킨 (리커버 에디션) 옥타비아 버틀러 리커버 컬렉션
옥타비아 버틀러 지음, 이수현 옮김 / 비채 / 202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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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은 나를 'SF작가'라고, 내 소설은 당연히 SF라고 규정한다. 그러나 나는 소설을 쓰는 '작가'일 뿐이다. 내가 좋은 이야기를 썼는지 아닌지만 판단받기를 원하는."


소설 표지를 넘기면 표지 안쪽에 이런 글이 쓰여 있다. 틀을 정하고 그 틀에 맞춰서 해석하고 이해하려는 경향이 있음을, 그런 틀을 벗어나 작품을 작품으로만 읽고 판단하기를 바라는 말.


소설을 어느 틀로 규정하느냐에 따라 이해도가 많이 달라질 수 있다. SF소설에 대한 생각도 많이 바뀌었는데, 소설을 통해 상상의 세계로ㅡ우리가 현실에서는 경험하지 못하는 세계로 들어가고 또 그 경험이 자신에게 좋았다면 그런 소설을 어떤 종류라고 규정하기보다는 좋은 소설이었어, 좋은 작가였어라고 생각하면 된다. 굳이 틀을 만들 필요가 없다. 옥타비아 버틀러 역시 그런 틀을 거부하고 있고.


타임슬립이라는 말을 한다. 시간 여행이라고 할 수 있는, 그런 시공간을 초월해 다른 시간대의 세상을 들어가는 일. 우리는 가끔 그런 상상을 하지 않나, 시간 여행을 하는. 과거로도, 미래로도 여행을 하고 있는.


소설은 1976년이라는 현실과 - 이 현실이 지금은 2022년이니 엄청나게 과거라고 느껴질 수 있다. 하지만 이 소설이 나온 시기가 그때니, 1970년대는 이 소설의 현시대이다 - 1800년대 초반이라는 과거가 공존하고 있다.


그리고 주인공인 다나는 1970년대에서 1800년대로 이동을 한다. 지금 그 상태 그대로. 다나에게 그 시대가 황당하겠지만, 그 시대 사람들에게는 다나가 황당할 수도 있다. 왜냐하면 그들에게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존재가 바로 다나이기 때문이다.


노예제가 살아 있던 미국 남부. 여기에 떨어진 흑인 여성. 그것도 청바지를 입고, 당시 흑인들과는 다른, 백인들과 비슷한 말투를 지닌 여성. 글을 읽고 쓸 줄 아는 여성. 


이런 다나가 루퍼스라는 백인과 지속적인 관계를 맺으면서 겪게 되는 일들이 소설 속에서 펼쳐진다. 다나는 목숨이 위태로운 루퍼스를 구하기 위해 1800년대로 가고, 그곳에서 자신의 목숨이 위태로워지면 1970년대로 돌아온다.


그렇게 루퍼스가 어린아이에서 어른으로 성장하고 죽음에 이르는 과정을 다나는 시간 이동을 통해서 경험하게 된다. 이 과정에서 우리는 노예제의 참상을, 여성에 대한 차별을 보게 된다.


그런 차별을 통해 미국 사회가 어떻게 변모해왔는지를 살펴보지만, 1970년대가 되어도 흑인은 노예가 아닐지 몰라도 백인과 같은 대우를 받기는 힘든 사회다. 다나가 백인인 케빈과 결혼할 때 일어나는 일을 보면 알 수 있다.


즉, 그들은 노예제는 폐지했지만, 1960년데 흑인민권운동을 통해 법률적인 평등은 확보했지만, 실질적인 평등으로는, 융합으로는 가지 못했음을 이 소설을 통해서 알 수 있다. 그래서 이 소설은 과거 미국 노예제의 참상을 고발하는 소설로 읽을 수도 있지만, 1970년대 당시 미국 사회의 인종 문제로도 읽을 수 있다.


여기에 사랑의 방식에 대한 소설로도 읽을 수 있다. 어떤 사랑을 해야 할까를 루퍼스가 앨리스를 대하는 태도를 보면 알 수 있다. 맹목적으로 앨리스를 취하려고 하는 마음이 과연 사랑일까? 앨리스의 처지에서 루퍼스는 한번이라도 생각해 봤을까? 오로지 자신의 불안을 잠재우기 위한 행동 아니었을까? 즉 그는 강자로서 앨리스를 취할 수는 있지만, 앨리스의 마음을 얻을 수는 없는 행동을 한다.


그건 사랑이 아니다. 자신의 욕심을 채우려는 행위일 뿐이다. 앨리스가 자살할 수밖에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루퍼스가 다나에게 죽임을 당할 수밖에 없는 이유가 되기도 하고.


이렇게 소설은 노예제에 대한 생각과 사랑에 대한 생각을 중첩시키면서 읽을 수 있다. 시공간을 초월하여 이동하는 설정은 중요하지 않다. 다나를 통해서 노예제와 노예제 이후의 미국 사회를 생각하면서 읽으면 좋고, 1800년대를 통해서는 사랑의 모습을 생각하면서 읽으면 된다. 


루퍼스의 사랑은 노예제에 기반한 사랑일 수밖에 없음을, 그리고 그런 사랑은 파탄으로 끝날 수밖에 없음을, 사랑은 상호 교감을 동반하지 않으면 이루어지지 않음을  루퍼스-앨리스 쌍과 다나-케빈 쌍을 통해서 생각하게 하고 있다.


처음부터 끝까지 흥미진진하게 읽을 수 있다. 결말까지 나아가고, 결말을 통해서 진한 여운을 느낄 수 있게 되는데...


끝까지 읽고 난 뒤, 옥타비아 버틀러의 말에 수긍하게 된다. 그리고 이런 말을 하고 싶다.


"당신은 좋은 작품을 썼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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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이달 2022-01-22 16:1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고맙습니다

러블리땡 2022-02-11 00:4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kinye91님 이달의 당선작 축하드립니다 ^^

kinye91 2022-02-11 07:12   좋아요 0 | URL
감사합니다.

thkang1001 2022-02-11 01:3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kinye91님! 이달의 당선작 선정을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kinye91 2022-02-11 07:12   좋아요 0 | URL
감사합니다

이하라 2022-02-11 01:4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kinye91님 축하드려요^^

kinye91 2022-02-11 07:13   좋아요 0 | URL
감사합니다
 
예언자와 보낸 마지막 하루 - 강렬했지만 스러진 존재의 희미하지만 영원한 온기
손홍규 지음 / 문학사상사 / 202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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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에는 세 인물의 이야기라고만 생각했다. 그러다가 소설 목차를 보는데 네 인물이 나와야 한다. 날짜가 네 개기 때문이다.


1895년 4월 24일. 1956년 7월 19일. 2009년 5월 23일. 2014년 4월 16일.


년도를 보면 대강 인물을 추측할 수 있다. 특히 지금과 가까운 2000년대는 인물을 쉽게 찾아낼 수 있다. 2009년 고 노무현 대통령, 2014년 아직도 해결되지 않은 우리들 가슴에 상처를 남긴 세월호. 그렇다면 1895년은  1894년 동학혁명 다음 해니, 전봉준을 떠올릴 수 있다. 동학혁명하면 많은 사람을 생각할 수 있지만, 전봉준을 대표라고 할 수 있으니... 1956년은 쉽게 찾을 수가 없다. 우리나라 현대사에 대해서 잘 알고 있는 사람이라면 1950년대 비극적인 죽음에서 박헌영이나 조봉암을 떠올릴 수 있겠지만, 구체적으로 누구인지를 추측하기는 힘들다. 이는 소설을 읽어봐야 한다. 소설을 읽는 순간, 아, 1956년은 박헌영이 사망한 해구나 하고 깨닫게 된다.


이렇게 이 소설은 전봉준, 박헌영, 노무현, 세월호(학생)를 대상으로 하고 있으며, 그들을 통해서 우리들이 지나온 과거와 그들이 꿈꾸었던 세상과 또 우리가 살아가야 할 세상에 대해서 생각하게 해주고 있다.


소설을 통해서 과거 속 인물을 만나고, 그들의 꿈을 알게 되고, 그들의 꿈이 어떻게 좌절되었는지, 또 역사에서 그들이 한 역할이 어땠는지를 체험함으로써 현실을 잘 살아내는 힘을 키울 수 있게 된다.


작가의 말이 이런 소설의 특징을 대변한다.


"우리가 어떤 일을 했는지를 기록하는 게 역사라면 우리가 어떤 꿈을 꾸었는지를 기억하는 건 소설이라고. 소설은 기억이다. 아름답고 비참했던 사람들이 어떤 세계를 꿈꾸었는지를 기억하는 가장 쓸쓸한 형식이다. 잠이 들면 그들은 내게 예언 같은 이야기를 들려주었고 잠에서 깨어나면 나는 무슨 꿈을 꾸었는지 기억하려 애썼다. 이 소설은 가까스로 기억해 낸 이야기다." (395쪽. 작가의 말)


그들이 꿈꾸었던 세상을 소설가는 소설을 통해서 기억하고, 우리는 그 기억을 생생하게 체험하게 된다. 소설 제목이 된 "예언자와 보낸 마지막 하루"는 바로 그들의 죽음 직전에서 시작해 그들의 삶을 살펴보게 하는 역할을 한다.


제목에 나온 예언자는 미래를 현실에 불러온다. 불러오기는 하지만 아직 실현되지는 않았다. 그래서 예언이다. 예언은 실현을 전제로 이야기되는 미래의 현실이지만, 예언이 실현되기 위해서는 사람들의 노력이 필요하다. 그냥 시간을 보낸다고 해서 예언이 실현되는 경우는 없다. 그렇다면 인간의 자율성은 의미가 없어지기 때문이다.


예언을 실현하는 힘은 바로 사람이다. 사람들 사이의 사랑이다. 사랑이 있으므로 좀더 나은 세상을 예언하고, 그런 세상을 실현하려 노력한다. 그 노력에 함께 하려고도 한다. 그러나... 예언은 실현되지 않는 경우가 더 많다.


예언을 실현시키려 하지 않는 집단이 더 큰힘을 지니고 있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그들에게는 권력, 경제력과 추종하는 사람들이 더 많이 있다. 따라서 예언자는 그 자체로 핍박을 받고 현실에서 추방당한다. 그는 미래의 꿈을 꾸지만, 그 미래가 오기 전에 현실에서 사라지게 된다. 이것이 바로 예언자의 운명이다.


이런 예언자의 운명을 가혹하다. 자신이 원하는 세상을 보지만 그 세상에서는 살아갈 수 없는 사람이라니... 사랑이 넘치지만 그 사랑이 자신을 더 힘들게 하고 있으니...


모세가 생각난다. 이스라엘 민족을 이집트에서 구출한 사람. 신의 뜻에 따라 그들을 이끌고 나온. 하지만 모세는 자신이 이끌던 사람들과 함께 신이 말한 그 땅으로 가지는 못한다. 모세의 역할은 현실에 미래를 가져오지만 자신은 현실에서 그 미래로 가지 못하는 존재에 머문다.


이 소설은 역사소설이라고 할 수 있다. 미래를 꿈 꾼 사람들. 좀더 나은 세상을 향해 자신의 꿈을 실현시키려 한 사람들. 찬반 논쟁이 있을 수 있고, 그들에 대한 좋고 나쁨이 있을 수 있지만 그들이 현실에 머무르지 않고 미래를 현재에 가져오려고 했다는 데는 동의할 수 있다.


이렇게 그들의 좌절된 꿈을 '해원'이라는 인물을 통해 보여준다. 네 시기에 공통으로 등장하는 이름이 바로 '해원'이다. 소설에서는 '해원'을 한자어로 표기하지 않았기에 '해원'이라는 이름에 대해서 독자가 의미를 붙일 수가 있다.


세월호에서 나오는 해원은 아빠와 엄마 이름 한 글자씩을 따서 만들었다고 하지만, 세월호라는 이름에서 바다 해(海)를 연상한다. 원(源)은 근원이라고 상상할 수도 있으니, 유치환이 쓴 "깃발"이란 시에 나오는' 저 푸른 해원을 향하여 흔드는 / 영원한 노스탤지어의 손수건'이란 구절에서 우리가 바라는 세상, 이상적 세계로 해원을 생각할 수도 있다.


부모는 그렇게 아이가 이상적인 세상에서 자유롭게 살아갈 수 있기를 바라며 '해원'이라는 이름을 지었을 수도 있다. 그러나 우리가 아다시피 바다는 자비롭지만은 않다. 차가운 바닷속에서 결국 생명을 잃은 아이... 이 아이가 지니고 있을 원망을 풀어야 한다. 그러니 이름에 이제는 원망을 푼다는 '해원'이란 뜻을 보탤 수 있다.


원망... 바라던 일들이 이루어지지 않았을 때 생기는 마음. 그것도 개인적인 욕망이 아니라 사회적 변혁에 대한 꿈이었다면 개인의 원망에 그치지 않고 우리 사회의 문제로 계속 남아 있게 된다. 풀어야만 하는 원망이다. 그래서 원망을 푼다가 아니라 원망을 풀어야 한다고 '해원'을 생각해야 한다.


동학혁명을 통해 전봉준이 꿈꾸었던 백성들이 잘사는 나라, 공산주의 운동을 통해 박헌영이 꿈꾸었던 민중들이 잘사는 나라, 민주주의를 통해 시민들이 잘사는 나라를 꿈꾸었던 노무현의 나라. 그들은 그런 나라가 오는 모습을 보지 못했다. 그들에게는 그런 나라는 예언 속 나라였다. 그들은 예언을 다른 사람들에게 말해주는 존재였고, 다른 사람들이 결국에는 그런 세상에서 살 수 있도록 노력하게 하는 존재였다.


비록 자신들은 그 미래에 도달하지 못하더라도, 그들은 역사 속에 살아남아 예언이 공언이 아니었음을 기억하게 하는 존재가 된다. 역사 속에서 그렇게 기억되는 존재더라도 이렇게 소설 속에 등장해서 자신들의 이야기를 보여주면 사람들 마음에 더 쉽게 다가오게 된다.


그리고 이제는 머리만이 아니라 마음으로도 기억하게 된다. 이런 작업을 소설을 통해서 소설가는 하고 있고, 그래서 작가는 '아름답고 비참했던 사람들이 어떤 세계를 꿈꾸었는지를 기억하는 가장 쓸쓸한 형식'이라고 했는지도 모른다. 


이 소설을 통해 그들이 그런 세상을 꿈꾸었던 것은, 미래를 예언하고 실현시키려 노력했던 것은 바로 사람에 대한 사랑이 바탕이었음을. 실패할지라도 지속적인 꿈을 이야기한 것은 바로 사랑이 있었음을, 그런 사랑이 지금의 우리를 있게 했음을... 


이 소설을 통해서 그런 존재들을 마음 속으로부터 기억할 수 있게 된다.


덧글


소설이어서 역사적 사실이나 인물들을 정확히 표기할 필요는 없다는 생각이 들지만, 그렇다고 해도 실존하는 인물에 대해서는 정확히 써야 한단 생각을 한다. 아예 없던 인물을 창조해내면 몰라도...


220쪽. 앙굴마라 이야기가 나오는데... '천 번째 살인을 저지르려는 순간 붓다를 만나 회심하여 비구니가 되었지요.'라는 서술이 있다. 그런데 비구는 남자 승려, 비구니는 여자 승려라는 차이가 있으니, '앙굴마라는 비구가 되었지요'라고 해야 적절하다는 생각을 버릴 수가 없다. 


304쪽. 박헌영을 주인공으로 삼은 장면에서... '박 선생, 정말 나를 모르겠소? 허현이외다.'라는 서술이 있는데, 박헌영과 관련 있는 변호사라면 아무래도 '허헌'이 아닐까 한다. '허헌이외다'라고 하는 편이 더 핍진감을 주지 않을까 하는 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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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왜 SF를 쓰는가 - 디스토피아와 유토피아 사이에서
마거릿 애트우드 지음, 양미래 옮김 / 민음사 / 202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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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F작가라고 생각해 보지 않았다. 마거릿 애트우드에 대해서는. 몇 년 전까지만 해도 SF작품에 대해선 어느 정도 편견이 있었다. 공상과학소설이라고, 과학소설이라고 하지 않고, 공상이란 수식어를 붙여 생각했다. 어린시절부터 이런 용어에 익숙했고, 언어가 사고를 결정하기 쉬운데, 공상이라는 말 때문에 SF소설은 어린 시절이나 읽는 소설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다 어슐러 K. 르 귄을 만났다. SF소설이 공상이라는 말이 빠져야 한다고 생각했다. 과학소설이라는 말도 무언가 부족하단 생각이 들었다. 소설 자체가 상상이 창조해낸 이야기 아닌가. 소설에서 현실의 모습을 그대로 찾는 사람이 어리석은 사람 아닌가.


그런 사람이 권력자가 되면 금서다 뭐다 하면서 소설에도 간섭을 하지 않나, 그렇다면 소설은 상상 이야기니 상상을 국한시키는 수식어를 굳이 붙일 필요가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책을 읽으면서 애트우드는 사변소설이라는 말을 사용하기도 한다. 사변소설, 생각을 밀고 나가는 소설.


이런 생각 덕분에 애트우드가 쓴 [시녀이야기]와 [증언들]을 읽으면서 SF라는 생각보다는 맞이하고 싶지 않은 사회라는 생각을 했다.


있음직하지 않은 세상, 그러나 있음직한 세상. 어쩌면 [시녀이야기]나 [증언들]에서 그려진 사회의 모습이 우리들이 살아가고 있는 이 세계에도 어느 정도 나타나고 있지 않나 하는 생각을 한다. 그렇게 소설은 사회를 반영하고 있다. 그것이 어떤 장르이든.


이런 소설을 쓴 애트우드의 글쓰기에 대한 책이 나왔다. 읽어볼 만하다. 애트우드의 어린 시절부터 작가가 되기까지의 과정을 알 수 있게 되고, 또 애트우드가 어떤 작가들에 관심을 가졌는지, 그리고 르 귄과 애트우드의 비슷한 점도 알게 될 수 있는 책이다.


특히 애트우드 역시 SF라고 해서 공상이 아님을, 현실을 그려내고 있음을 주장하고 있으니... 나는 왜 SF를 쓰는가라는 질문에 대한 답은 바로 인간을 이해하기 위해서이다.


소설은 인간이 살아가는 모습을 다양하게 표현해내는 예술이니, SF든 아니든 작가는 바로 인간을 이해하기 위해서 작품을 쓴다. 그리고 우리는 그런 작품을 읽고 인간을, 바로 나 자신을 이해하려고 한다.


특히 애트우드가 이 책에서 말하고 있는 '유스토피아'라는 말에 공감이 갔다. 유토피아와 디스토피아가 합쳐진 말.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이 유토피아이기만 하지도 않고, 그렇다고 디스토피아이기만 하지도 않다는 사실.


[시녀이야기]나 [증언들]이 디스토피아라고 해도, 그 소설 속에 이미 유토피아가 들어가 있음을 알 수 있고, 유토피아로 그려진 세상이 마냥 유토피아만은 아니니, 애트우드가 말하는 '유스토피아'란 용어가 적합하다는 생각이 든다.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은 어느 정도의 유토피아와 어느 정도의 디스토피아가 결합된, 그래서 결정되지 않고 과정을 통해서 변화가 가능한 세상 아니던가. 우리 인간이 살아가야 할 세상이 이렇고, 앞으로도 이런 세상에서 우리는 살아갈테니...


소설에 대한 애트우드의 글을 보자.


나는 스토리텔링이란 미완의 작업, 시간이 흐를수록 점점 많은 이들이 자문하게 되는 질문들을 통해 구현되는 작업이라고 생각하는 편이다. 이를테면 사람들은 이런 질문을 던진다. 대체 우리는 이 행성을 얼마나 망가뜨려 버린 걸까? 인간의 내면을 얼마나 깊이 파헤쳐 볼 수 있을까? 종 전체가 자기 구원을 위해 애쓰는 상황이 실제로 벌어진다면 그건 과연 어떤 모습일까? 한 가지 더. 유토피아적 사고는 대체 어디로 사라져버렸을까? 이 질문을 던지게 되는 이유는 유토피아적 사고란 절대 완전히 사라지지 않기 때문이다. 인간은 너무나 희망에 차 있는 종이므로, 그런 건 불가능하다. '좋음'이란 것이 있는 한, 언제나 '나쁨'이라는 쌍둥이가 존재할지 모르나 인간에게는 '더 좋음'이라는 다른 쌍둥이도 있다. (156쪽)


소설가의 거짓말이라 함은, 진실을 우회적으로 전달하고자 소설가가 자기만의 방식으로 해석한 진실이다. (197쪽)


그래서 소설을 SF라는 틀에 가둘 필요가 없다. 우리가 원하는 세상, 또는 원치 않는 세상을 작가는 소설을 통해 우리에게 보여주기 때문이다. 소설을 읽으면서 우리는 어떤 세상에서 어떻게 살아야 할지를 생각하고, 간접 체험할 수 있다.


1부에서는 애트우드의 자전적 이야기가 흥미를 끌고, 2부에서는 다른 작품에 대한 애트우드의 생각을 알 수 있어서 좋으며, 3부에서는 애트우드의 짧은 소설들을 만날 수 있어서 좋다. [시녀이야기], [증언들]을 읽은 독자라면, 또 [눈 먼 암살자]를 읽은 독자라면 애트우드의 작품 세계에 대해서 더 알고 싶다면 이 책을 읽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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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키니아의 작은 말들 - 뒤라스가 펼쳐 보이는 프랑스판 ‘부부의 세계’
마르그리트 뒤라스 지음, 장소미 옮김 / 녹색광선 / 202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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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해서 부부가 된다고 한다. 검은 머리가 파뿌리가 될 때까지 해로한다고 한다. 그렇게 사랑을 전제로 부부를 이야기 한다. 언제까지 변치 않을 사랑을 간직해야만 하는 관계.


당위다. 의무다. 상대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한다고... 그래야만 부부관계가 유지된다고. 세월이 흘러 사랑이라는 감정이 사라졌다고 왜 함께 사는지 모른다고 느낄 때도 부부는 사랑으로 맺어졌다고 말하는 경우가 있다.


이런 경우 소위 '쇼윈도 부부'라고 해서 유리창 안에 전시되어 보여지는 부부처럼 살아가기도 한다. 이 경우에 사랑은 없다. 그리고 부부 간에 영원히 지속되는 사랑도 없다. 부부 간에 상대에게 무한히 헌신하는 사랑도 없다.


무한한 사랑은 부모가 자식에게 주는 사랑, 신이 피조물들에게 주는 사랑이 있을 수 있다고 하지만 이 경우는 예외로 치고, 자, 부부들 간에 사랑이 어떤 의미일까? 어떻게 지내야 함께 평생을 살아갈 수 있을까?


위기를 겪는 부부 두 쌍과 이미 아내와 사별한 식료품점 주인, 그리고 자식을 잃은 노부부, 여기에 두 쌍의 부부 모두의 친구가 등장한다. 부수적인 인물로 가정부가 등장해서 사랑을 하는 모습도 보이지만 이 소설에서 가정부의 사랑은 부부의 사랑을 강조하는 역할에 그치고 만다.


이탈리아 휴양지로 여름 휴가를 떠나온 다섯 친구. (사라/자크, 지나/루디 두 쌍은 부부고 다이아나만 남편이 없다) 이들은 더위에 지쳐 권태로움에 빠진다.


늘 다투는 모습을 보이지만 서로를 떠나보낼 수 없는 부부인 지나/루디 부부는 이 소설에서 중심을 차지하지 못한다. 이들의 다툼은 결정적인 위기로 치닫지 않기 때문이다.


위기로 치닫는 부부는 겉으로는 평온해 보이지만 속으로는 서로가 서로에게 데면데면해지고 있는 사라/자크 부부다.


한 남자의 등장으로, 흔들리는 사라. 그리고 그를 지켜보는 자크. 사랑은 소유하는 것이 아니라는 생각. 그렇지만 육체적 욕망에 굴복하는 것 역시 사랑이 아니라는 생각.


소설은 '사라'를 중심으로 이야기가 전개된다. 어쩌면 사라는 우리가 주변에서 볼 수 있는 사람일지도 모른다. 부부 생활을 하면서 흔히 겪게 되는 일, 그런 일을 겪어가는 사람. 사라.


누가 부부가 서로를 가장 잘 안다고 하겠는가. 이 소서에서는 이런 말이 나오는데, 고개를 끄덕이게 한다.


"부부가 갖고 있는 서로에 대한 지식, 아마 그게 제일 형편없는 지식일걸." (52쪽-다이아나의 말)


아마, 자신이 부인에 대해, 남편에 대해 가장 잘 안다고 생각하겠지만 어쩌면 그것이 오만일 수도 있다는 것. 그래서 어느 순간 배신당했다는 느낌을 받고 서로에 대한 증오로 치닫는 관계가 될 수도 있다는 것. 


아무리 다 이야기한다고 해도, 감출 수 있고 또 감춰진 무엇이 있다는 생각을 해야 하고, 그것을 굳이 알려고 할 필요가 없다는 것. 그렇지 않고 상대에 대해 모든 것을 알아야겠다고 생각하고 실행하는 순간, 


"어쩌면 오래된 사랑이 우리를 그렇게 악의적으로 만드는 건지도 몰라. 위대한 사랑의 황금 감옥 말이야. 사랑보다 우리를 더 옥죄는 감옥은 없지. 그렇게 오랜 세월 갇혀 있다 보면 세상에서 가장 선량한 사람까지 악의적인 사람이 돼 버려." (295쪽 - 루디의 말) 


이런 말처럼 되어버릴 수도 있다. 그럼에도 부부는 서로에게 갇혀 있는 관계다. 그것은 인정해야 한다. 그 갇힘 속에서 서로가 서로에게 조금씩 무뎌지는 관계. 사랑이 없어지는 관계가 아니라 새로운 사랑을 만들어 가는 관계.


"세상에 서로가 서로에게 안 갇혀 사는 사람이 어디 있겠어?" (90쪽 - 자크의 말)

"커플로 사는 건 피곤한 일이야. 어느 커플이든." (263쪽 - 자크의 말)


피곤하지만, 사실 자신의 전 존재를 건 모험이 바로 결혼 아니겠는가. 상대와 함께 살기로 한 것, 나와 남이 합쳐져 우리가 되는 관계. 그런 관계를 인정하고, 그 관계를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말할 수 있다면 그들 부부는 검은 머리가 파뿌리가 될 때까지 해로할 수 있게 된다.


"세상의 어떤 사랑도 사랑을 대신할 순 없어, 그건 어쩔 도리가 없는 거야." (237쪽 - 자크의 말)

"사랑엔 휴가가 없어. 그런 건 존재하지 않아. 사랑은 권태를 포함한 모든 것까지 온전히 감당하는 거야, 그러니까 사랑엔 휴가가 없어." (306쪽 - 루디의 말)

"그게 사랑이야. 삶이 아름다움과 구질구질함과 권태를 끌어안듯, 사랑도 거기서 벗어날 수 없어." (306쪽 - 루디의 말)


평생을 살아가면서 처음에 느꼈던 사랑이 평생을 지속하리라고 생각하기보다는 살아가면서 끊임없이 그 사랑을 만들어가는 관계. 처음 느꼈던 사랑에 더하기를 하는 관계. 상대를 구속하는 사랑이 아니라 상대와 함께 하는 사랑. 


어쩌면 이 소설은 부부의 사랑 형태를 보여주면서 부부의 관계를 이어주는 것이 처음 만났을 때 번쩍하는 황홀한 감정에서 '타키니아의 작은 말들' 처럼 소소한 일상에서 함께 하는 관계임을 말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주인공들이 소설의 말미에 에트루리아 고분에 있는 '타키니아의 작은 말들'을 보러 가기로 하는 장면에서 그런 점을 느낄 수 있었다고나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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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사람 - 제22회 한겨레문학상 수상작, 개정판
강화길 지음 / 한겨레출판 / 202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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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사람'

 

제목을 보면서 '나'가 아닌 존재를 가리키는 말, 아니면 지금의 '나'를 벗어나고 싶어하는 존재가 바로 '다른 사람'이라는 생각을 했다. '나'라는 존재에 대해서 나 자신도 잘 모르면서도 우리는 대부분 '나'보다는 '다른 사람'을 더 좋게 바라보는 경향이 있다. 그러면서 나도 저런 다른 사람이 되어야겠다고 다짐하기도 한다. 특히 지금 자신이 어려움을 겪고 있다면, 그래서 자신에 대해서 실망하고 있다면, '나'보다는 '다른 사람' 되기를 열망한다.

 

그러면서 '나'를 잊고 '다른 사람'으로 살아가려고 한다. 그것이 결국 '나'를 갉아먹는 일임을, '나'를 '다른 사람'으로 만들지 못하고 '나'를 지워가는 과정임을 깨닫지 못하고.

 

소설을 읽는 중간에 내가 갖고 있지 않은 무언가를 갖고 있는 사람, 그것을 아무렇지도 않게 행사는 사람, 그런 사람을 '다른 사람'이라고 생각하게 됐다.

 

그렇다면 피해자에게는 가해자가 다른 사람이고, 여성에게는 남성이 다른 사람이다. 이상하게 소설을 읽으면서 남성이 여성을 다른 사람으로 여긴다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

 

소설은 처음부터 섬뜩하게 시작한다. 피해자가 더 피해를 본다. 그렇다면 피해자로 지내기보다는 다른 존재로 지내려고 하는 마음이 생긴다. 피해자가 가해자보다 더 비난을 받는 상황. 이런 상황은 생물학적으로 남성보다는 여성에게 더 잘 일어난다.

 

그렇게 데이트 폭력으로 소설은 시작한다. 자, 이 데이트 폭력이 어떻게 전개될 것인가? 데이트 폭력을 공개한 피해자가 어떤 삶을 살게 될 것인가? 대략 예상은 하지만 온라인 상에서는 피해자를 두둔하는 댓글과 피해자는 비난하는 댓글이 달린다.

 

그런데 그런 댓글들이 동등하게 달리지는 않는다. 동등하게 달리더라도 피해자의 눈길을 끄는 댓글은 피해자를 비난하는 댓글들이다. 그것이 비록 소수일지라도 피해자의 눈에는 그런 비난 댓글이 더 잘 들어온다. 잘 들어올 뿐만 아니라 피해자의 가슴에 비수처럼 박힌다. 박혀서 빠지지 않는다. 그리고 피해자를 더욱 힘들게 한다.

 

(최근에 읽은 시, 이소호가 쓴 '누구나의 어제 그리고 오늘 혹은 내일'을 보라.)

 

이런 전개는 상투적이다. 이런 피해자가 비난 댓글을 극복하고 자신을 찾아가는 과정, 자신 속에 있는 또 다른 자신을 찾아가는 과정으로 '다른 사람'을 생각한다면 이 소설은 힘을 잃을 것이다.

 

소설은 여기서 한 발 더 나아간다. 인물들이 한 명이 아니라 여러 명이 얽히고 설킨 관계로 맺어진다. 소설에 등장하는 주요 여성 인물로 진아, 수진, 유리가 있고, 이들과는 다른 사람이라고 할 수 있는 이강현이 등장한다. (이 이강현은 생물학적인 성별로는 여성이지만 삶의 양태로 보면 이 소설에서 말하는 '다른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여기에 남성 인물로는 류현규와 김동희가 등장한다.

 

물론 이 소설의 서술자인 진아를 나락에서 허우적거리게만 만들지 않는 단아라는 여성 인물이 등장하고, 나중에 '다른 사람'보다는 '나'로 살아가는 모습을 보인느 당찬 젊은이인 김이영, 서술자인 진아를 서술로 이끈 이진섭이라는 남성이 등장하지만 이들이 서술의 중심에 있지는 않다.

 

진아, 수진, 유리는 공통점이 있다. 이들이 겪은 일들이 그렇고 대응하는 방식이 그렇다. 이들은 '나'보다는 '다른 사람'이 되고 싶어했다. 그렇게 자신들의 '나'를 지우고 이 '나' 위에 '다른 사람'을 덧씌우려 했다.

 

물론 성공하기도 한다. 수진은 언뜻 보면 성공한 삶을 사는 듯하다. 그렇지만 아니다. 수진은 지속적으로 '다른 사람'의 그림자 속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이 그림자를 벗어나지 못하는 한 수진은 겉으로 보이는 모습과는 다르게 '나'로 살아갈 수밖에 없다.

 

온전히 '다른 사람'이 되지 못하고 '나'임을 의식하면서 전전긍긍하는 삶. 이런 삶에서는 '나'와 비슷한 존재들을 배척할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이런 존재들은 '나'를 '다른 사람'으로 살아가게 하는데 방해가 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들은 관계맺기에 실패한다. 바로 그들에게서 '나'를 보기 때문이고, 이런 '나들'이 바로 자신을 나약한 존재, 삶을 힘들게 하는 존재라고 여기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수진도, 유리도 서술자인 진아의 '나'에 해당한다. 그들은 '다른 사람' 될 수 없다. 그렇다면 '다른 사람'은 누구인가? 바로 이런 '나'를 힘들게 하는 존재다. '나'를 힘들게 하기에, '나'가 도저히 견딜 수 없기 때문에, '나'역시 '다른 사람'이 되고자 한다.

 

강간당하는 사람보다는 강간하는 사람이 되고자 한다. 그런데 이게 과연 해결책일까? 이는 가해와 피해의 이분법 속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모습일 뿐이다. 내가 가해자처럼 군다고 해서 내 피해가 사라지는가? 아니다. 사라지길 바라지만 그러면 그럴수록 피해는 내 속에 더 깊이 남아 있게 된다. 이런 피해의식들이 알게 모르게 내 삶을 규정한다. 내 행동, 내 말투 등등을.

 

그렇다면 '다른 사람'이 되기보다 '나'를 인정하는 방향으로 바꾸어야 한다. 내가 피해를 당한 것을 내 책임으로 돌려서는 안 된다. 가해자가 잘못한 일을 왜 피해자에게 돌리는가. 잘못은 가해자가 했고, 책임도 가해자에게 돌려야 한다. 그럼에도 지금까지 많은 경우에 책임이 피해자에게 돌아왔다.

 

바로 피해자들의 '나'를 왜곡하고 축소하고 '나 피해의식 있어.'라는 말로 책임을 전가한다. 이런 상황에서 '나'는 '다른 사람'이 되고자 하지만, 그 '다른 사람'은 바로 '나'일 수밖에 없다. 끊임없는 도돌이표.

 

이 도돌이표는 '다른 사람'이 되기를 바라지 않고 '나'를 바라보고 '나'로 살아가는 길을 찾았을 때 멈출 수 있다. 이는 바로 피해의식이 있다고 하는 그 말들이 바로 '가스라이팅'에 불과하다는 것을 인식하는 일이다. 그리고 '나'가 또다른 '나'와 연대할 때, 비로소 '나'와 대척점에 있던 '다른 사람'이 아니라 '나'가 '나들'로 굳건하게 연대한 '다른 사람'이 될 수 있다.

 

소설은 유리를 통해서 이런 '나'가 '나들'이 되는 과정, 그리고 젊은 세대인 김이영이라는 학생을 통해서 보여주고 있다. 진아는 뒷세대인 김이영을 통해 '나들'인 '다른 사람'이 될 수 있다. 그때서야 이제 과거의 인물이었던 유리가 현재로 나올 수 있게 된다.

 

이 다음부터는 우리들의 몫이다. 소설이 제기하는 문제는 바로 여기다. 소설은 사회의 문제를 제기한다. 그렇다면 이 소설이 제기하는 문제는 무엇인가? 이 소설에서 '다른 사람'의 의미는 무엇인가? 왜 가해자는 당당하게 피해자에게 '너 피해의식 있어.'라고 말하면서 자신이 어떤 잘못을 했는지도 깨닫지 못한단 말인가.

 

소설을 읽어보자. 서술자인 진아의 처지에서 읽어도 좋지만, 거꾸로 '다른 사람'이라고 할 수 있는 김동희의 처지에서 읽어보아도 좋다. 왜 그가 자신을 제대로 보지 못하는지, 그가 지니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긍정적인 면이 류현규라면 그 반대 얼굴이 바로 김동희라고 할 수 있으니...

 

하여 우리는 또다른 김동희가 되지 않도록 해야 한다.

 

소설은 중반을 지나면서 추리소설의 면모를 띠기도 한다. 문체의 박진감과 사건 전개의 속도, 그리고 누가 누구를 괴롭혔을까 하는 추측으로 결말이 어떻게 날 것인지 궁금하게 한다. 그렇게 끝을 향해 소설은 빠른 속도로 우리를 이끈다. 끝에 도달했을 때 여기가 끝이 아니라 시작임을, 유리의 보고서 제목이 '다른 사람'인 것을 보고 알게 된다.

 

소설에서 남자가 한 말을 진아가 돌려주는 장면이 있다. 끝부분에서 진아는 이렇게 말한다.

 

"이게 끝이라고 생각하지 마." (23쪽- 이진섭의 말)

"이걸로 끝이라고 생각하지 마." (329쪽-진아의 말)

 

도돌이표인가? 아니다. 이는 앞의 말을 이겨낸 '나'의 말이다. 나를 짓누르고 있던 '다른 사람'의 그늘을 벗어난 '나'의 말. 그러니 이제 소설은 끝났지만, 우리의 여행은 계속된다.

 

[소설의 이론]에서 루카치가 했다는 말이 생각났다.

 

'길이 시작되자, 여행이 끝났다'

 

그런가? 소설 읽기는 지금까지 우리가 해온 여행이다. 이 소설 읽기 여행은 끝났다. 하지만 소설의 끝은 바로 새로운 길의 시작이다. 이제 그 길은 소설 밖에 있다. 새로운 길로 우리의 새로운 여행이 시작되어야 한다.

 

"이걸로 끝이라고 생각하지 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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