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언자와 보낸 마지막 하루 - 강렬했지만 스러진 존재의 희미하지만 영원한 온기
손홍규 지음 / 문학사상사 / 202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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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에는 세 인물의 이야기라고만 생각했다. 그러다가 소설 목차를 보는데 네 인물이 나와야 한다. 날짜가 네 개기 때문이다.


1895년 4월 24일. 1956년 7월 19일. 2009년 5월 23일. 2014년 4월 16일.


년도를 보면 대강 인물을 추측할 수 있다. 특히 지금과 가까운 2000년대는 인물을 쉽게 찾아낼 수 있다. 2009년 고 노무현 대통령, 2014년 아직도 해결되지 않은 우리들 가슴에 상처를 남긴 세월호. 그렇다면 1895년은  1894년 동학혁명 다음 해니, 전봉준을 떠올릴 수 있다. 동학혁명하면 많은 사람을 생각할 수 있지만, 전봉준을 대표라고 할 수 있으니... 1956년은 쉽게 찾을 수가 없다. 우리나라 현대사에 대해서 잘 알고 있는 사람이라면 1950년대 비극적인 죽음에서 박헌영이나 조봉암을 떠올릴 수 있겠지만, 구체적으로 누구인지를 추측하기는 힘들다. 이는 소설을 읽어봐야 한다. 소설을 읽는 순간, 아, 1956년은 박헌영이 사망한 해구나 하고 깨닫게 된다.


이렇게 이 소설은 전봉준, 박헌영, 노무현, 세월호(학생)를 대상으로 하고 있으며, 그들을 통해서 우리들이 지나온 과거와 그들이 꿈꾸었던 세상과 또 우리가 살아가야 할 세상에 대해서 생각하게 해주고 있다.


소설을 통해서 과거 속 인물을 만나고, 그들의 꿈을 알게 되고, 그들의 꿈이 어떻게 좌절되었는지, 또 역사에서 그들이 한 역할이 어땠는지를 체험함으로써 현실을 잘 살아내는 힘을 키울 수 있게 된다.


작가의 말이 이런 소설의 특징을 대변한다.


"우리가 어떤 일을 했는지를 기록하는 게 역사라면 우리가 어떤 꿈을 꾸었는지를 기억하는 건 소설이라고. 소설은 기억이다. 아름답고 비참했던 사람들이 어떤 세계를 꿈꾸었는지를 기억하는 가장 쓸쓸한 형식이다. 잠이 들면 그들은 내게 예언 같은 이야기를 들려주었고 잠에서 깨어나면 나는 무슨 꿈을 꾸었는지 기억하려 애썼다. 이 소설은 가까스로 기억해 낸 이야기다." (395쪽. 작가의 말)


그들이 꿈꾸었던 세상을 소설가는 소설을 통해서 기억하고, 우리는 그 기억을 생생하게 체험하게 된다. 소설 제목이 된 "예언자와 보낸 마지막 하루"는 바로 그들의 죽음 직전에서 시작해 그들의 삶을 살펴보게 하는 역할을 한다.


제목에 나온 예언자는 미래를 현실에 불러온다. 불러오기는 하지만 아직 실현되지는 않았다. 그래서 예언이다. 예언은 실현을 전제로 이야기되는 미래의 현실이지만, 예언이 실현되기 위해서는 사람들의 노력이 필요하다. 그냥 시간을 보낸다고 해서 예언이 실현되는 경우는 없다. 그렇다면 인간의 자율성은 의미가 없어지기 때문이다.


예언을 실현하는 힘은 바로 사람이다. 사람들 사이의 사랑이다. 사랑이 있으므로 좀더 나은 세상을 예언하고, 그런 세상을 실현하려 노력한다. 그 노력에 함께 하려고도 한다. 그러나... 예언은 실현되지 않는 경우가 더 많다.


예언을 실현시키려 하지 않는 집단이 더 큰힘을 지니고 있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그들에게는 권력, 경제력과 추종하는 사람들이 더 많이 있다. 따라서 예언자는 그 자체로 핍박을 받고 현실에서 추방당한다. 그는 미래의 꿈을 꾸지만, 그 미래가 오기 전에 현실에서 사라지게 된다. 이것이 바로 예언자의 운명이다.


이런 예언자의 운명을 가혹하다. 자신이 원하는 세상을 보지만 그 세상에서는 살아갈 수 없는 사람이라니... 사랑이 넘치지만 그 사랑이 자신을 더 힘들게 하고 있으니...


모세가 생각난다. 이스라엘 민족을 이집트에서 구출한 사람. 신의 뜻에 따라 그들을 이끌고 나온. 하지만 모세는 자신이 이끌던 사람들과 함께 신이 말한 그 땅으로 가지는 못한다. 모세의 역할은 현실에 미래를 가져오지만 자신은 현실에서 그 미래로 가지 못하는 존재에 머문다.


이 소설은 역사소설이라고 할 수 있다. 미래를 꿈 꾼 사람들. 좀더 나은 세상을 향해 자신의 꿈을 실현시키려 한 사람들. 찬반 논쟁이 있을 수 있고, 그들에 대한 좋고 나쁨이 있을 수 있지만 그들이 현실에 머무르지 않고 미래를 현재에 가져오려고 했다는 데는 동의할 수 있다.


이렇게 그들의 좌절된 꿈을 '해원'이라는 인물을 통해 보여준다. 네 시기에 공통으로 등장하는 이름이 바로 '해원'이다. 소설에서는 '해원'을 한자어로 표기하지 않았기에 '해원'이라는 이름에 대해서 독자가 의미를 붙일 수가 있다.


세월호에서 나오는 해원은 아빠와 엄마 이름 한 글자씩을 따서 만들었다고 하지만, 세월호라는 이름에서 바다 해(海)를 연상한다. 원(源)은 근원이라고 상상할 수도 있으니, 유치환이 쓴 "깃발"이란 시에 나오는' 저 푸른 해원을 향하여 흔드는 / 영원한 노스탤지어의 손수건'이란 구절에서 우리가 바라는 세상, 이상적 세계로 해원을 생각할 수도 있다.


부모는 그렇게 아이가 이상적인 세상에서 자유롭게 살아갈 수 있기를 바라며 '해원'이라는 이름을 지었을 수도 있다. 그러나 우리가 아다시피 바다는 자비롭지만은 않다. 차가운 바닷속에서 결국 생명을 잃은 아이... 이 아이가 지니고 있을 원망을 풀어야 한다. 그러니 이름에 이제는 원망을 푼다는 '해원'이란 뜻을 보탤 수 있다.


원망... 바라던 일들이 이루어지지 않았을 때 생기는 마음. 그것도 개인적인 욕망이 아니라 사회적 변혁에 대한 꿈이었다면 개인의 원망에 그치지 않고 우리 사회의 문제로 계속 남아 있게 된다. 풀어야만 하는 원망이다. 그래서 원망을 푼다가 아니라 원망을 풀어야 한다고 '해원'을 생각해야 한다.


동학혁명을 통해 전봉준이 꿈꾸었던 백성들이 잘사는 나라, 공산주의 운동을 통해 박헌영이 꿈꾸었던 민중들이 잘사는 나라, 민주주의를 통해 시민들이 잘사는 나라를 꿈꾸었던 노무현의 나라. 그들은 그런 나라가 오는 모습을 보지 못했다. 그들에게는 그런 나라는 예언 속 나라였다. 그들은 예언을 다른 사람들에게 말해주는 존재였고, 다른 사람들이 결국에는 그런 세상에서 살 수 있도록 노력하게 하는 존재였다.


비록 자신들은 그 미래에 도달하지 못하더라도, 그들은 역사 속에 살아남아 예언이 공언이 아니었음을 기억하게 하는 존재가 된다. 역사 속에서 그렇게 기억되는 존재더라도 이렇게 소설 속에 등장해서 자신들의 이야기를 보여주면 사람들 마음에 더 쉽게 다가오게 된다.


그리고 이제는 머리만이 아니라 마음으로도 기억하게 된다. 이런 작업을 소설을 통해서 소설가는 하고 있고, 그래서 작가는 '아름답고 비참했던 사람들이 어떤 세계를 꿈꾸었는지를 기억하는 가장 쓸쓸한 형식'이라고 했는지도 모른다. 


이 소설을 통해 그들이 그런 세상을 꿈꾸었던 것은, 미래를 예언하고 실현시키려 노력했던 것은 바로 사람에 대한 사랑이 바탕이었음을. 실패할지라도 지속적인 꿈을 이야기한 것은 바로 사랑이 있었음을, 그런 사랑이 지금의 우리를 있게 했음을... 


이 소설을 통해서 그런 존재들을 마음 속으로부터 기억할 수 있게 된다.


덧글


소설이어서 역사적 사실이나 인물들을 정확히 표기할 필요는 없다는 생각이 들지만, 그렇다고 해도 실존하는 인물에 대해서는 정확히 써야 한단 생각을 한다. 아예 없던 인물을 창조해내면 몰라도...


220쪽. 앙굴마라 이야기가 나오는데... '천 번째 살인을 저지르려는 순간 붓다를 만나 회심하여 비구니가 되었지요.'라는 서술이 있다. 그런데 비구는 남자 승려, 비구니는 여자 승려라는 차이가 있으니, '앙굴마라는 비구가 되었지요'라고 해야 적절하다는 생각을 버릴 수가 없다. 


304쪽. 박헌영을 주인공으로 삼은 장면에서... '박 선생, 정말 나를 모르겠소? 허현이외다.'라는 서술이 있는데, 박헌영과 관련 있는 변호사라면 아무래도 '허헌'이 아닐까 한다. '허헌이외다'라고 하는 편이 더 핍진감을 주지 않을까 하는 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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