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킨 (리커버 에디션) ㅣ 옥타비아 버틀러 리커버 컬렉션
옥타비아 버틀러 지음, 이수현 옮김 / 비채 / 2020년 7월
평점 :
품절
"사람들은 나를 'SF작가'라고, 내 소설은 당연히 SF라고 규정한다. 그러나 나는 소설을 쓰는 '작가'일 뿐이다. 내가 좋은 이야기를 썼는지 아닌지만 판단받기를 원하는."
소설 표지를 넘기면 표지 안쪽에 이런 글이 쓰여 있다. 틀을 정하고 그 틀에 맞춰서 해석하고 이해하려는 경향이 있음을, 그런 틀을 벗어나 작품을 작품으로만 읽고 판단하기를 바라는 말.
소설을 어느 틀로 규정하느냐에 따라 이해도가 많이 달라질 수 있다. SF소설에 대한 생각도 많이 바뀌었는데, 소설을 통해 상상의 세계로ㅡ우리가 현실에서는 경험하지 못하는 세계로 들어가고 또 그 경험이 자신에게 좋았다면 그런 소설을 어떤 종류라고 규정하기보다는 좋은 소설이었어, 좋은 작가였어라고 생각하면 된다. 굳이 틀을 만들 필요가 없다. 옥타비아 버틀러 역시 그런 틀을 거부하고 있고.
타임슬립이라는 말을 한다. 시간 여행이라고 할 수 있는, 그런 시공간을 초월해 다른 시간대의 세상을 들어가는 일. 우리는 가끔 그런 상상을 하지 않나, 시간 여행을 하는. 과거로도, 미래로도 여행을 하고 있는.
소설은 1976년이라는 현실과 - 이 현실이 지금은 2022년이니 엄청나게 과거라고 느껴질 수 있다. 하지만 이 소설이 나온 시기가 그때니, 1970년대는 이 소설의 현시대이다 - 1800년대 초반이라는 과거가 공존하고 있다.
그리고 주인공인 다나는 1970년대에서 1800년대로 이동을 한다. 지금 그 상태 그대로. 다나에게 그 시대가 황당하겠지만, 그 시대 사람들에게는 다나가 황당할 수도 있다. 왜냐하면 그들에게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존재가 바로 다나이기 때문이다.
노예제가 살아 있던 미국 남부. 여기에 떨어진 흑인 여성. 그것도 청바지를 입고, 당시 흑인들과는 다른, 백인들과 비슷한 말투를 지닌 여성. 글을 읽고 쓸 줄 아는 여성.
이런 다나가 루퍼스라는 백인과 지속적인 관계를 맺으면서 겪게 되는 일들이 소설 속에서 펼쳐진다. 다나는 목숨이 위태로운 루퍼스를 구하기 위해 1800년대로 가고, 그곳에서 자신의 목숨이 위태로워지면 1970년대로 돌아온다.
그렇게 루퍼스가 어린아이에서 어른으로 성장하고 죽음에 이르는 과정을 다나는 시간 이동을 통해서 경험하게 된다. 이 과정에서 우리는 노예제의 참상을, 여성에 대한 차별을 보게 된다.
그런 차별을 통해 미국 사회가 어떻게 변모해왔는지를 살펴보지만, 1970년대가 되어도 흑인은 노예가 아닐지 몰라도 백인과 같은 대우를 받기는 힘든 사회다. 다나가 백인인 케빈과 결혼할 때 일어나는 일을 보면 알 수 있다.
즉, 그들은 노예제는 폐지했지만, 1960년데 흑인민권운동을 통해 법률적인 평등은 확보했지만, 실질적인 평등으로는, 융합으로는 가지 못했음을 이 소설을 통해서 알 수 있다. 그래서 이 소설은 과거 미국 노예제의 참상을 고발하는 소설로 읽을 수도 있지만, 1970년대 당시 미국 사회의 인종 문제로도 읽을 수 있다.
여기에 사랑의 방식에 대한 소설로도 읽을 수 있다. 어떤 사랑을 해야 할까를 루퍼스가 앨리스를 대하는 태도를 보면 알 수 있다. 맹목적으로 앨리스를 취하려고 하는 마음이 과연 사랑일까? 앨리스의 처지에서 루퍼스는 한번이라도 생각해 봤을까? 오로지 자신의 불안을 잠재우기 위한 행동 아니었을까? 즉 그는 강자로서 앨리스를 취할 수는 있지만, 앨리스의 마음을 얻을 수는 없는 행동을 한다.
그건 사랑이 아니다. 자신의 욕심을 채우려는 행위일 뿐이다. 앨리스가 자살할 수밖에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루퍼스가 다나에게 죽임을 당할 수밖에 없는 이유가 되기도 하고.
이렇게 소설은 노예제에 대한 생각과 사랑에 대한 생각을 중첩시키면서 읽을 수 있다. 시공간을 초월하여 이동하는 설정은 중요하지 않다. 다나를 통해서 노예제와 노예제 이후의 미국 사회를 생각하면서 읽으면 좋고, 1800년대를 통해서는 사랑의 모습을 생각하면서 읽으면 된다.
루퍼스의 사랑은 노예제에 기반한 사랑일 수밖에 없음을, 그리고 그런 사랑은 파탄으로 끝날 수밖에 없음을, 사랑은 상호 교감을 동반하지 않으면 이루어지지 않음을 루퍼스-앨리스 쌍과 다나-케빈 쌍을 통해서 생각하게 하고 있다.
처음부터 끝까지 흥미진진하게 읽을 수 있다. 결말까지 나아가고, 결말을 통해서 진한 여운을 느낄 수 있게 되는데...
끝까지 읽고 난 뒤, 옥타비아 버틀러의 말에 수긍하게 된다. 그리고 이런 말을 하고 싶다.
"당신은 좋은 작품을 썼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