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랍어 시간
한강 지음 / 문학동네 / 201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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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랍어' 


한자어로 적혀 있으면 어느 나라 말인지 알기 힘들다. 사실 한자로 나라 이름을 적었던 시기는 지금으로부터 오래 전이었으니...


독일을 덕국으로, 프랑스를 법국으로 불렀던 시대, 희랍은 그리스다. 그러므로 희랍어는 그리스어다. 우리와는 관계가 없을 언어라고 생각하는데, 요즘 코로나19로 인해서 희랍어를 조금씩 만나게 된다. 변이 바이러스들의 이름을 그리스어 알파벳의 순서대로 붙이고 있다고 하니.


이런 것을 떠나서 희랍어는 우리와 상관없는 언어다. 우리가 플라톤이나 아리스토텔레스의 저작을 희랍어로 읽으려고 하는 경우가 얼마나 있겠는가? 그리스 문학을 전공하거나, 그리스에 관심을 가져 그 나라와 교류를 하려고 하는 사람이 아닌 경우, 또는 특별한 학문적(언어적) 호기심으로 배우는 사람을 제외하고는.


소설 제목이 희랍어 시간이다. 생소한 언어를 배우는 시간이 소설 제목이다. 그렇다면 이 소설은 생소한 이야기여야 한다. 우리와는 결이 다른 사람들 이야기.


두 축으로 이야기는 전개된다. 한강 소설이 보여주는 특징이라고 할 수 있는 서술자가 교차되어 바뀌는 경우가 많은데, 이 소설에서는 희랍어를 가르치는 강사인 남자와 희랍어를 배우는 학생인 여자가 서술자가 된다.


남자는 점차 시력을 잃어간다. 그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그는 시력이 나빠지고, 안경을 쓰고도 잘 보지 못할 정도의 시력이다. 조금 더 시간이 지나면 완전히 시력을 잃을 수 있는 상태. 그는 외부로부터 오는 시각적 정보를 받아들일 수 없는 상태가 된다.


즉 외부의 세계와 어느 정도는 단절이 된다고 볼 수 있는데, 이것은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가 닫혀간다는 의미가 된다. 


여자는 말을 하지 못하게 된다. 의식적이 아니라 어느 순간 말이 자신에게서 사라진다. 눈이 외부의 자극을 받아들이는 역할을 한다면, 말은 내면에 있는 것들을 밖으로 표출하는 역할을 하는데, 말을 할 수 없는 상태는 자신의 내면을 다른 사람에게 표현하지 못한다는 얘기다. 물론 글을 쓰면 되지만, 순간순간 이루어지는 대화의 장에서 글로 의사소통하기는 힘드니, 소통의 창구가 어느 정도 닫혔다고 보면 된다.


이렇듯 남자와 여자 모두 관계가 단절되는 상태에 이르게 된다. 이런 상황이 소설 속에서는 여자의 말을 빌려 이렇게 표현되고 있다.


  시선만큼 즉각적이고 직관적인 접촉의 방법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그녀는 느꼈다. 접촉하지 않으면서 접촉할 수 있는 거의 유일한 방법이었다.

  그에 비하면 언어는 수십 배 육체적인 접촉이었다. 폐와 목구멍과 혀와 입술을 움직여, 공기를 흔들어 상대에게 날아간다. 혀가 마르고 침이 튀고 입술이 갈라진다. (55쪽)


이 표현을 보면 남자도 여자도 접촉할 수 있는 방법을 잃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둘은 모두 사회에서 접촉을 잃어가는 존재라고 할 수 있다. 이런 존재를 잃어가는 사람들이 희랍어라는 낯선 언어로 만나게 된다.


접촉을 잃어간다는 공통점. 그 다음에는 무엇이 올까? 낯섬을 통해서 익숙함의 세계로 갈 수 있을까? 그것이 쉽지 않음을, 여자와 가장 가까운 관계라고 할 수 있는 아들과의 만남 장면에서 추측할 수가 있다.


'그녀가 붙들려고, 팔을 붙들려고, 손을 잡으려고 하자 물고기처럼 재빨리 빠져나간, 지느러미처럼 부드러운 살갗을 모른다.' (183쪽)


아들마저도 이렇게 그녀를 떠나가는데, 남자가 알 수는 없겠다. 이는 보거나 말로 듣거나 해야 하는데 여자는 남자에게 말을 하지 않으니 말이다. 그렇지만 묘하게 한강 소설은 그렇게 끝나지 않을 것 같은 여운을 남긴다. 


제목이 희랍어 시간 아닌가. 낯선 언어를 배우는 시간. 왜 낯선 언어를 배우는가? 바로 찬섬을 통해서 자신이 겪는 일들을 벗어날 수 있다는 희망이 있기 때문 아닌가. 그리고 남자 역시 자신과 비슷한 절망을 안고 사는 사람이고.


그렇기에 한강이 다른 소설들에서 절망의 끝자락에 서 있다고 하지만, 거기서 한발 더 나아가려는 인물들을 만들어냈듯이. 세상을 그렇게 살아가야 한다는 듯이 이 소설 역시 절망으로 어둠 속에서 끝나지 않는다는 생각을 하게 한다.


'마침내 첫 음절을 발음하는 순간, 힘주어 눈을 감았다 뜬다.

눈을 뜨면 모든 것이 사라져 있을 것을 각오하듯이.' (191쪽)


이렇게 쓰인 이 소설의 마지막에서 그렇게 되겠다는 진한 여운을 느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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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02-12 11:24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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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02-12 12:08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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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우리들의 잔을 (반양장) 문학과지성사 이청준 전집 5
이청준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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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청준 소설은 독백체가 간간이 드러나고 있어서, 작가가 소설 속에 인물을 빌려 자신의 말을 하고 있다는 느낌을 주는 경우가 많다.


여기에 약간 예스러운 문체도 소설을 읽을 때 완전히 몰입하기보다는 인물에게서 한 걸음 물러서게 만들기도 한다. 이 소설도 마찬가지다. 등장인물은 한진걸, 김상응(김의원), 안 선생, 노명식, 지윤희 그리고 무불 스님과 배경숙, 약혼녀 명순, 친구이자 처남이 될 경식이다. 이 중에 경식은 스쳐지나가고, 약혼자라고 하는 명순(명숙? 이 책에서 이 인물에 대한 이름이 명순과 명숙으로 뒤섞여 나온다. 337쪽. 466쪽.문학과지성사 하면 문학 작품으로는 전문적인 출판사인데, 이 소설에서 이런 실수가 곳곳에서 나오니) 역시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지 못한다.


그러니 여래암이라는 절에 머무르고 있는 사람들을 중심으로 이야기가 전개되고 있는데, 이야기를 전개하는 사람은 한진걸이다. 고시를 준비한다는, 세상을 다 아는 듯한 태도를 지닌 사람. 그러나 읽어갈수록 그에 대한 믿음은 떨어진다. 그는 자신이 다 안다고 생각하지만 읽는 사람은 그가 참 허랑방탕한 사람이라는 생각을 지니게 된다. 그러니 그가 하는 말이나 행동에 거리를 두게 된다. 이 거리두기를 통해서 이 소설이 그냥 남녀간의 사랑을 다룬 소설로 국한되지 않게 된다.


'이제 우리들의 잔을'이라는 제목이 무슨 뜻일까 궁금해 하면서 읽게 되는데, 이 말은 소설의 끝부분에 '이젠 나도 내 잔을 들어야 할 때가 온 듯싶으니까'(489쪽)이라는 말에서 어느 정도 짐작할 수 있다.


사람들은 각자 자신의 삶이 있다는 것, 남의 삶을 살피고, 남의 삶을 살려고 하기보다는 자신이 살아가야 할 삶을 살아가야 함을 이 말로 표현했다고 할 수 있다.


이렇게 되기까지 여래암 사람들에게 많은 일들이 일어나는데 김의원은 자살이라고 할 수 있는 죽음으로 자신의 정치 인생을 끝낸다. 그에게 이제 정치를 할 수 없는 상황은 죽음과 같다고 할 수 있지만, 이 죽음이 꼭 정치적 자살로는 읽히지 않는다. 


그것은 사촌여동생을 범한 노명식의 참회록에 나오는 장면과 비슷한 장면이 김의원이 죽을 때 나오기 때문이다. 물론 명확히 명시는 하지 않지만, 읽다보면 어린 시절 노명식의 장면과 나이 든 김의원의 장면이 겹치게 된다. 


그런 노명식이 신학교에 가서 참회를 계속 이어가고자 하는데, 이는 안 선생이 전직 신부였다고 하니 노명식이 안 선생의 잔을 물려받아 자신의 잔을 채우게 되는 셈이고, 안 선생은 무불 스님으로부터 머리를 깎고 여래암에 눌러앉아 자신의 잔을 채우고, 무불 스님은 불교 정치를 한다고 속세로 나아갔으니 김의원의 자리를 이어받아 잔을 채웠다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윤희는 무엇인가? 진걸로 하여금 여자들에게 지녔던 환상을 깨게 하는 인물이다. 자신이 만났던 여자들 그래프를 그려놓고 10번째 여인으로, 그래프를 완성시켜줄 여인으로 윤희를 생각했지만 윤희는 결코 진걸을 위해 자신을 희생하려 하는 여인이 아니다. 윤희에게도 자신의 잔이 있기 때문이다.


윤희를 만나기 전까지, 아니 윤희에 의해 깨지기 전까지 진걸은 여자들은 자신의 잔을 채울 수 있는 수단에 불과했다. (요즘 이런 태도를 지닌 남성은 마초라는 이름을 받을 수밖에 없을 테지만, 이 소설은 꽤 오래 전에 쓰여졌고, 이 소설 곳곳에서 나타나는 가부장적 요소를 지금 관점에서 비판하기는 그렇다고 본다. 당시 지배적인 사고방식이나 행동방식을 표현했다고 보면 된다. 물론 지금 관점에서 이 소설이 지닌 한계를 이야기하고 되풀이 되지 않도록 해야 하기는 하지만) 그러니 그래프를 그려놓고 하지. 하지만 윤희는 윤희만의 잔이 있기에 진걸의 잔을 채워주는 역할에 그치지 않는다. 그렇게 진걸은 자신의 잔이 뭔지도 제대로 모르면서 잔을 채우려고 했다고 할 수 있다.


시험에서 떨어지고 윤희에게서 완전히 자신의 처지를 알게 된 후 진걸은 여래암에 남아 있을 수가 없다. 그렇다고 고향으로 돌아가 아무 일 없던 것처럼 명순과 결혼할 수도 없다. 아직 그는 자신의 잔에 무엇을 채워야 할지, 자신의 잔이 무엇인지 명확히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작가 역시 끝을 맺지 않고 있다. 사실 진걸이 고향으로 돌아가 동네 사람들의 눈초리에도 불구하고 명순과 결혼에서 자신의 삶을 살아가고 있다고 하면 이는 너무도 뻔한 결말 아니겠는가. 그러니 작가는 이런 결말 대신 진걸이 무슨 일을 하는지 알려주지 않는 방향으로 결말을 맺는다.


다만, 우리는 짐작할 수 있다. 진걸은 자신의 잔을 찾고 있을 것이라고. 그 자신의 잔을 채우려 노력하고 있다고. 그렇게 생각하게 해주는 인물이 배경숙이다. 어려운 처지에 있지만 자신의 처지를 인정하고, 그 처지에서 할 수 있는 최대치를 하려고 하는 사람. 고통 속에서도 희망의 끈을 놓지 않고 있는 사람.


그래서 진걸은 배경숙을 이렇게 표현하고 있고, 우리는 진걸 역시 그런 삶을 살아가려고 하지 않을까 추측을 하게 된다.


  여자로서는 가장 절망적인 부끄러움을 지녔던 여자 - 육신의 결함 때문에 누구보다 많은 부끄러움을 견뎌야 하는 그녀의 굴욕과 슬픔 속에서 그 마지막 부끄러움만이라도 자기의 것으로 지키는 여자가 되겠노라며 산을 내려간 배경숙 - 진걸은 아직도 그녀의 후일만은 쉽게 떠올려볼 수가 없었다.

  그리고 그만큼 그녀의 후일이 궁금했다.

  배경숙 - 그녀는 아직도 자신의 부끄러움을 견디면서 그것을 그녀의 마지막 진실로 지니고 살아가는 여자일 수 있을까! 그리고 그 어둡고 아픈 삶을 아직도 어디서 부끄럽고 겸허하게 살아내고 있는 것일까!

  하지만 진걸은 이내 머리를 세차게 흔들었다.

  경숙의 아픔이나 부끄러움을 부인하려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불결스런 상상으로 하여 그녀의 순결한 삶(진걸에겐 그녀의 삶이 그렇게만 생각되고 있었다)을 욕보이게 하고 싶지가 않았기 때문이었다.

  배경숙의 아픔과 부끄러움에 비하여 자신의 그것은 오히려 당당하고 뻔뻔스러워지고 있을 듯싶었기 때문이었다. 그에겐 그 경숙에게서와 같이 부끄러움다운 부끄러움조차도 없을 듯싶어졌기 때문이었다. (476-477쪽)


이런 장면 때문에 진걸은 자신의 잔을 찾아 살아가려고 한다고 생각할 수 있다. 이 장면에서만이 진걸이 진실로 자신을 돌아보게 되기 때문이다. 앞으로도 진걸은 과거와는 달리 살아가게 되리라 믿을 수 있게 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진걸은 누구의 자리를 찾아갈까? 그건 누구라고 꼭 집어 말할 수 없다. 다만, 자신의 삶을 겸허하게 살아내는 삶을 살아갈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이렇게 이 소설은 진걸이라는 세상을 다 아는 듯이 젠체하는 사람의 시선과 행동을 통해 우리들의 삶을 돌아보게 하고, 내 삶을 살아야 한다는 생각을 하게 한다. 그것이 바로 '우리들의 잔을'이라는 말에 함축되어 있다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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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이 분다, 가라 - 제13회 동리문학상 수상작
한강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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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번에 읽힌다. 아니, 읽기 시작하면 끝까지 손에서 놓기가 힘들다. 한강 특유의 짧게짧게 툭툭 치며 나가는 문자들이, 그리고 결코 길지 않게 끊어놓은 단락들이, 마치 한 계단 한 계단 밟아올라가듯이, 또는 한 계단 한 계단 밟아내려가듯이 소설을 계속 나아가도록 한다.


추리를 하게 하는 면도 있지만, 사랑에 관한 면이 주를 이루고, 그 사랑이 육체적인 사랑보다는 서로의 존재를 그대로 받아들이는 사랑이라는 점에서, 드러내놓고 보여주지 않는 사랑이어서 더 아련한 사랑에 대한 소설이라고 할 수 있다.


중학교 때 만나게 된 두 친구 정희와 인주. 떨어져 있으면서도 결코 떨어져 있지 못한 친구 관계. 그런 친구들 중에 한 사람인 인주가 죽는다. 자살이라고 한다. 유고전도 열린다. 평전도 쓰인다. 그런데 유고전이나 평전을 쓰는 사람에게 또다른 친구는 짙은 의심을 지닌다.


인주는 결코 자살할 사람이 아니다. 그런데 자살이란다. 정희는 평전을 반박하기 위해 죽은 친구인 인주가 만났던 사람들을 찾아 나선다. 그 과정이 긴박하게 펼쳐지면서, 평전을 썼던 강석원이라는 인물과 쫓고 쫓기는 갈등 관계가 겹쳐진다. 여기에 인주 엄마에 대한 류인섭의 글에서 인주 죽음의 진실을 밝힐 단서들이 나타난다.


정희는 인주에 대해서 잘 알고 있다고 생각했지만, 과연 정희와 인주는 서로를 얼마나 알고 있었을까? 사실 나도 나를 모르는데, 남이 나를 안다고 할 수 없다는 말이있지 않나. 아무리 가까운 사이라고 해도 모르는 사실이 있다. 감추고 싶은 일들이 있다. 마음이 있다. 그럼에도 우리는 모두 안다고 착각하기도 한다.


이 소설에서 정희와 인주는 오랜 친구다. 서술자인 정희는 인주의 죽음이 석연치 않다고 여기고 인주 죽음의 진실을 찾아 다닌다. 그러다가 자신이 인주에 대해서 많이 몰랐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인주가 끝까지 정희에게 감추고 있었던 것들. 그것은 인주 엄마에 대한 이야기도 있지만, 정희에 대한 인주의 감정이다.


소설 초반부에 잠깐 인주가 정희에게 지닌 감정이 서술된다.


한 번, 꼭 한 번이었지. 갑자기 네가 내 얼굴을 끌어당기고 입술을 포갰지. 

나는 너무 놀라 네가 하는 대로 가만히 있었지. 

왜 그랬어, 라고 내가 묻자 너는 말했지. 

이해하고 싶어서.

나는 달아오른 뺨과 입술을 두 손으로 가리며 뒤로 물러나 앉았지. 열여덟 살이었지. 삼촌의 빈 작업실에서, 물건들을 정리하다가 갑자기, 네가 내 입술에 입 맞췄지. 그렇게 된 거였지. (24쪽)


이런 인주의 마음이 소설의 뒤에 가면 인주가 쓴 글을 통해서 한 번 더 나온다. 삼촌에게 독백하듯이 쓴 글에서.


왜 가끔 이렇게 오지 않았어? 아무 말 없이라도 나타나주지 않았어? 그랬다면 좀더 견디기 쉬웠을 텐데. 환멸을. 증오를. 고통을. 믿을 수 없을 만큼 망가진, 그 여자만큼이나 부서진 정희의 얼굴을. (373쪽)


인주는 정희를 사랑한다. 그렇다고 표현하지 않는다. 지켜볼 뿐이다. 정희가 살아가도록. 이런 인주의 마음을 정희는 알게 되는 걸까? 소설의 막바지에 불이 난 작업실에서 가까스로 빠져나오며 정희는 이렇게 외친다. '살고 싶다'


그렇다. 이 소설은 두 친구의 사랑에 관한 이야기이기도 하지만, '살아내야' 함을 말하는 소설이기도 하다. 우리는 살아야 한다. 어떤 고통 속에서도 죽음으로 회피하지 않고 살아서 겪어내야 한다. 


정희가 마지막에 하는 말은 바로 이 결심을 이야기한 것이고, 정희의 이 다짐으로 소설은 결말을 완결짓지 않고 더 생각하게 하는 여운을 남긴다.


결국 인주를 죽인 것은 누구인지 짐작은 하지만 확실하게 밝히지는 않기 때문에 인주의 죽음에 대한 진실이 밝혀질 것인가? 앞으로 정희는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 하는 점은 독자의 마음 속에, 머리 속에 남아 있다. 그 다음 이야기는 독자들이 써내려가면 된다.


이렇게 사랑 이야기로 읽어도 좋다. 그 사람의 고통까지도 사랑하는 관계. 그래서 어떤 말보다도 함께 있어주는 그런 관계. 충고도 조언도 없이 그냥 덤덤하게 함께 있어주는 인주. 그런 사랑의 이야기로 읽어도 좋다.


하지만 여기에 덧붙여 진실을 파헤치는 과정에서 겪는 어려움, 그리고 서서히 밝혀지는 진실을 이야기하는 소설로 읽어도 좋다. 서술자인 정희로 하여금 진실에 한발 다가가게 만드는 단서들을 읽으면서 함께 찾아가는 재미도 좋다.


또한 한강 소설에서 느낄 수 있는, 사회의 그늘이 개인의 아픔 속에 녹아들어 나오는 면을 찾아 읽어도 좋다. 권력을 통해서 진실을 왜곡하던 시대의 모습 (류인섭이 정희에게 쓴 편지글에서 이 점이 잘 드러난다), 가부장적인 사회의 모습(정희가 엄마를 도와 일하는 장면에서 남자 형제들은 등장하지 않는다) 등도 이 소설에서 찾아볼 수 있으니 말이다.


그럼에도 이 소설은 살아냄을 담은 소설이다. 힘든 시기를 거치며 자살을 시도하는 정희에게 살아야 함을 이야기하는 인주, 그리고 인주가 정희에게 하는 말들.


정희야

넌 아마 아주 오래 살 거야.

모든 걸 기억하면서.

지금보다 더 추위를 타면서.

백 살, 백이십 살씩 사는 할머니들 봐.

다 체형이 너 같아. (327쪽. 187쪽에도 비슷한 구절이 나온다)


그러면서 인주는 말한다. '난 말이야, 그렇게 늙어갈 거야.'(187쪽)라고. 이런 인주가 자살을 할 이유가 없다. 그러니 정희가 인주의 죽음에 얽힌 진실을 파헤치려는 것이다. 또한 정희는 오래 살아서 진실을 기억해야 하고.


이렇게 짧은 문장들이 마음을 톡톡 건드리면서 소설의 끝을 향해 가게 한다. 그 자체만으로도 읽을 만한 소설이다. 단숨에 읽을 수 있는 그런 소설이었다. 읽고 나서도 마음 속에 긴 여운이 남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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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대의 차가운 손
한강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0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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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에 관한 말들이 많다. 다양한 뜻을 지니고 있는 관용구들이 얼마나 많은가. 손은 그만큼 우리 삶에서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대의 차가운 손'이다. 손이 차다는 말은 냉정하다는 말로 해석할 수도 있다. 그러니 그대의 차가운 손이라고 하면 사람을 받아들이지 않는 손이라는 생각을 할 수도 있다.


소설 제목에서 그런 생각을 가지고 읽으면 냉소적인 사회, 그런 사회를 살아가는 사람들 모습을 상상하게 되는데, 정작 소설은 다르게 전개된다.


소설은 소설 속의 소설 형식을 택하고 있다. 소위 액자소설이라고 하는 형식인데... 소설가인 '나'가 다른 사람이 쓴 글을 소개하는 형식으로 되어 있다. 소설의 앞과 뒤가 소설가가 서술자로 나오고, 소설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부분에서는 장운형이라는 미술가가 서술자로 나오게 된다.


장운형이 쓴 글 제목이 '그녀의 차가운 손'이다. 그리고 이 소설 제목은 '그대의 차가운 손'이다. 왜 작가는 소설 제목을 다르게 붙였을까? 소설 속 소설에서 그녀는 누구일까? 읽다보면 그녀의 차가운 손(294쪽)이라는 말이 직접 나온다. 소설 속에서는 장운형이라는 서술자를 제외하고는 모두 영어 이니셜로 나오기 때문에 이 글 제목이 된 그녀의 차가운 손에서 그녀는 E를 가리킨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읽다보면 소설 속 소설은 총3부로 구성되어 있는데, E는 3부에만 나온다. 이 3부까지 가기 위해 1부와 2부가 필요했는지도 모른다. 손을 이야기하지만 손은 사람이라고 할 수 있으니, 결국 사람에 대한 이야기를 한다고 보면 되는데...


손가락이 잘린 외삼촌. 가족들에게도 이해받지 못하고, 또 가족들과 어울릴 생각도 없이 알콜 중독이 된 외삼촌. 이런 외삼촌과 가족들 관계를 통해서 서술자인 장운형은 어린 시절부터 가면을 쓰게 된다. 그리고 그 가면을 누구나 다 지니고 있다고 믿고, 그는 철저하게 자신을 감추며 살아간다. 오히려 손가락이 잘린 외삼촌은 가면 없이 살았다고 할 수 있다. 그러니 그는 가면 없이 살아가는 사람과 가면을 쓰고 살아가는, 남들이 보면 평온한 삶을 살아가는 사람을 대비시키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여기서 가면을 쓰지 않고 살아가는 사람은 배척당하고 견딜 수 없게 된다. 2부 역시 마찬가지다. L이라는 여인이 나온다. 거구의 몸집을 지닌 여자. 그런데 장운형은 이 L이 손에 매혹된다. 이 손은 따뜻한 손이다. 그럼에도 L은 자신의 몸을 혐오하고, 살을 빼려고 한다. 사랑하는 사람이 생겼다고 하면서... 이런 L과의 생활이 펼쳐지는 2부에서는, 우리가 남들을 바라보는 시선보다는 남들의 시선을 의식하는 삶에 대해서 생각하게 된다.


L이 살을 빼려고 하는 이유 역시 남들의 시선을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것이 자신으로 하여금 가면을 쓰게 한다. 견딜 수 없는 식욕, 폭식과 구토를 거듭하면서 자신의 손에 상처를 남기는 L. 그러나 L은 언제까지 가면을 쓰고 살아가지 않는다. L은 자신을 받아들인다. 이렇게 자신을 받아들인 L이 장운형 곁에 있을 수가 없다. 왜냐하면 장운형은 여전히 가면을 쓰고 살아가고 있기 때문이다.


이제 그녀의 차가운 손이라고 할 수 있는 E가 등장한다. 겉으로 보기에는 성공한 삶을 사는, 외모 역시 남들의 부러움을 받는, 무엇 하나 부족함이 없어보이는 여자. 장운형은 E를 처음 만났을 때 무언가 섬뜩함을 느낀다. 무엇일까? 이것은 가면을 쓰고 살아가는 사람이 가면을 쓰고 사는 사람을 알아보는 모습이 아닐까?


2부까지 그렇게 손에 관심을 가졌던 장운형이 3부에서는 이상하게도 손 이야기를 하지 않고 얼굴 이야기를 한다. 갑자기 손에 대한 관심이 사라질 정도라면 E의 얼굴에서 풍기는 어떤 점이 장운형의 관심을 가져갔을텐데... 그것에 대한 추구를 하게 된다. 손에 대한 이야기는 없이... 그러다 후반부로 가면 E가 먼저 장운형에게 손을 보여준다. 그리고 자신의 손에 대한 이야기를 한다.


육손이로 태어나 손때문에 겪었던 일들을... 수술하고 나서 남들보다 더 잘 살기 위해서 지내왔던 가면을 쓰고 살았던 삶에 대해서... 그 말들이 끝나고 나서 원하든 원하지 않았든 석고를 뜨는 대상이 되었던 둘이... E가 이런 말을 한다. 이제 이들 서로에게는 가면이 필요없어졌다.


"네가 날 꺼냈고……또 난 널 꺼낸 건가?" (315쪽)


이 말로 장운형이 쓴 글은 정리가 되었다고 할 수 있다. 이 둘이 석고 조각들을 발로 밟아 자근자근 부숴버리는 장면에서 이들의 가면은 이제 없다고... 그렇다면 이들은 어떻게 될까? 가면을 벗어던진 그들은 지금까지 살아왔던 가면을 쓴 사회에서 살아갈 수가 없다. 표면상 그들은 실종이 된다.


그리고 작가의 에필로그. 한강 소설은 결말이 희망적이다. 이 소설에서도 마찬가지다. 가면을 벗은 이들... 가면을 쓰고 살아가는 사람들은 이들을 알아볼 수 없다. 하지만 이들은 이전까지와는 다른 삶을 살아갈 것이다. 둘이 함께... 그 점을 에필로그에서 볼 수가 있다.


그러니 장운형이 쓴 글 제목인 '그녀의 차가운 손'이 제목이 되지 않은 이유가 있다. 그녀의 차가운 손은 세상과 맞서 살아가고자 애쓴 손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차가운 손일 수밖에 없다. 감추고 싶었던 손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손을 받아들이는 사람을 알게 되는 순간, 진실을 알게 되는 순간, 더이상 차가운 손이 되지 않는다.


차가운 손은 바로 '그대'다. 우리다. 남들을 자신의 잣대로 판단하고 평가하는 우리들, 바로 그런 사람들이 가면을 쓰고 살아가면서 그 가면을 인식조차 못하고 살아가게 하는 사회. 그런 사회 속 사람들이 바로 '그대의 차가운 손'이다. 그러니 이 소설은 다름에 대한 소설이다. 다름을 받아들이느냐 배척하느냐에 관한. 차가운 손을 지닐 것이냐 따뜻한 손을 지닐 것이냐 하는 그런 소설. 


'그대의 차가운 손'이 아니라 '그대의 따스한 손'이 되도록 해야 한다고, 그렇게 하기 위해선 가면을 벗어던져야 함을, 우리 모두 진실된 모습을 보이고 서로를 이해하면서 가면을 벗게 해야 한다고, 이 소설을 그렇게 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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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은 사슴
한강 지음 / 문학동네 / 1998년 8월
평점 :
절판


소설을 읽으며 이건 현실이 아니다. 현실의 모방이다. 이런 생각을 한다. 소설에서 효용성을 먼저 생각하면 안 되지만, 소설이 현실을 반영하고 어느 정도 현실을 바꿀 수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한다. 실제로 그런 역할을 한 작품도 꽤 있고. 사회적 반향을 일으켜, 사람들로 하여금 생각하고 토론하고 행동하게 하는 작품이 여럿 있었으니, 소설에 그런 기대를 품는다고 잘못되었다고 할 수는 없다. 사진도 마찬가지일지도 모른다. 


뜬금없이 웬 사진 이야기? 이 소설에서는 개인이 겪는 아픔과 현실에서 벌어졌던 시대적 아픔에 대한 이야기가 펼쳐지지만 사진을 통해서 그 점을 더 깨닫게 되기도 한다. 주인공이라 할 수 있는 인영은 기자인데 사진도 찍는다. 그가 찍은 바다 사진들. 사람들이 나와 있지 않은 바다 사진 이야기가 나오는데, 왜 인영이 바다 사진을 주로 찍었는지는 소설 후반부에 가면 이해할 수가 있다.


여기에 사라진 의선을 찾아 가는 핑계 대상이 된 인물도 광산촌, 광부들 사진을 찍어온 장종욱에게서도 사진은 중요하다. 그 역시 사진을 통해서 자신의 아픔을 이겨나가고 있었다고도 할 수 있는데, 자의든 타의든 자신들이 그동안 찍어왔던 사진들이 모두 타버렸다는 데서 둘은 공통점을 지니고 있다.


게다가 이들이 찍은 사진이 모두 사라지지는 않았음을, 소설 후반부와 에피소드에서 알 수 있게 되는데 장종욱은 다시 광부들의 사진을 찍어 인영에게 보내주는데, 그때 찍힌 사진에는 수줍고 맑은 얼굴로 하늘을 올려다보는 얼굴이 나온다. 이렇게 소설은 희망을 버리지 않는다. 


한때 장종욱은 사진에 대해서 이런 생각을 한 적이 있다고 한다. 이는 사진뿐만 아니라 예술 전반에 걸친 생각일 수도 있다. 


그는 세계의 내면과 사진기 사이에 놓인 간격을 깨닫고 있었다. 사진기로는 어느 것의 안으로도 들어갈 수 없었다. 빛에서 시작하여 빛으로 끝나는 것이 사진이었다. 사진기가 포착하는 것은 빛이고, 인화지에 드러난 것도 빛일 뿐이었다. 만지고 냄새 맡고 통증을 느끼고 피를 흘릴 수는 없었다. 그때까지 장은 결코 사진기로 찍어낼 수 없는 것을 인화지에 담아내고 싶어하고 있었다. (411쪽)


사진을 소설로 바꾸어도 말이 통한다. 작가들의 고민이 여기에 있을 수도 있다. 소설 속 인물인 의선이 자신의 편지를 머리 속에서 정리해서 인영에게 전달해주려고 노력하지만, 말로는 완전하게 그려낼 수 없기에 결국 포기하고 있는 장면과 일치한다.


그러나 그렇게 사진이나 소설이나 세계의 모든 면을 드러낼 수는 없지만, 어느 정도는 가능하다.  우리가 끊임없이 작품을 읽고 보고 하는 이유가 완전하지는 않지만 작품을 통해서 세계를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작가들은 언어로, 그림으로, 사진으로 그 역할을 한다.


한강은 바로 이 소설을 통해서 그런 역할을 하려고 한다. 우리 사회에 감춰져 있던 진실을 개인의 아픔을 통해서 드러내려 하고 있다.


광산, 막장이라고 불리던, 한때 사람들이 어쩔 수 없이 갔던 그곳. 광부들의 삶은 결국 갱도에 갇혀 죽거나 진폐증에 걸려 죽거나 정부 정책으로 폐광이 되어 그곳을 떠나거가 떠날 수 없어서 그 검은 땅에 눌러 앉을 수밖에 없었다.


이런 폐광촌의 현실을 한강은 직설적으로 이야기하지 않는다. 이곳을 주 무대로 삼지도 않는다. 그러나 인물들을 통해서 우리나라 광산촌의 비참한 현실을, 지금도 끝나지 않은 그들의 어려움을 드러낸다. 


사라진 의선을 찾아가는 과정에서 만나게 되는 현실. 그렇다고 소설에서 광산촌의 현실이 주를 이루지 않는다. 소설에서는 의선을 찾는 과정에서 하나 둘씩 드러나는 인물들의 고통이다. 의선을 찾아나서자고 제안하는 명윤에게 드리운 어두운 그림자. 그 그림자를 떨치지 못해 현실에 제대로 적응하지 못하는 명윤. 


광산촌에서 사진을 찍지 못하고 근근이 살아가는 장종욱. 그리고 대범하고 냉철해 보이지만 언니를 잃은 상처를 지니고 있는 인영. 집을 나가버린 엄마와 엄마를 찾아 헤매는 의선의 아빠, 그리고 정신지체인 오빠를 둔 의선.


이렇게 이들은 나름대로의 고통을 안고 살아가지만, 그 삶에서 어떤 의미를 찾지 못하고 자신을 한 구석으로 몰아가지만 그럼에도 살아가야 함을 한강은 보여주고 있다. 


지금까지 읽은 한강 소설은 대부분 상처 입은 인물들이 등장한다. 그런데 그 상처가 가정에서부터 시작된 것임을 보여주는데, 가정에서 상처 입었다는 얘기는, 그 가정이 사회에서 온전하게 자리를 잡지 못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뺑소니 사고로 앓아누운 아버지, 여행을 갔다 죽은 언니, 갱도에 갇혀 죽어 나온 남편을 보고 미쳐버린 아내, 자신을 떠난 아내가 있는 사진사 장씨 등등.


이들 상처는 개인에게 커다란 고통을 주지만, 한강이 사회의 억압을 직접적으로 드러내지는 않지만, 이들 상처가 결국 사회로부터 비롯되었음을 알게 해준다.


의선이 받은 상처 역시 광산이라는 장소를 떠나서는 이야기할 수가 없고, 명윤이 굳이 의선을 찾아나서는 이유 역시 자신이 받았던 상처들에서 자유롭지 않기 때문이다. 그들은 이렇게 의선을 통해서 자신의 상처를 들여다보게 되고, 그 상처를 우리에게 보여줌으로써 개인의 상처가 사회를 통해 받은 상처임을 생각하게 해준다. 이렇게 개인들이 겪는 아픔을 통해서 한강은 소설을 통해 우리가 개인적 상처 저변에 있는 사회적 상처들을 바라보게 한다.


그렇게 개인의 상처와 사회적 상처가 맞물리면서 소설은 전개되고, 이런 소설을 통해서 우리는 현실을 바라볼 수 있게 된다. 소설이 현실을 그대로 가져올 수는 없더라도 인물들을 통해서 현실을 느끼게 해주고 있다. 


결국 '사진기로 찍어낼 수 없는 것을 인화지에 담아내고 싶어'했다는 장씨의 일념과 같이 소설가 한강은 글로 완전히 드러낼 수 없는 개인과 사회의 아픔을 소설로 드러내려 했고, 어느 정도 성공했다고 할 수 있다.


이렇듯 소설은 완전히 드러낼 수는 없지만 어느 정도 드러낼 수는 있고, 그래서 우리로 하여금 현실로 눈을 돌리게 할 수 있다. 한강은 그 점에서 성공한 작가라고 할 수 있다. 읽으면서 마음 한 구석이 짠해져서 자꾸 책장을 덮으려는 마음과 그래도 읽어야지 하는 마음이 갈등하면서 끝까지 소설을 놓지 않게 했는데...


아마도 끝까지 읽게 만든 이유 중에 하나가 이 소설 제목이 된 '검은 사슴' 이야기일지도 모른다. 이 이야기는 두 번 나오는데, 한번은 임씨가 장종욱에게 해준 이야기, 또 한번은 임씨가 딸인 의선에게 해준 이야기다.


갱 속 깊은 곳에 사는 검은 사슴 이야기. 늑대처럼 단단한 이빨과 빛나는 뿔을 지니고 있는 검은 사슴. 해를 보고 싶어해서 광부들에게 부탁하지만 뿔도 이빨도 잃고 죽음에 처하게 되는 검은 사슴 이야기. 여기까지만 보면 광산촌 사람들, 또는 힘없는 사람들이 힘있는 자들에게 어떻게 억압당하고 희생당하는 모습으로만 끝나게 되는데... 의선에게 해준 이야기에서는 이 검은 사슴이 죽어 웅덩이를 만들고 이 웅덩이에서 꽃이 핀다는 내용까지 나아간다.


그렇게 한강은 결국 핍박받고 억압받는 존재들, 고통에 몸부림치는 존재들이지만, 이들에게도 언젠가는 꽃을 피울 때가 있음을, 그 희망을 결코 놓지 말아야 함을 우리에게 말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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