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이 분다, 가라 - 제13회 동리문학상 수상작
한강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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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번에 읽힌다. 아니, 읽기 시작하면 끝까지 손에서 놓기가 힘들다. 한강 특유의 짧게짧게 툭툭 치며 나가는 문자들이, 그리고 결코 길지 않게 끊어놓은 단락들이, 마치 한 계단 한 계단 밟아올라가듯이, 또는 한 계단 한 계단 밟아내려가듯이 소설을 계속 나아가도록 한다.


추리를 하게 하는 면도 있지만, 사랑에 관한 면이 주를 이루고, 그 사랑이 육체적인 사랑보다는 서로의 존재를 그대로 받아들이는 사랑이라는 점에서, 드러내놓고 보여주지 않는 사랑이어서 더 아련한 사랑에 대한 소설이라고 할 수 있다.


중학교 때 만나게 된 두 친구 정희와 인주. 떨어져 있으면서도 결코 떨어져 있지 못한 친구 관계. 그런 친구들 중에 한 사람인 인주가 죽는다. 자살이라고 한다. 유고전도 열린다. 평전도 쓰인다. 그런데 유고전이나 평전을 쓰는 사람에게 또다른 친구는 짙은 의심을 지닌다.


인주는 결코 자살할 사람이 아니다. 그런데 자살이란다. 정희는 평전을 반박하기 위해 죽은 친구인 인주가 만났던 사람들을 찾아 나선다. 그 과정이 긴박하게 펼쳐지면서, 평전을 썼던 강석원이라는 인물과 쫓고 쫓기는 갈등 관계가 겹쳐진다. 여기에 인주 엄마에 대한 류인섭의 글에서 인주 죽음의 진실을 밝힐 단서들이 나타난다.


정희는 인주에 대해서 잘 알고 있다고 생각했지만, 과연 정희와 인주는 서로를 얼마나 알고 있었을까? 사실 나도 나를 모르는데, 남이 나를 안다고 할 수 없다는 말이있지 않나. 아무리 가까운 사이라고 해도 모르는 사실이 있다. 감추고 싶은 일들이 있다. 마음이 있다. 그럼에도 우리는 모두 안다고 착각하기도 한다.


이 소설에서 정희와 인주는 오랜 친구다. 서술자인 정희는 인주의 죽음이 석연치 않다고 여기고 인주 죽음의 진실을 찾아 다닌다. 그러다가 자신이 인주에 대해서 많이 몰랐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인주가 끝까지 정희에게 감추고 있었던 것들. 그것은 인주 엄마에 대한 이야기도 있지만, 정희에 대한 인주의 감정이다.


소설 초반부에 잠깐 인주가 정희에게 지닌 감정이 서술된다.


한 번, 꼭 한 번이었지. 갑자기 네가 내 얼굴을 끌어당기고 입술을 포갰지. 

나는 너무 놀라 네가 하는 대로 가만히 있었지. 

왜 그랬어, 라고 내가 묻자 너는 말했지. 

이해하고 싶어서.

나는 달아오른 뺨과 입술을 두 손으로 가리며 뒤로 물러나 앉았지. 열여덟 살이었지. 삼촌의 빈 작업실에서, 물건들을 정리하다가 갑자기, 네가 내 입술에 입 맞췄지. 그렇게 된 거였지. (24쪽)


이런 인주의 마음이 소설의 뒤에 가면 인주가 쓴 글을 통해서 한 번 더 나온다. 삼촌에게 독백하듯이 쓴 글에서.


왜 가끔 이렇게 오지 않았어? 아무 말 없이라도 나타나주지 않았어? 그랬다면 좀더 견디기 쉬웠을 텐데. 환멸을. 증오를. 고통을. 믿을 수 없을 만큼 망가진, 그 여자만큼이나 부서진 정희의 얼굴을. (373쪽)


인주는 정희를 사랑한다. 그렇다고 표현하지 않는다. 지켜볼 뿐이다. 정희가 살아가도록. 이런 인주의 마음을 정희는 알게 되는 걸까? 소설의 막바지에 불이 난 작업실에서 가까스로 빠져나오며 정희는 이렇게 외친다. '살고 싶다'


그렇다. 이 소설은 두 친구의 사랑에 관한 이야기이기도 하지만, '살아내야' 함을 말하는 소설이기도 하다. 우리는 살아야 한다. 어떤 고통 속에서도 죽음으로 회피하지 않고 살아서 겪어내야 한다. 


정희가 마지막에 하는 말은 바로 이 결심을 이야기한 것이고, 정희의 이 다짐으로 소설은 결말을 완결짓지 않고 더 생각하게 하는 여운을 남긴다.


결국 인주를 죽인 것은 누구인지 짐작은 하지만 확실하게 밝히지는 않기 때문에 인주의 죽음에 대한 진실이 밝혀질 것인가? 앞으로 정희는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 하는 점은 독자의 마음 속에, 머리 속에 남아 있다. 그 다음 이야기는 독자들이 써내려가면 된다.


이렇게 사랑 이야기로 읽어도 좋다. 그 사람의 고통까지도 사랑하는 관계. 그래서 어떤 말보다도 함께 있어주는 그런 관계. 충고도 조언도 없이 그냥 덤덤하게 함께 있어주는 인주. 그런 사랑의 이야기로 읽어도 좋다.


하지만 여기에 덧붙여 진실을 파헤치는 과정에서 겪는 어려움, 그리고 서서히 밝혀지는 진실을 이야기하는 소설로 읽어도 좋다. 서술자인 정희로 하여금 진실에 한발 다가가게 만드는 단서들을 읽으면서 함께 찾아가는 재미도 좋다.


또한 한강 소설에서 느낄 수 있는, 사회의 그늘이 개인의 아픔 속에 녹아들어 나오는 면을 찾아 읽어도 좋다. 권력을 통해서 진실을 왜곡하던 시대의 모습 (류인섭이 정희에게 쓴 편지글에서 이 점이 잘 드러난다), 가부장적인 사회의 모습(정희가 엄마를 도와 일하는 장면에서 남자 형제들은 등장하지 않는다) 등도 이 소설에서 찾아볼 수 있으니 말이다.


그럼에도 이 소설은 살아냄을 담은 소설이다. 힘든 시기를 거치며 자살을 시도하는 정희에게 살아야 함을 이야기하는 인주, 그리고 인주가 정희에게 하는 말들.


정희야

넌 아마 아주 오래 살 거야.

모든 걸 기억하면서.

지금보다 더 추위를 타면서.

백 살, 백이십 살씩 사는 할머니들 봐.

다 체형이 너 같아. (327쪽. 187쪽에도 비슷한 구절이 나온다)


그러면서 인주는 말한다. '난 말이야, 그렇게 늙어갈 거야.'(187쪽)라고. 이런 인주가 자살을 할 이유가 없다. 그러니 정희가 인주의 죽음에 얽힌 진실을 파헤치려는 것이다. 또한 정희는 오래 살아서 진실을 기억해야 하고.


이렇게 짧은 문장들이 마음을 톡톡 건드리면서 소설의 끝을 향해 가게 한다. 그 자체만으로도 읽을 만한 소설이다. 단숨에 읽을 수 있는 그런 소설이었다. 읽고 나서도 마음 속에 긴 여운이 남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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