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우리들의 잔을 (반양장) 문학과지성사 이청준 전집 5
이청준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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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청준 소설은 독백체가 간간이 드러나고 있어서, 작가가 소설 속에 인물을 빌려 자신의 말을 하고 있다는 느낌을 주는 경우가 많다.


여기에 약간 예스러운 문체도 소설을 읽을 때 완전히 몰입하기보다는 인물에게서 한 걸음 물러서게 만들기도 한다. 이 소설도 마찬가지다. 등장인물은 한진걸, 김상응(김의원), 안 선생, 노명식, 지윤희 그리고 무불 스님과 배경숙, 약혼녀 명순, 친구이자 처남이 될 경식이다. 이 중에 경식은 스쳐지나가고, 약혼자라고 하는 명순(명숙? 이 책에서 이 인물에 대한 이름이 명순과 명숙으로 뒤섞여 나온다. 337쪽. 466쪽.문학과지성사 하면 문학 작품으로는 전문적인 출판사인데, 이 소설에서 이런 실수가 곳곳에서 나오니) 역시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지 못한다.


그러니 여래암이라는 절에 머무르고 있는 사람들을 중심으로 이야기가 전개되고 있는데, 이야기를 전개하는 사람은 한진걸이다. 고시를 준비한다는, 세상을 다 아는 듯한 태도를 지닌 사람. 그러나 읽어갈수록 그에 대한 믿음은 떨어진다. 그는 자신이 다 안다고 생각하지만 읽는 사람은 그가 참 허랑방탕한 사람이라는 생각을 지니게 된다. 그러니 그가 하는 말이나 행동에 거리를 두게 된다. 이 거리두기를 통해서 이 소설이 그냥 남녀간의 사랑을 다룬 소설로 국한되지 않게 된다.


'이제 우리들의 잔을'이라는 제목이 무슨 뜻일까 궁금해 하면서 읽게 되는데, 이 말은 소설의 끝부분에 '이젠 나도 내 잔을 들어야 할 때가 온 듯싶으니까'(489쪽)이라는 말에서 어느 정도 짐작할 수 있다.


사람들은 각자 자신의 삶이 있다는 것, 남의 삶을 살피고, 남의 삶을 살려고 하기보다는 자신이 살아가야 할 삶을 살아가야 함을 이 말로 표현했다고 할 수 있다.


이렇게 되기까지 여래암 사람들에게 많은 일들이 일어나는데 김의원은 자살이라고 할 수 있는 죽음으로 자신의 정치 인생을 끝낸다. 그에게 이제 정치를 할 수 없는 상황은 죽음과 같다고 할 수 있지만, 이 죽음이 꼭 정치적 자살로는 읽히지 않는다. 


그것은 사촌여동생을 범한 노명식의 참회록에 나오는 장면과 비슷한 장면이 김의원이 죽을 때 나오기 때문이다. 물론 명확히 명시는 하지 않지만, 읽다보면 어린 시절 노명식의 장면과 나이 든 김의원의 장면이 겹치게 된다. 


그런 노명식이 신학교에 가서 참회를 계속 이어가고자 하는데, 이는 안 선생이 전직 신부였다고 하니 노명식이 안 선생의 잔을 물려받아 자신의 잔을 채우게 되는 셈이고, 안 선생은 무불 스님으로부터 머리를 깎고 여래암에 눌러앉아 자신의 잔을 채우고, 무불 스님은 불교 정치를 한다고 속세로 나아갔으니 김의원의 자리를 이어받아 잔을 채웠다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윤희는 무엇인가? 진걸로 하여금 여자들에게 지녔던 환상을 깨게 하는 인물이다. 자신이 만났던 여자들 그래프를 그려놓고 10번째 여인으로, 그래프를 완성시켜줄 여인으로 윤희를 생각했지만 윤희는 결코 진걸을 위해 자신을 희생하려 하는 여인이 아니다. 윤희에게도 자신의 잔이 있기 때문이다.


윤희를 만나기 전까지, 아니 윤희에 의해 깨지기 전까지 진걸은 여자들은 자신의 잔을 채울 수 있는 수단에 불과했다. (요즘 이런 태도를 지닌 남성은 마초라는 이름을 받을 수밖에 없을 테지만, 이 소설은 꽤 오래 전에 쓰여졌고, 이 소설 곳곳에서 나타나는 가부장적 요소를 지금 관점에서 비판하기는 그렇다고 본다. 당시 지배적인 사고방식이나 행동방식을 표현했다고 보면 된다. 물론 지금 관점에서 이 소설이 지닌 한계를 이야기하고 되풀이 되지 않도록 해야 하기는 하지만) 그러니 그래프를 그려놓고 하지. 하지만 윤희는 윤희만의 잔이 있기에 진걸의 잔을 채워주는 역할에 그치지 않는다. 그렇게 진걸은 자신의 잔이 뭔지도 제대로 모르면서 잔을 채우려고 했다고 할 수 있다.


시험에서 떨어지고 윤희에게서 완전히 자신의 처지를 알게 된 후 진걸은 여래암에 남아 있을 수가 없다. 그렇다고 고향으로 돌아가 아무 일 없던 것처럼 명순과 결혼할 수도 없다. 아직 그는 자신의 잔에 무엇을 채워야 할지, 자신의 잔이 무엇인지 명확히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작가 역시 끝을 맺지 않고 있다. 사실 진걸이 고향으로 돌아가 동네 사람들의 눈초리에도 불구하고 명순과 결혼에서 자신의 삶을 살아가고 있다고 하면 이는 너무도 뻔한 결말 아니겠는가. 그러니 작가는 이런 결말 대신 진걸이 무슨 일을 하는지 알려주지 않는 방향으로 결말을 맺는다.


다만, 우리는 짐작할 수 있다. 진걸은 자신의 잔을 찾고 있을 것이라고. 그 자신의 잔을 채우려 노력하고 있다고. 그렇게 생각하게 해주는 인물이 배경숙이다. 어려운 처지에 있지만 자신의 처지를 인정하고, 그 처지에서 할 수 있는 최대치를 하려고 하는 사람. 고통 속에서도 희망의 끈을 놓지 않고 있는 사람.


그래서 진걸은 배경숙을 이렇게 표현하고 있고, 우리는 진걸 역시 그런 삶을 살아가려고 하지 않을까 추측을 하게 된다.


  여자로서는 가장 절망적인 부끄러움을 지녔던 여자 - 육신의 결함 때문에 누구보다 많은 부끄러움을 견뎌야 하는 그녀의 굴욕과 슬픔 속에서 그 마지막 부끄러움만이라도 자기의 것으로 지키는 여자가 되겠노라며 산을 내려간 배경숙 - 진걸은 아직도 그녀의 후일만은 쉽게 떠올려볼 수가 없었다.

  그리고 그만큼 그녀의 후일이 궁금했다.

  배경숙 - 그녀는 아직도 자신의 부끄러움을 견디면서 그것을 그녀의 마지막 진실로 지니고 살아가는 여자일 수 있을까! 그리고 그 어둡고 아픈 삶을 아직도 어디서 부끄럽고 겸허하게 살아내고 있는 것일까!

  하지만 진걸은 이내 머리를 세차게 흔들었다.

  경숙의 아픔이나 부끄러움을 부인하려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불결스런 상상으로 하여 그녀의 순결한 삶(진걸에겐 그녀의 삶이 그렇게만 생각되고 있었다)을 욕보이게 하고 싶지가 않았기 때문이었다.

  배경숙의 아픔과 부끄러움에 비하여 자신의 그것은 오히려 당당하고 뻔뻔스러워지고 있을 듯싶었기 때문이었다. 그에겐 그 경숙에게서와 같이 부끄러움다운 부끄러움조차도 없을 듯싶어졌기 때문이었다. (476-477쪽)


이런 장면 때문에 진걸은 자신의 잔을 찾아 살아가려고 한다고 생각할 수 있다. 이 장면에서만이 진걸이 진실로 자신을 돌아보게 되기 때문이다. 앞으로도 진걸은 과거와는 달리 살아가게 되리라 믿을 수 있게 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진걸은 누구의 자리를 찾아갈까? 그건 누구라고 꼭 집어 말할 수 없다. 다만, 자신의 삶을 겸허하게 살아내는 삶을 살아갈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이렇게 이 소설은 진걸이라는 세상을 다 아는 듯이 젠체하는 사람의 시선과 행동을 통해 우리들의 삶을 돌아보게 하고, 내 삶을 살아야 한다는 생각을 하게 한다. 그것이 바로 '우리들의 잔을'이라는 말에 함축되어 있다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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