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캐넌의 세계 환상문학전집 5
어슐러 K. 르귄 지음, 이수현 옮김 / 황금가지 / 200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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르 귄의 소설을 다시 읽기 시작한다. 환상적인 배경을 통하고 있지만, 결코 환상적인 이야기가 아닌 소설.


[로캐넌의 세계]는 르 귄이 쓴 [바람의 열두 방향]이란 소설집에 실린 '샘레이의 목걸이'를 확장해서 쓴 소설이다. 이 소설에도 '샘레이의 목걸이'는 프롤로그에 목걸이란 제목으로 실려 있다. 이 이야기에서 시작해서 미지의 행성으로 찾아온 로캐넌이 펼치는 이야기가 바로 이 소설이다.


그는 샘레이를 만난 뒤에 미지의 행성을 탐험하기로 하고, 이 행성에 와서 지낸다. 지내던 어느날 행성 연합에 반란을 일으킨 세력이 그의 우주선을 파괴하고 동료들을 죽음에 이르게 한다. 그뿐만 아니라 그 행성에 살고 있는 종족들을 몰살하거나 노예로 삼는다. 가공할 만한 현대 무기를 앞세워서 평화롭게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을 죽이거나 쫓아내거나 노예로 삼는 행위.


로캐넌은 그런 행위를 이렇게 비판하고 있다.


'적어도 세 종 이상에, 모두 기술적으로 낮은 수준에 있는 이 행성의 고도 지성 생명체에 대해서는 모두 무시하거나 노예로 삼거나 절멸시키거나 중에 제일 편한 길을 택할 것이다. 침략자들에게는 기술만이 문제가 될 뿐이므로.' (68쪽)


이렇게 알려지지 않은 행성에 살고 있는 생명체들에 대한 존중은 없다. 함께 살아가려는 노력도 하지 않고 그들의 생활 방식을 알려고도 하지 않는다. 오로지 자신들의 기술력을 믿고 그들을 종속시키려 할 뿐이다.


이런 세력이 점점 많아지면 평화란 없다. 오로지 전쟁뿐이다. 그렇게 행성 연맹은 해체되어 가기 시작한다. 그런 해체를 로캐넌의 세계에서 보여주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이 행성에 대한 침입에 대항하기 위해 로캐넌은 영주인 모지언과 그 수행원들과 함께 침략자들의 기지를 찾아 여행을 떠난다. 이 소설은 그런 모험담이기도 하지만, 이들이 긴 여정을 떠나면서 만나게 되는 일들이 바로 우리가 모르는 세계나 사람들과 처음 만났을 때 어떤 위험이나 또는 어떤 환대를 받게 되는지를 잘 보여주고 있다.


우여곡절 끝에 기지를 찾아내지만, 이미 깨지기 시작한 행성 연맹의 평화가 지속되리라고는 생각할 수가 없다. 로캐넌은 돌아갈 곳이 없다. 이 행성에 머무르기로 한다. 그리고 그는 자신의 이름을 지닌 별을 지니게 된다.


이름, 막대한 기술력을 지닌 존재들은 무엇에든 자신들이 알 수 있는 이름을 붙이려든다. 이 이름이 기존 사회와 갈등을 일으키든, 기존 사회에 필요가 없든 상관이 없다. 그러니 소설의 끝부분에서 이 행성에 '로캐넌'이라는 이름을 붙였다는 서술은 평화로운 공존이 이루어지는 행성 연맹이 아니라는 사실을 의미한다. 로캐넌은 의도하지 않았겠지만, 이 역시 강자의 이름짓기에 불과하다. 그 행성을 자신들의 체계 속으로 끌어들이는.


사실 '아메리카'라는 이름도 그 대륙에 살던 원주민들이 붙인 이름이 아니지 않은가. 그러니 그들이 부르던 이름으로 그곳을 지칭할 수도 있어야 하는데, 힘이 있는 자들의 언어로 이름을 붙이는 일들... 결국 이름은 권력이다.


이름은 존재를 자신에게 가져오는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소설에서 로캐넌은 이 말이 우리에게 이름의 의미를 생각하게 한다.


'나는 이 땅에서 새로운 나무를 보고 네게, 혹은 너는 잘 대답해 주지 않으니까 야한이나 모지언에게 나무 이름이 뭐냐고 물어보지. 이름을 알기 전에는 마음이 불편하거든.' (169쪽)


이렇게 이 소설을 읽으며 압도적인 기술력을 발휘하는 외계에 대항하는 이 행성의 사람들, 특히 날아다니는 말을 타고 다니는(그리폰의 후예라고 하나?) 그들의 모습에서 영화 '아바타'를 연상하게 된다.


이 영화 역시 [로캐넌의 세계]와 비슷한 세계관을 지니고 있다는 생각을 하고, 외부에서 온 존재로 인해서 위기를 벗어나고, 그 외계 인물이 아바타들의 세계에 동화되는 모습이 바로 그렇다. 이렇게 보면 또 다른 문명에 대한 침탈과 그에 대항하는 사람이야기는 영화 '늑대와 춤을'에서도 볼 수 있다.


아메리카 대륙에 이미 살고 있던 원주민들을 이주민들이 어떻게 몰아냈는지를 생각해 보면, 이 소설은 새로운 세계에 도달한 이주민들이 그 세계를 어떻게 파괴해 왔는지를, 그것이 얼마나 잘못되었는지를 깨닫게 한다.


르 귄이 쓴 이 소설 [로캐넌의 세계]는 우리가 낯선 곳에서 낯선 존재를 만났을 때 그들과 어떻게 지내야 하는지를 생각하게 해주고 있다. 먼 미래의 이야기도, 실현 불가능한 공상 속 우주 이야기도 아닌, 바로 지금 우리 삶에서 우리들이 지녀야 할 삶의 자세를 생각하게 해주는 그런 소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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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성어 서점 마음산책 짧은 소설
김초엽 지음, 최인호 그림 / 마음산책 / 202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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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초엽이 쓴 짧은 소설이다. 한편 한편이 독립되어 있지만 읽다보면 서로 연결되는 소설도 있다. 물론 우리가 흔히 리얼리즘이라 부르는 소설과는 거리가 있다. 김초엽은 다양한 상황, 우리가 상상할 수 있는 상황과 과학기술이 발달하는 과정에서 일어날 수 있음직한 상황들을 창조해 내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런 상황을 통해서 현재 우리 삶을 바라볼 수 있게 된다.


많은 작품이 실려 있지만, 외계(인)를 다룬 소설들이 제법 있다. 외계인 하면 괴물을 연상하고, 그들이 지구를 침략하는 상황을 생각했던 과거 소설이나 영화에서 요즘은 더 나아가 외계 존재들과 공생하는 모습의 작품들이 많이 창작되고 있다.


그만큼 인간들의 사고 방식이 유연해졌다고 할 수 있고, 외계 존재와 공생하는 방식을 택해야만 한다는 생각이 자리잡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이 소설에서도 마찬가지다. 인류의 삶을 파괴하는 외계 생명체도 나오지만, 인류와 더불어 살아가는 외계 생명체들에 대한 이야기가 더 많다. 지구촌이라는 개념을 더 넓히면 우주촌이 되기 때문에, 어차피 우주 존재들과 공생해야 하는 미래가 우리에게 있다고 생각하면 당연한 일이다.


이 소설집에는 인공지능로봇도, 클론도, 외계인도 나온다. 그럼에도 이들은 지구에서 함께 살아간다. 저마다의 방식으로. 어떨 때는 외계 생물체가 지구를 잠식해 지구인들이 살아가기 힘든 상황에 처하는 상황도 그려지지만, 그럼에도 그 상황에서도 외계 생물과 공존하는 사람들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즉, 일방적인 침략을 생각하지 않는다. 어떤 어려운 환경에서도 함께 공존하는 모습을 그림으로써 김초엽은 우리 사회가 다양성과 함께 살아가야 함을 보여주고 있는지도 모른다.


다름을 차별로 인식하고 행동해서는 안 된다는 것. 자신만이 아니라 다른 존재도 껴안을 수 있어야 한다고, 작가는 말하고 있는 듯하다.


'선인장 끌어안기'라는 소설에서 외부와 접촉을 하면 고통을 받는 특이한 신체를 지닌 사람 이야기. 그럼에도 그는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서 껴안기를 한다. 그렇게 고통을 받아들이는 모습, 어쩌면 고통 속에서 사랑을 깨닫는 모습을 통해서, 우리들 삶을 돌아보게 된다.


고통을 마냥 회피하기만 해서는 안 된다고, 그 고통도 자신으로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한다고... 이런 내용을 '오염 구역'이란 소설에서도 만날 수 있다. 외계 생명체로 인해 지구 환경이 파괴되고 사람들이 살아갈 수 없게 되지만, 한 오지에서 사람들이 미치지 않고 살아가고 있다는 보고를 받고 간 파견원 이야기.


그곳 사람들은 외계 생명체와 공생하는 법을 익혔다. 몸에 버섯이 돋아나고 그 버섯을 먹으면 살아갈 수 있다는 사실을 알고 그렇게 살아가는 사람들. 비록 그것이 보기 흉하고, 자신들에게 고통을 줄지라도 그들은 미치기보다는 그렇게 외계 생명체와 함께 살아가는 방식을 선택했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우리에게 고통을 주지 않는 관계만을 맺고 살 수 있을까? 누군가에게 상처를 받고, 또 누군가에게 상처를 주면서 살아가고 있지 않나. 그럼에도 그 상처와 더불어 함께 살아가는 법을 익혔기에, 지금까지 사회생활을 할 수 있었다고 생각하면, 이 소설에 나오는 외계 생명체가 주는 고통을 그렇게 생각해 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한다.


이 소설집에서는 과학기술의 발달도 예전 삶의 방식들이 사라져 가는 모습과 그것을 지키려는 소수의 모습도 보이도 있는데 제목이 된 '행성어 서점'이 그렇다. 우주의 모든 언어가 번역될 수 있는 시대에, 번역이 안 되는 책을 파는 서점. 


관광지가 되어 자신들은 읽지 못하지만 멋으로 책을 사가는 사람들. 그런데 어느날 그 책들을 읽을 수 있는 사람이 나타난다. 그래, 이것이 바로 인간이다. 모든 것이 다 과학기술로 대체되기도 하지만 그럼에도 사람들이 스스로 하고자 하는 일이 있다. 


책을 읽는 일도 어쩌면 이런 일이 속할지도 모른다. 이제는 책 읽어주는 로봇도 나올테고, 번역을 통해서 다른 나라들의 언어를 공부하지 않아도 소통이 되는 시대가 되겠지만, 그럼에도 힘들게 언어를 배워서 그 나라, 다른 언어로 쓰인 책을 읽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책 읽은 행위도 하나로 통일될 수 없다. 책 읽는 방법도 사람마다 다를 수밖에 없다. 그 다양성이 바로 인류를 풍요롭게 하는 요소일지도 모르고, 우리는 그런 다양성의 이로운 점을 잊고 획일화로 치닫고 있는지도 모른다.


이와 비슷하다고 느낀 소설이 '포착되지 않는 풍경'이란 소설이다. 사진으로 찍을 수 없는 광경. 사진을 찍어도 사진이 제대로 나오지 않는 그런 현상. 사진가는 어딘가에서 가장 구식의 아날로그 사진기를 구해서 찍어야 하나 하는 생각을 하지만, 다른 사람들도 있다. 그들은 그 풍경을 그림으로 그리거나 글로 표현해내려 한다. 이렇게 자기만의 방식으로 풍경을 기억하려 하는 사람들이 모습을 그린 소설이 이 소설이다.


이 소설집을 통해 바로 다양한 삶이 있음을 생각하게 된다. 그 다양한 삶들을 서로 인정하고 함께 살아가야 한다는 생각도 하게 하고. 소설집은 두 부분으로 나누어 소설을 '서로에게 닿지 않도록 조심하면서'에서는 8편의 소설을, '다른 방식의 삶이 있음을'에서는 6편의 소설을 싣고 있다.


이렇게 나눈 부분을 이어보면 '서로에게 닿지 않도록 조심하면서 다른 방식의 삶이 있음을' 알고 함께 살아가자가 된다.


닿지 않는다는 말이 관계를 맺지 않는다는 말이 아니라, 상대를 나와 동일하게 생각하고 행동하지 않고 다른 존재임을 인정한다는, 즉 다른 방식의 삶이 있음을 인정한다는 말이 된다.


그렇게 우리는 다른 존재들과 함께 살아가야 한다. 짧은 분량이지만 내용은 결코 짧지 않는 소설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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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없는 자들의 도시
주제 사라마구 지음, 송필환 옮김 / 해냄 / 2008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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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라마구 소설 '~도시' 연작을 읽고 있는 중. 앞선 눈먼 자들의 도시와 눈뜬 자들의 도시가 경악, 공포를 불러일으켰다면, 이 소설은 그에 비해서는 차분하다는 인상을 준다.


그런데 그 차분함이 어쩌면 이름 없는 자들의 도시라는 제목에 맞는다는 생각이 든다. 이름 없는 자들의 도시가 무엇일까 생각해 보면서 읽는데, 내용은 단순하다. 등기소 직원인 주제 씨가 한 여인의 기록을 보게 된다. 그리고 그 여인을 추적하는 과정이 소설의 전부다.


왜 추적하는지, 무엇을 알려고 하는지도 잘 밝혀지지 않는다. 단순한 호기심이라고 할 수도 있지만, 소설을 통해서 우리는 그 여인의 이름을 끝까지 알 수 없게 된다. 아니 이 소설에서는 이름을 지닌 사람으로는 주인공이라 할 수 있는 주제 씨밖에는 없다. 다른 사람들은 거주지에 따라서 또는 직급에 따라서 불리고 있을 뿐이다. 이렇듯 이 소설에선 이름을 지닌 인물이 거의 없다. 그냥 이름 없이 살아갈 뿐이다. 아니, 이름이 있는데도 이름으로 불리지 못한다. 


그런 극단적인 예가 바로 주제 씨가 관심을 갖고 있는 여인이다. 그녀가 자살을 해서 공동묘지로 갔는데도 이름보다는 번호만이 남게 된다. 그것도 바뀐 번호로. 그렇다면 이름은 무엇일까? 정체성일까? 관계를 맺는 기초일까? 친근한 사람들끼리 이름을 부르면서 관계를 맺어가는데, 이름 없는 자라는 이야기는 관계 맺기가 안 된 사람이라는 뜻이 되지 않을까.


여기서 김춘수의 '꽃'이란 시를 떠올릴 수 있다. 이름을 부르기 전까지는 나에게는 관계가 없는 존재일 뿐. 사람들 관계도 마찬가지 아닐까? 사회 생활을 하면서 맺는 관계에서는 이름보다는 직급이나 다른 호칭으로 불릴 수도 있지만, 사적인 관계, 친밀한 관계가 되려면 서로의 이름을 불러야 하지 않나. 이름으로 불리지 않는 사람들과의 관계는 형식적인 관계일 수밖에 없다.


여자는 주제 씨에게 기록으로 다가오지만, 그 기록을 우리는 알 수 없다. 여자가 다녔던 학교, 직장까지 찾아가지만 그것이 전부다. 왜 그녀가 자살을 했는지, 어떤 삶을 살았는지는 알 수가 없다. 당연하다. 이름 없는 자들의 도시이기 때문이다. 


현대인들의 삶을 보여주고 있다는 생각이 드는데, 지금 대도시에서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은 바로 이렇게 이름 없는 자들의 도시에서 살아가고 있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든다.


그냥 기록으로만 남아 있고, 그 기록이 진실을 담고 있는지를 알 수 없는 그런 세상. 그러기에 사라마구의 이 소설은 익명으로 살아가는 현대인들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우리는 어떤 관계를 맺고 살고 있을까를 생각하게 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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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뜬 자들의 도시 (리커버 에디션)
주제 사라마구 지음, 정영목 옮김 / 해냄 / 202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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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격, 경악, 두려움.


이 소설을 읽은 느낌을 세 단어로 표현하면 이렇다. 긍정적인 단어들이 나와야 하는데, 제목이 '눈먼 자들의 도시'가 아니라 '눈뜬 자들의 도시' 아닌가.


눈을 떴다는 이야기는 이성적이고 합리적으로 생각하고 행동하는, 정치로 따지면 민주주의를 이룩한 사회를 만들어가는 사람들 이야기 아닌가.


그래서 불의를 참지 못하고, 부패에 저항하며, 독재 정권을 용납하지 못하는 그런 사회를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는 도시가 바로 '눈뜬 자들의 도시' 아닌가.


그런 기대를 하고 읽게 되고, 소설 전반부에서는 그런 기대를 충족시키고 있다. 그럼 그렇지. 부패한 정권, 독재 정권에 저항하는 평화적인 방법. 도시 사람들은 백지 투표를 한다. 두 차례에 걸친 선거에서 처음에는 70% 정도가 백지 투표를 했다면(투표를 하러 나왔지만 어느 정당에도 기표를 하지 않고 투표 용지를 제출하는 상태) 두 번째 선거에서는 이보다 더 나아가 80%이상이 백지 투표를 한다.


정권을 잡고 있는 우익 정당에게도, 그를 뒤쫓고 있는 중도 정당에게도, 그렇다고 변화를 주장하는 좌익 정당에게도 유의미한 표를 주지 않는다. 그것은 그만큼 그들이 기성 정치를 불신하고 있다는 이야기가 된다.


이대로는 안 된다. 바꿔야 한다고 우리가 촛불을 들었듯이 소설에서는 선거에서 백지를 냄으로써 자신들의 의사를 표현한다. 누구랄 것도 없도 선동자도 없이 그렇게 백지를 내자 정부는 당황한다.


여기서부터 소설은 시작된다. 이 사태를 어떻게 해결할까? 민주적인 정부라면 이는 시민들의 불신이라고 생각하고 내각 총사퇴를 할 것이다. 정치 개혁을 하려 할 것이다. 하지만 소설에서는 그렇게 하지 않는다. 이들은 정권을 내줄 생각이 전혀 없다. 시민들 가운데 약 500명 정도를 잡아간다. 그리고 그들에게 백지 투표를 했냐고 묻는다.


이 물음 자체가 이미 독재 정권임을 암시하고 있다. 현대 투표는 비밀 투표이기 때문에 누가 어느 정당에 투표를 했는지 물을 권리가 없다. 시민들은 그렇게 헌법에 기초해서 또 상식에 기초해서 대답한다. 아무것도 얻어낼 수 없자 정권이 시도하는 일은 우리가 잘 알고 이는 고문이다. 말로는 고문이 아니라고 하지만 격리시킨 다음에 나오는 행동은 뻔하다.


 (우리나라 엄혹했던 시절, 고문이 일상이던 시절을 굳이 떠올리지 않아도 이 소설에서 암시하고 있는 방법들, 그 장면들은 생생하게 떠오른다)


답이 나오지 않자 정부는 수도를 이전한다. 백지 투표가 수도에서 이루어졌기 때문에... 그리고 도시를 봉쇄한다. 누구도 들어오고 나가지 못하도록.


(기시감이 느껴질 대목이다. 광주민주화 운동 당시 계엄군이 했던 행동이 떠오르는데, 설마 사라마구가 우리나라 사례를 알고 소설에 도입하지는 않았겠지)


이때 수도의 시장이 한 행동이 민주주의가 아직 죽지 않았음을 알린다. 수도 전철역에서 폭탄 테러가 발생한다. 정부가 수도를 이전하고, 정부 관료, 경찰관들을 모두 철수시켰을 때 치안 걱정을 했지만, 도시는 예상 밖으로 잘 돌아간다. 여기에 당황한 정부에서 할 수 있는 방법. 혼란을 일으키는 일. 이를 간파한 시장은 시장직을 사임한다. 그에게는 시민들이 더 중요했던 것.


이때 한 통의 편지가 온다. (사실 세 통의 편지다. 대통령, 총리, 내무부 장관에게 온 같은 내용의 편지) 모두가 눈 멀었을 때 눈 뜬 여자가 있었다고, 이번 백지 투표 사태와 그 여자가 관련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내용의. 상황을 반전시킬 기회를 잡았다고 정부는 판단한다.


이에 내무부 장관은 경찰 세 명을 파견한다. 진상을 조사하고 여자를 체포하라고. 하지만 도시에 들어온 경찰 중 지도자인 경정은 여자가 무죄임을 알게 된다. 확신한다. 그리고 정부가 그 여자를 백지 투표의 주범으로 몰아가 자신들 정권을 안정을 꾀하려 함을 간파한다.


그에게는 두 가지 선택지가 있다. 그냥 자신의 양심을 묻어두고 명령대로 할지, 아니면 양심에 따라 행동할지. 사라마구는 여기에서 낙관적으로 보이는 서술을 한다. 경정은 양심에 따라 행동한다. 언론에 그동안 자신이 한 일을 폭록한다. 물론 여자에게도 자신의 임무를 알리고.


언론에서는 이 일을 검열을 피해 교묘하게 발표하고 (꼭 남의 나라 일 같지가 않다. 보도지침이라는 언론통제 제도가 있던 나라가 우리나라 아니던가) 사람들은 그 신문이 발행정지가 되어도 기사를 복사해서 서로 알린다.


이제는 경정이 남았다. 진실을 폭로한 사람. 어떻게 될까? 제목이 '눈 뜬 자들의 도시'라서 희망을 보여주는 결말을 예상하고 있었는데, 안심하고 있는 순간, 경정은 죽임을 당한다. 그렇다. 정권의 비리를 폭로한 내부자는 살아남을 수 없다. (박정희 정권 때 중앙정보부장을 했던 김형욱을 생각해 보라. 그의 죽음을) 이렇게 하고 소설이 끝났으면 좋았으련만.


'눈먼 자들의 도시'와 연결되는 장면들이 이 소설에 나오는데, 사람들이 갑자기 눈이 멀었던 시기에서 4년 뒤가 바로 이 소설의 배경이다. 그리고 유일하게 눈을 떴던 사람이 나오고... 그때에 유일하게 눈을 뜰 수 있었던 사람, 그 사람은 진실을 알고 있는 사람이다.


자, 4년 뒤 정권은 진실을 감추려고 하고 있다. 그렇다면 진실을 알고 있는 사람이나 진실을 폭로할 수 있는 사람은 어떻게 되어야 하나? 경정의 말에서 결말을 추측할 수 있다.


내가 이 일을 하면서 배운 바로는 정부에 있는 사람들은 우리가 말도 안 된다고 판단하는 것 앞에서 결코 물러서지 않고, 외려 그런 말도 안 되는 것을 이용해서 양심을 무디게 하고 이성을 파괴하오. (377쪽-2009년 초판 10쇄)


결말은 이야기 하지 않겠다. 다만, 정권 내에서도 치열한 권력 다툼이 벌어진다는 사실은 언급하고 넘어가야겠다. 그들은 권력을 나눌 생각을 하지 않는다. 언제든지 상대를 걸어서 넘어뜨리려 한다. 그리고 넘어뜨린다. 그래야 자신이 살아남을 수 있다고 여긴다. 이게 권력의 속성이다. 이런 권력의 속성을 잘 드러내는 인물이 바로 소설 속 총리다. 그 총리는 소설 속 인물만이 아니라 독재 정권이 이뤄지고 있는 나라에서 흔히 찾아볼 수 있는 인물이다. 권모술수에 능한 사람이라는 말로 통칭할 수 있는 그런 인물들.


(총리가 장관들을 해임하고 법무부와 내무부 장관을 겸임하는 과정이 이 소설 속에 나오는데, 와 이거 완전 전두환이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보안사령관과 중앙정보부장을 함께 맡아 군과 민간의 정보권력을 장악했던 그를. 사라마구 소설이 우리나라 현실을 빗대어 썼나 싶은 생각이 드는 장면이기도 한데, 이런 일은 권력을 추구하는 인간들에게서 흔히 나타나는 현상이라고 파악할 수 있다)


사라마구는 우리에게 근거없는 희망을 지니지 말라고 말하는 듯하다. 민주주의는 그냥 유지되지 않는다고. 권력집단은 그리 호락호락하지 않다고. 그들을 제대로 감시하고 통제하지 못하면 다시 '눈먼 자들'로 돌아갈 수밖에 없다고.


그래서 소설 결말에 다시 눈 먼 사람들이 등장하여 말을 하면서 소설을 끝맺는다. 권력을 제대로 감시, 통제하지 못했을 때 그렇게 우리는 눈 먼 자들이 될 수밖에 없고, 우리에게 조심하라고 경각심을 주는 존재를 잃으면서도 그것을 아쉬워하지 않게 된다고 하는 듯하다.


누가 환상적 리얼리즘이라고 했나. 이 소설은 리얼리즘이다. 그냥 우리 현실에서 너무도 잘 볼 수 있는 면들이다. 그것을 사라마구는 소설을 통해서 우리 눈 앞에 들이밀 뿐이다. 이래도 보지 않겠냐고, 이래도 눈 감고 있겠냐고. 계속 눈 감고 있으면 이렇게 된다고. 눈을 뜨고 있어도 권력은 이토록 보이지 않으면서도 치밀하고 집요하게 우리를 감시하고 괴롭히고 있다고.


우리도 곧 선거가 다가온다. 선거에 참여하기 전에 이 소설을 먼저 읽었으면 좋겠다. 우리 국민 모두가. 정말로 '눈먼 자들'이 되지 않고 '눈뜬 자들'이 되기 위해서. 우리 눈을 부릅뜨고 지켜봐야 한다. 그것이 민주주의다. 사라마구는 이 소설을 통해 이 말을 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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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감 2022-02-14 16:4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눈먼자들의도시는 재밌게 읽었는데 속편은 이상하게 손이 안가 안읽었어요. 근데 리뷰보니까 전편하고는 전혀 다른 분위기 같네요. 이 책도 속편이 더 있는 거 같던데 다 읽는게 나으려나요?^^

kinye91 2022-02-14 16:59   좋아요 1 | URL
눈먼 자들의 도시, 눈뜬 자들의 도시, 이름 없는 자들의 도시 이렇게 세 편을 읽었는데, 제 생각으로는 눈뜬 자들의 도시는 재미있었는데, 이름없는 자들의 도시는 좀 그랬어요.
 
희랍어 시간
한강 지음 / 문학동네 / 201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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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랍어' 


한자어로 적혀 있으면 어느 나라 말인지 알기 힘들다. 사실 한자로 나라 이름을 적었던 시기는 지금으로부터 오래 전이었으니...


독일을 덕국으로, 프랑스를 법국으로 불렀던 시대, 희랍은 그리스다. 그러므로 희랍어는 그리스어다. 우리와는 관계가 없을 언어라고 생각하는데, 요즘 코로나19로 인해서 희랍어를 조금씩 만나게 된다. 변이 바이러스들의 이름을 그리스어 알파벳의 순서대로 붙이고 있다고 하니.


이런 것을 떠나서 희랍어는 우리와 상관없는 언어다. 우리가 플라톤이나 아리스토텔레스의 저작을 희랍어로 읽으려고 하는 경우가 얼마나 있겠는가? 그리스 문학을 전공하거나, 그리스에 관심을 가져 그 나라와 교류를 하려고 하는 사람이 아닌 경우, 또는 특별한 학문적(언어적) 호기심으로 배우는 사람을 제외하고는.


소설 제목이 희랍어 시간이다. 생소한 언어를 배우는 시간이 소설 제목이다. 그렇다면 이 소설은 생소한 이야기여야 한다. 우리와는 결이 다른 사람들 이야기.


두 축으로 이야기는 전개된다. 한강 소설이 보여주는 특징이라고 할 수 있는 서술자가 교차되어 바뀌는 경우가 많은데, 이 소설에서는 희랍어를 가르치는 강사인 남자와 희랍어를 배우는 학생인 여자가 서술자가 된다.


남자는 점차 시력을 잃어간다. 그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그는 시력이 나빠지고, 안경을 쓰고도 잘 보지 못할 정도의 시력이다. 조금 더 시간이 지나면 완전히 시력을 잃을 수 있는 상태. 그는 외부로부터 오는 시각적 정보를 받아들일 수 없는 상태가 된다.


즉 외부의 세계와 어느 정도는 단절이 된다고 볼 수 있는데, 이것은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가 닫혀간다는 의미가 된다. 


여자는 말을 하지 못하게 된다. 의식적이 아니라 어느 순간 말이 자신에게서 사라진다. 눈이 외부의 자극을 받아들이는 역할을 한다면, 말은 내면에 있는 것들을 밖으로 표출하는 역할을 하는데, 말을 할 수 없는 상태는 자신의 내면을 다른 사람에게 표현하지 못한다는 얘기다. 물론 글을 쓰면 되지만, 순간순간 이루어지는 대화의 장에서 글로 의사소통하기는 힘드니, 소통의 창구가 어느 정도 닫혔다고 보면 된다.


이렇듯 남자와 여자 모두 관계가 단절되는 상태에 이르게 된다. 이런 상황이 소설 속에서는 여자의 말을 빌려 이렇게 표현되고 있다.


  시선만큼 즉각적이고 직관적인 접촉의 방법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그녀는 느꼈다. 접촉하지 않으면서 접촉할 수 있는 거의 유일한 방법이었다.

  그에 비하면 언어는 수십 배 육체적인 접촉이었다. 폐와 목구멍과 혀와 입술을 움직여, 공기를 흔들어 상대에게 날아간다. 혀가 마르고 침이 튀고 입술이 갈라진다. (55쪽)


이 표현을 보면 남자도 여자도 접촉할 수 있는 방법을 잃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둘은 모두 사회에서 접촉을 잃어가는 존재라고 할 수 있다. 이런 존재를 잃어가는 사람들이 희랍어라는 낯선 언어로 만나게 된다.


접촉을 잃어간다는 공통점. 그 다음에는 무엇이 올까? 낯섬을 통해서 익숙함의 세계로 갈 수 있을까? 그것이 쉽지 않음을, 여자와 가장 가까운 관계라고 할 수 있는 아들과의 만남 장면에서 추측할 수가 있다.


'그녀가 붙들려고, 팔을 붙들려고, 손을 잡으려고 하자 물고기처럼 재빨리 빠져나간, 지느러미처럼 부드러운 살갗을 모른다.' (183쪽)


아들마저도 이렇게 그녀를 떠나가는데, 남자가 알 수는 없겠다. 이는 보거나 말로 듣거나 해야 하는데 여자는 남자에게 말을 하지 않으니 말이다. 그렇지만 묘하게 한강 소설은 그렇게 끝나지 않을 것 같은 여운을 남긴다. 


제목이 희랍어 시간 아닌가. 낯선 언어를 배우는 시간. 왜 낯선 언어를 배우는가? 바로 찬섬을 통해서 자신이 겪는 일들을 벗어날 수 있다는 희망이 있기 때문 아닌가. 그리고 남자 역시 자신과 비슷한 절망을 안고 사는 사람이고.


그렇기에 한강이 다른 소설들에서 절망의 끝자락에 서 있다고 하지만, 거기서 한발 더 나아가려는 인물들을 만들어냈듯이. 세상을 그렇게 살아가야 한다는 듯이 이 소설 역시 절망으로 어둠 속에서 끝나지 않는다는 생각을 하게 한다.


'마침내 첫 음절을 발음하는 순간, 힘주어 눈을 감았다 뜬다.

눈을 뜨면 모든 것이 사라져 있을 것을 각오하듯이.' (191쪽)


이렇게 쓰인 이 소설의 마지막에서 그렇게 되겠다는 진한 여운을 느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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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02-12 11:24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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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02-12 12:08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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