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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뜬 자들의 도시 (리커버 에디션)
주제 사라마구 지음, 정영목 옮김 / 해냄 / 2020년 12월
평점 :
구판절판
충격, 경악, 두려움.
이 소설을 읽은 느낌을 세 단어로 표현하면 이렇다. 긍정적인 단어들이 나와야 하는데, 제목이 '눈먼 자들의 도시'가 아니라 '눈뜬 자들의 도시' 아닌가.
눈을 떴다는 이야기는 이성적이고 합리적으로 생각하고 행동하는, 정치로 따지면 민주주의를 이룩한 사회를 만들어가는 사람들 이야기 아닌가.
그래서 불의를 참지 못하고, 부패에 저항하며, 독재 정권을 용납하지 못하는 그런 사회를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는 도시가 바로 '눈뜬 자들의 도시' 아닌가.
그런 기대를 하고 읽게 되고, 소설 전반부에서는 그런 기대를 충족시키고 있다. 그럼 그렇지. 부패한 정권, 독재 정권에 저항하는 평화적인 방법. 도시 사람들은 백지 투표를 한다. 두 차례에 걸친 선거에서 처음에는 70% 정도가 백지 투표를 했다면(투표를 하러 나왔지만 어느 정당에도 기표를 하지 않고 투표 용지를 제출하는 상태) 두 번째 선거에서는 이보다 더 나아가 80%이상이 백지 투표를 한다.
정권을 잡고 있는 우익 정당에게도, 그를 뒤쫓고 있는 중도 정당에게도, 그렇다고 변화를 주장하는 좌익 정당에게도 유의미한 표를 주지 않는다. 그것은 그만큼 그들이 기성 정치를 불신하고 있다는 이야기가 된다.
이대로는 안 된다. 바꿔야 한다고 우리가 촛불을 들었듯이 소설에서는 선거에서 백지를 냄으로써 자신들의 의사를 표현한다. 누구랄 것도 없도 선동자도 없이 그렇게 백지를 내자 정부는 당황한다.
여기서부터 소설은 시작된다. 이 사태를 어떻게 해결할까? 민주적인 정부라면 이는 시민들의 불신이라고 생각하고 내각 총사퇴를 할 것이다. 정치 개혁을 하려 할 것이다. 하지만 소설에서는 그렇게 하지 않는다. 이들은 정권을 내줄 생각이 전혀 없다. 시민들 가운데 약 500명 정도를 잡아간다. 그리고 그들에게 백지 투표를 했냐고 묻는다.
이 물음 자체가 이미 독재 정권임을 암시하고 있다. 현대 투표는 비밀 투표이기 때문에 누가 어느 정당에 투표를 했는지 물을 권리가 없다. 시민들은 그렇게 헌법에 기초해서 또 상식에 기초해서 대답한다. 아무것도 얻어낼 수 없자 정권이 시도하는 일은 우리가 잘 알고 이는 고문이다. 말로는 고문이 아니라고 하지만 격리시킨 다음에 나오는 행동은 뻔하다.
(우리나라 엄혹했던 시절, 고문이 일상이던 시절을 굳이 떠올리지 않아도 이 소설에서 암시하고 있는 방법들, 그 장면들은 생생하게 떠오른다)
답이 나오지 않자 정부는 수도를 이전한다. 백지 투표가 수도에서 이루어졌기 때문에... 그리고 도시를 봉쇄한다. 누구도 들어오고 나가지 못하도록.
(기시감이 느껴질 대목이다. 광주민주화 운동 당시 계엄군이 했던 행동이 떠오르는데, 설마 사라마구가 우리나라 사례를 알고 소설에 도입하지는 않았겠지)
이때 수도의 시장이 한 행동이 민주주의가 아직 죽지 않았음을 알린다. 수도 전철역에서 폭탄 테러가 발생한다. 정부가 수도를 이전하고, 정부 관료, 경찰관들을 모두 철수시켰을 때 치안 걱정을 했지만, 도시는 예상 밖으로 잘 돌아간다. 여기에 당황한 정부에서 할 수 있는 방법. 혼란을 일으키는 일. 이를 간파한 시장은 시장직을 사임한다. 그에게는 시민들이 더 중요했던 것.
이때 한 통의 편지가 온다. (사실 세 통의 편지다. 대통령, 총리, 내무부 장관에게 온 같은 내용의 편지) 모두가 눈 멀었을 때 눈 뜬 여자가 있었다고, 이번 백지 투표 사태와 그 여자가 관련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내용의. 상황을 반전시킬 기회를 잡았다고 정부는 판단한다.
이에 내무부 장관은 경찰 세 명을 파견한다. 진상을 조사하고 여자를 체포하라고. 하지만 도시에 들어온 경찰 중 지도자인 경정은 여자가 무죄임을 알게 된다. 확신한다. 그리고 정부가 그 여자를 백지 투표의 주범으로 몰아가 자신들 정권을 안정을 꾀하려 함을 간파한다.
그에게는 두 가지 선택지가 있다. 그냥 자신의 양심을 묻어두고 명령대로 할지, 아니면 양심에 따라 행동할지. 사라마구는 여기에서 낙관적으로 보이는 서술을 한다. 경정은 양심에 따라 행동한다. 언론에 그동안 자신이 한 일을 폭록한다. 물론 여자에게도 자신의 임무를 알리고.
언론에서는 이 일을 검열을 피해 교묘하게 발표하고 (꼭 남의 나라 일 같지가 않다. 보도지침이라는 언론통제 제도가 있던 나라가 우리나라 아니던가) 사람들은 그 신문이 발행정지가 되어도 기사를 복사해서 서로 알린다.
이제는 경정이 남았다. 진실을 폭로한 사람. 어떻게 될까? 제목이 '눈 뜬 자들의 도시'라서 희망을 보여주는 결말을 예상하고 있었는데, 안심하고 있는 순간, 경정은 죽임을 당한다. 그렇다. 정권의 비리를 폭로한 내부자는 살아남을 수 없다. (박정희 정권 때 중앙정보부장을 했던 김형욱을 생각해 보라. 그의 죽음을) 이렇게 하고 소설이 끝났으면 좋았으련만.
'눈먼 자들의 도시'와 연결되는 장면들이 이 소설에 나오는데, 사람들이 갑자기 눈이 멀었던 시기에서 4년 뒤가 바로 이 소설의 배경이다. 그리고 유일하게 눈을 떴던 사람이 나오고... 그때에 유일하게 눈을 뜰 수 있었던 사람, 그 사람은 진실을 알고 있는 사람이다.
자, 4년 뒤 정권은 진실을 감추려고 하고 있다. 그렇다면 진실을 알고 있는 사람이나 진실을 폭로할 수 있는 사람은 어떻게 되어야 하나? 경정의 말에서 결말을 추측할 수 있다.
내가 이 일을 하면서 배운 바로는 정부에 있는 사람들은 우리가 말도 안 된다고 판단하는 것 앞에서 결코 물러서지 않고, 외려 그런 말도 안 되는 것을 이용해서 양심을 무디게 하고 이성을 파괴하오. (377쪽-2009년 초판 10쇄)
결말은 이야기 하지 않겠다. 다만, 정권 내에서도 치열한 권력 다툼이 벌어진다는 사실은 언급하고 넘어가야겠다. 그들은 권력을 나눌 생각을 하지 않는다. 언제든지 상대를 걸어서 넘어뜨리려 한다. 그리고 넘어뜨린다. 그래야 자신이 살아남을 수 있다고 여긴다. 이게 권력의 속성이다. 이런 권력의 속성을 잘 드러내는 인물이 바로 소설 속 총리다. 그 총리는 소설 속 인물만이 아니라 독재 정권이 이뤄지고 있는 나라에서 흔히 찾아볼 수 있는 인물이다. 권모술수에 능한 사람이라는 말로 통칭할 수 있는 그런 인물들.
(총리가 장관들을 해임하고 법무부와 내무부 장관을 겸임하는 과정이 이 소설 속에 나오는데, 와 이거 완전 전두환이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보안사령관과 중앙정보부장을 함께 맡아 군과 민간의 정보권력을 장악했던 그를. 사라마구 소설이 우리나라 현실을 빗대어 썼나 싶은 생각이 드는 장면이기도 한데, 이런 일은 권력을 추구하는 인간들에게서 흔히 나타나는 현상이라고 파악할 수 있다)
사라마구는 우리에게 근거없는 희망을 지니지 말라고 말하는 듯하다. 민주주의는 그냥 유지되지 않는다고. 권력집단은 그리 호락호락하지 않다고. 그들을 제대로 감시하고 통제하지 못하면 다시 '눈먼 자들'로 돌아갈 수밖에 없다고.
그래서 소설 결말에 다시 눈 먼 사람들이 등장하여 말을 하면서 소설을 끝맺는다. 권력을 제대로 감시, 통제하지 못했을 때 그렇게 우리는 눈 먼 자들이 될 수밖에 없고, 우리에게 조심하라고 경각심을 주는 존재를 잃으면서도 그것을 아쉬워하지 않게 된다고 하는 듯하다.
누가 환상적 리얼리즘이라고 했나. 이 소설은 리얼리즘이다. 그냥 우리 현실에서 너무도 잘 볼 수 있는 면들이다. 그것을 사라마구는 소설을 통해서 우리 눈 앞에 들이밀 뿐이다. 이래도 보지 않겠냐고, 이래도 눈 감고 있겠냐고. 계속 눈 감고 있으면 이렇게 된다고. 눈을 뜨고 있어도 권력은 이토록 보이지 않으면서도 치밀하고 집요하게 우리를 감시하고 괴롭히고 있다고.
우리도 곧 선거가 다가온다. 선거에 참여하기 전에 이 소설을 먼저 읽었으면 좋겠다. 우리 국민 모두가. 정말로 '눈먼 자들'이 되지 않고 '눈뜬 자들'이 되기 위해서. 우리 눈을 부릅뜨고 지켜봐야 한다. 그것이 민주주의다. 사라마구는 이 소설을 통해 이 말을 하고 있는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