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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대로 ㅣ 열린책들 세계문학 212
버지니아 울프 지음, 최애리 옮김 / 열린책들 / 2013년 6월
평점 :
‘버지니아 울프’ 오랫동안 기다려왔던 그녀를 ‘등대로’를 통해 만났다. 문장력 있고 그 시절부터 페미니즘을 다룬 여성 작가라는 막연한 기대와 호기심은 ‘경이로움’으로 바뀌었다. 책을 읽는 것이 아니고, 책의 낱장들을 모두 분리하고 그 위의 글자들을 모두 털어내 모은 다음 욕조의 뜨거운 물에 가득 붓고, 알몸으로 들어가 머리끝까지 잠수하며 유영한 것 같다. 울프의 이 자전적 소설을 가지고 이야기하고 싶은 것은 많지만, 나는 먼저 그녀의 ‘의식의 흐름’과 ‘내적 독백’이라 불리는 서사를 이야기하고 싶다. 책장을 넘기며 노트한 것과 밑줄 친 것들을 가지고.
‘글’이 ‘대화’ 보다는 덜 하겠지만, 그들의 후에는 머리와 가슴속에 ‘이미지’가 남는 것 같다. 동원된 모든 단어들은 몇몇을 제하고 무의식의 바닥에 쌓여있을 것이다. 엄청난 만연체는 이 ‘이미지’ 남기기에 ‘주술적’ 에너지를 발산하는 것 같다. p15의 노트
“급행열차에서 책을 읽다 말고 고개를 들어 농장들과 나무들과 작은 집들을 삽화처럼 바라보고는 읽고 있던 무엇인가를 확인한 듯 만족스럽고 힘차게 다시 책으로 돌아가듯이, 그는 아들과 아내를 딱히 구분하지도 않은 채 그들의 모습을 보는 것만으로도 힘이 나고 만족스러워져서 자신의 찬란한 지성의 힘을 온통 쏟고 있는 문제에 대한 완전하고 분명한 이해에 도달하기 위해 노력을 집중했다.” p48
하루 24시간 매분 매초의 모든 주변과 자신의 생각을 이와 같이 갈무리해두었다가, 글을 쓸 때 바라는대로 편리하게 꺼내 쓰지는 못할 것이다. 자신의 외부와 내부에 수백대의 카메라를 가지고 동시에 녹화하고 그것들을 실로 촘촘히 유기적으로 연결하는 것은 얼마나 벅찬 일일까. 울프는 이 녹화와 저장 그리고 적절하게 불러오기를 탁월하게 잘하는 것 같다. 사유의 시간을 압도적으로 많이 가지며 불러오기를 -어쩌면 무턱대고 - 반복하고 되씹으며 잘 정돈해두는 것일까?
“이제 눈이 내리기 시작했고 산정은 안개로 덮였으니, 그만 누워서 아침이 오기 전에 죽으리라는 것을 아는 지도자라면 부끄러울 것 없는 감정이 슬그머니 그를 덮쳐와, 그의 눈빛을 창백하게 하고, 테라스에서 돌아서는 단 2분 사이에도 시든 노년의 표정을 탈색해 버렸다.” p50
비단, 울프 자신의 경험의 녹화 뿐만 아니라 그가 간접적으로 경험한 것들까지도 그녀의 만연체를 촘촘하게 꾸며주고 있다. 간접 경험의 주체에 거의 완벽하게 또는 그 주체보다 더 주체답게 이입을 하지 않았을까?
“하필 인간관계의 불안전함을 떠올리는 것이 고통스러운 바로 그 순간, ... 순간, ... , 순간, ... 순간, ... 카마이클씨가 노란 슬리퍼를 끌며 지나갔다.” p56
이승우씨의 ‘식물들의 사생활’처럼 - 처럼이라고 하기에는 ‘등대로’가 훨씬 일찍 쓰였지만 - 어떤 한 장면의 서사를 만나기도 또 만나지도 않을 여러 분절된 선들이 병렬로 나아가다 툭하니 멈춰 섰을 때 찍은 스냅샵을 배경으로 하며 써나간다. 잠시 한눈을 팔면 무엇을 서사하는 지 잊어버려 문장의 처음으로 돌아갈 수 있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 울프가 자신이 간접경험 한 주체보다 더 주체적으로 그것을 경험하듯 독자인 나도 더 울프적으로 그 서사의 한가운데 자리할 수 있다.
“삶이란 낱낱이 살아지는 사소한 일들로 이루어지다가도 또 일시에 파도처럼 커다란 전체가 되어 사람을 휘말아 올리기도 하고 해변에 철썩 던져 버리기도 하는구나 하고 느껴지는 것이었다.” p65
그녀의 굴곡진 삶이 뱉어낸 이 문장. 물의 흐름을 방해하는 그 무엇인가가 있어야만 퇴적도 되고 침식도 되는가보다. 그리고 세상엔 일직선으로 곧게 마냥 흘러가는 물은 잘 없는 것 같다.
“한 항아리에 부어 합친 물이 나눌 수 없이 하나이듯이, 그처럼 찬탄해 마지않는 대상과 하나가 되는 방법은 무엇일까?” p71
‘소크라테스의 변명’에서 영혼의 영원성을 대화할 때, 반박하기 힘든 논리가 펼쳐진다. 그 논리의 큰 맥락 중 하나는 세상은 서로 반대되는 것들의 존재함이다. 해가 뜨면 해가 지고, 단단한 것이 있으면 부드러운 것이 있다는 식의. 그 대화에는 많은 예시가 사용된다. 여기의 은유처럼. 소크라테스의 경우는 1부터 차곡차곡 1식 그 예시와 은유로 꾸역꾸역 하지만 빠르게 20까지 논리를 전개해서 1과 20이 같음을 증명한다. 그 쌓아감에 녹아들어 종국에는 자연스럽게 끄덕이게 된다. 울프의 이 은유 또한 그녀의 깊은 사유를 통해 끄덕이게되는 ’공감’을 얻어내는 것 같다.
“비용이 50파운드는 될 거에요” p91
이 현실적인 옥죄임은 여러 번 반복된다. 고결한 사유를 헤치는 이 현실적인 문장은 인생의 무상함마저도 느끼게 한다. 배고픈 소크라테스가 더 좋아 곡기에 괴로워하는 인간이 되었다면 사유할 수 있을까? 크누트 함순의 굶주림에서도, 그래 결국 배를 타지 않았던가?
“’울프’는 어떠한 사소한 일상에서도, 아무리 짧은 시간에서도, 아주 적은 인물들에서도 인생의 무한한 상념들을 끌어내 흩어 뿌릴 수 있을 것 같다. 마르케스의 마술적 리얼리즘과는 또 다른 방식으로 현혹한다. 전뇌를 흠뻑 적시게 말이다. “ p110 노트
그렇다. 아무 페이지나 펼쳐 아무 문장이나 낭독하고 우리들은 몇 시간이고 떠들 수 있을 것 같다. 진정으로. 유쾌하고 무겁게.
“새벽이 몸을 떨고 밤이 정지하는 주저의 순간이 왔기 때문이다.” p185
만연체뿐만아니라 이렇게 간결하고 함축적인 묘사도 일품이다. 울프는.
‘울프가 등대로를 ‘제작’하는 과정을 전기문처럼 자세히 다루고 있어 해설마저도 흥미롭고 경쾌하다. 무엇을 전달할지, 각 ‘부’의 구성은 어떻게 할지, 누구에게 어떤 중요도를 둘지, 울프의 제작 과정을 보는 것이 경이롭다.
p286 노트
울프의 이 어마어마한 문장들을 멋지게 번역해주시고 해설도 이렇게 써주신 최애리 역자님께 감사드린다. 그녀의 신간 알림을 신청하며.
“등대로는 작가 자신의 부모와 어린 시절에 대한 추억을 소재로 한 자전적 소설이다. ... 그녀가 이 작품을 소설이 아니라 ‘엘레지’라 하는 것도 그 때문이다.” p288, 해설
엘레지: 서정시의 일종으로 애도와 비판의 감정을 표현한 시. 셜리, 밀턴, 테니슨 등의 작품이 유명하다.
이 책의 마지막 문장. “바로 이거야’ p274의 원문은 “I have had my vision”이다. 최애리님의 멋진 - 의역에 가까운 - 번역이다. 최애리님에게 찬사를 보내면서도 원서 또한 보고 싶다.
Reference
제임스 조이스
자기만의 방
그림형제
셰익스피어
톨스토이, 안나 카레니나
월터 스콧 p161
발자크 p167
그리고 ‘최애리’
"급행열차에서 책을 읽다 말고 고개를 들어 농장들과 나무들과 작은 집들을 삽화처럼 바라보고는 읽고 있던 무엇인가를 확인한 듯 만족스럽고 힘차게 다시 책으로 돌아가듯이, 그는 아들과 아내를 딱히 구분하지도 않은 채 그들의 모습을 보는 것만으로도 힘이 나고 만족스러워져서 자신의 찬란한 지성의 힘을 온통 쏟고 있는 문제에 대한 완전하고 분명한 이해에 도달하기 위해 노력을 집중했다." p48
"이제 눈이 내리기 시작했고 산정은 안개로 덮였으니, 그만 누워서 아침이 오기 전에 죽으리라는 것을 아는 지도자라면 부끄러울 것 없는 감정이 슬그머니 그를 덮쳐와, 그의 눈빛을 창백하게 하고, 테라스에서 돌아서는 단 2분 사이에도 시든 노년의 표정을 탈색해 버렸다." p50
"삶이란 낱낱이 살아지는 사소한 일들로 이루어지다가도 또 일시에 파도처럼 커다란 전체가 되어 사람을 휘말아 올리기도 하고 해변에 철썩 던져 버리기도 하는구나 하고 느껴지는 것이었다." p65
"한 항아리에 부어 합친 물이 나눌 수 없이 하나이듯이, 그처럼 찬탄해 마지않는 대상과 하나가 되는 방법은 무엇일까?" p71
"새벽이 몸을 떨고 밤이 정지하는 주저의 순간이 왔기 때문이다." p1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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