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아침에 출근하자마자 실기시험 접수했습니다. 뭐 저야 시험 보는 일반적인 입장과 동기가 달라서 약간 느긋? 하게 시험 준비를 하고 있는데요. 여하튼 저야 합격은 여유? 부려서 자신은 없죠. 외우는 게 진짜 안됩니다.ㅎㅎㅎ 머리가 이렇게 나빴나 싶을 만큼 자책 중.ㅠ.ㅠ 그렇다고 빡치게 외우지를 못하고 있으니까요.
원서 접수시간이 09시부터 온라인 접수인데요. 어찌나 대기 시간이 길던지, 원하는 장소와 시간을 접수시에 선택해야 하니, 원서 접수조차 경쟁이 되었습니다. 대기인원이 1만명이 넘어갑니다. 클릭 순서로 접수가 되므로 온라인 회선에 일시적 과부하로 버벅거리기만 합니다. 거의 1시간만에 접속을 시도, 겨우 접수를 마쳤습니다. 혹시나 지역에서 접수 순서에 밀려서 다른 지역으로 시험 보는 어처구니없는 사태가 발생하기도 하거든요. 장소의 여건에 따라 인원수는 정해지니 선착순으로 배정이 되니 말이죠. 시험장 장소 선정마저도 치열한 경쟁이 이루어지는...
여유 부리는 나와는 좀 다르긴 한데요. 특히 후배, 청년들은 취업이나 기타 승진이나 가산점 등의 이유로 꼭 합격해야 할 목적이라면 얼마나 큰 부담이 될는지요. 그들에겐 시험과 자격증이 당장 당면한 절박한 문제가 되거든요. 자격증은 공무원 시험 때 가산점이 주어지고, 혹은 기술계 분야에서는 공기업 또는 일반 기업에서도 자격증을 우대하고 특히 자격증 소지자가 법적으로 구비되어야 하는 업종에서는 반드시 자격증을 가진 직원이 필요합니다. 그러니 입사에서도 우선순위가 따라 오기 마련이거든요. 그러니 자격증 시험은 먹고사는 문제에서 급하고 절실한 스펙이 될 수밖에 없죠. 입사 경쟁에서 가산점을 하나라도 더 받아야 하는 노오력의 표시를 보여야 자신이 간택되는 문제니까 말입니다.
한편으로는 집안이 좋아서, 이런저런 특별히 단련하지 않아도 먹고 사는데 지장 없는 사람들이야 그리 많지는 않겠지만 가끔 그런 게 부럽기도 하죠. 다 사람이라면 부럽지 않다는 것도 어폐가 있겠지만요. 젊은 친구들의 노~오~력 사회가 방향의 설정에 있어서 뭔가 삐딱하게 흘러가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이렇게 경쟁의 치열함으로 살아야 하니 사는 게 이렇게 어려워서야~라는 탄식입니다. 오늘날 젊은 친구들이 처한 상황에 대해서 무척이나 힘이 빠지는 일이 아닐 수 없기도 합니다. 현대사회가 날로 경쟁은 치열하고 알아야 할 지식은 늘어가고 갖추어야 할 스펙의 요구에 지치고 피로한 사회가 되어가고 있는 셈이죠.
산업사회의 태동기부터 가난한 노동자들에게 요구한 열심히만 하면 잘 살수 있다는 이데올로기는 아직도 여전하고 노력~하는 것이 최고의 덕목이고 게으른 것이 아주 나쁜 가치관이 된 것에 이제는 의심이 들어야 당연하죠. 처음이야 열심히 노오력해서 돈 많이 버는 시대도 있었습니다. 다단계 사업에서 처음에 배팅한 사람이 떼 돈을 번 것처럼 피라미드가 타고 내려갈수록 노오력의 이론이 어긋난다는 생각도 해야 하는 것 처럼 말입니다. 실제로도 자영업자가 사업 오픈해서 5년 뒤에 95%가 문을 닫는 시대인데 그럼 95%는 게을러서 일을 열심히 하지 않아서 망했다고 절대 말할 수 없거든요. 그래서 여기에 대해 이의를 제기하고 싶었거든요. 좃뺑이 치도록 경쟁에서 이겨야 하고 지는 사람은 나태해서 게을러서 경쟁에 졌다는 식으로 죄인 취급은 정말 아니거든요. 여전히 나이 먹은 꼰대들에게는 노오력이 그들의 지상 과제이고 자신이 살아온 경력이 노오력으로 악착같이 살아 냈음의 자부심으로까지 연결됩니다. 정말 죽을힘을 다해 살았다는 이것 하나, 죽을 만큼 힘을 쓸려면 차라리 죽어 버리는 것이 낫다면 죽는 게 맞죠. 죽을 만큼 살아도 실제로는 죽을 만큼의 상처와 고통은 죽는 것보다 더 못한 결과라는 것도 따져 볼 문제가 아닐까 하는 의심을 들기도 합니다. 물론 나이들은 사람들의 과대포장과 뻥의 심리는 뭐 자신만이 그렇게 죽을 뚱 설뚱 발버둥의 위대함을 내 새울는지는 모르겠지만 진짜 가진 거 아무것도 없는 가난한 부모에게서 나와 부랄 두 쪽뿐인 사람의 선택은 별다를 것도 없는 거 아니겠습니까. 발악하듯이 산 것이 다른 노오력으로 산 것으로 포장되고 싶은 자기만족형 심리일 것입니다. 안 그러면 자신이 비굴해지고 처절하며 비참해지거든요. 그러니 내가 열심히 노오력으로 포장하는 듯이 살아야 할말도 있고 그럴싸하게 보이는 것입니다. 그렇지도요. 그런데 이제는 좀 달리 볼 필요가 있거든요. 그때는 아무것도 없이도 부랄 두쪽으로도 버틸 상황의 시대와, 지금은 부랄으로는 택두 없는 시대의 상황에 비교해서 어느 것이 더 살기 힘든 것인지 경쟁할 것은 없거든요. 그때는 그때대로 어렵고 힘들었으며, 지금은 머리가 푹푹 쪄 익어갈 정도로 아픈 것도 비슷하다는 것입니다. 그때는 그 시대로 이해하려 들어야 하고 지금은 지금의 난관을 이해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자신이 살았던 시대가 제일 힘들다는 그 꼰대적인 생존의 경험성의 뻥튀기는 결국 니들은 살아 보지 않아서 모른다는 식으로 몰이해하려 들고 결국 오늘에 대한 시대적 이해에 저항하거든요. 요즘 젊은이들이 뭐가 힘들다고 징징 거려 싼 놈?라면서 폄하하기 바쁘거든요. 그때도 어려웠다는 거 인정하고요. 대단하죠. 그런 시대적 가난한 질곡을 건너왔다는 것에서 살아 낸 것만으로도 훌륭하지만요. 지금도 그때에 비교 해서 더 나아졌다고 해서 자랑할 것도 되지 못한다는 것이죠. 그때나 지금이나 백 없고 돈 없고 가진 자본 없으면 마찬가지라는 걸 애써 외면할 필요는 없거든요. 살아온 이력 자체가 상 받을 일은 아니니까요. 어쩌면 비열하고 저열하게 시대를 버틴 게 쪽팔릴 수도 있다는 것도 느낄 수 있죠. 그전에는 투박하게 빡~쳤더라면, 요즘은 교묘하고 디테일하게 빡치게 만드는 투박과 섬세함의 차이로 달라졌다는 거죠. 그러니 노오력에 있어서 비굴함은 형식과 격식만 달라졌을 뿐 그 속성은 내부적으로 닮았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그때나 지금이나 다를 바 없는 걸 알아야 하죠. 왕년에 고난도 버텼는데 요즘 애들 포시랍게 자라서 이겨 낼줄 모른다고 하면, 이 또한 얼마나 큰 상처를 주는 것지도 느꼈야 만이 세대간의 서로가 이해의 접접을 찾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시대가 달라서 살아온 환경 때문에 싸울 필요가 없다는 뜻입니다. 세대를 몰이해로 갈라서게 만드는 것도 다 누군가의 장난같지는 않는지 ...
회사에 직원이 많지는 않는데요. 최근에 여직원이 아이를 가졌거든요. 어떻게 보면 집안에 막내 여동생이 결혼해서 뒤늦게 기다리던 아이를 가진 것처럼 기쁘기도 하구요. 축하한다고 전해 주었죠. 여직원이 평소에 건강이 좋지 못해서 병원에 자주 다니기도 했으니까 어렵게 아이를 가진 게 대단하기도 하고 한편으로 걱정이 되기도 했습니다. 비교적 노산에 속하는지라서 젊은 신혼부부보다 더 안정을 취하고 건강에 신경을 더 써야 함에도 불구하고, 여직원이 아이를 가진 채로 또 일을 하야하는 처지가 무척 안쓰럽더군요. 노산에 속하니까 더 각별히 신경 쓰지 않으면 안 되는 환경이기도 합니다. 현실의 어쩔 수 없음에 대해 일하러 출근해야 하는 게 너무 힘들어 보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조금은 편리도 봐주고 아침 출근 시간에 나올 것도 없이 오전 중에라도 괜찬을 때 출근하고 저녁에는 퇴근 시간 마추지 말고 별 일없으니 일찍 퇴근시키고 있는 중입니다. 그런데 요즘은 아이 가지는 것은 시작부터가 모든 게 다 비용이 무척 많이 드는 것도 사실이거든요. 안 그래도 형편이 썩 나은 것도 아닌데 아이까지 생기고 보니 검사비에 병원 진료비에 또 어려워지는 건가 싶었어요. 낳기 전에도 이런 넉넉하지 못한 형편이라면 낳고 난 후의 일은 또 어떻게 감당해야 할 것인지, 한편으론 답답하기도 했습니다. 아이를 가지고 싶은 욕망으로 인간은 오늘날까지 이어 왔습니다. 어떤 이유에서건 간에 인간은 욕망으로 태어난다는 것은 부인하기 어렵죠. 게다가 오늘날처럼 태어날 아이에게 살아갈 세상이라는 게 정말 어렵거든요. 존재의 부재는 고민의 부재로 이어집니다. 허나 존재함에 따른 이 욕망이 또 인생의 고락을 겪게 만들기도 합니다. 그래서 아이에게 꼭 물어보듯이 자문자답을 해보라고 권유했습니다. 우리의 삶이란 1이란 원하는 것을 위해서 99의 아픔을 감내하는 것과 같은 것이라고 말해주었습니다. 문제는 우리가 원하는 1이란 욕망이 99를 감내할 만큼의 가치가 있고 의미를 부여할 수 있는 것인가에 대한 회의적인 믿음은 꼭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이미 태어난 모든 사람들은 달리 선택할 운명의 도리는 없습니다만, 앞으로 태어날 아이의 선택은 어떠해야 할 것이지를 철학적 존재론으로도 꼭 한번 사유해봤으면 하는 바람을 가지게 되거든요.
지나간 세월의 통증이야 시간이 지나고 나니 흔적은 남더라도 지속적이진 못하지만 앞으로의 젊은 후배들이 살아가야 할 세상의 무게는 어떻게 부담을 덜어줘야 할 일인지 현재를 살아가는 모든 사람들의 숙제는 아닌가 싶었습니다.
며칠 동안 알라딘에 자주 접속을 못할 것 같습니다. 하기야 알라딘의 서재에 올라오는 리뷰나 페이퍼 글은 이웃 유저분들이 허투루 쓴 글이 아님을 너무나도 잘 알아요. 그러니 바쁘다는 핑계로 대강 대강 겉핥기 식으로 읽어 보는 것도 사실은 예의가 아니지요. 어렵게 쓴 글을 함부로 읽는 것은 그 정성에 누가 되는 것이기도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먼저 미리 양해를 구하고 사정이 이러 이러하니 속속들이 미쳐 다 섭렵하지 못하더라도 사정이 있으니 그렇구나라는 이해심을 바라게 되기도 합니다. 간간이 스마트폰으로 접속해서 읽어도 되긴 하는데 시간을 너무 잡아먹게 되니 이것도 참 어렵더군요.ㅎㅎㅎ 댓글이나 공감 표시가 줄어들더라도 이해 바라는 마음~ 시간 나면 또 좋은 글 서재의 책 리뷰 팍팍 즐겁게 보도록 하겠습니다. 요즘 사진도 거의 못 찍어요. 가끔 동네에서 카메라 매고 산책할 때도 있는데 사진 찍는 맛보다는 카메라를 들고 있으므로 사진 찍고 싶은 마음에 위안으로 삼고 있거든요. 점심시간에 밥을 안먹으니 페이퍼 글 한자락이나 주루룩 올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