육식의 제국(티머시 페키릿 지음, 이지훈 옮김 -이하 "제국"이라 지칭함), 육식의 종말.(제레미 리프킨 지음 신현승 옮김-이하 "종말"이라 지칭함)이라는 책 두 권을 공교롭게도 거의 비슷한 시기에 구입하였다. 굳이 이 책을 구입하게 된 배경은 자주는 아니지만 나 스스로가 그동안의 아무 생각 없던 육식에 대한 자기 반성이었다. 음주에 항상 고기가 뒤따라 먹고서 몸이 나이가 들어 감으로써 망가지는 속도에 육식이 이에 가속도를 붙게 한 셈이었으니까. 맛을 찾다가 몸이 맛탱이 가출하는 사태를 수습하기 위한 일환의 생각에서 비롯되었기 때문이다.


제국이라는 책은 저자가 실제 소 도축장에서 6개월간 근무하면서 도축의 전반에 대한 과정을 설명하고 도축에 대하여 우리가 보지 못하고, 보려 들지 않은 이야기들이다. 살이 잘려 나가는 과정을 생생하게 르포 형식으로 나타냈고, 종말이라는 책은 육식에 대한 전반적인 고찰과 육식이 퍼진 자본주의 시대에 면밀한 과정과 의미를 추적하여 집대성하였다. 두 책에 담긴 내용은 성격이 전혀 다르지만 공통점이라면 인간의 육식, 특히 소에 대한 이야기를 다루었다. 특히 오늘날 공장식 고기 생산 시스템에 대한 반성을 역시 이 두 책이 담고 있다는 점이다. 따라서, 이 책을 통하여 나 개인적인 반성과 성찰, 그리고 사회적인 육식 문화에 대한 생산과 소비, 그리고 육식의 역사성을 뒤집어 봄으로써 인간이 더 건강한 삶을 살 수 있는 환경에 초점을 맞춘다. 오늘날 과도한 육식은 온갖 질병을 야기되는 고통과 불편을 초래한다. 더불어서 소들도 편하게 죽음을 맞이할 수 있는 인간성의 도리를 짚어 보자는 의도였다.


사람은 끊임없이 먹어야 하는 산다. 산다는 것은 곧 먹음으로써만 가능하다. 그런데 먹기에 대해서 육식에 따른 전 지구적인 고통에 대해서는 먹기의 정당성이 지구의 정당성으로 착각하게 만들었다는 것이다. 살기 위해 무엇인가 파괴해야 하고 훼손으로 고통당하게 할 때, 먹기의 비애가 숨어 있기 때문이다. 내가 먹기 위해 무엇에 인가 고통스러워해야만 하는 존재적인 모순이 있다면 이것들은 내가 먹어 살기 때문에 라는 본질적인 슬픔이며 먹기에 대한 나의 양심은 무엇인지에 대한 고민이었다. 이런 차원에서 이 두 권의 책을 통하여 스스로의 사고를 넓히고 앞으로 우리가 좀 더 건강한 삶이 양심에 위배되지 않고 떳떳하고 윤택하게 하기 위해서 육식에 대한 고민을 해보고자 한다.


사람의 세치 혓바닥의 본능은 무엇보다도 강렬하다. 하물며 성욕보다 더 끈질기고 지속적이기도 하다. 이 욕구의 갈망은 자본주의 시대와 결합되어 고기의 소비는 나날이 늘어나고 고기 소비가 늘어날수록 질병은 비례하게 증가했다. 특히 우리 조상들이 거의가 채식 위주로 먹었던 까닭에 육식으로 전환될 때 발생하는 부작용은 원래부터 육식을 주식으로 했던 서구인보다 훨씬 더 심각하다. 정확한 이야기는 아니지만 우리나라 사람들의 대장 길이는 유럽인에 비해 길이가 길다고 한다. 즉 채식 위주의 음식이었으니 당연히 소화가 덜 되는 채식으로 오랫동안 장에 머물러야 하고 흡수율을 높이기 위해 유전적으로 대장의 길이가 길어졌다고 했다. 그러니 육식으로 긴 대장에 소화가 됨에 따라 고기는 오래 머물러야 하고 당연히 오래 머물수록 고기가 소화되면서 나오는 독소 성분이 대장에 영향을 미친다고 한다. 이런 이유에서 일까. 우리나라 대장암 발병률은 여타의 암의 발생률보다 훨씬 높다. 앞으로 더 높아질 것이라는 불길한 예측도 하고 있는 형편이다. 이는 육식 위주의 식사가 한국인의 채식 체질에 얼마나 맞지 않는 것인지 증명하고 있는 것이라고 학계는 주장하고 있다고 들었다. 상당히 설득력 있는 주장임에는 틀림없다.


아마도 우리나라 사회에서 고대로부터 근대까지와 현대를 비교하면 생활 수준의 향상으로 먹거리의 변화는 가히 혁명적이었다고 헤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오죽 못 먹고살았으면 초근목피라고까지 했을 정도이니 가히 먹고사는 일이 일반 백성들에겐 생존이 달린 문제였으니까 말이다. 근대까지만 해도 소고기를 한번 먹는다는 것은 거의 없었다. 특별한 날이 아니면 소고기는 구경도 못했고 고기를 먹더라도 대부분 많은 사람들이 먹기 위해 소고기 국물의 형태로 먹었지 고기 자체를 먹는 경우도 상당히 드물었다. 게다가 농경사회에서 소가 주는 노동력은 사람 몇 배의 생산성을 나타냄으로써 소를 함부로 도축하거나 소고기를 먹는 것을 굉장히 터부시하는 경우가 많았다. 특별한 대감집의 잔치라든가 명절 등 기념하는 날이 아니면 배불리 소고기를 먹는다는 것은 거의 없었던 일이다. 또한 소고기를 도축하는 이른바 백정이라고 불렸던 도축 전문가의 인식도 굉장히 좋을 리가 없었고 함부로 손에 피를 묻히는 일도 터부시했던 사회였다.


그러나 이제는 돈만 주면 얼마든지 먹을 수 있고 동네마다 식육식당이나 정육점은 이제 흔히 볼 수 있는 시대가 되었다. 소비는 가히 폭발적으로 일어 났고 일상에서도 회식이나 기념일이라면 거의가 고기집을 가는 경우가 많다. 이처럼 다량의 소비가 이루어지고 개인당 고기 섭취량이 늘어나는 일은 자연스러운 현상이었다. 이처럼 직업적으로도 고기와 관련된 일을 하는 사람들도 상당히 많다. 직접적인 도축업자에서부터 고기를 취급하는 일의 수출 수입하는 무역업자까지 실로 다양한 방식으로 고기 산업과 연관되어 있다. 고기 산업은 사회의 생산자에서부터 공급자 소비자까지 전체의 시스템으로 연결된 유기적이 거래 관계로 얽혀 있으니 이제는 백정이니 터부시하지도 않고 오히려 자본에 더 충실한 돈 잘 버는 직종이 되었다. 이런 현상은 많은 사람들이 고기와 연관될 수밖에 없도록 소비가 다양하고 복합적으로 이루어지기 때문이기도 하고 고기의 소비가 비탄력적 소비로써 소비의 증가는 지속적으로 나타난다는데 있기도 하다. 그만큼 많이 먹는다는 뜻이다.


우리나라의 가축 산업은 거의가 축사 형태로 소들을 성장시키고 시장에 고기를 내놓는다. 외국처럼 대규모 방목장이 있는 것도 아니라서 넓은 초지가 거의 없다. 그렇다면 가둬 놓고 살을 찌워서 마블링의 기준에 맞는 고기를 생산하게 될 때 가축들이 받는 스트레스는 가히 인간으로써는 상상이 잘 되지 않는 것도 사실이다. 오늘날처럼 고기를 대량 생산하는 측면에서는 효율성을 재고하겠지만 효율성이 가축들의 질병과 무관하지 않는 편이다. 일전에 언젠가 구제역이란 병이 온통 유행병처럼 휩쓸고 지나갔을 때 살처분된 소들이 대체 몇 마리가 된 것인지 돈으로 환산해도 어마어마한 금액이었을 것이다. 좁은 축사에서 주는 사료에 의지했을 때 농가의 생산량에 따른 사룟값의 지출도 농가의 소득을 떨어트리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풀은 초지에서 공급할 수 있어야 하지만 넓은 땅이 없으니 좁은 축사에 가둘 수밖에 없고 먹이를 위해 사료를 구매해야 하는 소값은 높게 형성되기도 한다. 게디가 소고기의 지방 함량에 따라서 마블링이라는 등급으로 고기의 품질을 매기고 지방 덩어리를 우리는 맛나다는 식으로 인식하게 됨으로써 건강에 심각한 영향을 미치게 되는 악순환 현상이라는 점이다. 육류 산업이라는 것이 기본적으로 대량 생산이란 관점에 맞춰져 있는 시스템 속에서 건강과 맛과 맞바꾼 셈이나 마찬가지이다.


방송을 보더라도 블로그를 보더라도 어디 맛 집을 소개하면서 고기의 소비를 촉진시키는 방법은 다양하게 이루어진다. 그기에 건강이라는 명제는 쏙 빠져 있다. 아무리 맛을 찾더라도 아플 때는 무슨 맛이든 오지 못한다. 하루가 멀다 하고 어디 고깃집의 마블링의 지방덩어리의 꽃이 핀 것을 자랑삼아 내고 등급이 특등이라고 칭송할 때 건강은 악화될 수밖에 없다. 한국인의 생활 양식은 산업화를 거치면서 육체적인 노동에 종사하는 사람을 제외하면 고열량 고칼로리를 소비할 일은 없다. 하루 종일 뙤약볕에서 농사짓던 민족이 산업화를 거치면서 점점 배에 기름이 빨리 들어 차는 이유가 그만큼 움직임이 줄어들었기 때문이다. 수만 년 간 원시인 때부터 인간은 늘 굶주려 왔다. 사냥이라도 잘 되는 날에만 포식할 수 있었지만 대부분 허탕 치는 날에는 초근 목피 할 수밖에 없었다. 이런 기간이 수천 수만 년에 걸쳐서 겪었으니 인간의 유전자는 항상 배고픔에 대비된 체질이었다. 무엇을 먹든 간에 소비를 최대한 줄이고 축적을 많이 해두어야 만이 배고픔에 대비해서 지방을 열량으로 바꾸어 생존을 하고 다시 사냥을 할 수 있었다. 그러다 사냥에 성공하면 포식하고 다시 축적을 시켜냈어야 한다. 이런 축적의 능력이 못되면 춥고 배고픈 날에는 견디지 못하고 죽을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러니 인간의 에너지 축적의 기술이 유전적으로 효율적으로 자연스럽게 지배할 수 있었을 것이다. 이렇게 축적의 유전자가 발달된 지금 현대는 사냥에 의존하지 않아도 얼마든지 사냥하고 포식하듯이 먹을 수 있게 되었지만 문제는 축적의 기술은 변함이 없다는데 주목할 수밖에 없다. 그러니 매일 사냥한 듯이 포만하게 될때 축적의 기술이 여전히 이루어지니 살찌는 것은 너무 빠르다. 또한 수만 년에 걸친 감각에서 생존에 절대적인 배고픔의 감각은 여전히 살아 있으니 현대에서도 배고픔에 얼마든지 대응하니까 절제하기 어렵기도 하다. 밤 늦은 시간에 야식이 더 맛있는 이유가 바로 이런 이유 때문이 아닐까 생각되기 때문이다. 먹고 자면 에너지 소비는 최저가 되고 축적은 최고가 되니 굶주림에 대응하는 생존력은 올라간다. 그런데 지금은 이렇게 하다간 살 빼기는 불가능한 것이 다이어트의 이론이 된 거다. 그런데 육류의 칼로리는 여타 음식의 칼로리 보다 월등히 높으니 당연히 배고픔에 대비하는 고열량식이었으니 육류가 더 당기는 이유이기도 하다. 더욱이 산업사회에서 활동력이 줄어들었다면 비례적으로 음식의 량도 줄여야 하는 당연하지만 우리의 감각기관은 수만 년에 걸친 유전적인 명령으로 감각은 원시인이나 비슷하니 배고픔에는 저항을 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인터넷 방송 중에 아프리카 TV에서 무슨 먹방 방송이 그렇게 호황을 누리는 이유도 어쩌면 그 방송을 보고 대리만족이라는 코드에 따라 별 풍선을 마구 던지는 것도 자주 경험하게 된다. 또한 무슨 방송에서도 먹방 방송은 대리 만족이기도 하고 지금 현재의 사회가 막혀 있는 불만과 개인적인 결핍이 먹는 순간에서만큼은 스트레스를 받지 않는 것의 심리적인 위안처럼 만들어내고 풀어낸다.


이제는 시대가 바뀌었다. 먹을 것이 부족했던 시대에는 많이 먹는 것이 미덕이었다. 나이 드신 분들이 그저 많이 먹으라는 말은 그 사람을 위하는 길이 아니고 배려도 아니고 양보도 아니다. 이제는 많이 먹으라면 미운 놈 떡 줘서 목에 떡이 걸려서 질식해서 죽으라는 뜻이 되었다. 고기도 소식해야 한다. 오로지 맛 때문에 먹기는 절제되어야 한다. 최소한으로 줄여야 건강할 수 있다. 언젠가 다시 인류 문명사회가 멸망하고 다시 원시사회가 도래할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때 가면 또 많이 먹는 것이 미덕이고 배려이고 양보이겠지만 지금은 아니다. 많이 먹으라면 너 빨리 죽으라는 소리로 알아차려야 한다. 특히 고기는 더더욱 많이 먹어서 몸에는 독이 되었다.


이 두권의 책에서 보듯이, 인간에게 있어서 육류의 소비로 인하여 발생하는 문제에 대해 오늘날 우리들에게 제시하고 있는 온갖 환경과 사회시스템에 대한 경고성 발언들은 개인적인 건강의 위험 신호에서부터 전 지구적인 건강의 위험신호까지 빨간색으로 도배되어 있다. 어쩌면 원자력의 핵미사일 보다 건강의 적신호가 더 큰 위협이고 현재도 진행형처럼 이유들을 설명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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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 : 소가 어떻게 도축되어 컨베이어 벨트를 지남에 따라 고기라는 제품으로 생산되는 전 과정을 설명한 책_ 육식 제국.

따라서 소의 도축으로 발생하는 비인도적인 가축의 생산적 시스템을 고발했습니다. 진짜 알고는 소고기(다른 고기도 마찬가지) 못 먹겠더군요.


근대 현대로 넘어오면서 소가 산업자본사회에서 사육되는 과정으로 전 지구적인 산업화가 된 역사적인 전체 맥락을 설명한 책_육식의 종말.

소가 먹어 치우는 곡식과 이에 따른 식량 불평등 관계, 소의 생산을 위한 가축 환경 및 자연환경의 파괴 현상. 유럽과 미국의 육류 산업의 전반적인 역사적인 고찰 등등이 이렇게 두 책은 요약할 수 있습니다.


반성 좀 많이 하게 됩니다.

이렇게 내가 소들에게 모질게 하며 살았구나 싶어 미안함이 치밀어 올랐습니다. 다음 생에 내가 태어나면 나도 소들과 똑같이 태어나도 소에게 할말 하나도 없었습니다. 소들이 나에게 "니들도 당해봐라" 해도 나는 거부 못하겠더만요. 아이고.ㅠ.ㅠ


책이 두권이라서 두 권 동시 리뷰로는 안되므로 페이퍼 카테고리로 적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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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ansient-guest 2016-10-04 08:5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늘 고민하게 되는 이슈입니다. 고기를 먹지 않을 수 없지만, 탈공장식 사육에 관심을 갖고 있습니다. 미국에서는 같은 맥락에서 자신이 직접 사냥하고 도축한 고기가 아니면 먹지 않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예전에 보니 집에서 닭을 키우고 사슴을 잡아와서 남기지 않고 먹는 것으로써, 생명을 존중한다는 취지의 글이 있더군요. 지금은 생산-소비가 끊임없이 맞물려 돌아가는 시대입니다. 채식주의자는 아니라도, 고기를 먹을땐 남기지 않기 위해 노력합니다. 먹을 양만큼만 먹도록 노력하구요. 어려운 문제인데, 사리 생명존중만 놓고 보면 고기를 먹지 말아야할 것 같아요. 전에 읽은 fast food nation이라는 책에서도 이런 문제를 접한 기억이 나네요.

yureka01 2016-10-04 09:14   좋아요 0 | URL
자본주의시대에 들어서 돈벌이에 육식도 포함되면 이게 생명 경시 자본중시에 따르는 비극이죠.
공장식은 더 많이 더 싸게 공급이라는 돈벌이시스템이었으니까요.

요즘 저도 육식의 공포에 반성을 하게 됩니다. 문제는 현재의 육식생산시스템이면 먹는게 죄스러움이며
몸이 안좋아지는 대가를 치뤄야 한다는 점이죠..

2016-10-04 19:3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6-10-04 20:2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6-10-05 11:2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6-10-05 11:28   URL
비밀 댓글입니다.

종이달 2021-10-13 12: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