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주석의 옛 그림 읽기의 즐거움 2
오주석 지음 / 솔출판사 / 2006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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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그림, 보이는 것은 넘어서 되살려내기

그림 한 폭에 담긴 이야기는 무궁무진하다. 그림을 그린이나 그 그림을 보는 이나 같은 것을 보지는 않을 것이다. 이 사이, 틈이 존재하기에 수많은 상상의 나래를 펼치는 것이 가능해진다. 그린이가 무엇을 담고자 했는가도 중요하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보는이가 무엇을 보는가에 달렸다고 봐도 지나친 말은 아닐 것이다.

 

물아일체(物我一體)라는 말이 있다. 외물(外物)과 자아, 객관과 주관, 또는 물질계와 정신계가 어울려 하나가 됨을 나타내는 말이다. 옛 사람들이 대상을 바라보는 기본적인 생각이었다. 그렇게 바라본 대상에는 자연을 비롯한 이웃이나 벗 등 나와 구분되는 모든 것이 포함될 것이다. 이렇게 대상을 바라본다면 시끄러운 세상살이에 번잡하기만 하는 내 마음이 대상에 의해 이렇게 저렇게 변덕을 부리지는 않을 것 같다.

 

옛사람들은 그렇게 세상과 자신을 보았다. 학문하고 여가를 보내는 일상이 바로 그것이었기에 그들이 가슴에 담을 뜻을 표현할 때도 마찬가지였으리라. 시를 짓고 그림을 그리고 벗들과 풍류를 즐기는 모든 것에 그런 정신을 담았으니 오늘날 전해지는 시, , 화의 모든 것에서 그 정신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우리 것의 소중함과 가치를 찾아가는 길을 다양하다. 우리 그림에 대한 한없는 애정을 보이며 그림 속에 녹아 있는 옛 사람들의 정서를 느끼고 공유하고 싶어 하는 사람 오주석 같은 사람들이 노력으로 우리 조상들의 숨결이 현대에서 살아나고 있음은 그나마 햇살 비추는 봄날처럼 사람들의 마음에 온기를 전하고 있다.

 

김홍도의 송하맹호도마상청앵도’, 정선의 금강전도’, 정약용의 매화쌍조도’, 민영익의 노근묵란도’, 그리고 작자미상의 이채초상에 대한 설명을 담고 있는 오주석의 옛그림 읽기의 즐거움 2’는 우여곡절 끝에 발간된 책이다. 저자 오주석이 병고 끝에 유명을 달리한 이후 그를 사랑하는 사람들에 의해 발간되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목차에는 들어가 있으나 저자가 완결 짓지 못한 일월오봉병日月五峰屛에 대한 글들은 빠졌다고 한다.

 

여섯점의 그림에 대한 책치고는 분량이 만만치 않다. 그만큼 그림을 이해하는데 필요한 요소들이 많다는 점이다. 툭히 눈길이 가는 것은 김홍도의 송하맹호도정선의 금강전도에 대한 저자의 풍부한 해설이다. 송하맹호도에서는 우리나라 호랑이가 우리 민족에게 차지하는 의미에서부터 호랑이의 습성과 일제치하 이후 사라진 배경에 이르기까지 상세하게 설명하고 있다. 또한, ‘금강전도를 해설하는 이야기에는 감히 엄두도 나지 않은 주역을 바탕으로 정선이 금강전도에 담고자 했던 조선의 현재외 미래에 대한 전망까지를 알 수 있게 한다.

 

한 점의 그림에 대해 연관된 그림과 그 그림을 이해하는데 필요한 다양한 요소들을 자세하게 설명을 담은 대중서는 많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왜 오주석 이런 욕심을 부린 것일까? 한마디로 오주석의 우리 옛그림에 대한 애정으로 볼 수 밖에 없다는 결론이다. 오주석은 조선의 땅에서 살아온 조선의 화가들, 문인들, 그리고 그들의 작품에 깊은 애정의 눈길을보낸다. ‘글씨든 그림이든 오랫동안 관찰하며 작품세계에빠져들고, ‘깊고 넓은 통찰력으로 그림 한 점 한 점을 아름다운 운율로드러낸다. 이렇게 하여 스스로 읽은 모든 조선 그림이 옛 모습 그대로 생생하게되살아나게 만들기 위해서다. 출간에 부쳐 글을 쓴 미술사학자 강우방의 말이 더더욱 와 닿는다. ‘제 모습을 보지 못하였던 조선 그림의 세계를, 뒤에 오는 그 누군가가 그 정신을 이어받아 펼쳐나가기를 마음 깊이 바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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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대는 어찌

겨울에도

시들지 않는

소나무처럼

변함이 없는가?"

 

 

추사 김정희(金正喜) 세한도(歲寒圖)

조선 1844, 종이에 수묵, 국보 제180

 

시절이 하 수상타. 세상이 온통 권세와 이득을 쫓느라 분분하니 흙먼지 인다. 어제의 벗이 손바닥 뒤집듯 오늘의 원수가 되고, 그렇다고 진정 미운 사람도 없어서 누구하고나 쉽게 손을 잡고 웃음을 판다. 어느 세상엔들 이런 한심한 꼴이 없었으랴만, 돌이켜보면 세상이 늘 그렇게 호락호락하지는 않았다.”

 

오주석이 세한도를 이야기하며 첫머리에 꺼낸 이야기다. 150여 년 전, 추사 김정희가 제주 유배지에서 느낀 마음과 크게 다르지 않을 오늘의 현실이 만만치 않음을 느낀다.

 

옛글에 권세와 이득을 바라고 합친 사람은 그것이 다해지면 교제 또한 성글어진다고 하였다. 그대는 어찌하여 겨울에도 시들지 않는 소나무, 잣나무처럼 변함이 없는가?”

 

제자 이상적을 보며 김정희가 썼다. 세상에서 강제로 추방된 사람이 느끼는 감회가 고스란히 담겼다. 차가운 겨울바람 앞에 맨몸으로 서 있는 듯 갈필의 흔적만이 고스란히 담겨있는 것이다. 한양으로부터 천리 길 너머 그보다 더 먼 바다를 건넌 사람에게 세상인심은 등을 돌렸지만 늘 변함없는 한 사람의 마음이 있었고 이를 있는 그대로 받아 안았다. 이상적은 나중에 스승 김정희의 부음을 듣고 평생에 나를 알아준 건 수묵화였네/흰 꽃심의 난꽃과 추운 시절의 소나무시 가운데서 이렇게 읊었다. 여기 추운 시절의 소나무가 세한도다.

 

세한도는 두 사람의 마음과는 달리 험난한 여정을 밟는다. 제주도에서 그려져 이상적에게 보내졌다가 연경까지 다녀왔고, 다시 김정희에게 갔다가 이상적이 소장하게 되었다. 그러다 이상적의 제자 김병선에서 그의 아들 김준학으로 2대에 걸쳐 소중하게 보관하였다. 이후 일제 강점기 경성대학 교수 후지즈키의 손에 들어가 광복 직전인 194310월 현해탄을 넘고 말았다. 그러다 천운으로 서화가 소전 손재형 선생이 일본 도쿄로 후지즈카를 찾아가 석 달 동안이나 끈질기게 설득한 끝에 가까스로 양도받아 다시 우리 땅으로 오게 되었다.

 

세한도에는 세상의 매운 인정과 그로 인한 씁쓸함, 고독, 선비의 굳센 의지, 옛사람의 고마운 정, 그리고 끝으로 허망한 바램에 이르기까지 필설로 다하기 어려운 많은 것들이 담겨져 있다. 석 자 종이 위에 몇 번의 마른 붓질이 쓸고 지나간 흔적에서 이러한 정서를 담았기에 문인화의 정수라 불리고 있다.

 

오주석이 사랑한 우리 그림책 속의 그림을 다시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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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품에 돌아온 문화재
국외소재문화재재단 엮음 / 눌와 / 201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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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자리 있을 때 더 빛날 우리 문화재

156천여 점, 국외소재문화재재단이 파악한 국외소재 우리 문화재 숫자다. 결코 적은 숫자가 아니기에 어떻게 해서 이런 일이 벌어졌는지, 국외 소재 문화재가 파악된 이후 반환을 위해 어떤 조치를 취하고 있는지 궁금할 수밖에 없다. 한때, 느낌표라는 공중파 텔레비전 프로그램에서 전 국민적 각성을 촉구하며 문화재에 대한 인식의 전환이 요구됨을 확인하기도 했다.

 

멀리는 두 차례에 걸친 조일전쟁과정과 제국주의 국가들과 국교수교과정, 일제식민지 과정에서 대거 약탈되었거나 불법적 반출, 매매의 과정을 통해 국외로 나갔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특히, 일본에 수많은 우리의 문화재가 있고 심지어 일본의 국보로까지 지정되어 있는 우리 문화재의 현주소를 정확히 밝히는 것이 필요한 것이 아닌가 한다.

 

이러한 국외소재 한국문화재를 체계적으로 조사·연구하고 그 가치를 널리 알리고 지원하는 일을 하고 있는 국외소재문화재단은 문화재보호법에 의해 문화제청 산하에 설립된 단체로 국외소재 우리 문화재 중 불법적으로 유출된 문화재는 되찾기 위해 힘쓰고, 그렇지 않은 문화재는 현지에서 최대한 활용하는 일에 앞장서고 있다. ‘우리 품에 돌아온 문화재는 그간 활동의 성과를 모아 책으로 발간 한 것이다.

 

국외소재문화재재단은 이 책 우리 품에 돌아온 문화재는 그 발간 목적을 확실히 하고 있다. 먼저, 해외 문화제 반환 사례를 보다 역사적 사실에 입각해 확인하고 소개하는 것과 두 번째로 문화재 반환 과정을 사례별, 유형별로 소개하여 그 속에서 찾을 수 있는 교훈과 시사점을 널리 공유하고자 함이라고 밝혔다.

 

우리 품에 돌아온 문화재에는 16가지를 사례별, 유형별로 묶어 문화재가 가진 가치와 그 문화재가 국외로 유출된 경로 그리고 이를 찾아내 국내로 가져오는 과정을 담았다. 돌아온 문화재를 유형별로 보면 소장자 기증, 정부협상, 민간의 노력, 민관협력과 일제강점기에 돌아온 문화재로 구별하여 살핀다. 이렇게 돌아온 문화재로는 추사 김정희의 세한도와 서화류, 와룡매, 테라우치문고 한국 관계 자료, 한일협정 환수문화재 1432, 어재언 장군 수자기, 외규장각 의궤 297, 고종어보 등 문화재 93, 경복궁 자선당 유구, 겸재정선화첩, 김시민 선무공신교서, 북관대첩비, 오대산사고본 조선왕조실록 47, 일본 궁내청 보관 한국 도서 1205, 주미대한제국공사관, 원주 법천사지 지광국사탑, 개성 경천사지 십층석탑 등이다.

 

이렇게 국외 소재 우리 문화재를 반환이나 기증, 대여와 같은 형식으로 국내로 가져오는 과정에서 걸림돌로 작용하는 것이 1965년 한일협정 당시 한국과 일본의 협정조항이 그 중심에 있다고 봐야 한다. 또한 문화재에 대한 국제법도 1970년 이전에 일어난 것은 보호받지 못한다는 점도 있다. 문화재 반환은 그 문화재의 가치에 국한된 문제가 아니라는 점이다. 곧 자국의 역사와 밀접히 관계 맺고 있기에 불법으로 취득한 것이라면 이를 인정하는 모양세가 되기에 각국이 이를 쉽게 용납하지 못하고 있다는 점이다. 하여, 국외소재문화재재단에서는 민간과 정부가 긴밀하게 협조하여야 한다고 밝히고 있다.

 

세계 각지에 흩어진 우리 문화재의 수는 최소 156천여 점을 많게는 30만 점에 이를 것으로 추정한다. 문화재는 우리 역사의 순간들을 상기시키는 것이며, 우리 민족의 정체성을 확인할 수 있는 소중한 유물이다. 문화재는 만들어진 당시 그 자리에 있어야 빛난다. 국외 뿐 아니라 국내에서도 마찬가지다. 일본으로 반출된 북관대첩을 가져와 그것이 있던 북한으로 돌려보낸 사례를 통해 확인 할 수 있다.

 

우리 품에 돌아온 문화재를 통해 소중한 민간인들의 노력이 주목되어야 하지 않을까 싶다. 프랑스 국립도서관 소장 외규장각 도서를 발견한 박병선, 테라우치 문고와 관련된 이종영, 고종어보 관련 조창수, 자선당 유구를 찾아낸 김정동, 겸재정선화첩을 가져온 선지훈 신부 등이 그들이다. 정부의 노력보다 민간인들의 노력에 의해 출발한 경우가 독보적으로 많다는 점을 주의 깊게 살펴야 할 것으로 보인다. 몽유도원도를 비롯해 아직 돌아보지 못한 우리 문화재에 대해 보다 국민 스스로 깊은 관심을 가져야 할 것이다. 이 기록은 문화재에 깃든 소중한 가치를 후손들과 전 인류에게 온전히 물려주고자 했던 살아 있는 역사이자, 숭고한 실천 활동의 기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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익살로

피어난

삼절의 내면

 

 

표암 강세황(姜世晃) 자화상(自畵像)

조선 1782, 비단에 채색, 보물 제590-1

 

꿋꿋하다. 그림에서 느껴지는 사람의 기개, 의지, 태도나 마음가짐 따위가 매우 굳세다는 말이다. 하지만, 이상하다. 입은 옷하고 머리에 쓴 모자가 도통 어울리지 않는다는 말이다. 관직에 나간 관리가 예를 갖춰 관복에 쓰는 모자인 오사모(烏紗帽)를 평상복에 쓰고 있으니 어울리지 않는다는 것이다.

 

조선시대 초상화나 자화상을 그리는 기본은 사람의 정신까지 오롯이 담겨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하여, 얼굴의 점이나 터럭하나 다르지 않게 그려야하지만 모양만 닮으면 초상화의 완성으로 보지 않았으며 엄격한 기준에 의해 그려졌다. 이점은 정조 때 영의정을 지낸 번암 체제공의 초상하에서는 사팔뜨기 눈을 그대로 그렸던 것에서도 볼 확인할 수 있다.

 

예원(藝苑)의 총수라고 불리는 강세황이 그린 자화상이다. 그가 왜 자신의 자화상을 이렇게 그렸을까? 그 이유를자화상머리의 좌우 여백에 빼곡히 쓴 찬문(贊文)은 강세황 자신의 써놓았다. 글씨인데 그 까닭을 이렇게 설명한다.

 

"저 사람이 누구인고? 수염과 눈썹이 새햐얀데/머리에는 사모 쓰고 몸엔 평복을 걸쳤구나/오라, 마음은 시골에 가 있는데 이름이 벼슬아치 명부(名簿)에 걸린 게라/가슴엔 수천 권 책을 읽은 학문 품었고, 감춘 손에 태산을 뒤흔들 서예 솜씨 들었건만/사람들이 어찌 알리오, 내 재미삼아 한번 그려 봤을 뿐인데/노인네 나이 일흔이요, 노인네 호는 노죽(露竹)인데/자기 초상 제가 그리고 그 찬문도 제 지었으니/이 해는 바로 임인년(壬寅年)이라."

 

오주석에 의하면 글에도 장난꽃이 가득 피었다고 보았다. 강세황은 36녀 중에서도 64세에 얻은 막내로서 많은 사랑을 듬뿍 받고 자란 늦둥이였다고 한다. 그래서 유달리 밝고 해학적인 성품을 지녔으니 그 제자인 김홍도 역시 농담에 능했고 시서화악(詩書畵樂)에 이르는 여려 교양을 섭렵한 것이 모두 스승 강세황으로부터 온 내력이었다는 것이다.

 

강세황(1713~17910)의 호는 표암(豹菴), 표옹(豹翁) 등이다. 그는 문인이자 화가, 평론가로 두루 활동하면서 많은 흔적을 남겼다. 노년에 한성판윤, 참판 등의 벼슬을 지내기도 했지만, 젊은 시절에는 벼슬에 뜻을 두지 않고 예원에 머물며 오직 학문과 서화에 매진했다. 강세황은 5점의 자화상을 남겼는데 조선시대 화가로는 매우 보기 드문 사례다. 또한 그가 송도松都(지금의 개성)를 여행하고 난 후 그곳의 모습을 화폭에 옮긴 <송도기행첩>에서 찾아볼 수 있듯이, 새로운 서양화법의 수용에도 기여해 18세기 조선미술에 변화와 생동감을 부여하기도 했다. 뿐만 아니라 김홍도의 스승이자 후원자로서 단윈의 위대한 예술을 탄생시키는 데에도 크게 기여했다.

 

오주석이 사랑한 우리 그림책 속의 그림을 다시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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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균의 생각
이이화 지음 / 교유서가 / 201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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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혁사상가로 허균에 주목한다

역사는 시각이 중요하다. 역사적 사실이나 인물을 볼 때 보고자 하는 사람이 어떤 목적으로 보느냐에 따라 그 해설의 결과는 달라질 수밖에 없다. 하여, 같은 사건이나 인물에 대해서도 판이한 결론을 도출하여 목적한 바를 주장하는 도구로 사용하게 된다. 그 과정에서 필연코 등장하는 것이 자의적인 역사해석이다. 문헌적 근거를 무시하거나 자신dpo게 유리한 부분만을 확대해석해서 결론을 도출하는 경우가 그런 것이다. 그렇기에 역사서를 선택하는 것도 어떤 사람에 의해 저술되었는가가 중요한 요소 중 하나이다.

 

허균의 생각의 저자 이이화는 50여 년간 역사 탐구와 저술에만 몰두해 온 역사학자로 어려서부터 한학을 공부하며 문학에 열중하기도 했으나 한국학에 더 매력을 느껴 역사 분야로 방향을 돌렸다. 민족문화추진회, 서울대 규장각 등에 봉직하였고, 성심여대 등에서 역사학도들을 지도하였고, 서원대학교 석좌교수를 지냈다. 저서로는 한국사 이야기를 비롯해 동학농민전쟁 인물열전’, ‘이야기 한국 인물사’, ‘조선후기 정치사상과 사회변동’, ‘한국의 파벌등이 있다.

 

허균이라고 하면 우선 홍길동전이라고 하는 최초의 한글소설의 저자로 기억하는 사람이 대부분일 것이다. 하지만, 홍길동이라는 역사인물이 시사하는 바는 문학에서의 소설가로서보다는 그를 죽임으로 몰아갔던 정치적 사안에 대해 주목해야 하는 것은 아닌가 한다. 시대적 한계를 넘어선 그의 행보를 주목하여 그가 이루고자 했던 사회 변혁적 사고가 오늘날 우리가 처한 현대사회에서 얼마만큼 유의미한 것인가를 확인하는 것이 역사인물 허균을 보는 이유가 될 것이다.

 

허균의 생각은 명문가에서 태어나 당대 최고의 문장가로 이름을 떨쳤으나 끝내 역모죄에 얽혀 능지처참에 처해졌던 허균의 파란만장한 생애와 사상에 대한 이야기를 담고 있다. 조선의 역사에서 허균만큼 철저하게 숨겨진 사람이 없을 정도로 묻힌 사람 중 하나이다. 우선 저자 이이화는 허균의 생애를 몇 가지로 나누어 살피며 그의 정치, 학문, 문학에 대해 상세한 이야기를 전개한다. 특히, 허균의 사상적 경향성에 있어 천하에 가장 두려운 존재는 오직 백성뿐이다라고 하는 호민론의 이야기를 중심으로 하고 있어 허균의 생애와 사상에서 무엇을 중심으로 살피고 있는지를 시사한다.

 

또한, 익히 잘 알려진 허난설헌의 동생, 서얼출신의 다양한 사람들과의 교류, 유학자로 신분으로 불교와 도교를 비롯한 타 사상에 대한 그의 관심과 새로운 사상인 천주교를 최초로 도입한 사람 등에 대한 저자의 이야기는 허균을 종합적으로 이해하는데 많은 도움이 될 것으로 보인다.

 

허균은 그가 살아 당시나 죽어서도 역사에서 철저하게 외면당한 주인공 허균에 대한 고찰은 그가 남긴 몇 편의 글로부터 시작하여 그의 정치, 학문, 문학의 지향성이 어디에 있는지를 살펴야 할 것이다. 이에 저자는 그의 글을 기본으로 삼고 당시의 집권세력 비판적 시각을 살펴 허균에 대한 종합적 고찰을 시도하고 있다. 저자에 의하면 허균은 사대부의 자제로서 유복한 삶을 누릴 수 있었는데도 당대의 권위에 과감히 도전했던 그의 고발정신과 저항정신, 그리고 개혁의지와 냉철한 현실인식은 개혁사상가로의 허균에 주목하고 있다.

 

역사학자 이이화의 역사를 보는 시각에 대해 공감할 수 없는 부분도 있다. 이이의 십만양별설이 그것이다. 역사학계에서도 정의내리지 못한 불분명한 설을 기정사실화하여 이이에 대한 평가를 하고 있는 점과 당시 계급제도나 왕도정치를 인정한 것에 대해 허균의 사상적 한계로 지적하고 있는데 이 점도 공감을 불러일으키기에는 한계가 있는 것은 아닌가 싶다. 그렇더라도 잊혀진 인물 허균을 불러와 그에 대한 종합적 평가를 시도하고 개혁사상가로서의 허균이 현대사회에서 주목받아야 한다는 것에는 많은 사람들이 동의하리라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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