익살로

피어난

삼절의 내면

 

 

표암 강세황(姜世晃) 자화상(自畵像)

조선 1782, 비단에 채색, 보물 제590-1

 

꿋꿋하다. 그림에서 느껴지는 사람의 기개, 의지, 태도나 마음가짐 따위가 매우 굳세다는 말이다. 하지만, 이상하다. 입은 옷하고 머리에 쓴 모자가 도통 어울리지 않는다는 말이다. 관직에 나간 관리가 예를 갖춰 관복에 쓰는 모자인 오사모(烏紗帽)를 평상복에 쓰고 있으니 어울리지 않는다는 것이다.

 

조선시대 초상화나 자화상을 그리는 기본은 사람의 정신까지 오롯이 담겨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하여, 얼굴의 점이나 터럭하나 다르지 않게 그려야하지만 모양만 닮으면 초상화의 완성으로 보지 않았으며 엄격한 기준에 의해 그려졌다. 이점은 정조 때 영의정을 지낸 번암 체제공의 초상하에서는 사팔뜨기 눈을 그대로 그렸던 것에서도 볼 확인할 수 있다.

 

예원(藝苑)의 총수라고 불리는 강세황이 그린 자화상이다. 그가 왜 자신의 자화상을 이렇게 그렸을까? 그 이유를자화상머리의 좌우 여백에 빼곡히 쓴 찬문(贊文)은 강세황 자신의 써놓았다. 글씨인데 그 까닭을 이렇게 설명한다.

 

"저 사람이 누구인고? 수염과 눈썹이 새햐얀데/머리에는 사모 쓰고 몸엔 평복을 걸쳤구나/오라, 마음은 시골에 가 있는데 이름이 벼슬아치 명부(名簿)에 걸린 게라/가슴엔 수천 권 책을 읽은 학문 품었고, 감춘 손에 태산을 뒤흔들 서예 솜씨 들었건만/사람들이 어찌 알리오, 내 재미삼아 한번 그려 봤을 뿐인데/노인네 나이 일흔이요, 노인네 호는 노죽(露竹)인데/자기 초상 제가 그리고 그 찬문도 제 지었으니/이 해는 바로 임인년(壬寅年)이라."

 

오주석에 의하면 글에도 장난꽃이 가득 피었다고 보았다. 강세황은 36녀 중에서도 64세에 얻은 막내로서 많은 사랑을 듬뿍 받고 자란 늦둥이였다고 한다. 그래서 유달리 밝고 해학적인 성품을 지녔으니 그 제자인 김홍도 역시 농담에 능했고 시서화악(詩書畵樂)에 이르는 여려 교양을 섭렵한 것이 모두 스승 강세황으로부터 온 내력이었다는 것이다.

 

강세황(1713~17910)의 호는 표암(豹菴), 표옹(豹翁) 등이다. 그는 문인이자 화가, 평론가로 두루 활동하면서 많은 흔적을 남겼다. 노년에 한성판윤, 참판 등의 벼슬을 지내기도 했지만, 젊은 시절에는 벼슬에 뜻을 두지 않고 예원에 머물며 오직 학문과 서화에 매진했다. 강세황은 5점의 자화상을 남겼는데 조선시대 화가로는 매우 보기 드문 사례다. 또한 그가 송도松都(지금의 개성)를 여행하고 난 후 그곳의 모습을 화폭에 옮긴 <송도기행첩>에서 찾아볼 수 있듯이, 새로운 서양화법의 수용에도 기여해 18세기 조선미술에 변화와 생동감을 부여하기도 했다. 뿐만 아니라 김홍도의 스승이자 후원자로서 단윈의 위대한 예술을 탄생시키는 데에도 크게 기여했다.

 

오주석이 사랑한 우리 그림책 속의 그림을 다시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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