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대용과 1766년 - 조선 지성계를 흔든 연행록을 읽다
강명관 지음 / 한국고전번역원 / 201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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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대용의 연행록을 통해 조선후기를 이해한다

조선후기를 대표하는 사람들로 북학파를 빼놓을 수 없다. 중국을 중심으로 세계관을 형성했던 조선사회에서 사상적 균열의 시발점이 북학파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박지원, 박제가를 비롯한 북학파로 불리는 일단의 사람들의 좌장격인 사람이 있다. 그가 홍대용이다.

 

홍대용(洪大容, 1731~1783)은 노론 집안의 양반 가문에서 태어나 여러 번 과거에 실패하고 음직으로 군수까지 지냈다. 천문, 지리 등 과학에 관심이 많았으며 특히, 거문고를 비롯하여 악기에도 탁월한 소질을 발휘했다. 그의 활약은 1765년 초의 북경(北京) 방문을 계기로 서양 과학의 영향을 깊이 받아서 가능해진 것이었다. 그가 중국을 방문한 것은 연행사(燕行使)의 서장관으로 임명된 작은아버지 홍억(洪檍)의 수행군관으로 60여 일 동안 북경에 머물면서 두 가지 중요한 경험을 했다. 하나는 우연히 사귀게 된 항저우(杭州) 출신의 엄성과 반정균, 육비 등 중국 학자들과 개인적인 교분을 갖게 된 일이며, 다른 하나는 북경에 머물고 있던 서양 선교사들을 찾아가 서양 문물을 구경하고 필담을 나눈 것이다. 이런 연행 기록은 연기(燕記)’을병연행록으로 남겼다.

 

강명관의 홍대용과 1766는 바로 홍대용이 연경을 다녀와서 남긴 연기(燕記)’을병연행록을 바탕으로 그가 걸었던 연행의 길을 따라가며 홍대용의 이야기를 펼쳐가고 있는 책이다. 박지원의 열하일기나 박제가의 북학의도 바로 홍대용의 연행록이 미친 영향으로 만들어진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만큼 홍대용의 연행록이 당시 조선 지식인 사이에 미친 영향력은 지대한 것이었다.

 

홍대용은 1765년에서 1766년 사이 청이 지배하던 중국을 방문하고 보고 느낀 것으로부터 당시 성리학을 중심으로 한 조선 사대부, 지식인들 사이에 광범위하게 펴져 있던 중화주의의 견고한 벽을 허물게 하는 계기가 되었다는 점을 주목해야 한다. 의외인 점은 과학적 기술의 선두주자였던 홍대용 역시 중화주의의 상상적 경향성이 강한 사람이었다는 점이다. 중국에 머무는 동안 새로운 과학지식을 얻고자 하는 것과 동시에 명나라를 잊지 않고 기억하는 선비들을 만나고 싶어 했다는 것이다.

 

그런 열망 속에 만난 사람이 바로 엄성, 반정균, 육비와 같은 선비들이었다. 홍대용은 이들과의 만남에서 서로 마음을 터놓고 호형호제하는 사이가 되었으며 귀국 후에도 편지를 통해 안부를 묻고 선비로써 갖춰야할 품성에 대한 이야기를 주고받는다. 이러한 만남은 후대 사람들에게 중국 지식인과의 사귐에 대한 귀감이 되어 박지원, 박제가, 이덕무와 같은 사람들이 중국을 방문하여 홍대용 이후 인적 교류가 이어지게 되었고 이후 김정희에게까지 전해지게 된다.

 

저자 강명관은 홍대용의 연행록인 연기(燕記)’을병연행록을 통해 이 여행기가 왜 당시 조선 지식인들에게 큰 논란거리가 되었는지, 그것이 이후 조선 사회에 어떤 영향을 끼쳤는지, 나아가 지금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는 무엇인지를 이야기 한다. 강명관이 홍대용에게서 주목하는 것은 상대에 대한 적극적인 관찰과 대화를 통해 편견을 깨고, 보다 앞선 세계에 대해서는 배우고자 하였다는 점이다. 홍대용을 통해 조선 후기 사상의 흐름과 변화 과정을 이해할 수 있는 기회로 삼을 수 있다는 점에 주목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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엎치락뒤치락,

들뜬 왼발과

떠오르는 오른발,

판났다!”

 

단원 김홍도(金弘道), 씨름

조선 18세기 후반, 단원풍속화첩 중, 종이에 수묵담채, 보물 제527

 

절정의 순간이다. 모여든 사람들이 각가지 모양으로 이 순간을 주목하고 있다. 구경꾼들이 만든 경계는 자연스럽게 씨름판이 되었다. 갓을 벗고, 부채를 흔들고, 얼굴을 가리고, 신발을 벗어두고 순서를 기다리고, 짐짓 딴청을 부리는 사람들이 모여 씨름판의 분위기를 고조시킨다. 곧 판가름 날 것 같은 상황이다.

 

누가 이길까? 오른쪽 하단의 두 사람은 낌새를 알아채고 움츠린 모습니다. 오주석에 의하면 이 사람은 너무 놀란 나머지 오른 손과 왼 손의 위치가 바뀌었다고 보았다. “꼼꼼히 살피지 않으면 전혀 의식할 수 없는 이 장면을 두고 화가가 씨름판의 열기와 긴박감에 취해 실수했다고들 하는 이도 있으나 아마도 뒷모습을 얼굴이 반 넘어 보이게 그리다 보니 아차하는 순간에 앞모습으로 착각한 것일 게다.”

 

모두가 이목을 집중하는 판에 오직 한사람만이 딴전이다. 엿장수는 씨름의 승부에는 관심 없다는 듯 먼 산을 바라보고 있다. 단오풍정의 한 단면을 묘사한 이 씨름판엔 무엇이 걸렸을까? 어린 시절 동네 씨름판엔 송아지도 걸려있고 쌀이나 솥단지와 같은 일상에서 필요한 것들을 상품으로 걸었다.

 

이 한편의 그림에서 알 수 있는 것들은 씨름판이라는 것 이외에도 많다. 평민과 양반이 누구인지, 구경꾼들의 신분은 물론 다음 출전 선수가 누구인지, 부채를 통해 세시풍속에 구경꾼의 성격까지 자세하게 알 수 있다. 그런데 모두 남자들뿐이다. 여자들은 어디 갔을까? 단오 날이라 여인네들만의 놀이가 있었다. 이런 다양하고 세심한 내용을 담고 있는 것, 풍속화가 가지는 긍정적 측면일 것이다.

 

이 그림이 씨름판 한 복판에 있는 것처럼 사실적으로 느껴지는 이유는 어디에 있을까? “빙 둘러앉은 구경꾼으로 동그라미를 이루게 하고 그들의 구심적인 시선의 한복판에 씨름꾼을 놓아 그림에 강한 통일성을 주었다. 하지만 통일성만 강해도 그림이 답답해질 우려가 있으므로 오른편 가를 일부러 텅 터놓았다. 또 시선이 모이기만 해도 단조로우니 엿장수는 짐짓 딴 데를 본다. 한편 갓과 벙거지를 적당히 흩어놓아 화면에 리듬감이 살아 있고 부채 또한 여기저기서 같은 역할을 한다.” 김홍도의 화격이리라.

 

단원(檀園) 김홍도(金弘道, 1745~1806 이후) 편안하고 인간적인 풍속화로 우리에게 친숙한 조선시대 화가다. 씨름, 서당, 무동, 대장간, 빨래터 등의 풍속화로 잘 알려져 있다. 그는 풍속화 분위기에 어울리게 얼굴도 희고 잘생겼으며 성격도 좋았다고 전한다. 거문고 대금 등 악기 연주에도 능했고 시도 잘 지었다고 한다. 또한 김홍도는 술을 좋아해 유명한 일화를 남겼다. “그림값 3000전을 받아 2000전은 매화를 사고 800전은 술을 마시고 겨우 남은 200전으로 쌀과 땔감을 샀다.”는 것이다. 김홍도의 풍속화가 이처럼 풍류가 넘치는 감각과 세상을 바라보는 따스한 시선이 있었기에 가능했던 것으로 보인다.

 

오주석이 사랑한 우리 그림책 속의 그림을 다시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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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복 입은 남자
이상훈 지음 / 박하 / 201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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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라진 장영실을 불러오다

네덜란드의 거장 루벤스가 그린 한복을 입은 남자(A Man in Korean Costume)’의 그림 속 주인공은 누구일까?

 

먼저 1993년 출간된 오세영의 베니스의 개성상인에서는 정유재란 때 왜국으로 끌려간 후 유럽으로 팔려간 유승업이라는 인물을 등장시켜 파란만장한 그의 일대기를 그려간다. ‘안토니오 코레아라는 이름으로 활동하며 그가 한복을 입은 남자의 주인공 일 것이라 짐작했다. 제목에서도 알 수 있듯 개성상인의 후예답게 전 유렵을 무대로 상업에 성공한 사람으로 그려졌다.

 

2014년 이상훈에 의해 새롭게 조명된 한복 입은 남자는 다르다. 루벤스에서 레오나르도 다빈치 그리고 조선에서 건너간 장영실로 이어지는 그림을 그려간다. 그 사이에 중국의 정화라는 실존 인물이 등장하여 이들의 만남을 매개하고 있다. 조선 초 세종 시절의 찬란했던 시대의 주역이었던 장영실의 사라진 역사에 주목하여 루벤스의 한복 입은 남자로 접근하고 있다.

 

먼저 장영실은 어떤 인물인가? 동래의 노비출신으로 종3품 대호군에 오른 입지전적인 사람이면서도 어느 날 석연치 않은 이유로 역사에서 사라진 사람이다. 자격루, 측우기, 신기전, 갑인자 등 세계사에 한 획을 긋는 위대한 발명품을 수없이 만들어내며 세종과 함께 조선 르네상스를 이끌었던 장영실이 가마를 잘못 설계했다는 이유로 철두철미했던 조선의 기록 문화 속에서 사라진 것이다.

 

이상훈이 주목했던 것은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스케치. 도르래 원리를 이용한 기중기부터 다연발 로켓, 물시계, 비차의 모형도까지 레오나르도 다빈치가 그린 수많은 스케치에는 우연으로는 도저히 설명할 수 없는 장영실과의 접점이 나타난다.”는 것이다. 이를 모티브로 하여 세종 시절 중국과의 마찰 그리고 중국의 대항해의 주역이었던 정화대장에 이르러 그 실마리를 찾아가고 있다.‘역사적 가정은 때로 역사적 진실로 진입하는 기회가 되기도 한다. 가정이 성립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사료와 고증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한복 입은 남자에서 이상훈은 루벤스의 그림 한복 입은 남자의 주인공은 안토니오 꼬레아가 아니다 라는 것이다. 한복 입은 남자가 입은 옷은 애초에 성인 남자의 의복이며, 그 의복의 시대가 조선 중기에 들어서서 입었던 의복과는 차이가 난다는 것을 통해 이를 그림 속 주인공이 조선 전기 인물이거나 그 후손임을 의미한다는 것이다. 또한 그림 속에 보이는 배의 모습이 그 당시에 유럽의 배 모습과는 차이가 나는 중국의 정크선이라는 점도 지적하고 있다. 나아가 루벤스의 성 프란시스코 하비에르의 기적에 등장하는 조선인의 모습이 그것이다. 이는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스케치 속에 등장하는 조선인의 모습의 연장선으로 보는 것이다.

 

하여, 이상훈은 장영실이 조선에서 사라진 후 중국의 정화대장을 만나서 대항해에 함께 나서고 오랜 시간을 걸쳐 유럽에 닿아 로마 교황을 만난 이후 피렌체 공국에서 동서양의 과학기술의 만남으로 이후 세계적인 발명품들이 만들어 졌다는 가정을 하고 있다. 이는 오세영의 안토니오 코레아보다 더 설득력 있게 다가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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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로였으면 좋겠다 - 최갑수 빈티지트래블, 개정판
최갑수 지음 / 꿈의지도 / 201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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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로를 안고 돌아오기 위한 여행

삶 자체가 여행이라고는 하지만 삶을 그렇게 받아들이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일상에 짓눌린 사람들에게 그래서 여행은 삶의 현주소를 찾게 하는 기회가 된다. 먼 길이든 오랫동안이든 여행은 이러한 물리적 제한 조건을 벗어난 범주에 있다. 여행길에 오른 사람이 걷는 발걸음 속에 무엇을 담고 있는가의 차이가 존재할 뿐이다.

 

국경을 벗어나 본 적이 없는 사람이지만 요사이 여행이라고 하면 그 범주는 더 이상 국내에 국한된 이야기가 아니다. 국내외를 막론하고 전 세계를 포함한 여행이 이제는 자연스럽다. 그렇게 여행을 다녀온 사람들의 이야기는 수많은 여행서적으로 남고 있으며 그만큼 많은 독자들을 확보하고 있다고도 말할 수 있다. 그렇게 많고 많은 여행서적은 여행을 생각하는 누구에게나 꼭 필요한 것은 아니다. 제각기 자신의 필요에 따라 선택하고 그 속에 담긴 여행자의 마음을 보고 느끼며 자신의 여행에 참고할 것이다.

 

여행길에 오른 사람이든 마음만 함께한 사람이든 여행서적을 읽는 이유는 무엇일까? 십중팔구는 대리만족에 있지 않을까 싶다. 이 대리만족에는 가보지 못한, 여행길에 오르지 못한 사람으로 동경도 있을 것이고, 경험자의 마음을 통해 스스로에게 위안을 주고자 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난 그 후자에 속한다. 여행자가 여행길에서 보고 느끼고 가슴에 담아 둔 이야기를 통해 삶이라는 여행길에 서 있는 자신에게 위로를 주고자 한다. 이렇게 독자에게 위로를 전하는 여행자 중 한 사람이 최갑수가 아닐까 한다.

 

이 책위로였으면 좋겠다생의 탐색가, 시간의 염탐자, 길의 몽상가라고 불리우는 2008년에 발간한 최갑수의 여행 책 구름그림자와 함께 시속 3km’를 새롬게 꾸민 개정판이다. 세계 각지를 발품 팔아가며 길 위에서 있는 동안 담아온 사진에 그 길 위에서 만난 마음을 짧은 글로 담았다. 이 책은 애써 여행의 과정을 쫒아가거나 이곳에 어디쯤일까 하는 궁금증을 일으키지 않는다. 그거 페이지 속 가득 채워진 사진에서 전해지는 느낌과 글을 통해 공감하면 된다.

 

언젠가는 다시 떠날 것이고, 다시 또 돌아올 것이니까. 조금 힘들어도 조금 부족해도 괜찮다고 믿는 것. 앞으로는 조금 더 나아질 것이라고 믿고 가는 것.”

 

최갑수의 여행에 대한 정의다. 그의 말처럼 여행은 떠남이 전재로 한다. 그 떠남은 다시 돌아올 것을 포함하고 있다. 떠난 길 위에서 만나는 모든 것은 결국 자신의 자리로 돌아 온 스스로가 자신의 현주소를 직시할 수 있는 힘을 얻는 과정이기 때문이다. 자신을 직시할 수 있는 힘은 결국 스스로를 위로할 때 가능해 진다. “길 위에서 여행자로 산다는 건, 익숙한 현실에서 익숙한 고민을 하는 것보다 몇 배는 더 큰 용기와 노력이 필요한 일이기에 여행은 현실의 가치를 새롭게 깨닫기 위해서다.

 

노트 한 권과 볼펜 한 자루와 운동화 한 켤레만으로도 충분한 여행이라면 그 여행은 분명 자신과 만남을 불러올 것이고, 여행자의 눈에 비친 소소한 풍경이 일상에 지친 사람들에게 따스한 온기를 전하는 매개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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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남쪽 어딘가

눈발 속

첫 매화 봉오리를

찾아서

 

 

김명국(金明國), 답설심매도(踏雪尋梅圖)

조선 17세기 중반, 모시에 수묵 담채

 

눈 속에 묻힌 풍경에 갇혔다. 산천초목 모든 것이 숨죽이고 봄을 기다리는 시간이다. 겨울은 그렇게 사람마저 움츠리게 한다. 눈 쌓인 풍경이 주는 멋을 충분히 누리고도 남을 만큼의 시간이 지나면서 점점 기다려지는 것이 있다. 아직 다 녹지도 않은 눈을 밟으며 찾아나서는 것, 바로 봄소식의 전령사 매화다.

 

'눈 밟고 매화 찾아가는 그림'은 조바심이다. 뭔가 기다리는 것이 있는데 시간은 더디 가고 소식은 좀처럼 오지 않는다. 그러니 길을 나설 수밖에 없다. 그것도 어둠이 채 걷히지 않은 새벽 눈빛에 의지해서 단단하게 무장하고 길잡이 앞세우고 나귀등에 올랐다. “머지않아 가지 위에 따스한 볕이 쪼이면 매화 봉오리가 살포시 실눈을 뜰지 모른다.”어찌 길을 나서지 않을 수 있을까. “겨울 끝머리에 가장 먼저 꽃을 피워 맑은 향기를 퍼뜨리는 농주미인(弄珠美人) 매화. 간밤 꿈속에 선비는 '구슬을 희롱하는 미인'을 보았다.” 이미 나선길인데 왜 뒤를 돌아다보는 것일까?

 

집 앞 나무는 가지가 메말라서 뼈만 남았다. 단지 나무뿐 아니라 산도 물도 모두 얼어 자연의 뼈다귀를 드러내었다. 성기고 메말라 보인다. 겨울 풍경을 담았으니 그러려니 하면서도 무엇인가 전해지는 것이 있다. 예각으로 틀어지면서 험상궂게 옹이를 드러낸 나무들. 잔가지 획을 게발처럼 뽑아 그렸기 때문에 해조묘(蟹爪描)라 부르는 이 필법은 혹심한 추위를 견디는 꼬장꼬장한 겨울나무의 혼이다.

 

연담(蓮潭) 김명국(金明國, 1600~1662년 이후)은 취옹(醉翁)이란 호도 사용했을 만큼 화원으로서 술을 매우 좋아했고 성격도 호방했다고 전해진다. 대표작인 달마도와 같은 선종화 외에도 산수화와 인물화 모두 잘 그렸다. 18세기의 화론가인 남태웅(1687~1740)청죽화사(聽竹畵史)란 저서에서 "김명국 앞에도 없고 김명국 뒤에도 없는 오직 김명국 한 사람이 있을 따름이다"라고 평했다.

 

오주석이 사랑한 우리 그림책 속의 그림을 다시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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