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 4.3을 묻는 너에게
허영선 지음 / 서해문집 / 201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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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반도 최남단에 존재하는 섬 제주도는 전 세계적으로 유명한 대한민국의 관광지 중 하나다. 연애 중인 커플들이나 결혼한 연인들끼리 놀러 가는 곳이기도 한 제주도는 평화롭고 경치도 매우 아름다우며 자연환경도 좋은 섬이다. 중국인 관광객들도 아름다운 자연을 보고 휴양하기 위해 많이 방문하는 곳이기도 하다. 현재 제주도는 미국의 하와이나 일본의 오키나와 중국의 하이난도(해남도) 그리고 인도네시아의 발리와 같이 참으로 여행하기 좋은 곳이다.


그러나 이렇게 평화롭고 여행하기 좋은 제주도는 지금으로부터 70년 전 참으로 비극적이다 못해, 지옥과도 같은 섬이었다. 그 당시 제주도는 송장 썩는 냄새가 코를 찔렀고, 투명하고 푸른 바다나 계곡은 피로 물들었으며, 한라산에 핀 꽃들은 붉게 물들었었다. 왜냐하면, 1948년 4월 3일을 시작으로 제주도에선 민간인을 대상으로 한 광기 어린 대학살이 일어났기 때문이다.


제주 4.3 항쟁이 어떻게 일어나게 됐는지를 보면 다음과 같다. 1945년 8월 15일 일본 제국주의가 패망하자 제주도는 해방을 맞았다. 일본 제국주의자들이 물러나자 여운형을 중심으로 한 건국준비위원회가 결성되어 전국적으로 새 조국 건설을 위한 사업을 해나갔고, 제주도에서도 건국준비위원회와 인민위원회가 자체적으로 조직되어 그 사업을 진행해나갔다. 그러나 그런 희망찬 사업은 1945년 9월 28일 미군이 제주도에 상륙하면서 물거품이 되고 말았다.


미군정이 제주에 들어왔을 초기 제주도에 자리를 잡은 인민위원회와 협력하는 방향으로 나갔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미군정은 일제 친일 경찰들을 등용하여 제주도를 통치하려 했고, 이러한 미군정의 행동은 제주도민들의 불만을 샀다. 더 나아가 미군정의 자본주의 경제 정책으로 제주도의 경제 사정 또한 안좋아 졌기에 민중들은 점차 미군정에게 반감을 사게 되었으며, 미군정 또한 제주도민에게 지배자로서의 모습을 보였다. 그 때문에 1947년 초에는 대략 300~400명의 학생이 미군정을 반대하는 시위를 하기도 했다.


1947년 3월 1일 제주도에서는 3.1 운동 제28주년 기념행사가 열렸다. 대략 3만 명 이상이나 되는 제주도민이 참가했던 이 행사에는 국내의 사회주의 조직이었던 남로당도 참가했었는데, 이를 좋지 않게 본 경찰이 어린아이를 말발굽에 부딪치게 만들면서 죽였고, 이에 반발하는 시민에게 총을 발포하여 10명 이상의 사상자가 발생하게 했다. 그 사건 이후인 3월 10일 남로당을 이끄는 좌익 계열 인사들과 민중들은 이에 총파업으로 맞섰고, 미군정과 경찰은 이 집회를 진압했다. 진압한 이후 그들은 서북청년회 출신의 인물들과 더 많은 우익경찰들을 제주도에 배치했고, 대대적인 좌익 탄압으로 나섰다. 그리고 이런 탄압은 서북청년단의 민간인 테러라는 형식으로 나타났다.


1948년 3월 초 제주도 내에 있던 남로당원들은 이러한 탄압을 견디지 못하고 무장투쟁 노선을 선택했다. 1948년 4월 3일 남로당 인사들은 무장봉기를 일으켜 반미 반제국주의 투쟁으로 나섰다. 이들이 무장투쟁으로 맞서자 이에 당황한 미군정과 경찰은 본토로부터 더 많은 병력을 투입했고, 우익 출신 경찰과 군인 그리고 서북청년단 단원들은 제주도에서 “빨갱이를 잡는다”는 명분을 내세워 광적인 학살을 하기 시작했다. 특히나 진압군 사령관이었던 송요찬이 이른바 ‘초토화 작전’으로 나서면서 수많은 민간인이 우익경찰과 군인 그리고 서북청년단에게 학살당했다. 좌익이 저지른 것도 없진 않았으나, 대체로 서북청년단과 같은 우익세력들을 대상으로 일어났다.


1948년 11월부터 시작되었던 초토화 작전은 1949년까지 계속되었다. 그 과정에서 진압을 거부한 여수 순천의 14연대는 이에 저항하여 무장봉기를 일으키기도 했었다. 아무튼 이러한 우익들의 학살로 인하여 제주도민 희생자 80% 이상이 우익들에 의해 무참히 희생되었다. 3만 명 이상의 민간인 희생자가 거의 다 우익들이 저지른 학살에서 생겼다는 것이다. 제주 4.3 항쟁 시기 우익들이 저지른 학살은 아이, 어른, 노인, 여자, 장애인을 가리지 않았다. 진압 작전에 나섰던 토벌대는 초등학교까지 가서 한 아이를 체포하여 운동장에서 총으로 쏴 죽이는 행보를 보이기도 했고, 빨갱이라고 의심한 무고한 민간인 여성을 강간하기도 했으며, 심지어 1살, 2살짜리 영유아도 마을 주민들과 같이 학살해버리는 만행을 저질렀다. 심지어 어떤 마을에선 수백명 단위로 학살되어 마을 하나가 전멸하는 경우도 있었다. 이런 광적인 학살은 1948년과 1949년 사이에 일어났다. 따라서 제주도는 시체 썩는 냄새가 진동했고, 푸른 바다는 죽은 사람의 피가 넘치는 바다가 되었으며, 한라산에 있는 꽃들은 죽은 사람의 피로 붉게 물들 수 밖에 없었다.


이런 제주도의 비극은 한국전쟁이 일어나며 다시 한번 반복됐다. 1950년 한국전쟁이 일어났을 당시 제주도민들은 다시 한번 검거당해야 했고, 이들 중 대다수는 쥐도 새도 모르게 처형당해 암매장 되고 했다. 따라서 빨갱이로 몰리는 것이 두려웠던 살아남은 제주의 젊은이들은 국군에 자진해서 자원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들에게 돌아온 것은 ‘빨갱이’라는 의심의 눈초리하고 연좌제라는 사회 제도적인 공권력 탄압이었다. 4.3을 겪었던 제주도민들은 자신들의 겪은 고통에 대해 말할 권리를 잃었다. 그 때문에 이승만, 박정희, 전두환 독재정권 시기 과거에 침묵하며 살아야 했다. 이들의 억울한 죽음과 기억이 재조명되기 시작한 건 대한민국이 민주화가 되면서부터였다.


1948년 제주 4.3 항쟁 당시 대략 3만 명 이상이나 되는 민간인들이 무차별 학살당했다. 그 학살에는 대한민국 대통령 이승만이 있었고, “대한민국을 위해 전도에 휘발유를 부어 30만 도민을 모조리 죽이고 모든 것을 태워 버리라”라고 말하며 강경 진압에 나섰던 조병옥이 있었으며, 미군정이 있었다. 누군가는 제주 4.3 항쟁을 폭동이라고 한다. 특히나 이승만 찬양에 열을 올리는 극우 뉴라이트 세력들이 그러하다. 그들은 제주 4.3 항쟁을 무고한 민간인들을 대량으로 학살하던 토벌대와 이승만의 입장에서 제주 4.3 항쟁을 해석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는 바람직하지 못한 역사관이다. 지금 당장이라도 그들에게 이 책을 읽어보라 추천해주고 싶을 정도다.


허영선 시인이 집필한 이 책을 읽으면서 슬픔과 분노를 감출 수 없었다. 책 한 페이지씩 넘기는 것이 너무나 고통스러웠다. 책 한 페이지마다 지옥도를 경험했던 제주도민들의 고통이 너무나도 잘 표현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거기다 저자가 시인이다 보니 시적 감수성을 자극하는 요소들도 많았기에 더 와닿았다.

 

 

지금으로부터 1년 전인 2018년 1월 필자는 제주 4.3 박물관을 방문했었다. 당시 그곳을 방문한 필자는 눈물을 흘렸었다. 도대체 왜 이 무고한 사람들이 이렇게 학살당했는지를 생각하다 보니 자연스럽게 눈물이 흘렀다. 이번 기회에 허영선 시인의 ‘제주 4.3을 묻는 너에게’를 읽게 된 건 참으로 의미 있는 일이다. 이 책의 장점은 제주 4.3 항쟁과 그 역사적 배경 그리고 한국 현대사에 대해 전혀 모르는 일반인들도 충분히 공감할 수 있도록 쓴 책이다. 따라서 역사 지식이 없더라도 책의 내용을 이해하는데 전혀 문제가 되지 않을 것이다. 많은 사람에게 일독을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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