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운형 - 독립과 통일 의지로 일관한 신뢰의 지도자 독립기념관 : 한국의 독립운동가들 88
변은진 지음,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 역사공간 / 201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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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방 이후 "조선을 이끌어나갈 저도자"를 선택하는 여론조사에서 이승만과 김구를 재치고 단연 1위를 한 지도자가 있었다. 그는 젊은 시절 집에 있는 노비를 해방시켰고, 1919년 김규식을 파리강화회의에 보내 3.1 운동의 불씨를 제공했으며, 해방 후 좌우합작운동을 전개햐여 통일 정부 수립을 위해 헌신한 인물이었다. 그가 바로 몽양 여운형이다.

 

해방 정국 시기 그의 인기는 참으로 대단했었다. 1937년 중일전쟁과 1941년 태평양 전쟁을 거치면서 많은 사람들이 독립운동 노선에서 친일로 변절할 때, 일본제국주의의 회유와 억압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지조를 지켰던 그는 노르망디 상륙작전 이후인 1944년 8월 국내에서 건국동맹과 농민동맹을 조직하여 일제의 패망을 국내에서 대비했던 인물이었다. 마치 나치독일 치하에서 독립운동을 전개하던 프랑스의 레지스탕스가 좌우연합하여 나치독일에 맞서 파리 해방을 미리 대비했던 것 처럼 말이다. 비록 광복군 국내 탈환 작전이 성사되지 않아서, 여운형이 조직한 건국동맹이 일본 제국주의에 맞서 민중봉기를 일으켜 그 민중의 군대가 일본군을 무장 해제 시키지는 못했으나, 일본 제국주의자들과 친일파들이 일본 제국주의의 전쟁을 미화하며 그들조차 속고 있었을 시기 일제의 패망을 예견하고, 그 이후를 대비했다는 사실 자체가 참으로 대단한 일이다. 거기서 더 나아가 그는 총독부의 엔도 류사쿠 정무 총감과 협상하여 총독부로 부터 행정권을 이양받고, 일본 천황의 항복 소식과 동시에 감옥에 있던 정치범들을 석방시켰다. 자신의 조직인 건국동맹을 건국준비위원회로 발촉시켜 무정부 상태를 막고, 전국적으로 치안유지와 조국건설 사업을 추진해나갔었다.

 

그랬던 여운형이기에 해방 후 대한민국 국민이라면 거의 다 아는 독립운동가 백범 김구와, 임시정부 초대 총령이자 대한민국 제1공화국 대통려인 이승만보다 더 인기가 높았던 것이다. 일제시기에는 독립운동 해방 이후에는 좌우합작과 남북통일정부수립에 힘을 썼던 그는 안타깝게도 12번의 테러 끝에 혜화동 로터리에서 괴한의 총탄에 맞고 비명횡사했다. 그가 암살로 생을 마감한 이후인 1948년 남북분단정부가 수립되고, 1950년에는 우리 역사의 비극인 한국전쟁이 일어나 수백만이 죽었다는 사실을 생각해 봤을 때 그의 죽음은 너무나도 안타까운 사건이다.

 

이 뿐만이 아니다. 그는 이승만 박정희 전두환 정권시기 잊혀진 인물이었고, 아직도 많은 이들이 그의 이름을 모른다. 노무현 정부가 들어선 2005년 공로를 인정받고, 2008년에는 대한민국장 1급에 추서됐으나, 일반사람들에게 있어서 그가 이룬 업적에 비해 많이 잊혀졌다.

 

해방정국 시기가 아닌 그의 독립운동 행적만 보더라도 몽양 여운형은 분명 이룬 업적에 비해 많이 잊혀졌다는 주장은 맞는 말이다. 위에서 상술했듯이 젊은 시절 그는 을사조약 이후 자신의 집에 있던 노비들을 전부 해방시켰고, 애국계몽운동에 참가했다. 경술국치 이후 그는 중국으로 넘어가 유학했고, 1918년에는 신한청년단을 조직하여 3.1 운동에 불씨를 제공했으며, 임시정부의 일원으로써 일본으로가 일본고위급과의 회담에서 조선독립을 역설하였다. 그는 1920년대 초 한국 노병회를 조직하여 무장투쟁을 준비했었고, 모스크바에가 레닌과 트로츠키를 만나 조선 독립의 필요성을 설득했다. 1920년대 중국에서 활동하며 중국의 손문, 마오쩌둥, 장개석을 비롯한 중국의 좌우를 아우르는 인물들 사이에서 제1차 국공합작에도 일부분 기여했고, 베트남의 호치민과도 만나 교류했었다. 1930년대에는 조선중앙일보 사장으로 있으면서 언론활동을 통해 일제시대의 현실을 비판했고, 1936년 일장기 말살사건을 주도했다. 그리고 일제가 패망하기 1년 전인 1944년 건국동맹을 결성하여 일제의 패망을 대비했었다. 독립운동사에 있어서 그를 빼놓고 논하는 것은 사실상 주연이 없는 것과 마찬가지라고 볼 수 있다.

 

그가 꿈꾸던 남북통일정부수립은 우리에게 있어서 현재진행형이다. 현재 한반도는 평화를 향해 변화해가고 있다. 최근 들어 북한과 미국간의 제2차 정상회담이 베트남 다낭에서 열릴것이라는 얘기도 들린다. 이는 한반도의 정세가 대립에서 평화로 바뀐다는 것을 뜻한다. 따라서 지금으로 부터 70년 전 좌우와 남북의 통일을 꿈꾸던 그를 돌아보는 일은 필요하다. 그를 다룬 대중적인 영화나 드라마가 나와 많은 사람들에게 알려지기를 바라며 서평을 마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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