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0년대 이승만과 임정 탄핵 그리고 이봉창 윤봉길 의거

(상해 임시정부에 도착하여 임정요인들에게 환영 받았던 이승만, 임시정부 인사들은 그와 노선적 갈등이 있었지만 그가 상해에 도착했을 때 그를 환영해주었다.)    

 

1919년 상해에서 탄생한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초대 대통령이 된 이승만은 독립운동사에서 화합의 상징이 아닌 분열과 갈등 그리고 사리사욕의 상징이었다. 이승만의 대통령 선임을 둘러싼 갈등에서 외무총장인 박용만과 교통총장 문창범이 취임을 거부한 데에 이에 신흥무관학교를 새웠던 이회영과 신채호 같은 무장투쟁론쪽 인물들이 상해를 떠나 북경으로 올라갔다. 또한 러시아 혁명 이후 1918년 한인사회당을 창설하여 사회주의 계열 독립운동의 길을 열었던 이동휘는 레닌이 지원한 독립자금 관련한 문제를 독자적으로 처리하다 물의를 일으켜 1921년 임시정부를 떠나게 됐다.

 

1920년 당시 미국 수도 워싱턴에 머물고 있던 이승만은 그해 125일 상해에 도착했다. 상하이에 도착한 이승만은 독립운동가 여운형의 소개로 프랑스 조계에 위치한 미국인 안식교 선교사 크로프트 목사의 집에 기거하면서, 1213일 임시정부 청사를 방문하고, 처음으로 국무위원, 의정원 의원들과 상면했다. 임시정부의 독립자금을 사리사욕을 채우는데 사용하던 이승만이었지만, 그가 도착하자 임시정부 요인들은 갈등은 뒤로하고 환영파티를 열어주었다. 그러나 그런 환영도 잠시였다. 이승만이 상해에 도착한 지 한 달 만에 국무총리였던 이동휘가 사표를 제출했고, 그 뒤를 이어 안창호와 김규식 등이 차례로 임시정부를 떠났다. 당시 임시정부는 이승만이 상해에 거주하게 됨에 따라 외교론을 고수했는데, 이런 이승만의 외교독립론은 많은 이들에게 분열을 일으켰다. 민족문제연구소에서 만든 두 얼굴의 이승만에 따르면 그의 외교독립론은 다음과 같다.

(당시 이승만의 진정한 목적, 그는 독립자금을 횡령하여 자신의 사적인 영역에 사용했다.)

  

우리 형편상 전쟁준비는 국민들에게 맡기는 것이 옳다. 국내외 일반 국민들은 각자 직업에 종사하면서 여가시간에 병법을 연마하라. 무기도 각자 구하라. 그러다 좋은 시기가 오면 일제히 나서 싸우자.”

 

민족문제연구소의 다큐멘터리에 따르면 이승만이 이런 허무맹랑한 비젼을 내놓은 데에는 돈줄과 연관되어 있었다. 임시정부가 수립된 이후 한인들은 독립성금을 냈다. 정부는 예산을 편성해서 독립군 부대를 양성했다. 그런데 소위 대통령이라는 이승만이 여기에 끼어들어 소위 중개인 역할을 해왔던 것이다. 그는 성과가 사실상 없는 외교활동을 주장하며 13%만 정부에 송금했는데, 그러나 독립전쟁 준비를 모두 국민들에게 떠넘기면 얘기가 달라진다. 이렇게 되면 이승만으로서는 정부에 보낼 돈을 파격적으로 줄일 수 있기 때문이다. 즉 이승만은 독립운동을 사적인 이익을 위해 대통령을 자처하며 이러한 짓거리를 했던 것이다.

 

이런 허무맹랑한 주장을 하던 이승만에게 임정 요인들이 좋은 감정을 가질 수가 없었다. 당시 임시정부 국무위원들은 이승만이 정부가 수립된 지 1년 밤만에 왔으니 임시 대통령으로서 어떠한 방책을 준비해 온 것으로 믿고 기다렸지만, 그는 아무런 방안도 내놓지 못했다. 따라서 이승만에게 기대를 걸었던 임정 요인들은 실망할 수밖에 없었다. 이에 반발하여 이동휘ㆍ안창호ㆍ김규식ㆍ남형우 등 거물급 지도자들이 속속 임시정부를 떠났고, 이승만은 이들을 붙잡아 포용하려는 대신 신규식ㆍ이동녕ㆍ이시영ㆍ노백린ㆍ손정도 등을 새 국무위원으로 임명하여 위기를 넘기고자 했다.

 

이승만이 주장했던 외교독립론과 대척점에 있었던 무장투쟁론은 만주에서 여러 성과물을 만들어 냈다. 조선 시대의 현재 기준으로 수백억원의 재산을 소유하고 있던 이회영 선생은 1911년 신흥무관학교를 세워 무장 독립군을 양성하는데 최선을 다했다. 1919년 젊은 청년 약산 김원봉이 창설한 의열단은 1920년대 여러 가지 사보타주 활동을 함으로써 일본 제국주의자들과 그 압잡이들을 공포에 떨게 했다. 1920년 당시 만주 각지에서 조직된 무장독립군 세력은 홍범도의 지휘 아래 봉오동 전투에서 대승을 거두었고, 김좌진 장군의 지휘 아래 청산리 전투에서도 대승을 거두었다. 봉오동 전투와 청산리 전투에서 패배한 일본 제국주의자들은 간도 참변을 일으켜 소름끼치는 만행을 저질렀다. 이러는 시기 이승만이 대한민국임시정부 대통령으로서 한 것은 별로 없었고, 임시정부는 이승만의 독선과 독주로 요인들이 하나 둘씩 떠나가고 말았다.

(이승만이 독립운동 시절 당시 그가 보인 행적, 그는 돈가지고 장난치는데는 고수였다.)

 

이처럼 이승만의 독선적인 정부 운영과 무대책에 실망한 임시정부 국무위원들과 의정원 의원들은 국민대회를 준비하면서 지도체제를 대통령중심제에서 국무위원중심제 즉 일종의 내각책임제로 바꾸는 개헌작업을 시도했다. 이승만이 이에 반대하면서 임정은 더욱 분열상이 가중됐다. 이승만이 반대의사를 표명해도 바뀔 기미가 보이지 않자 그는 1921529일 마닐라행 기선 콜롬비아호를 타고 상해를 떠났다. 물론 그는 대통령직을 절대 사퇴하지 않았다. 그로부터 한달 뒤, 하와이 호놀룰루에 도착한 이승만은 민찬호 등과 대한인동지회를 조직하고, 동지회 창립석상에서 임시정부를 맹렬하게 비난하는 모습을 보였다. 이것은 자신에 반대한 임정 세력들에 대한 치졸한 보복행위였다.

 

이승만은 임시정부로부터 1921929일 태평양회의(위싱턴 군축회의)에 참석하라는 지침을 받고 하와이에서 수도 워싱턴 D.C로 돌아왔다. 그는 상하이 임시정부에서 자신의 위상이 흔들리는 것을 지켜보고 미국으로 돌아온 이승만은 워싱턴 D.C.의 구미위원부를 한국위원회(The Korean Commission)로 바꾸고 활동 근거지로 삼았다. 그는 김규식이 워싱턴에 도착한 것을 계기로 이승만 등이 한국위원회를 발족 김규식을 위원장으로 위촉하고 워싱턴회의에 참석하는 미 대표에게 <한국독립청원서>를 제출했지만, 당시 서구 제국주의 열강 국가들에게 한국의 독립문제는 안중에도 없었고, 워싱턴회의는 아무런 성과 없이 끝나고 말았다.

 

워싱턴회의 이후 이승만은 하와이에 아예 정착하게 됐다. 19236월 자신이 운영하는 한인기독학원의 남학생 12, 여학생 8명으로 하와이학생 고국방문단을 구성하고, 자신이 운영하던 학교 건축비 조달을 목적으로 호놀룰루 주재 일본총영사관과 교섭하여, 이 학생들이 일본 여권을 갖고 한국을 방문하게 했다. 그는 여기서도 일본에게 우호 내지는 친화적인 발언을 수도 없이 많이 했다. 임시정부와 이승만의 갈등은 점점 심각해졌다. 그가 무책임하게 상해를 떠난 이후 상해임시정부는 극심한 분열상을 보였고, 임시정부 의정원들은 미국에 건너간 이승만에게 전보를 보내 수습을 요청했지만, 그는 사태수습을 외면하고 답신조차 보내지 않았다. 임시정부 의정원은 이승만 대통령 불신임안을 제출하여 일주일 간의 토의 끝에 617일 재적의원 3분의 2의 찬성으로 불신임안을 의결하였다. 정부 수립 6년여 만에 임시 대통령 불신임안이 채택된 것이다.

 

임시 의정원의 불신임결의에도 이승만은 이를 강건너 불구경하듯이 봤고, 그는 구미위원부 사업을 빙자하여 임시정부의 허락도 없이 독립공채를 팔아 자신과 측근들의 활동비에 충당했다. 1925311일 임시정부 의정원의원 곽헌ㆍ최석순ㆍ문일민ㆍ고준택ㆍ강창제ㆍ강경신ㆍ나창헌ㆍ김현구ㆍ임득신ㆍ채운개의 명의로 임시 대통령 이승만 탄핵안이 발의되고, 임시 대통령심판위원장 나창헌, 심판위원 곽헌, 채원개, 김현구, 최석순이 선임되었다. 이에 따라 이승만은 임시 대통령에 취임한 지 6년여 만에 의정원에서 면직되었고, 쉽게 말해 탄핵됐다

(1925년 임시정부의 이승만 탄핵 문서, 우리는 2017년 박근혜가 탄핵된 것을 두고 대한민국 역사 최초로 탄핵에 성공했다 했지만, 박근혜 탄핵 90년 전 이승만 또한 임정에서 탄핵당했다.)

 

1925410일 상해임시정부 의정원은 이승만이 주도하고 있는 구미위원부의 폐지령을 공포했지만, 이승만은 이에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러나 3년 뒤인 1928년에 구미위원부는 폐쇄상태가 되고 말았다. 1920년대 중후반 이승만은 주로 하와이에 머물면서 활동했다. 이승만이 탄핵당한 이후 임시정부의 주석 자리에는 민족주의자인 백범 김구가 오르게 됐다. 그는 비록 반공주의적이고 우익 민족주의적인 인물이었지만, 조국을 일제로부터 독립시키겠다는 의지가 매우 강한 열렬한 독립운동가였다. 그는 임시정부가 가장 어려운 시기 임시정부를 지켰다

(윤봉길 의거에서 보인 이승만의 반응)

 

사실 대한민국임시정부가 다시 활동적인 단체로 거듭난 것은 1932년 백범 김구가 주도했던 이봉창 윤봉길의 의거를 통해서였다. 1932년 한인애국단원 이봉창은 일본 도쿄에서 일본 제국주의자들이 살아있는 신으로 모시는 천황을 암살하려고 하다 체포됐다.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 상해 홍구공원에선 한인애국단원 윤봉길이 던진 물통 폭탄으로 주중 일본공사 시게미츠 마모루를 포함한 일본 제국주의의 거물들 7명이 죽고 부상당했다.

 

이 사건은 독립운동사에 큰 영향을 주었다. 이를 알게된 중국의 장제스 총통은 100만 명의 중국인이 하지 못한 일을 조선인 1명이 했다고 하며 칭찬을 아끼지 않았고, 대한민국임시정부를 물질적으로 지원하게 됐다. 당시 윤봉길 의거의 방법론에는 비판적인 견해를 가졌던 조선공산당의 박헌영도 19327월에 박헌영은 '상하이 폭탄 사건은 무엇을 의미하느냐?'라는 제목으로 이 사건을 다루며, '윤봉길의 의거는 결코 살인이 아니며, 일제의 대표들을 죽이고 병신을 만들었다는 것은 참으로 통쾌한 기분'이라고 집필했다.

(장제스와 이승만이 보였던 윤봉길 의거에 대한 반응, 같은 극우파임에도 이처럼 독립운동에 대해 대조적인 모습을 보였다.)

 

그러나 당시 미국에 있던 이승만의 반응은 과거 장인환 전명운 열사가 단행했던 스티븐슨 사건에서 보인 행보처럼 이봉창 윤봉길 의거에 대해서도 주제넘게 평가절하했다. 이승만은 윤봉길 의거에 대해 이런 행동은 어리석은 짓이며, 일본의 선전내용만 강화시켜 줄 뿐 한국의 독립을 가져다주지는 못할 것이다.”라고 했다. 196587일 경향신문에 실렸던 <이승만박사 해외독립운동 내막>을 보면 다음과 같은 내용이 나온다

(1933년 스위스 제네바에 있는 국제연맹 건물에서 찍은 이승만 사진)

 

“19321월 이봉창 의사는 일본 천황을 암살하려 했고 윤봉길 의사는 상해에서 시라가와 대장을 비롯한 일본의 유력 인사들에게 폭탄을 던져 여러 명을 폭살 또는 불구로 만들었다. 그리고 만주를 비롯해서 고국에 무장투사가 잠입하여 일본인들의 간담을 서늘케 했다. 이때 이승만은 이러한 행동을 크게 비난하고 어리석은 짓들이라고 조소했다. 미국 신문 <크로니클>지 보도에 의하면, 그 당시 이승만은 이른바 비밀사절을 상해 임시정부에 파견하여 테러행위를 즉각 중지하도록 설득하였다고 한다. 이승만에 의하면 이봉창이나 윤봉길 의사의 의거가 한국의 독립에 하등 도움도 되지 않을 뿐더러 일본으로 하여금 한국을 탄압하는 구실밖에 주는 것이 없다고 했다.”

(일본 내막기, 진주만 기습공격이 일어나기 전 이승만이 쓴 책이다. 일각에서는 이 책을 가지고 이승만의 반일사상을 높게 평가하지만, 그 이전에 이승만이 미국의 비위를 맞추기 위해서 보여주었던 행동들을 생각하면 이는 정반대의 모습이다.)

 

이승만은 1925년 임시정부에서 탄핵당했지만, 자신의 사리사욕을 채우는 행위를 끝내지 않았다. 그는 1910년대 초와 1920년대 당시 일본에 대해 우호적인 사설이나 발언들을 자주 했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초대 대통령이라는 권위를 이용해서 독립자금을 사적인 영역에 이용했다. 백범 김구가 조직한 한인애국단의 이봉창 윤봉길 의사가 의거를 감행했을 때, 이것은 독립운동에 방해되는 짓이라며 이를 주제넘게 평가 절하했다. 이러는 시기 국제정세는 점차 일본의 군국주의화를 불러왔고, 일본의 극단적 군국주의화는 미국과의 대립으로 이어졌다. 이런 과정을 거치면서 이승만 또한 일본에 대한 반일적인 모습을 보이게 됐다. 결정적으로 1941127일 일본의 진주만 기습 공격이 있고 나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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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인96 2020-05-06 17:3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한국 현대사 최대 비극은 이승만이 초대 대통령이 되었다는 것이죠. 글 잘 읽었습니다. :)

NamGiKim 2020-05-06 17:41   좋아요 1 | URL
김삼웅 선생의 책과 민족문제연구소 다큐 그리고 그외의 몇개 서적들 참고해서 썻습니다. 하루빨리 이승만식 반공주의를 벗어나야 할텐데
 

위임통치론과 대한민국 임시정부 초대 대통령 이승만

(파리강화회의 당시 모인 연합국 정상)   

 

이승만이 하와이에서 세력을 형성하고 있을 시기 식민지 조선과 세계 정세는 변화해 가고 있었다. 1910년 조선을 식민지화 한 이래로 일제는 소위 무단통치를 실행했다. 무단통치란 일본이 조선의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등 모든 부분에서 강점정책을 실행하던 통치였다. 그들은 조선총독부를 만들어 조선의 행정권, 입법권 그리고 군대사용권 등을 모두 가지고 있었고, 일본 헌병이 경찰력을 대신했다. 일본이 조선을 무단통치롤 지배하고 있을 시기 세계는 크나큰 전쟁에 휩싸였다. 그 전쟁이 바로 제1차 세계대전(World War 1)이다. 1914628일 세르비아의 한 청년이 오스트리아의 황태자를 저격한 것으로 시작된 제1차 세계대전은 유럽의 거의 모든 국가가 참전하게 되는 전쟁이었고, 1000만 명 이상 죽게 만든 전쟁이었다. 이 과정에서 미국은 1917년에 참전하게 됐고, 1918년 연합국 측은 독일제국의 항복을 받아낼 수 있었다.

 

1차 세계대전이 끝나면서 전승국들은 연합국과 동맹국 간의 평화조약을 협의하기 위해 1919년 프랑스에서 파리강화회의를 열었다. 당시 미국의 대통령이자 이승만의 스승이기도 한 우드로 윌슨은 소위 민족자결주의를 표방했는데, 이것은 제국주의 국가에 짓밟혀왔던 약소 민족국가들 사이에서 유행하게 됐다. 파리강화회의가 열릴 시기 신한쳥년당을 이끌었던 독립운동가 여운형(Lyuh Woon Hyung, 呂運亨)은 김규식을 프랑스 파리에 보내 열강들에게 독립을 청원하고자 했다. 당시 미국에 있던 이승만은 191916일 하와이 호놀룰루를 출발하여 122일 대한인국민회 중앙총회장인 도산 안창호(安昌浩) 만났다. 그 뒤 뉴욕을 거쳐 23일 필라델피아에서 서재필을 만났다. 이승만은 서재필, 정한경, 장택상 등과 회동하고 필라델피아를 떠나 수도 워싱턴 D.C로 달려가 파리행 여권을 준비했다. 그는 여권 취득을 위해 윌슨 대통령을 면담하고자 했지만, 윌슨은 자신의 제자인 이승만을 만나주지 않았다. 결국 이승만과 그 일행은 파리 강화회의 참석이 불가능하게 됐다.

(이승만의 위임통치 청원서 내용)  

  

파리강화회의에서 강대국들은 식민지 조선의 상황을 무시했지만, 그해 식민지 조선에선 전국적으로 반일운동이 일어났다. 그것이 바로 3.1 운동이다. 3.1운동은 전국적으로 일어난 저항운동이었고, 비록 일제의 잔인한 진압으로 끝났지만, 민중 대부분이 참여했다는 점에서 큰 의미가 있었다. 이승만은 파리강화회의 참석이 좌절되면서 새로운 방안을 모색했다. 그것이 바로 위임통치 청원이었다. 1919225일 이승만은 위임통치 청원서를 우편으로 미국 대통령과 파리강화회의에 제출하였는데, 이 청원서 내용이 국내외 독립운동 진영에 알려지면서 독립운동 세력들은 크게 분노했다. 그가 작성한 청원서의 한 부문은 다음과 같다.

 

저희들은 자유를 사랑하는 1500만 한국인의 이름으로 각하께서 여기에 동봉한 청원서를 평화회의에 제출하여 주시옵소, 연합국 열강이 장래 한국의 완전한 독립을 보장한다는 조건하에 일본의 현 통치로부터 한국을 해방시켜 국제연맹의 위임통치하에 두는 조처를 취할 수 있도록 지지하여 주시기를 간절이 청원하는 바입니다.”

(1919년 필라델피아에서 열렸던 거리행진)  

  

아무튼, 이와같은 이승만의 위임 통치서가 알려지자 독립운동가들은 분통을 터뜨렸다. 더 분기충천하게 만든 일은 1919314일 이승만의 측근인 정한경이 미국 신문과의 회견에서 한인들이 원하는 것은 국제연맹 회의에서 한국을 관할하되, 민주정치를 쓰는 미국이 한국정치를 고문하여 차츰 한국의 기초를 굳건히 하고자 하는 데 있다라고 설명한 데에 있다. 즉 이승만이 주장한 위임통치론은 말 그대로 미국이 대신 조선을 일본 대신 통치해주자는 발언이었고, 이것은 이승만의 친미사대주의적인 발언이었다. 이승만과 정한경은 3.1운동 소식이 미국에 전해지고 난 다음에도 위임통치 문제를 가지고 미국 언론의 주목을 끌고자 했었다. 이것만 보더라도 이승만이 보인 행동은 친미 사대주의적인 행보였다. 이승만을 연구한 이화여대 교수 정병준은 이승만의 노골적인 반일운동은 3.1운동 이전까지 한 차례도 없었다고 지적한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필라델피아에서의 행진 당시 성조기와 태극기를 들고 있는 이승만)   

 

대외적으로 이승만은 미국 정세와 하와이 내 자신의 입지에 따라 대일관에서 유화적인 자세와 반일을 오고 갔지만, 한인 사회 내부에 대해서는 언제나 반일 구호를 내세웠다. 이승만은 자신의 종교 활동과 교육활동이 모두 독립과 반일을 위한 것이라고 한인들에게 설명했다. 그러나 1915년의 국민회 쿠데타와 1918년 이즈모호 사건 등은 이승만의 대내적 반일구호가 실제로는 자신의 정치적 기반 강화를 위한 도구일 뿐이라는 의심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했다. 적어도 1919년 이전까지 이승만은 단 한 차례도 노골적인 반일운동을 벌인 적이 없었다.”

 

이승만은 310일 서재필에게서 국내의 3.1운동 소식을 들었고, 재미 독립운동가들은 미국 독립운동의 요람지로써 독립기념관이 있는 필라델피아에서 414일 한인대회를 열었다. 14일부터 16일까지 대략 3일 동안 필라델피아 소극장에서 열린 이 대회는 서재필, 이승만, 임병직, 조병옥, 유일한 그리고 노디 김 등이 참가했고 총 150명이나 되는 독립운동가들이 참가했다. 비슷한 시기 국내외에서는 몇 갈래로 임시정부 수립이 시도되었고, 19193~4월 국내외적으로 도합 8개의 임시정부가 수립 선포되었다. 이중에서 실제적인 조직과 기반을 갖추고 수립된 것은 러시아 연해주, 상해 그리고 한성정부였다. 한성임시정부는 이승만을 소위 집정관 총재로 선출했다.

(임시정부 건국 강령)  

  

1919411일 중국 상하이에서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수립됐다. 상하이에서 국내외에서 모여든 조선의 각구 대표 30명이 410~11일 임시의정원 회의를 개최하고 여기서 임시헌장 10개조와 정부 관제를 채택, 임시정부를 수립하여 대내외에 선포했다. 그리고 국무위원을 선출했는데, 여기서 국무총리는 바로 이승만이 되었다. 더나아가 그는 대한민국임시정부 초대 대통령 자리에 오르게 된다. 도대체 어떻게 해서 초기 개화운동 이후에 아무것도 한게 없었던 이승만이 어떻게 해서 결과적으로 대한민국임시정부 초대 대통령 자리에 오를 수 있엇던 것일까? 그 이유에 대해 주진오 교수는 무엇보다도 그가 미국과 친밀한 관계를 갖고 있는 사람으로 비쳤다는 점이 중요하게 작용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에게는 배재학당 시절부터 맺어진 미국인 선교사들과의 친밀한 관계가 늘 막강한 배경을 이루었다라고 주장하며 다음과 같이 진단한다.

 

당시 국민들 사이에서 국내에 과장되게 알려졌던 그의 외교활동 성과도 큰 몫을 하였을 것으로 판단된다. 상해임시정부의 운동노선이 외교론이라는 점은 이미 잘 알려져 있는 사실이다. 이때 가장 주된 관심의 대상은 당연히 미국이었다. 그러므로 미국과의 외교관계를 잘 수행해 낼 수 잇는 사람으로서 이승만이 주목된 것이 그가 대통령이라는 지위를 차지하게 된 배경을 이룬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거기다가 왕족의 후손이라는 신화와 35일 간에 불과했던 중추원 의관의 경력, 그의 구속이 사실은 박영효 역모사건과 관련때문이었지만 만민공동회 활동의 결과라는 인상도 유리하게 작용했을 것이다.”

(1920년 이승만이 이끌던 구미위원부)   

 

하지만 이승만이 대통령이 임시정부의 국무총리가 되자 그의 선출을 둘러싸고 심한 논란이 있었다. 즉 이승만이 국무총리를 맡아서 되는 지에 대한 적격성 논란이었다. 1911년 전재산을 바쳐 신흥무관학교를 새웠던 우당 이회영이나 역사학자 단재 신채호 그리고 이승만과 의형제를 맺기도 했었던 박용만 등 무장 독립운동계열 인사들은 위임통치론을 제기한 이승만을 거세게 비판했다. 이들은 이승만이 선출되자 퇴장하기에 이르렀다. 이들은 외세에 의존하여 절대 독립을 방해하는 사람이 새 정부의 수반이 될 수 없다는 주장을 강하게 했다. 단재 신채호는 다음과 같은 말을 남겼다.

(이승만에 대해 비판을 한 단재 신채호, 그는 이승만을 이완용 보다 더 한 매국노로 간주했다.) 

  

이승만은 이완용보다 더 큰 역적이다. 이완용은 있는 나라를 팔아먹었지만, 이승만은 아직 나라를 찾기도 전에 팔아먹은 놈이다!”

 

이승만은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초대 대통령이 되고 난 이후부터 그 권위를 이용했다. 그는 상하이임시정부의 거듭된 현지 업무 집행의 요청에도 불구하고 미국을 떠나려 하지 않았다. 그는 191910월 초부터 19206월 말까지 자신의 비서 임병직과 함께 미국 주요 도시를 순방하면서 교포들과 미국인들을 상대로 일제의 만행을 규탄하고 임시정부의 지지를 호소했지만, 한편으로 그의 외교노선으로 이회영 신채호 등이 상해 임시정부를 떠나 북경으로 올라가 버렸다. 또한 이승만은 임시정부의 초대 대통령이 된 이후 그 기관의 돈줄부터 장악하고자 했다. 그는 워싱턴에 구미위원부를 설립하여 국채를 발행해 돈을 모으기 시작했다. 그러한 그의 행동은 무장투쟁을 추구하던 이들의 반발을 불러왔고, 임시정부를 내분에 휩싸이게 했다. 따라서 독립운동사에서의 이승만의 존재는 분열과 갈등 그리고 사리사욕에 찬 상징이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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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일적 언사와 의형제 박용만과의 갈등 그리고 배신

(경술국치 당시 사진) 

  

이승만이 미국서 유학하던 시기 조선은 일제의 식민지가 되어가고 있었다. 1905년 을사늑약으로 조선을 식민지화하기로 한 일제는 1910829일이 되어 조선을 일본의 식민지로 만들었다. 을사늑약 이후 국내에서는 의병 활동이 활발하게 전개됐고, 신민회가 전개했던 애국계몽운동 그리고 안중근 의사의 이토 히로부미 저격 사건 등 조선사람들은 일제에 저항하는 모습을 보였다. 조선이 일제의 식민지가 된 지 1년 정도인 1911년 식민지 조선의 총독이었던 데라우치는 무단통치를 실행했다. 또한, 그는 1912데라우치 암살 미수 사건을 조작하여 신민회 회원 700여 명을 체포하고 105인을 기소했다. 이것이 바로 ‘105인 사건이다.

 

미국에서 박사학위를 딴 이승만은 19101010일 식민지 조선으로 돌아왔다. 장인환 전명운 열사의 변호를 살인자 변호라며 거부했던 그는 미국에 있을 시기 별다른 독립운동을 하지 않았었다. 외교를 주장한 것 외에는 특별한 것이 없었다. 그러던 1912105인 사건으로 일제의 검열과 탄압이 심해지자 이승만은 410일 감리교 동북아 총책인 헤리스 감독과 함께 식민지 조선을 떠나 다시 미국으로 돌아갔다. 이것은 본인과 같은 종교를 믿는 기독교 독립운동가들이 105인 사건으로 고난을 겪던 와중에 친일파 목사의 주선으로 해외를 떠난 것이었다. 물론 이승만은 105인 사건으로 체포되지도 않았고, 일본 정부가 발행한 일본인 여권으로 해외로 나갈 수 있었다

(미국 유학 시절의 이승만)

 

19128월 이승만은 자신의 의형제이기도 한 박용만을 만나러 미국 네브래스카주 헤스팅스에 있는 한인소년병학교에 가서 그를 만난 뒤 향후 진로에 대해 상의했다. 이승만은 1912년 후반까지 뉴저지주 감텐시의 YMCA에서 머물다가 191323일 하와이에 도착했다. 당시 이승만이 하와이에 도착할 당시 대략 6000명이나 되는 한인 교포들이 하와이세 살고 있었다. 이들 대부분은 사탕수수밭 백인 농장의 노동자로 일하고 있었고, 그나마 도시에 진출한 이들은 채소상, 재봉소, 이발관 등과 같은 상업에 종사하는 수준에 머물렀다. 그가 하와이에 정착하게 될 당시 교민들은 이승만을 환영하지 않았다. 재미한족독립운동실기의 기록에 따르면, 그 사실을 알 수 있다. 이 기록은 다음과 같이 이승만에 대해 전하고 있다.

(워싱턴 포스트에 실린 이승만의 친일적 발언)  

 

“1913년에 이승만 씨가 하와이에 왔다. 이승만 씨가 일찍이 본국에 들어갔다가 재미를 못보고 청년회 대표 명의를 띄고 미주로 나왔다. 4면으로 돌아보아야 자기를 그렇게 환영하는 곳도 없고 또한 발 붙힐 곳도 그리 많지 아니한 것은 이승만 씨의 학위가 영세중립학이라, 그 학식을 가지고는 별로 쓸 곳이 없고, 한인이 모인 곳이라고는 미주에 하와이나 캘리포니아 뿐인데, 캘리포니아 한인은 장인환 재판시에 통역하기를 거절한 고로 달게 여기지 아니하고, 하와이에서는 당시 박용만 씨를 청하여 국민회에 인도자로 봉대하고 한인사회가 일신 건설되고 있는 때에 비유컨대 수탉 두 마리가 한 횃대에서 서로 용납지 못하는 것 같이 두 호걸이 한 섬 중에서 각자 주장이 다른 이상에 화목이 병진하기에 곤란하지나 아니할까 하는 의아가 바이 없지 아니하여 국민회로서는 이승만을 초청할 뜻이 없었는 데 부자중에 이승만 씨가 하와이에 도착하였다. 당시 국민회 총회장 박상하 씨가 개인적으로 통신 연락이 있었던 것이라 한다.”

 

하와이에 정착한 이승만은 영문 월간지 발행을 서둘러 했고, 하외이를 중심으로 폭넓게 활동하게 됐다. 그렇게 해서 그가 창간한 것이 태평양잡지(Korean Pacific Magazine)’였다. 그러나 이승만이 쓴 태평양잡지는 조선의 독립을 주장하기 보다 오히려 서방 제국주의와 일본에게 우호적인 기사들을 실기도 했는데. 이것은 하와이 교민으로 하여금 크게 분노하게 만들기도 했다. 태평양잡지에는 인도가 영국에 식민지가 되어 안락을 누린다는 것과 필리핀이 미국의 통치를 받고 있는 것 그리고 안남(베트남)이 법국(프랑스)의 식민지가 되어 다들 안전한 생활을 하고 평화로이 안전하다라는 말이 실렸었다. 하와이에 정착한 이승만은 교민들을 대상으로 교육사업을 진행했는데, 이 교육사업은 다른 독립운동 단체가 하는 것과는 달랐다. 민족문제연구소에서 제작한 다큐멘터리 두 얼굴의 이승만에 따르면 참으로 충격적인 내용들이 나온다.

(반일사상을 가르친다는 것을 부인했던 이승만) 

  

민족문제연구소에서 자작한 두 얼굴의 이승만에 따르면 1916106일 하와이 호놀룰루 스타블러틴 신문에서 이승만은 한인 학교에서 반일사상을 가르친다는 것을 부인했고 한다. 신문에 따르면 이승만은 우리 학교에서는 일본을 비판하라고 가르치지 않는다. 나는 반일감정을 일으킬 생각이 없다. 일본 신문들은 나에 대해 오해를 하지 말길 바란다. 오해는 빨리 풀수록 좋다.”라고 말했다. 뿐만 아니라 이승만은 1912년 하와이에 오기 전 워싱턴 포스트 기자회견에서 한일합방후 3년도 지나기 전에 한국의 낡은 인습이 지배하는 느림보 나라에서 활발하고 떠들썩한 산업경제의 한 중심으로 변모했다.” 이것은 놀랍게도 현재 뉴라이트에서 주장하는 식민지 근대화론과 똑같은 발언이다.

 

이승만이 이러한 친일적인 언행을 했던 것은 그가 뼛속까지 친미주의자였기 때문이었다. 당시 미국과 일본의 분위기는 상당히 우호적이었다. 그러한 국제정세를 알고 있던 이승만은 미국 지배계급의 비위를 맞추기 위해, 그들 앞에서 일본에 대한 우호적인 발언도 서슴지 않았던 것이다. 하지만 그는 하와이 교민들 앞에선 반대로 반일적인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그는 손 끝에 바람을 불며 내가 일본놈들의 감옥에 간 것만 생각하면 손 끝이 시리다라고 하며 제대로 된 연기를 보였다. 이승만과 제1공화국을 주로 연구한 이화여대의 정병준 교수는 자신의 책에서 다음과 같이 전하고 있다.

 

미일 간의 평화가 지속되면 이승만은 대일 유화적인 자세를 취했다. 특히 그가 활동의 근거지로 삼은 하와이에서는 일본인들의 영향력이 강했고, 1941년 태평양 전쟁의 발발 이전에는 미일 간의 우호분위기가 지배적이었다. 이승만은 하와이에서 기독교·교육·언론계의 지도자로 활동했는데, 하와이 소수민족 중에서 영향력이 강했던 일본인을 적극적으로 배척하는 것은 스스로의 입지를 허무는 일이었다. 이승만이 노골적인 반일 언론·반일운동이나 무력· 폭력 노선을 취하지 않은 데는 하와이의 특수한 상황이 일정하게 작용했다. 이승만은 1910년대 중반 이후 하와이 YMCA에서 일본인 지도자들과 함께 간부진으로 활동했다. 뿐만 아니라 이승만은 19229월 하와이로 귀환했는데, 기자화견을 통해 대일전은 불가능하며 새로운 조선총독이 많은 개혁을 단행해 한국인들의 성원을 얻고 있다고 발언했다. 같은 해 이승만을 교주로 하는 한인기독교회 건립식이 개최되었을 때 하와이 한인 사회 최초로 일본 총영사가 참석해 기부금을 내기까지 했다.”

(박용만, 그는 한성감옥에서 이승만과 의형제를 맺었던 인물이다. 그러나 그 또한 이승만에게 철저하게 배신당한다.)

 

이런 이중적인 플레이를 했던 이승만은 하와이에서 자신의 세력이 형성되자 감옥에서 의형제를 맺었던 박용만과 갈등이 생겼다. 1908년에 있던 덴버회의 사건으로 이승만은 박용만과 독립운동노선을 둘러싸고 차츰 대립의 싹이 트기 시작했다. 이승만은 교육·출판이나 외교 활동을 통한 노선이었지만, 박용만은 무장투쟁노선이었기 때문이다. 박용만은 1911년 미주에서 설립된 재미동포의 단체인 대한인국민회의 기관지 신한민보의 주필로 활동했었다. 그는 국민개병설’, ‘군인수지라는 책을 발간했고, 대일 무장투쟁을 준비하기 위해 교포가 많이 사는 하와이를 근거지로 삼아, 하와이 지방총회의 기관지 신한국보의 주필이 되어 항일 논조를 폈다. 또한 제1차 세계대전이 시작되던 1914년에는 하와이의 한 농장을 임대하여 동포 청년들과 공동으로 경작하면서 항일무장독립운동 단체인 대조선국민군단을 조직, 군사훈련을 실시했다. 그의 노력이 힘입어 총 124명의 독립군이 대조선국민군단에서 양성됐다.

(대조선국민군단, 1914년에 창설된 이 군단을 통해 박용만은 미주지역에서 무장독립운동을 준비했었다.)

 

이렇게 박용만과 노선 갈등이 있던 이승만은 19155월 대한인국민회 하와이 지방총회의 주도권과 재정문제로 박용만 측과 대결하게 됐다. 많이 서술했듯이 박용만은 이승만과 한성감옥에서 의형재를 맺었던 인물이었고, 이승만을 하와이로 초청한 사람도 박용만이었다. 그러나 이승만은 대한인국민회와 하와이지역의 주도권을 행사하기 위해 박용만 제거에 나섰다. 이 시기 이승만은 박용만과 대한인국민회가 하는 사업들을 일일이 반대했다. 그는 반대하며 그 집은 외 짓느냐, 건축을 하면 누가 있겠느냐?”라는 식으로 반대하는 모습을 보였다. 이승만은 대한인국민회를 장악하고 싶었다. 대한인국민회는 어렵게 사는 교민들이 자금을 바치는 곳이었고, 그로 인하여 미주지역 전체에서 모이는 독립운동 자금처였다. 이 사실을 안 이승만은 자신의 추종자들을 이끌고 대한인국민회를 장악하기 위해 싸웠다. 그는 자신을 반대하는 사람에게는 테러와 폭력도 불사했다.

(하와이의 파인애플밭, 당시 하와이에 살던 교민들은 이러한 고된 노동으로 생계를 이어나갔다.)

 

(하와이의 사탕수수밭, 당시 하와이에 살던 교민들은 이렇게 힘든 노동을 하며 살았지만, 이승만은 이들의 돈을 갈취해갔다.)

 

그렇게 해서 이승만은 마침내 하와이 한인사회의 주도권을 장악하게 되었다. 이승만은 1916년 여학생 기숙사를 확장하여 한인여자성경학원으로 발족시켰고, 19178월에는 태평양 잡지사를 통해 독립정신2판을 출판했다. 19187월에는 호놀룰루에 신립교회를 설립하고, 같은 해 한인여자성경학원을 남녀공학제의 한인기독학원으로 개명 개편했다. 실제로 그는 국민회를 장악하면서 엄청난 부동산 재태크의 달인이 됐다. 1914714일 이승만은 여학생 기숙사 건립기금 2400달러로 부동산을 구입했다. 그 당일날 이승만은 자신에게 땅을 판 프레드 베링거에게 그 땅을 담보로 1400달러를 빌렸다. 당시 돈일 빌리는 조건으로 1년내 상환이고 이자는 연리 8%였다. 1년후인 19157월에 이승만에게 돈을 빌려준 베링거가 돈을 값으라고 항의하자, 이승만은 자신이 만든 빚 1400달러를 대한인국민회에게 값으라고 떠넘겼다. 그는 국민회 재산인 한인 여학교를 단돈 1달러에 인수했고, 국민회의 재산을 담보로 부동산 2개를 저당잡혀 4250달러를 대출했으며 나중에는 자기 소유로 만든 국민회 재산을 전부 매각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목돈을 챙겼다.

 

이후 이승만의 이러한 행위가 계속되자, 일부는 이에 반발했다. 특히나 박용만 쪽 인사들이 그러했다. 이러한 움직임이 있자 이승만은 자신의 추종자를 동원하여 그들의 입을 막으려고 했다. 그는 자신의 재정문제에 반발한 이들을 미국 경찰에 고발했다. 고발 사유는 폭동죄였다. 1918227일 하와이 법원에서 이승만은 법정의 증인으로 나와 미국 판사를 향해 다음과 같이 믿기 힘든 말을 했다.

 

판사님! 이들은 박용만 패당이며 미국 영토에 한국인 군대를 만들었습니다. 이들은 위험한 반일행동을 하며 일본군함 이즈모가 호놀룰루에 도착하면 파괴하려는 음모까지 꾸민 무리들입니다. 이것은 미국과 일본 사이에 중대한 사건을 일으켜 평화를 방해하려는 것입니다. 판사님 저들을 조처해 주십시오!”

(미국의 한 문서, 이승만은 사적인 권력욕을 위해 독립운동을 했다.)    

 

하와이에 정착한 이승만은 친일적인 언사를 했고, 자신과 감옥에서 의형제를 맺었던 박용만까지 배신했다. 그는 박용만이 만든 독립군대를 미국과 일본 사이의 평화를 방해하려는 존재라 주장했고, 자신의 권력욕을 위해 이들에게 폭력을 행사하기도 했다. 또한 그는 1912년 워싱턴 포스트와의 인터뷰에서 식민지 근대화론과 똑같은 발언을 하기도 했으며, 미국 지배계급의 비위를 맞추기 위해 친일언사도 서슴지 않았다. 이것이 이승만이 하와이에서 독립운동을 하며 저지른 짓거리였다. 그러나 1919년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상해에서 탄생했을 때, 임시정부 초대 대통령으로 선출된 것은 다름아니게 이승만이었다. 도데체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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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기 생애와 스티븐슨 암살 사건

(1875년 운요호 사건, 이 사건 이후 일본은 조선에게 강화도 조약을 강제로 체결하게 했다.)

 

대한민국 초대 대통령인 이승만은 1875326일 황해도에서 태어났다. 이승만이 태어나던 1875년은 조선시대 후기로써 명치유신을 통해 근대화를 이룩한 일본이 조선에 대한 침략의 마수를 본격적으로 드러내던 시대였다. 당시 일본군함이 강화도에 나타나 포격을 가했던 운요호 사건이 일어났고, 1876년 일본은 조선에게 불평등한 조약인 강화도 조약을 체결하게 했다. 이런 상황의 조선 시대에 태어난 이승만은 조선의 정세와는 별개로 머리가 매우 뛰어났다. 세종대왕의 형님인 양녕대군의 16대손이고 이성계의 18대손의 가계를 가지고 있는 몰락 왕손의 후예인 이승만은 5세에 천자문을 배우고 7세 때 동몽선습을 배웠다. 이어서 남산에 있는 도동서원에 입학하여 10대 시절에는 사서삼경과 통감절요를 읽으며 과거 시험을 준비했었다.

 

이승만은 13세때부터 도합 11차례나 과거에 응시했다. 그러나 조선 후기 부패한 탐관오리들의 탐욕으로 인하여 이승만은 과거시험에 떨어졌고, 결국 이러한 상황은 이승만으로 하여금 서당공부를 중당하고 동학에 입교하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이승만이 20살이 되던 1894년 조선에서 녹두장군 전봉준이 주도한 동학농민혁명이 있었고, 갑오경장으로 과거제도가 폐지되었다. 과거제도가 폐지되자 이승만은 1895년 미국 감리교선교사가 아펜젤러(Appenzeller)가 세운 배재학당에 입학했다. 거기서 이승만은 배재학당 영문부에 입학하여 영어 공부에 열중했고, 영어 뿐만 아니라 그 외의 역사·지리·산수·성경 등의 과목에서 우수한 성적을 보임에 따라 입학 6개월 만에 영어 조교사로 발탁됐다.

 

18977월 이승만은 우수한 성적으로 배재학당을 졸업했다. 그는 졸업생 대표 연사로 선발되어 한국의 독립이라는 주제의 연설을 했다. 배재학당 시기 그는 서재필이 했던 강의를 들었었는데, 서재필의 강의는 이승만에게 많은 영향을 주었다. 이승만은 서재필이 조직한 협성회에 참가했고, 1898년 유영익·최정익과 함께 협성회보창간을 주도하여 본격적인 언론활동을 전개했다. 이승만이 20대를 보낸 1890년대 조선의 상황은 격렬한 변화가 있었다. 1895년에는 일본 공사가 보낸 폭도들에게 명성황후가 살해당했고, 고종이 아관파천하는 일이 있었으며, 단발령이 발표됐다. 이런 상황에서 1896년 서재필이 한국 최초의 민간신문인 독립신문을 창간했고, 고종은 자신을 황제라 칭하며 1897101일 기해 국호를 대한제국으로 선포했다.

(감옥에 있던 시절의 이승만) 

  

이처럼 조선 후기 변화가 있자, 이승만 또한 초기 개화 활동에 눈을 뜨게 된 것이다. 이후 협성회보가 중단되자 이승만은 매일신문을 개제하여 발간했고, 매일신문 폐간이 된 이후에는 제국신문에서 주필로 활약했다. 독립협회가 당시 있던 제국주의 열강의 이권 침탈을 비판하고 의회설립 운동을 전개하는 한편 만민공동회 개최를 준비하자 이승만은 만민공동회에서도 활동하며 연사로 나서기도 했다. 개화활동을 하던 중 이승만은 조선 당국에 체포되어 재판에서 중형이 선고됨에 따라 서소문감옥에서 옥생활을 하게 됐다. 당시 이승만은 서소문감옥에서 죄수들을 교육하는 활동을 했었다. 이 내용은 김구의 백범일지에도 잘 서술되어 있다. 백범일지에 따르면 그는 당시 감옥서 죄수들에게 성경을 가르쳤다고 한다. 또 이승만 감옥에서 박용만이라는 인물과 의형제를 맺게 됐다. 그리고 감옥에 있으면서 제국신문의 논설을 쓰기도 했고, ‘독립정신이라는 책을 저술하기도 했다. 그가 쓴 독립정신은 조선인들을 개화하겠다는 목적에서 집필되었고, 이 책은 1910년 하와이에서 처음으로 출판되었다.

(이승만의 저서인 독립정신, 그는 감옥에 있을 시절 독립정신이라는 책을 집필했다. 이 독립정신이라는 책은 현재 이승만의 악행을 숨기려는 목적으로 뉴라이트 세력들에 의해 악용되고 있다.)

 

190489일 이승만은 일본공사 하야시 곤스케의 도움으로 57개월간의 감옥 생활 끝에 출감했다. 당시 조선의 정세는 엄청나게 변해가고 있었다. 1895년 청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은 1904년에는 비록 유럽에서 가장 낙후된 봉건 자본주의 국가 러시아와 전쟁을 치렀고, 러일전쟁에서 승리했다. 이렇게 러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은 1905년 을사늑약을 조선에게 강제로 체결하게 함으로써 조선을 식민지화하는 데 성공하게 된다. 이승만은 출옥하자 먼저 출감한 박용만 등은 상동교회 부설로 세운 청년상동학원 교장으로 이승만을 초청했다. 박용만에게 초청으로 청년상동학원에서 일하게 된 이승만은 교사로 활동했다. 그러나 1달도 안 되어 이승만은 미국으로 떠났다. 당시 이승만은 일본으로부터 조선을 지키기 위해선 미국의 힘을 빌리는 길 밖에 달리 없다고 믿고 있었기 때문이다.

 

190411월 이승만은 제물포에서 미국행 선박에 올랐고, 3주 뒤 미국령 하와이에 도착했다. 이승만은 하와이에서 다시 배를 타 12월에 미국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했으며, 며칠 뒤 열차편으로 수도 워싱턴으로 향했다. 워싱턴에서 미국 대통령을 만나기도 했던 이승만은 외교활동에서 큰 성과를 얻지 못했다. 결국 이승만은 조국으로의 귀국을 단념하고 미국에서 공부를 하기로 결심하게 됐다. 이승만은 조선을 떠날 때 미국에서 대학교육을 받으려는 야심이 있었는데, 실제로 그가 미국으로 떠나기에 앞서 게일, 언더우드, 벙커 등 조선 내의 저명한 선교사들로부터 미국 교계 지도자들 앞으로 쓴 추천서 19통도 챙겨서 떠났다

(하버드 대학교에 다니던 당시 이승만 성적)

 

아무튼 이런 미국 기독교계 인사들의 지원으로 이승만은 1905년 가을학기부터 조지 워싱턴 대학에 입학했다. 19076월 졸업할 때까지 2년간 공부에 전념했다. 비록 성적이 좋지 않았지만, 이승만은 워싱턴 대학을 마친 뒤 서재필 등의 주선으로 보스턴에서 있는 하버드대학(Harvard University) 즉 현재 기준으로도 세계 최고의 인재를 양성하는 대학에 입학할 수 있었다. 당시 하버드대학에 몇몇 과목에서 DC를 받았기에 박사과정을 마치려던 계획에 차질이 생겼다. 하버드대학에서 2년 내에 박사학위 취득이 어렵다고 판단한 이승만은 국내에서부터 친분이 있던 프린스턴신학교 출신 북장로교 홀 선교사를 통해 프린스턴 대학원에 다시 입학했다. 따라서 이승만은 탄탄한 인맥을 통해 하버드대학에서 석사과정을 밟고 프린스턴 대학에서 박사과정을 밟을 수 있었다

(프린스턴 대학 졸업할 당시의 이승만)

 

이에따라 이승만은 19099월부터 19106월 중순까지 2년 동안 뉴저지주 소재 프린스턴대학원에서 공부하게 되었다. 그는 국제법을 전공으로 했고, 미국사와 철학사 과목들을 부전공으로 택했다. 참으로 놀라운 사실은 이승만을 지도교수로서 가르쳤던 인물이 바로 미국의 제국주의자이기도 한 우드로 윌슨(Woodrow Wilson)’이었다. 하지만 그의 학위 취득과정에는 의문점이 적지 않다. 이승만의 동지였지만, 뒷날 정적이 된 이현구는 자서전에서 고등학교도 졸업하지 않는 이승만이 통상 12년 이상 소요되는 학부와 박사과정을 단 5년 만에 어떻게 수료할 수 있었는지 미스테리하다.”라고 의문을 제기했다. 박사학위와 석사학위를 같은 날에 받은 것도 참으로 이해가 안 될 만큼 흥미로운 일이다. 정확한 사정을 알 수는 없지만 그가 이렇게 빠른 기간에 하버드대학에서 석사, 프린스턴 대학에서 박사학위를 취득할 수 있었던 것은 미국의 주한 선교사를 비롯한 미국 기독교계의 전폭적인 지원 때문이었다.

(친미제국주의자 스티븐슨, 그는 일본의 조선 식민지 지배를 합리화 했던 친일파이자 친미 제국주의자였다.)

 

이승만이 미국에서 유학하던 시기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선 한국 독립운동사에 놀랄만한 일이 일어났다. 미국의 제국주의자이자 대통령인 테어도어 루즈벨트의 절친인 스티븐슨이 장인환 전명운 의사에 의해 암살당했기 때문이다. 테어도어 루즈벨트의 절친인 스티븐슨은 일본 제국주의의 이익을 대변하는 악질적인 친일 친미 제국주의자였다. 1905년 을사늑약이 체결됐을 때, 스티븐슨은 일본은 조선과 조선 사람들을 잘 먹고 잘 살수있도록 유도하고 노력하였던 고마운 나라이다. 그러므로 조선인들은 이러한 일본에게 감사를 표해야할 것이다조선은 원래부터 못 사는 나라가 아니었던가. 그러기 위해서는 일본의 도움없이는 살아가기가 힘들다. 모든 한국인들은 일본 과의 조약 체결을 기쁘게 받아들여야 할 것이다.”와 같은 제국주의적 망발을 일삼았었다.

(장인환 전명운 의거를 보도한 미국 신문, 이는 비단 조선 사회 뿐만 아니라 미국 사회까지 발칵 뒤집었던 사건이었다.) 

  

또한 1908년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했을 때, 그는 기자회견에서 한국민이 일본의 보호정치를 찬양하고 있다면서 을사조약은 한국민을 위해 취해진 당연한 조치이며, 한국민은 독립할 자격이 없는 무지한 민족이다라는 망언을 했다. 그런 망발로 인하여 그는 조선 교민들로부터 구타를 당하기도 했었다. 그러나 그는 미국의 제국주의자 답게 뉘우침 없이 친일언동을 계속했다. 결국 그는 샌프란시스코에 있는 오클랜드역에서 재미 조선인인 장인환과 전명운 열사에 의해 총탄을 맞고 사망했다.

(샌프란시스코에 있는 장인환 전명운 열사 의거 장소, 2018년 11월 필자가 샌프란시스코 여행 중 직접 방문했던 곳이다. 당시 필자는 서부 여행에선 한국 여행사가 운영하는 현지 패키지를 이용했는데, 그때 가이드가 샌프란시스코를 방문하며 이 장소에 대해 얘기해줬다. 필자를 포함한 여행일원들은 독립투사들을 기억하는 차원에서 거사 장소에서 묵념의 시간을 가졌었다.)

 

장인환과 전명운 열사의 의거는 조선사회는 물론 미국에도 큰 충격을 줬다. 미국 당국에 의해 체포된 이후 두 의사가 재판을 받게 되자, 그의 재판과 변호를 위해 미주 본토는 물론이고 하와이 멕시코, 국내, 연해주, 만주, 중국 등지를 포함한 세계 각지에서 답지하여 그 당시 돈으로 7390달러가 모였다. 당시 장인환 전명운 열사를 변호하기 위해 고군분투하던 이들은 당시 하버드 대학에서 유학중이던 이승만을 초청했다. 그러나 이승만은 이들에게 장인환 전명운 변호 통역 요청을 거절했다. 거절할 당시 이승만이 내세웠던 이유는 시간 관계로 오래 있을 수 없으며 예수교인의 신분으로 살인 재판 통역을 원하지 않는다였다. 여기서 얘기한 시간 관계를 이해한다 치더라도 살인재판을 통역할 수 없다는 구절은 정말 그가 조선의 독립을 생각하는 인물이었는지 심히 의심받을 만하다. 결국 이승만은 어려운 살림의 교포들이 힘들게 모아 보낸 비용으로 보스턴에서 비행기를 타고 왔다가 다시 비행기를 타고 보스턴으로 돌아가버렸다.

 

결국 장인환은 재판에서 징역 25년형을 전명운은 증거불충분으로 석방됐지만, 조선의 독립운동사에 큰 영향을 주었던 사건을 살인을 운운하며 변호를 거부한 이승만의 행동은 참으로 큰 오점이었다. 이후 이승만은 감옥에서 의형제를 맺었던 박용만하고도 갈등을 하게 되는데, 박용만과의 갈등 당시에는 의형제를 맺은 이에게 믿기 힘들 정도의 배신 행위를 보여주었다. 그런 인물이 바로 우남 이승만이었고, 장인환 전명운 열사의 재판 변호 거부는 그가 저지른 악행의 시작일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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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원도 이승만 별장에 있는 이승만 흉상)

 

지난 2015년 박근혜 정권은 자신의 정체성에 맞는 역사관을 국민들에게 심어주기 위해, 국정 교과서를 추진했었다. 국정 교과서를 추진한 박근혜 정권은 소위 좌파 역사관따위를 운운하며, 자신의 아버지인 박정희를 산업화와 근대화의 아버지로 떠받드는 동시에, 대한민국 초대 대통령인 우남 이승만(雩南 李承晩)’을 소위 건국의 아버지나 국부로 칭송했다. 박근혜 정권이 이승만을 재조명하려는 움직임이 있자 2014년과 2015년 사이에는 이승만을 찬양하는 서적들이 마구잡이로 나오기 시작했다. 대한민국 정체성 총서라는 이름을 단 백년동안 출판사의 시리즈 책들은 이승만을 애국작 혹은 건국의 아버지로 치켜세웠고, 미국사 전공자이자 이승만 찬양론자인 이주영 교수는 이승만 평전이라는 책을 출판하여 이승만 찬양에 열을 올렸다. 그외에도 저자 안병훈의 건국 대통령 이승만의 생애’, 김용삼 저자의 이승만의 네이션 빌딩’, 권혁철 외 다수저자의 이승만 깨기등의 이승만 찬양론적 서적들이 서점에 나돌았다.

(2020년 이화장을 방문한 황교안)

 

더 나아가 2016년에는 저질 반공영화 인천상륙작전(Operation Chromite)’이 어용매체들의 홍보에 힘입어 인기를 끌었고, 이런 반공영화가 인기를 끌게 됨에 따라 소위 건국 대통령 이승만을 재조명 하려는 움직임도 활발하게 일어났었다. 심지어 자신의 와이프를 폭행했던 인물인 서세원은 건국 대통령 이승만을 재조명한 독립영화까지 제작했었다. 이러한 이승만 띄우기 움직임은 독재자 박정희를 띄우려는 움직임과 맥을 같이 했다. 이것은 박근혜 정권 이전인 기업 대통령이 통치하던 이명박 때도 마찬가지였다. 2012년 총선과 대선을 앞두고 수구세력들은 이승만 찬양에 열을 올렸었다.

 

어떤 자치단체장은 광화문에 이승만 동상을 세우자는 주장을 했었고, 한 이승만 광신도 단체는 남산에 이승만 동상을 세웠다. 또한 친미적인 이명박 정권은 광화문에 대한민국역사박물관을 만들어 이승만과 박정희 찬양 및 우상숭배에 열을 올리며 막대한 예산을 쏟아 부었다. 이런 움직임들은 국가적이진 않더라도 정권이 교체된 현재도 뉴라이트 세력들이 그러한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올해 2월 전 자유한국당 총리이자 미래통합당 출신의 국회의원 후보인 황교안은 과거 이승만이 살던 이화장을 찾아가 이승만의 연설 구호인 뭉치면 살고 흩어지면 죽는다를 인용하면서 대통합을 이뤄내겠다라고 말을 했다. 또한 그들은 이승만에 대해 부정적인 평가를 내리는 세력과 인물들에게 좌파 용공, 공산주의, 종북이라는 딱지를 붙혀 수준낮은 이념공격을 하고 있다. 민족문제연구소와 같이 이승만의 민낯을 폭로하는 단체는 좌파로 간주되고, 이승만에 대해 독재자라 욕하는 사람들은 종북 혹은 공산주의자가 된다. 이것만 보더라도 이승만 찬양은 현재 미래통합당과 같은 수구 세력들의 이데올로기적 핵심이다. 그렇다면 이승만이라는 인물은 과연 존경받을 만할까?

(12회 이승만애국상 시상식, 엄마부대 주옥순도 보인다.)

 

우리들에게 독립운동가로 알려져 있는 이승만은 사실 독립운동가였지만, 그의 미주망명시절의 행적은 독립운동보다는 오히려 친일적인 언행이 적지 않았다. 그는 오히려 일본이 낡은 조선을 바꾸었다며 현재의 식민지 근대화론과 비슷한 주장을 하기도 했었다. 1908년 샌프란시스코에서 장인환 전명운 열사가 친일파이자 미제국주의자인 스티븐슨을 암살했을 때, 기독교 신자를 핑계로 변호를 거부했던 인물이 바로 이승만이었다. 1932년 임시정부의 주석 백범 김구가 이봉창 윤봉길 의거를 단행했을 때, 이것을 테러행위라고 하며 주제넘게 비난했었다. 또한 대힌민국 임시정부 초대 총령을 지냈던 그는 독립운동 진영을 분열시켰고, 그 결과 탄핵당한 인물이기도 하다. 해방 이후에도 그의 악행은 끊이지 않아, 친일파들을 이용하여 분단 정부를 수립했고, 제주4.3 항쟁과 여순 항쟁을 진압하여 무수히 많은 민간인들을 학살했다. 한국전쟁 당시에는 최소 30만에서 많게는 100만 이상의 민간인이 국민보도연맹 사건으로 무차별 학살당했고, 방산비리로 자국 군인 10만 명을 아사시키기도 했다. 전쟁 이후에는 노욕에 찌들어 독재 권력을 확립했고, 진보당의 죽산 조봉암을 사법살인 했으며 3.15 부정선거에 저항하는 시민학생에게 발포하여 200명을 죽이고 6천 명 이상을 부상케 만든 독재자였다.

(대한민국 정체성 총서, 2015년 소위 대한민국 정체성을 찾겠다고 하며 일각에서는 이런 극우반공주의적 서적들을 대량으로 출판했었다.)

 

이승만은 사회의 정의를 반공이라는 이름하에 짓밟았다. 1949년 친일파 청산을 위해 만들어진 반민특위를 장경근 휘하의 경찰 병력을 동원하여 해체했고, 고문왕으로 유명한 친일파 노덕술과 같은 악질들을 반공애국투사로 치하하며 그들에게 기회를 주고 애국자로 둔갑시켰다. 그 결과 대한민국 사회는 친일파를 단 한 명도 처벌하지 못한 사회가 됐다. 이렇게 무수히 악행을 저지른 이승만을 소위 수구세력들이 건국의 아버지로 묘사하는 이유는 자명하다. 그들의 뿌리가 바로 친일파이기 때문이다. 이들은 마치 이승만이 대한민국을 건국한 것처럼 착각하고 있다. 아니 바로 이런 소리와 주장들을 통해 우리의 역사를 왜곡하고 있다. 원론적으로 대한민국 헌법에 따르면 대한민국의 건국은 1919년 임시정부가 창설되던 해다. 이것은 대한민국 헌법에 임시정부를 계승한다고 명시되어있기 때문이다.

(한미동맹과 이승만을 홍보하는 어떤 유튜브 영상)

 

설사 1948년 건국설을 빈말로 인정한다 하더라도 이것은 민중의 염원이 아니었다. 해방 후 민중의 대다수는 미국식 자유주의가 아닌 사회주의나 적어도 자유주의보다 나은 체제를 원했다. 즉 이승만과 그의 지지자들은 이런 민중의 염원과 미군정에 반대하는 세력들에게 무차별 폭력을 동원하여 노동자 농민들을 패죽이고, 대한민국이라는 국가를 선포했다. 몽양 여운형 같은 독립운동가들은 남북의 통일을 이루기 위해 좌우합작 운동을 추진했었고, 비록 늦은 선택이었지만 임시정부의 주석인 백범 김구도 남북협상에 참가했었다. 따라서 뉴라이트들이 주장하는 1948년 건국은 민중의 염원도, 민중을 생각하는 체제도 절대 아니었다.

 

이렇게 무수히 많은 과오가 있는 인물임에도 한국에서는 이승만을 찬양하려는 움직임이 있다. 이러한 움직임은 2020년인 현재도 계속되고 있으며, 특히나 미래통합당과 같은 수구 세력들이 주도하고 있다. 우리는 이승만의 악행에 대해 교육에서 깊게 가르치지 않는다. 그의 무수한 악행들을 보다 정확히 알아야할 필요가 있다. 이것이 내가 이승만 악행사라는 이름으로 시리즈를 연재하기로 마음먹게 된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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