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일적 언사와 의형제 박용만과의 갈등 그리고 배신

(경술국치 당시 사진)
이승만이 미국서 유학하던 시기 조선은 일제의 식민지가 되어가고 있었다. 1905년 을사늑약으로 조선을 식민지화하기로 한 일제는 1910년 8월 29일이 되어 조선을 일본의 식민지로 만들었다. 을사늑약 이후 국내에서는 의병 활동이 활발하게 전개됐고, 신민회가 전개했던 애국계몽운동 그리고 안중근 의사의 이토 히로부미 저격 사건 등 조선사람들은 일제에 저항하는 모습을 보였다. 조선이 일제의 식민지가 된 지 1년 정도인 1911년 식민지 조선의 총독이었던 데라우치는 무단통치를 실행했다. 또한, 그는 1912년 ‘데라우치 암살 미수 사건’을 조작하여 신민회 회원 700여 명을 체포하고 105인을 기소했다. 이것이 바로 ‘105인 사건’이다.
미국에서 박사학위를 딴 이승만은 1910년 10월 10일 식민지 조선으로 돌아왔다. 장인환 전명운 열사의 변호를 살인자 변호라며 거부했던 그는 미국에 있을 시기 별다른 독립운동을 하지 않았었다. 외교를 주장한 것 외에는 특별한 것이 없었다. 그러던 1912년 105인 사건으로 일제의 검열과 탄압이 심해지자 이승만은 4월 10일 감리교 동북아 총책인 헤리스 감독과 함께 식민지 조선을 떠나 다시 미국으로 돌아갔다. 이것은 본인과 같은 종교를 믿는 기독교 독립운동가들이 105인 사건으로 고난을 겪던 와중에 친일파 목사의 주선으로 해외를 떠난 것이었다. 물론 이승만은 105인 사건으로 체포되지도 않았고, 일본 정부가 발행한 일본인 여권으로 해외로 나갈 수 있었다.

(미국 유학 시절의 이승만)
1912년 8월 이승만은 자신의 의형제이기도 한 박용만을 만나러 미국 네브래스카주 헤스팅스에 있는 한인소년병학교에 가서 그를 만난 뒤 향후 진로에 대해 상의했다. 이승만은 1912년 후반까지 뉴저지주 감텐시의 YMCA에서 머물다가 1913년 2월 3일 하와이에 도착했다. 당시 이승만이 하와이에 도착할 당시 대략 6000명이나 되는 한인 교포들이 하와이세 살고 있었다. 이들 대부분은 사탕수수밭 백인 농장의 노동자로 일하고 있었고, 그나마 도시에 진출한 이들은 채소상, 재봉소, 이발관 등과 같은 상업에 종사하는 수준에 머물렀다. 그가 하와이에 정착하게 될 당시 교민들은 이승만을 환영하지 않았다. 재미한족독립운동실기의 기록에 따르면, 그 사실을 알 수 있다. 이 기록은 다음과 같이 이승만에 대해 전하고 있다.

(워싱턴 포스트에 실린 이승만의 친일적 발언)
“1913년에 이승만 씨가 하와이에 왔다. 이승만 씨가 일찍이 본국에 들어갔다가 재미를 못보고 청년회 대표 명의를 띄고 미주로 나왔다. 4면으로 돌아보아야 자기를 그렇게 환영하는 곳도 없고 또한 발 붙힐 곳도 그리 많지 아니한 것은 이승만 씨의 학위가 영세중립학이라, 그 학식을 가지고는 별로 쓸 곳이 없고, 한인이 모인 곳이라고는 미주에 하와이나 캘리포니아 뿐인데, 캘리포니아 한인은 장인환 재판시에 통역하기를 거절한 고로 달게 여기지 아니하고, 하와이에서는 당시 박용만 씨를 청하여 국민회에 인도자로 봉대하고 한인사회가 일신 건설되고 있는 때에 비유컨대 수탉 두 마리가 한 횃대에서 서로 용납지 못하는 것 같이 두 호걸이 한 섬 중에서 각자 주장이 다른 이상에 화목이 병진하기에 곤란하지나 아니할까 하는 의아가 바이 없지 아니하여 국민회로서는 이승만을 초청할 뜻이 없었는 데 부자중에 이승만 씨가 하와이에 도착하였다. 당시 국민회 총회장 박상하 씨가 개인적으로 통신 연락이 있었던 것이라 한다.”
하와이에 정착한 이승만은 영문 월간지 발행을 서둘러 했고, 하외이를 중심으로 폭넓게 활동하게 됐다. 그렇게 해서 그가 창간한 것이 ‘태평양잡지(Korean Pacific Magazine)’였다. 그러나 이승만이 쓴 태평양잡지는 조선의 독립을 주장하기 보다 오히려 서방 제국주의와 일본에게 우호적인 기사들을 실기도 했는데. 이것은 하와이 교민으로 하여금 크게 분노하게 만들기도 했다. 태평양잡지에는 “인도가 영국에 식민지가 되어 안락을 누린다는 것과 필리핀이 미국의 통치를 받고 있는 것 그리고 안남(베트남)이 법국(프랑스)의 식민지가 되어 다들 안전한 생활을 하고 평화로이 안전하다”라는 말이 실렸었다. 하와이에 정착한 이승만은 교민들을 대상으로 교육사업을 진행했는데, 이 교육사업은 다른 독립운동 단체가 하는 것과는 달랐다. 민족문제연구소에서 제작한 다큐멘터리 ‘두 얼굴의 이승만’에 따르면 참으로 충격적인 내용들이 나온다.

(반일사상을 가르친다는 것을 부인했던 이승만)
민족문제연구소에서 자작한 ‘두 얼굴의 이승만’에 따르면 1916년 10월 6일 하와이 호놀룰루 스타블러틴 신문에서 이승만은 한인 학교에서 “반일사상”을 가르친다는 것을 부인했고 한다. 신문에 따르면 이승만은 “우리 학교에서는 일본을 비판하라고 가르치지 않는다. 나는 반일감정을 일으킬 생각이 없다. 일본 신문들은 나에 대해 오해를 하지 말길 바란다. 오해는 빨리 풀수록 좋다.”라고 말했다. 뿐만 아니라 이승만은 1912년 하와이에 오기 전 워싱턴 포스트 기자회견에서 “한일합방후 3년도 지나기 전에 한국의 낡은 인습이 지배하는 느림보 나라에서 활발하고 떠들썩한 산업경제의 한 중심으로 변모했다.” 이것은 놀랍게도 현재 뉴라이트에서 주장하는 식민지 근대화론과 똑같은 발언이다.
이승만이 이러한 친일적인 언행을 했던 것은 그가 뼛속까지 친미주의자였기 때문이었다. 당시 미국과 일본의 분위기는 상당히 우호적이었다. 그러한 국제정세를 알고 있던 이승만은 미국 지배계급의 비위를 맞추기 위해, 그들 앞에서 일본에 대한 우호적인 발언도 서슴지 않았던 것이다. 하지만 그는 하와이 교민들 앞에선 반대로 반일적인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그는 손 끝에 바람을 불며 “내가 일본놈들의 감옥에 간 것만 생각하면 손 끝이 시리다”라고 하며 제대로 된 연기를 보였다. 이승만과 제1공화국을 주로 연구한 이화여대의 정병준 교수는 자신의 책에서 다음과 같이 전하고 있다.
“미일 간의 평화가 지속되면 이승만은 대일 유화적인 자세를 취했다. 특히 그가 활동의 근거지로 삼은 하와이에서는 일본인들의 영향력이 강했고, 1941년 태평양 전쟁의 발발 이전에는 미일 간의 우호분위기가 지배적이었다. 이승만은 하와이에서 기독교·교육·언론계의 지도자로 활동했는데, 하와이 소수민족 중에서 영향력이 강했던 일본인을 적극적으로 배척하는 것은 스스로의 입지를 허무는 일이었다. 이승만이 노골적인 반일 언론·반일운동이나 무력· 폭력 노선을 취하지 않은 데는 하와이의 특수한 상황이 일정하게 작용했다. 이승만은 1910년대 중반 이후 하와이 YMCA에서 일본인 지도자들과 함께 간부진으로 활동했다. 뿐만 아니라 이승만은 1922년 9월 하와이로 귀환했는데, 기자화견을 통해 대일전은 불가능하며 새로운 조선총독이 많은 개혁을 단행해 한국인들의 성원을 얻고 있다고 발언했다. 같은 해 이승만을 교주로 하는 한인기독교회 건립식이 개최되었을 때 하와이 한인 사회 최초로 일본 총영사가 참석해 기부금을 내기까지 했다.”

(박용만, 그는 한성감옥에서 이승만과 의형제를 맺었던 인물이다. 그러나 그 또한 이승만에게 철저하게 배신당한다.)
이런 이중적인 플레이를 했던 이승만은 하와이에서 자신의 세력이 형성되자 감옥에서 의형제를 맺었던 박용만과 갈등이 생겼다. 1908년에 있던 ‘덴버회의 사건’으로 이승만은 박용만과 독립운동노선을 둘러싸고 차츰 대립의 싹이 트기 시작했다. 이승만은 교육·출판이나 외교 활동을 통한 노선이었지만, 박용만은 무장투쟁노선이었기 때문이다. 박용만은 1911년 미주에서 설립된 재미동포의 단체인 대한인국민회의 기관지 ‘신한민보’의 주필로 활동했었다. 그는 ‘국민개병설’, ‘군인수지’ 라는 책을 발간했고, 대일 무장투쟁을 준비하기 위해 교포가 많이 사는 하와이를 근거지로 삼아, 하와이 지방총회의 기관지 ‘신한국보’의 주필이 되어 항일 논조를 폈다. 또한 제1차 세계대전이 시작되던 1914년에는 하와이의 한 농장을 임대하여 동포 청년들과 공동으로 경작하면서 항일무장독립운동 단체인 대조선국민군단을 조직, 군사훈련을 실시했다. 그의 노력이 힘입어 총 124명의 독립군이 대조선국민군단에서 양성됐다.

(대조선국민군단, 1914년에 창설된 이 군단을 통해 박용만은 미주지역에서 무장독립운동을 준비했었다.)
이렇게 박용만과 노선 갈등이 있던 이승만은 1915년 5월 대한인국민회 하와이 지방총회의 주도권과 재정문제로 박용만 측과 대결하게 됐다. 많이 서술했듯이 박용만은 이승만과 한성감옥에서 의형재를 맺었던 인물이었고, 이승만을 하와이로 초청한 사람도 박용만이었다. 그러나 이승만은 대한인국민회와 하와이지역의 주도권을 행사하기 위해 박용만 제거에 나섰다. 이 시기 이승만은 박용만과 대한인국민회가 하는 사업들을 일일이 반대했다. 그는 반대하며 “그 집은 외 짓느냐, 건축을 하면 누가 있겠느냐?”라는 식으로 반대하는 모습을 보였다. 이승만은 대한인국민회를 장악하고 싶었다. 대한인국민회는 어렵게 사는 교민들이 자금을 바치는 곳이었고, 그로 인하여 미주지역 전체에서 모이는 독립운동 자금처였다. 이 사실을 안 이승만은 자신의 추종자들을 이끌고 대한인국민회를 장악하기 위해 싸웠다. 그는 자신을 반대하는 사람에게는 테러와 폭력도 불사했다.

(하와이의 파인애플밭, 당시 하와이에 살던 교민들은 이러한 고된 노동으로 생계를 이어나갔다.)

(하와이의 사탕수수밭, 당시 하와이에 살던 교민들은 이렇게 힘든 노동을 하며 살았지만, 이승만은 이들의 돈을 갈취해갔다.)
그렇게 해서 이승만은 마침내 하와이 한인사회의 주도권을 장악하게 되었다. 이승만은 1916년 여학생 기숙사를 확장하여 한인여자성경학원으로 발족시켰고, 1917년 8월에는 태평양 잡지사를 통해 ‘독립정신’ 제2판을 출판했다. 1918년 7월에는 호놀룰루에 신립교회를 설립하고, 같은 해 한인여자성경학원을 남녀공학제의 한인기독학원으로 개명 개편했다. 실제로 그는 국민회를 장악하면서 엄청난 부동산 재태크의 달인이 됐다. 1914년 7월 14일 이승만은 여학생 기숙사 건립기금 2400달러로 부동산을 구입했다. 그 당일날 이승만은 자신에게 땅을 판 프레드 베링거에게 그 땅을 담보로 1400달러를 빌렸다. 당시 돈일 빌리는 조건으로 1년내 상환이고 이자는 연리 8%였다. 1년후인 1915년 7월에 이승만에게 돈을 빌려준 베링거가 돈을 값으라고 항의하자, 이승만은 자신이 만든 빚 1400달러를 대한인국민회에게 값으라고 떠넘겼다. 그는 국민회 재산인 한인 여학교를 단돈 1달러에 인수했고, 국민회의 재산을 담보로 부동산 2개를 저당잡혀 4250달러를 대출했으며 나중에는 자기 소유로 만든 국민회 재산을 전부 매각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목돈을 챙겼다.
이후 이승만의 이러한 행위가 계속되자, 일부는 이에 반발했다. 특히나 박용만 쪽 인사들이 그러했다. 이러한 움직임이 있자 이승만은 자신의 추종자를 동원하여 그들의 입을 막으려고 했다. 그는 자신의 재정문제에 반발한 이들을 미국 경찰에 고발했다. 고발 사유는 폭동죄였다. 1918년 2월 27일 하와이 법원에서 이승만은 법정의 증인으로 나와 미국 판사를 향해 다음과 같이 믿기 힘든 말을 했다.
“판사님! 이들은 박용만 패당이며 미국 영토에 한국인 군대를 만들었습니다. 이들은 위험한 반일행동을 하며 일본군함 이즈모가 호놀룰루에 도착하면 파괴하려는 음모까지 꾸민 무리들입니다. 이것은 미국과 일본 사이에 중대한 사건을 일으켜 평화를 방해하려는 것입니다. 판사님 저들을 조처해 주십시오!”

(미국의 한 문서, 이승만은 사적인 권력욕을 위해 독립운동을 했다.)
하와이에 정착한 이승만은 친일적인 언사를 했고, 자신과 감옥에서 의형제를 맺었던 박용만까지 배신했다. 그는 박용만이 만든 독립군대를 미국과 일본 사이의 평화를 방해하려는 존재라 주장했고, 자신의 권력욕을 위해 이들에게 폭력을 행사하기도 했다. 또한 그는 1912년 워싱턴 포스트와의 인터뷰에서 식민지 근대화론과 똑같은 발언을 하기도 했으며, 미국 지배계급의 비위를 맞추기 위해 친일언사도 서슴지 않았다. 이것이 이승만이 하와이에서 독립운동을 하며 저지른 짓거리였다. 그러나 1919년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상해에서 탄생했을 때, 임시정부 초대 대통령으로 선출된 것은 다름아니게 이승만이었다. 도데체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