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0년대 이승만과 임정 탄핵 그리고 이봉창 윤봉길 의거

(상해 임시정부에 도착하여 임정요인들에게 환영 받았던 이승만, 임시정부 인사들은 그와 노선적 갈등이 있었지만 그가 상해에 도착했을 때 그를 환영해주었다.)    

 

1919년 상해에서 탄생한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초대 대통령이 된 이승만은 독립운동사에서 화합의 상징이 아닌 분열과 갈등 그리고 사리사욕의 상징이었다. 이승만의 대통령 선임을 둘러싼 갈등에서 외무총장인 박용만과 교통총장 문창범이 취임을 거부한 데에 이에 신흥무관학교를 새웠던 이회영과 신채호 같은 무장투쟁론쪽 인물들이 상해를 떠나 북경으로 올라갔다. 또한 러시아 혁명 이후 1918년 한인사회당을 창설하여 사회주의 계열 독립운동의 길을 열었던 이동휘는 레닌이 지원한 독립자금 관련한 문제를 독자적으로 처리하다 물의를 일으켜 1921년 임시정부를 떠나게 됐다.

 

1920년 당시 미국 수도 워싱턴에 머물고 있던 이승만은 그해 125일 상해에 도착했다. 상하이에 도착한 이승만은 독립운동가 여운형의 소개로 프랑스 조계에 위치한 미국인 안식교 선교사 크로프트 목사의 집에 기거하면서, 1213일 임시정부 청사를 방문하고, 처음으로 국무위원, 의정원 의원들과 상면했다. 임시정부의 독립자금을 사리사욕을 채우는데 사용하던 이승만이었지만, 그가 도착하자 임시정부 요인들은 갈등은 뒤로하고 환영파티를 열어주었다. 그러나 그런 환영도 잠시였다. 이승만이 상해에 도착한 지 한 달 만에 국무총리였던 이동휘가 사표를 제출했고, 그 뒤를 이어 안창호와 김규식 등이 차례로 임시정부를 떠났다. 당시 임시정부는 이승만이 상해에 거주하게 됨에 따라 외교론을 고수했는데, 이런 이승만의 외교독립론은 많은 이들에게 분열을 일으켰다. 민족문제연구소에서 만든 두 얼굴의 이승만에 따르면 그의 외교독립론은 다음과 같다.

(당시 이승만의 진정한 목적, 그는 독립자금을 횡령하여 자신의 사적인 영역에 사용했다.)

  

우리 형편상 전쟁준비는 국민들에게 맡기는 것이 옳다. 국내외 일반 국민들은 각자 직업에 종사하면서 여가시간에 병법을 연마하라. 무기도 각자 구하라. 그러다 좋은 시기가 오면 일제히 나서 싸우자.”

 

민족문제연구소의 다큐멘터리에 따르면 이승만이 이런 허무맹랑한 비젼을 내놓은 데에는 돈줄과 연관되어 있었다. 임시정부가 수립된 이후 한인들은 독립성금을 냈다. 정부는 예산을 편성해서 독립군 부대를 양성했다. 그런데 소위 대통령이라는 이승만이 여기에 끼어들어 소위 중개인 역할을 해왔던 것이다. 그는 성과가 사실상 없는 외교활동을 주장하며 13%만 정부에 송금했는데, 그러나 독립전쟁 준비를 모두 국민들에게 떠넘기면 얘기가 달라진다. 이렇게 되면 이승만으로서는 정부에 보낼 돈을 파격적으로 줄일 수 있기 때문이다. 즉 이승만은 독립운동을 사적인 이익을 위해 대통령을 자처하며 이러한 짓거리를 했던 것이다.

 

이런 허무맹랑한 주장을 하던 이승만에게 임정 요인들이 좋은 감정을 가질 수가 없었다. 당시 임시정부 국무위원들은 이승만이 정부가 수립된 지 1년 밤만에 왔으니 임시 대통령으로서 어떠한 방책을 준비해 온 것으로 믿고 기다렸지만, 그는 아무런 방안도 내놓지 못했다. 따라서 이승만에게 기대를 걸었던 임정 요인들은 실망할 수밖에 없었다. 이에 반발하여 이동휘ㆍ안창호ㆍ김규식ㆍ남형우 등 거물급 지도자들이 속속 임시정부를 떠났고, 이승만은 이들을 붙잡아 포용하려는 대신 신규식ㆍ이동녕ㆍ이시영ㆍ노백린ㆍ손정도 등을 새 국무위원으로 임명하여 위기를 넘기고자 했다.

 

이승만이 주장했던 외교독립론과 대척점에 있었던 무장투쟁론은 만주에서 여러 성과물을 만들어 냈다. 조선 시대의 현재 기준으로 수백억원의 재산을 소유하고 있던 이회영 선생은 1911년 신흥무관학교를 세워 무장 독립군을 양성하는데 최선을 다했다. 1919년 젊은 청년 약산 김원봉이 창설한 의열단은 1920년대 여러 가지 사보타주 활동을 함으로써 일본 제국주의자들과 그 압잡이들을 공포에 떨게 했다. 1920년 당시 만주 각지에서 조직된 무장독립군 세력은 홍범도의 지휘 아래 봉오동 전투에서 대승을 거두었고, 김좌진 장군의 지휘 아래 청산리 전투에서도 대승을 거두었다. 봉오동 전투와 청산리 전투에서 패배한 일본 제국주의자들은 간도 참변을 일으켜 소름끼치는 만행을 저질렀다. 이러는 시기 이승만이 대한민국임시정부 대통령으로서 한 것은 별로 없었고, 임시정부는 이승만의 독선과 독주로 요인들이 하나 둘씩 떠나가고 말았다.

(이승만이 독립운동 시절 당시 그가 보인 행적, 그는 돈가지고 장난치는데는 고수였다.)

 

이처럼 이승만의 독선적인 정부 운영과 무대책에 실망한 임시정부 국무위원들과 의정원 의원들은 국민대회를 준비하면서 지도체제를 대통령중심제에서 국무위원중심제 즉 일종의 내각책임제로 바꾸는 개헌작업을 시도했다. 이승만이 이에 반대하면서 임정은 더욱 분열상이 가중됐다. 이승만이 반대의사를 표명해도 바뀔 기미가 보이지 않자 그는 1921529일 마닐라행 기선 콜롬비아호를 타고 상해를 떠났다. 물론 그는 대통령직을 절대 사퇴하지 않았다. 그로부터 한달 뒤, 하와이 호놀룰루에 도착한 이승만은 민찬호 등과 대한인동지회를 조직하고, 동지회 창립석상에서 임시정부를 맹렬하게 비난하는 모습을 보였다. 이것은 자신에 반대한 임정 세력들에 대한 치졸한 보복행위였다.

 

이승만은 임시정부로부터 1921929일 태평양회의(위싱턴 군축회의)에 참석하라는 지침을 받고 하와이에서 수도 워싱턴 D.C로 돌아왔다. 그는 상하이 임시정부에서 자신의 위상이 흔들리는 것을 지켜보고 미국으로 돌아온 이승만은 워싱턴 D.C.의 구미위원부를 한국위원회(The Korean Commission)로 바꾸고 활동 근거지로 삼았다. 그는 김규식이 워싱턴에 도착한 것을 계기로 이승만 등이 한국위원회를 발족 김규식을 위원장으로 위촉하고 워싱턴회의에 참석하는 미 대표에게 <한국독립청원서>를 제출했지만, 당시 서구 제국주의 열강 국가들에게 한국의 독립문제는 안중에도 없었고, 워싱턴회의는 아무런 성과 없이 끝나고 말았다.

 

워싱턴회의 이후 이승만은 하와이에 아예 정착하게 됐다. 19236월 자신이 운영하는 한인기독학원의 남학생 12, 여학생 8명으로 하와이학생 고국방문단을 구성하고, 자신이 운영하던 학교 건축비 조달을 목적으로 호놀룰루 주재 일본총영사관과 교섭하여, 이 학생들이 일본 여권을 갖고 한국을 방문하게 했다. 그는 여기서도 일본에게 우호 내지는 친화적인 발언을 수도 없이 많이 했다. 임시정부와 이승만의 갈등은 점점 심각해졌다. 그가 무책임하게 상해를 떠난 이후 상해임시정부는 극심한 분열상을 보였고, 임시정부 의정원들은 미국에 건너간 이승만에게 전보를 보내 수습을 요청했지만, 그는 사태수습을 외면하고 답신조차 보내지 않았다. 임시정부 의정원은 이승만 대통령 불신임안을 제출하여 일주일 간의 토의 끝에 617일 재적의원 3분의 2의 찬성으로 불신임안을 의결하였다. 정부 수립 6년여 만에 임시 대통령 불신임안이 채택된 것이다.

 

임시 의정원의 불신임결의에도 이승만은 이를 강건너 불구경하듯이 봤고, 그는 구미위원부 사업을 빙자하여 임시정부의 허락도 없이 독립공채를 팔아 자신과 측근들의 활동비에 충당했다. 1925311일 임시정부 의정원의원 곽헌ㆍ최석순ㆍ문일민ㆍ고준택ㆍ강창제ㆍ강경신ㆍ나창헌ㆍ김현구ㆍ임득신ㆍ채운개의 명의로 임시 대통령 이승만 탄핵안이 발의되고, 임시 대통령심판위원장 나창헌, 심판위원 곽헌, 채원개, 김현구, 최석순이 선임되었다. 이에 따라 이승만은 임시 대통령에 취임한 지 6년여 만에 의정원에서 면직되었고, 쉽게 말해 탄핵됐다

(1925년 임시정부의 이승만 탄핵 문서, 우리는 2017년 박근혜가 탄핵된 것을 두고 대한민국 역사 최초로 탄핵에 성공했다 했지만, 박근혜 탄핵 90년 전 이승만 또한 임정에서 탄핵당했다.)

 

1925410일 상해임시정부 의정원은 이승만이 주도하고 있는 구미위원부의 폐지령을 공포했지만, 이승만은 이에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러나 3년 뒤인 1928년에 구미위원부는 폐쇄상태가 되고 말았다. 1920년대 중후반 이승만은 주로 하와이에 머물면서 활동했다. 이승만이 탄핵당한 이후 임시정부의 주석 자리에는 민족주의자인 백범 김구가 오르게 됐다. 그는 비록 반공주의적이고 우익 민족주의적인 인물이었지만, 조국을 일제로부터 독립시키겠다는 의지가 매우 강한 열렬한 독립운동가였다. 그는 임시정부가 가장 어려운 시기 임시정부를 지켰다

(윤봉길 의거에서 보인 이승만의 반응)

 

사실 대한민국임시정부가 다시 활동적인 단체로 거듭난 것은 1932년 백범 김구가 주도했던 이봉창 윤봉길의 의거를 통해서였다. 1932년 한인애국단원 이봉창은 일본 도쿄에서 일본 제국주의자들이 살아있는 신으로 모시는 천황을 암살하려고 하다 체포됐다.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 상해 홍구공원에선 한인애국단원 윤봉길이 던진 물통 폭탄으로 주중 일본공사 시게미츠 마모루를 포함한 일본 제국주의의 거물들 7명이 죽고 부상당했다.

 

이 사건은 독립운동사에 큰 영향을 주었다. 이를 알게된 중국의 장제스 총통은 100만 명의 중국인이 하지 못한 일을 조선인 1명이 했다고 하며 칭찬을 아끼지 않았고, 대한민국임시정부를 물질적으로 지원하게 됐다. 당시 윤봉길 의거의 방법론에는 비판적인 견해를 가졌던 조선공산당의 박헌영도 19327월에 박헌영은 '상하이 폭탄 사건은 무엇을 의미하느냐?'라는 제목으로 이 사건을 다루며, '윤봉길의 의거는 결코 살인이 아니며, 일제의 대표들을 죽이고 병신을 만들었다는 것은 참으로 통쾌한 기분'이라고 집필했다.

(장제스와 이승만이 보였던 윤봉길 의거에 대한 반응, 같은 극우파임에도 이처럼 독립운동에 대해 대조적인 모습을 보였다.)

 

그러나 당시 미국에 있던 이승만의 반응은 과거 장인환 전명운 열사가 단행했던 스티븐슨 사건에서 보인 행보처럼 이봉창 윤봉길 의거에 대해서도 주제넘게 평가절하했다. 이승만은 윤봉길 의거에 대해 이런 행동은 어리석은 짓이며, 일본의 선전내용만 강화시켜 줄 뿐 한국의 독립을 가져다주지는 못할 것이다.”라고 했다. 196587일 경향신문에 실렸던 <이승만박사 해외독립운동 내막>을 보면 다음과 같은 내용이 나온다

(1933년 스위스 제네바에 있는 국제연맹 건물에서 찍은 이승만 사진)

 

“19321월 이봉창 의사는 일본 천황을 암살하려 했고 윤봉길 의사는 상해에서 시라가와 대장을 비롯한 일본의 유력 인사들에게 폭탄을 던져 여러 명을 폭살 또는 불구로 만들었다. 그리고 만주를 비롯해서 고국에 무장투사가 잠입하여 일본인들의 간담을 서늘케 했다. 이때 이승만은 이러한 행동을 크게 비난하고 어리석은 짓들이라고 조소했다. 미국 신문 <크로니클>지 보도에 의하면, 그 당시 이승만은 이른바 비밀사절을 상해 임시정부에 파견하여 테러행위를 즉각 중지하도록 설득하였다고 한다. 이승만에 의하면 이봉창이나 윤봉길 의사의 의거가 한국의 독립에 하등 도움도 되지 않을 뿐더러 일본으로 하여금 한국을 탄압하는 구실밖에 주는 것이 없다고 했다.”

(일본 내막기, 진주만 기습공격이 일어나기 전 이승만이 쓴 책이다. 일각에서는 이 책을 가지고 이승만의 반일사상을 높게 평가하지만, 그 이전에 이승만이 미국의 비위를 맞추기 위해서 보여주었던 행동들을 생각하면 이는 정반대의 모습이다.)

 

이승만은 1925년 임시정부에서 탄핵당했지만, 자신의 사리사욕을 채우는 행위를 끝내지 않았다. 그는 1910년대 초와 1920년대 당시 일본에 대해 우호적인 사설이나 발언들을 자주 했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초대 대통령이라는 권위를 이용해서 독립자금을 사적인 영역에 이용했다. 백범 김구가 조직한 한인애국단의 이봉창 윤봉길 의사가 의거를 감행했을 때, 이것은 독립운동에 방해되는 짓이라며 이를 주제넘게 평가 절하했다. 이러는 시기 국제정세는 점차 일본의 군국주의화를 불러왔고, 일본의 극단적 군국주의화는 미국과의 대립으로 이어졌다. 이런 과정을 거치면서 이승만 또한 일본에 대한 반일적인 모습을 보이게 됐다. 결정적으로 1941127일 일본의 진주만 기습 공격이 있고 나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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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인 2020-05-06 17:3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한국 현대사 최대 비극은 이승만이 초대 대통령이 되었다는 것이죠. 글 잘 읽었습니다. :)

NamGiKim 2020-05-06 17:41   좋아요 1 | URL
김삼웅 선생의 책과 민족문제연구소 다큐 그리고 그외의 몇개 서적들 참고해서 썻습니다. 하루빨리 이승만식 반공주의를 벗어나야 할텐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