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임통치론과 대한민국 임시정부 초대 대통령 이승만

(파리강화회의 당시 모인 연합국 정상)   

 

이승만이 하와이에서 세력을 형성하고 있을 시기 식민지 조선과 세계 정세는 변화해 가고 있었다. 1910년 조선을 식민지화 한 이래로 일제는 소위 무단통치를 실행했다. 무단통치란 일본이 조선의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등 모든 부분에서 강점정책을 실행하던 통치였다. 그들은 조선총독부를 만들어 조선의 행정권, 입법권 그리고 군대사용권 등을 모두 가지고 있었고, 일본 헌병이 경찰력을 대신했다. 일본이 조선을 무단통치롤 지배하고 있을 시기 세계는 크나큰 전쟁에 휩싸였다. 그 전쟁이 바로 제1차 세계대전(World War 1)이다. 1914628일 세르비아의 한 청년이 오스트리아의 황태자를 저격한 것으로 시작된 제1차 세계대전은 유럽의 거의 모든 국가가 참전하게 되는 전쟁이었고, 1000만 명 이상 죽게 만든 전쟁이었다. 이 과정에서 미국은 1917년에 참전하게 됐고, 1918년 연합국 측은 독일제국의 항복을 받아낼 수 있었다.

 

1차 세계대전이 끝나면서 전승국들은 연합국과 동맹국 간의 평화조약을 협의하기 위해 1919년 프랑스에서 파리강화회의를 열었다. 당시 미국의 대통령이자 이승만의 스승이기도 한 우드로 윌슨은 소위 민족자결주의를 표방했는데, 이것은 제국주의 국가에 짓밟혀왔던 약소 민족국가들 사이에서 유행하게 됐다. 파리강화회의가 열릴 시기 신한쳥년당을 이끌었던 독립운동가 여운형(Lyuh Woon Hyung, 呂運亨)은 김규식을 프랑스 파리에 보내 열강들에게 독립을 청원하고자 했다. 당시 미국에 있던 이승만은 191916일 하와이 호놀룰루를 출발하여 122일 대한인국민회 중앙총회장인 도산 안창호(安昌浩) 만났다. 그 뒤 뉴욕을 거쳐 23일 필라델피아에서 서재필을 만났다. 이승만은 서재필, 정한경, 장택상 등과 회동하고 필라델피아를 떠나 수도 워싱턴 D.C로 달려가 파리행 여권을 준비했다. 그는 여권 취득을 위해 윌슨 대통령을 면담하고자 했지만, 윌슨은 자신의 제자인 이승만을 만나주지 않았다. 결국 이승만과 그 일행은 파리 강화회의 참석이 불가능하게 됐다.

(이승만의 위임통치 청원서 내용)  

  

파리강화회의에서 강대국들은 식민지 조선의 상황을 무시했지만, 그해 식민지 조선에선 전국적으로 반일운동이 일어났다. 그것이 바로 3.1 운동이다. 3.1운동은 전국적으로 일어난 저항운동이었고, 비록 일제의 잔인한 진압으로 끝났지만, 민중 대부분이 참여했다는 점에서 큰 의미가 있었다. 이승만은 파리강화회의 참석이 좌절되면서 새로운 방안을 모색했다. 그것이 바로 위임통치 청원이었다. 1919225일 이승만은 위임통치 청원서를 우편으로 미국 대통령과 파리강화회의에 제출하였는데, 이 청원서 내용이 국내외 독립운동 진영에 알려지면서 독립운동 세력들은 크게 분노했다. 그가 작성한 청원서의 한 부문은 다음과 같다.

 

저희들은 자유를 사랑하는 1500만 한국인의 이름으로 각하께서 여기에 동봉한 청원서를 평화회의에 제출하여 주시옵소, 연합국 열강이 장래 한국의 완전한 독립을 보장한다는 조건하에 일본의 현 통치로부터 한국을 해방시켜 국제연맹의 위임통치하에 두는 조처를 취할 수 있도록 지지하여 주시기를 간절이 청원하는 바입니다.”

(1919년 필라델피아에서 열렸던 거리행진)  

  

아무튼, 이와같은 이승만의 위임 통치서가 알려지자 독립운동가들은 분통을 터뜨렸다. 더 분기충천하게 만든 일은 1919314일 이승만의 측근인 정한경이 미국 신문과의 회견에서 한인들이 원하는 것은 국제연맹 회의에서 한국을 관할하되, 민주정치를 쓰는 미국이 한국정치를 고문하여 차츰 한국의 기초를 굳건히 하고자 하는 데 있다라고 설명한 데에 있다. 즉 이승만이 주장한 위임통치론은 말 그대로 미국이 대신 조선을 일본 대신 통치해주자는 발언이었고, 이것은 이승만의 친미사대주의적인 발언이었다. 이승만과 정한경은 3.1운동 소식이 미국에 전해지고 난 다음에도 위임통치 문제를 가지고 미국 언론의 주목을 끌고자 했었다. 이것만 보더라도 이승만이 보인 행동은 친미 사대주의적인 행보였다. 이승만을 연구한 이화여대 교수 정병준은 이승만의 노골적인 반일운동은 3.1운동 이전까지 한 차례도 없었다고 지적한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필라델피아에서의 행진 당시 성조기와 태극기를 들고 있는 이승만)   

 

대외적으로 이승만은 미국 정세와 하와이 내 자신의 입지에 따라 대일관에서 유화적인 자세와 반일을 오고 갔지만, 한인 사회 내부에 대해서는 언제나 반일 구호를 내세웠다. 이승만은 자신의 종교 활동과 교육활동이 모두 독립과 반일을 위한 것이라고 한인들에게 설명했다. 그러나 1915년의 국민회 쿠데타와 1918년 이즈모호 사건 등은 이승만의 대내적 반일구호가 실제로는 자신의 정치적 기반 강화를 위한 도구일 뿐이라는 의심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했다. 적어도 1919년 이전까지 이승만은 단 한 차례도 노골적인 반일운동을 벌인 적이 없었다.”

 

이승만은 310일 서재필에게서 국내의 3.1운동 소식을 들었고, 재미 독립운동가들은 미국 독립운동의 요람지로써 독립기념관이 있는 필라델피아에서 414일 한인대회를 열었다. 14일부터 16일까지 대략 3일 동안 필라델피아 소극장에서 열린 이 대회는 서재필, 이승만, 임병직, 조병옥, 유일한 그리고 노디 김 등이 참가했고 총 150명이나 되는 독립운동가들이 참가했다. 비슷한 시기 국내외에서는 몇 갈래로 임시정부 수립이 시도되었고, 19193~4월 국내외적으로 도합 8개의 임시정부가 수립 선포되었다. 이중에서 실제적인 조직과 기반을 갖추고 수립된 것은 러시아 연해주, 상해 그리고 한성정부였다. 한성임시정부는 이승만을 소위 집정관 총재로 선출했다.

(임시정부 건국 강령)  

  

1919411일 중국 상하이에서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수립됐다. 상하이에서 국내외에서 모여든 조선의 각구 대표 30명이 410~11일 임시의정원 회의를 개최하고 여기서 임시헌장 10개조와 정부 관제를 채택, 임시정부를 수립하여 대내외에 선포했다. 그리고 국무위원을 선출했는데, 여기서 국무총리는 바로 이승만이 되었다. 더나아가 그는 대한민국임시정부 초대 대통령 자리에 오르게 된다. 도대체 어떻게 해서 초기 개화운동 이후에 아무것도 한게 없었던 이승만이 어떻게 해서 결과적으로 대한민국임시정부 초대 대통령 자리에 오를 수 있엇던 것일까? 그 이유에 대해 주진오 교수는 무엇보다도 그가 미국과 친밀한 관계를 갖고 있는 사람으로 비쳤다는 점이 중요하게 작용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에게는 배재학당 시절부터 맺어진 미국인 선교사들과의 친밀한 관계가 늘 막강한 배경을 이루었다라고 주장하며 다음과 같이 진단한다.

 

당시 국민들 사이에서 국내에 과장되게 알려졌던 그의 외교활동 성과도 큰 몫을 하였을 것으로 판단된다. 상해임시정부의 운동노선이 외교론이라는 점은 이미 잘 알려져 있는 사실이다. 이때 가장 주된 관심의 대상은 당연히 미국이었다. 그러므로 미국과의 외교관계를 잘 수행해 낼 수 잇는 사람으로서 이승만이 주목된 것이 그가 대통령이라는 지위를 차지하게 된 배경을 이룬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거기다가 왕족의 후손이라는 신화와 35일 간에 불과했던 중추원 의관의 경력, 그의 구속이 사실은 박영효 역모사건과 관련때문이었지만 만민공동회 활동의 결과라는 인상도 유리하게 작용했을 것이다.”

(1920년 이승만이 이끌던 구미위원부)   

 

하지만 이승만이 대통령이 임시정부의 국무총리가 되자 그의 선출을 둘러싸고 심한 논란이 있었다. 즉 이승만이 국무총리를 맡아서 되는 지에 대한 적격성 논란이었다. 1911년 전재산을 바쳐 신흥무관학교를 새웠던 우당 이회영이나 역사학자 단재 신채호 그리고 이승만과 의형제를 맺기도 했었던 박용만 등 무장 독립운동계열 인사들은 위임통치론을 제기한 이승만을 거세게 비판했다. 이들은 이승만이 선출되자 퇴장하기에 이르렀다. 이들은 외세에 의존하여 절대 독립을 방해하는 사람이 새 정부의 수반이 될 수 없다는 주장을 강하게 했다. 단재 신채호는 다음과 같은 말을 남겼다.

(이승만에 대해 비판을 한 단재 신채호, 그는 이승만을 이완용 보다 더 한 매국노로 간주했다.) 

  

이승만은 이완용보다 더 큰 역적이다. 이완용은 있는 나라를 팔아먹었지만, 이승만은 아직 나라를 찾기도 전에 팔아먹은 놈이다!”

 

이승만은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초대 대통령이 되고 난 이후부터 그 권위를 이용했다. 그는 상하이임시정부의 거듭된 현지 업무 집행의 요청에도 불구하고 미국을 떠나려 하지 않았다. 그는 191910월 초부터 19206월 말까지 자신의 비서 임병직과 함께 미국 주요 도시를 순방하면서 교포들과 미국인들을 상대로 일제의 만행을 규탄하고 임시정부의 지지를 호소했지만, 한편으로 그의 외교노선으로 이회영 신채호 등이 상해 임시정부를 떠나 북경으로 올라가 버렸다. 또한 이승만은 임시정부의 초대 대통령이 된 이후 그 기관의 돈줄부터 장악하고자 했다. 그는 워싱턴에 구미위원부를 설립하여 국채를 발행해 돈을 모으기 시작했다. 그러한 그의 행동은 무장투쟁을 추구하던 이들의 반발을 불러왔고, 임시정부를 내분에 휩싸이게 했다. 따라서 독립운동사에서의 이승만의 존재는 분열과 갈등 그리고 사리사욕에 찬 상징이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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