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0 3·15 부정선거와 4·19 혁명

(이승만과 이기붕)

 

이승만 정부는 정치 분야에선 이승만 개인과 자유당 독재의 길로 가고 있었고경제는 무너져가고 있었다당시 이승만 정부는 미국 경제원조로 유지하고 있었다하지만 미국의 경제원조는 1957년 3억 8,289만 3천 달러에서 1958년에는 3억 2,217만 2천 달러로 감축되었으며, 1959년에는 2억 2,220만 4천 달러로 거의 1억 달러 가까이 삭감됐다이렇게 미국의 원조가 감축되자 즉각적으로 한국경제는 몰락하기 시작했다. 1959년 7월 31일 이승만은 정치경쟁자 조봉암을 사법살인 함으로써 자신의 권력을 공고히 하고자 했다또한 그는 여전히 건강한 편이었다. 85세의 고령에도 불구하고 이승만의 권력욕은 수그러들지 않았다.

 

이승만은 1958년 12월 소위 보안법파동이라 하여 자유당 단독으로 신국가보안법을 통과시켰다이것은 여순항쟁 이후 10년만에 새로 제정된 국가보안법으로 사실상 자유당 정권의 정권연장을 위한 수단이었다이들은 통과시킨 국가보안법에는 간첩행위를 극형에 처하게 한다.”는 내용이 들어가 있었다이들이 제출한 새 국가보안법에는 1. 간첩활동의 방조행위에 대해 범죄구성의 요건을 명백히 하며, 2. 간첩죄 피고인의 변호사 접견을 금지하며, 3. 상고심 제도를 폐지한다는 3대원칙의 정략이 숨겨져 있었다여기에는 정 부통령 선거를 앞두고 야당과 언론인의 활동을 제약하고 탄압을 가속화하려는 이승만의 숨겨진 의도가 있었다.

 

이렇게 되자 민주당의 백남훈조병옥곽상훈장택상 등을 포함한 민주당과 무소속의원 95명은 범야 연합전선으로 저지투쟁에 나섰다물론 이승만의 자유당 측도 반공투쟁위원회를 구성하고장택상을 회유함으로써 범야 연합전선을 붕괴시키고자 했다자유당 정부는 신국가보안법 통과를 위해 내무부와 은밀한 협의를 거쳐 극비리에 전국 각지의 경찰서에서 유도와 태권도 유단자인 무술경찰관 300명을 임시 경위로 특채하고, 3일 동안 국회경위의 역할을 담당할 훈련을 시켰다이승만과 자유당의 목표는 오로지 ‘1960년의 재집권에 있었다이승만과 이기붕은 제4대 정·부통령선거에 대비하여 1959년 3월 가장 충직하다고 믿는 최인규를 내무장관으로 하고재무 송인상부흥 신현확농림 이근직교통 김일환을 각각 국무위원에 기용했다또한 그들은 신국가보안법이 통과되기 5일전 야당의원들이 식사하러 간 사이에 자유당의원만으로 3분만에 법사위에 상정한 것을 처리하는 변칙을 연출했다당연히 야당의원들은 이에 반대했고국회의사당 안에서 농성투쟁에 들어갔다이럴걸 예상하고 있던 이승만 세력은 훈련시킨 무술경관들을 동원하여 무자비하게 구타하고 지하실에 감금했다박순천김상돈허윤수김응주김재건 의원 등이 중경상을 입고 세브란스병원에 입원해 응급치료를 받기도 했다.

(1960년 대통령 선거, 이승만과 이기붕은 자유당 집권 연장을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다.)

 

비록 이승만과 자유당이 무차별적인 폭력을 휘두르고 진보당의 조봉암을 사법살인 했지만야당은 이승만 정권에 저항했다. 1959년 11월 26일 서울 시공관에서 민주당 정·부통령 후보 지명대회가 열렸고대통령 후보에는 조병옥부통령 후보에는 장면이 선출됐다이들은 구파와 신파의 갈등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연합했다당연히 자유당은 이승만을 대통령 후보로 내세웠고부통령 후보로는 이기붕을 내세웠다하지만 민주당은 여기서 큰 타격을 받았다. 1956년 신익희가 그랬던 것처럼 그도 급병으로 사망했기 때문이다.

(조병옥 후보의 사망, 그의 죽음으로 다시한번 민주당에게 대통령 후보 없는 선거를 치르게 됐다.)

 

1959년 12월부터 민주당의 대통령 후보 조병옥은 피로가 겹치며 몸 상태가 안 좋아졌다결국 1960년 1월 29일 조병옥은 치료차 도미하게 됐다조병옥이 도미하자 자유당은 선거 시기를 2개월이나 앞당겨 3월 15일에 실시할 것을 2월 3일에 전격 발표한다. 1960년 2월 조병옥은 미국에서 수술을 받았다수술 후 경과도 매우 좋은 편이었고주미대사로 있던 양유찬이 문병을 와서 담소를 나눌 정도였다하지만 2월 15일 충격적인 일이 발생했다쾌유할 거라 생각했던 그가 심장마비를 일으켰고 그 자리에서 사망해버린 것이다그로부터 6일 뒤 조병옥은 김포공항에 무언의 환국을 했고운구행렬에는 시민들이 뒤따라 고인의 죽음을 애도했다. 4년 전에 그랬듯이 민주당은 대통령 후보 없이 부통령 후보만으로 선거를 치르게 됐다다시한번 고통을 겪게 된 장면은 부통령 후보는 자유당에 1/3의 표를 주지 말고 재선거를 실시하자라고 하며 유권자에게 호소했다이런 상황속에서 자유당은 부통령 선거를 위해 온갖 음모와 공작을 꾸미고 있었다바로 부정선거였다.

 

1960년 2월 하순 이승만 정부는 내무장관 최인규의 이름으로 선거사상 최악의 부정선거 지령문을 전국 시장·군수·경찰서장에게 내렸다지령문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1. 자연기권표선거인 명부에 허위 기재한 유령 유권자표금전으로 매수하여 기권하게 한 표 중 합계 유권자 4할에 해당하게 하는 표를 사전에 자유당 입후보자에게 기표하였다가 투표개시 (오전 7전에 무더기로 투표함에 투입할 것. (소위 4할 사전투표)

 

2. 자유당 입후보자에게 투표하도록 미리 공작하는 유권자로서 3인조 또는 9인조를 편성하여 그 조장이 조원의 기표상황을 확인한 후 다시 각 조원이 기표한 투표용지를 자유당선거위원에게 제시하고 투표함에 투입토록 할 것. (소위 3인조 또는 9인조 공개투표)

 

3. 자유당 유권자로 하여금 자유당 완장을 착용하고 투표케 함으로써 투표소 부근 일대의 분위기를 자유당 일색화하여 야당 측 유권자에게 심리적 압박을 가하여 자유당에게 투표토록 한다.

 

4. 민주당 참관인을 매수하여 참관 못하게 하거나그것이 불여의할 경우에는 변기를 투표소 내에 가지고 왔다는 등 구실로 시비를 걸어서 투표소 밖으로 축출할 것.

(3.15 부정선거 개표)

 

이 지령문은 1960년 3월 3일 민주당에 의해 폭로되었지만정부와 여당은 이것을 오히려 야당의 날조라 공격했고그들에게 충성하는 어용신문들은 이를 대서특필했다. 3월 15일 투표가 실시됐다예정대로 부정선거가 저질러졌다자유당의 부정선거의 핵심은 4할 사전투표로 3인조1·5인조·9인조의 공개투표를 통해 자유당 후보의 득표율 85%를 사전에 달성한다는 것이었다당연히 이들은 부정선거를 방해하지 못하도록 투표소에서 야당 참관인들을 매수해 퇴장시키도록 했다따라서 3.15선거는 자유당의 사전계획대로 철저한 부정선거로 이루어졌다중앙선관위의 선거결과 발표에 따르면 전국의 유권자 1,119만 6,498명 중 1,050만 9,482명이 투표에 참가하여 963만 3,376표로 이승만이 제4대 대통령에 당선되었고부통령에는 833만 7,059표를 얻은 이기붕이 당선되었다장면은 184만 4,257김준연은 24만 5,526임영신은 9만 9,090표였다즉 이승만은 전체 유권자의 92%를 이기붕은 78%를 득표한 셈이다.

(부정선거 이후 마산에서 일어난 시위, 3.15 부정선거가 있자 많은 시민들이 이에 분노했다. 마산 시위는 민중혁명을 알리는 신호탄이었다.)

 

이렇게 3.15 부정선거가 자행되자 많은 국민들이 분노했다분노한 이들은 저항하기 시작했고가장 용기있게 떨치고 일어선 사람은 바로 경남 마산의 시민과 학생들이었다마산시민들과 용기있는 학생들은 부정선거 날 오후 평화적으로 부정선거를 규탄하는 시위를 벌였다학생과 시민들이 시윌르 벌이자 경찰은 투석전을 벌인 끝에 무차별 발포와 체포·구금으로 다수의 희생자를 만들었다이러자 격분한 시민들은 남성동파출소를 비롯한 경찰관서와 변절한 국회의원 및 경찰서장 자택을 습격했다이 과정에서 시민 7명이 사망하고 80여 명의 사망자가 발생했다전라도 광주에서도 시위가 일어났다. 12시 50분경 광주 민주당원 50여 명은 <()! 민주주의 장송>이라고 쓴 만장을 선두로 민주주의는 죽었다는 곡성을 외치며 금남로 4가에서 광주지방법원 앞까지 시위하였다그러나 경찰에 저지당해 다수의 부상자를 내고 해산되었다.

 

마산에서 시위가 일어나자 경찰은 주모자로 26명을 구속했다경찰은 구숙안 이들을 혹독한 고문을 가했고 용공분자나 좌익분자라는 허위자백을 받아내려 했다또한 정부는 이 마산시위를 공산당의 조종으로 몰아붙여 시민들의 분노를 샀다심지어 경찰은 인민공화국 만세라고 쓰인 전단을 시위 도중 사망한 학생들의 주머니에 집어넣기도 했다국민은 더 이상 참으려하지 않았다대통령의 담화나 경찰의 탄압에 더 이상 겁먹지 않았다. 3월 17일 진해고교생서울성남고교생전남여고생들이 데모를 벌였다이런데도 부정선거를 저지른 측은 파렴치하고 뻔뻔한 모습을 보였다. 3월 18일 부통령 당선자로 공고된 이기붕은 마산사건에 대한 기자들의 질문에 총은 쏘라고 (일부는 쓰라고로 들었다 함준 것이지 가지고 놀라고 준 것은 아니다라는 망언을 했다이기붕의 망언은 당연히 시위진압에 나선 일선 경찰들에게 발포명령으로 받아들여졌다.

 

3.15부정선거와 이에 저항하는 시위는 외신을 통해서도 보도됐다. <런던 타임스>(3월 15)는 <고교생도 반항적>이란 기사에서 대구고등학생들의 시위를 상세히 보도하고 <타임>(3월 21)은 <경찰 통제 하의 3인조 선거>, 같은 날짜 <뉴스위크>는 <붙들고 놓지 않으려는 연극>, <워싱턴 포스트>(3월 16)는 <침묵에 잠겼던 한국의 젊은 세대 잠을 깨다>, <르몽드>(3월 18)는 사설 <심각한 투쟁양상>, <크리스챤 사이언스 모니터>(3월 16)는 사설 <이씨의 승리중대문제를 야기>, 같은 날짜 <뉴욕타임스>는 사설 <마산사건의 발생>, 은 <양당제도 파탄위기>, <워싱턴 포스트>(3월 17)는 사설 <더러운 승리>, <런던 타임스>(3월 17)는 사설 <차라리 가장(假裝)선거를>, <이코노미스트>(321)는 <이박사의 희미한 승리>, <뉴욕 타임즈>(3월 22)는 사설에서 <이박사의 후계자>문제를 각각 제기하였다.

(김주열 열사의 사체, 시위가 격해지자 경찰은 발포했고, 그로인한 사상자가 발생했다. 김주열 열사는 경찰이 쏜 최류탄에 맞고 사망했다. 하지만 경찰측은 이 사실을 은폐하기 위해 그의 사체를 바다에 던졌다. 그리고 이 일을 주도했던 경찰간부는 바로 친일경찰이었다.)

 

1960년 4월 11일 마산상고생 김주열 학생의 사체가 오른쪽 눈에 최루탄이 박힌 처참함 모습으로 바다에서 떠올랐다참으로 기가막힌 사실은 학생 김주열에게 정면에서 최루탄을 쏴 죽인 마산경찰서 경비주임 박종표는 일제 악질 경찰출신이다이를 지켜 본 시민들이 궐기했다분노한 시민들은 김주열 열사 사건을 계기로 경찰의 만행과 부정선거를 규탄함으로써 4월혁명의 불길을 앞당겼다2마산사건은 경찰의 발포로 2명 사망, 14명 부상 등의 희생을 치루면서 며칠째 계속되었다정부는 4월 13일 마산의 적색분자를 조사를 한다며 군경의 대공 3부 합동조사위원회를 설치하고마산에서 일대 검거 선풍을 벌였다이승만은 4월 15일 다시 마산사건은 공산당의 조종이 있다는 담화를 발표했다검찰은 2차 마산사건과 관련하여 시민학생 30명을 구속하고 28명을 불구속 입건했다.

(학생들의 시위, 학생들의 시위는 이승만 정권의 폭압이 강해질수록 더 격렬해졌다. 심지어 중학생과 초등학생도 시위에 자발적으로 참가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승만은 뻔뻔했다이승만은 3.15부정선거에 항거하는 마산 시민학생들을 끝까지 공산당 조종이란 용공사건으로 몰아 위기의 국면을 벗어나고자 하였다이승만의 추종자들이 3.15 부정선거는 최인규 등 내각에서 저지른 것이고이승만은 몰랐다는 주장은그의 거듭된 용공담화’ 발표에서 거짓임이 확인된다이승만은 3.15 부정선거와이에 항거한 마산 시민·학생 학살의 주범이다.

 

마산을 시작으로 번진 시위는 전국적으로 확대됐다서울에서도 이승만과 이기붕의 부정선거를 규탄하는 시위가 일어났고특히 고려대학교 학생들이 이 시위에 아주 적극적으로 참가했다. 1960년 4월 18일 고려대학교 학생들은 대규모 시위에 나섰다. 4천 명의 고려대 학생들은 오후 1시 교내에서 선언문을 낭독한 다음 스크럼을 짜고 안암교종로를 거쳐 9차례나 경찰과 충돌하면서 저지선을 격파하여 오후 2시 15분 국회의사당(광화문 소재앞에 도착연좌시위에 들어갔다결집했던 고려대 학생들은 결국 유진오 총장의 설득으로 농성을 풀고 학교로 돌아가는 것을 선택했다여기서 문제가 또 터졌다청계천 4가에서 잠복해 있던 100여 명의 정치깡패들이 부삽·쇠갈귀·몽둥이·벽돌 등으로 마구 난타하여 학생 10여 명기자 3명 등이 부상당하는 사태가 일어났기 때문이다이 정치깡패는 반공청년단 소속으로 이정재를 두목으로 하는 동대문 특별단부라는 조직폭력배들이었다여기에는 임화수유지광 등이 관여한 것으로 알려졌다.

(4.18 고대생 습격 사건 현장, 이정재를 두목으로 하고 있는 동대문파 깡패들은 고려대 학생을 폭행했다.)


(유지광, 유지광은 동대문파 깡패다. 그는 이정재, 임화수등과 더불어 4.18 고대생 습격 사건을 주도했던 인물중 하나다.)

 

정치깡패의 고려대학생 폭행사건은 오히려 민중시위의 기폭제가 되었다다음날인 4월 19일 여러 대학 학생들은 총궐기했다그날 고교생과 대학생을 비롯한 10만여 명의 서울시민이 시위에 참가했다서울대생 2천여 명이 민주주의를 위장한 백색 전체주의에 항거한다는 선언문을 낭독하고 교문을 출발하여 경찰의 저지선을 뚫고 국회의사당 앞까지 진출하였다이와 함께 건대생 1,500동국대생 1천 여 명서울사대생 1,500여 명동성고등학생 1천여 명서울의대약대생 1,600여 명성균관대생 1,500여 명고대생 2천여 명연대생 4천여 명경희대생 1천여 명경기대서울음대생 2백여 명단국대국학대한양대서라벌예대성심여대홍익대강문중고생흥국중고생대광중고생 등 도합 10만 여 명의 학생들이 광화문으로 밀려왔던 것이다시위대중 일부는 경무대로 향했고또 다른 일부는 정부기관지 서울신문사와 반공회관경찰서 등에 불을 지르고 부정선거를 규탄했다다른 지방도시에서도 수십만의 학생들이 이승만 정권 타도 시위를 벌였다.

(곽영주, 곽영주는 이승만의 경호를 맡던 경찰 간부다. 그는 4.19 혁명 당시 경무대로 몰려온 시민과 학생에게 발포했다. 그 결과 수백명의 사상자가 발생했다.)

 

경무대 앞에서는 이승만의 경호를 맡은 곽영주가 경찰에게 발포를 명령하여 무차별 총격이 시민들에게 가해졌다이날 하룻동안 서울시내 곳곳에서 수 차례 시위대와 경찰의 접전이 이루어지고경찰의 무차별 발포로 100여 명의 사망자와 수천 명의 부상자가 발생하였다학생들은 쓰러진 동료들의 시신을 업고 일진일퇴를 거듭하였다단말마적인 경찰은 최루탄실탄기관포를 가리지 않고 난사하여 사상자가 더욱 늘어났다. 419혁명 과정에서 186명의 사망자와 6,230명의 부상자가 발생했다즉 많은 이들이 경찰의 발포로 이날 목숨을 잃은 것이다.

(경무대에서 후퇴하는 경찰병력)

 

여기서도 이승만은 마지막 발악을 했다그는 4월 19일 오후 1시를 기해 서울 일원에 국무원 공고 83호로 비상계엄령을 선포하고 계엄사령관에 육군 참모총장 송요찬 중장을 임명했다. 16시 30분 부산·대구·광주·대전 지구에도 계엄을 선포하여언론을 사전 검열하고 오후 7시부터 새벽 5시까지 통행을 금지시켰다이승만은 시위를 진압하고 싶어했던 것이다하지만 이승만이 임명한 송요찬 중장은 시위 진압을 거부했고오히려 시민들 편에 섰다결국 4월 21일 내각이 유혈사태에 대한 책임을 지고 물러났고, 22일 이기붕이 모든 공직에서 물러난다는 것을 밝혔다이어 부통령이었던 장면은 이승만에게 대통령직에서 물러날 것을 촉구하며 부통령직을 사퇴했다여기서 민중들은 이승만의 하야를 요구했다. 4.19혁명이 일어난 지 6일 후인 4월 25일 전국 대학교수들이 시국수습을 위한 선언문을 발표했다이들은 “4.19의거로 쓰러진 학생의 피에 보답하라는 슬로건을 내걸고 계엄하에서 시위를 감행했고시가를 행진했다교수단의 데모는 시민과 학생들의 절대적 지지를 불러일으켰고다음날인 26일에 대대적인 데모를 촉발시키면서 이승만 정권의 몰락에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매카나기 대사, 주한미국대사인 매카나기는 이승만에게 대통령직에서 물러날 것을 요청했다.)

 

결국 4월 26일 이승만은 국민들에게 자신이 대통령직에서 물러나겠다는 의사를 밝혔다이로써 이승만의 제1공화국 정부가 시민혁명으로 무너진 것이다하지만 이승만이 사퇴한 것에는 또 다른 이유가 있었다바로 주한 미국대사 매카나기가 미국의 뜻을 전달했는데거기에는 이승만이 물러나길 바라는 미국의 의지가 있었기 때문이다즉 이승만은 미국이 자신을 버렸다는 것을 깨닫고 물러나는 길을 택한 것이다이승만이 대통령직에서 물러나자 이기붕 일가도 끝이나 버렸다이승만의 양자였던 아들 이강석은 권총으로 가족을 쏴죽인 뒤본인도 자살로 생을 마감했다.

(이승만 하야소식을 보도한 신문기사)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수립부터 1960년 4월 26일 대통령직에서 물러날 때까지 이승만은 12년이라는 기간 동안 독재자로써 군림했다. 85세의 나이에도 불구하고 조금이라도 더 권력을 유지하고자 했던 이승만의 권력욕은 민중혁명으로 막을 내렸다일각에서는 이승만이 마치 민중을 생각해서 하야한 것처럼 얘기한다그러나 이 시리즈를 다루면서 누누이 강조했듯이 그는 공산주의자 색출을 위해 광적인 민간인 학살을 저질렀던 인물이었다따라서 이승만에겐 그러한 양심따위는 전혀 없었다그는 그 시점에서 노욕만 있었을 뿐이다. 3.15 부정 선거 이후 민중혁명 과정에서 그가 보인 모습은 전형적인 독재 권력자의 모습이었다단지 미국이 물러나라 해서 물러났을 뿐그가 물러난 이후 그의 지원자였던 이기붕 일가가 집단자살로 생을 마감했다이기붕 일가의 장례식에 참가했던 그에게 이제 남은 것은 단 하나였다그것은 바로 다시 한국을 떠나는 일이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9)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이승만과 자유당 독재 체제 그리고 조봉암 사법살인

(민주당, 민주당은 1955년에 창당됐다. 현재 집권여당인 민주당의 뿌리는 여기에 있다고 보면 된다.)

 

한국전쟁이 끝나지 않았던 1952년 부산정치파동을 주도하면서까지 권력욕을 꺾지 않았던 이승만은 1954년 소위 사사오입 개헌이라는 전대미문의 수학공식으로 개헌안을 통과시키는 등 독재정치를 일삼았다나이가 80이 다되어감에도 불구하고 이승만의 권력욕을 그칠 줄을 몰랐다. 1951년 이승만이 주도하여 창당된 자유당은 사실상 이승만을 위한 당이었다특히나 한국전쟁 기간부터 갈등을 하게 된 정치세력들은 1954년 사사오입 개헌을 시작으로 새로운 정당을 만들었는데그것이 바로 민주당이다.

 

민주당은 1955년에 창당되었다신익희조병옥장면윤보선이철승박순천유진산 등이 민주당에서 활동했다또한 사사오입 개헌 당시 개헌에 반대했던 자유당 인사들도 떨어져 나오면서 민주당에 합류하기도 했다참으로 흥미로운 사실은 이들 대다수가 해방 이후 우익으로써 이승만 편에 서서 소위 좌익반대에 앞장섰던 인물이었다는 사실이다거기다 조병옥은 이승만 악행사 민간인 학살편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1948년 제주 4.3 항쟁을 피바다로 만들었던 장본인이었다이들의 반공의식은 이승만 못지않게 강경했지만하지만 한국전쟁을 겪으며 이승만이 개인적인 권력욕이 자신들의 이해관계와 갈라지자 대립하게 되었다.

 

이승만은 본격적으로 족벌정치와 독재정치를 실행하기 시작했다그는 충직한 비서출신 이기붕에게 자유당을 맡겼고초대 대통령 중임제를 철폐하는 개헌안을 관철시킴으로써 영구집권이 가능한 토대를 만들었다당연히 여기서 이승만은 과거에도 항상 그랬듯이 비판세력에게는 국가안보(National Security)’의 개념을 내세워 빨갱이(Commie)’ 딱지를 붙였다한국전쟁 이후에도 이승만은 반공정서를 절대로 버리지 않았다그는 1954년 7월 28일 그는 미국 상하의원 합동회의에서 제3차 세계대전을 촉구하는 초강경연설을 했다그의 연설에 따르면 북한과 중국은 물론이고 소련과의 전쟁까지도 지체없이 벌어야 한다.”는 것인데 이것은 미국 반공 보수세력의 지지를 받기에는 충분했다.

(1950년대 판자촌, 이승만 정부 시절은 참으로 가난한 시기였다. 전쟁으로 인한 경제적 피해와 친일파들의 부정부패 그리고 이승만 정부의 무능은 최악의 경제체제로 이끌었다. 이때분에 민중의 생활은 나락으로 떨어졌다.)


(부대찌개, 현재 우리가 즐겨먹는 부대찌개는 사실 한국전쟁 이후 한국에 주둔하던 미군들이 먹다 버린 햄이나 소시지 등을 한국사람들이 한국화해서 먹으면서 생긴 음식으로, 가난의 역사를 담고 있는 음식이다.)

 

이승만이 이끄는 반공국가 대한민국은 한국전쟁 이후 경제가 참으로 피폐했다휴전 협정 이후 대한민국의 GNP 성장률은 떨어지기 시작했는데, 1953년 당시 GNP 성장률이 25.7%였지만 1954년에는 5.2%, 1955년은 4% 그리고 1956년에는 0.3%까지 떨어졌다인플레이션도 매우 심각했다휴전 이후 4년 동안 인플레이션으로 인한 물가상승률은 26.4%, 51%, 42.9%, 37.8%였다경제가 나락으로 떨어지는 한국의 상황을 직시하던 미국은 이승만 정부에게 경제개발 계획을 실행하라고 했지만자유주의와 반공주의를 신봉하던 이승만에게 경제개발 5개년 계획과 같은 것은 사회주의 국가에서나 하는 것이기에 절대로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현재 뉴라이트 세력들이 그렇게 원하는 이승만식 자본주의는 사실 그들 스스로도 자각하지 못하고 있지만현재 한국사회에서 누리고 있는 복지제도의 전면적 철폐에 가까운 어리석은 논리다따라서 현재 전세계적 펜데믹 COVID-19의 무상진료도 이승만의 논리대로라면 자비로 치료받아야 한다즉 뉴라이트들은 이 정도의 상식도 없는 맹신적 자본주의자들인 것이다.

 

이승만 정권 당시 민중의 생활은 참으로 가난했다당시 한국에 주둔하던 미군이 먹다 벌인 음식 즉 꿀꿀이죽으로 배를 채우는 한국인들이 부지기수였고미군부대에서 일하던 이들이 미군이 먹다버린 햄이나 소시지 등으로 음식을 만들었는데 이게 바로 현재 우리가 즐겨먹는 부대찌개였다한국경제가 인플레이션으로 허덕일 때 자유당을 비롯한 친일파 관리들의 부정부패는 극에 달했었다대표적으로 이승만에게 자신의 아들을 이강석을 양아들로 넘겼던 이기붕의 경우를 들 수 있다. 1960년 8월 21일 자 동아일보에 의하면 이기붕 소유와 그의 아내 박마리아 소유의 건물과 땅주식재산 등은 상상을 초월했다이기붕 일가에 비하면 이승만은 양호한 편이었다다른 관료들 또한 이들 못지않는 부정부패와 재산축적을 일삼았다.

(이승만 동상, 이 동상은 이승만 생일을 기념하여 만들어졌다. 높이가 무려 24m나 된다. 이승만은 전 사회적 영역에서 자신의 우상화 작업을 실행했다.)

 

이승만 개인에 대한 국가적 차원의 숭배가 있었다이승만 80회 생일을 기념하며 24m 높이의 동상이 제작됐다. 59년 10월엔 이승만의 얼굴을 넣은 100환 동전 등 이승만을 소재로 한 화폐 8종이 발행되었다서울 뚝섬에는 이승만의 호를 딴 우남송덕관우남회관우남정등의 건물이 건축됐고부산 용두산 공원은 우남공원으로 명칭이 변경되었으며중앙대학교 도서관은 우남도서관이라는 이름이 붙여졌다심지어 서울시를 우남시로 변경하려는 시도도 있었을 정도였다당시 자유당 정권은 이승만 찬양가를 지어 배포했는데노래의 가사는 다음과 같다.

 

우리나라 대한나라 독립을 위해.

여든 평생 한결 같이 몸 바쳐 오신.

고마우신 리대통령 우리 대통령.

그 이름 기리기리 빛나오리라.

오늘은 리대통령 탄생하신 날.

꽃피고 새노래하는 좋은 시절.

우리들의 리대통령 만수무강을.

온겨레가 다같이 비옵나이다.

우리들을 리대통령 뜻을 받드러.

자유평화 올 때까지 멸공전선에.

몸과 맘을 다 바치어 용진할 것을.

다시 한번 굳쎄게 맹세합니다.

몸과 맘을 다바치어 용진할 것을.

다시 한번 굳쎄게 맹세합니다.

(반공청년단 관련 기사, 반공청년단은 이승만을 맹신적으로 따르는 단체였다. 그들은 이승만을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했다.)

 

이승만 정귄 시기 각종 어용 조직 단체가 활기쳤다이승만은 반공청년단’, ‘상이군경회’, ‘서북청년단’ 등 철저한 반공주의자들을 압력단체로 이용하였고이들 압력단체들은 여당 기간단체 내지는 산하 단체로서 애초부터 정부권력 및 정당의 뒷받침을 통해서 이루어졌다이승만은 1957년 이기붕의 장남 이강석을 양자로 들였다본부인과의 사이에 아들이 있었으나 미국에서 사망하고프란체스카와의 사이에서는 출산을 하지 못했기 때문이다물론 이기붕의 아들 이강석을 양자로 들인 이후 1957년 신학기를 맞아 서울법과대학에 부정 입학시킨 것이 탄로가 났었다.

(이승만 일가, 이승만과 이기붕 일가는 한국이라는 나라를 자유당 독재 국가로 이끌었다.)

 

1956년 5월 15일 제3대 대통령선거와 제4대 부통령 선거가 실행됐다집권당인 자유당은 대통령 이승만이 이기붕을 러닝메이트로 하고야당인 민주당은 대통령 후보에 신익희부통령 후보에 조병옥을 내세웠다또한 혁신계의 진보당은 전 농림부장관이었던 조봉암을 대통령 후보로 내세웠다. 1956년 선거 당시 민주당은 불행을 겪었다이승만에 대적하기 위해 자신들이 내세웠던 후보 신익희가 열차에서 심장병으로 급사했기 때문이다그것도 투표일 10일을 앞둔 사망이었다투표 당시 이승만을 따르는 자유당은 부정선거를 획책했지만개표결과 이승만 504만 6,437조봉암 216만 3,808신익희 추모표 185만 표가 나왔다이승만 득표율 80%라는 예측은 완전히 빚나갔다그리고 부통령 선거에서는 장면이 401만 2,654표로 380만 5,502표인 이기붕을 누르고 당선됐다사실상 자유당이 이 선거에서 패배한 셈이다.

(조병옥, 해방 이후 반공노선으로 가며 이승만과 함께 했던 조병옥은 한국전쟁을 이후 이승만과 대립했다. 그 결과 그는 아이러니하게도 민주당에서 활동하며 반이승만 활동을 전개했다.)

 

이승만과 자유당 정권은 반대세력들에게 탄압과 공작을 일삼았다부통령 선거에서 패배한 이승만과 자유당은 부통령 장면을 암살하기 위한 계획을 세웠다. 1956년 9월 28일 오후 2시 30분 이승만과 자유당 측이 고용한 암살범이 명동 시공관에서 장면을 향해 총탄을 발사했다하지만 이 사건은 살인미수에 그쳤다저격사건의 범인은 자유당 정책위원이자 이기붕의 측근 임홍순의 조종을 받는 하수인 김상봉이었다그는 현장에서 체포되어 경찰에 넘겨졌다권총을 발사했던 김상봉은 권총 발사 이후 조병옥 박사 만세!”를 외치며 자신의 범행을 민주당 신파와 구파의 싸움으로 몰고 가려는 치졸한 연극을 연출했다물론 이것은 사전이 치밀하게 짜인 각본이었다.

(이정재, 이정재는 자유당의 끄나풀로 소위 동대문파를 이끌었다. 그는 한때 김두한 밑에 있던 조직 폭력배였으나, 1950년대 동대문파를 이끄는 조직 폭력배 두목으로 성장했다. 결국 그는 1961년 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박정희에 의해 처형된다.)

 

위에서 상술했듯이 이승만은 반공청년단과 같은 여러 청년 단체와 조직 폭력배를 동원하는 것을 좋아했다대표적으로 장충단집회 방해 사건을 들 수 있다자유당의 사주를 받은 이정재임화수유지관 등 동대문파 정채깡패들은 1957년 5월 25일 자유당의 독재를 규탄하기 위해 서울 장충단 공원에서 열린 시국강연회를 방해하는 사건을 벌였으며당연히 이것은 이승만과 자유당 세력이 의도한 것이었다.

(경향신문 폐간 관련 기사, 이승만 정부는 1958년 경향신문을 폐간조치했다.)

 

언론탄압도 심했다. 1958년 1월 27일 서울시경은 만화작각 김성환을 경무대를 모욕했다는 이유로신문사에는 허위사실을 게재했다는 혐의로작가를 즉결 심판에 회부하여 과태료 450환에 처했다이른바 <고바우 만화필화사건이다당시 정부 정책에 비판적 성향을 보이는 언론사는 대표적으로 <동아일보>와 <경향신문>이었다. <경향신문>이 이승만과 그 정권에 대한 비판적인 언론을 지속적으로 쓰자이승만은 그 신문사를 폐간시켰다결국 경향신문은 4.19 혁명 이후에 복간될 수 있었다.

 

이처럼 1950년대의 한국사회는 이승만 위주로 돌아가는 사회였다모든 분야에서 이승만이 강조됐다부정부패한 관료들은 이승만에게 아부떨기 바빴고이승만과 자유당은 영구집권을 위한 시도들을 정치적으로 해나갔다반공교육은 전사회적으로 실행됐다. 1958년 1월 12일과 15일 조봉암을 포함한 진보당 인사들을 검찰이 체포하는 일이 벌어졌다이승만 정부가 조봉암을 구속한 죄명은 이른바 간첩죄였다.

(죽산 조봉암, 조봉암은 대한민국의 정치인이자 사회주의 계열 독립운동가다. 일제시절 소련의 수도 모스크바 동방노력자대학에서 유학했던 그는 독립운동에 투신했다. 해방 이후 조선공산당과 남로당에서 활동했지만, 박헌영과의 노선갈등으로 탈당하고 1948년 대한민국 정부 수립에 참여했다. 이후 농림부 장관을 역임하고, 토지개혁을 단행했다. 1950년대에는 이승만의 반대세력이 됐고, 간첩죄로 구속되어 형장의 이슬로 사라진다.)

 

1956년 대통령 선거에서 이승만 다음으로 많은 득표율을 얻었던 조봉암은 대중적인 정치인이자 독립운동가였다일제시절 사회주의 운동에 투신했다가 해방 이후 박헌영과의 노선 갈등으로 남로당을 탈당한 조봉암은 대한민국 초대 내각의 농림부 장관으로써 유상매수 유상분배에 입각한 토지개혁을 성공적으로 마쳤던 인물이었다그 또한 한국전쟁을 겪으며이승만과 갈등하게 됐고이승만의 정치적 경쟁자로 등극했다특히나 1956년 대통령 선거에서 이승만 다음으로 많은 득표율을 얻었던 조봉암은 이승만에게 있어 눈엣가시와도 같은 존재였다거기다 조봉암은 이승만과는 달리경제적 평등을 추구했다경제적 분야에서의 개혁을 추구했던 조봉암은 통일론에서도 이승만과 달랐다그 또한 반북주의가 있었지만이승만과는 달리 조국을 평화적으로 통일해야 한다고 생각했다따라서 그는 평화통일론을 주장했다. 1948년 이후부터 계속 구호에만 그친 북진통일론을 주장하던 이승만하고는 달랐다.

 

이승만은 그를 어떻게 해서든 제거하고 싶었다그래서 그는 조봉암과 진보당을 간첩죄로 몰아 체포했다이렇게 구속된 진보당 대표 조봉암은 1958년 7월 2일 1심재판에서 징역 5년을 선고받았다하지만 이승만을 지지하는 반공세력들은 판결 뒤 청년들을 동원하여 친공판사 유병진을 타도하라”, “조봉암을 간첩혐의로 처벌하라라며 난동을 부렸다결국 1959년 2월 27일 대법원 확정판결에서 조봉암은 사형선고를 받았고나머지 진보당 간부들은 무죄를 선고받았다사형선고를 받은 조봉암은 1959년 7월 31일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죽산 조봉암 무죄 선고, 죽산 조봉암은 사형선고 52년 만에 대법원에서 무죄를 판결받으면서 명예가 회복됐다.)

 

조봉암을 제거하기 위한 이승만 정권의 음모는 비열하기 짝이 없었다구속된 진보당 간부들에게 모진 고문을 자행하면서 살려줄 테니 조봉암이 간첩이었다는 사실만을 진술하라는 등 사건조작을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다그들은 조봉암을 간첩으로 만들기 위해서 조봉암 집에 있는 서재에서 마르크스 관련 책이 있다는 이유로 빨갱이로 몰았다또한 그가 주장하던 평화통일론을 빨갱이 사상이라며 폄하하기 바빴다조봉암 간첩 누명은 사형집행 52년 만인 2011년 대법원에서 무죄를 선고하며 무고함이 확인됐다당시 조봉암이 구속되자 아이러니 하게도 이승만 반대편에 있으며한때 자유당과 같이 진보당을 좌익으로 몰았던 조병옥이나 장택상 등이 그를 변호하기도 했었다즉 이것만 보더라도 조봉암은 애초부터 간첩이 아니었고이승만 정권의 억울한 희생자였다.

 

이승만은 자신의 권력욕을 위해 장면 암살을 시도하고반공청년단이나 이정재의 동대문파를 동원하여 폭력으로 반대세력을 탄압했으며자유당과 자신의 영구집권을 위해 부정선거도 마다하지 않았다북진통일론을 끝까지 주장했으며 북한과의 적대적인 노선 추구뿐만 아니라 중국과 소련하고 전쟁을 해야 한다며 세계적인 반공투사를 자임했다즉 이승만은 외교적으로도 반공을 주장했던 것이다. 1956년 미국의 지원을 받은 영국과 프랑스가 이집트 나세르 정권이 국유화한 수에즈 운하를 폭격하자, “우방 영국과 프랑스를 위해 한국군을 파병하겠다는 망발을 했었다그의 집권 기간 동안 친일파 민족반역자들의 부정부패는 극에 달했고민중의 경제는 나락으로 떨어졌다미국이 경제개발을 요구해도 뼈속까지 자유주의자였던 이승만은 이를 듣지 않았다.

 

그는 자신의 권력욕을 위해 진보당의 당수 조봉암을 사법살인 하는 악행을 저질렀다조봉암 사법살인에서 알 수 있듯이당시 한국 사회는 약간이라도 진보적인 주장을 하면 사법살인이 가능한 반공독재국가였다반공에 조금이라도 어긋나면 얼마든지 공권력을 동원해 처벌할 수 있었고이승만은 이를 자신의 권력욕을 위해 악용했다죽산 조봉암이 사법살인 당한 이후 이승만 정부는 막장을 향해 더욱 질주하고 있었다위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인플레이션과 경제구조는 무너질 상황이었고간신히 미국의 원조로 버티고 있는 수준이었다그러던 중 이승만 정부를 끝낼 결정적인 사건이 발생했다그게 바로 3.15 부정선거와 4.19 혁명이었다.


댓글(2) 먼댓글(0) 좋아요(1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가람 2024-02-04 23:2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제1공화국 시절에는 물자가 하도 모자라서, 화장실에서 대변을 닦은 휴지도 재활용을 해서 그걸로 책을 만들었는데 재활용 기술도 형편없어서 대변 처리도 제대로 안 되어 대변에 포함된 고춧가루 같은 물질이 그대로 묻은 재생지로 이루어진 책들도 있었다고 합니다. 출처가 강준만 교수의 한국 현대사 산책 시리즈의 1950년대 편 같은데, 잘 기억이 안 나는군요...

NamGiKim 2024-02-04 23:25   좋아요 0 | URL
워낙 가난한 나라니 가능성 있죠. 거기다 전쟁으로 인프라 다 파괴됐고.
 

독재정치를 향한 발걸음부산정치파동과 사사오입 개헌

 

2011년에 나온 영화 고지전(The Front Line)’을 보면 휴전회담이 진행중이던 1952년에서 1953년 사이 38선을 중심으로 배치되어 있던 남북한의 병사들은 회담에서 유리한 위치를 점하기 위해 지속적으로 교전을 한다그 과정에서 무수히 많은 남북한의 병사들이 목숨을 잃었고이러한 전투는 휴전회담이 성사될 때까지 지속됐다. ‘반공포로 석방’ 편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이런 상황에서도 이승만은 오로지 북진통일만을 외쳤다한국전쟁에서 휴전회담이 진행되는 와중에 이승만이 했던 또 다른 일은 바로 자신의 독재 권력을 강화하는 것이었다.

(부통령 이시영, 이시영은 1911년 신흥무관학교를 세운 이회영의 동생이다. 그는 이회영과 더불어 독립을 위해 한평생을 바쳤던 독립운동가였다.)

 

1911년 신흥무관학교를 세워 독립운동에 온몸을 바쳐 투신했던 이회영 일가의 6형제 중 한명인 이시영은 1948년 7월 12일 제헌국회에서 초대 부통령에 당선되어 새 국가건설에 노력을 다했던 인물이었다물론 이승만의 견제는 점점 심해졌고한국전쟁 당시 임시수도 부산에 있을 때는 상황이 더 힘들어졌다결국 부통령 이시영은 1951년 5월 1일 <국민에게 고한다>는 한 통의 서한을 신익희 국회의장 앞으로 전달하고 부통령직에서 사임했다이승만은 부통령의 존재를 고깝지 않게 여겼다그는 매사에 유아독존적이었다정부의 각종 행사장에서는 부통령의 자리를 마련하지 않을 때가 많았고국정의 주요 정책 결정에 소외시키기 일쑤였다국회는 5월 17일 부통령 보궐선거를 실시하여 과반수 득표자가 없어 결선투표 끝에 김성수가 78표를 얻어 74표를 얻은 이갑성을 누르고 제2대 부통령에 당선되었다김성수도 부통령직에 오래 있지 못하였다. 1952년 5월 29일 폭탄적인 사임서를 제출하고 물러나고 말았다.

(부산의 임시수도 정부청사, 한국전쟁 당시 이승만이 사용했다.)

 

이승만은 자신의 대통령 재선을 위해선 어떠한 것도 마다하지 않았다원래대로라면 국회 의석의 분포로 봐서는 도저히 재선이 불가능한 구도였지만이승만은 노회함은 그것에 굴복하지 않았다거기서 그가 생각해낸 것이 바로 대통령 직선제 개헌이었다이렇게 이승만은 직선제 개헌을 추진함으로써 제2대 대통령선거에 대비하면서 1951년 11월 23일 자신이 주도하는 당을 발족했다그 당이 바로 자유당이다당시 자유당은 당의 주도권을 둘러싸고 원내파와 원외파로 분열되었는데원내파는 이갑성을 중심으로원외파는 이범식을 중심으로 각각 자유당을 발족하나의 이름으로 두 개의 정당이 만들어지는 이상한 구도였다이승만은 이 두 개의 자유당을 하나의 정당으로 통합하여 자유당을 만들었다.

 

이승만이 생각했던 대통령직선제 개헌안은 1952년 1월 28일 표결 결과 재적 163명 중 가 19, 부 143, 기권 1로 부결되는 참패로 끝났다직선제 개헌안이 국회에서 부결되자 이승만은 자유당과 방계단체인 국민회한청족청 등을 동원하여 1952년 1월 말부터 백골단땃벌떼민중자결단 등의 명의로 국회의원 소환 벽보와 각종 삐라를 뿌리는 등 공포분위기를 조성하였다소위 이들은 전국애국단체 명의로 대통령직선제 요구 등을 내건 이승만지지 운동을 전개하였다하지만 이승만이 주도한 관제데모는 결과적으로 반 이승만 정서를 고조시키는 역풍을 불러왔다.

(부산정치파동, 당시 이승만이 동원한 헌병들은 대낮에 국회의원들이 타고 있던 버스를 연행했다.)

 

이승만은 대통령 직선제를 개헌하기 위해선 합법적인 방법으로는 불가능하다고 판단을 내렸다그는 1952년 5월 25일 부산을 포함한 경남과 전남 전북 일부지역에 비상계엄을 선포하고 최전선에서 인민군과 대치중이던 전투부대까지 후방으로 빼내어 계엄을 선포했다계엄사령부는 즉각 언론검열을 실시했고내각책임제 개헌추진을 주도한 의원들의 체포에 나섰다다음날인 5월 26일 국회의원 40명이 타고 국회로 향하던 통근버스를 크레인으로 끌어 헌병대로 몰고 가서 연행했다이게 바로 부산정치파동 사건이었다이런 상황까지 가자 이시영김창숙김성수장면 등 반이승만 야당원로들이 부산에서 이른바 국제구락부 사건으로 불리는 호헌구국선언대회를 열어 이승만 독재를 규탄하고 나섰다그러나 6.25기념식상에서 전 의열단원 유시태와 김시현 등이 주도한 이승만 암살미수사건이 터지면서 야권은 완전히 전의를 잃게 되었다.

 

해방 후 친일경찰 채용에 앞장섰던 장택상은 이런 기회를 놓치지 않고 국회해산을 협박하면서 발췌개헌을 추진했다발췌개헌안은 7월 4일 심야에 일부 야당 의원들을 강제연행하고경찰군대와 테러단이 국회를 겹겹이 포위한 가운데 기립표결로서 출석 166명 중 가 163기권 2명으로 의결하고, 7월 7일 공포하였다비상계엄은 28일 해제되었다이승만의 일방적인 선거운동으로 개정 헌법에 따라 8월 5일 실시된 첫 직선제 대통령선거에서 이승만은 74.6%의 압도적 득표로 제2대 대통령에 당선되었다직선제로 실시한 제2대 대통령선거에서 이승만은 발췌개헌 과정에서 내무장관으로서 충직한 심복 노릇을 한 이범석이 자유당 공천으로 부통령후보가 되었으나이를 인정하지 않았다권력욕이 강한 이승만은 족청을 등에 업은 이범석의 세력이 커지는 것을 두려워했기 때문이다결국 이범석을 토사구팽의 신세로 전락했다여기서 알 수 있듯이 이승만은 자파라도 세력이 커질 것 같으면 그 뿌리부터 자르는데 머뭇거림이 없는 노회함을 겸비한 인물이었다.

(1952년 대통령 선거 투표장)

 

1953년 7월 27일 휴전협정이 성사되면서 한국전쟁은 막을 내렸다하지만 한국전쟁의 종결은 국내 정치적으로 남한의 반공보수세력의 기반을 공고히 굳히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10만 미만이었던 한국군은 60만 대군으로 급격히 자라났고경찰력도 증강되어 반공안보체제를 강화했다그리고 반공이라는 체제의 가치는 국시로서의 지위로 더 강화되었고소위 사회주의 노선이나 민주사회주의 노선 할 거 없이 조금이라도 진보적인 색체를 보이면이단취급 받는 광적인 사회가 되었다.

 

1953년 5월 20일 제3대 민의원 선거가 한국에서 실시되었다3대 총선은 2년 앞으로 다가온 제3대 대통령선거를 앞둔 이승만에게는 대단히 중요한 선거가 되었다우선적으로 이승만은 국회에서 이범석 세력을 철저히 제거하는 일에 착수했다이승만은 먼저 대통령령을 발포하여 각종 청년단체를 불법화하였고자유당과 별도로 독립적으로 존재하던 이범석의 족청을 존재할 수 없게 만들었다그러고 난 뒤 이승만은 헌법 속에 들어있는 의원내각제의 잔재를 완전히 없애고 장기집권을 위한 개헌을 가능하게 하는 다수의석을 차지하고자 했다.

 

1952년 부산정치파동을 시작으로 자유당을 통한 이승만의 독재정권이 공고화 되기 시작하자 대한민국 국회는 점차 반이승만세력들이 뭉치기 시작했다해방 후 이승만과 한편에 섰던 조병옥이나 이범석 그리고 신익희 등의 인물들이 바로 그러했고이승만을 위해 백색테러를 일삼다가 국회의원 자리까지 들어가게 된 조직폭력배 김두한 또한 반이승만세력이 되었다아무튼 제3대 총선은 이승만이 이와 같은 목적을 충족시키기 위해 강압적으로 시행되었다자유당은 거액의 정치자금을 긁어모아 유권자를 매수하는 한편 깡패들을 동원하여 야당의 유세장을 기습하고 야당 후보 및 무소속 후보들에게 테러를 가하는 등 갖은 불법행위를 저질렀다특히 제2대 대통령선거에 출마했던 초대 농림부장관 조봉암의 등록 서류를 탈취하여 후보등록을 못하게 하고장면의 측근 오위영에게 후보를 사퇴하도록 압박하였다.

(자유당, 자유당은 한국전쟁 시기부터 그가 대통령직에서 물러날 때까지 이승만을 대변했던 정당이다.)

 

온갖 부정타락선거의 결과 자유당은 114석으로민국당 15대한국민당 3국민회 3제헌동지회 1무소속 67석에 비해 압도적 승리를 거뒀으나 당초 목표인 개헌정족수를 채우는 데는 실패했다. 1954년 9월 7이승만의 자유당은 선거공약을 실천한다는 명분으로 이기붕 의원을 포함한 135명의 서명을 받아 개헌안을 국회에 제안했다이렇게 하여 제2차 개헌파동이 시작된 것이다개헌안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① 국민투표제의 채택 주권의 제약 또는 영토의 변경을 가져올 국가안위에 관한 중대사항에 대한 국민투표제 채택.

 

② 국무총리제 및 국무위원 연대책임제를 폐지하고 민의원에 국무위원에 대한 개별적 불신임권 부여.

 

③ 참의원 의원을 2부제로 개선.

 

④ 참의원에 대법관 기타 고급 공무원의 임명에 대한 인준권 부여.

 

⑤ 경제체제의 중점을 국유국영의 원칙으로부터 사유사영원칙.

 

⑥ 현대통령에 한하여 중임 제한 폐지.

 

⑦ 기타 8개 항의 개정사항을 포함한 내용을 담고 있었다.

 

불과 2년전 부상정치파동을 주도했던 이승만은 종신대통령을 꿈꾸며 1954년 5월에 실시된 제3대 민의원선거에서 대규모 부정선거를 저질러 자유당이 원내 압도적 다수를 차지하게 됐지만거기서 만족하지 않은 이승만은 자유당의 개헌안을 공고기간에 거쳐 11월 18일 본회의에 상정했다또한 이승만은 국회상정에 앞서 우파 반공주의의 본산인 민국당을 용공으로 몰아가는 등 개헌안 통과를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다개헌안은 11월 27일 국회에서 표결에 부친 결과 재적 203명 중 가 135부 60기권 7표로 개헌정족수인 136표에 1표가 미달부결이 선포되었다이날 사회를 맡은 최순주 국회부의장은 개헌안이 1표 차로 부결되었다고 분명히 선언했다.

(사사오입 개헌, 이승만은 자신의 권력욕을 위해서라면 이상한 전대미문의 수학계산법도 마다하지 않았다.)

 

그러나 여기서 역사상 유래를 찾아볼 수 없는 일이 일어났다개헌안이 부결된 다음날인 11월 28일 일요일 자유당은 긴급 의원총회를 소집하고 정부는 공보처장 갈홍기의 이름으로 203명의 2/3는 135라도 무방하다는 특별성명을 내는 등 개헌안 부결 번복을 위해 총력을 다했다. 27일 저녁 자유당 수뇌부는 서울대학의 수학교수 최윤식 등을 동원하여 203의 3분의 2가 135라는 희한한 방식에 착안하고이 내용을 이승만에게 보고하여 개헌안이 통과된 것으로 처리하기로 결정했다.

 

자유당 의총은 성명을 통해 어제 최 부의장이 본회의에서 개헌안 투표가 부결임을 선포한 것은 의사과장의 잘못된 산출방법의 보고에 의하여 착오 선포된 것이라고 지적하고 재적의원 203명의 3분의 2는 정확하게 135.333……인데 자연인을 정수가 아닌 소숫점 이하까지 나눌 수 없으므로 사사오입의 수학적 원리에 의해 가장 근사치의 정수인 135명 임이 의심할 바 없으므로 개헌안은 가결된 것이라는 해괴망측한 발표를 했다다음날 29일 최 부의장이 개회 벽두에 전차회의에서 부결이라고 선포한 것은 계산착오이므로 취소하고 가결되었다고 선포하자국회는 난장판이 되었다이것이 바로 사사오입 개헌(四捨五入改憲)’이었다.

(사사오입 개헌의 논리)

 

이승만은 이런 전대미문의 개헌으로 종신 대통령의 토대를 마련했다사사오입 개헌은 절차상으로도 정족수에 미달한 불법적인 개헌이었을 뿐만 아니라 1인의 종신집권을 보장하는 개헌이었다는 점에서도 한국의 헌정사상 황당무계한 사건이었다이승만의 악행은 대통령으로서 독재정권을 강화하면서도 아주 잘 드러났다그는 자신의 권력욕을 위해서라면 그 어떠한 일을 가리지 않았으며, 1952년의 부산정치파동과 1954년의 사사오입 개헌은 이를 명백히 보여주고 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8)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의미 없는 북진통일론과 반공포로 석방 그리고 한미상호방위조약

(이승만과 워커 장군)

 

1950년 6월 25일에 시작된 한국전쟁은 인민군의 진격도 신속했지만전쟁 초기 인민군의 진격 속도만큼이나 미군의 군사개입 또한 매우 신속했다지난번 이승만 정부의 민간인 학살 파트에서도 언급했듯이 이승만은 전쟁 초기 도망치기 바빴으며미국의 즉각적인 군사개입에도 불구하고 대한민국 영토 90%가 인민군이 점령하게 되는 상황에 놓이게 됐었다그러나 그 시기 워커 장군의 이름을 딴 워커라인 즉 낙동강 전선이 형성되면서 인민군 또한 길게 진격하지 못했다미국은 이 전쟁에서 UN군이라는 이름하에 총 15개국을 전쟁에 끌어들였고영국프랑스캐나다호주뉴질랜드터키태국필리핀 등이 이 전쟁에 군대를 보냈다.

 

1950년 9월 15일 UN군 사령관인 더글라스 맥아더(Douglas MacArthur)가 인천상륙작전을 개시하면서 전세는 인민군 쪽에게 불리해졌지만항미원조 보가위국의 기치를 내세운 마오쩌둥(Mao Ze Dong)의 중국군대가 참전하면서 북진했던 연합국은 다시 후퇴하여 1951년 1월 4일엔 수도 서울이 인민군과 중공군에게 함락 당했다이렇게 되자 유엔군 총사령관인 더글라스 맥아더는 1951년 4월 중국공산당 영토인 만주에 대한 대대적인 폭격 및 핵폭격 그리고 국공내전 당시 대만으로 피신한 장제스 군대의 반격을 주장했다만약 맥아더의 말대로 만주에 핵공격이 가해졌다면 만주와 한반도 지역의 방사능 피해는 이루 해아릴 수 없었을 것이다결국 스탈린의 참전으로 인한 제3차 세계대전을 우려한 대통령 해리 트루먼에 의해 해임됐고2차 세계대전 당시 유럽 전선에서 활약했던 매슈 리지웨이(Matthew Ridgway)가 임명됐다.

 

1951년 봄에서 여름 사이 한국전쟁은 새로운 국면을 맞이했다우선 맥아더가 해임되고 리지웨이가 임명되었다그리고 그해 7월부터 휴전회담이 시작됐다하지만 전쟁초기부터 미국이 군사적인 목적을 가지고 해오던 폭격은 휴전회담이 진행되는 와중에도 계속됐다태평양 전쟁 당시 미국이 일본 본토를 폭격하기 위해 사용했던 폭탄은 네이팜 폭탄을 합쳐 20만 톤 안팎이었지만한국전쟁 시기 북한을 폭격하기 위해 사용된 폭탄개수는 네이팜 폭탄을 포함하여 66만 7000톤이나 달했다당시 이승만은 미공군이 한국전쟁에서 감행한 폭격에 대해 다음과 같은 말을 하기도 했다.

 

미국 전투기가 적의 주요시설을 강타하고 대단히 큰 피해를 입혔습니다이번 전쟁에서 미국 전투기가 중요하다는 걸 우리는 압니다.”

 

이승만의 이러한 발언에는 미군 전투기가 행하고 있던 폭격의 민간인 피해에 대한 고려나 비판의식이 1% 존재하지 않는다당시 미국은 주로 북한을 타켓으로 폭격을 감행했지만남한땅 안에서도 비인간적인 폭격을 감행했었다따라서 이승만에게 있어 미국의 폭격 학살은 그저 공산주의자들을 약화시키고 섬멸하는 자유를 위한 반공성전의 위대한 과정이었다. 1951년 휴전회담이 진행되자 이승만은 휴전회담을 결사반대하고 나섰다여기서도 이승만이 주장한 것은 바로 그의 정복주의적 비전인 북진통일론이었다이승만은 북진통일을 계속 주장하면서 휴전회담을 주선하는 미국과 북한중국 측에 강력히 반발했다대한민국 정부수립 이후 외치던 북진통일처럼 휴전회담 과정에서도 그가 외친 북진통일은 정치적 허세 혹은 무의미한 정치적 구호였다.

(북진통일 시위, 이승만은 대한민국 정부수립부터 물러날 때까지 항상 북진통일을 입에 달고 살았다.)

 

이승만은 휴전문제 그 자체를 문제 삼았었다그리고 그가 외치는 북진통일론을 국민들로 하여금 구호로 외치게 했다. 1952년 부산을 비롯하여 광주대구대전서울에서 학생들이 통일이 아니면 죽음을 달라는 대규모 시위를 벌였다여기에는 이승만이 미국으로부터 휴전회담 압박을 통해 미국으로부터 일정한 대가를 받아내려는 그의 정치적인 계산도 있었다조성훈의 책 <왜 이승만은 휴전협정에 반대했을까>라는 책에는 다음과 같이 언급하고 있다.

 

이승만은 아무런 성과 없이 휴전이 성립되면국민적 기대에 부응하지 못해 그의 정치적 위기를 초래할 수 있는 형편이었다.”

 

휴전회담은 거의 2년을 끌었다휴전회담에서 가장 중심적으로 논의된 사항은 3가지로 나눌 수 있다첫 번째는 비무장지대 설치 즉 군사분계선의 설정 문제였고두 번째는 양측에 대한 휴전감시기관 설치 문제였으며세 번째는 양측의 포로교환 문제였다이중에서 가장 큰 논쟁거리 내지는 대치했던 문제가 바로 양측 포로문제였다우선 세계는 제네바 협정에 따라 포로에 대한 보호를 우선시하고 있었다이에 따라 유엔군 쪽은 포로 개개인의 자유의사에 따라 남쪽과 북쪽 그리고 중국과 대만으로 갈 수 있도록 하자고 주장했고북한과 중국측은 모든 포로가 그 본국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맞섰다따라서 양측의 회담이 난항에 빠졌던 것이었다.

(거제도 포로수용소에 수용된 친공포로들, 한국전쟁 당시 남한에 있던 포로수용소는 친공포로와 반공포로로 나뉘었다. 이 사진에서 스탈린 초상화를 들고있는 친공포로가 참으로 인상적이다.)

 

남한에는 인민군 및 중공군 포로가 거의 13만 2474명이 있었고북한에는 한국군 및 유엔군 포로 1만 1559명이 있었다북한측에 잡힌 포로들의 경우 인민군 측이나 중공군 측의 포로 학대 및 고문이 있었다는 일부 증언을 하기는 했지만대체로 큰 반발 없이 지냈던 것으로 추측되고 있다적어도 북한에 있던 포로수용소의 경우 국군이나 유엔군 포로가 편이 갈려 서로를 죽고 죽이는 일은 없었던 것으로 확인되고 있다한국전쟁 당시 북한측 포로의 대우에 대해선 아직 연구가 많이 되지 않은 편이라 학자들의 연구가 필요한 것도 있겠지만북한에 있던 수용소의 경우 포로들이 모여 체육대회도 하는 화기애애한 모습이 서방측 언론에 보도되기도 했던 것을 보면적어도 남한 내의 포로수용소하고는 달랐던 것을 알 수 있다.

 

남한에 있던 포로수용소의 경우 포로들 끼리 편이 갈려 죽고 죽이는 일이 반복됐다남한 내에 최대 포로수용소 시설인 거제도 포로수용소는 소위 북측을 따르는 친공포로와 북측에 반감을 가지고 있던 반공포로로 나뉘었다반공포로의 경우 전쟁 초기 인민군에게 포로로 붙잡혀 인민군이 되었다 다시 국군의 포로가 된 사례로 북한과 인민군에 대한 반감이 강했다결국 유엔측은 거제도 포로수용소에서 그들을 분리해서 수용했지만이들끼리의 싸움은 끊이질 않았으며양측은 서로에 대한 반감만 생겨갔다.

(석방된 반공포로들, 수용소에는 소위 인민군과 북한체제를 싫어하는 반공포로들이 있었다. 이승만은 이들을 휴전회담을 막기 위해 정치적으로 이용했다.)

 

휴전회담은 양측 포로문제로 중단되기도 했었다이러는 도중 휴전회담을 좀 더 앞당긴 사건이 일어났다. 1953년 3월 5일 소련의 지도자 이오시프 스탈린(Joseph Stalin)이 사망한 것이다스탈린이 사망하자 포로교환이 이루어지면서 휴전회담이 재개됐고포로 송환협정이 조인되었다그러나 이승만은 휴전회담에 반대하여 이 회담에 찬물을 끼얹었는데그게 바로 반공포로 석방이었다. 1953년 6월 18일 이승만은 반공포로를 일방적으로 석방하는 조치를 취했다마산대구영천논산부산 등 7개 수용소에 갇혀 있던 3만 7000명의 반공포로 중 2만 7000명을 석방시켰다그러면서 이승만은 한국 측 요구가 관철되지 않으면 휴전협정 파기를 위해 보다 강력한 조치를 취하겠다라며 엄포를 놓았다이것은 결국 국제적인 물의를 일으켰다이에 분노한 북한 측은 포로들의 재수용을 요구하기까지 했다.

(휴전회담 당시 사진, 휴전회담은 2년을 끌었다. 회담을 2년이나 끝 이유에는 양측 포로문제가 항상 있었다.)


(휴전협정에 조인한 각국 대표자들의 서명, 당연히 여기에 이승만의 이름은 적혀있지 않다.)

 

이승만이 반공포로들을 일방적으로 석방하면서 휴전회담이 진행되지 않을 뻔했지만결국 휴전협정은 1953년 7월 27일 유엔군수석대표 해리슨 중장과 공산군 측 대표 남일(南日사이에 3통의 휴전협정서와 부속협정서에 각각 서명한 뒤 클라크 유엔군사령관김일성 북한군총사령관중국의용군사령관 팽덕회가 각각 자신들의 후방사령부에서 휴전협정에 서명하면서 3년 1개월간 지속되던 한국전쟁도 끝이 났다당연히 이승만은 휴전회담에는 서명하지 않았기에 휴전회담도 미국과 북한만 한 것이 됐다거기다 전쟁 초기 이승만은 한국군의 전시작전권을 미국에게 넘겼기에 한국의 작전권은 현재 미국이 가지고 있는 상황에 놓여있다한국전쟁이 끝나고 나서 미국은 소련과 중국의 팽창을 막고 한국일본에 대한 효과적인 방어를 목적으로 1953년 10월 1일 수도 워싱턴에서 한국 측 전권위원 변영태와 미국 측 전권위원 델러스 사이에 한미상호방위조약을 체결하였다전문과 6조로 된 조약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한미상호방위조약 조인식, 사진속에는 이승만도 보인다.)

 

① 미 양국은 국제평화와 정의를 위협하는 무력행사를 삼갈 것을 약속한다.

② 양국 중 어느 1국이 외부로부터 무력공격의 위협을 받을 때는 양국이 상호 협의하여 외침을 방지하는 적절한 조치를 취한다.

③ 양국은 자국의 영토 및 자국의 영토를 위태롭게 하는 태평양지구에 있어서의 무력적 외침에 대처하여 공동투쟁을 전개할 것을 선언한다.

④ 양국은 상호합의에 의하여 미합중국의 육공군을 대한민국 영토내와 그 부근에 배치하는 권리에 대해 대한민국은 이를 허용하고 미합중국은 이를 수락한다.

⑤ 이 조약은 양국이 각각 자국의 헌법상 절차에 따라 비준한다.

⑥ 이 조약은 무기한으로 유효하며어느 1국이 이 조약을 폐기할 의사가 있을 때는 그 의사를 상대국에 통고한 지 1년 후라야 폐기될 수 있다.

 

이 조약은 궁극적으로 1954년 1월 13일 양국의 국회에서 비준이 이루어지면서 발효되었다결과적으로 한국전쟁 이후 이승만이 미국과 체결한 한미상호방위조약에 따라 현재까지 대한민국 영토에는 주한미군이라는 형태로 미군이 주둔하게 된 것이다일각에서는 주한미군이 한국에 주둔한 것을 영광으로 생각하며 숭미적인 태도를 보이고 있다어쨌든 미국이 한국에 주둔하는 명분은 소위 양국 공동의 적인 북한에 맞서 군사력으로 견제한다는 것이기 때문이다하지만 이것은 지극히 반공주의적인 시각에 근거한 것이고이런 시각의 근본은 바로 이승만식의 반공사상에 있다.

(윤금이, 1992년 미군 기지촌에서 일하던 윤금이는 주한미군 병사에 의해 아주 잔혹하게 살해됐다. 당시 주한미군 병사가 저지른 폭력은 올해 이슈가 됐던 N번방을 능가했다.)

 

또한 주한미군이 주둔함으로써 대한민국 내에서 일어나는 미군문제는 이루 해아릴 수가 없을 정도로 문제가 심각하다대표적으로 1992년에 일어났던 윤금이 피살 사건을 들 수 있다당시 미군 기지촌에서 일하던 술집 종업원 윤금이는 주한미군 소속 케네스 마클 이병에게 살해당했는데사망 원인은 콜라병으로 맞은 얼굴의 함몰 및 그로 인한 과다 출혈이었지만살해된 시신에는 차마 입으로 표현하기 힘든 폭행이 저질러졌으며소위 N번방 사건을 능가하는 수준이었다그랬지만 이런 범죄를 저지른 미군은 제대로 처벌받지 않았다. 2012년에 한 미군이 저지른 성폭행 사건도 처벌를 제대로 받지 않았다는 점에서 비슷했다.

(평택 코로나 확진자, 2020년 전세계를 강타한 전염병에 가장 무능한 나라는 미국이다. 이에 따라 주한미군에게도 코로나가 퍼지고 있는 중이다. 하지만 여기에 대해 문제의식을 가지거나 대응하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2002년엔 소위 효순이 미선이 사건이라 하여 두명의 여중생이 미군 장갑차에 의해 압살당한 사건도 일어났다이것도 제대로 된 처벌을 받지 않아서 많은 사람들의 분노를 사기도 했다즉 한국전쟁 이후 주한미군이 저지른 범죄는 무수히 많다그러나 더욱 기가막힌 건 한국정부는 미국이 저지르는 짓에 대해 어떠한 조치조차 취하지 못하고 있는 상황이다올해 7월 전 세계적으로 강타한 전대미문의 질병인 COVID-19가 미국 전역에 퍼지면서 한국사회에도 피해를 줬다미군기지가 있는 평택은 현재 확진자 72.5%가 미군이지만한국정부는 아무런 대응조차 하지 못하고 있다따라서 주한미군의 이런 악순환적 구도의 뿌리는 바로 1953년 이승만 정부가 체결한 한미상호방위조약에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즉 이승만 정부가 심어놓은 반공의 뿌리는 주한미군이라는 형태를 남겨 이러한 피해에도 확실한 처벌조차 못하는 구도를 만들어 놓은 것이나 다름없다.

(이승만과 응오딘지엠, 1957년 이승만은 남베트남의 지도자 응오딘지엠이 서울을 방문하자 매우 환영해주었다. 둘의 반공성향은 일란성 쌍둥이라 불러도 될 정도로 매우 유사하다. 이승만에게 있어 응오딘지엠은 공산주의에 맞서는 투사였다.)

 

1953년 한국전쟁이 끝난 뒤 이승만 정부는 또 다른 흑역사를 시도했었다바로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에 반공십자군을 파견하는 것이었다한국전쟁 당시 인도차이나 반도에는 프랑스와 베트남 사이의 전쟁이 벌어졌는데미국은 자신들의 우방인 프랑스를 지원하고 있었다물론 프랑스는 한국전쟁에 군대를 파병한 국가였고이승만의 입장에서 프랑스가 치르고 있던 전쟁은 식민지를 유지하기 위한 전쟁이 아닌 공산주의에 맞서는 성전이었다. 1954년 1월 이승만 정부가 자청한 인도차이나 반도에 대한 한국군 1개 사단 파병이 미국 정부에 의해 재검토되었는데당시 이승만은 “1950년 한반도에서 전쟁이 발발하자 16개국이 군대를 파견하여 우리 정부를 도와준 데 대한 보답과 동남아시아에서 반공정신의 고취가 파병의 목적이다라고 말했다물론 이 요청을 미국이 거절하면서 실패했지만여기서 알 수 있는 것은 공산주의에 맞서기만 한다면 식민지 해방 전쟁도 결국 반공이라는 이름으로 합리화 되는 이승만의 저급한 인식일 것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민간인 학살과 한국전쟁

(보도연맹 학살, 보도연맹 학살은 한국전쟁 초기 이승만 정부가 조직적으로 벌인 전쟁범죄였다. 무수히 많은 민간인이 빨갱이로 몰려 학살당했다.)

 

해방 후 대한민국 정부수립 과정에서 대다수 민중의 염원과는 달리 단독정부가 탄생하는 방향으로 가면서 남한내에선 이에 맞서는 저항이 끊이질 않았다지난번 친일의 힘을 빌리다편에서 언급했던 바와 같이 모스크바3상회의 이후 좌우갈등이 극심해지면서그 구도는 친일세력 대 독립운동 세력이라는 모순적인 구조가 생기고독립운동 세력이 좌익 혹은 빨갱이로 몰려 탄압당하는 상황이 됐다여기에 더해 김두한을 두목으로 하는 대한민청이나 월남한 친일지주들의 자식들로 구성된 서북청년단 같은 극우 깡패 조직은 온갖 노동자 파업 현장을 돌아다니며 테러행위를 일삼았다.

 

해방 이후 민중들의 저항이 대대적으로 일어났던 사건은 대구에서 일어났다. 1946년 9월부터 조선노동자전국평의회의 주도로 전국적 규모의 총파업이 한반도 이남에서 시작되었다이 파업이 일어난 결정적인 이유는 미군정의 극심한 좌익탄압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9월 24일 서울을 비롯한 전 철도종업원 1만 명이 쌀배금임금인상해고반대노동운동자유민주인사 석방 등의 요구를 내걸고 총파업에 들어가면서 전국적인 시위는 본격화됐다.

(대구 10.1 항쟁, 대구 10.1 항쟁은 미군정의 무능과 폭정에 맞서 민중이 들고 일어난 사건이다. 이를 대응하는 미군정의 태도는 폭력적이었고, 잔혹했다.)

 

1946년 10월 1일 여성들과 어린이를 중심으로 하는 1000명 이상의 시위군중은 대구시청으로 몰려가 우리에게 쌀을 달라라고 요구하며 시위를 벌었고, 500명의 노동자들이 대구역 앞에서 동맹파업하면서 경찰과 충돌했다이것이 바로 대구 10.1 항쟁의 시작이었다대구에서 시위가 격해지자 미군정과 이승만의 지원을 받는 경찰과 우익 청년단들은 이를 진압하기 위해 대구로 출동했고항쟁이 일어난 다음날 오후 6시에는 계엄령이 선포됐다미군정은 이를 진압하기 위해 탱크 4대를 포함한 미군을 출동시켰고강경진압에 나섰다대구에서의 시위는 미군정과 우익세력들의 진압으로 마무리 됐지만미군정과 우익에 저항하는 이 이쉬는 경상도와 전라도 그리고 강원도까지 확산됐다시위는 12월까지 전개되었는데이 과정에서 1000명 이상의 민간인이 전국적으로 사망하고 수천 명이 체포됐다이때 당시 사망한 주도급 인사 중 한명은 이후 5.16 쿠데타를 주도한 박정희의 형인 박상희도 포함되어 있었다.

 

대구에서의 항쟁이 우익들과 미군정의 진압으로 끝난 뒤, 1948년 4월엔 제주도에서 대학살극의 신호탄을 알리는 일이 발생했다바로 제주 4.3 항쟁이다제주도는 해방 이후 미군정이 들어가 친일경찰을 이용하면서부터 문제가 생겼었다. 1947년 3.1절 기념식에서 친일 경찰에 의한 발포사건이 발생하면서 민중들의 분노는 차올랐고, 48년 이승만 정권이 남한만의 단독정부 수립을 단행하려 하자 결국 민중봉기가 일어났다제주도에서 민중봉기가 일어나자 미군정 당국은 제주도민들의 요구는 무시하면서 군정경찰과 극우단체인 서북청년단 등을 파견하여 강경진압에 나섰다당시 이승만과 같은 편이었던 경찰총장 조병옥은 대한민국을 위해 전 도에 휘발유를 부어 30만 도민을 모두 죽이고 모든 것을 태워 버려라라는 발언을 하기도 했었다.

(제주 4.3 항쟁 당시 체포된 민간인)

 

제주 4.3 항쟁을 진압하기 위해 출동한 경찰과 우익단체 서북청년단의 만행은 입에 담기 힘들정도로 추악하고도 잔인했다이들의 무차별 학살로 인해 목숨을 잃은 사람의 대다수는 민간인들이었고여성 노인 아이 그리고 유아도 포함되어 있었다제주 4.3 항쟁은 1954년까지 이어졌고 대부분의 사망자는 초토화 작전이 진행되던 1948년 11월부터 1949년사이에 나왔다대략 3만 명에서 4만 5000명의 제주도민이 학살이 피해자가 됐고이중 80% 이상은 우익들에 의해 학살당했다제주 4.3 항쟁 당시 강경진압을 주장했던 인물이 바로 초대 대통령 이승만이었다그는 이 대학살극을 공산주의를 막기 위해선 필요한 조치라고 생각했다그는 1948년 7월 17일 대통령령 제31호로 제주도 전역에 계엄령을 선포했으며그 계엄령 조치로 인해 군경과 서북청년단이 수많은 민간인을 학살할 수 있게 만든 장본인이었다.

(여순민중 항쟁 당시 학살당한 민간인)

 

제주도에서 광란의 학살극이 벌어질 무렵 전라도의 여수와 순천에선 이승만을 놀라게 할 또다른 일이 일어났다이게 바로 여순민중항쟁이다. 1948년 10월 15일 전라남도 여수에 주둔하던 제14연대에 19일 오후 6시를 기해 1개 대대를 제주도로 출동시키라는 명령을 내렸다당시 한국군에는 좌익성향의 군인들이 존재했었다이들은 좌익활동을 하다가 체포를 피하기 위해 군에 위장입대하게 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제주도에 가서 같은 동포를 진압하기를 원치 않았던 제14연대 군인들은 무장봉기를 일으켰다이들은 여수와 순천에서 해방구를 구성하여 저항에 나섰다더 나아가 이들은 친일군경과 지주들을 재판에 세우고 농민들에게 혁명적 대의에 합류해줄 것을 주장했다.

(학살자 김종원, 그는 태평양 전쟁에 참전했던 일본군 장교출신으로 잔혹성이 이루 해아릴 수 없을 정도였다. 그는 여순항쟁 당시 진압군으로써 체포된 민간인의 목을 일본도로 베는 것을 즐겼다. 즉 살인을 즐겼다는 것이다. 또한 한국전쟁에서도 거창 양민학살사건의 주역이었다. 이승만은 그를 훌륭한 애국자로 생각했다.)

 

여수와 순천에서 무장봉기가 일어나자 이승만 정부는 진압군을 보냈다여순 봉기를 진압하러간 군대는 이를 아주 잔혹하게 진압했다당시 이승만이 파견한 군대는 과거 친일경력이 있는 장교들이 지휘하는 군대로서 잔혹함이 말로 표현하기 힘들 정도로 엄청났다당시 진압군으로 파견된 이승만의 심복 김종원은 민간인들을 여수중앙초등학교 운동장에 모아놓고 부역자를 색출하는 작업에 나섰다그는 학교 운동장에 모아 놓은 민간인들의 목을 일본도로 베는 것을 즐겼다일본도로 베는게 지치면 권총이나 소총으로 쏴서 민간인을 하나 둘씩 죽였다김종원은 이후 한국전쟁에서도 수많은 양민학살을 저질렀지만대통령 이승만은 그에 대해 김종원은 애국 충정이 대단한 사람으로서 충무공 이순신과 견줄 만하다라고 할 정도로 아꼈다여순항쟁을 진압하고자 출동한 군대는 이와 같은 잔인한 학살을 통해 봉기를 일으킨 측을 진압했고결국 봉기는 진압됐다이 과정에서 수천 명의 민간인이 우익측의 강경진압으로 목숨을 잃었다.

 

이승만의 참혹한 양민학살은 1950년 한국전쟁(Korean War)이라는 민족사적 비극이 일어나면서 극에 달했다. 1950년 6월 25일에 한국전쟁이 일어나자 이승만 정부는 도망치기 바빴다인민군이 수도 서울을 향해 진격하자 이승만 정부는 국민들에게 이른바 거짓방송을 해놓고 도망쳤다그는 라디오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폭파된 한강다리)

 

서울시민 여러분안심하고 서울을 지키시오적은 패주(敗走)하고 있습니다정부는 여러분과 함께 서울에 머물 것입니다국군은 총반격으로 적은 퇴각 중입니다이 기회에 우리 국군은 적을 압록강까지 추격하여 민족의 숙원인 통일을 달성하고야 말 것입니다.”

 

이는 명백히 거짓방송이었다당시 수도 서울은 3일 만에 인민군에 의해 함락되었는데함락되기 전 이승만은 이런 거짓방송을 해놓고 몇몇 정부 관료들과 도망쳤던 것이다이것도 모자라 인민군의 T-34 탱크의 진격을 막는다는 전제하에 이승만 정부는 피난가는 사람들의 길마저 막아버렸다한국군은 인민군의 T-34 탱크를 막는다는 명분을 들어 한강에 있던 모든 다리들을 폭파시켜 버렸다그바람에 수백명이 목숨을 잃는 사태가 벌어졌다이승만 정부는 전쟁 초기에 아주 잔인한 전쟁범죄를 계획적으로 저질렀는데그게 바로 국민보도연맹 학살이다.

 

국민보도연맹이란 1948년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 이승만 정부가 좌익 세력 축출이라는 목적하에 해방 후 소위 좌익 활동을 한 사람들을 전향시키기 위해 만든 단체였다하지만 보도연맹이라는 조직은 만들어지는 과정에서 비단 과거 좌익 활동을 했던 사람들뿐만 아니라 일반인들도 많이 가입하게 되었고, 10대인 중·고교생이 가입할 정도로 가입절차가 매우 간단했다쉽게 말해 사상적 전향보단 생업에 충실한 민간인들이었다고 보면 되는 것이다그러나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이승만 정부는 이들이 인민군을 도울 것이라는 의심을 하게 됐다따라서 이승만 정부는 보도연맹원들을 무차별 검거하고 집단학살했다.

(체포당한 보도연맹원, 이승만 정부의 보도연맹 학살로 전쟁 초기 수십만이 학살당했다.)

 

대한민국의 군인과 경찰 그리고 서북청년단 같은 우익단체들은 보도연맹원들이 북한군에게 동조할지 모른다는 이유를 들어 예비검속하거나 강제로 검거하여 집단학살극을 자행했는데전쟁 초기 전세가 불리해지자 이런 학살극이 대한민국 전역에서 일어났다육지에서는 산속이나 계곡강가 등 인적이 드문 곳에서 학살이 전개되었다. 1950년 7월 전라도 해남 지역의 경찰이 보도연맹원들을 소집 후 학살하였고제주에서는 4.3 사건 관련자들이 예비검속되어 학살당했다경상남도 마산의 여양리에 있는 골짜기 도둑골과 부산의 금정구 노포동 뒷산에서 수천 명이 집단 학살당했다그 외에도 진해통영거제에서도 우익청년단과 군경에 의해 무차별 학살이 일어났다.

(광산 코발트 학살 현장, 이 학살의 현장은 이승만 반공주의가 만들어낸 광란의 학살극을 증명하는 역사적인 장소다.)

 

이중에 경산 코발트 학살 사건은 경상도에서 일어났던 가장 악질적인 전쟁범죄였다대략 3500명의 보도연맹원을 경산 지역 코발트 광산에 몰아놓고 무차별 학살한 뒤 그 3500명의 시신을 콘크리트로 덮어 학살을 은폐하려는 짓까지 했다이렇게 해서 한국전쟁 초기 2~3개월 기간 동안 대한민국 전역에서 최소 30만 명 이상이 학살당했다국민보도연맹 학살을 포함하여 한국전쟁 기간 이승만 정부가 저지른 학살의 희생자는 많게는 100~120만 명까지 잡기도 한다이들 중 학살당한 사람 중에는 보도 연맹원뿐만 아니라 민간인이 압도적으로 더 많았고, 10대 청소년부터 엄마의 젓을 빨다 검거되어 같이 총살당한 아이들도 있을 정도였다이승만은 한국전쟁에서 이런 광란의 학살극을 벌였으며이런 학살극은 반공 혹은 자유민주주의 수호라는 이름하에 은폐되고 미화됐다.

 

한국전쟁에서 도망치기 바빴던 이승만은 뻔뻔했다그는 전세가 낙동강 전선까지 밀려 부산에 있던 시기 조봉암 장택상 등의 의원이 국민에게 사과해야한다는 말을 했을 때자신은 지은 죄가 없다며 사과할 필요가 없다고 큰소리를 쳤다한국전쟁은 미군이 UN군이라는 이름으로 개입하며 국제적인 전쟁의 양상을 띄었다미국은 UN군이라는 이름하에 영국캐나다프랑스네덜란드호주뉴질랜드 등의 나라를 끌어들였고, UN군의 지원을 받는 한국군은 미군과 더불어 전세를 역전시키기 시작했다. 1950년 9월 15일 유엔군 총 사령관 더글라스 맥아더가 인천상륙작전을 성공시키고낙동강 전선에 있든 연합국이 반격을 시작하자 그해 9월 28일에는 수도 서울을 다시 수복했다.

(거창 양민 학살 사건에서 학살당한 민간인)

 

이승만 정부는 여기서도 학살을 멈추지 않았다전쟁 초기 서울을 버리고 떠났던 이승만은 서울을 수복하자 인민군 부역자 색출을 목적으로 또 다시 무차별적인 학살이 벌어졌다이러한 무차별 보복 및 학살은 곳곳에서 일어났고여기서 무수히 많은 사람들이 빨갱이로 몰려 학살당했다또한 한국군은 인천상륙작전 이후 지리산을 중심으로 숨은 빨치산들을 소탕한다는 명분을 들어 여순민중항쟁에서 그랬듯이 무수히 많은 민간인들을 학살했다. 1951년 공식적으로 700명 이상을 학살했던 거창양민학살이 대표적인 사례였다이 거창 양민 학살사건도 아이 노인 여자 할 것 없이 무차별적으로 저지른 한국군의 민간인 학살이었고이승만 정부의 반공주의의 폭력성을 아주 극명하게 보여주었다.

(국민방위군 사건, 자국민 9만에서 10만을 아사시킨 이 사건은 세계 역사상 유래를 찾아보기 힘든 방산비리였다.)

 

더 나아가 전쟁 당시 이승만 정부는 희대의 방산비리를 저지르기도 했다그게 바로 국민방위군 사건이다한국전쟁으로 기존에 없던 자원과 기반마저 파괴되면서 수많은 국민이 고통을 겪었다그러나 그런 고통속에서도 정부관리들과 군부는 엄청난 부정부패를 자행했다중공군이 참전하여 전세가 다시 인민군 측으로 기울어지던 1950년 12월 이승만 정부는 국민방위군 설치법을 공포하여 제2국민병에 해당하는 만 17~40세 정도의 남성을 방위군에 편입시켰다그러나 위에서 언급한 대로 전선이 다시 밀리자 방위군 간부들은 이 기회를 틈타서 막대한 돈과 물자를 빼돌려 착복했고그 결과 보급부족으로 자국군인이 아사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국민방위군 사건 주모자의 처형, 부패한 이들은 결국 처형당했다.)

 

이들이 착복한 돈과 물자는 당시 화폐로 무려 24억 원양곡 5만 2천 섬에 달했다결국 국회가 진상조사에 나서고 1951년 4월 30일 방위군 해산을 결의함에 따라 5월 12일 방위군은 해산됐으며사건을 일으킨 김윤근 등 4명은 사형해 처해졌다국회조사단이 진상조사를 통해 밝힌 내용에 따르면 책정된 예산 209억 원 중 실제 집행한 액수는 130억뿐이었고, 740만 명 정도의 유령병력을 조직하여 23억 5천만 원의 현금과 5만 2천여 섬의 식량을 부정유출했으며그 밖에 귀향 장병의 귀향경비의약품부식비 등이 부정처분되었다김윤근과 같이 이 사건에 책임이 있는 자들은 자신들이 사적으로 모은 돈을 기생집에 가서 뿌리며 놀기까지 했다국민방위군 사건이라는 역사상 유례를 찾아 보기 힘든 방산비리로 인하여 대략 9만 명의 군인이 아사했다.

(북진통일론을 외치는 이승만, 이승만에게 있어 북진이란 자신의 정치생명과도 같은 구호였던 것 같다.)

 

이승만은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전과 이후 그리고 한국전쟁 시기까지 민간인 학살 사건을 주도했고 저질렀다더 나아가 방산비리로 자국군인 9만 명을 아사시키기도 했다그는 한국전쟁 초기 인민군에게 군사적으로 밀렸음에도 국민들을 버리고 도망쳤으며도망치지 못한 국민들을 빨갱이로 몰아 두 번 죽이는 일까지 했다이처럼 이승만은 한국전쟁을 전후로 하여 광란의 학살극을 주도하였으며반공 내지는 민주주의라는 수식어로 그 모든 광란극을 합리화했다이승만은 대한민국 정부 수립부터 정권에서 물러나기 전 까지 북진통일론(北進統一論)’이라는 정복주의적 통일비젼을 포기하지 않았다그러나 이 정복주의적이고 친제국주의적인 통일비젼은 오히려 전쟁을 끝내는데 있어 방해가 되고 만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7)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