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nd after 4,000 years of struggling against nature and foreign invaders and the last 25 years, prior to the revolution, of struggle against French colonialism. I don’t think that the people of Vietnam are about to compromise in any way, shape, or form about the freedom and independence of their country, and I think Richard Nixon would do well to read Vietnamese history, particularly their poetry, written by Ho Chi Minh.(베트남 인민은 4천년 동안 자연과 외국 침략자들을 상대로 줄기차게 싸워왔습니다. 프랑스와 식민투쟁에서도 이겼습니다. 베트남의 완전한 자주 독립을 스스로 쟁취해나갈 것입니다. 리차드 닉슨이 베트남 역사와 베트남의 시를 배워야 할 것입니다. 특별히 호치민이 쓴 시를 잘 읽어 음미했으면 합니다.)”

 

위에 인용한 구절은 1972년 북베트남을 방문한 반전운동가이자 여배우인 제인 폰다(Jane Fonda)가 했던 연설이다. 베트남 전쟁이 사실상 미국의 패배로 끝나가던 1972년 미국의 닉슨 대통령은 남베트남에서의 미군 철수를 목표로 함과 동시에 이미 베트남 주변국인 캄보디아와 라오스를 침공하여 수십만에 달하는 동남아시아 민간인을 대량 학살하는 반인륜적 전쟁범죄를 자행했다. 이미 구정 공세를 통해 미국 내에서 격해진 반전운동은 미국의 수많은 젊은이들과 지식인들을 베트남 전쟁을 반대하도록 만들었고, 미녀배우로 유명했던 제인 폰다 또한 그 중 일부였다.

 

반전운동이 격해지는 과정에서 반전 시위대는 베트남 전쟁에 대한 또 다른 진실에 눈을 뜨게 되었는데, 그게 바로 베트남의 독립운동가이자 현재도 국부로 평가받고 있는 지도자 호치민(Ho Chi Minh)이다. 반전운동 시위대들 중에는 적잖은 이들이 사회주의에 대해 다시 바라보게 되었고, 당시 미국에 맞서 반제국주의 투쟁을 벌이고 있던 호치민이라는 인물 또한 마찬가지였다. 특히나 1971년 펜타곤 직원인 대니얼 엘스버그(Daniel Ellsberg)가 미국의 1급 기밀문서인 펜타곤 페이퍼(Pentagon Papers)를 세상에 폭로하면서 그 전쟁의 추악함은 더 극명하게 드러났다. 펜타곤 페이퍼에 따르면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베트남의 민중과 대중적인 독립운동 조직은 호치민과 그가 조직한 베트민(Viet Minh) 뿐이었다. 이처럼 미국은 베트남의 독립운동 세력을 방해하기 위해 부도덕한 전쟁을 일으켰던 것이다.

 

베트남 전쟁 당시 미국의 적으로 규정되었던 호치민은 베트남의 상징과도 같은 위대한 독립운동가였다. 1890519일 응에안 성에서 태어난 그는 젊은 시절부터 반프랑스 감정을 가지고 있었고, 1911년 베트남을 떠나 전 세계를 떠돌아 다니며, 경험을 쌓았다. 1919년 그는 베르사유 회담 당시 베트남 인민의 기본적인 권리를 호소하기 위해 파리 베르사유 궁전까지 가서 이를 청원했던 인물이었다. 이후 레닌의 러시아 혁명에 영향을 받아 마르크스-레닌주의자가 되었으며, 모스크바로가서 코민테른 요원으로 훈련받았다. 그리고 그 이후 중국에 가서 활동하며 1930년 홍콩에서 현재의 베트남 공산당을 창당했던 인물이다. 그는 30년간의 해외생활을 보냈고, 30년 동안 일본과 프랑스 그리고 미국에 맞서 독립은 쟁취하기 위해 무장투쟁을 벌였다.

 

그는 국제정세를 읽고 이를 잘 이용하는 실용적이고 탁월한 지도자였으며, 무엇보다 30년 동안의 해외생활을 했던 인물이었기에, 1949년 스탈린을 만나러 소련을 방문한 것이 첫 해외방문이었던 마오쩌둥하고도 확연한 차이가 있는 인물이었다. 이번에 학교 도서관에 갔다가 우연히 빌려서 읽게 된 세계 지도자 열전 시리즈 중 하나인 호치민에서는 그가 미국에 있을 시기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서술하고 있는데, 상당히 인상적으로 다가온다.

 

뉴욕에 머무르는 동안에도 호치민은 주로 주방 요리사나 식당의 심부름꾼 노릇으로 연명할 수 있었다. 이렇게 하여 미국에 머무르는 동안 그가 받은 인상은, 미국 사회를 구성하고 있는 서로 다른 계급들이 향유하는 자유의 정도가 각자의 부에 의존하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출처: 호치민 p.31

 

194130년 만에 베트남에 돌아온 호치민은 자신의 해외에서 쌓은 경험을 바탕으로 당시 베트남을 침략한 일본에 맞서 독립운동 단체를 조직하며 무장투쟁에 나섰는데, 그 조직이 바로 베트남 독립 동맹 즉 줄여서 베트민이었다. 당시 호치민은 중월 국경지대인 까오방의 한 동굴에서 혁명투쟁을 시작했는데, 책에 나온 그 내용은 상당히 감동적이면서도 인상적으로 다가온다.

 

그곳의 밤은 지독히 추웠다. 너무나 추워 잠조차 들 수 없는 밤이면 호치민과 그의 동료들은 장작불을 피워놓고 그 주위에 웅크리고 앉아, 세계 도처에서 일어난 혁명의 과정들을 하나하나 열거하는 호치민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밤을 지새웠다. 그는 또한 자기에게 큰 영향력을 미친 사람들에게 존경심을 나타내고자 인근의 산봉우리를 카를 마르크스 산정이라 이름 붙이고, 근처의 개울을 레닌 시냇물이라 명명했다.”

 

출처: 호치민 p.65

 

호치민은 젊은 시절부터 프랑스 식민주의에 맞서 독립운동을 전개했고, 2차 세계대전 중에는 일본에 맞서 싸웠으며, 2차 세계대전 이후에는 다시 침략한 프랑스에 맞서 독립투쟁을 전개했다. 특히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일어난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에서 프랑스는 온갖 화력과 병력을 동원하여 베트민을 공격했지만, 호치민과 그를 따르는 위대한 명장 보 응우옌 잡(Vo Nguyen Giap)은 게릴라전으로 맞서 싸웠으며, 1954년 디엔비엔푸 전투(The Battle of Dien Bien Phu)에서 프랑스군의 최정예 병력 11,721명을 포로로 붙잡았다. 디엔비엔푸 전투가 베트남의 승리로 끝나면서, 프랑스는 전쟁에서 패배하고 결국 베트남에서 철수했다.

 

제네바 회담 이후 남베트남에 들어선 국가는 미국의 꼭두각시 정권이었고, 1949년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 시기 프랑스가 내세웠던 바오다이 황제(Bao Dai)의 베트남국(States of Vietnam)을 계승한 나라였다. 단순히 바오다이 황제에서 그가 수상으로 내세웠던 응오딘지엠(Ngo Dinh Diem)이 대통령이 되었을 뿐이고, 프랑스 대신 미국이 그 나라를 지원했을 뿐이었다. 책 또한 이러한 사실을 인정하고 있으며, 결국 베트남 전쟁의 명분에서 당연히 호치민과 공산당에게 있을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즉 그러한 점에서 베트남 전쟁 또한 호치민의 민족해방전쟁이었다. 책에는 베트남의 역사를 연구한 미국의 역사학자 윌리엄 J. 듀이커의 분석이 인용되어 있다. 그 내용을 인용하자면 다음과 같다.

 

사실상 베트남은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기 3개월 전에 이미 두 지역으로 구분되어 있었다. 북부의 공산주의 세력과 남부의 프랑스 세력이 그러했다. 이후의 대립 투쟁은 궁극적으로 거기에 기초하여 전개되어 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출처: 호치민 p.90

 

즉 미국이 치른 베트남 전쟁 또한 이런 맥락이 존재하는 것이며, 호치민이나 북베트남 공산당 그리고 남베트남민족해방전선(The National Liberation Front of South Vietnam)은 프랑스에 이어 미국에 빌붙은 민족반역자들과 미국의 제국주의적 침략에 맞서 독립투쟁을 벌였다. 이것이 바로 베트남 전쟁의 명백한 본질이다. 심지어 이 책은 미국에서 열전 시리즈로 만들어 진 것이며, 미국인의 시각에서 보아도 베트남 전쟁 자체가 결과적으로 명분이 호치민과 북베트남 공산당에게 있었음을 보여주고 있다. 그리고 미국은 자신들이 일으킨 침략전쟁에서 수백만이나 되는 베트남인들을 폭격과 고엽제 투하로 학살했다는 점에서 전쟁범죄를 저질렀기에, 당연히 지금까지도 비판받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 책은 엄밀히 따지자면, 어린 시절 읽게 되는 위인전에서 벗어나 인물의 생애를 보다 객관적으로 접근하려는 시도 중 하나다. 물론 미국에서 출판된 책이기에, 다소 미국 편향적인 시각이 투영되어 있다. 이번에 읽은 호치민의 경우에도 현재는 과장으로 드러난 토지개혁 10만 처형설이 그대로 언급되긴 하지만, 내용 자체는 대체로 객관적인 시각에서 서술됐다. 물론 북베트남 정권의 토지개혁은 호치민 스스로가 강도높은 자아비판을 했고, 여러 연구와 베트남측 문서가 공개되면서 희생자 수치가 10만 명이 아닌 3,000명에서 15,000명사이라는 역사적 사실이 밝혀졌지만, 이 책이 나온 연도가 냉전이 끝나던 1990년이라는 점과 다소 미국 우파적 시각에서 서술된 점을 고려할 필요도 있는 것 같다.

 

호치민은 한 평생을 베트남의 자유와 독립을 위해 바친 위대한 독립운동가였다. 그는 항일, 항불 그리고 항미투쟁을 전개한 구국의 80년 생애를 보냈으며, 미국의 침략에 맞서 싸우다 1969년 심장마비로 사망했다. 그러나 그의 정신을 계승한 공산당 정치인들과 민중은 6년간의 항전끝에 베트남의 통일을 이룩했다. 이것은 그의 위대한 투쟁적 생애가 베트남 인민들로 하여금 제국주의에 맞서 투쟁할 수 있는 원동력이었음을 보여준다. 책 마지막 구절에 나온 내용을 인용하며 서평을 마치겠다.

 

호치민은 살아생전 전쟁의 끝맺음을 보지 못했다. 196993, 그는 심장마비로 세상을 떠났다. 여하튼 그는 두 대륙에 걸쳐서 역사의 진로를 변화시킨 셈이다. 그는 1966년의 라디오 대담에서 스스로 말했듯이 자신의 전 생애를 조국의 자유화에 바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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