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일전쟁이 발발하던 1937년 마오쩌둥(Mao ZeDong)은 중국 연안에 있으면서 실천론 모순론이라는 철학 서적을 집필한 적이 있었다마오쩌둥의 이런 철학적 해석 및 시도는 엄밀히 따졌을 때일본 제국주의의 침략이라는 상황에서 항일민족통일전선의 결성과 그 과정에서의 마르크스-레닌주의 이론의 중국화에 대한 시도이기도 했다실제로 마오쩌둥은 중일전쟁 전후로 해서 마르크스-레닌주의의 중국화를 강조하기도 했는데, 1940년 그가 쓴 신민주주의론은 그러한 중국화의 시도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마오쩌둥은 신민주주의론에서 기본적으로 구민주주의혁명단계와 신민주주의혁명단계로 중국혁명을 구분했는데자본주의에서 사회주의로 이행하는 단계에서 장기간의 신민주주의혁명단계를 설정해놓고이에 따를 사회개혁 정책과 사회문화의 개조 등 신중국의 새로운 발전 및 비전을 제시했다여기에는 제2차 국공합작이라는 현실정치의 영역도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물론 마오쩌둥은 기본적으로 마르크스-레닌주의를 보편적 이론으로 인정했다다만 앞서 말한 바와 같이 이 이론을 기계적으로 중국에 적용하지 말고중국의 현실 상황에 맞게 적용하자는 것이 마오쩌둥이 철학적으로 강조하고 싶었던 것으로 보인다마오쩌둥은 1941년 연안 간부회의에서 마르크스-레닌주의의 중국화와 관련해서 다음과 같은 3가지 문제점을 지적하기도 했었다.

 

첫째중국의 객관적인 현실조건에 대한 조사와 연구를 철저하고 체계적으로 진행하지 않으면 안 된다조사와 연구를 소홀히 하는 것은 마르크스주의의 기본정신과 위배되는 것이다.

 

둘째중국의 역사에 대한 학습을 강화하지 않으면 안 된다많은 마르크스-레닌주의자들은 입만 열면 고대 희랍의 역사를 운위하면서도 자신들의 조상과 자신들의 역사를 망각하는 경우가 많다.

 

셋째마르크스-레닌주의의 입장관점방법에 의거하여 중국의 현실조건중국의 역사그리고 중국혁명과정에서 발생하는 문제에 대한 구체적인 분석과 해결을 모색하지 않으면 안 된다.”

 

물론 이것이 소련과 코민테른 노선에 반대한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엄밀히 따졌을 때마오쩌둥이 얘기한 중국화의 방침은 1935년 코민테른 제7차 대회의 노선에 입각한 것이었다즉 아시아를 포함한 식민지 지역의 공산주의 운동의 민족적 특수성을 반영하고 민족적 이익을 대변하는 민족적 공산주의로 전환되어야 한다는 결의에 입각하고 있었다또한 당시 마오쩌둥이 소련의 최고 지도자인 이오시프 스탈린과 입장을 대립한 것도 아니었다마오쩌둥과 스탈린 사이의 심각한 견해차이도 없었다.

 

1940년대 초 제2차 세계대전이 격해지면서 중국의 상황이 바뀌었다. 1937년 제2차 국공합작을 맺은 국민당과 공산당은 1941년 신사군 사건으로 중국 국민당군이 공산당 휘하의 신사군 9,000명을 몰살시키면서다시 대립적인 분위기로 갔다또한 일본군은 중국 공산당 휘하의 팔로군과 신사군을 상대로 아주 잔혹하기 짝이 없는 삼광작전(모든 것을 불태우고죽이고약탈한다는 의미)’을 전개했다중일전쟁 과정에서 해방구를 넓혀나갔던 마오쩌둥은 위기국면에 봉착했다따라서 마오쩌둥은 당내의 분열과 동요 그리고 이에 맞선 정치투쟁을 전개하게 되었는데그것이 바로 1942년에 전개된 정풍운동이다.

 

정풍운동은 1942년 2월 1일 연안의 당교 개교식에서 1,000여 명의 당 간부가 모인 가운데마오쩌둥이 당의 작풍을 정돈하자라는 연설을 하면서 공식적으로 전개됐다정풍운동은 학풍당풍문풍이라는 3풍 정돈을 목표로 추진되었다마오쩌둥에 의하면 학풍의 정돈이란 중국의 현실을 무시하는 주관주의에 대한 비판을 통하여 앞에서 설명한 바와 같이 마르크스-레닌주의의 중국화를 추진한다는 것이었다당풍의 정돈은 종파주의와 관료주의에 대한 투쟁을 의미한다즉 이런 관료주의에 대한 투쟁을 통해 당내의 정치적 이데올로기적 통일과 기율을 수립하는 것이다마지막으로 문풍의 정돈은 무의미하고 무책임하며 공허한 표현을 일삼는 형식주의적 경향을 비판하는 것이다.

 

이에 따라 1942년부터 1944년까지 전체 당원을 대상으로 대대적인 정풍운동이 전개됐다. 1942년에서 1943년 사이에 당의 고급 및 중급단위의 실무책임자들약 3만 명 이상의 당간부들을 대상으로 하여 학풍당풍문풍에 대한 마오쩌둥의 저작물을 비롯하여 당중앙이 선정한 문건을 중심으로 학습과 훈련을 실시했다당원과 당간부를 소조별로 나누어 자신의 사상적정치적 관점과 입장에 대하여 비판과 자아비판을 반복하는 형식으로 진행됐다따라서 정풍은동은 당내에 존재하는 잘못된 사상과 행동을 바로잡고당원들로 하여금 올바른 사상과 행동양식을 가지게 하는 사상혁명적 성격이 강했다때문에 공개적인 숙청이나 또는 폭력적인 방식은 거의 사용되지 않았으며이는 1930년 AB단 사건(Anti-Bolshevik의 약자로 푸난사변으로도 불린다.) 때의 적잖은 유혈이 있었던 것과는 대조적이었다.

 

이러한 이데올로기적정치적 투쟁을 통해 중국 공산당에서는 이른바 모택동 사상이 강조되는 방향으로 진행됐다. ‘모택동 사상이 당의 지도이념으로 부상했고이에 따라 중국 공산당의 역사를 마오쩌둥과 모택동 사상의 관점에서 재해석하는 방향으로 전개됐다그리고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던 1945년 4월에 개최된 제6기 6중전회에서 역사문제에 대한 결의를 채택했다이것은 천두슈와 이립삼과 구추백 그리고 강서시대의 소련유학파 노선을 비판하면서 그 대안으로 모택동 노선을 강조했다역사문제에 대한 결의는 1945년 4월 개최된 중국 공산당 제7차 당대회에서 통과됐으며이로써 중국 공산당의 지도이념은 마르크스-레닌주의와 더불어 모택동 사상으로 재정립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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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드로 윌슨)

 

1919년 제1차 세계대전 종전 이후 서구의 강대국들은 파리강화회의와 베르사유 조약을 통해 자신들의 경제적 그리고 식민지적 이권을 챙겼다당시 미국의 대통령이었던 우드로 윌슨(Woodrow Wilson)은 이른바 민족자결주의를 주장했고이는 아시아나 아프리카 등의 나라에서 독립운동가들에게 독립의 희망을 주었다물론 이것은 허상이었고이 허상을 깨닫는 데에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1919년 3월 1일 식민지 조선에서 대대적으로 일어났던 3.1운동도 결과적으로 실패로 끝나면서 윌슨의 민족자결주의가 얼마나 서구 제국주의 중심적인지를 깨닫게 됐다당시 북경대 사서로 근무했던 마오쩌둥은 민족자결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민족자결은 이제 됐다 그래정말 후안무치한 놈들이야!”

 

1900년대 초중반에 미국에 정착한 이승만은 하버드 대학에서 석사를 프린스턴 대학교에서 박사학위를 얻은 인물이었다당시 그는 독립운동가의 타이틀을 달고 있었지만, 1907년 독립운동가 장인환 전명운의 거사에 대한 변호직책을 살인재판이라며 단번에 거절했던 인물이었고독립운동을 사적인 권력욕을 위해 했다는 현재 학계의 비판이 있는 인물이기도 하다아이러니 하게도 그는 미국 대통령인 우드로 윌슨의 제자이기도 했다.

(미국에 거주할 당시 이승만)

 

1차 세계대전 이후 파리강화회의가 열린다는 소식이 들리자미국에 있던 이승만은 1919년 1월 6일 하와이 호놀룰루를 출발하여 1월 22일 대한인국민회 중앙총회장인 도산 안창호를 만났다그 뒤 뉴욕을 거쳐 2월 3일 필라델피아에서 서재필을 만났다이승만은 서재필정한경장택상 등과 회동하고 필라델피아를 떠나 수도 워싱턴 D.C로 달려가 파리행 여권을 준비했다그는 여권 취득을 위해 윌슨 대통령을 면담하고자 했지만윌슨은 자신의 제자인 이승만을 만나주지 않았다결국 이승만과 그 일행은 파리 강화회의 참석이 불가능하게 됐다.

(위임통치론의 본질적인 내용)

 

여기서 이승만이 생각한 한 가지 아이디어가 있었는데그것이 바로 위임통치론이었다이승만과 정한경은 1919년 2월 25일 작성한 <위임통치 청원서>를 우편으로 미국 대통령과 파리 강화회의에 제출했는데그 내용은 정말 기가 막힌 것이었다.

 

저희들은 자유를 사랑하는 1500만 한국인의 이름으로 각하께서 여기에 동봉한 청원서를 평화회의에 제출하여 주시옵소연합국 열강이 장래 한국의 완전한 독립을 보장한다는 조건하에 일본의 현 통치로부터 한국을 해방시켜 국제연맹의 위임통치하에 두는 조처를 취할 수 있도록 지지하여 주시기를 간절히 청원하는 바입니다.”

(이승만에 대한 신채호의 평가)

 

국내에서 3.1운동이 한참 진행 중이던 1919년 3월 14일 이승만과 그의 측근 정한경은 미국 신문과의 회견에서 한인들이 원하는 것은 국제연맹 회의에서 한국을 관할하되민주정치를 쓰는 미국이 한국정치를 고문하여 차츰 한국의 기초를 굳건히 하고자 하는 데 있다라고 설명했었다즉 이승만이 주장한 위임통치론은 말 그대로 미국이 대신 조선을 일본 대신 통치해주자는 발언이었고이것은 이승만의 친미사대주의적인 발언이었다이승만을 연구한 이화여대 교수 정병준은 이승만의 노골적인 반일운동은 3.1운동 이전까지 한 차례도 없었다고 지적한다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대외적으로 이승만은 미국 정세와 하와이 내 자신의 입지에 따라 대일관에서 유화적인 자세와 반일을 오고 갔지만한인 사회 내부에 대해서는 언제나 반일 구호를 내세웠다이승만은 자신의 종교 활동과 교육활동이 모두 독립과 반일을 위한 것이라고 한인들에게 설명했다그러나 1915년의 국민회 쿠데타와 1918년 이즈모호 사건 등은 이승만의 대내적 반일구호가 실제로는 자신의 정치적 기반 강화를 위한 도구일 뿐이라는 의심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했다적어도 1919년 이전까지 이승만은 단 한 차례도 노골적인 반일운동을 벌인 적이 없었다.”

(더글라스 맥아더와 이승만)

 

이승만은 이 위임통치론을 1919년 4월에 탄생한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초대 총령(자신의 표현으로는 대통령자리에 있으면서도 끝까지 주장했다이승만의 이러한 입장과 태도는 그가 근본적으로 제국주의 국가 미국을 신봉한 친미 사대주의자였다는 사실과 친미 제국주의자였다는 사실을 보여준다독립운동 시절 그가 일본에 대해 다소 강경하지 않은 입장을 보이다 1941년 태평양 전쟁이 일어나면서 반일투사의 모습을 보인 이유에는 미국의 대일정책과 관련이 있다또한 해방 이후 미군정의 지원을 받아 1948년 단독정부를 수립한 것도 어쩌면 1919년 그가 주장한 위임통치론 논리와 맥락적으로 크게 차이가 없을 수도 있다따라서 위임통치론은 그가 이후 친미 제국주의자가 되는데 근간이 되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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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공주의가 외면하는 미국 역사의 진실》 출판후원 보고와 2차 후원을 요청드립니다

 

반공주의가 외면하는 미국 역사의 진실(김남기 저 어깨걸고 전국노동자정치협회 발행출판 후원을 해주신 여러분들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성심성의껏 추천사를 써주신 분들께도 존경의 마음을 담아 감사를 드립니다.

지금까지 총 38분이 후원하고미주양심수후원회해방세상 두 단체에서도 출판 후원을 해주셨습니다.

그 동안 1474천 원의 출판 후원금이 걷혔습니다.

현재 출판 등록을 한 상태이며막바지 편집 작업을 하고 있습니다공식 출판은 9월 27일로 예정되어 있습니다.

공식 출간 전까지 2차 후원을 요청드립니다.

 

아프가니스탄에서의 미제국주의 패배에서 보듯미제국주의는 내리막길을 걷고 있습니다미제의 쇠퇴는 역사적 필연입니다그러나 인간사는 종국적으로는 격돌하는 인간들 상호 간의 투쟁 속에서 그 법칙이 실현됩니다.

미제국주의가 쇠퇴하는 국면이 다가오면 올수록 미제는 그 퇴장을 늦추기 위해 격렬하게 저항하고그럼으로써 더 추악하고 반동적으로 변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곳에서도 미제의 역사적 퇴장을 앞당기기 위해 투쟁해야 할 것입니다.

반공주의가 외면하는 미국 역사의 진실이 그 역사적 과업을 수행하는데 도구가 되기를 기대합니다.

 

◎ 후원은 1만 원부터입니다.

 

◎ 1, 2차 출판 사전 후원을 해주신 전체 후원자들께는 한국사회와 변혁의 길을 출판한 책과 같이 보내드리도록 하겠습니다.

 

◎ 1, 2차 후원자들 중 2만원 이상 후원자들께는 [맑스레닌주의 총서2] 맑스주의와 무정부주의를 같이 보내드리도록 하겠습니다.

 

◎ 출판 사전 후원자들 중 출간된 책 여러 권이 필요하신 분들은 따로 요청해 주기 바랍니다.

 

◎ 책을 보내드릴 주소와 이름연락처와 필요한 권수를 보내 주시기 바랍니다.

 

◎ 문의

010 2533 3083

 

◎ 후원 계좌

229301-04-187600

국민은행김남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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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1 9.11테러 당시 내 나이는 7살이었다당시 나는 유치원에 다녔던 나이었던지라, 9.11테러에 대한 기억은 전혀 없다아마 2003년이었던 것 같다당시 텔레비전에서 미군으로 추정되는 군인들과 대규모의 탱크부대가 사막에서 진격하는 장면을 나는 보았던 기억이 있다그 당시에는 너무나도 어린 나이었기에 나는 이라크라는 나라 이름만 알았지 도대체 어떻게 해서 전쟁이 일어났는지그리고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는 하나도 몰랐다.

(2001년 9.11 테러 당시 사진)

 

내가 보다 미국 역사에 지대한 관심을 가지게 된 것은 하워드 진(Howard Zinn)이 쓴 책들을 읽게 되면서부터였던 것 같다당시 하워드 진이 쓴 책들에는 미국이 어떻게 해서 제국주의 국가인지를 아주 일목요연하게 잘 설명하고 있었고나는 진 선생이 쓴 글에 감명 받았다. 3년 전 군복무를 마치고나서 나는 1달 동안 미국여행을 할 기회가 있었다뉴욕에서 대략 1주일동안 있었던 나는 9.11기념관 근처를 들렸었다당시 내가 이곳을 방문하며 느낀 감정은 미국은 과거사에 전혀 반성하지 않는다.”는 사실이었다.

(베트남을 폭격하는 미국으 B-52 폭격기)

 

2001년 9월 11일 오사마 빈라덴과 그 알카에다 세력들이 9.11테러를 일으켰다이 테러로 최소 3,000명의 민간인이 사망했다이는 1941년 12월 7일 일본의 진주만 기습 공격으로 사망했던 미국인 숫자보다 더 많은 수치였다냉전 이후 세계 최강의 국가라 자부하던 미국은 얼마 지나지 않아 아프가니스탄을 침공했고, 2년 뒤인 2003년에는 이라크를 침공했다이렇게 해서 중동분쟁의 화약이 터져버린 것이다미국의 이라크 전쟁은 대략 2011년에서 2012년에 종결됐고아프가니스탄 전쟁은 올해 8월 31일에 종결됐다이 전쟁에서 미국은 막대한 군사력과 자금을 쏟아 부었고그 나라를 초토화시켰다이라크 전쟁에서만 65만 명의 이라크 민간인이 미군의 공습으로 사망했으며아프가니스탄에서도 최소 15만 이상이 죽은 것으로 추정된다.

(한국전쟁 당시 마을에 투하된 네이팜 폭탄)

 

사실 미국은 9.11테러에 대한 보복으로 아프가니스탄을 침공했었는데아프가니스탄 전쟁 초기인 2001년 12월 말까지 미군의 공습 및 군사작전으로 죽은 아프가니스탄 민간인이 최소 2만 명을 넘겼었다개전 초기 몇 주 동안 죽은 아프가니스탄 민간인의 숫자는 9.11 테러로 희생된 민간인 숫자를 훨씬 상회했다앞서 설명한 이라크 전쟁 또한 마찬가지였고이라크 전쟁에서는 테러리스트들을 잡는다는 명목으로 온갖 기행적인 고문들을 이라크군 포로에게 행했다이 전쟁을 계획했던 인물인 조지 부시와 딕 체니 그리고 도널드 럼스펠트와 콘돌리자 라이스 등은 이러한 전쟁을 일으키고 계획한 침략자들이었다심지어 딕 체니의 경우 자신이 CEO로 있던 핼리버튼 회사를 통해 이라크 전쟁에서 석유산업으로 막대한 부를 축적하기까지 했다이런 사실에서 알 수 있듯이, 2003년 이라크 전쟁은 미국의 자본이 더 많은 부를 축적하기 위해 일으킨 침략전쟁이었다.

 

미국이 하는 방식은 과거에도 전혀 다르지 않았다. 1947년 그리스 내전에 개입하여 소수의 고문단과 네이팜 폭탄을 투하할 때도결과적으로 이익을 보는 세력은 미국 자본가 세력이었다한국전쟁과 베트남 전쟁에서도 마찬가지였다사실 냉전시기 미국이 개입한 전쟁들은 식민주의와 파시즘의 모순 속에서 자유라는 장식을 포장되었을 뿐이었다그리고 그런 전쟁개입과 내정간섭에서 미국이 이러한 행위를 하는 이유에는 근본적으로 자신들의 자본주의적 이해관계에 입각한 것이었다베트남 전쟁도 그러했다말이 좋아 민주주의를 지키러 간다는 명분을 세웠지만현실은 프랑스 식민주의자들이 만들어 놓은 토대에 자유와 민주주의라는 단어를 포장해서 일으킨 전쟁이었고그 나라 민중의 80%(대다수 베트남인들은 호치민과 공산당을 지지함.)의 염원을 짓밟아버린 행위였다해방 후 한반도에 이승만 정부를 수립한 것도 민중들의 염원(해방 후 한반도 민중 70%가 사회주의를 지지)과는 거리가 먼 일이었다이는 제주4.3항쟁을 통해서 입증된다.

(아옌데 사후 수많은 칠레 시민들을 체포하는 피노체트의 군인들)

 

라틴 아메리카와 중동 그리고 아프리카에서 반복되는 미국의 제국주의 침략 및 내정간섭은 소위 서방세계에서 쉽게 잊혀지곤 한다특히 미국이 만들어 놓은 9.11 이미지 메이킹은 참으로 소름이 돋을 정도다마치 히로시마 원자폭탄 투하를 빌미로 자신들의 제국주의적인 전쟁범죄를 전부 다 덮어버리려는 일본 제국주의자들이 모습이 생각날 정도다실제로 미국은 그러하다아프가니스탄 전쟁에서 자신들에 의해 무수히 많은 민간인 사상자가 생긴 사실은 외면한 채아프가니스탄에서의 여성인권 및 탈레반 세력의 잔혹성만을 부각시킨다이런 것이 바로 미국이 과거사를 반성하지 않고 있다는 증거다.

(이라크 전쟁 당시 포로들에게 온갖 고문과 폭행을 일삼는 미군 병사들)

 

9.11 테러로 희생된 미국인들은 당연히 도덕적인 측면에서 그리고 인권적인 측면에서 안타까운 일이다그러나 미국은 자신들이 저지른 수많은 과거에 대해선 전혀 반성하지 않는다한국전쟁에서의 폭격 및 세균전베트남 전쟁에서의 폭격 및 맹독성 고엽제 살포 그리고 이라크와 아프가니스탄에서의 폭격과 드론 공습 등에 대해선 반성하는 모습을 국제적으로 잘 보여주지 않는다그렇게 미국이 죽인 타국의 생명은 수천만이 넘어감에도 불구하고 미국은 반성하지 않는다아직도 반공주의적 감수성에 빠져 미국의 폭력 행위에는 감각이 없는 이들은 마찬가지로 미국정부와 똑같은 실수를 반복하고 있다작년 1월 이란과 미국의 대립 구도에서 반전운동이 일어났을 때한국에서도 반전운동이 소규모로 진행되었지만일각에서는 한국의 호르무즈 해협 파병을 지지하는 아주 아제국주의적인 성향을 보여줬다그리고 그랬던 이들은 현재 아프가니스탄에 대해 얘기할 때도 앵무새처럼 똑같은 행동을 반복한다.

 

하워드 진의 말대로 미국은 정말 과거로부터 아무런 반성을 하지 않고 있다. 9.11 20주년인 오늘 우리가 머릿속에 새겨야할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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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미 2021-09-11 21:11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저도 오늘 각종 뉴스에서 나오는 관련 기사들 보며 같은 생각을 했습니다. 하워드 진의 책은 미국을 제대로 알기 위해 꼭 읽어야하는 필독서라 생각합니다.
911로 희생된 죄없는 희생자들은 안타깝지만 어떤 죽음은 추모되지도 기억되지도 않는다는게 더 끔찍하네요.

NamGiKim 2021-09-11 21:14   좋아요 2 | URL
해방정국 10만
한국전쟁 150만
베트남 전쟁 300만
캄보디아 1차 킬링필드 50만
이라크 아사 정책 150만
이라크 전쟁 65만
아프가니스탄 전쟁 15만
그외의 수많은 미제 침략 및 개입으로 거의 수천만이 죽었다 봐도 과언이 아니죠.

그러나 우리는 기억과 역사평가에 있어서 얼마나 공정할까요? 저는 지극히 서구편향적이라 봅니다.

NamGiKim 2021-09-11 22:3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9월 27일날 제 책도 알라딘서 살 수 있으니, 이 부분에 대해 관심있으면 읽어보세요.
 

1963 11 1일 남베트남에서 군부 주도의 쿠데타(coup d'état)가 발생했다당시 쿠데타를 일으킨 인물은 남베트남군 장성인 즈엉반민(Dương Văn Minh으로 Dương Văn “Big” Minh이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다.)으로 그는 1945 3월 일본의 쿠데타 당시 프랑스군에 복무하며 일본군과 전투를 치른 적이 있는 인물이었다그는 프랑스 식민지 군대에 복무했으며이후 바오다이 정부와 응오딘지엠 정부에서도 남베트남군에서 복무하며 장성까지 올라간 인물이었다.

(응우옌카인)

 

1954년 디엔비엔푸 전투 이후 제네바 회담에서 베트남을 남북 분단시킨 미국은 남베트남에 반공 민족주의자인 응오딘지엠(Ngô Ðình Diệm)을 내세워 친미 꼭두각시 정부를 세웠었다그러나 응오딘지엠 정부는 초기에 미국이 걸었던 기대와는 달리 독재정치와 민심붕괴 그리고 토지개혁 실패 등으로 국가를 제대로 운영하지 못했고남베트남 민중들은 1960년에 창설된 남베트남민족해방전선 즉 베트콩(Viet Cong)을 지지하게 됐다디엠 정부의 인기는 특히나 불교를 탄압하면서 나락으로 떨어졌고, 1963년 6월 11일 고승 틱광둑(Thích Quảng Ðức)이 수도 사이공 거리에서 분신자살을 하면서 종말로 나아갔다.

 

거기다 1963년 기준으로 베트콩은 로버트 맥나마라(Robert McNamara)의 추산으로 남베트남 지역 40%를 통치하고 있었고일부 통계에 따라선 최대 남베트남 국토 75%를 접수한 상황이었다남베트남에 미군사고문단을 파병했던 미국의 존 F. 케네디(John F. Kennedy) 정부는 결국 CIA를 동원하여 응오딘지엠을 암살하기로 결정했다이에 따라 남베트남군의 장성인 즈엉반민 장군이 쿠데타를 주도하게 됐고이들은 사이공에서의 군사작전 끝에 응오딘지엠과 그의 동생 응오딘누(Ngô Đình Nhu)를 살해하는데 성공했다이렇게 해서 남베트남에서 첫 번째 정권 교체 쿠데타가 성공한 것이다.

(로버트 맥나마라와 응우옌카인)

 

그러나 응오딘지엠의 죽음은 아이러니 하게도 남베트남에 더 큰 혼란을 가져왔다물론 남베트남 정부는 응오딘지엠 정부 시점부터 망해가고 있었지만그가 사망하자 남베트남에서는 군벌들의 권력 쟁취 싸움이 지속적으로 일어났다그 이유는 디엠이 죽은 이후 정권을 잡은 이들의 통치력이 매우 결여되어 있었기 때문이었다디엠 암살 3주뒤 미국에서는 케네디가 암살당했다케네디가 죽자 부통령이었던 린든 B. 존슨(Lyndon B. Johnson)이 대통령에 취임했다. 1963년 12월 맥나마라는 자칫하면 2~3개월 안에 남베트남이 공산당이 지배하게 될 수 있다.”고 보았다그만큼 남베트남의 상황은 당장 무너져도 놀랍지 않은 수준이었던 것이다.

 

다음해인 1964년 1월 30일 이번에는 남베트남군 대령 출신인 응우옌카인(Nguyên Khánh) 장군이 군사 쿠데타를 일으켰고, 1주일 뒤인 2월 7일에 즈엉반민 장군을 형식상의 수반으로 하는 신정부를 수립했다그리고 카인 자신은 남베트남의 수상으로 등극했다물론 리영희 교수가 저서 전환시대의 논리에서 언급했던 것처럼응우옌카인 또한 민 장군과 같은 또 다른 과거의 프랑스 식민지 장교에 지나지 않았다응우옌카인의 쿠데타 또한 미국의 힘을 얻어 진행된 것이었고이에 따라 3월에는 미국의 존슨 대통령이 맥나마라를 남베트남에 보내 카인 정부가 미국편이라는 것을 확실히 하고자 했다당시 맥나마라는 카인과 함께 남베트남 대중들 앞에서 베트남 만세!”를 외쳤는데베트남어 발음 차이 때문에 대중들에겐 베트남 만세!”가 아닌 작은 오리가 눕고 싶다.”라는 말로 들려서 웃음을 멈추지 못했다는 에피소드도 있다.

(쿠데타 당시 사이공의 대통령궁)

 

존슨이 맥나마라까지 베트남에 보내 자신의 편인 것을 확실시 했던 카인 정부는 마찬가지로 즈엉반민 정권처럼 대중성이 결여되어 있었다따라서 다른 남베트남 군인들이 계속 권력을 잡으려는 쿠데타를 일으켰다따라서 남베트남에서의 내부 쿠데타는 1965년까지 일어났고디엠 암살부터 1965년까지 대략 20개월 동안 총 10번의 쿠데타가 있었다2차 세계대전 말기 북베트남의 지도자 호치민(Hồ Chí Minh)과 깊은 관계를 형성하며 호치민을 존경했던 아키메데스 패티(Archimedes Patti)처럼, 1950년대 당시 응오딘지엠과 깊은 관계를 형성하며 응오딘지엠을 존경했던 에드워드 랜스데일(Edward Lansdale)은 다음과 같은 증언을 했었다.

 

“CIA는 쿠데타 진행 방법에 반대했다디엠의 몰락과 함께 장성들은 헌법도 바꿔 버렸다새 헌법에 따라 그들은 성장이나 지방 고위 관리들을 대부분 재임명하는 수법으로 개혁을 피해 갔다국가 원수를 제거하기 위한 정치적 투쟁이 드디어 세련되고 막강한 힘을 가진 적북베트남의 면전에서 정치적인 분열로 이어졌다.”

 

출처베트남 10000일의 전쟁 p.153

 

남베트남 내부에서 일어나는 쿠데타불교도 및 대학생 그리고 시민들의 반독재 투쟁응오딘지엠 암살 이후 남베트남 곳곳에서 남베트남군을 패퇴시키는 베트콩과의 전쟁은 카인 정부에서도 지속적으로 일어났고남베트남 정권 입장에서 오히려 더 사태가 악화되고 있었다. 1964년 8월 23일에는 반독재 투쟁 시위대가 사이공방송국을 점령했었고, 25일에는 수만명이 모인 대규모 시위가 수도 사이공에서 개최되기도 했다거기다 1964년 12월 28일부터 약 3일 동안 호치민의 표현대로 작은 디엔비엔푸(Little Dien Bien Phu)’가 빈지아 지역에서 발생했다이 전투에서 4,000명 이상의 남베트남군이 1,000명 안팎의 베트콩에게 대패했다베트콩은 32명이 전사한 반면남베트남군은 201명이 전사하고 또 다른 200명이 부상당했을 정도로 참패했다.

(윌리엄 웨스트모어랜드 장군과 린든 B. 존슨 대통령 그리고 응우옌반티에우와 응우옌까오끼)

 

1964년 12월 20일 남베트남의 극우파 소장 장교를 중심으로 내부 쿠데타가 카인 정부의 민정이양 이후 탄생한 찬반후옹(Trần Văn Hương) 정부는 1965년 1월에 카인을 지지하는 세력의 군부 쿠데타로 다시 물러났고그해 2월에 또 다른 장교단의 쿠데타가 발생했다이 쿠데타에 이어 또 다른 역 쿠데타가 2월 20일에 일어났다참으로 놀라운 사실은 이런 일련의 과정들이 미국이 베트남 전쟁을 전면적으로 일으키는 과정과 베트콩들에게 전투에서 패전하는 속에서 일어났다는 사실이다그리고 더 놀라운 것은 남베트남에서 베트콩과 제대로 싸울 능력도 없던 응우옌카인은 이승만처럼 북진통일(????????)’을 외치기까지 했었다.

 

남베트남의 쿠데타를 종결시킨 또 다른 쿠데타는 린든 존슨 대통령이 남베트남에 미군 지상병력을 파병하고 나서 3개월 뒤에 일어났다당시 베트남 전쟁은 다낭에 미해병대 3,000명이 상륙한 시점부터 대한민국과 오스트레일리아뉴질랜드필리핀태국이 베트남 전쟁에 지상병력 파병을 시작하려고 할 때였다. 1965년 6월 11일 응우옌까오끼(Nguyễn Cao Kỳ)와 응우옌반티에우(Nguyễn Văn Thiệu)가 마지막으로 남베트남에서 쿠데타를 일으켜 자신들의 정권을 잡았다대통령에는 티우가 수상에는 끼가 차지했다이렇게 되면서 남베트남에서 지속적으로 일어나던 내부 총질의 물결은 존슨 행정부의 대규모 지상병력 파병이 실행되는 시점에서 종결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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