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일전쟁이 발발하던 1937년 마오쩌둥(Mao ZeDong)은 중국 연안에 있으면서 『실천론』과 『모순론』이라는 철학 서적을 집필한 적이 있었다. 마오쩌둥의 이런 철학적 해석 및 시도는 엄밀히 따졌을 때, 일본 제국주의의 침략이라는 상황에서 항일민족통일전선의 결성과 그 과정에서의 마르크스-레닌주의 이론의 중국화에 대한 시도이기도 했다. 실제로 마오쩌둥은 중일전쟁 전후로 해서 마르크스-레닌주의의 중국화를 강조하기도 했는데, 1940년 그가 쓴 『신민주주의론』은 그러한 중국화의 시도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마오쩌둥은 『신민주주의론』에서 기본적으로 ‘구민주주의혁명단계’와 ‘신민주주의혁명단계’로 중국혁명을 구분했는데, 자본주의에서 사회주의로 이행하는 단계에서 장기간의 ‘신민주주의혁명단계’를 설정해놓고, 이에 따를 사회개혁 정책과 사회문화의 개조 등 신중국의 새로운 발전 및 비전을 제시했다. 여기에는 제2차 국공합작이라는 현실정치의 영역도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물론 마오쩌둥은 기본적으로 마르크스-레닌주의를 보편적 이론으로 인정했다. 다만 앞서 말한 바와 같이 이 이론을 기계적으로 중국에 적용하지 말고, 중국의 현실 상황에 맞게 적용하자는 것이 마오쩌둥이 철학적으로 강조하고 싶었던 것으로 보인다. 마오쩌둥은 1941년 연안 간부회의에서 마르크스-레닌주의의 중국화와 관련해서 다음과 같은 3가지 문제점을 지적하기도 했었다.
“첫째, 중국의 객관적인 현실조건에 대한 조사와 연구를 철저하고 체계적으로 진행하지 않으면 안 된다. 조사와 연구를 소홀히 하는 것은 마르크스주의의 기본정신과 위배되는 것이다.
둘째, 중국의 역사에 대한 학습을 강화하지 않으면 안 된다. 많은 마르크스-레닌주의자들은 입만 열면 고대 희랍의 역사를 운위하면서도 자신들의 조상과 자신들의 역사를 망각하는 경우가 많다.
셋째, 마르크스-레닌주의의 입장, 관점, 방법에 의거하여 중국의 현실조건, 중국의 역사, 그리고 중국혁명과정에서 발생하는 문제에 대한 구체적인 분석과 해결을 모색하지 않으면 안 된다.”
물론 이것이 소련과 코민테른 노선에 반대한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엄밀히 따졌을 때, 마오쩌둥이 얘기한 중국화의 방침은 1935년 코민테른 제7차 대회의 노선에 입각한 것이었다. 즉 아시아를 포함한 식민지 지역의 공산주의 운동의 민족적 특수성을 반영하고 민족적 이익을 대변하는 민족적 공산주의로 전환되어야 한다는 결의에 입각하고 있었다. 또한 당시 마오쩌둥이 소련의 최고 지도자인 이오시프 스탈린과 입장을 대립한 것도 아니었다. 마오쩌둥과 스탈린 사이의 심각한 견해차이도 없었다.
1940년대 초 제2차 세계대전이 격해지면서 중국의 상황이 바뀌었다. 1937년 제2차 국공합작을 맺은 국민당과 공산당은 1941년 신사군 사건으로 중국 국민당군이 공산당 휘하의 신사군 9,000명을 몰살시키면서, 다시 대립적인 분위기로 갔다. 또한 일본군은 중국 공산당 휘하의 팔로군과 신사군을 상대로 아주 잔혹하기 짝이 없는 ‘삼광작전(모든 것을 불태우고, 죽이고, 약탈한다는 의미)’을 전개했다. 중일전쟁 과정에서 해방구를 넓혀나갔던 마오쩌둥은 위기국면에 봉착했다. 따라서 마오쩌둥은 당내의 분열과 동요 그리고 이에 맞선 정치투쟁을 전개하게 되었는데, 그것이 바로 1942년에 전개된 정풍운동이다.
정풍운동은 1942년 2월 1일 연안의 당교 개교식에서 1,000여 명의 당 간부가 모인 가운데, 마오쩌둥이 「당의 작풍을 정돈하자」라는 연설을 하면서 공식적으로 전개됐다. 정풍운동은 학풍, 당풍, 문풍이라는 3풍 정돈을 목표로 추진되었다. 마오쩌둥에 의하면 학풍의 정돈이란 중국의 현실을 무시하는 주관주의에 대한 비판을 통하여 앞에서 설명한 바와 같이 마르크스-레닌주의의 중국화를 추진한다는 것이었다. 당풍의 정돈은 종파주의와 관료주의에 대한 투쟁을 의미한다. 즉 이런 관료주의에 대한 투쟁을 통해 당내의 정치적 이데올로기적 통일과 기율을 수립하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문풍의 정돈은 무의미하고 무책임하며 공허한 표현을 일삼는 형식주의적 경향을 비판하는 것이다.
이에 따라 1942년부터 1944년까지 전체 당원을 대상으로 대대적인 정풍운동이 전개됐다. 1942년에서 1943년 사이에 당의 고급 및 중급단위의 실무책임자들, 약 3만 명 이상의 당간부들을 대상으로 하여 학풍, 당풍, 문풍에 대한 마오쩌둥의 저작물을 비롯하여 당중앙이 선정한 문건을 중심으로 학습과 훈련을 실시했다. 당원과 당간부를 소조별로 나누어 자신의 사상적, 정치적 관점과 입장에 대하여 비판과 자아비판을 반복하는 형식으로 진행됐다. 따라서 정풍은동은 당내에 존재하는 잘못된 사상과 행동을 바로잡고, 당원들로 하여금 올바른 사상과 행동양식을 가지게 하는 사상혁명적 성격이 강했다. 때문에 공개적인 숙청이나 또는 폭력적인 방식은 거의 사용되지 않았으며, 이는 1930년 AB단 사건(Anti-Bolshevik의 약자로 푸난사변으로도 불린다.) 때의 적잖은 유혈이 있었던 것과는 대조적이었다.
이러한 이데올로기적, 정치적 투쟁을 통해 중국 공산당에서는 이른바 모택동 사상이 강조되는 방향으로 진행됐다. ‘모택동 사상’이 당의 지도이념으로 부상했고, 이에 따라 중국 공산당의 역사를 마오쩌둥과 모택동 사상의 관점에서 재해석하는 방향으로 전개됐다. 그리고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던 1945년 4월에 개최된 제6기 6중전회에서 「역사문제에 대한 결의」를 채택했다. 이것은 천두슈와 이립삼과 구추백 그리고 강서시대의 소련유학파 노선을 비판하면서 그 대안으로 모택동 노선을 강조했다. 「역사문제에 대한 결의」는 1945년 4월 개최된 중국 공산당 제7차 당대회에서 통과됐으며, 이로써 중국 공산당의 지도이념은 마르크스-레닌주의와 더불어 모택동 사상으로 재정립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