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드로 윌슨)

 

1919년 제1차 세계대전 종전 이후 서구의 강대국들은 파리강화회의와 베르사유 조약을 통해 자신들의 경제적 그리고 식민지적 이권을 챙겼다당시 미국의 대통령이었던 우드로 윌슨(Woodrow Wilson)은 이른바 민족자결주의를 주장했고이는 아시아나 아프리카 등의 나라에서 독립운동가들에게 독립의 희망을 주었다물론 이것은 허상이었고이 허상을 깨닫는 데에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1919년 3월 1일 식민지 조선에서 대대적으로 일어났던 3.1운동도 결과적으로 실패로 끝나면서 윌슨의 민족자결주의가 얼마나 서구 제국주의 중심적인지를 깨닫게 됐다당시 북경대 사서로 근무했던 마오쩌둥은 민족자결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민족자결은 이제 됐다 그래정말 후안무치한 놈들이야!”

 

1900년대 초중반에 미국에 정착한 이승만은 하버드 대학에서 석사를 프린스턴 대학교에서 박사학위를 얻은 인물이었다당시 그는 독립운동가의 타이틀을 달고 있었지만, 1907년 독립운동가 장인환 전명운의 거사에 대한 변호직책을 살인재판이라며 단번에 거절했던 인물이었고독립운동을 사적인 권력욕을 위해 했다는 현재 학계의 비판이 있는 인물이기도 하다아이러니 하게도 그는 미국 대통령인 우드로 윌슨의 제자이기도 했다.

(미국에 거주할 당시 이승만)

 

1차 세계대전 이후 파리강화회의가 열린다는 소식이 들리자미국에 있던 이승만은 1919년 1월 6일 하와이 호놀룰루를 출발하여 1월 22일 대한인국민회 중앙총회장인 도산 안창호를 만났다그 뒤 뉴욕을 거쳐 2월 3일 필라델피아에서 서재필을 만났다이승만은 서재필정한경장택상 등과 회동하고 필라델피아를 떠나 수도 워싱턴 D.C로 달려가 파리행 여권을 준비했다그는 여권 취득을 위해 윌슨 대통령을 면담하고자 했지만윌슨은 자신의 제자인 이승만을 만나주지 않았다결국 이승만과 그 일행은 파리 강화회의 참석이 불가능하게 됐다.

(위임통치론의 본질적인 내용)

 

여기서 이승만이 생각한 한 가지 아이디어가 있었는데그것이 바로 위임통치론이었다이승만과 정한경은 1919년 2월 25일 작성한 <위임통치 청원서>를 우편으로 미국 대통령과 파리 강화회의에 제출했는데그 내용은 정말 기가 막힌 것이었다.

 

저희들은 자유를 사랑하는 1500만 한국인의 이름으로 각하께서 여기에 동봉한 청원서를 평화회의에 제출하여 주시옵소연합국 열강이 장래 한국의 완전한 독립을 보장한다는 조건하에 일본의 현 통치로부터 한국을 해방시켜 국제연맹의 위임통치하에 두는 조처를 취할 수 있도록 지지하여 주시기를 간절히 청원하는 바입니다.”

(이승만에 대한 신채호의 평가)

 

국내에서 3.1운동이 한참 진행 중이던 1919년 3월 14일 이승만과 그의 측근 정한경은 미국 신문과의 회견에서 한인들이 원하는 것은 국제연맹 회의에서 한국을 관할하되민주정치를 쓰는 미국이 한국정치를 고문하여 차츰 한국의 기초를 굳건히 하고자 하는 데 있다라고 설명했었다즉 이승만이 주장한 위임통치론은 말 그대로 미국이 대신 조선을 일본 대신 통치해주자는 발언이었고이것은 이승만의 친미사대주의적인 발언이었다이승만을 연구한 이화여대 교수 정병준은 이승만의 노골적인 반일운동은 3.1운동 이전까지 한 차례도 없었다고 지적한다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대외적으로 이승만은 미국 정세와 하와이 내 자신의 입지에 따라 대일관에서 유화적인 자세와 반일을 오고 갔지만한인 사회 내부에 대해서는 언제나 반일 구호를 내세웠다이승만은 자신의 종교 활동과 교육활동이 모두 독립과 반일을 위한 것이라고 한인들에게 설명했다그러나 1915년의 국민회 쿠데타와 1918년 이즈모호 사건 등은 이승만의 대내적 반일구호가 실제로는 자신의 정치적 기반 강화를 위한 도구일 뿐이라는 의심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했다적어도 1919년 이전까지 이승만은 단 한 차례도 노골적인 반일운동을 벌인 적이 없었다.”

(더글라스 맥아더와 이승만)

 

이승만은 이 위임통치론을 1919년 4월에 탄생한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초대 총령(자신의 표현으로는 대통령자리에 있으면서도 끝까지 주장했다이승만의 이러한 입장과 태도는 그가 근본적으로 제국주의 국가 미국을 신봉한 친미 사대주의자였다는 사실과 친미 제국주의자였다는 사실을 보여준다독립운동 시절 그가 일본에 대해 다소 강경하지 않은 입장을 보이다 1941년 태평양 전쟁이 일어나면서 반일투사의 모습을 보인 이유에는 미국의 대일정책과 관련이 있다또한 해방 이후 미군정의 지원을 받아 1948년 단독정부를 수립한 것도 어쩌면 1919년 그가 주장한 위임통치론 논리와 맥락적으로 크게 차이가 없을 수도 있다따라서 위임통치론은 그가 이후 친미 제국주의자가 되는데 근간이 되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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