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1년 12월 7일 일본은 진주만 기습 공격을 감행했다. 일본이 치밀하게 계획했던 이 기습 공격으로 2400명 이상의 미국인이 사망했고, 소식은 미국 본토 전역으로 전파됐다. 일본의 진주만 기습 공격 다음날인 12월 8일 대통령 프랭클린 루스벨트(Franklin Roosevelt)는 미 의회를 긴급 소집하여 일본에게 공식적인 선전포고를 감행했다. 이렇게 해서 미국이 치르는 태평양 전쟁이 시작됐다. 이 뉴스를 들었던 영국의 총리 윈스턴 처칠(Winston Churchill)은 “이것으로 히틀러의 운명은 결정되었다. 무솔리니의 운명도 결정되었다. 일본도 산산조각 나게 되었다”고 하며 환호성을 외쳤고, 중국 국민당 지도자인 장제스도 자신의 일기에 “행운은 결코 어떤 사람에게 오랫동안 마냥 미소만 짓는 것이 아니다.”라고 썼다.
아이러니 하게도 이 소식을 들었던 이들 중에 기쁨을 표출했던 지도자가 연합국에만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당시 유럽 정복에 착수했던 아돌프 히틀러(Adolf Hitler)도 미국의 참전 소식을 듣고 매우 기뻐했다. 장제스나 처칠은 공식적으로 반파시즘 연합 전선을 구축했기 때문에, 이들이 미국의 참전 소식을 기뻐할 이유가 충분했다. 하지만 히틀러의 경우는 달랐다. 미국의 참전 소식은 엄밀히 말해 나치독일이 치르고 있던 양면전선에 부담을 주게 되기 때문이다. 히틀러가 미국의 참전소식에 기뻐했던 이유는 생각보다 단순했다. 당시 그가 했던 발언은 다음과 같다.
“우리는 전쟁에서 질 수 없다. 우리는 지난 3천 년간 패배한 적이 없는 파트너가 생겼다.”
여기서 히틀러가 얘기하는 파트너는 일본을 뜻하고, 3천 년이라는 숫자 단위는 일본의 역사를 뜻한다. 히틀러의 표현에서 알 수 있듯이, 태평양 전쟁 당시 일본의 지도부는 자신들의 역사를 2600년 혹은 조금 더 과장해서 3000년이라는 얘기를 했었다. 일본에서 주장하는 2600년 내지는 3000년 역사는 일본서기와 고사기의 기록을 따르고 있는 것이다. 이 기록에 따르면 기원전 660년 초대 진무 천황(神武天皇)이 즉위했다고 나오고, 이것을 일본 역사의 시작이라 잡은 것이라 할 수 있다. 쉽게 말해 한국으로 치자면 단군 할아버지와 같은 의미를 갖는다고 보면 된다.
(진무천황, 기원전 660년에 천황으로 즉위했다고 한다. 그러나 실존성이라는 문제에 있어서는 불확실하다.)
하지만 이것은 어디까지나 실화가 아니라 신화이기 때문에 실존성이라는 문제에 있어선 교차검증이 불가능하다. 또한 일본의 다이쇼 덴노의 4남 미카사노미야 다카히토 친왕(1915~2016) 또한 “진무 덴노는 신화이지 실존 인물이 이니다”라고 주장했다가 ‘공산주의자 왕자님’이라는 비난을 듣기도 했었다. 아무튼 이에 대해 여러 가지 학살이 있긴 하지만, 주로 중국이나 한반도의 왕조와 비교하여 천황의 역사를 정당화하는 차원에서 후대가 연대를 올려 고쳤다는 설과, 실존 인물이 아니라는 설, 즉 이 두 가지 설이 학계에선 가장 유력한 것으로 여겨지고 있다.
거기다 일본서기와 고사기의 기록에서 나오는 진무천황이 즉위하던 시대는 일본 역사에서 보았을 때, 이른바 조몬 문화 시대였다. 매머드가 사실상 멸종하던 기원전 1만 년부터 야요이 문화 시대가 열리는 기원전 3세기까지를 조몬 문화시대라고 하는데, 이 시기에는 토기 발명과 밤나무나 도토리 채집 내지는 사슴이나 멧돼지 사냥으로 살던 시대였다. 따라서 20세기 일본 제국주의자들이 내세운 2600년 내지는 3000년이라는 역사는 어떤면에선 과장이 섞였다고 볼 수 있다.
기원전 3세기 일본 역사는 조몬 문화시대에서 야요이 시대로 넘어가는데, 이 야요이 시대는 3세기까지 계속되었고, 벼농사의 시작과 청동기와 철기가 동시에 등장하였다. 또한 당시 인접국이던 가야나 백제와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었으며, 이것을 바탕으로 한반도에서 건너오는 선진 문물을 흡수하고 이를 바탕으로 규슈(九州)나 시코쿠 등 일본 서부 지역에 위치한 각종 소국들을 복속시켜 나갔으며 점차적으로 관동지역 일대에 주거하고 있던 아이누 계통의 부족들을 정복하면서 현재 일본의 기틀을 형성하게 되었다.
(야마토 시대, 일본 문명의 시작점이다.)
또한 3세기 여왕 히미코가 다스리는 야마타이 국을 중심으로 형성되었던 연합국 시대를 거쳐 4세기 초 긴키의 야마토를 중심으로 야마토 정권의 성립되었다. 그리고 이 야마토 정권은 5세기 무렵 왜 5왕 시대에 이르러서는 각 지역 세력들의 연대를 전제로 성립된 호족 연합체제의 성격을 띠고 있었다. 6~7세기 무렵 일본은 국가로서 틀이 잡히기 시작했다. 이 아스카 시대에는 쇼토쿠 태자가 불교를 공인하는 한편, 한반도를 거치지 않은 채 중국의 선진 문활르 도입하는 모습을 보여주었으며, 이때 수양제에게 보낸 국서에 “해 뜨는 나라의 천자가 해 지는 나라의 천자에게”라는 문구를 기입하여 이를 보여주기도 했다. 이게 오늘날까지도 이어지는 일본의 특징인 그들만의 세계를 보여주는 좋은 예일지도 모른다.
물론 오늘날 사용되는 일본(日本)이라는 국호는 덴무(673~686)와 지토(690~697) 천황의 시대에 성립했을 가능성이 크다. 또한 일본 군주의 호칭인 천황이 처음 사용된 것도 목간을 비롯한 당시의 실물 사료를 통해 확인할 수 있는 것이 덴무 시대다. 따라서 일본의 천황제는 7세기에 성립되었다고 보는 것이 정확하다. 일본은 7세기 이후 대륙의 선진 문화와 문물을 적극적으로 수용했지만, 9~10세기에 접어들면서 달라졌다. 특히나 당나라와 신라 그리고 발해가 멸망하면서 일본은 이 나라들과 대외 관계를 단절하고 일본적인가치를 모색하기 시작했으며, 10세기 이후에는 이른바 국풍화 현상이 나타났다. 즉 문학과 학술적인 측면에서 일본적 특성이 나타났다는 것이다.
(사무라이, 사무라이는 무사계급 즉 유럽 중세로 치면 기사에 속한다.)
10세기에 접어들면서 일본은 중세로 들어갔다. 중세로 들어가면서 일본에선 소위 무사라는 계급이 등장했고, 이들을 중심으로 하는 가문이 생겻으며, 11세기 중엽부터 이들은 군사 전문가인 동시에 토지 개간자 혹은 그 관리자의 성격을 띄게 되었다. 이 시대가 바로 헤이안 시대였다. 12세기 일본은 이른바 가마쿠라 막부가 설립되었다. 이 가마쿠라 시대는 150년간 존재했다. 가마쿠라 시대에는 소위 ‘쇼군’이라는 명칭이 막부의 수장을 가리키는 용어로 사용되었고, 따라서 쇼군은 막대한 권위를 가질 수 있었으며, 이것은 천황을 넘어서는 것이었다.
(몽골의 일본 침략, 1281년 쿠빌라이칸은 일본을 침공했었다. 그러나 그 침공은 실패로 끝났다.)
가마쿠라 시대인 1281년 일본은 몽골과 고려 연합군에게 대대적인 침략을 받았었다. 13세기 몽골의 칭기즈칸이 부족을 통일하고 세계 최강의 제국을 건설함에 따라 이들 또한 침략을 받은 것이다. 초반에 몽골 고려 연합군은 하카타 만에 침입하였지만, 거센 태풍이 오는 바람에 침공은 실패로 끝났다. 당시 일본을 침략했던 몽골-고려 연합군을 빗대어 ‘무쿠리 고쿠리’라는 말은 경멸과 공포의 언어가 되었고, 몽골군을 무찌르는 데 큰 도움이 되었던 바람은 신풍 즉 가미카제라는 말로 불리게 됐다. 태평양 전쟁 당시 미군 항공모함에 자살돌격을 했던 가미카제 특공대의 어원이 바로 여기서 온 것이다.
(전국시대 당시 영주세력들, 150년간 지속된 이 전쟁은 말 그대로 엄청나게 많은 세력과 전쟁을 초래했다.)
몽골 침략을 기점으로 가마쿠라 시대는 점차 쇠퇴했고, 1333년 멸망했다. 가마쿠라 막부 이후인 1338년 무로마치 막부가 시작이 되었지만, 가마쿠라 막부 멸망 이후 나타난 남북조 시대의 갈등과 전쟁을 막지는 못했다. 이렇게 하여 일본은 이른바 전국시대(애니메이션 이누야샤를 보았다면 무조건 들어봤을 시대)가 시작된 것이다. 전국시대는 일본의 여러 세력들이 나와바리 다툼에 참여했는데, 이 전쟁은 대략 150년간 지속되었다. 이 과정에서 고려 이후 새로 탄생한 나라 조선에게 대마도를 침공당하는 일도 벌어졌다. 그러던 1543년 전 세계적으로 무역로를 넓혀가던 포르투갈이 일본에게 획기적인 무기하나를 갖다 주었는데, 그게 바로 나는 새도 잡는 다는 조총이었다. 이 조총의 도입으로 오다노부나가라는 인물이 전국을 평정해 나갔다. 그러나 그는 부하의 배신으로 목숨을 잃었고, 노부나가의 충실한 부하였던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최종적으로 통일을 이룩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출신 성분은 안좋았지만 일본 최고자리에 오른 사람이었다. 그는 매우 큰 야망을 가지고 있었고, 임진왜란을 일으켰다. 그러나 개인적 기대와는 달리 처참한 패배와 실패를 맛보았다.)
(임진왜란 당시 일어난 전투를 가리킨 지도)
전국시대는 1590년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전국을 통일하면서 끝이났다. 그러나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꿈이 매우 큰 사람이었고, 단순히 일본 전국을 통일하는 것으로 만족하지 않았다. 그는 과거 자신의 나라를 정벌하려고 했던 몽골처럼 일본을 대제국으로 만들고 싶어 했다. 그렇게 해서 명나라를 먹는 다는 이유를 들어 1592년 이른바 임진왜란을 일으켰다. 하지만 임진왜란은 조선 사람들의 거센 저항과 명나라의 지원 그리고 전멸에 가까운 해전에서의 패배로 인해 결국 실패로 끝났고, 전쟁 말기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죽으면서 일본군도 철수했다.
(도쿠가와 이에야스,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임진왜란때 군대를 한 명도 보내지 않았다. 그 결과 히데요시 죽음 이후 정권을 잡을 수 있었다.)
(일본의 쇄국정책,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정권을 잡게 되며 일본은 에도 막부에 들어섰고, 이른바 쇄국정책에 들어섰다. 이 사진은 1945년 미국 국방부에서 만든 다큐멘터리의 한 장면이다.)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죽고난 이후 일본에서는 또 다른 인물이 세력을 장악하기 위해 나섰다. 그가 바로 도쿠가와 이에야스였다. 임진왜란 당시 조선 침략에 군대를 전혀 보내지 않았던 이에야스는 히데요시의 죽음을 틈타서 세력을 확장하나갔다. 1600년 9월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승리하면서 그는 일본의 최고 통치자 자리에 올랐다. 이렇게 하여 260년간 지속되는 에도막부가 시작됐다. 하지만 에도막부를 시작으로 일본은 전국시대부터 해오던 서방과의 무역을 중단했다.
(일본과 미국, 1776년 독립전쟁을 통해 탄생한 소위 민주주의 국가 미국은 일본의 쇄국정책에 큰 타격을 주었다.)
1612년엔 가톨릭 금지령이 내려졌고, 이들에 대한 대대적인 탄압도 시작됐다. 즉 쇄국정책으로 들어간 것이다. 물론 나가사키 같은 곳은 네덜란드 상인들의 무역로를 열어놓기도 했지만, 딱 거기까지였다. 17세기 중반 일본은 포르투갈 선박의 내항을 금지했고, 네덜란드에게는 나가사키에만 문을 열었으며, 중국과의 무역은 나가사키를 통해 그리고 조선과의 무역은 쓰시마를 통해, 류큐(오키나와)하고는 사쓰마를 통해 관계를 맺고 있었다. 200년 뒤 일본의 이런 정책에도 문제가 생기기 시작했다. 19세기 산업혁명을 통해 발전한 서구 문명이 일본에 큰 도전장을 내밀었기 때문이다. 일본의 쇄국정책에 엄청난 충격은 나라는 서구세력이었고, 탄생한지 얼마 되지 않은 나라였다. 바로 미국(Untied States)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