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의 2개월간 올리지 않았네요기다리는게 좀 느리더라도 개인 사정이 있으니 양해 부탁 드립니다.)

 

1919년 식민지 조선에서 일어난 3.1운동은 5.4운동이나 다른 식민지 지배 국가들의 독립운동 세력에게 영향을 미쳤다는 점에서 큰 의의가 있었지만궁극적으로 실패로 끝났다. 1919년 3.1운동이 일어났던 결정적인 이유에는 한일합병 이후 일본이 실행했던 무단통치에 대한 반발이 있었다이렇게 되자 일본은 기존의 무단통치에서 노선을 바꾸게 되었는데이것이 바로 문화통치였다문화통치가 실행되며 출판과 집회 및 결사의 자유가 부분적으로 허용되었고민족자치운동이 전개되기도 했다.

(다이쇼 데모크라시 시대 관련 서적)

 

3.1운동 이후 조선총독부 총독으로 취임한 사이토 미노루 총독은 1927년까지 조선 총독으로 있으면서 문화통치를 실행했다그러나 이 문화통치는 일본의 식민지배 차원에서 전개된 것이었고진정한 목적은 친일파 양성을 통한 조선통치에 있었다일제는 민족대표 33인이었던 최남선이나 이광수를 이용하여 민족개량주의를 선전했고최린과 박영효를 앞세워 민족주의자들을 일본과 타협하도록 설득했다또한 이 과정에서 식민지 조선인에 대한 일본인화도 실행되었다교육을 통해 식민지 조선인들에게 조선은 옛날부터 강대국의 지배를 받아온 열등한 민족이다와 같은 말들을 세뇌시켰던 것이다.

(사이토 미노루, 식민지 조선 초대 총독인 데라우치 집권 이후 자리를 이어받은 그는 1920년대 이른바 식민지 조선에서 문화통치를 실행했다.)


(문화통치의 실상)

 

1920년대 당시 일본이 식민지 조선에게 문화통치를 했듯이당시 일본 내에서도 이른바 다이쇼 데모크라시 시대를 맞이했다일본의 다이쇼 데모크라시는 민중과 정당의 성장을 바탕으로 전개됐다1차 세계대전 당시인 1918년에는 미가 앙등에 따른 생활고에 민중들이 반발하여 쌀 소동이 전국적으로 발생했고이런 대규모 저항의 움직임은 정치적으로 큰 충격을 주기도 했었다이로 인해 조선 총독 출신의 데라우치 마사타케가 이끄는 번벌 내각이 총사퇴했고사태 수습을 위한 대안으로 하라 다카시가 이끄는 정우회 내각에 의해 정당내각이 수립되기에 이르렀다. 1925년에는 25세 이상 남성에게 재산에 상관없이 선거권을 부여하는 보통 선거법이 제정되었으며보통선거법의 제정은 민중의 정치적 요구를 수용함으로써 민주주의의 확대를 가져왔다는 점에서 의미가 컸다.

(산미증식계획의 진실)

 

앞에서 서술한 쌀소동에 대한 일본의 대책은 식민지 조선에 대한 산미증식계획에 있었다일본의 통계자료에 따르면 조선의 쌀 생산량은 늘었다총독부 통계에 의하면 1921년에 1,400만 석이었던 것이 1928년에는 1,700만 석으로 300만 석이 증가했다그러나 실질적인 조선인 1인단 쌀 소비량은 크게 감소하였다왜냐하면 일본으로의 쌀 이출이 1921년 300만 석에서 1928년 700만 석으로 증가했기 때문이다따라서 실질적인 조선인들의 쌀 소비량은 줄어들 수 밖에 없는 구조였다즉 이것이 산미증식계획의 핵심이었다거기다 지주의 숫자도 증가하여 농민들은 점차 빚을 잔뜩 짊어진 채무농민이 되어갔다일본의 경제 구조도 자본주의적 착취에서 벗어나지 못했기에 식민지 조선 만큼은 아니더라도 마르크스가 말한 계급 계층 간의 구조적 불평등은 극심했다.

(일본 공산당, 1922년에 창당된 일본 공산당은 현재까지 일본 정당정치에서 원내정당으로 남아 있다. 다만 예전과는 달리 사회민주주의적 성향으로 개량되었다는 비판을 받기도 한다. 하지만 독도 문제, 위안부 문제 그리고 일본 침략 문제에 있어선 항상 진보적인 시각을 지금까지도 유지하고 있다.)

 

거기다 1917년 레닌의 볼셰비키 혁명이 러시아에서 성공하면서 사회주의 이데올로기가 이 시기부터 주목을 받기도 했으며아나키즘사회주의 등과 같은 진보 이념을 표방하는 집단 및 단체들이 일본에서 생겨나기에 이르렀다. 1922년 7월에는 일본 공산당이 창당되었고일본 공산당은 군주제와 귀족원 폐지, 18세 이상 모든 인간에게 보통 선거권 부여집회·결사·출판의 자유, 1일 8시간 노동 실시실업보험을 포함한 사회보장 및 최저임금제누진소득세에 따른 과세 실시를 슬로건으로 내세우기도 했다.

(박열, 박열은 아나키즘 계열 독립운동가로 1920년대 주로 활동했다. 그러나 관동 대지진 이후 체포되어 22년을 감옥에서 살았다.)


(박열과 가네코 후미코, 이 둘은 혁명 동지이자 연인이었다. 박열은 해방 후 석방되었지만, 감옥살이를 하던 중 가네코는 1926년에 죽었다. 이들의 이야기는 2017년 영화 박열로 개봉하기도 했다.)

 

1921년 11월에는 일본 내 조선인 학생들에 의해 이른바 흑도회가 조직되었고이는 일본 내 유학생들 최초의 이념 서클로서이후 많은 유학생단체들에 큰 영향을 주기도 했었다그리고 당시 흑도회의 회원은 2017년 영화로도 만들어진 주인공 박열도 있었다박열을 비롯한 아나키스트들은 1923년 10월로 예정되어 있던 일본 황태자의 결혼식에 요인을 암살하는 계획을 세우기도 했으며, ‘불령사라는 비밀결사를 조직하고 상하이에 인사를 보내 폭탄을 구입하기도 했었다. 1925년에는 김재봉박헌영 등이 주도해서 식민지 조선에서는 제1차 조선 공산당이 창당되기도 했다따라서 이러한 좌파조직들이 식민지 조선과 일본 내에서 생겨나고 투쟁을 전개하기에 이른 건 자본주의와 식민주의라는 일본 제국주의의 유산이 고스란히 사회 구조적으로 남아 있었기 때문이다.

(1923년 관동 대지진 당시 불타는 일본)

 

또한 다이쇼 데모크라시 시기 일본에서 민주주의가 발전하고여러 좌파조직들이 탄생했다고 해서 그 분위기가 자유로웠던 것도 아니고조선에 대한 식민 지배가 약했던 것도 아니었다. 1923년 9월 1일 일본 관동지방에서는 이른바 대지진이 일어났었다이 지진의 규모는 7.9의 격진이었고일본 사가미만 연안과 보소반도 남부에서는 목조가옥의 50% 정도가 파괴되었으며수도 도쿄에서는 화재로 인한 사망이 4만 4천 명을 초과했다요코하마의 경우 6만 가옥 이상이 전소되었었다이 지진으로 인한 사망자와 행방불명자가 15만 명에 달했고 피해액은 65억 엔으로 추정된다고 한다.

(관동 대지진 당시 자경단의 학살, 이들의 학살로 수천 명의 조선인이 학살당했다.)

 

이런 대지진이 있자일본인들은 증오의 대상을 찾았다그 대상이 바로 일본에 살고 있던 조선인이었다그 다음날인 2일에는 일본에서 계엄령이 선포되어 군대가 치안유지를 담당하였는데관동지방 각지에서는 경찰의 협조아래 재향 군인회청년단소방대 등을 중심으로 자경단이 조직되어 조선인을 무차별 살해 및 학살했다지진 이후 일본인들에게 퍼진 유언비어는 지진 이후 도쿄와 요코하마에서 조선인들이 방화하고우물에 독약을 넣었다는 것이었다따라서 이 유언비어는 일본 사람들이 가지고 있던 조선인에 대한 적대감을 부추겼고학살로 이어졌다학살은 6일간 계속되었으며 6,433명의 조선인 사상자를 발생시켰다.

 

그리고 관동 대지진 이후 학살을 부추겼던 일본 정부는 사회주의자와 아나키스트들에 대한 체포도 진행했는데여기서 박열을 포함한 아나키스트들도 체포했다이렇게 해서 박열과 그의 연인인 가네코 후미코는 사전에 계획했던 암살 계획이 드러나면서 감옥살이를 하게 되었다옥중에서 결혼한 가네코 후미코는 1926년 7월에 사망했고박열은 1945년 10월 27일까지 즉 해방이 되고 난 이후까지 22년 동안 옥살이를 했다.

(일제 치안 유지법, 치안 유지법은 1925년에 제정되어 독립운동가들과 좌파들을 탄압하는 용도로 사용되었다. 그리고 불행하게도 이 치안 유지법은 1948년 여순항쟁 시기 대한민국 정부에서 국가 보안법이라는 법의 기초가 되었다.)

 

그 뿐만이 아니었다. 1925년 일본에선 이른바 치안유지법이라는 것이 통과됐다치안유지법 제1조에 따르면 국체를 변혁 또는 사유재산제도를 부인할 목적으로 결사를 조직한다든가 또는 그 사정을 알고 이에 가입하는 자는 10년 이하의 징역또는 금고에 처한다라고 규정했다이에 따라 식민지 조선 내에 있던 사회주의자들과 일본의 사회주의자들이 덩달아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잡혀 들어갔다.

(다나카 기이치, 다나카 기이치는 중국 대륙 침략에 이데올로기적인 역할을 일본에 부여한 인물이다. 아이러니 하게도 1919년 당시 일본 도쿄에 온 젊은 독립 운동가 여운형과 회담했었는데, 조선인을 전부 학살하겠다는 협박을 시도했었다. 물론 독립운동가 여운형은 이를 논리적으로 반박하여, 그를 놀라게 하기도 했었다.)

 

1926년 12월 다이쇼 천황이 사망한 이후새로운 천황이 일본에 즉위했다쇼와천황이라고 불리기도 하는 이 천황이 바로 제2차 세계대전을 일으킨 히로히토 천황이었다히로히토 천황이 즉위하면서일본의 상황도 점차 바뀌어 갔다. 1927년 4월에 성립한 다나카 기이치 내각은 기존에 중국과 추구했던 협조 외교 대신에 대륙 적극 정책을 전개했다다나카 내각은 동방회의를 개최하여 만몽지역을 중국 본토에서 분리하여 일본의 세력 하에 두기로 결정했다.

(장작림, 장작림은 1920년대 만주에 있던 중국 군벌이다. 일본의 계획으로 폭사하게 된다.)


(장작림 폭사 사건 당시 열차, 장작림이 사망했던 열차다.)


(장학량, 장쉐량이라고도 불리는 그는 장작림의 아들이다. 일본에 의해 아버지를 잃은 그는 반일감정이 강했고, 1930년대 일본과의 전투를 상대적으로 피하고자 했던 장제스에게 반감이 강했다. 따라서 1936년 시안사건을 주도해 장제스로 하여금 제2차 국공합작을 성사시키는데 기여했다.)

 

당시 중국 국민당의 지도자 장제스가 북벌을 진행하자 이에 대한 맞대응으로 중국 산동으로 출병하여 무력 대응을 하기도 했으며, 1928년에는 만주 군벌 장작림이 장제스에게 접근하는 것을 막기 위해 관동군의 계획에 따라 철도 폭파 사고를 위장한 장작림 암살을 단행했다이게 바로 장작림 폭사 사건이었다중국 산동 지역에 출동한 일본 일본군은 총 5천 명이었고중국군과의 전투 도중 발생한 사상자 50명 이내였다이에 반해 중국은 민간인을 포함해 최소 1000명 이상의 사상자가 나왔고, 1,700명이 일본군의 포로로 붙잡혔다.

(중국 대륙에 진입한 일본군, 일본은 1920년대부터 노골적으로 중국 대륙에 침략의 마수를 드러내기 시작했다.)

 

이처럼 다이쇼 시대가 끝난 이후 일본은 중국 대륙에 대한 야욕을 조금씩 드러내기 시작했다거기다 1925년 제정된 치안유지법을 통해 사회주의자와 반체제 인사들에 대한 탄압을 효율적으로 할 수 있었다1차 세계대전 이후 전후재건에 착수했던 몇몇 유럽 국가들은 점차 경제를 회복시켰던 반면일본은 불황을 겪었다. 1923년에 일어난 관동대지진은 그런 일본 경제에 악영향을 끼쳤다. 1920년대의 일본 경제는 그러했다그러던 1931년 9월 18일 일본 제국주의자들은 드디어 중국 대륙에 대한 침략의 마수를 드러내는데 그것이 바로 만주사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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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리강화회의 당시 임시정부 대표단, 앞줄의 한인은 여운형의 동생 여운홍과 우사 김규식이다. 뒷줄에는 조소앙과 황기환도 있다.)

 

1918년 11월 11일 제1차 세계대전은 독일과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패배로 끝났다1차 세계대전이 끝난 이후 승전국 자리에 오른 미국과 영국프랑스는 전후 문제를 논의하게 되었고이에 따라 1919년 1월 파리강화회의와 6월 베르사유 조약을 통해 합의를 봤다당시 미국의 대통령이었던 미국의 우드로 윌슨(Woodrow Wilson)은 이른바 민족자결주의 즉 각 민족이 스스로의 의지에 따라서 그 귀속과 정치 조직운명을 결정하고 타민족이나 타국가의 간섭을 받지 않을 것을 천명한 집단적 권리를 주장했고이는 식민지 지배를 받고 있던 나라들에게 상당한 영향을 주었다베트남의 국부로 칭송받고 있는 호치민이나 중국의 마오쩌둥 등이 이에 감명 받기도 했다그러나 윌슨의 민족자결주의는 사실상 서구 제국주의 국가들이 패권을 나눠먹기 위한 용도로 사용됐다.

 

윌슨의 민족자결주의는 1910년부터 일본의 식민지가 된 조선의 지식인들을 자극시켰다이에 따라 신한청년당의 여운형은 김규식을 파리강화회의에 보내 조선의 독립을 요구했고그 이후 신한청년당 단원이었던 장덕수는 일본 도쿄로 건너가 유학생들과 접촉하여 2월 8일 이광수를 포함한 200명의 학생들과 함께 2.8독립선언식을 가졌다이것은 식민지 조선 전역과 만주 연해주에도 소식이 전해졌고, 1919년 3월 1일 오후 2시 서울 종로 태화관에서 민족대표 33인 가운데 29명이 참석하여 독립선언식을 가지게 되며전국적인 항전으로 이어졌다이것이 바로 3.1운동의 발단이었다.

(3.1운동 당시 종로에서 있던 만세시위)

 

3.1운동은 서울 외에도 평양진남포안주의주선천원산 등 주요도시에서 동시다발적으로 독립선언과 만세시위가 전개되는 양상을 보였다이렇게 시작된 3.1운동은 3월 중순이 되어 청년학생교사나 지식인만이 참가하는 시위가 아닌 도시노동자 및 상인층이 참가하고 그들에 의해 전국 소도시로 확산되었으며그 시기에는 중남부 지방면 단위 이하의 농촌 지역 심지어 산간벽촌에 이르기까지 독립만세의 함성이 울려 퍼졌다. 3월 22일 서울에서 노동자와 청년 학생들이 준비한 노동자대회에서 많은 노동자들이 참여해 시위를 전개했다이 시위는 이후 서울 시가지 시위의 기폭제가 되어 23일 이후 매일 밤 시내 도처에서 게릴라식 시위가 벌어졌다. 26, 27일에는 전차 종업원경성철도 노동자만철 경성관리국 노동자들도 파업에 돌입하기도 했다.

(3.1운동 관련 상상화, 유관순 열사와 이화학당 학생들을 표현한 게 인상적이다.)

 

이렇게 시위가 전국적으로 일어나자 일제는 이 시위를 강력하게 진압했다. 3월 1일 조선 총독 하세가와는 추호의 가차도 없이 엄중 처단한다는 협박문을 발표하고 발포 명령을 내렸다조선에 주둔하고 있던 2개 사단 즉 23,000명의 일본군이 있었다이걸로는 시위 진압에 부족하다 느낀 일제는 3.1운동을 진압하기 위해 4월 들어 일본 본토에서 헌병과 보병부대를 증파시켰으며, 3월 중순 이후 시간이 흐를수록 시위 도중 군경의 발포로 인한 사망자가 크게 늘어났고이를 진압하는 일본 측의 잔인함도 극심해졌다일례로 3.1운동에 적극적으로 참가했던 유관순과 그 동료들은 서대문형무소에서 극심한 고문을 받았었다. 3.1운동에서 얼마나 많은 사상자가 나왔는지는 아직 밝혀지지는 않았지만일제 측 자료에 따르면 1919년 3월 이후 1년간 피살자를 350명 혹은 630부상자는 800명 혹은 1900명으로 기록하고 있고투옥된 이들은 8000~9000명으로 기록하고 있다.

(제암리 학살, 1919년 4월 15일 일본은 수원 제암리에서 민간인 학살을 벌였다.)

 

계급과 계층을 망라하여 전 조선민중이 참가했던 3.1운동은 일본 제국주의자들의 무자비한 진압으로 끝났다. 3.1운동 진압 과정에서 일본은 민간인 학살을 저지르기도 했는데그 학살이 바로 1919년 4월 15일 수원 제암리에서 벌어진 제암리 학살이다이 제암리 학살로 30명 이상의 민간인이 일본군에 의해 학살당했다. 3.1운동은 비록 일본의 진압으로 끝이 났지만세계적인 식민지 해방 운동에 적잖은 영향을 주었다. 3.1운동 이후 중국에선 5.4운동이 일어났고인도의 독립운동가 간디가 이에 영향을 받기도 했으며아일랜드 독립운동에도 영향을 주었다.

(5.4 운동, 1919년 3.1운동의 영향을 받아 중국에선 외세와 일본 제국주의를 배쳑하고자 5.4운동이 일어났다.)

 

3.1운동 이후 일본은 한일합병 이후 실행해오던 무단통치에서 이른바 문화통치로 노선을 바꾸었다물론 이것 또한 독립운동에 대한 탄압과 경찰력 동원에 있어선 큰 차이는 없었지만 말이다. 3.1운동 이후 중국 상하이에선 한국 독립운동사에 있어서 상징적인 사건이 일어났다바로 대한민국임시정부가 탄생한 것이다또한 3.1운동 이후 만주 지역의 민족운동가들은 본격적인 무장투쟁을 준비했다. 1919년 1월에 압록강 이북 서간도 지역에서 발족된 한족회는 서로군정서라는 군정부로 개편되었다두만강 이북 북간도 지역에는 간민회라는 자치단체가 대한국민회로 이름을 고쳤고이들은 국민회군이라는 독립군부대를 편성했다또 북간도 왕청현 지역에서는 대종교 세력이 북로군정서라는 부대를 편성했다.

(홍범도 장군, 그는 1920년 봉오동 전투를 승리로 이끌었다.)


(영화 봉오동, 봉오동 전투는 2019년 영화로도 만들어졌다.)

 

독립군 부대들은 1920년부터 국내 진공 작전을 개시했다. 1920년 기준으로 독립군이 함남·함북·평북에 침입해 전개한 전투는 1,651건 정도로 동원된 독립군만 해도 4,643명으로 집계된다이처럼 독립군이 자주 국경을 넘어 들어왔기에 일본은 국경 3도에 군사 및 경찰 경비력을 강화시켰다이렇게 독립군들이 식민지의 국경을 공격하자 일본군은 1920년 6월 북간도의 독립군을 추격하기 위해 250명의 추격대를 편성하여 훈춘 인근의 봉오동 쪽으로 진격했었다여기서 정보를 입수한 홍범도의 대한독립군과 최진동의 군무도독부안무의 국민회군이홍수의 대한신민단 등은 6월 7일 일본군을 봉오동 골짜기로 유인하여 섬멸했다당시 독립신문은 이 전투에서 일본군이 157명 이상이 사살되었다고 보도했다전사자 수치에 대한 논란이 있긴 하지만분명한건 일본군이 이 전투에서 패배했다는 사실이다.

(김좌진 장군, 김좌진 장군은 1920년 청산리 전투를 승리로 이끈 명장이다. 깡패이자 대한민국 국회의원을 지낸 김두한이 김좌진의 아들이라는 얘기가 있으나, 확실한 사실은 아닌것으로 확인되고 있다.)


(청산리 전투 상상도, 박정희 시절인 1970년대 국가사업 차원에서 나온 그림이다.)

 

봉오동 전투 이후 일본군은 근본적인 대책이 필요하다 생각한 나머지 만주의 군벌인 장작림에 협조하여 이른바 훈춘 사건을 조작했다훈춘 사건을 구실로 일본은 약 2만 명의 대병력을 서북간도로 침입시켰다이러자 독립군 부대들은 일본군과의 정면승부를 피하며 은신했다이후 일본군의 동태를 파악한 독립군은 김좌진 장군의 지휘아래 일본군을 깊숙이 유인하여 섬멸했고홍범도의 독립군 부대도 이에 협력하여 일본군을 섬멸했다이것이 바로 청산리 대첩 또는 청산리 전투다청산리 전투에서 독립군들은 적백내전 당시 러시아에서 철수하던 체코군으로부터 사들인 총기로 무장했다그리고 청산리 전투에서 이들은 대략 1,000명 가까이 되는 일본군을 섬멸했다. 1920년에 있던 봉오동 전투와 청산리 전투는 독립운동사에 있어서 대승으로 기록되었다.

(청산리 전투를 승리로 이끌었던 북로군정서군)

 

봉오동 전투와 청산리 전투에서 대패한 일본군은 인근 지역에서 소름끼치는 학살을 전개했는데그것이 바로 간도참변이다조선주둔군 예하 19사단을 주축으로 한 일본군 부대는 이에 대한 보복으로 간도에서 삶의 터전을 일구어가던 많은 한인들을 학살했고그들의 마을과 가옥을 불태웠다당시 파견된 조선군은 작전을 원활히 수행하기 위해 압도적인 군사력을 한인에게 과시하여 저항의지를 차단하고독립군을 근거지에서 분리하기 위해 무력시위와 최신무기를 동원하였다.

(간도참변, 당시 일본군의 학살로 수천 명의 한인이 목숨을 잃었다.)


(간도참변 당시 한인 독립군을 총살하는 일본군)

 

간도참변 당시 일본군의 군사작전은 간도지방불령선인초토계획서에 입안한 것이었다위에서 상술한 조선주둔군 19사단은 10월 14일 한인마을에 대한 제1차 토벌을 개시했고이들은 한인마을들을 포위 습격했다. 10월 22일에는 제2차 토벌을 개시했다. 2차 토벌 당시 일본군은 “600명의 독립군이 있다는 것을 첩보하여 10얼 28일 부근 학교 및 가옥을 소각했다간도 지역은 일본군이 군사작전을 전개함에 따라 학살의 장으로 변했다간도참변은 1920년 10월부터 1921년 5월까지 북간도와 서간도 일대에서 전개됐다.

(간도참변 당시 학살당한 조선 양민의 시신)

 

대략 2만 명 이상의 일본군이 독립군의 근거지를 파괴하고수천 명을 학살했다. 1920년 10월과 11월 사이 약 2개월 동안 북간도의 8개현에서 3,600여 명이 피살되었으며, 3,200여 채의 가옥과 41채의 학교, 16채의 교화가 불에 탔다부녀자들과 아이들도 학살당했으며부녀자들 중에는 일본군에게 강간당한 이들도 적지 않았다. 2015년 당시 국내에서 1,000만 이상이 관람했던 영화 암살에서는 전지현이 연기했던 안옥윤은 간도참변에 대해 얘기하는 약산 김원봉에게 다음과 같은 대사를 한다.

 

저희 어머니도 그때 총에 맞고 돌아가셨습니다운이 좋으셨죠다른 사람들은 칼에 찔려 죽고몽둥이에 맞아 죽고목이 졸려 죽고불에 타서 죽고생매장 당해 죽고솟에 삶기도 하고그렇게 3400명을 죽였습니다. 27일 동안

 

물론 이것은 픽션이 약간 가미되었을 수는 있지만간도참변의 잔혹함을 알기에는 아마 충분할 것이다이렇듯 간도참변 당시 일본군의 학살은 상상을 초월했다. ‘일제의 만주침략과 간도참변이라는 연구 논문을 쓴 조원기는 간도참변은 단지 간도지역 한인 및 항일운동에 대한 탄압에 그치지 않고 일제의 만주침략을 위한 구도에서 감행된 것이었다.”라고 밝힌다즉 1920년 전후 만주독립군의 활동을 억제하거나한인사회의 파괴만을 목적으로 일어난 군사침략만이 아니라만주침략이라는 계획아래 추진된 학살만행이라는 것이 그의 주장이다.

 

간도침략의 1차 목적은 기존 한인 사회를 해체하고 한인 학살에 그 목적이 있었던 것은 분명하다1차 세계대전이 얼마 끝나지 않은 1920년 당시 안정적인 국제정세하에서 일제가 만주를 무력으로 점령하는 것은 당연히 불가능하겠지만대신 일본은 간도침공을 통해 자신들의 만주에 대한 군사적 지배력을 대외에 과시하였고간도를 사회적경제적으로 지배하기 시작하여 만주침략의 전초기지로 활용할 수 있게 되었다. 1931년 만주사변과 1932년 괴뢰 만주국 건설이라는 이후의 행보를 생각해보았을 대간도 참변은 즉 그러한 군사적 행동의 신호탄이라고도 볼 수 있을 것이다.

(다이쇼데모크라시 관련 서적)

 

일제는 1919년 3.1운동을 무자비하게 진압했고, 1920년 봉오동 전투와 청산리 전투의 패배에 대한 보복으로 간도 참변으로 조선인 수천 명을 학살했다그러나 일본은 다이쇼 데모크라시라고 하는 흐름과 더불어 사회적으로 또 다른 문제에 시달리기도 했다그것은 바로 1917년 러시아 혁명 이후 일본에 영향을 끼친 좌파 이데올로기의 성장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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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국주의 열강을 풍자한 그림)

 

청나라와 러시아를 전쟁으로 이기고 조선까지 식민 지배를 하게 된 일본은 한일합병을 한지 불과 4년 만에 또 다른 전쟁에 참전하게 되었다그 전쟁이 바로 제1차 세계대전이다일본이 메이지 유신을 통해 탈아입구를 시도하던 시기 유럽의 정세는 1871년 독일의 오토 폰 비스마르크가 통일을 이룩하면서 점차 불균형이 생기기 시작했다비스마르크는 식민 지배를 옹호하지도 않았고유럽 평화의 중재자 역할을 자임했지만그가 물러나고 나서 독일을 통치하게 된 빌헬름 2세는 식민지 팽창에 나서게 되었다당시 제국주의 국가들에서 선두를 다투던 영국과 프랑스는 사실상 아시아와 아프리카 등지에서 수많은 식민지를 가지고 있었고나폴레옹 보나파르트가 잠자는 사자라 부르던 중국(당시 청나라)는 아편전쟁 이후 힘을 탕진했다그 결과 1911년 신해혁명이 일어나 1912년 중화민국이 탄생하게 된다.

(사라예보 사건, 1914년 6월 28일 세르비아의 한 민족주의 청년이 오스트리아 황태자에게 쏜 권총은 제1차 세계대전의 신호탄이 되었다.)

 

1900년 중국에서 의화단 운동이 일어나자 독일미국영국프랑스러시아일본 등의 제국주의 국가들은 연합군을 만들어 진압에 나섰다통일 이후 강대국으로 부상한 독일과 영국 프랑스 러시아 등은 유럽의 화약고라고 불린 발칸반도에서 패권경쟁이 가속화되었다즉 아프리카의 유리한 지점을 둘러싼 강대국들의 다툼과 1912~1913년의 발칸전쟁으로 초래된 불안은 제1차 세계대전의 기운을 예견하는 것만 같았다. 1914년 6월 28일 세르비아의 한 민족주의 성향의 청년이 오스트리아의 페르디난츠 황제를 사살하면서유럽 각국의 긴장감은 높아졌다이 암살사건을 계기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은 세르비아에게 선전포고를 했다그러자 세르비아의 동맹국 러시아 제국이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에게 선전포고를 했고오스트리아의 동맹국인 독일이 러시아와 영국 프랑스에게 선전포고를 감행했다이렇게 해서 제1차 세계대전이 1914년에 시작된 것이다.

(돌격하는 프랑스 보병, 제1차 세계대전 당시 수많은 나라들이 적진에 배치된 기관총을 향해 이런식의 공격을 감행했다. 그 결과 엄청난 학살로 이어지기도 했다.)

 

1차 세계대전은 참으로 끔찍한 전쟁이었다이 전쟁에서 현재 우리가 사용하거나 국제법상으로 금지한 무기들의 기본적 형태가 만들어졌기 때문이다탱크전투기독가스지뢰기관총 등 과학 기술력을 통해 발전된 무기의 현대화는 전쟁 자체를 대학살극으로 바꿨다이 전쟁으로 최소 1,000만 명이 사망하고 2,000만 명이 부상당했다그러나 이 전쟁에서 적잖은 이익을 본 나라가 있었다그 나라가 바로 유럽 전선의 지구 반대편에 있던 신흥강국 일본이었다.

(제1차 세계대전을 묘사한 만화)

 

지난번 러일전쟁편에서 다뤘듯이당시 일본은 영일동맹을 유지하고 있었다따라서 제1차 세계대전이 일어나자 일본은 유럽 전선에는 직접 연루되지 않았지만 그해 8월 23일에 영일동맹을 구실로 독일에 선전포고를 했다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영국과 프랑스는 적국인 독일 식민지에 있는 수비대를 제압하기 위한 조치에 들어갔다. 1915년 10월 일본은 독일 식민지인 마리아나 군도와 마셜 군도 그리고 캐롤라인 군도를 점령했다그리고 이 섬들은 전쟁이 끝나가던 1918년 일본의 위임통치령 하에 들어갔고그로부터 25년 뒤에 태평양 전쟁에서 일본과 미국이 섬 쟁탈전을 하는 곳으로 바뀐다.

(1914년에서 1915년 사이 일본이 점령한 독일측 식민지)


(칭다오 지도)

 

뿐만 아니라 일본은 독일 식민지였던 중국 영토 칭다오를 공격했다대략 3,000명의 독일 제국 해병대가 지키고 있던 칭다오는 어떤 공격군도 쉽게 넘기 어려운 대단한 군사적 장애물이었다요행을 바라지 않았던 일본은 5만 명의 병력을 칭다오에 상륙시켜 계획적인 포위공격을 시작했다일본이 칭다오에 대한 포위공격을 시작하자텐진에 조파하고 있던 영국군 사우스웨일즈 국경수비연대 2대대와 시크 연대 36대대가 일본군과 합류하여 독일군을 공격했다결국 일본은 10년 전 러일전쟁 당시 여순에서 러시아의 요새를 정복할 때처럼 11인치 곡사포로 포격을 개시했다. 11월 7일 아침 총독으로 근무하던 해군 장교 알프레트 마이어 발데크 대령이 부대를 포기하면서 일본의 승리로 끝이났다비록 발데크의 해병대가 200명이 전사했던 반면 일본군은 1,455명이나 전사했지만 말이다.

(칭다오 시가지를 향해 포격 중인 45식 240mm 공성포, 러일전쟁 당시 화력을 무시하고 보병의 총검에만 의존하여 무리한 공격을 하다가 엄청난 사상자를 내었던 것을 경험삼아 개발하였다.)


(칭다오 주둔 독일 제3해군보병대대 소속의 병사들)

 

이처럼 영일동맹을 구실로 제1차 세계대전에 참전한 일본은 영토 확장과 경제적 이익 획득이라는 일거양득의 기회를 얻었었다. 1915년 1월 일본은 중국 정부에 21개조 요구를 하여 만주와 몽고산동성에 대한 독점적 이권을 확보하고 중국 정부를 자신의 세력하에 두려고 했다즉 일본은 이시기부터 중국에 대한 제국주의적 야욕을 드러내고 있었던 것이다1차 세계대전은 전쟁 초기 독일의 슐리펜 작전으로 프랑스가 굴복할 것처럼 보였지만비스마르크 통일전쟁시기 굴욕을 잊지 못한 프랑스는 의외로 잘 싸웠다그 바람에 슐리펜 작전에 차질이 생겨 양면전선을 치르게 된 독일은 전쟁 초기부터 1917년까지 대대적인 교착상태에 놓인 참호전을 벌였다.

(러시아 혁명을 지도한 블라디미르 레닌)

 

그러던 1917년 전 세계를 뒤흔들 사건이 일어났다바로 러시아 혁명이었다1차 세계대전으로 경제상황이 심각하던 러시아에서 사회주의자들이 일어난 혁명으로 차르 체제가 타도되었다그 이후 10월 혁명이 일어나 인류 최초의 사회주의 체제가 역사에 등장했다러시아의 혁명가 블라디미르 레닌이 건설한 혁명 러시아는 1918년 브레스크 리토프스크 조약을 맺고1차 세계대전에서 빠졌다그러나 그들이 제1차 세계대전에서 빠지기가 무섭게 서구 제국주의 세력은 사회주의 러시아를 침략해 들어왔다그리하여 러시아에선 적백내전이 발발하게 된다적백내전이 발발하자 일본은 시베리아에 출병을 감행했다일본의 시베리아 출병은 적백내전이 끝날 때까지 이어졌다.

(일본의 신흥부자 나라킨을 묘사한 그림, 이들은 제1차 세계대전이라는 지구반대편 전쟁을 통해 성장한 일본의 부유층들이다. 이 그림에선 나라킨이 자신의 신발을 찾으로 100엔짜리 지폐에 불을 지피는데, 당시 대졸 남성의 평균 월급이 50엔이었다. 그러니까 이들은 엄청나게 많은 재산과 자본을 축적한 이들이었던 것이다.)


(일본의 나라킨, 이원복의 먼나라 이웃나라에서도 이런식으로 묘사됐다.)

 

1차 세계대전을 거치면서 일본의 자본주의는 비약적으로 성장했다1차 세계대전으로 제국주의 열강들이 유럽에서 전쟁을 치르게 되면서 일본은 아시아에서의 무역을 사실상 독점했다무역에서 수출이 수입을 초과하게 되었고해운업과 조선업도 호황을 이룩했다공장의 증설과 신설투자의 확대로 인한 호경기가 이어지면서 나라킨이라고 불리는 신흥부자들이 탄생하기도 했다또한 중화학공업이 발달하면서 1918년에는 공업 생산액이 농업 생산액을 초과하여 아시아 1위의 공업국이 되었다.

 

일본이 전쟁으로 돈을 벌고 있는 사이 제1차 세계대전도 끝나갔다형식적으로 중립을 지키던 미국이 계속되는 독일 U-보트의 상선 공격과 치머만 전보로 인해 분노하면서 전쟁에 참전하게 됐다이렇게 되면서 영국과 프랑스는 미국이라는 최대의 동맹을 얻을 수 있었다러시아 혁명 이후 러시아가 전쟁에 빠지면서 제1차 세계대전의 막바지 전황이 독일에게 유리하게 전게되기도 했었다독일은 병력의 대다수를 서부전선으로 모아 총공격에 나섰지만미국이 대규모의 병력을 영국과 프랑스에게 지원하면서 독일은 다시 패배하기 시작했다그렇게 해서 1918년 11월 독일은 연합국에게 항복을 선언했다.

(파리강화회의,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난 이후 강대국들은 전후문제를 논의했다.)

 

1919년 1월 파리의 베르사유 궁전에서 강화회의가 열렸다여기서 일본은 산동성에 대한 이권의 획득과 적도 이북 남양군도 영유를 요구했다즉 일본은 승전국 위치에 있었던 것이다그러나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나면서 일본은 제국주의의 모순이 노출되기 시작했다전쟁 중의 호경기로 산업 생산이 확대됨에 따라 노동자의 수가 크게 늘어났지만 1920년대에는 경기 침체로 노동쟁의가 크게 증가했다뿐만 아니라 미국 윌슨 대통령이 민족자결주의를 표방하면서 식민지 국가에선 독립운동의 물결이 일어났다마찬가지로 1910년 일본이 강제로 병합한 식민지 조선에서도 독립운동이 바람이 불기 시작했다그것은 바로 3.1 운동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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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합병과 무단통치

(1910년 경복궁 근정전에 걸린 일장기)

 

19세기 근대화 성공 이후 일본의 산업은 발전했다일본의 산업화는 청일전쟁을 계기로 비약적 발전을 이룩했고전쟁으로 인한 대규모 군수 수요가 창출되었다또한 전쟁 승리의 대가로 청으로부터 받은 대규모 배상금을 산업자본으로 활용하기도 했다특히나 러일전쟁을 거치면서 일본의 경제는 중공업 부문에 있어서 발전이 두드러졌다일본의 대표적인 제철소였던 야하타 제철소는 1906년 국내 철강 생산의 90%를 차지했다. 1907년엔 민간 제철소인 니혼 제철소도 건설되었다그 외에도 조선업과 공작기계 생산도 증가했다.

 

이와 동시에 일본은 다른 나라를 합병하고자 했다그 나라가 바로 고종황제가 다스리는 조선이었다사실 1894년 청일전쟁과 1904년 러일전쟁을 치렀던 일본이 이 강대국들과 전쟁을 벌인 이유는 명확했다바로 그들(청나라러시아일본사이에 있는 국가 조선을 정치경제군사적으로 독점하기 위해서였다러일전쟁을 치르는 과정에서 일본은 조선에 대한 정치적 독점권을 틀어쥐었다그들은 먼저 외무·내무 그리고 재무에 고문정치를 시도했다그리고 1905년 고종황제에게 어떠한 조약을 체결하게 했다그 조약이 바로 을사조약(을사늑약이라고도 한다)이다.

(일본의 가츠라와 미국의 테프트, 당시 제국주의 국가였던 일본과 미국은 서로의 제국주의적 이해관계에 따라 타국에 대한 식민지 지배를 가속화했다.)

 

러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은 1905년 7월 당시 제국주의 국가였던 미국과 비밀협약을 맺었었다그 협약은 가츠라 테프트 밀약으로 미국이 필리핀 지배를 인정하는 대신 일본의 한국 보호권 확립을 찬성하는 것이 주된 내용이었다두 제국주의 국가끼리 양국의 식민지배에 대해 합의를 본 것이다이렇게 합의를 본 일본은 대한제국의 내부대신인 이완용과 이지용 등의 을사오적을 매수하여 고종황제를 협박했고반대하는 국민을 총칼로 제압하면서 을사보호조약을 강제로 체결하게 했다이렇게 하여 일본은 조선에 대한 식민지 지배권을 사실상 확보하게 된 것이다.

(헤이그 특사를 보도한 만국평화회의 담보)

 

을사조약에 따라 일본은 이토 히로부미를 초대 통감으로 하는 통감부를 서울에 두었다이것은 대한제국의 외교사무를 관리한다는 구실이었지만실제로는 그 안에 경무부·농상공부·총무부 등을 둠으로써조선의 내정 전체를 관장한 것이나 다르지 않았다비록 을사조약이 체결되었지만이러한 일을 국제사회에 알리기 위해 조선의 황실은 미국 등지와 만국평화회의가 열리는 네덜란드 헤이그 등에 밀사를 보냈다그러나 이것은 별로 성과를 내지 못했다일단 미국부터가 일본의 한반도 지배를 원조하는 처지였고평화화의 또한 이상설이준 등의 활동에도 불구하고 일본을 원조하는 영국 등의 방해가 있었기 때문이었다거기다 헤이그 밀사사건이 있자 일본은 고종황제를 강제로 퇴위시키고 대신 병약한 순종을 즉위시켰으며조선으로 하여금 정미7조약을 강제로 체결하게 했다.

(1907년 당시 일본에 맞서 들고 일어난 조선의 의병들)


고종황제의 퇴위와 정미7조약 체결 등이 있자 한반도에서는 해산 군인을 중심으로 이른바 의병전쟁이 전국적으로 본격화되기 시작했다사실 1894년 동학농민전쟁이 진압당한 이후에도 을미의병과 같은 의병전쟁이 강원도와 충청도전라도 그리고 경상도에서도 있었지만크게 힘을 발휘하지 못했었다그러나 정미7조약 체결 이후엔 해산당한 관군 중심의 병사들이 의병에 가담하면서 의병전력이 한층 강화되었고여기에 유생이나 농민 중심의 의병군이 병사농민 중심의 의병으로 바뀌어가면서 의병전쟁은 독립전쟁의 성격을 띄게 되었다의병전쟁은 대략 2년 동안 격렬하게 일어났다. 1908년 3월 이인영과 허위가 지휘하는 10,000명의 전국 의병군은 서울 탈환작전을 시도하기도 했었다화승총으로 무장한 그들은 신식소총으로 무장한 일본군을 유격전으로 고전하게 만들기도 했지만현대식 무기로 무장한 일본군에게 당연히 밀리게 되었다.

 

조선반도 내에서 의병운동이 대대적으로 일어나자 1909년 일본은 이른바 남한 대토벌작전을 벌여 의병들을 섬멸하고자 했다이 작전에서 일본은 전남 전체를 육로와 해상으로 완전히 포위하여 의병을 몰살해나갔다그리고 모든 도민의 통행을 금지하여 이에 위반하는 자는 가차없이 사살했다약 2개월간에 걸쳐 감행된 일본군의 이 작전으로 심남일 등을 포함한 의병장이 사살당하고박도경 등의 의병장이 체포되어 처형되는 등 이 지역 의병은 거의 섬멸되다시피 했다결국 의병운동은 일본에 의해 진압당했다의병전쟁은 참으로 큰 저항이었다. 1908년 후반기에만도 의병과 일본군이 치른 전투횟수는 1900여회나 되었고전쟁에 참가했던 의병의 수도 83,000명이나 되었다나중에 이들 중 일부는 나라를 잃은 뒤 간도로 가서 망명정부를 세워 독립군을 양성하게 된다.

(하얼빈역에서 이토 히로부미를 처단하는 안중근 의거 기록화)

 

을사조약과 정미7조약을 강제로 체결하게 한 이토 히로부미는 조선에 대한 식민지화를 추구했던 인물로 일본 제국주의자들의 상징과도 같은 인물이었다그러나 1909년 10월 26일 만주 하일빈을 들렸던 이토 히로부미는 그날 독립운동가 안중근이 쏜 3발의 권총을 맞았다안중근이 쏜 총탄 3발은 이토 히로부미의 가슴을 통과했다이것이 제국주의자 이토 히로부미의 최후였다이토 히로부미를 사살한 안중근은 거사 이후 5개월 만인 1910년 3월 26일 여순감옥에서 생을 마감했다.

(도산 안창호, 그는 독립운동가이자 교육자다. 그는 한일합방 이전 미주지역과 국내에서 독립운동을 전개했었고, 그 이후에도 독립운동가와 교육자로서의 삶을 살았다.)

 

이처럼 을사조약이 강제로 체결된 이후 조선인들은 한반도와 해외에서 독립운동을 벌였다그 외에도 1907년에 조직된 신민회같은 독립운동 단체들도 있었다도산 안창호의 경우 국내와 미주지역에서 독립운동을 전개했었다그러나 을사조약 이후 조선에 손을 뻣은 일본 제국주의의 영향력은 점점 막강해졌다. 1910년 5월 대한제국 시기 조선의 신문사였던 대한매일신보는 강제 매각되어 일제의 수중으로 넘어가버렸고, 1910년 8월 29일 공식적으로 한일합병이 선언되면서 1392년 태조 이성계가 세운 나라 조선은 역사 속으로 사라져버렸다한일합방의 소식을 들었던 조선의 지식인 매천 황현은 망국의 책임을 통감하며 자결을 선택하기도 했다자결하기 전 그가 남겼던 말이 있다그 구절을 인용하자면 다음과 같다.

(매천 황현, 그는 조선 후기 학자이자 독립운동가로 1910년 일제에 의해 국권피탈이 되자 국치(國恥)를 통분하며 절명시(絶命詩) 4편을 남기고 음독 순국하였다)

 

무궁화 삼천리 강산이 궁지에 빠졌구나.

책을 덮고 지난날을 돌이켜보니 글 아는 사람 구실하기 어렵다.

인을 이루었을 뿐 충을 이루지 못한데다 겨우 순절할 뿐이요,

의병을 일으키지 못했으니 부끄럽기 짝이 없다.

 

1910년 조선을 완벽히 식민지화한 일본은 이른바 무단통치를 실행했다무단통치란 지배자 일본이 조선의 정치경제사회문화 등 모든 부문에서 강점정책을 실행하던 통치였다그들은 조선총독부를 만들어 조선의 행정권입법권 그리고 군대사용권 등을 모두 가지고 있었고일본 헌병이 경찰력을 대신했다말 그대로 이시기 일본은 조선의 행정권·입법권·군대사용권 등을 모두 행사하는 전제군주와 같은 절대 권력자였던 것이다일제는 전국의 지방조직을 13도 12부 317군으로 편제하여도지사에 상당수 친일 조선인을 등용했다.

(일제가 토지조사를 위해 측량하는 모습. 일제는 근대적 토지소유 관계를 정립한다는 명분으로 토지조사 사업을 실시해 막대한 토지를 조선총독부 소유로 만들었다.)

 

조선의 식민지 지배기관인 조선총독부는 1910년 이른바 임시토지조사국을 설치하고 이른바 토지조사사업을 진행했다그러나 이것은 말이 좋아 토지조사사업이었지실제로는 한국농민들의 당을 강제로 빼앗기 위한 합법적인 절차일 뿐이었다총독부는 신고되지 않은 농민들의 땅을 모조리 총독부 소속의 국유지로 만들었고그 땅들을 저렴한 가격으로 일본인들에게 팔았다그리하여 일본인들은 조선농민들을 소작농으로 부리는 대지주가 될 수 있었다쉽게 말해 토지조사사업은 조선을 경제적으로 장악하고자 했던 일본 제국주의자들의 정책이었을 뿐이었다.

(조선총독부, 조선총독부는 35년간 일제 식민지배의 상징과도 같은 기관이다. 이 건물은 1995년에 최종적으로 철거되며 사라졌다.)

 

1911년 1월 일제는 양기탁임치정주진수안태국 등 신민회의 주요 간부를 체포했다그리고 그해 9월 이른바 ‘105인 사건을 발생하여신민회 인사들을 대규모적으로 검거했다. 105인 사건의 공식 명칭은 데라우치 총독 모살미수사건이었다이 사건을 빌미로 일제는 서북 지방을 중심으로 애국지사 600~700여 명을 검거했다. 1912년 6월 28일 경성 지방법원에서 105인 사건의 공식 재판이 진행되었는데검거한 700명 중에 123명을 기소했다그런데 이 사건의 재판은 처음부터 삐걱거렸다왜냐하면 첫 번째 피의자였던 신효범의 경우 모든 혐의를 부인하고 나섰기 때문이었다그는 신민회라는 단체에 대해 들어본 적도 없고경찰 앞에서 모든 혐의를 인정한 것은 가혹한 고문 때문이었다고 진술했다.

(105인 사건 관련한 다큐 영상 사진)

 

뒷날 105인 사건의 관련자들은 당시 경찰이 사용한 고문 방법이 70여 가지가 넘었고하나같이 삶과 죽음을 오갈 정도로 혹독했다고 증언했다결국 105인 사건의 재판은 사건을 구성하는 기초적인 사실 관계 어느 하나 제대로 맞아떨어지는 것이 없었다혐의를 입증할 제대로 된 물증도 없었다쉽게 말해 형편없는 조작사건이었다말 그대로 105인 사건은 3류 소설만도 못하는 형편없는 조작 사건이었다.

(욱일승천기를 들고 있는 일본 제국주의 군대)

 

1905년 일본은 조선에게 을사조약을 강요하며 조선을 식민지화하기 위한 작업들을 착수했다을사조약 이후 조선인들은 국내와 해외에서 독립운동을 전개하기도 했다특히나 1908년에 번진 의병전쟁은 수만 명이 참가하는 투쟁이었다그러나 조선에 대한 일본 제국주의의 영향력은 막강했다그 결과 1910년 일본은 공식적으로 한일합방을 성사시켰다그리고 조선총독부를 세워 이른바 무단통치를 실시했으며토지조사사업이라는 명분으로 조선 농민들을 일본인 지주의 착취를 받도록 만들었다또한 1911년 이른바 105인 사건을 조작하기도 했다일본이 조선을 합병한 지 4년 뒤 지구반대편에선 인류최초의 대학살극을 동반한 전쟁이 일어난다바로 제1차 세계대전이었다1차 세계대전 당시 일본은 어떤 길로 나갔던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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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일전쟁 당시 3국의 상황이 그려진 만평


1853년 미국 페리제독에 의해 개항을 했던 일본은 서방으로부터 굴욕을 당했던 시점으로부터 50년 뒤인 1904년 서방 제국주의 세력과 전쟁을 하게 됐다그 전쟁은 지구상에서 가장 광활한 영토를 자랑하는 제국과의 전쟁이었고그 전쟁이 바로 러일전쟁(Russo-Japanese War)이었다지난번 청일전쟁 편에서 다룬 바와 같이 청일전쟁 이후 일본은 요동반도를 차지하게 된 대가로 삼국간섭을 받았다특히나 1895년 민비 명성황후를 살해한 이후 고종이 아관파천을 하면서 조선에 대한 러시아 제국의 영향력은 강해졌다. 1898년 러시아 제국은 청나라 정부로부터 요동 반도의 여순과 대련을 조차했다.

 

청일전쟁을 통해 일본은 아시아에서 큰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는 위치에 올랐다청일전쟁의 결과일본은 한반도에서 청나라의 영향력을 몰아내는 데 성공했고대만과 팽호제도를 영유하게 됐다청일전쟁 이후 일본은 러일전쟁 발발 이전까지 불과 10년 만에 최소 2배 이상의 육군력을 보유하게 되었고전함의 숫자도 늘었다. 1896년부터는 103척의 함정을 건조하는 계획에 착수했다.

(고종황제, 그는 1895년 명성황후가 살해된 뒤 아관파천하여 러시아의 조선 영향권를 확대시켰다. 그리고 1897년 자신을 황제라 칭하며 국호를 조선이 아닌 대한제국으로 선포했다.)

 

고종 황제의 아관파천 이후 러시아 제국은 만주와 조선에서 세력을 크게 확장했다러시아 제국은 조선으로부터 압록강과 두만강 유역의 벌목권 등 많은 이권을 따냈고조선에 군사·재정 고문단을 파견하여 영향력을 행사했다이는 1897년 고종이 대한제국을 선포하며 황제로 등극했을 때도 계속됐다만주에서도 북만주를 관통하는 동청철도와 남만지선의 부설권을 따냈다. 1900년 청나라에서 이른바 의화단 운동이 일어나 동청철도와 남만지선도가 많이 파괴되었는데러시아 제국은 철도보호를 구실로 만주에 출병하여 아예 만주지역을 점령해버렸다.

(영일동맹을 상징하는 포스터)

 

러시아 제국의 만주 주둔은 다른 열강들의 비판을 받았다제국주의 국가 영국은 러시아의 남하 정책에 위기의식을 느껴 1902년 1월 30일 수도 런던에서 이른바 영일동맹을 체결했다이 영일동맹은 유사시 군사적 개입을 명문화하고일본이 조선에 대해 특별한 수준의 이해관계를 갖는다고 인정했다즉 일본의 조선 식민지화를 사실상 승인한 것이다영일동맹 이후 이에 압력을 받은 러시아는 1902년 4월 단계적인 만주 철군을 약속했다그러나 일부만 철수하는 데 그쳤다.

 

1903년 7월 일본의 제의로 만주와 조선에서 세력권을 가르려는 러일교섭이 시작됐다그러나 두 제국주의 세력의 야욕이 맞물려서 합의에는 실패했다양국협상이 결국 결렬되면서 전운의 기운이 돌게 됐다당시 일본은 러시아와의 전쟁에서 승리를 낙관하지는 못했다그러나 시베리아 철도가 완공되면 승리의 가능성이 더 희박해진다는 판단을 내리고 있었다따라서 1903년 말 일본정부는 러시아와의 전쟁을 결정했다양국사이에 전쟁의 기운이 돌자 러시아는 자국 내부에 있는 혁명의 기운을 전쟁으로 끄고자했다.

(러일전쟁 당시 전투를 묘사한 그림)

 

1904년 2월 일본의 함대가 러시아의 함대를 공격함으로써 러일전쟁이 일어났다전쟁 전에 대부분의 서양인들은 어디까지나 일본이 패배하고 결국 러시아가 승자가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일본이 중국에 대해 승리했지만그것은 쇠망하던 국가에 대한 승리에 불과하고 감히 서구강국에 대항하여까지 이길 수는 없으리라는 생각이었다개전 초부터 일본군은 연전연승하면서 바다와 육지양쪽에서 러시아군을 계속 밀어붙였다러시아의 황제 니콜라이 2세는 선전포고도 없이 공격해온 일본군을 맹비난했다일본에 대한 맹비난을 함과 동시에 국민들에게 전쟁의 적극 참여를 호소하기도 했다.

(203 고지 관련 영화, 대략 1만 명이 전사했던 이 고지쟁탈전은 이후 일본에서 영화로도 만들어졌다.)

 

1904년 5월 일본군은 압록강을 넘어 만주로 진격했다만주로 진격한 일본군은 요양·사하·봉천 등의 전장에서 대병력의 참호전을 치렀다이 과정에서 양측의 사상자는 급증했다봉천에서만 러시아군 10만 명과 일본군 7만 명의 사상자가 나왔다병사들은 땅에 바짝 엎드려서 전진해야 하고막대한 화력이 쏟아 부어지는 가운데 장시간 전투하다 보니 많은 희생자가 나올 수밖에 없었다. 1904년 8월부터 1905년 1월까지 전개된 여순 공방전 중 일보인 203고지 쟁탈전의 경우 이곳에서만 최소 1만 명 이상의 일본군이 전사했다즉 203고지 전체가 시체로 산이 형성된 것이다이것은 일본군이 지속적으로 돌격전술에 의존했던 것도 있었다어쨌든 여순 공방전에서 일본은 157일 간의 포위 끝에 뤼순 요새를 함락시켰다.

(발틱함대)


(대마도에서 일본 군함에게 격침당하는 발틱함대)

 

사실 육지에서의 전투는 것만 보기엔 일본이 이긴 것 같았지만일본은 지쳐가고 있었다러일전쟁에서 일본이 확실히 승기를 잡을 수 있었던 것은 바로 해전이었다러시아 제국은 로제스트벤스키 제독 휘하의 러시아 발틱 함대를 러일전쟁에 투입시켰다그러나 러시아 제국의 발틱함대는 말 그대로 스웨덴과 핀란드 그리고 러시아 중간에 있는 발트해에 있었다. 19세기 당시 이집트에는 지중해와 인도양을 연결하는 수에즈 운하가 건설되어서 유럽과 아프리카 아시아가 해로로 더 가까이 연결되었다그러나 당시 이집트는 영국의 식민지였고, 1902년 영일동맹을 맺은 영국은 러시아의 발틱 함대가 수에즈 운하를 통과하지 못하도록 막았다따라서 러시아 발틱 함대는 남아프리카의 희망봉을 지나 말 그대로 지구 반바퀴를 돌아 일본으로 향했고, 1905년 5월 27일 대마도에서 대기하고 있던 일본함대에게 격파 당했다이로써 러일전쟁은 일본의 승리로 끝이 났다.

(발틱함대 이동경로, 발틱 함대는 말 그대로 지구 반바퀴를 돌아 일본에 갔다.)

 

러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은 명실상부 아시아의 최강국으로 거듭났다러일전쟁을 치르면서 치러야할 일본의 경제적 타격은 결코 적지 않았지만미국 테어도어 루스벨트 대통령의 중재를 받아들여 1905년 8월 미국 포츠머스에서 러시아와의 강화회담을 시작했고, 9월 5일에는 강화조약에 조인했다이 조약에 따라 일본은 조선에 대한 우월한 지위를 공식적으로 승인받았고여순과 대련을 이양 받았으며만주철도와 그 부속지의 양도 및 수비 병력 주둔권도 승인받았다또한 러시아의 영토인 사할린의 절반도 얻었다아무튼 일본은 러일전쟁을 통해 강대국으로 급부상 할 수 있었던 것이다.

(사할린, 러시아 령이었던 사할린은 1905년 러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이 그 절반을 차지하게 되었다. 그로부터 40년 뒤 다시 러시아(소련)이 접수하게 된다.)


(피의 일요일, 1905년 러시아에선 사회주의자들이 주도한 혁명이 일어났다. 그러나 니콜라이 2세는 발포를 명령했고, 그 결과 수도 상트페테르부르크의 겨울궁전 앞에서는 학살극이 벌어졌다.)

 

반면에 러일전쟁에서 패배한 러시아의 경우 체면적인 부분에서 많은 타격을 입은 것은 물론이고국가적으로도 위태로워졌다. 1905년 러일전쟁 기간에 이른바 러시아 내의 사회주의자들이 주도한 1905년 혁명이 일어났기 때문이다. 1905년 혁명이 일어난 이유 중에는 러일전쟁으로 인한 경제상황 악화도 한몫했었다물론 이 혁명은 니콜라이 2세가 군대의 발포를 명령하면서 대학살극으로 끝을 맺었다하지만 러시아 제국이 러일전쟁을 기점으로 점점 쇠약해졌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러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은 다른 나라를 식민지화하고자 했는데조선의 식민지화가 바로 그 시작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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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amGiKim 2020-11-18 00:2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요즘따라 제 글에 생각보다 많은 분들이 좋아요를 눌러주는것 같습니다. 다들 항상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