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리강화회의 당시 임시정부 대표단, 앞줄의 한인은 여운형의 동생 여운홍과 우사 김규식이다. 뒷줄에는 조소앙과 황기환도 있다.)
1918년 11월 11일 제1차 세계대전은 독일과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패배로 끝났다.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난 이후 승전국 자리에 오른 미국과 영국, 프랑스는 전후 문제를 논의하게 되었고, 이에 따라 1919년 1월 파리강화회의와 6월 베르사유 조약을 통해 합의를 봤다. 당시 미국의 대통령이었던 미국의 우드로 윌슨(Woodrow Wilson)은 이른바 민족자결주의 즉 “각 민족이 스스로의 의지에 따라서 그 귀속과 정치 조직, 운명을 결정하고 타민족이나 타국가의 간섭을 받지 않을 것을 천명한 집단적 권리”를 주장했고, 이는 식민지 지배를 받고 있던 나라들에게 상당한 영향을 주었다. 베트남의 국부로 칭송받고 있는 호치민이나 중국의 마오쩌둥 등이 이에 감명 받기도 했다. 그러나 윌슨의 민족자결주의는 사실상 서구 제국주의 국가들이 패권을 나눠먹기 위한 용도로 사용됐다.
윌슨의 민족자결주의는 1910년부터 일본의 식민지가 된 조선의 지식인들을 자극시켰다. 이에 따라 신한청년당의 여운형은 김규식을 파리강화회의에 보내 조선의 독립을 요구했고, 그 이후 신한청년당 단원이었던 장덕수는 일본 도쿄로 건너가 유학생들과 접촉하여 2월 8일 이광수를 포함한 200명의 학생들과 함께 2.8독립선언식을 가졌다. 이것은 식민지 조선 전역과 만주 연해주에도 소식이 전해졌고, 1919년 3월 1일 오후 2시 서울 종로 태화관에서 민족대표 33인 가운데 29명이 참석하여 독립선언식을 가지게 되며, 전국적인 항전으로 이어졌다. 이것이 바로 3.1운동의 발단이었다.
(3.1운동 당시 종로에서 있던 만세시위)
3.1운동은 서울 외에도 평양, 진남포, 안주, 의주, 선천, 원산 등 주요도시에서 동시다발적으로 독립선언과 만세시위가 전개되는 양상을 보였다. 이렇게 시작된 3.1운동은 3월 중순이 되어 청년, 학생, 교사나 지식인만이 참가하는 시위가 아닌 도시노동자 및 상인층이 참가하고 그들에 의해 전국 소도시로 확산되었으며, 그 시기에는 중남부 지방, 면 단위 이하의 농촌 지역 심지어 산간벽촌에 이르기까지 독립만세의 함성이 울려 퍼졌다. 3월 22일 서울에서 노동자와 청년 학생들이 준비한 ‘노동자대회’에서 많은 노동자들이 참여해 시위를 전개했다. 이 시위는 이후 서울 시가지 시위의 기폭제가 되어 23일 이후 매일 밤 시내 도처에서 게릴라식 시위가 벌어졌다. 26일, 27일에는 전차 종업원, 경성철도 노동자, 만철 경성관리국 노동자들도 파업에 돌입하기도 했다.
(3.1운동 관련 상상화, 유관순 열사와 이화학당 학생들을 표현한 게 인상적이다.)
이렇게 시위가 전국적으로 일어나자 일제는 이 시위를 강력하게 진압했다. 3월 1일 조선 총독 하세가와는 “추호의 가차도 없이 엄중 처단한다”는 협박문을 발표하고 발포 명령을 내렸다. 조선에 주둔하고 있던 2개 사단 즉 23,000명의 일본군이 있었다. 이걸로는 시위 진압에 부족하다 느낀 일제는 3.1운동을 진압하기 위해 4월 들어 일본 본토에서 헌병과 보병부대를 증파시켰으며, 3월 중순 이후 시간이 흐를수록 시위 도중 군경의 발포로 인한 사망자가 크게 늘어났고, 이를 진압하는 일본 측의 잔인함도 극심해졌다. 일례로 3.1운동에 적극적으로 참가했던 유관순과 그 동료들은 서대문형무소에서 극심한 고문을 받았었다. 3.1운동에서 얼마나 많은 사상자가 나왔는지는 아직 밝혀지지는 않았지만, 일제 측 자료에 따르면 1919년 3월 이후 1년간 피살자를 350명 혹은 630명, 부상자는 800명 혹은 1900명으로 기록하고 있고, 투옥된 이들은 8000~9000명으로 기록하고 있다.
(제암리 학살, 1919년 4월 15일 일본은 수원 제암리에서 민간인 학살을 벌였다.)
계급과 계층을 망라하여 전 조선민중이 참가했던 3.1운동은 일본 제국주의자들의 무자비한 진압으로 끝났다. 3.1운동 진압 과정에서 일본은 민간인 학살을 저지르기도 했는데, 그 학살이 바로 1919년 4월 15일 수원 제암리에서 벌어진 제암리 학살이다. 이 제암리 학살로 30명 이상의 민간인이 일본군에 의해 학살당했다. 3.1운동은 비록 일본의 진압으로 끝이 났지만, 세계적인 식민지 해방 운동에 적잖은 영향을 주었다. 3.1운동 이후 중국에선 5.4운동이 일어났고, 인도의 독립운동가 간디가 이에 영향을 받기도 했으며, 아일랜드 독립운동에도 영향을 주었다.
(5.4 운동, 1919년 3.1운동의 영향을 받아 중국에선 외세와 일본 제국주의를 배쳑하고자 5.4운동이 일어났다.)
3.1운동 이후 일본은 한일합병 이후 실행해오던 무단통치에서 이른바 문화통치로 노선을 바꾸었다. 물론 이것 또한 독립운동에 대한 탄압과 경찰력 동원에 있어선 큰 차이는 없었지만 말이다. 3.1운동 이후 중국 상하이에선 한국 독립운동사에 있어서 상징적인 사건이 일어났다. 바로 대한민국임시정부가 탄생한 것이다. 또한 3.1운동 이후 만주 지역의 민족운동가들은 본격적인 무장투쟁을 준비했다. 1919년 1월에 압록강 이북 서간도 지역에서 발족된 ‘한족회’는 ‘서로군정서’라는 군정부로 개편되었다. 두만강 이북 북간도 지역에는 ‘간민회’라는 자치단체가 ‘대한국민회’로 이름을 고쳤고, 이들은 ‘국민회군’이라는 독립군부대를 편성했다. 또 북간도 왕청현 지역에서는 대종교 세력이 ‘북로군정서’라는 부대를 편성했다.
(홍범도 장군, 그는 1920년 봉오동 전투를 승리로 이끌었다.)
(영화 봉오동, 봉오동 전투는 2019년 영화로도 만들어졌다.)
독립군 부대들은 1920년부터 국내 진공 작전을 개시했다. 1920년 기준으로 독립군이 함남·함북·평북에 침입해 전개한 전투는 1,651건 정도로 동원된 독립군만 해도 4,643명으로 집계된다. 이처럼 독립군이 자주 국경을 넘어 들어왔기에 일본은 국경 3도에 군사 및 경찰 경비력을 강화시켰다. 이렇게 독립군들이 식민지의 국경을 공격하자 일본군은 1920년 6월 북간도의 독립군을 추격하기 위해 250명의 추격대를 편성하여 훈춘 인근의 봉오동 쪽으로 진격했었다. 여기서 정보를 입수한 홍범도의 대한독립군과 최진동의 군무도독부, 안무의 국민회군, 이홍수의 대한신민단 등은 6월 7일 일본군을 봉오동 골짜기로 유인하여 섬멸했다. 당시 독립신문은 이 전투에서 일본군이 157명 이상이 사살되었다고 보도했다. 전사자 수치에 대한 논란이 있긴 하지만, 분명한건 일본군이 이 전투에서 패배했다는 사실이다.
(김좌진 장군, 김좌진 장군은 1920년 청산리 전투를 승리로 이끈 명장이다. 깡패이자 대한민국 국회의원을 지낸 김두한이 김좌진의 아들이라는 얘기가 있으나, 확실한 사실은 아닌것으로 확인되고 있다.)
(청산리 전투 상상도, 박정희 시절인 1970년대 국가사업 차원에서 나온 그림이다.)
봉오동 전투 이후 일본군은 근본적인 대책이 필요하다 생각한 나머지 만주의 군벌인 장작림에 협조하여 이른바 ‘훈춘 사건’을 조작했다. 훈춘 사건을 구실로 일본은 약 2만 명의 대병력을 서북간도로 침입시켰다. 이러자 독립군 부대들은 일본군과의 정면승부를 피하며 은신했다. 이후 일본군의 동태를 파악한 독립군은 김좌진 장군의 지휘아래 일본군을 깊숙이 유인하여 섬멸했고, 홍범도의 독립군 부대도 이에 협력하여 일본군을 섬멸했다. 이것이 바로 청산리 대첩 또는 청산리 전투다. 청산리 전투에서 독립군들은 적백내전 당시 러시아에서 철수하던 체코군으로부터 사들인 총기로 무장했다. 그리고 청산리 전투에서 이들은 대략 1,000명 가까이 되는 일본군을 섬멸했다. 1920년에 있던 봉오동 전투와 청산리 전투는 독립운동사에 있어서 대승으로 기록되었다.
(청산리 전투를 승리로 이끌었던 북로군정서군)
봉오동 전투와 청산리 전투에서 대패한 일본군은 인근 지역에서 소름끼치는 학살을 전개했는데, 그것이 바로 간도참변이다. 조선주둔군 예하 19사단을 주축으로 한 일본군 부대는 이에 대한 보복으로 간도에서 삶의 터전을 일구어가던 많은 한인들을 학살했고, 그들의 마을과 가옥을 불태웠다. 당시 파견된 조선군은 작전을 원활히 수행하기 위해 압도적인 군사력을 한인에게 과시하여 저항의지를 차단하고, 독립군을 근거지에서 분리하기 위해 무력시위와 최신무기를 동원하였다.
(간도참변, 당시 일본군의 학살로 수천 명의 한인이 목숨을 잃었다.)
(간도참변 당시 한인 독립군을 총살하는 일본군)
간도참변 당시 일본군의 군사작전은 ‘간도지방불령선인초토계획서’에 입안한 것이었다. 위에서 상술한 조선주둔군 19사단은 10월 14일 한인마을에 대한 제1차 토벌을 개시했고, 이들은 한인마을들을 포위 습격했다. 10월 22일에는 제2차 토벌을 개시했다. 2차 토벌 당시 일본군은 “600명의 독립군이 있다는 것”을 첩보하여 10얼 28일 부근 학교 및 가옥을 소각했다. 간도 지역은 일본군이 군사작전을 전개함에 따라 학살의 장으로 변했다. 간도참변은 1920년 10월부터 1921년 5월까지 북간도와 서간도 일대에서 전개됐다.
(간도참변 당시 학살당한 조선 양민의 시신)
대략 2만 명 이상의 일본군이 독립군의 근거지를 파괴하고, 수천 명을 학살했다. 1920년 10월과 11월 사이 약 2개월 동안 북간도의 8개현에서 3,600여 명이 피살되었으며, 3,200여 채의 가옥과 41채의 학교, 16채의 교화가 불에 탔다. 부녀자들과 아이들도 학살당했으며, 부녀자들 중에는 일본군에게 강간당한 이들도 적지 않았다. 2015년 당시 국내에서 1,000만 이상이 관람했던 영화 암살에서는 전지현이 연기했던 안옥윤은 간도참변에 대해 얘기하는 약산 김원봉에게 다음과 같은 대사를 한다.
“저희 어머니도 그때 총에 맞고 돌아가셨습니다. 운이 좋으셨죠. 다른 사람들은 칼에 찔려 죽고, 몽둥이에 맞아 죽고, 목이 졸려 죽고, 불에 타서 죽고, 생매장 당해 죽고, 솟에 삶기도 하고. 그렇게 3400명을 죽였습니다. 27일 동안”
물론 이것은 픽션이 약간 가미되었을 수는 있지만, 간도참변의 잔혹함을 알기에는 아마 충분할 것이다. 이렇듯 간도참변 당시 일본군의 학살은 상상을 초월했다. ‘일제의 만주침략과 간도참변’이라는 연구 논문을 쓴 조원기는 “간도참변은 단지 간도지역 한인 및 항일운동에 대한 탄압에 그치지 않고 일제의 만주침략을 위한 구도에서 감행된 것이었다.”라고 밝힌다. 즉 1920년 전후 만주독립군의 활동을 억제하거나, 한인사회의 파괴만을 목적으로 일어난 군사침략만이 아니라, 만주침략이라는 계획아래 추진된 학살만행이라는 것이 그의 주장이다.
간도침략의 1차 목적은 기존 한인 사회를 해체하고 한인 학살에 그 목적이 있었던 것은 분명하다. 제1차 세계대전이 얼마 끝나지 않은 1920년 당시 안정적인 국제정세하에서 일제가 만주를 무력으로 점령하는 것은 당연히 불가능하겠지만, 대신 일본은 간도침공을 통해 자신들의 만주에 대한 군사적 지배력을 대외에 과시하였고, 간도를 사회적, 경제적으로 지배하기 시작하여 만주침략의 전초기지로 활용할 수 있게 되었다. 1931년 만주사변과 1932년 괴뢰 만주국 건설이라는 이후의 행보를 생각해보았을 대, 간도 참변은 즉 그러한 군사적 행동의 신호탄이라고도 볼 수 있을 것이다.
(다이쇼데모크라시 관련 서적)
일제는 1919년 3.1운동을 무자비하게 진압했고, 1920년 봉오동 전투와 청산리 전투의 패배에 대한 보복으로 간도 참변으로 조선인 수천 명을 학살했다. 그러나 일본은 다이쇼 데모크라시라고 하는 흐름과 더불어 사회적으로 또 다른 문제에 시달리기도 했다. 그것은 바로 1917년 러시아 혁명 이후 일본에 영향을 끼친 좌파 이데올로기의 성장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