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 시리즈를 연재하기로 했는데거의 5개월 가까이 연재를 하지 않았군요기다리신 분들을 위해 사과드립니다다시 방학기간이니졸문이지만 종종 연재를 해보도록 하겠습니다.)

 

1931년 만주사변과 1932년 상해 사변을 통해 일본은 기고만장한 모습을 보였다이런 일련의 침략행위를 통해 일본은 제1차 세계대전 이후 잠자고 있던 서방 세력에게 힘을 과시했다비슷한 시기 지구반대편에서도 파시즘이 급부상하고 있었다일본의 만주 점령 10년 전 이미 이탈리아에선 베니토 무솔리니(Benito Mussolini)가 이끄는 검은 셔츠단(Blackshirts)이 수도 로마로 진군해 파시스트 정부를 수립했다즉 이탈리아에선 10년 가까이 파시즘 통치가 이루어지고 있었던 것이다.

(2.26 사건, 1936년에 일어난 이 군부의 쿠데타는 일본이 중국 침략을 하게 되는 징검다리 역할을 하게 된다.)

 

베니토 무솔리니가 정권을 잡은건 반공주의 성향의 조직들을 모아 폭력과 무력으로 잡은 것이었다1차 세계대전 이후 독일에서도 이러한 반공주의 운동이 하나의 조직으로 나타났는데그것이 바로 1920년 히틀러를 당수로 둔 나치당(Nazi Party)이었다이들은 무솔리니의 검은셔츠단을 예시로 삼아 갈색셔츠단 즉 돌격대(Stormtrooper)를 만들어군대 쿠데타를 통한 정권 전복에 나섰다그러나 1923년 바이마르 당국의 진압으로 실패했고히틀러 또한 감옥생활을 경험했다당시 독일의 바이마르 정권은 그 이후 계속 유지되다가 1929년 미국발 경제 대공황을 맞으면서나치와 사회주의 세력에 의해 흔들렸었다경제 대공황 이후 다시 경제가 휘청거리자나치는 다시 국민들의 지지를 얻을 수 있었고, 1933년 민주적인 투표를 통해서 독일에서 권력을 잡을 수 있었다.

(무솔리니와 히틀러, 무솔리니와 히틀러는 20세기 파시즘을 추구한 인물로서 제2차 세계대전을 일으킨 장본인들이다. 무솔리니가 선배였으나, 제2차 세계대전이 지속되면서 히틀러의 힘이 무솔리니보다 훨씬 더 강해졌다.)

 

마찬가지로 일본에서도 이른바 다이쇼 데모크라시로 대표되던 시대는 끝났고군부를 중심으로 정치가 형성되는 시대가 열리기 시작했다. 1931년 만주사변과 1932년 상해 사변을 통해 시작됐다또한 정치인들에 대한 테러도 시작이 됐다이노우에 닛쇼가 결성한 국가주의 단체 혈맹단은 일본 정부의 전 대장이나 대신 그리고 재벌 총수 등을 차례로 암살했다. 1932년엔 5.15 사건이라고 하여일본 해군출신의 청년장교들이 이누카이 쓰요시 수상을 살해하고육사 생도등이 정부와 정당 기관 그리고 일본 은행 등을 습격하는 사건이 일어났다이것은 당시 히로히토 천황의 측근과 정당 그리고 재벌에 대한 테러이자 쿠데타였다.

(5.15 사건을 보도한 일본의 언론사)


(찰리 채플린, 무명영화 배우로 유명한 찰리 채플린 또한 이 사건에서 암살당할 뻔했으나, 덴뿌라를 먹고 있어서 살아남았다. 이 이야기는 신비한 TV 서프라이즈에서도 다룬적이 있다.)

 

이런 쿠데타를 일으켰던 이들은 재판에서 위기에 처한 국가방위를 위한 불가피한 조치였다고 자신들의 행위를 옹호했다쿠데타에 가담했던 이들은 가담의 정도에 따라 유기징역과 집행유예 및 훈방조치를 받았다당시 일본 민중들이 정당정치의 부패에 염증을 느끼고 있었기에오히려 반란 장교를 구명하려는 탄원이 많이 있었으며이에 따라 사형을 받은 이들은 한명도 없었다재판을 받은 40명 중에 거의 전원이 1~2년 내에 석방됐다그러나 일본에서 일어난 5.15사건은 1920년대로 대표되던 이른바 다이쇼 데모크라시와 식민지 조선에서는 문화통치로 일컬어지던 시대의 종말 즉 정당내각 시대의 종언을 뜻하는 것이기도 했다.

(2.26 쿠데타 당시 진격하는 일본군)


(2.26 쿠데타 관련 일본 측 서적)

 

1932년에 일어난 5.15 사건은 이렇게 끝났지만, 1936년 2월 26일에 일어난 이른바 2.26 쿠데타는 아니었다. 1936년 2월 26일 수도 도쿄에 주둔하던 일본군 제1사단의 청년 장교들이 이끄는 1,400명의 병력은 말 그대로 쿠데타를 일으켰다이들은 육군대신의 공관을 포위했고경시청을 점거했으며총리대신과 대장 대신내대신시종장을 암살했다그리고 육군 교육총감의 집으로 몰려가 총감을 살해했다쿠데타를 일으킨 이들이 내세운 명분은 존황토간(尊皇討奸)’으로 천황을 제대로 받들기 위해 간신들을 치겠다는 의미였다이들은 천황에게 자신들의 뜻을 알리기 위해육군대신의 공관으로 몰려들어 자신들의 요구 사항을 알려줬다그들의 요구사항은 다음과 같았다.

 

1. 정치사회적 개조와 통제파 지도자들을 체포할 것

2. 황도파 장교들을 요직에 임명할 것

3. 소련을 압박하기 위해 아라키 장군을 관동군 사령관에 임명할 것

 

당시 2.26 쿠데타에 연루가 됐던 인물 중에는 사회주의와 파시즘 사이에서 애매모호한 입장에 있던 기타 잇키(Kita Ikki)도 있었다그는 참으로 알 수 없는 인물이었다일본 제국 패망사의 저자 존 톨랜드(John Tolland)는 그에 대해 사회주의 강령에 제국주의를 결합하려고 애쓴 열렬한 혁명가이자 민족주의자라고 주장했는데그는 급직적인 사회상을 꿈꾸면서도 천황 숭배 사상에 사로잡혔었다고 톨랜드는 주장했다물론 톨랜드의 주장과는 달리 기타 잇키가 천황제를 거부했다는 주장도 있고, 2.26 쿠테타의 실질적인 정신적 지주가 아니라는 주장도 있다.

(기타 잇키, 그는 사회주의와 제국주의 성향이 혼합된 인물로 말 그래도 짬뽕인 인물이다.)


(국내에 출판된 기타 잇키 전기, 교양인에서 문제적 인간 시리즈로 출간했다. 분량과 가격이 만만치 않은 책이다.)

 

기타 잇키는 중국과 인도의 7억 형제들은 우리의 보호와 지도력이 없으면 독립을 이룩할 수 없다.”라고 생각했고이러한 생각은 식민지 조선에 대한 입장에서도 나타났다물론 그는 일본 정부가 식민지인들을 차별하는 것에 반대했고그러한 차별을 완벽히 철폐해야한다 생각했다이러한 그의 생각은 하나의 일본제국 하에서 일본인과 조선인은 대등한 민족이 되어야 한다.”라는 그의 주장에 잘 나타나 있다그렇지만일본의 지배 자체를 포기해서도 안 된다고 생각했다개인적인 생각으로는 그 또한 2.26 쿠데타에 관여가 되어 있었던 것으로 보이며사회주의와 제국주의가 혼합된 이데올로기를 가지고 있었던 것 같다.

 

2.26 쿠데타를 주도한 청년 장교들은 천황이 자신들을 지켜줄 것이라고 기대했다. 1932년 5.15 사건을 생각하며 기대했던 것으로 보인다그러나 이 쿠데타 소식을 들은 천황은 매우 분노했고자신이 군대를 이끌고 진압하겠다고 하며 큰소리를 쳤다반면 일본 육군은 청년 장교들의 취지에 공담한다면서 천황을 설득하고자 했다결국 천황의 명령에 따라 일본 군대는 쿠데타 진압에 나섰다결국 쿠데타는 실패로 끝났고장교 2명이 자결하고 세 차례의 재판 결과 주모자 및 적극 가담자 18명이 교수대에 올랐다. 6명이 무기징역형, 22명은 1년 6개월~6년의 징역형을 받았다이렇게 되면서 2.26 쿠데타는 막을 내렸다.

 

쿠데타가 일어났을 당시 도쿄에 있던 독일 대사관도 이 소식을 접했고당연히 반란의 소용돌이 안에 있었다당시 나치독일의 언론 지였던 프랭크푸르터 알게마이네 차이퉁에서 비공식 통신원으로 일하던 대사관의 무관 비서관은 2.26 쿠데타에 관한 임시 보고서를 작성했는데보고서를 2개나 작성했다하나는 나치 독일에 보내는 것이었고다른 하나는 소련에게 보내는 것이었다이 임시 보고서를 작성한 사람의 증조부는 카를 마르크스와 프리드리히 엥겔스와 친구사이였다그가 바로 소련의 스파이로 독소전쟁에 큰 기여를 했던 리하르트 조르게(Richard Sorge)였다.

(MBC 드라마 제3공화국에서 나온 박정희, 어린 시절 그는 2.26 쿠데타에 감명받았다고 한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만주군 중위가 된 박정희, 그는 결국 1940년 만주에 있는 육군사관학교에 진학했다. 이렇게 해서 박정희의 기회주의적인 생애가 시작된다.)

 

아이러니 한 일이지만 이 2.26 쿠데타는 25년 뒤 한국 현대사에도 큰 영향을 끼쳤다젊은 시절 군인의 꿈을 가지고 있었던 조선의 한 청년이 이에 감명 받았기 때문이다그가 바로 1961년 5.16 군사 쿠데타를 일으킨 박정희(Park Chung hee)였다. 2.26 쿠데타가 진압으로 끝나면서 통제파가 전면에 서게 되었고일본 군부가 모든 것을 좌우하는 전시체제가 확고해졌다앞에서 언급한 소련의 스파이 리하르트 조르게 덕분에 소련은 “2.26 사건을 통해 일본이 중국 대륙을 향한 팽창주의로 이어질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소련이 예측한 대로 일본은 1년 뒤 중국과의 확실한 전면전에 돌입했고그것이 바로 1937년에 발발한 중일전쟁이었다마지막으로 일본 제국 패망사』 1장 게코쿠조에 나오는 말을 인용하며 마치겠다.

(리하르트 조르게, 그는 일본 주재 독일 대사관에 근무하면서 소련의 스파이로 활동했다. 그의 활약 덕분에 소련은 상당히 많은 이득을 보았다. 그러나 스파이임이 발각되어 1944년 처형당했고, 1960년대 초 소련에서 영웅으로 인정받았다.)


(일본에 있는 조르게의 묘, 현재는 러시아 대사관 측 인물들이 그를 기리고 있다.)

 

“2. 26 사건은 끝났다여기서 발생한 폭력 사태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참담한 유혈극이었다다만 목숨을 잃은 사람이 7명에 불과했고 폭도들은 순수히 항복했다가장 뛰어난 용기의 모범은 여인들이 보여주었다반대로 장군들은 허둥거렸다대부분의 외국인에게 이 반란은 초국가주의자가 저지른 또 하나의 학살극에 지나지 않았다그리고 이 사건의 의의를 아는 사람은 별로 없었다단 소련은 알았다이 사태가 중국 내륙을 향한 팽창주의로 이어질 것이라고 정확하게 예측한 조르게가 있었기 때문이다.

 

이 사태는 끝났지만잔잔한 연못에 돌을 던진 것처럼 파문은 이미 태평양으로 번져나가고 있었다.”

 

출처일본 제국 패망사 p.91~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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