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1년 당시 일본의 만주 침략도)

 

1931년 9월 18일 밤 10시 20분경펑톈 시 외곽 북쪽으로 7.5km 떨어진 류타오후에서 뤼순과 펑톈 그리고 창춘을 연결하는 만주철도를 달리던 특급열차는 달리던 중 폭음을 듣게 됐다다행히 폭발에도 불구하고 열차는 파괴되지 않았고제 갈 길을 달렸다같은 시각 철도 주변에는 일본 관동군 독립수비대 제2대대 제3중대 소속의 공병들이 숨어 있었고이들은 동북군이 만철 철로를 파괴했다고 본부에 보고했다그 시각 보고를 받은 이타가키 세이시로 대좌는 관동군 사령관의 명의를 제멋대로 사칭하여 일본군 제2대대와 제5대대에게 펑톈 교외에 있는 장학량 휘하의 동북군을 일제히 공격하라고 명령했다이렇게 해서 일본군과 중국군간의 전투가 시작됐다이것이 바로 1931년에 일어난 일본의 만주사변이었다.

 

지난 1920년대의 일본은 중국 대륙에 대한 야심을 드러내긴 했지만중국 대륙의 영토를 대상으로 침략전쟁을 본격화 하지는 못했다그러나 1931년의 일본은 비록 만주이긴 해도 중국 대륙을 본격적으로 침략해 나갔다이것은 1937년에 일어날 중일전쟁의 시발점이기도 했다몇몇 학자들은 일본의 만주침략이 본격적으로 군국주의로 나가는 방향이었다고 주장하기도 한다도대체 왜 일본은 1931년에 만주사변을 일으킨 것일까?

(검은 화요일, 1929년 미국에서 시작된 검은 화요일은 미국 뿐만 아니라 전 세계적인 경제 공황을 불러 일으켰다.)

 

다이쇼 데모크라시 시기 일본은 1923년 관동대지진을 겪으면서 경제에 심각한 타격을 입었다일본 정부는 기업의 도산 사태를 막기 위해 진재어음을 발행하는 것으로 수습하는 것 같았다그러나 1927년에 이르러 일본의 만성적 불황은 금융공황으로 비화됐고가까스로 수습하기에 이르렀다그러나 1929년 만성적 공황을 수습하기가 무섭게 다른 일이 일어났다바로 그해 10월 뉴욕 주식시장의 폭락으로 인해 세계 대공황이 시작된 것이다.

 

검은 화요일이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는 경제 대공황은 세계 경제에 큰 타격을 주었다특히나 제1차 세계대전 이후 극심한 인플레이션에 시달리던 독일의 경우 1924년부터 경제를 회복시켜 나갔지만, 1929년 미국에서 경제 대공황이 시작되자직격타를 맞았다일본 또한 경제 대공황으로 돌이킬 수 없는 타격을 받았다경제 대공황으로 수출 시장이 축소되고공업 생산이 급감했다이것은 일본의 임금 하락과 실업 증가로 나타났으며사회적 불안이 가중되었다여기서 일본이 선택한 노선이 바로 팽창정책이었다.

(만주사변 당시 중국 선양에 입성한 일본군과 기병대)

 

사실 일본은 1910년 조선을 합병한 이후부터 만주 지역을 독점 하고자 했다. 1912년과 1916년 그리고 장작림 폭사사건에서 비롯된 1928년의 사건은 일본의 만몽 자치운동을 사주하려는 계획의 결과였다즉 일본은 예전부터 만주지역을 탐내고 있었던 것이다거기다 미국발 경제 대공황은 제1차 세계대전 이후 창설된 국제연맹의 힘을 약화시키거나 국제연맹으로 하여금 아시아 문제를 무관심하게 만들었다따라서 일본인 만주침략을 가속하 하기 위한 내적 혹은 외적 조건들이 갖추어졌던 것이다.

(만주사변 당시 일본군 소총 대대)

 

1931년 9월 18일 밤에 철도가 폭파되면서 일본의 만주 침략이 시작됐다다음 날인 19일에는 관동군에서 조선군 사령부에도 전보를 보내어 신속한 병력 증파를 요청하였고대략 4천 명으로 구성된 조선군과 2개 비행중대가 신의주에서 압록강을 건너 만주로 진입했다또한 펑톈을 방어하는 동북군 사이에 격렬한 전투가 벌어졌고, 240mm 중포를 앞세운 관동군의 공격 앞에 중국군은 패주했다이후 주요 정부 청사를 비롯해 펑톈 항공국병기창동대영이 잇따라 함락되면서 20일 새벽까지 펑톈 성 전역이 일본 관동군의 수중에 들어갔고그날 관동군의 대대적인 공격을 받은 장춘도 함락됐다그 다음 날인 21일에는 지린 성이 아무런 저항 없이 일본군에게 점령됐다이렇게 해서 광대한 남만주 지역이 거의 2~3일 만에 일본군 수중으로 들어갔다.

(만주에서 진공중인 일본군 관동군 소속 육군 부대)


(1931년 9월 19일 새벽 장학량 군대를 공격해서 펑톈 성을 장악한 것을 환호하는 일본 관동군)

 

일본이 만주사변을 일으키자 이는 전 세계적으로 큰 반응을 일으켰다하지만 국제연맹은 무능함만 드러냈다거기다 미국은 이해관계에 눈이 멀어 일본을 일방적으로 지지하는 모습을 보였고과거 일본과 동맹 관계를 맺었던 영국도 일본편을 들었다어쨌든 일본에 대한 국제연맹의 제재는 전혀 없었다만주를 점령한 일본군은 이 기세를 몰아 1932년 1월 3일에 진저우를, 2월 5일에는 하얼빈을 점령했고만주 전체를 장악하기에 이르렀다당시 만주에 주둔하던 장학량은 국민당의 장제스 밑에서 있었는데상당히 무기력한 모습을 보였다.

(상하이 사변 당시 방어진지에서 전투중인 중국 국민당군)


(상하이에 입성한 일본군 89식 전차)

 

1931년 만주를 손쉽게 장악했던 일본은 1932년 만주 전역을 점령하는 과정에서 중국 본토에서도 전투를 전개했는데그것이 바로 상하이 사변이었다당시 일본은 상하이에서 전쟁을 일으켜 중국과 국제사회의 이목을 만주에서 상하이로 집중시킬 수 있다고 생각했다그렇게 해서 만주 전역을 장악하겠다는 속셈이었던 것이다만주사변 이후 일본은 상하이와 앙쯔강 일대에 배치된 해군력을 강화했다항공모함을 포함한 군함들을 그곳에 증파했고상하이 지역에 일본군 병력을 증원했다또한 장제스도 그곳에 병력을 배치했고이렇게 되면서 양측의 충돌은 불가피해졌다.

(상하이 사변 당시 독일제 트럭을 타고 시내오 진입한 일본군)


(상하이 사변에서 승리를 거두고 환호하는 일본군들)

 

전투는 1932년 1월 28일에 일어났다당시 중국군은 3만 3,500명의 병력을 보유하고 있던 반면일본군은 6천 명에 불과했다그러나 일본군은 30척의 군함과 최소 40대 이상의 항공기를 보유하고 있었으며야포와 장갑차 수십 대를 보유하고 있었다즉 화력이나 제공권에서 중국군을 훨씬 압도했던 것이다양측의 전투는 매우 치열해졌고초기에 일본군이 중국군의 방어선을 돌파하려 했지만이는 실패로 끝이 났다. 2월 9일에는 일본군 또한 본국으로부터 병력 지원을 요청했고, 2월 24일에 일본군 2개 사단이 증원되면서 점차 승기를 잡았다. 1932년 3월 1일 네 번째 총공격에서 중국군 방어선을 돌파하는 데 성공했고, 2일 뒤인 3월 3일 양측은 정전에 합의하게 된다.

(2020년에 만들어진 중국 영화 800, 제1차 상하이 전투 당시의 전투를 다룬 영화다.)

 

상하이 전투는 매우 치열했다. 2달간 전개됐던 이 전쟁에서 양측의 사상자는 적지 않았다군함 80척과 항공기 300대를 투입했던 일본군은 3,091명의 사상자가 나왔던 반면 중국군은 1만 4,326명이 나왔다고 한다이후에도 일본군은 국지적인 충돌을 계속 이어나가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지만목표 자체는 만주지역 점령과 만주국 수립에 있었기에 전투 이전의 상태로 복귀하는 선에서 국제적인 합의를 봤다상하이 사변 이후 일본은 이를 승전으로 홍보했다.

(만주국 초대 내각)


(만주국 괴뢰 황제 푸이)


(1932년 홍커우 공원에서 열린 상해사변 승전 기념식)

 

1932년 4월 29일 상하이 국제 공동 조계에 있는 홍커우 공원에서는 일본군의 전승행사가 열렸다그리고 그 전승행사에선 시라카와 요시노리 대장을 비롯해시께미스 마모루 등을 포함한 7명의 일본측 대표들이 누군가가 투하한 폭탄에 의해 죽거나 부상을 당했다이것이 바로 대한민국임시정부를 이끄는 백범 김구가 계획했던 윤봉길 의거였다비록 상하이 전투에서 장제스는 패배한 입장이었지만윤봉길의 폭탄 투척 사건을 듣고이에 감동을 받아 대한민국임시정부를 대대적으로 지원하기에 이르렀다.

(상해사변 승전 기념식에서 터진 폭탄, 이 폭탄은 대한민국임시정부 요원인 윤봉길이 던진 것이었다.)


(윤봉길, 1932년 4월 29일 상하이 홍커우 공원에서 물통 폭탄을 던진 윤봉길은 이후 체포되어 처형된다. 이것은 임시정부 주석이던 백범 김구가 계획했던 일이었고, 이 일을 계기로 임정은 장제스의 지원을 받게 된다.)


(윤봉길의 유서)

 

상하이 사변이 지속되는 과정에서 일본은 1932년 3월 1일 청나라의 마지막 황제였던 푸이를 내세워 이른바 만주국이라는 꼭두각시 국가를 만들었다따라서 일본은 본인들이 목표했던 것을 만주사변과 상하이 사변을 통해 성공적으로 이루어 냈다상하이 사변 당시 일본은 국제적인 반대에 시달렸는데이에 아랑곳 하지 않는 모습을 보였다그리고 1933년 3월 27일에는 일본은 국제연맹을 탈퇴하기에 이른다같은 해 지구 반대편에서는 또 다른 중대한 사건이 일어났다독일에선 아돌프 히틀러가 독일의 수상자리에 올랐기 때문이다거기다 히틀러의 파시즘적 형제인 베니토 무솔리니는 이미 정권을 장악한 상태였다세계 경제 대공황과 일본의 만주 침략과 시작된 1930년대는 암흑의 터널을 통해 달리고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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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풍오장원 2021-02-21 10:5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만주국에 대하 쓰신 글을 보니 영화 <마지막 황제>에서 푸이가 떠오르네요^^

NamGiKim 2021-02-21 14:41   좋아요 0 | URL
푸이를 보살펴주던 중국 공산당 출신의 인물이 있었죠. 나중에 문혁으로 죽게 되지만ㅠㅡ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