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성륜의 사진)


에드가 스노(Edgar Snow)의 아내였던 헬렌 포스터 스노우(님 웨일즈)는 어느 한 조선인 혁명가에게 매력을 느꼈었다. 조선인 혁명가에게 큰 관심을 가지고 있던 헬렌은 그를 인터뷰했고, 이후 그녀는 미국에서 책 한권을 출판했다. 그 책이 바로 아리랑의 노래(Song of Ariran: a korean communist in the chinese revolution)’. 현재 우리에게 알려진 아리랑이다. 아리랑은 1940년대 미국에서 출판되기도 했으나, 2차 세계대전 이후 미소냉전이 시작되자, 미국에서 매카시즘의 광풍이 불면서 대대적인 탄압을 받았었다.

 

그러나 이 책은 이후 1960년대 일본에서도 출판됐고, 당시 한국의 젊은 기자출신인 리영희는 우연히 도쿄의 한 서점에서 책의 존재를 알게 됐다. 당시 리영희는 감동했고, 이 책은 이후 한국의 운동권에게도 널리 읽히게 된다. 아리랑은 많은 이들을 감동시켰으며, 2000년대 국내에서도 개정판이 나왔었다, 그 아리랑의 주인공은 한평생을 독립운동의 길을 걸었으며, 중국 혁명에도 참가했고, 이후 1930년대 트로츠키주의라는 오명을 받아 처형되었으나, 1970,80년대 중국 공산당에 의해 복권됐다. 그 인물이 바로 김산이다.

 

김산의 전기인 아리랑이나 이원규 작가의 김산 평전을 읽어본 이라면 알겠지만, 젊은 시절 김산은 만주에서 독립운동을 했으며, 1919년 약산 김원봉이 설립한 의열단에도 가입했었다. 그 시기 김산이 가장 신뢰하던 혁명 동지 한명이 있었다. 그는 독립운동사에서 전설적인 업적을 세운 인물 중 한사람이며, 1922년 의열단이 주도했던 다나카 기이치(1919년 여운형과 회담했던 그 인물이다.) 암살 기도 사건의 주인공이었다. 그가 바로 김산의 혁명동지인 오성륜이다.

 

오성륜은 1900년 함경북도 온성에서 태어났다. 7살이 되던 1907년 부친을 따라 간도 지방 허룽 현으로 이주했고, 1918년 훈춘 현 다황거우의 북일중학교를 졸업했다. 3.1 운동이 일어나는 1919년 왕칭 현 봉오동에서 교원 생활을 하다 독립군 부대에 들어갔다. 1920년 오성륜은 베이징으로 가서 약산 김원봉이 설립한 단체인 의열단에 가입했으며, 전광일, 전광, 오진, 오한생, 오성임 등의 가명을 사용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오성륜은 1922328일 의열단의 김익상, 이종암과 함께 상하이 부두에 내린 다나카 기이치 전 육군대장을 저격한 사건으로 유명인사가 됐다. 아쉽게도 그가 쏜 총알이 오발루 뒤에 있던 미국인 여성이 숨졌고, 김익상이 던진 폭탄이 터지지 않아서 실패로 끝났지만, 이 사건은 독립운동사에 상징적인 사건으로 기록됐다. 오성륜은 김익상과 함깨 체포되어 상하이 주재 일본 총영사관 경찰서로 넘겨졌으며, 2달 뒤인 52일에 수감돼 있던 일본인의 도움을 받아 탈옥했다. 이에 따라 일본 경찰은 오성륜에게 당시 현상금 500달러를 걸었다.

 

이후 오성륜은 위조 여권으로 독일에 갔다가 소련 모스크바로 가서 소련 공산당에 입당하여 동방근로자공산대학을 1926년에 졸업했다. 모스크바에서 유학을 마친 오성륜은 192612월 말 블라디보스토크를 거쳐 상하이로 와 광동에 있는 황포군관학교에서 입학했고, 거기서 러시아어를 가르쳤다고 한다. 19279월에는 중국 공산당에 가입했으며, 장제스의 쿠데타로 제1차 국공내전이 터지자 혁명동지인 김산과 함께 광동코뮌과 하이루펑 소비에트에 참가하여 국민당 군대에 맞선 혁명투쟁을 전개했다. 물론 결과적으로 국민당 군대의 토벌로 홍콩으로 탈출했고, 1929년 중국 공산당의 지령을 받아 다시 만주로 돌아갔다.

 

오성륜은 만주사변이 일어나던 1931년 이후에는 만주에서 항일무장투쟁에 가담했으며, 1935년에는 동북인민혁명군 제1군 제2사의 정치부 주임으로 일했다. 193677일 진촨허리 회의에서 항일연군 1, 2군을 합쳐 1로군을 편성했을 때 약 2,000명의 병력을 보유한 2군의 지휘체계는 군장 왕더타이, 정치위원 웨이정민, 정치부 주임 오성륜이었다. 당시 김일성의 경우 2군 산하 6사의 사장이었다고 한다. 1938년에는 동북항일연군 제1로군 정치부주임 겸 군수처장을 지냈다.

 

그러나 만주에서의 일본군의 독립군 토벌이 끝나가던 1941년 오성륜은 체포됐고, 일본에게 투항한 그는 친일로 변절했다. 변절한 그는 만주국 치안부로 들어갔고 열하성 경무청 경위부로 일했으며, 1945년 일본이 패망한 이후 하북성 승덕에서 한교동맹 위원장 겸 조선독립동맹 승덕시 책임자가 되었으나, 연안에 머물다가 화북지역을 해방시키며 진격해온 조선독립동맹과 조선의용군은 그를 체포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원규 작가에 따르면 오성륜은 그들과의 재회를 기뻐하였으나, 조선의용군은 그를 용서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는 1947년에 처형당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일각에서는 그가 병사했다고도 한다. 정확한 진실은 모르겠으나 그는 1947년에 47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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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도 특설대 - 1930년대 만주, 조선인으로 구성된 친일토벌부대
김효순 지음 / 서해문집 / 2014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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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710일 서울대병원에서 100살 먹은 한 노인이 사망했다. 사망일로부터 5일 후 그는 대전에 있는 현충원에 안장되었으며, 그의 죽음과 장례식은 한국사회에서 정치적으로 논쟁을 불러일으켰다. 그의 사망 전날에는 서울 시장이었던 박원순씨가 자살로 생을 마감했는데, 이러한 상황은 문재인 정부 하에서 정치적 논쟁을 불러일으키는 요소로 작용했다. 따라서 두 인사의 장례식은 정치적 성향에 다른 이들의 충돌을 우려하여 다른 장소에서 치러졌다. 그는 한국전쟁 당시 다부동 전투를 승리로 이끌었으며, 인천상륙작전 이후 38선 돌파 이후 미군 제1 기병사단과 선두 경쟁을 벌인 끝에 북한의 수도 평양에 먼저 입성한 인물이었다. 그가 바로 백선엽이다.

 

다부동 전투의 영웅으로 알려진 백선엽은 역사적 비판을 피할 수 없는 행적을 가지고 있는 인물이다. 왜냐하면 그가 바로 일제시대 당시 독립군을 토벌하는 만주군 군사조직인 간도특설대에 복무했던 인물이기 때문이다. 간도특설대는 제2차 세계대전이 일어나기 6개월 전인 19393월에 창설된 부대로 1945년까지 만주에서 활동했던 친일파 부대다. 간도특설대에 복무했던 이들 중에는 조선인들이 적잖게 있었다. 간도특설대에 지원했던 조선인들의 목적은 분명했다. 바로 일본 제국주의가 일으킨 침략전쟁에 동참하기 위함이었다. 따라서 이들이 간도특설대에 복무한 것은 조선의 독립이라는 가치와는 상반된 친일 행위였다.

 

간도특설대가 만주에서 창설된 궁극적인 목적은 만주 지역에서 항일투쟁의 뿌리 뽑기 위함이었다. 왜냐하면 만주지역은 항일투쟁의 본거지였기 때문이다. 1931918일 일본이 만주사변을 일으키자, 만주 지역에서는 항일무장투쟁이 활발해졌다. 1932년 일본은 괴뢰 황제 푸이를 내세워 만주국을 창설했지만, 만주지역 곳곳에서 일어나는 항일무장투쟁을 완벽히 꺾지는 못했다. 1931년 일본이 만주사변을 일으켰을 당시의 중국 대륙은 장제스의 국민당과 마오쩌둥의 공산당간의 내전이 전개되고 있었다. 국민당의 장제스는 일본에 저항하기 보단 중국 공산당 세력을 축출하는데 더 많은 노력을 기울여서, 군벌 장작림의 아들 장학량이 반감을 사게 만들었다.

 

그에 반해 만주 지역에 있던 중국 공산당 휘하의 군인들은 일본에 맞서 만주 지역에서 무장투쟁을 전개했다. 이 과정에서 수많은 조선인들이 중국인들을 도와 일본에 맞서 싸웠다. 따라서 일본은 만주국을 세우는 과정에서 그리고 만주국을 세운 이후에도 항일 무장병력을 상대로 대대적인 토벌작전을 벌였다. 이러한 토벌 작전은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가는 시점까지 전개됐다. 수많은 조선인과 중국인들이 일본 제국주의에 맞서 투쟁하다 전사했고, 이들을 상대하기 위해 일본은 더 많은 병력과 물자를 만주 지역에 배치했다. 이에 따라 만주 지역에 주둔했던 일본군은 70만 이상이 되었고, 최소 600대 이상의 일본군 항공기도 만주 지역에 배치됐다. 태평양 전쟁과정에서 미군을 상대하기 위해 적잖은 병력이 태평양 전선으로 차출되기도 했으나, 일본 관동군은 명실상부 일본군의 주력을 담당한 병력이었다.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1931년 만주사변 이후 만주에서 항일 무장투쟁을 전개했던 세력은 중국 공산당 휘하의 병력과 중국 공산당에 가입하거나 협력하던 조선인들이었다. 그리고 그 당시 만주 항일무장투쟁에서 명성을 쌓아 올린 인물이 있었는데, 그 중 한 사람이 바로 현재 북한 최고지도자의 할아버지인 김일성이었다. 1931년 만주사변 이후부터 항일무장투쟁에 가담한 김일성은 중국 공산당과 협력하여 수많은 전투를 만주에서 전개했다. 민생단 사건으로 죽을 위기에 놓일 뻔했지만, 김일성은 살아남았다. 그 이유는 바로 그의 항일경력을 알아본 중국 공산당의 스중헝이 변호해줬기 때문이었다. 이처럼 김일성은 그 당시 항일 무장투쟁의 붉은 별이었다. 물론 만주에서의 항일 무장투쟁은 김일성 혼자만의 작품은 아니었지만, 그의 존재 또한 독립투쟁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역사임은 부정할 수 없다.

 

반면 김일성과 같은 항일 무장병력을 상대로 토벌작전을 전개한 일본군 안에는 조선인 출신들도 적잖게 있었다. 이들 중에는 해방 이후 대한민국 정부 수립 과정에서 소위 국군의 아버지로 불리는 이들도 있었으며, 심지어 대통령 자리까지 오른 인물도 있었다. 대표적으로 대한민국 해병대의 아버지로 불리는 신현준, 다부동 전투의 영웅 백선엽 그리고 박정희 전 대통령이 이에 해당된다. 다만 이들의 경우 일본군에 복무했던 시점이 조선인 출신 독립군 부대가 만주에서 거의 자취를 감춘 시점이었다. 대신 이들은 중국 공산당 휘하의 팔로군을 상대로 토벌작전을 벌였었다. 이들이 조선인 출신 독립군을 토벌의 진위여부와는 별개로 일본 제국주의 침략전쟁에 적극적으로 협력한 세력이라는 사실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일본은 1932년부터 1935년 봄까지 특히 만주의 간도 지역에서 3차에 걸친 대토벌을 벌였고, 그 이후에도 전차와 항공기를 앞세운 토벌 작전을 1940년대 초반까지 전개했다. 이런 상황속에서 고난의 행군을 마친 김일성은 1940년 홍기하 전투에서 최소 100명 이상의 일본군을 사살하고, 소련으로 피신하여 제88특별여단에 배속됐다. 동북항일연군 3로군 참모총장 허형식은 만주에서 무장투쟁을 지속적으로 벌이다가 194283일 현재 헤이룽장 성 청안에서 전투 중 전사했다. 이처럼 만주의 상황은 항일과 친일간의 전투가 벌어지는 격전지였다.

 

이번에 김효순 선생의 책 간도특설대를 읽으며, 만주에서 전개된 친일파와 항일독립군의 토벌과 반토벌 과정을 상세히 알 수 있었다. 수많은 조선인과 중국인이 만주에서 일본 제국주의자들의 침략에 맞서 투쟁했던 그 역사가 감동적으로 다가왔다. 저자가 말했듯이, 일제시대를 살았던 모든 이들에게 항일의 기준만으로 평가하기는 매우 어려운 일이다. 왜냐하면 일제에 맞서 목숨을 걸고 독립운동을 한다는 것 자체가 어려운 일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저자의 주장대로, 당시 독립운동가들을 탄압하고 토벌하는데 동참하거나 그런 정책에 동참했던 이들이 자신의 행적을 낯부끄럽게 미화하는 것은 당연히 잘못된 것이다. 무엇보다 자신의 행적을 독립운동의 연장선상으로 포장하려는 행위는 당시 만주에서 항일 무장투쟁을 하다가 산화한 이들을 모욕하는 행위이다. 따라서 우리는 과거 백선엽이 근무했던 간도특설대의 존재를 제대로 알 필요가 있으며, 앞으로 더 많은 연구가 필요하다.

 

책에서도 언급된 사실이지만, 1939년에 창설된 간도특설대를 포함하여 일본은 만주지역에서 여러 특수부대들을 창설했다. 당시 일본이 창설한 특수부대 중에는 소련에서 탈출한 이들을 모아 편성한 아사노 부대도 있었다. 이 아사노 부대는 하사관 이하 사병이 모두 러시아인이었다고 한다. 그 외에도 만주 북부 지역의 소수민족인 오로촌족을 모집하여 만든 오로촌 부대, 몽골인들을 모아 창설한 기병부대인 이소노 부대 등이 있었다. 일본이 이와 같은 부대를 창설한 목적은 궁극적으로 소련과의 전쟁을 대비한 것이었다. 따라서 1931년 만주사변부터 1941년까지 일본이 만주에서 벌인 군사작전의 궁극적인 목적 중 하나는 소련을 견제하기 위한 목적이 강했다. 물론 이러한 일본의 대소정책은 19414월 소일 중립조약이 체결되고 같은 해 127일 진주만 기습 공격으로 태평양 전쟁이 시작되면서 수정되었으나, 이들의 기본적인 성격을 공산주의자 색출 및 토벌이라는 제1차적 반공주의적 목적의 색채가 짙었다.

 

아이러니 하게도 이러한 반공주의적 목적에 따른 정책은 이후 미국이 계승했다. 2차 세계대전이 끝난 이후 폭격으로 폐허가 된 일본을 재건하는 과정에서 미국의 대일정책은 평화적인 정책에서 반공주의적인 정책으로 수정됐다. 냉전이 시작됨에 따라 트루먼 대통령은 트루먼 독트린을 선언하여 반공주의 정책을 국제적으로 표명했는데, 이에 따라 미국은 독일과 일본의 산업을 부흥시켜 반공주의 라인의 일원으로 만들었다. 실제로 미국의 제임스 포레스털 해군장관은 소련을 봉쇄하려면 일본, 독일과 그 밖의 추축국이 원래 자리로 돌아가는 것이 필요하다.”라고 주장했는데, 포레스털의 주장은 미국의 대일정책 기조가 됐다.

 

미국의 이러한 정책에서 알 수 있는 사실은 냉전 초기 미국의 대소련 정책이 과거 일본의 대소련 정책과 이데올로기적으로 일맥상통한다는 사실이다. 일맥상통하는 것은 바로 반공주의 이데올로기다. 비극적이게도 만주에서 일어났던 토벌의 비극은 1950년 한국전쟁에서도 반복됐다. 간도특설대에 복무했던 백선엽이 지리산에서 독립운동을 한 이현상과 그가 이끌던 빨치산을 토벌했기 때문이다. 이러한 역사적 사실에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바로 이런 역사를 잊어서는 안된다는 사실이다. 이제는 반공주의에 의해 가려진 만주 항일투쟁의 역사를 바로 알아야 하며, 김효순 선생의 저서 간도특설대는 이러한 사실을 읽는 이들에게 가르쳐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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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들어가며

(1945년 연설하는 여운형, 일설에 따르면 그는 연설을 아주 잘한 것으로 알려졌다.)

 

2차 세계대전에서 일본이 패망하자, 일본의 식민 지배를 받았던 국가들에서는 새로운 국가를 탄생시키기 위한 움직임이 활발히 일어났다. 이중에는 35년 동안 일본의 식민지 지배를 받았던 식민지 조선도 있었고, 1940년부터 일본이 패망할 때 까지 5년간 일제의 통치를 받았던 베트남도 있었다. 많이들 한국과 베트남이 비슷한 역사를 가지고 있다고 얘기한다. 그러한 얘기들의 근거는 아무래도 한국과 베트남이 남북 분단되어 전쟁을 치렀다는 역사적 사실에 둔 것이라 할 수 있다.

(1945년 하노이 바딘광장 연단에 오른 호치민, 호치민은 베트남의 독립운동가로 상당히 탁월한 정치능력과 대중력을 발휘했던 인물이다.)

 

한국의 경우 분단이 지금까지도 유지되고 있는 반면, 베트남은 1975년에 무력으로 통일을 이루면서 분단을 극복해냈다. 이 점이 바로 한국과 베트남의 역사를 가르는 가장 결정적인 부분일 것이다. 한국과 베트남이 비슷한 역사적 경험을 가졌다는 사실은 제법 알려졌으나, 일본이 패망한 해방정국 시점에서 두 국가가 어떠한 방향으로 나아가 새로운 국가를 탄생시키려 했는지에 대해선 제법 알려지지 않았다. 한 가지 흥미로운 사실은 두 국가 모두 주체적으로 새로운 국가를 탄생시키려 했다는 것이다.

 

따라서 이 글은 1945년 당시 해방정국을 주도했던 조선의 독립운동가 여운형(Lyuh Woon Hyung)과 베트남의 독립운동가 호치민(Ho Chi Minh)의 활동을 분석하고 비교하는 것에 목적을 두었다. 또한 여운형의 조직 조선건국준비위원회와 호치민의 조직 베트민을 비교함으로써, 전자는 왜 실패했고 후자는 왜 성공했는지도 분석해보려는 목적도 있다.

 

2. 여운형과 호치민의 간략한 생애

 

여운형과 호치민은 그 시기 각국의 유명한 독립운동가였다. 1945년 시점에서 여운형과 호치민은 조국의 명망높은 독립운동가로 많은 사람들로부터 존경의 대상이었으며, 주체적인 독립국가를 만들고자 했다. 이런 점에 있어서 여운형과 호치민은 흥미로운 공통점이 존재한다. 그러나 이들은 가장 결정적인 차이점도 선명하게 있으며, 그것이 새로운 국가 건설의 성공과 실패를 좌우하는 결정적인 요인이 되었다. 이러한 얘기를 하기 위해선 우선 여운형과 호치민이 어떠한 생애를 가지고 있는지를 볼 필요가 있다.

(양평 몽양 여운형 생가, 현재는 경의중앙선인 신원역에 위치해있다. 몽양 여운형 생가 및 박물관은 2011년에 만들어졌다고 한다.)

 

만능 스포츠인이자 조선의 독립운동가였던 여운형은 화려한 생애를 가지고 있다. 여운형은 1886525일 경기도 양평의 몰락 양반 가문에서 태어났다. 14살이 되던 1900년 미국 선교사 아펜젤러가 설립한 배제학당에 입학했던 그는 1905년 러일전쟁 이후 조선이 을사조약을 통해 일제의 식민지로 전락하자 애국계몽운동에 참여했으며, 집안에 있던 노비들을 해방시키는 대담함을 가진 인물이었다. 도산 안창호의 연설을 듣고 감명 받은 여운형은 일제의 식민지배 초기 중국 난징에 있는 금룽대학에 입학하여 영문학을 전공했고, 1차 세계대전이 종결되던 1918년 신한청년당을 창설하여 우사 김규식을 파리강화회의에 보내는 등 19193.1운동의 불씨를 제공한 결정적인 인물이었다.

(1936년 일장기 말소사건, 독일 베를린 올림픽에서 손기정 선수가 금메달을 따자 일장기를 지워서 보도한 사건이다. 이 사건 또한 조선중앙일보의 사장이던 여운형이 주도했다.)

 

이후 임시정부에 들어간 그는 일본 고관들과의 회담에서 회유와 협박에도 굴하지 않는 진정한 독립운동가로서의 모습을 보였으며, 1922년에는 모스크바에 가서 레닌을 직접 만나는 등 사회주의 운동에도 투신했다. 뿐만 아니라 중국 혁명에도 가담했었으며, 국제적으로 여러군데를 다니고 여행한 인물이었다. 1929년 일본경찰에게 체포되어 식민지 조선에서 옥살이를 하기도 했다. 1933년부터는 조선중앙일보 사장으로 활동했으며, 1936년 손기정 선수의 일장기말소사건을 주도했었다. 1937년 중일전쟁 시점부터는 일제의 패망을 예견하는 뛰어난 국제정세 판단력을 가졌던 인물로 태평양 전쟁 당시 일제의 패망을 확신하고 그 이후를 대비했던 인물이었다. 이에 따라 1944년 건국동맹을 만들어 일제의 패망을 대비했으며, 1945년 조선총독부로부터 행정권을 이양 받아 초기 해방 정국을 주도했다.

(조선건국동맹 깃발)


(배우 신구가 연기한 여운형, 드라마 서울 1945에서 나오는 한 장면이다.)

 

1945년 일본의 패망한 이후 여운형은 자신의 조직을 조선건국준비위원회로 만들어 해방정국을 주도했으며, 한반도 북부에 소련군 남부에 미군이 들어온 상태에서도 민중들에게 대단한 인기를 끌었던 인물이다. 모스크바삼상회의 이후에는 분열된 좌우의 합작과 남북통일정부 수립을 목적으로 좌우합작운동을 전개했으며, 괴한들의 테러의 희생자가 되기도 했다. 그러던 1947719일 혜화동 로터리에서 괴한의 총탄에 비명횡사했다.

(응에안 성에 있는 호치민 생가, 호치민은 1890년 여기서 태어났다.)

 

베트남의 독립운동가인 호치민은 현재까지도 베트남인들에게 큰 존경을 받는 인물이다. 호치민은 1890519일 베트남의 응에안 성에서 태어났다. 어린 시절 아버지를 따라 베트남을 돌아다니다 프랑스가 세운 학교에 입학했던 그는 1911년 프랑스 측의 상선 보조로 취직하여 전 세계를 돌아다녔으며, 프랑스와 미국, 영국, 아프리카, 아시아, 중동, 라틴아메리카 등을 여행했다. 그러던 1917년 프랑스 파리에 정착하여 베트남 독립을 위한 길을 걷게 되었으며, 여운형이 김규식을 파리로 보내던 때에 윌슨의 민족자결주의의 영향을 받아 안남민족 8개 요구를 베르사유 궁전에 가서 직접 제출했었다.

(1920년 프랑스 공산당에서 활동했던 호치민)


(베트남 독립 동맹 대원들, 1941년 호치민은 베트남 독립 동맹 즉 베트민을 창설하여 독립투쟁에 나섰다.)

 

1920년부터는 프랑스 사회당과 공산당에서 활동했으며, 1923년 모스크바로 넘어가 소련 코민테른에서 훈련받았고, 이후 중국 광저우에 정착하여 베트남 독립을 위한 언론 활동 및 교육 활동 그리고 조직 창설활동에 나섰던 인물이었다. 이에 따라 호치민은 1930년에 인도차이나 공산당을 창설했다. 1930년 반불봉기가 실패로 끝난 이후엔 다시 소련에서 유학하다 중국으로 돌아왔고, 194130년 만에 베트남에 귀국하여 베트남 독립 동맹 즉 베트민을 창설했다. 베트민을 창설하여 항불 항일투쟁에 나섰으며, 나중에는 미국 OSS하고도 협력하여 반파시즘 연합전선을 구축했었다. 그러나 1945년 일제 패망 시점에 맞춰 베트남 전역에서 총봉기를 일으켰고, 194592일에 베트남민주공화국을 탄생시켰다.

(1954년 디엔비엔푸 전투, 호치민은 이 승리를 통해 프랑스를 몰아냈다.)

 

그 이후에는 프랑스가 다시 쳐들어오자 독립전쟁을 전개하여 1954년 디엔비엔푸 전투에서 승리함으로써, 프랑스의 100년 식민 지배를 종결시켰다. 그 이후 미국이 남베트남에 친미 반공주의적인 응오딘지엠 정권을 세워 베트남을 침략했지만, 미국의 침략에 맞서 투쟁했다. 그러던 19699279세의 나이로 서거했으며, 호치민 전기를 쓴 윌리엄 J. 듀이커(William J. Duiker)의 표현대로 그의 연설과 글들은 베트남이 미국을 무찌르고 통일을 이룩하는데 큰 힘이 되었다.

 

따라서 여운형과 호치민 둘 다 훌륭한 독립운동가였으며, 진보적인 색채를 가진 지도자 중 한사람이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3. 건국준비위원회의 활동과 조선인민공화국 탄생 그리고 강제해산

 

여운형이 건국준비위원회를 창설한 것은 1945817일이었다. 이는 해방 이후 2일만의 일이었고, 초기 해방 정국을 몽양 여운형이 주도했다는 것을 뜻한다. 여운형의 건국준비위원회는 1944년 그가 조직한 조선건국동맹을 바탕을 둔 조직이었으며, 해방정국에서 행정과 치안을 담당했다.

 

194248일 미국이 진주만 기습 공격에 대한 보복으로 둘리틀 공습을 도쿄에 가했을 때, 여운형은 이를 직접 도쿄에서 목격했다. 또한 그는 당시 이승만이 하고 있던 미국의 소리(Voice of America)’ 단파방송을 비밀리에 들었었고, 일제가 은폐하고자 했던 태평양 전쟁의 전황과 해외 독립운동의 상황을 주변 인사들에게 전달했다. 이런 이야기는 급속히 확산됐고, 그는 결국 194212월에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감옥살이를 했었다. 감옥에서 풀려난 여운형은 1943810일 조동호·이상도·이상백 등과 같은 인물과 만나고 사회주의자와 민족주의자를 아우르는 조직 조선민족해방연맹을 결의했는데, 이 조직이 점차 확대되어 1년뒤인 19449월에는 새로운 단체로 확장 및 탄생했다. 그 조직이 바로 조선건국동맹이었다.

 

조선건국동맹은 1944810일 서울에 있는 현우현의 집에서 건설됐다. 건국동맹은 ‘3불맹서라는 원칙을 규약으로 채택했고, 두 달 뒤인 108일 자신의 고향인 양평군 용문산으로 동지들을 불러 모았다. 여기서 여운형은 또 다른 단체를 조직하는데, 그게 바로 농민동맹이었다. 농민동맹 또한 조선건국동맹과 마찬가지로 조국의 해방을 목표로 활동했고, 징병 및 징용자들을 도피시키고 그들을 반일운동을 전개하게끔 활동하고자 했다. 건국동맹의 규모에 대해선 다소 논란이 많다. 여운형에 대해 가장 방대한 연구서를 집필한 이정식 교수는 건국동맹 단원이 수만 명이었다는 말을 믿지 않으며, 일제말기의 고등경찰이나 헌병대가 파업을 하고 있었다면 모르되 수만이 아니라 수백 명의 맹원을 가진 단체마저도 조직될 수가 없었다고 생각한다.”고 얘기했다. 어쨌든 조선건국동맹은 조직적으로 활동했고, 여기에는 이후 한국의 통일운동가 이기형 선생이나 1936년 베를린 올림픽 마라토너인 손기정도 관여했다.

 

19458월 일본의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원자폭탄이 떨어지고, 소련군이 대일선전포고를 한 뒤 만주에서 거침없는 진격을 하자 일본은 긴급히 협상할 대상을 찾았다. 처음에는 우익 민족주의자 고하 송진우와 접선하려 했다는 얘기가 있으나, 총독부는 여운형과 회담을 했다. 회담에서 여운형은 총독부의 엔도 류사쿠 정무총감에게 다음과 같은 요구를 했다.

 

1. 전 조선의 정치범·경제범을 즉시 석방하라.

2. 집단 생활지인 경성의 3개월분 식량을 확보하라.

3. 치안유지와 건설사업에 아무런 구속과 간섭을 하지 말라.

4. 조선의 추진력인 학생의 훈련과 청년의 조직화에 간섭하지 말라.

5. 조선 내 각 사업장에 있는 일본 노무자들을 우리의 건설사업에 협력케 하라.

 

엔도 총감은 이 조건들을 아무런 이의없이 다 승낙했고, 이것이 바로 여운형이 8.15 직후의 어렵고 혼란한 시기에 치안을 비롯한 여러 가지 중책을 맡게 되었던 배경이었다. 1945815일 일본 천황의 방송이 있자, 35년간 일본의 식민지였던 조선은 해방을 맞이했다. 이에 따라 여운형이 있던 계동으로 수많은 인파가 모여들었다. 여운형의 딸인 여연구 여사의 회고록 <나의 아버지 여운형>에 따르면 갑자기 대문이 활짝 열리고 사람들이 밀려들었다. 어느새 방안과 마루, 마당에 사람들이 꽉 차서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고 한다. 다음날인 816일 여운형은 현재 휘문중학교에 가서 우렁찬 연설을 했다. 연설의 내용을 일부 발췌하면 다음과 같다.

(1945년 8월 16일 휘문중학교 운동장으로 향하는 여운형)

 

조선민족 해방의 날이 왔습니다. 어제 15일 아침 나는 엔도 조선총독부 정무총감의 초청을 받아(중략) 요청을 받았습니다. 나는 이에 대하여 다섯 가지 요구를 제출하였는데 즉석에서 무조건 응락했습니다.(중략) 이것으로 우리 민족해방의 첫걸음을 내디디게 되었으니 우리가 지난날에 아프고 쓰라렸던 것은 이 자리에서 모두 잊어버리고 이 땅을 참으로 합리적이고 이상적인 낙원으로 건설해야 합니다. 개인의 영웅주의는 단연코 없애고 끝까지 집단적 일사분란의 단결로 나아갑시다.”

 

다음날인 817일 여운형은 건국준비위원회를 창설했다. 여운형은 첫째로 치안을 확보하고, 둘째로 건국사업을 위한 민족 총역량을 일원화하고, 셋째로 교통·통신·금융 및 식량대책을 우선적으로 강구하겠다.”는 담화를 발표하여 일반민중으로 하여금 건국준비위원회의 성격이 어떠한 것인지를 명확히 알렸다. 이에 따라 건준은 지방에서 자연 발생적으로 조직된 지방 건준을 강화하는 데 힘을 기울였다. 건국준비위원회와 인민위원회가 한반도 전역에 창설됐다. 당시 소련군은 일본이 항복하기 며칠 전부터 한반도 이북에 들어왔는데, 자신들의 점령 지역에서 건국준비위원회와 인민위원회가 창설되자 이들과 협력하는 길을 택했다. 여기에는 그 지역 좌파들도 있었으나 우익 성향의 고당 조만식과 같은 독립운동가도 있었다. 이북지역에서의 건준 및 인민위원회 활동은 2006KBS에서 방영했던 드라마 서울 1945에서 묘사된 적이 있다.

(건국준비위원회 지부, 건국준비위원회는 해방 초기 전국적으로 설립됐다.)

 

건준이 창설됨에 따라 각 지방의 유지들은 치안대, 보안대, 또는 유사한 이름의 단체를 구성하여 경찰관들을 밀어내다. 8월 말에는 남북을 통틀어 전국 145개소에서 건준의 지회 또는 분회를 구성하였다고 한다. 이런 건준 활동은 그 규모나 범위 면에서 광범위했기 때문에, 1997년 대한민국의 대통령을 지낸 김대중 전 대통령 또한 해방 후 건국준비위원회에 가입했던 경력이 있다. 건국치안대의 경우 청년학생 2,000명을 동원하여 서울의 치안 확보를 위해 노력하는 한편 지역별 및 직장별 치안대를 조직하여 각각 그곳의 치안을 유지케 하고, 중요 자재 및 기관사들과 특히 수원지 등을 보호케 하였으며, 전기회사 및 철도국과 연락하여 교통 원활화를 위해서도 노력했다.

(소련군 사령관을 만난 고당 조만식)

 

브루스 커밍스가 쓴 <한국전쟁의 기원, The Origin of the Korean War>에 따르면, “치안대 본부는 후에 중앙에서 파견된 인원에 의하여 조직된 것과 현지 집단들이 자발적으로 조직하여 중앙의 추인을 받은 지부가 전국에 걸쳐 162개나 구성되었다고 발표했다.” 남북을 아울러 좌우연합체로서 결성된 건준은 소련군이 진주한 이북에서는 친일파 청산 작업에 착수하기도 했다. 실제로 초기 북한지역에 있던 친일파들이 구금되거나 처형되고 그리고 대다수가 남으로 도망친 이유에는 이러한 작업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에 반해 한반도 이남에는 비록 항복했지만, 무장한 일본군이 있었고, 친일파들을 청산하기 위한 작업에 착수하기 다소 어려운 측면이 있었다. 어쨌든 해방정국 초기 여운형을 중심으로 건준이 활동하면서 친일파와 일제의 힘은 약해졌다.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건준은 좌우연합체였다. 그러나 건준은 초기에 몇몇 문제를 겪기도 했는데, 이것은 해방 이후 박헌영을 중심으로 재건된 조선공산당이 대거 편입되면서 생긴 좌경화 현상이었다. 당시 건준의 핵심 멤버였던 안재홍과 같은 우익인사들이 박헌영을 포함한 조선 공산당 인사들의 참여하면서 탈퇴했고, 좌우연합의 색체가 사라지는 문제가 발생했다. 이에 따라 건준은 좌익세력이 주도하게 되었다. 물론 이것이 좌파입장에서 보면 애초에 우익적인 인사들을 축출하고 해게모니를 장악하는 건 당연한 일이었을지도 모르나, 좌우연합이라는 문제에선 아닐 것이다.

(서울에 진입한 미군들, 이것은 또다른 점령의 시작이었다.)

 

이런 과정에서 여운형은 96일 조선인민공화국을 선포했다. 이는 미군이 한반도 이남에 상륙한다는 소식을 접했기 때문이었다. 그로부터 2일 뒤인 194598일 첫 미군부대가 인천항에 상륙했고, 남한 땅에 상륙한 미 제7사단은 다음날인 9일에 수도 서울에 입성했다. 당시 미 제7사단에 있던 총지휘관은 바로 오키나와 전투에서 태평양의 패튼이라 불렸던 존 리드 하지였다. 미군이 들어온다는 소식을 들은 민중들은 이들을 해방군으로써 환영하고자 했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일본 경찰의 발포로 2명이 사망했다. 그러나 미군은 일본을 두둔하는 모습을 보였다. 서울에 입성한 미군은 조선 총독부 건물에서 공식적인 항복 조인식을 갖고, 총독부 국기게양대에 일장기를 내린 뒤 성조기를 올렸다. 이로써 미군정이 실시된 것이다. 그러나 미군은 해방군이 아니었다. 그들은 명백히 점령군이었다. 이런 사실은 이들의 포고령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미군정이 발표한 맥아더 포고령의 내용의 핵심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1. 미군은 점령군의 지위로 들어오고 영어를 공용어로 사용한다.

2. 미국에 반대하는 사람은 사형이나 그 밖의 형벌에 처한다.

3. 경인 지구에 오후 8시부터 다음 날 새벽 5시까지 통행금지를 실시한다.

 

이에 따라 미군정은 여운형이 건설한 인공하에 있던 건준과 인민위원회를 해산하는 방향을 선택했다. 미군정은 이들을 탄압하고 짓밟는 대신, 친일파들이 몰려있던 한민당과 일제 경찰출신과 군인출신인 이들을 해방 정국의 행정요인에 앉혔다. 이에 따라 여운형이 주도했던 해방정국의 헤게모니는 건준에서 미군정으로 넘어갔고, 미군정이 주도하며 한국 현대사의 비극의 서막이 올랐다. 마오쩌둥 1차 전기인 <중국의 붉은 별, The Red Star Over China>를 집필했던 에드가 스노(Edgar Snow)는 해방 후 조선에 와서 2개월간 머무르면서 정세를 알아보고 귀국한 후 [새터데이 이브닝 포스트(Saturday Evening Post)]지에 다음과 같은 글을 게재했다.

 

미국은 아무 준비가 없이 조선에 상륙했다. 그러나 조선에는 건국준비위원회가 있었다. 곧 정치적 준비가 있었다. 미국인이 만일 건국준비위원회를 살렸더라면 조선의 건설은 더 신속하고 유리하였을 것이다.”

 

4. 베트민의 8월 봉기와 베트남민주공화국의 탄생

 

194592일 하노이 바딘광장은 수만 명 혹은 수십만 명의 인파로 시끌벅적했다. 그 이유는 새로운 조국의 탄생을 기다렸기 때문이다. 하노이 바딘광장에는 한 인물이 연단에 올라 연설을 했다. 그는 빛을 바랜 카키색 양복과 고무 슬리퍼 차림이었지만 대중 앞에서 자신이 준비한 독립선언문을 읽기 시작했다. 놀랍게도 그가 읽은 베트남 독립선언문의 시작은 1776년 토마스 제퍼슨의 작성한 미국의 독립선언문의 시작과 같았다. 소수를 제외한 일반 대중들은 그의 연설을 듣기 전까지 그가 1930년 베트남 공산당을 창당한 애국자 응우옌 아이 꾸옥이라는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 그는 연설을 통해 자신이 베트남의 전설의 독립운동가이자 애국자인 응우옌 아이 꾸옥(Nguyễn Ái Quốc)이라는 사실을 밝혔다. 그가 바로 호치민(Ho Chi Minh)이다.

(중월국경지대 까오방에 있는 팍 보 동굴, 호치민은 이곳에 있던 산봉우리를 마르크스 산봉우리라 했고, 시냇물을 레닌 시냇물이라 했다.)

 

1919년 프랑스 파리의 베르사유 궁전에 가서 베트남 인민의 평등한 권리를 요구했던 호치민은 1941년 조국을 떠난 지 30년 만에 귀국했다. 그는 중월국경지대에 있는 팍 보(Pác Bó)라 불리던 동굴에서 한 조직을 창설했다. 그 조직의 명칭은 베트남독립동맹 즉, 베트민(Viet Minh)이었다. 히틀러가 프랑스를 점령했던 1940년 나치 독일의 동맹국인 일본은 베트남을 점령했다. 당시 베트남의 일부 독립운동 세력들은 일본을 해방자로 맞이하는 큰 착각에 빠졌었지만, 식민지 조선의 상황과 3.1운동의 실상을 잘 알고 있던 호치민은 달랐다. 19415월 베트민의 권리 호소문을 보면 그 성격을 잘 알 수 있다.

 

1. 전민단결!

2. 무장궐기!

2. 항불항일!

4. 베트남 독립!

 

이런 점에 있어서 호치민은 선경지명이 뛰어난 베트남의 독립운동가였다. 1941년 진주만 기습 공격 이후 호치민은 1942년 중국의 도움을 얻기 위해 중국으로 갔다가 스파이로 오인하여 중국 경찰에게 체포당했다. 감옥생활을 하면서 <옥중일기>를 집필했다. 오인으로 인한 체포였기에 19439월에 석방됐다. 이 시기 호치민은 전설적인 명장 보 응우옌 잡(Vo Nguyen Giap) 장군에게 베트민의 군대를 양성하도록 했는데, 이에 따라 194412월 잡 장군이 지휘하는 베트남해방군이 창설됐다. 그리고 태평양 전선에서 반파시즘 연합 전선을 형성하고자 했던 미국과 협력하여, 베트민 부대들 중 일부를 OSS에서 훈련받도록 했다. 뿐만 아니라 당시 일본 제국주의자들에 의해 초래된 대기근으로 150~200만이나 되는 베트남인이 아사하자, 베트민은 일본군 창고를 습격하여 쌀을 농민들에게 나눠줌으로써 대중적인 지지를 얻을 수 있었다.

(호치민과 보 응우옌 잡)


(OSS와 호치민, 제2차 세계대전 당시 OSS와 호치민의 협력관계를 심층적으로 다룬 서적이다.)

 

실제로 OSS와 협력관계를 구축한 베트민들 중 일부는 일본군 기지를 공격하여 승리하는 성과를 올리기도 했지만, 2차 세계대전의 전황은 소련군의 베를린 해방과 미국의 오키나와 점령을 기점으로 급변했다. 특히나 19458월 원폭투하와 소련군의 대일전 참전은 베트남 정국을 급변하게 만들었다. 그로부터 5개월 전 기존 프랑스 정권과 협력하던 일본은 3월 쿠데타를 일으켜 괴뢰황제 바오다이(Bao Dai)를 내세웠는데, 기근으로 민심이 이반되자, 민중들 대다수는 독립세력인 베트민을 지지하고 있었다. 8월이 되자 호치민은 베트남에서 혁명을 준비했다. 당시 혁명을 준비하며 했던 호치민의 발언을 일부 발췌하면 다음과 같다.

 

우리 민족의 운명을 결정할 시간이 다가왔습니다. 우리 자신을 해방하기 위해 우리 온 힘을 모아 일어서자!

 

전 세계 수많은 피압박 민족들이 독립을 얻기 위해 다투어 나서고 있습니다. 우리만 뒤처질 수는 없는 일입니다.

 

전진! 전진! 베트민전선 깃발 아래 용감하게 전진합시다!”

 

당시 보 응우옌 잡 장군이 이끄는 베트민의 군대는 급속히 성장했다. 194412월 몇 백 명의 대원으로 시작했던 베트민의 군대는 1945년 초중 순에 수천 명 단위에서 1만 명으로 증가했다. 군대의 숫자는 혁명 과정을 거치며 민중이라는 파도 속에서 더 급속히 증가했다. 1945812일 총봉기를 결정한 호치민의 부름에 따라 베트민은 봉기를 준비했고, 천황 항복 다음날인 816일에 혁명을 시작했다. 이 봉기를 이른바 8월 혁명(August Revolution)이라고 부른다. 이 혁명은 베트남 북부와 중부 남부에서 신속히 진행됐다. 북부에서는 하노이. 중부에서는 후에, 남부에서는 사이공에서 베트민이 주도한 민중봉기가 일어났다. 이 봉기에 전국적으로 총 100만 명 이상이 참가한 것으로 알려졌다. 819일 하노이 봉기에서만 총 10만 명이 봉기에 참여하여 일본군 철수와 프랑스 식민 통치 종결 그리고 바오다이 황제 폐위를 요구했다.

(8월 혁명으로 베트민 깃발이 걸린 하노이, 8월 혁명은 일제의 패망을 전후로 하여 급속히 전개됐다.)


(바오다이 황제, 베트남 응우옌 왕조의 마지막 황제로 일본과 프랑스 그리고 미국의 꼭두각시 노릇을 했던 인물이다.)

 

더 나아가 일본군을 무장해제 시키고, 823일에는 바오다이 황제를 폐위시켰으며, 이에 따라 베트민은 전국적으로 활동하는 조직으로 급부상했다. 당시 시위대는 농촌인민과 도시인민이 섞여 제국주의자 타도, 프랑스 식민주의자 타도, 베트남을 베트남인에게, 모든 권력을 베트민으로등과 같은 혁명적인 구호를 외쳤다. 이 시기 베트민은 지역권력을 장악하고 인민혁명위원회를 수립했으며, 권력까지 장악했다. 북부 하노이와 중부 후에에서의 봉기는 사실상 무혈봉기에 가까운 승리였다. 다만 남부의 경우 까오다이와 같은 친일조직과의 충돌이 있었던 것으로 확인된다. 이런 과정을 거쳐 8월 말 바오다이 폐위 결정에 따라 825일에는 남부의 중심도시 사이공까지 베트민의 지도하에 들어갔고, 베트남 전역은 베트민이 장악하게 됐다.

(응우옌 칵 비언이 쓴 베트남사, 1990년대에 나온 이 책은 베트남 통사로써 전반적인 베트남 역사를 다루고 있다.)

 

8월 혁명에 대해 베트남의 역사학자 응우옌 칵 비언(Nguyễn Khắc Viện)“1945년 당시 8월 혁명은 80년간의 프랑스 식민통치를 종결시켰고, 군주제를 폐지시켰으며, 베트남을 독립국가로 재건했다.”<베트남 오래된 역사, Vietnam A Long History>에서 주장했다. 팜마이흥(Pham Mai Hung)“19458월 혁명은 베트남 민족의 영광스런 국가를 세우고 유지하는 몇몇 역사의 장 가운데 중요한 한 장.”이었다고 평가 내렸다. 1971년 베트남 전쟁 당시 대니얼 엘스버그(Daniel Ellsberg)가 전 세계에 폭로한 펜타곤 페이퍼(The Pentagon Papers)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나온다.

 

호치민은 이미 베트남독립동맹(베트민)을 일본과 프랑스에 맞서 효과적으로 저항할 수 있는 베트남 전체 차원의 유일한 정치조직으로 구축해 놓은 상태였다. 호치민은 전국민적인 지지를 받는 베트남의 유일한 전시 지도자였으며, 19458월에서 9월 사이에 일본을 타도하고, 베트남민주공화국을 창설하고, 진주하는 연합군을 위해 환영식을 개최하면서 베트남 국민들 사이에서 널리 충성을 얻고 있음을 확인시켜 줬다. 19459월의 몇 주 동안, 베트남은 근대사에서 최초이자 유일하게 외국의 지배에서 벗어나 호치민의 지도하에 남에서 북까지 통일됐다.”

 

따라서 호치민과 베트민이 주도한 8월 혁명은 이런 점에서 의의가 정말 큰 하나의 혁명사적 업적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하노이 바딘광장에서 연설하는 호치민)

 

8월 혁명을 통해 베트남에서 해방정국을 주도한 베트민은 92일 새로운 국가를 탄생시켰다. 그 나라가 바로 베트남민주공화국(Việt Nam Dân Chủ Cộng Hòa, Democratic Republic of Vietnam)이었다. 194592일 이미 베트남 전역은 베트민이 만든 붉은 깃발로 장식되어 있었다. 이는 수많은 베트남인들이 베트민을 지지했다는 사실을 의미한다. 194592일 오후는 희망과 기쁨으로 가득 차 있었다. 호치민은 미국 자동차를 타고 하노이 바딘광장으로 향했으며, 도착하여 자신이 준비한 베트남 독립 선언(Declaration of Vietnam Independence)을 낭독했다. 그 내용 중 일부를 발췌하면 다음과 같다.

 

모든 사람들을 평등하게 태어났다. 창조주에게 절대적 권리를 부여받았으며, 그중에는 생명, 자유, 그리고 행복 추구권이 있다. 1776년 미합중국 독립선언문에 둥장했던 불멸의 문구입니다. 더 넓게 해석한다면, 모든 민족은 태어날 때부터 평등하며, 살 권리, 행복할 권리, 자유로울 권리를 지닌다는 말입니다.(중략) 우리 베트남민주공화국 임시정부는 세상을 향해 엄숙히 선포합니다. 베트남은 자유와 독립을 누릴 권리를 가지며, 사실상 자유로운 독립국가가 되었습니다. 베트남 민족이라면 누구나 몸과 마음을 다하여 생명과 재산을 희생하면서까지 자유와 독립을 수호할 각오가 되어있습니다.”

 

이로써 베트남에는 호치민의 주도로 독립국가 베트남민주공화국이 탄생했다. 하노이시는 붉은 깃발이 뒤덮었고, 베트남어, 프랑스어, 영어, 중국어 그리고 러시아러로 쓴 슬로건을 적은 현수막이 길거리마다 내걸렸다. “베트남인을 위한 베트남, 프랑스 식민주의 타도, 독립 아니면 죽음, 임시정부를 지지하라, 호치민 주석을 지지하라, 연합국 사절단 환영등과 같은 구호를 담은 현수막들이었다. 그러나 이런 기쁨도 잠시 연합국들은 베트남을 북위 16도선으로 가르고, 북부에는 중국 국민당군이 남부에는 영국군이 주둔했다. 이 과정을 틈타 프랑스 식민주의자들이 베트남을 침략해 들어왔고, 프랑스는 베트남을 식민지배하려는 야욕을 보였다. 이렇게 해서 프랑스 제국주의자들은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이라는 식민주의 침략전쟁을 일으켰다. 이에 따라 호치민과 베트민은 프랑스 제국주의자들의 침략에 맞서 독립을 쟁취하기 위한 투쟁에 나서게 됐다.

 

5. 해방정국에서의 여운형과 호치민 차이점

 

지금까지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조선의 여운형과 호치민의 활동을 정리했다. 19458월 일본의 항복은 여운형도 호치민에게도 큰 기회였고, 두 인물 다 해방정국을 주체적으로 주도했다. 여운형은 1944년 자신이 조직한 건국동맹을 건국준비위원회로 발전시켜 초기 해방 정국을 주도해 나갔으며, 남과 북 좌와 우를 망라했다. 전국적으로 건국준비위원회는 145개의 지부와 분회를 결성하였으며, 이는 대한민국 전 대통령인 김대중 또한 젊은 시절에 가담했을 정도로 유명하고 대중적인 조직이었다.

(YMCA 건물에서 건국준비위원회 발족식때 강연하는 여운형)

 

호치민은 일본과 프랑스에 맞서 독립투쟁을 벌였고, 실제로 무장투쟁을 벌였으며, 미국 OSS의 지원을 받기도 했다. 그러나 제2차 세계대전 전황 속에서 신속하게 8월 혁명을 주도했으며, 베트남의 북부와 중부 그리고 남부를 단기간에 장악했다. 이런 대중적 기반을 통해 호치민은 194592일 베트남민주공화국을 탄생시켰다. 8월 혁명에는 최소 100만 명 이상이 참여했으며, 대중적으로 큰 호응을 받았고, 결과적으로 기반과 행정이 잡인 국가 탄생으로 이어졌다.

(호치민과 보 응우옌 잡 그리고 혁명동지들)

 

여운형과 호치민은 해방정국을 단기간에 주도했다는 점에서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그들의 훌륭함과는 별개로 결정적인 차이점이 더 명백하다고 할 수 있다. 우선 여운형의 경우 무엇보다 총과 폭탄으로 무장한 조직적인 군대가 없었다. 건준 조직도 어디까지나 치안대였을 뿐, 일본군 자체를 자력으로 무장해제 시킬 정도의 역량은 없었다. 조만식이 주도했던 북조선의 건국준비위원회도 마찬가지다. 초기 한반도 북부의 일본군 무장해제는 사실상 전투를 치르며 진격해나간 소련군이 했다. 따라서 194598일 미군이 상륙하여 건준과 인민위원회를 해산하자 무력하게 해산될 수밖에 없었다.

(베트민을 선두지휘하는 양복입은 보 응우옌 잡 장군, 베트민은 독립운동 단체이자 강력한 군사조직이었다.)

 

반면에 호치민은 초기부터 군대양성에 주력했다. 이미 1945년에 1만 명 가까이나 되는 정규군대를 보유하고 있었으며, 8월 혁명 과정에서 일본군 무장 해제를 베트민의 군대를 통해 할 수 있었다. 또한 베트남민주공화국을 선포한 이후에도 군대를 지속적으로 양성했고, 이는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에서 프랑스군을 무찌를 수 있는 이유이기도 했다. 당원의 숫자도 늘었는데, 보 응우옌 잡에 따르면 “1945년 총봉기의 날에는 당원이 단지 5,000명에 불과했으나, 1951년에는 760,000명으로 늘어났다.”고 한다. 군대의 성장도 이런 식으로 증가했다. 그 얘기는 호치민과 베트민 지도부는 독립군을 양성하는 데 사력을 다했다는 것이다.

(분단된 한반도)


(한때 분단되었던 베트남)

 

따라서 이러한 점에서 여운형과 호치민은 큰 차이가 날 수 밖에 없었다. 19459월 미군정이 들어와 건준과 인민위원회가 무기력하게 해산되었던 것에 반해, 중국 국민당군과 영국군 그리고 프랑스군이 들어왔음에도 호치민은 주도권을 외세로부터 빼앗기지 않았다. 이에 따라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 전까지도 베트민과 프랑스측 사이에 교전이 일어나기도 했었다. 그렇기 때문에 베트민은 외세 프랑스를 몰아낼 수 있었던 반면, 한반도의 운명은 미군정에 의해 좌지우지 됐다. 물론 여기에는 여운형이라는 인물이 군대를 양성하는 인물보다는 정치적 역량을 발휘하는 정치인이라는 점도 작용한 것도 있을 것이다. 그 결과 한반도의 운명은 미군정의 염원에 따라 한국의 응오딘지엠인 이승만이 주도하는 판국이 됐다.

 

이러한 점을 생각해보았을 때, 여운형과 호치민 두 인물 다 진보적이고 훌륭한 지도자였다는 점은 부정할 수 없지만, 군대를 가지고 있느냐 가지고 있지 않았느냐의 결정적인 차이점을 보이고 있다.

 

6. 마치며

 

이 글은 여운형과 호치민 누가 더 훌륭한가?’ 혹은 누가 더 옳았는가?’를 평가하고자 쓴 글이 아니다. 다만 어떠한 차이점과 과정이 있었기에 해방정국의 판도가 한쪽은 집권성공 한쪽은 집권 실패로 갔는지를 분석한 글이다. 사람들이 비교적 역사부분에서 관심을 크게 갖지 않는 부분을 재조명 내지는 재해석하려는 하나의 시도다. 따라서 내 주관적 관점도 많이 투영되어 있다. 앞서 언급했듯이, 개인적으로 여운형과 호치민이라는 인물을 좋아하고 있고, 두 인물을 깊이 존경하기에 이러한 비교분석을 한번 해보고 싶었다.

 

앞으로 한국사회에서 여운형과 호치민이 더 재조명 받기를 바라며

 

7. 참고문헌

 

한국전쟁의 기원, 브루스 커밍스, 김자동(), 일월서각, 1986

 

나의 아버지 여운형, 여연구, 김영사, 2001

 

호치민 평전, 찰스 펜, 김기태(), 자인, 2001

 

베트남 10000일의 전쟁, 마이클 매클리어, 유경찬(), 을유문화사, 2002

 

새로 쓴 베트남의 역사, 유인선, 이산, 2002

 

호치민 평전, 윌리엄 J. 듀이커, 정영목(), 푸른숲, 2003

 

여운형 평전, 이기형, 실천문학사, 2004

 

베트남과 한국의 반공독재국가형성사, 윤충로, 선인, 2005

 

여운형, 이정식, 서울대학교출판부, 2008

 

호치민: 식민주의를 타도하라, 호치민, 월든 벨로(서문), 배기현(옮김), 프레시안북, 2009

 

왜 호찌민인가?, 송필경, 에녹스, 2013

 

한국의 레지스탕스, 조한성, 생각정원, 2013

 

한국독립운동사, 박찬승, 역사비평사, 2014

 

몽양 여운형 평전, 김삼웅, 채륜, 2015

 

브루스 커밍스의 한국전쟁, 브루스 커밍스, 조행복(), 현실문화, 2017

 

디엔비엔푸, 보 응우옌 잡, 강범두(), 길찾기, 2019

 

26일 동안의 광복, 길윤형, 서해문집, 2020

 

Vietnam a long history, Nguyen Khac Vien, The Gioi Publishers,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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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레이스 2021-08-15 10:0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오래 전 브루스커밍스 읽었습니다.
페이퍼가 논문이네요
잘 읽었습니다

NamGiKim 2021-08-15 10:02   좋아요 1 | URL
논문형식을 따르고 있죠?ㅎㅎㅎ a4로 10페이지 이상 분량입니다.ㅋ
 

1947719일 혜화동 로터리(현재 4호선인 혜화역에 있는 그 로터리다.)에서 한 인물이 괴한의 총탄에 암살당했다. 그는 한평생을 조선의 자주독립을 위해 헌신했고, 해방 이후 통일정부 수립을 위해 노력했던 인물이었으며, 19193.1운동의 불씨를 제공한 인물이었다. 그가 바로 몽양 여운형(夢陽 呂運亨, Lyuh Woon Hyung)이다.

 

여운형은 한국 근현대사에서 절대로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다. 그는 독립운동사에 있어서 큰 인물로 애국계몽운동부터 중국 유학, 신한청년당 당수, 3.1운동의 불씨제공, 고려 공산당 활동 및 중국 혁명 참여, 조선중앙일보 사장 그리고 조선건국동맹과 조선건국준비위원회까지 상당히 돋보이는 이력을 가진 매력적인 인물이다.

 

1922년에는 소련의 수도 모스크바에 가서 레닌을 만나기도 했으며, 손문과 장제스 그리고 마오쩌둥과도 친분이 있었으며, 베트남의 독립운동가였던 호치민하고도 만났었다. 또한 해방 이후에는 여러 미군정 인사들이나 소련측 인사들도 그롤 높게 평가했으며, 통일정부 수립을 위해 38선을 넘어 김일성을 포함한 북조선 인사들과도 협의하는 유연한 행동력과 친화력을 보였던 인물이다.

 

나는 무엇보다 그가 태평양 전쟁 말기 일제의 패망을 예상하고 1944년 조선건국동맹을 조직하여 일제의 패망을 대비했다는 점이 가장 매력적으로 다가온다. 재미조선사정협의회장이었던 김용중은 1946년 초 이승만이나 김구는 너무 늙고 경륜도 영도력도 없는 망명객이므로 그들보다는 자유적이고 민중의 인기가 높은 여운형이 적합한 지도자이다.”라고 얘기했는데, 당시 여운형에 대한 대중의 인기가 어느 정도인지 알 수 있다.

 

해방 이후 남북통일 정부 수립을 위해 좌우합작 운동을 전개하다 암살당한 그는 우리 현대사의 비극으로 자리매김했다. 그의 죽음은 1948년 남북분단 정부 수립과 그 과정에서 벌어진 제주4.3학살과 여순학살 그리고 1950년 한국전쟁으로 이어졌다. 서중석 교수나 정병준 교수 그리고 박태균 교수를 포함한 한국 현대사를 연구한 사학자들은 여운형의 좌우합작이 분단을 막을 수 있는 결정적인 기회였다고 평가하기도 한다. 나 또한 그런 입장에 동의하는 바이며, 따라서 그의 암살은 우리 현대사에 있어서 매우 안타까운 일이다.

 

여운형의 암살 배후는 아직 밝혀지지 않았으나, 분단정부를 수립하고자 온갖 테러와 악행을 일삼던 이승만과 그 친일 친미 제국주의 세력일 가능성이 매우 높다. 이들에게 있어서 여운형의 존재는 아주 무서운 존재였다. 무엇보다 여운형은 친일파들이 적극적으로 친일에 나설 때, 끝까지 독립운동의 길을 걸었고, 대중적인 인기도 컸으며, 미국과 소련을 아우르는 통합력과 통일력을 소유한 인물이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어떻게든 제국주의적인 분단정부를 세우기 위해선, 이승만과 친일 친미 제국주의 세력은 그를 제거하고 싶어했을 것이다.

 

오늘은 여운형 선생이 암살당한 719일이다. 아이러니 하게도 이 719일은 친미 제국주의자 이승만이 늙어서 죽은 날이기도 하며, 조선 공산당의 지도자 박헌영이 북한에서 처형당한 날이기도 하고, 버마의 독립지도자 아웅산이 암살당한 날이기도 하다. 국내에서는 719일에 여운형과 이승만의 추모제가 동시에 서울지역에서 거행되는데, 일설에 따르면 이승만 지지자들이 여운형 추모제 근처에 와서 소음공해를 일으키기도 한다고 한다.

 

이제는 여운형 선생의 바람인 남북분단을 허물어 버려야할 시점이다. 앞으로 우리 사회는 여운형 선생의 바람대로 분단을 물리쳐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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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전쟁을 주제로 한 국내의 영화들을 정말 많다. 2004년에 개봉한 강제규 감독의 태극기 휘날리며의 경우 천만관객이라는 성공적인 성과를 거둔 영화도 있다그 외에도 한국전쟁 관련 드라마 또한 적잖게 있다이러한 영화나 드라마를 보면 항상 설정해 놓는 것이 있다그것은 바로 한국전쟁 당시 북한을 돕기 위해 참전한 중공군에 대한 묘사다한국에서 만든 한국전쟁 관련 영화나 드라마 등을 보면정치성향과는 상관없기 중공군에 대한 묘사는 일치한다.

(영화 태극기 휘날리며에 나온 중공군 물량 공세)

 

예를 들어 드라마를 보자면, 2010년 MBC에서 방영했던 반공 드라마 로드 넘버원에서 나온 중공군들은 숫자에 의존한 공격을 퍼붑는 것으로 나온다드라마 상에서 나온 중공군의 평양 탈환작전이나주인공 부대와 한미 연합군이 치르는 전투에서 중공군은 압도적인 물량으로 이들을 압박하지만미공군의 항공지원으로 간신히 무찌르는 것으로 묘사된다. 2006년 KBS에서 방영했던 해방전후사를 다소 진보적인 시각에서 다룬 대하드라마 서울 1945’에서도 중공군의 공세를 66화에서 아주 짧게나마 다루는데여기서도 중공군은 숫자로 한국군을 압도하는 모습을 보인다영화도 마찬가지다앞에서 언급한 태극기 휘날리며나 고지전등에서도 중공군은 물량공세를 펼치는 것으로 나온다.

 

이처럼 국내에서 만든 한국전쟁 관련 대중매체는 중공군을 단순히 인해전술에만 의존한 군대로 묘사한다그렇다면이러한 묘사는 사실적인 묘사일까내가 내리는 답은 물론 아니다. 1950년 6월 25일에 시작된 한국전쟁은 자본주의 진영과 사회주의 진영의 싸움이자내전의 성격을 가지고 있었으며베트남 전쟁과 마찬가지로 사회주의 진영의 민족해방전쟁적인 모순점도 아주 명확하게 드러나 있던 전쟁이었다이 전쟁에 중국이 참전하게 된 것은 1950년 10월 25일의 일이었다.

 

한미 연합군이 인천에 상륙작전을 성공시키고수도 서울을 수복한 시점까지만 해도 중국은 참전할 의사를 보이지 않았었다그러한 이유는 중국이 내전을 끝낸 지 1년도 채 안된 시점이었기 때문이었다그러나 한국군을 포함한 유엔군이 이승만의 염원에 따라 북진을 하게 되면서 이야기가 달라졌다. 1950년 10월 1일 한국군은 단독으로 38선을 돌파했는데그 다음날인 10월 2일 마오쩌둥은 스탈린에게 참전 관련 편지를 보냈고, 10월 13일에 참전을 결정했다. 10월 19일 한미 연합군은 평양에 입성했는데이 시점에 마오쩌둥이 보낸 중공군은 압록강과 두만강 지역에 대기하고 있었다.

(소련제 기관단총으로 무장한 팔로군들)

 

이렇게 되면서 10월 25일 중공군은 한국전쟁에 참전했고참전한 중공군은 여기서 유엔군과 첫 교전을 벌였다이후 중공군은 팽덕회(펑더화이)의 지원 아래 초기에 최소 30만 명이 참전했다참전 규모는 이후 100만에서 150만까지 증가한다이들은 곳곳에서 한국군과 유엔군을 격퇴했고크리스마스가 되기 전 전쟁이 끝날 것이라는 유엔군 사령관 더글라스 맥아더의 말을 몽상으로 바꾸어 놓았다중공군은 북한의 조선인민군과 연합하여 12월에 다시 평양을 탈환하고 1951년에는 다시 서울을 점령했다그 이후엔 수원과 용인 그리고 충청북도 주변까지 진격했다이후엔 유엔군의 반격으로 다시 38선 부근까지 후퇴했고그곳에서 2년간 고지전을 치르다가 휴전을 맞이했다.

 

전쟁 초기 중공군이 쓴 전술로는 흔히 인해전술이 많이 알려져 있다그러나 이는 사실이 아니었다물론 중공군이 인해전술을 쓴 경우가 있었는데대표적으로 유엔군이 철수하게 된 장진호 전투에서였다장진호 전투에서 중공군 12만 명과 유엔군 2만 명이 교전을 벌였고중공군은 4만 명 그리고 유엔군은 2,500명이 전사했다당시 중공군은 미군을 밀어붙이기 위해 물량에 의존했었고당시 참전했던 미군들이 이후 인해전술로 불릴만한 증언들을 했기 때문이다이것이 바로 우리가 중공군에 대해 가지게 되는 인식의 시작점이었다.

(북한에서 만든 중국인민지원군과 조선인민군을 그린 그림)

 

실제로 중공군의 주된 전술은 인해전술이 아니었다이들의 주된 전술은 게릴라전이었다중공군은 과거 제1차 국공내전과 중일전쟁 그리고 제2차 국공내전에서 그랬듯이게릴라전에 익숙한 군대였다마오쩌둥이 키운 중국의 홍군은 게릴라전을 기반으로 성장한 군대였고, 1935년 대장정 뿐만 아니라 중일전쟁 시기에도 일본군이 모든 것을 불태우고약탈하고죽인다.”는 삼광작전을 펼친 것도 팔로군의 게릴라전술에 대한 대응이었다2차 세계대전 이후 장제스에 맞선 전쟁에서도 마오쩌둥의 중국 공산당은 주로 화력보단 게릴라전술에 의존했다내전 초기 국민당군이 430만 대군이었던 반면 공산당은 120만 명의 군대를 보유하고 있었으므로 전력에서도 국민당이 3.5배나 많았다화력에서도 국민당이 미국의 탱크와 항공기를 지원받았기에 압도적이었다따라서 중공군은 이 시점에서만 보더라도 인해전술식 군대가 아니었다.

 

특히 국공내전 시기 동북해방전선에서 활약한 이 중공군은 한국전쟁에서도 국민당군을 굴복시킨 전술을 참전 초기에 사용했다이들은 보급로가 길어지면서 고립된 유엔군과 한국군 부대를 포위 공격했고야간을 이용하여 산을 타고 내려온 부대들을 통해 이들의 후방을 차단했다따라서 당시 적잖은 한국군과 유엔군이 공산진영의 포로로 붙잡혔다결국 이러한 전략전술을 통해 중공군이 다시 38선을 넘어 서울을 점령할 수 있었던 것이고수원과 용인을 넘어 충청북도 인근까지 진격이 가능했던 것이다.

 

그러나 중공군에게도 한계가 있었다그것은 바로 막강한 유엔군의 화력이었다우선 유엔군은 막강한 제공권을 장악하고 있었고거기다 한국전쟁 초기 낙동강 전선에서 보충한 강력한 기갑부대도 있었다특히나 항공화력은 북한 전역을 초토화 시킬 정도로 무서운 수준이었다이러한 화력지원을 토대로 맥아더 해임 이후 유엔군 총사령관이된 리지웨이는 중공군의 춘계 대공세를 효율적으로 막아낼 수 있었던 것이다이에 따라 양측 모두 더 싸우기 보단 휴전협정을 앞당기는 쪽을 택했다본문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중공군의 전략적 뿌리는 게릴라전에 있었다따라서 한국전쟁 시기 중공군이 인해전술에 의존했다는 인식은 사실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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