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성륜의 사진)


에드가 스노(Edgar Snow)의 아내였던 헬렌 포스터 스노우(님 웨일즈)는 어느 한 조선인 혁명가에게 매력을 느꼈었다. 조선인 혁명가에게 큰 관심을 가지고 있던 헬렌은 그를 인터뷰했고, 이후 그녀는 미국에서 책 한권을 출판했다. 그 책이 바로 아리랑의 노래(Song of Ariran: a korean communist in the chinese revolution)’. 현재 우리에게 알려진 아리랑이다. 아리랑은 1940년대 미국에서 출판되기도 했으나, 2차 세계대전 이후 미소냉전이 시작되자, 미국에서 매카시즘의 광풍이 불면서 대대적인 탄압을 받았었다.

 

그러나 이 책은 이후 1960년대 일본에서도 출판됐고, 당시 한국의 젊은 기자출신인 리영희는 우연히 도쿄의 한 서점에서 책의 존재를 알게 됐다. 당시 리영희는 감동했고, 이 책은 이후 한국의 운동권에게도 널리 읽히게 된다. 아리랑은 많은 이들을 감동시켰으며, 2000년대 국내에서도 개정판이 나왔었다, 그 아리랑의 주인공은 한평생을 독립운동의 길을 걸었으며, 중국 혁명에도 참가했고, 이후 1930년대 트로츠키주의라는 오명을 받아 처형되었으나, 1970,80년대 중국 공산당에 의해 복권됐다. 그 인물이 바로 김산이다.

 

김산의 전기인 아리랑이나 이원규 작가의 김산 평전을 읽어본 이라면 알겠지만, 젊은 시절 김산은 만주에서 독립운동을 했으며, 1919년 약산 김원봉이 설립한 의열단에도 가입했었다. 그 시기 김산이 가장 신뢰하던 혁명 동지 한명이 있었다. 그는 독립운동사에서 전설적인 업적을 세운 인물 중 한사람이며, 1922년 의열단이 주도했던 다나카 기이치(1919년 여운형과 회담했던 그 인물이다.) 암살 기도 사건의 주인공이었다. 그가 바로 김산의 혁명동지인 오성륜이다.

 

오성륜은 1900년 함경북도 온성에서 태어났다. 7살이 되던 1907년 부친을 따라 간도 지방 허룽 현으로 이주했고, 1918년 훈춘 현 다황거우의 북일중학교를 졸업했다. 3.1 운동이 일어나는 1919년 왕칭 현 봉오동에서 교원 생활을 하다 독립군 부대에 들어갔다. 1920년 오성륜은 베이징으로 가서 약산 김원봉이 설립한 단체인 의열단에 가입했으며, 전광일, 전광, 오진, 오한생, 오성임 등의 가명을 사용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오성륜은 1922328일 의열단의 김익상, 이종암과 함께 상하이 부두에 내린 다나카 기이치 전 육군대장을 저격한 사건으로 유명인사가 됐다. 아쉽게도 그가 쏜 총알이 오발루 뒤에 있던 미국인 여성이 숨졌고, 김익상이 던진 폭탄이 터지지 않아서 실패로 끝났지만, 이 사건은 독립운동사에 상징적인 사건으로 기록됐다. 오성륜은 김익상과 함깨 체포되어 상하이 주재 일본 총영사관 경찰서로 넘겨졌으며, 2달 뒤인 52일에 수감돼 있던 일본인의 도움을 받아 탈옥했다. 이에 따라 일본 경찰은 오성륜에게 당시 현상금 500달러를 걸었다.

 

이후 오성륜은 위조 여권으로 독일에 갔다가 소련 모스크바로 가서 소련 공산당에 입당하여 동방근로자공산대학을 1926년에 졸업했다. 모스크바에서 유학을 마친 오성륜은 192612월 말 블라디보스토크를 거쳐 상하이로 와 광동에 있는 황포군관학교에서 입학했고, 거기서 러시아어를 가르쳤다고 한다. 19279월에는 중국 공산당에 가입했으며, 장제스의 쿠데타로 제1차 국공내전이 터지자 혁명동지인 김산과 함께 광동코뮌과 하이루펑 소비에트에 참가하여 국민당 군대에 맞선 혁명투쟁을 전개했다. 물론 결과적으로 국민당 군대의 토벌로 홍콩으로 탈출했고, 1929년 중국 공산당의 지령을 받아 다시 만주로 돌아갔다.

 

오성륜은 만주사변이 일어나던 1931년 이후에는 만주에서 항일무장투쟁에 가담했으며, 1935년에는 동북인민혁명군 제1군 제2사의 정치부 주임으로 일했다. 193677일 진촨허리 회의에서 항일연군 1, 2군을 합쳐 1로군을 편성했을 때 약 2,000명의 병력을 보유한 2군의 지휘체계는 군장 왕더타이, 정치위원 웨이정민, 정치부 주임 오성륜이었다. 당시 김일성의 경우 2군 산하 6사의 사장이었다고 한다. 1938년에는 동북항일연군 제1로군 정치부주임 겸 군수처장을 지냈다.

 

그러나 만주에서의 일본군의 독립군 토벌이 끝나가던 1941년 오성륜은 체포됐고, 일본에게 투항한 그는 친일로 변절했다. 변절한 그는 만주국 치안부로 들어갔고 열하성 경무청 경위부로 일했으며, 1945년 일본이 패망한 이후 하북성 승덕에서 한교동맹 위원장 겸 조선독립동맹 승덕시 책임자가 되었으나, 연안에 머물다가 화북지역을 해방시키며 진격해온 조선독립동맹과 조선의용군은 그를 체포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원규 작가에 따르면 오성륜은 그들과의 재회를 기뻐하였으나, 조선의용군은 그를 용서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는 1947년에 처형당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일각에서는 그가 병사했다고도 한다. 정확한 진실은 모르겠으나 그는 1947년에 47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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