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7719일 혜화동 로터리(현재 4호선인 혜화역에 있는 그 로터리다.)에서 한 인물이 괴한의 총탄에 암살당했다. 그는 한평생을 조선의 자주독립을 위해 헌신했고, 해방 이후 통일정부 수립을 위해 노력했던 인물이었으며, 19193.1운동의 불씨를 제공한 인물이었다. 그가 바로 몽양 여운형(夢陽 呂運亨, Lyuh Woon Hyung)이다.

 

여운형은 한국 근현대사에서 절대로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다. 그는 독립운동사에 있어서 큰 인물로 애국계몽운동부터 중국 유학, 신한청년당 당수, 3.1운동의 불씨제공, 고려 공산당 활동 및 중국 혁명 참여, 조선중앙일보 사장 그리고 조선건국동맹과 조선건국준비위원회까지 상당히 돋보이는 이력을 가진 매력적인 인물이다.

 

1922년에는 소련의 수도 모스크바에 가서 레닌을 만나기도 했으며, 손문과 장제스 그리고 마오쩌둥과도 친분이 있었으며, 베트남의 독립운동가였던 호치민하고도 만났었다. 또한 해방 이후에는 여러 미군정 인사들이나 소련측 인사들도 그롤 높게 평가했으며, 통일정부 수립을 위해 38선을 넘어 김일성을 포함한 북조선 인사들과도 협의하는 유연한 행동력과 친화력을 보였던 인물이다.

 

나는 무엇보다 그가 태평양 전쟁 말기 일제의 패망을 예상하고 1944년 조선건국동맹을 조직하여 일제의 패망을 대비했다는 점이 가장 매력적으로 다가온다. 재미조선사정협의회장이었던 김용중은 1946년 초 이승만이나 김구는 너무 늙고 경륜도 영도력도 없는 망명객이므로 그들보다는 자유적이고 민중의 인기가 높은 여운형이 적합한 지도자이다.”라고 얘기했는데, 당시 여운형에 대한 대중의 인기가 어느 정도인지 알 수 있다.

 

해방 이후 남북통일 정부 수립을 위해 좌우합작 운동을 전개하다 암살당한 그는 우리 현대사의 비극으로 자리매김했다. 그의 죽음은 1948년 남북분단 정부 수립과 그 과정에서 벌어진 제주4.3학살과 여순학살 그리고 1950년 한국전쟁으로 이어졌다. 서중석 교수나 정병준 교수 그리고 박태균 교수를 포함한 한국 현대사를 연구한 사학자들은 여운형의 좌우합작이 분단을 막을 수 있는 결정적인 기회였다고 평가하기도 한다. 나 또한 그런 입장에 동의하는 바이며, 따라서 그의 암살은 우리 현대사에 있어서 매우 안타까운 일이다.

 

여운형의 암살 배후는 아직 밝혀지지 않았으나, 분단정부를 수립하고자 온갖 테러와 악행을 일삼던 이승만과 그 친일 친미 제국주의 세력일 가능성이 매우 높다. 이들에게 있어서 여운형의 존재는 아주 무서운 존재였다. 무엇보다 여운형은 친일파들이 적극적으로 친일에 나설 때, 끝까지 독립운동의 길을 걸었고, 대중적인 인기도 컸으며, 미국과 소련을 아우르는 통합력과 통일력을 소유한 인물이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어떻게든 제국주의적인 분단정부를 세우기 위해선, 이승만과 친일 친미 제국주의 세력은 그를 제거하고 싶어했을 것이다.

 

오늘은 여운형 선생이 암살당한 719일이다. 아이러니 하게도 이 719일은 친미 제국주의자 이승만이 늙어서 죽은 날이기도 하며, 조선 공산당의 지도자 박헌영이 북한에서 처형당한 날이기도 하고, 버마의 독립지도자 아웅산이 암살당한 날이기도 하다. 국내에서는 719일에 여운형과 이승만의 추모제가 동시에 서울지역에서 거행되는데, 일설에 따르면 이승만 지지자들이 여운형 추모제 근처에 와서 소음공해를 일으키기도 한다고 한다.

 

이제는 여운형 선생의 바람인 남북분단을 허물어 버려야할 시점이다. 앞으로 우리 사회는 여운형 선생의 바람대로 분단을 물리쳐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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