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방정국은 한국 현대사의 시작점을 알리는 시대다. 2차 세계대전이 연합국의 승리로 끝나고, 일본 제국주의가 패망한 이후 한반도는 북쪽 지역에는 소련군이 남쪽 지역에는 미군이 들어와 38선을 기점으로 사실상 남북 분단됐다. 물론 이 시점까지만 해도 남과 북이 왕래할 수 있는 길은 있었으나, 1948년 남북한에 단독정부가 수립되면서 그러한 길까지 막혔고, 이는 1950년 한국전쟁이라는 극단적인 대립으로 이어졌다. 북한에서는 소련군이 입성한 이후 김일성을 중심으로 사회주의 진영이 연합하여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1948년에 수립됐다.

 

남한에서는 이승만을 중심으로 1948년 대한민국이 수립됐고, 북한하고는 다른 이른바 미국의 지원을 받은 이른바 자유주의 국가(물론 자유주의 국가도 아니지만)가 되었다. 그러나 북한의 정부수립 과정과는 달리 남한에서는 이대올로기적 대립과 갈등이 표출되었는데, 이러한 과정 속에서 김두한과 같은 우익깡패 조직들이나 족청 그리고 서북청년단 같은 이들이 무차별 테러리즘을 선보였다. 독소전쟁 초기 소련을 침공했던 히틀러 파시스트 군대 중 그 악명 높은 아인자츠그루펜은 무차별적으로 민간인들을 학살하고, 폭력을 휘둘렀는데, 그런 역할을 바로 서북청년단이나 이범석의 족청 그리고 김두한의 우익깡패조직들이 한 것이다. 물론 여기에는 미군정사령관 하지의 지원을 받은 이승만이 있었다. 이와 더불어 이승만의 주된 지지층은 한민당과 같은 지주계급으로 친일적 성향을 상당히 가지고 있는 이들이 많았다.

 

1945년 일제가 패망하자 식민지 조선은 해방을 맞았다. 해방 정국 초기 가장 먼저 움직인 세력은 여운형의 건국준비위원회였다. 여운형이 조직한 건국준비위원회는 전국에 걸쳐 활동을 하며 해방 정국의 치안과 행정을 담당했다. 그러나 98일 존 리드 하지(John Reed Hodge)가 이끄는 미군이 한반도 이남에 상륙하면서, 이른바 맥아더 포고령이 한반도 이남 전역에서 실행이 되었는데, 이는 미국이 해방군이 아닌 점령군으로써 들어온 것을 뜻했다. 당시 미군정의 포고령 내용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미군은 점령군의 지위로 들어오고 영어를 공용어로 사용한다.

미국에 반대하는 사람은 사형이나 그 밖의 형벌에 처한다.

경인 지구에 오후 8시부터 다음 날 새벽 5시까지 통행금지를 실시한다.

 

따라서 점령군으로서 한반도에 들어온 미군은 건국준비위원회나 인민위원회를 비롯한 조직들을 인정하지 않았다. 미군은 여운형이 선포한 인공은 물론이고 대한민국 임시정부 그 어느것도 인정하지 않고 일제의 통치 기구를 이용했다. 미군정은 일제강점기 시설 부역한 경찰을 찾아내 다시 경찰로 활동하게 해 경찰 간부 대부분을 일제 경찰 출신으로 채워졌으며, 악질 친일경찰인 노덕술이나 하판락 그리고 간도 특설대 대장이던 백선엽 등이 미군정에 빌붙기 시작했다. 그리고 송진우가 창설한 극우익성향의 한민당 또한 미군정과 적극적으로 협력하기에 이른다.

 

미군정이 실행된 지 1달 뒤인 19451016일 미국에서 오랜 망명생활 끝에 이승만이 귀국했는데, 사실 이승만은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가던 시점부터 태평양 전쟁 총 사령관이던 더글라스 맥아더에게 강력한 반소반공적인 입장을 표명했다. 이러한 이승만의 반공주의는 더글라스 맥아더로 하여금 그를 존경하게 만드는 계기가 되었다. 그 덕분에 이승만은 해방 후 일본 도쿄에서 미군정사령관인 하지를 만날 수 있었고, 그의 지원을 받아 미군 C-47 항공기를 타고 귀국할 수 있었다. 이승만이 귀국하자 한민당 측에선 그를 환영하는 환영식을 아주 성대하게 열어주었다. 이를 통해 이승만은 미군정과 한민당 그리고 친일경찰들의 지원을 얻을 수 있는 정치적 우위를 점할 수 있었다.

 

2차 세계대전 이후 미국과 소련은 한반도의 신탁통치를 놓고 회담을 벌였는데 그것이 바로 모스크바삼상회의였다. 여기서 소련은 한반도의 즉시 독립을 주장했고, 미국은 한반도의 신탁통치를 주장했지만, 이런 사실은 반대로 왜곡되어 국내에 보도되었다. 그 결과 모스크바삼상회의에서 소련의 입장(조선의 즉시 독립)을 지지했던 박헌영 측의 조선 공산당은 매국노로 몰리고, 이에 덩달아 이승만과 김구는 연합하여 반탁운동을 벌였다. 이후에 신탁통치 정정보도가 있었지만 반탁운동은 친일파민족반역자들에게 천재일우의 기회였고, 이 반탁시위는 사실상 해방 정국의 한 면을 장식했다.

 

물론 그 이후에도 제1차 미소공동위원회가 열렸는데, 양측은 합의점을 찾지 못했다. 그러자 이승만은 전라도 정읍에 내려가 남한만의 단독정부 수립을 실행해야 한다.”는 분단론적인 발언을 했으나, 이는 역으로 미군정의 반발을 사서, 여운형과 김규식이 국내에서 좌우합작운동을 전개하게 됐다. 좌우합작운동은 남한내의 좌우갈등을 극복하고, 한반도에 남북 통일정부를 수립할 목적으로 전개되었으나, 결국 이승만 지지파들의 노골적인 방해로 실패로 끝났다. 해방 이후 미군정의 폭압적인 통치에 불만을 가진 민중들은 조선 공산당과 더불어 항쟁을 일으키기도 했는데, 이것이 바로 대구 10.1 항쟁이었다. 대구 10.1 항쟁은 미군정이 탱크까지 동원하여 진압에 나섰고, 적잖은 사람들이 미국과 이승만 지지세력들에 의해 목숨을 잃게 됐다. 이 시기 남한 민중의 70%가 사회주의를 지지했는데, 이러한 목소리를 막은 것은 결국 미국이었고, 미국은 친일파들을 이용하여 민중을 적으로 만들어 놓았었다.

 

좌우합작운동이 실패로 끝나는 과정에서 이승만에겐 또 다른 기회가 찾아왔다. 그것이 바로 19473월 트루먼 독트린이 선언된 것이다. 당시 지구 반대편에 있는 국가 그리스에서는 자본주의와 사회주의 세력간의 내전이 일어났는데, 이 내전의 성격은 서방의 지원을 받았던 이들이 과거 나치 협력이라는 문제를 가지고 있었다는 점에서 민중항쟁적인 성격이 아주 강했다. 트루먼 독트린을 통해 미국은 그리스에 고문단과 군사원조를 진행하게 되었는데, 이는 이승만에게도 유리하게 작용한 것이다. 무엇보다 트루먼 독트린은 반공정책이었고, 이승만이 추구하는 것과 일치했다. 따라서 미군정은 이승만을 보다 더 지원하게 된 것이다.

 

1947년부터 확실한 지원을 받게 된 이승만은 여운형 암살 이후 남한만의 단독정부 수립을 위한 박차를 가했고, 미군정은 유엔에게 한국의 단독정부 수립 선거를 진행하게 했다. 이 과정에서 제주도와 여수순천에서 민중항쟁이 일어나 반제국주의 투쟁을 전개했지만, 미군정과 이승만 세력의 광란의 학살극으로 막을 내렸다. 한국전쟁이 일어나기 전까지 이미 10만 명 가까이나 되는 민간인이 미국과 이승만 세력에 의해 학살당했다. 이러한 점을 생각해보았을 때, 해방 이후 미국과 이승만의 정책은 폭력적이고 반민중적이었으며 제국주의적이었고 광란의 대학살극이자 유혈극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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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5.18 광주민주항쟁 41주년입니다. 우리는 광주에게 참으로 많은 빛이 있습니다. 지금 우리가 누리고 있는 자유, 인권 그리고 민주주의는 전두환 군사독재정권과 반공주의적 폭력에 맞서 끝까지 저항했던 이들이 있기에 존재하는 것입니다.

1980년 5월 18일 대규모의 공수부대와 군사병력을 투입했던 전두환 일당은 광주를 피바다로 만들었고 수백 수천명을 죽거나 다치게 했습니다. 자국민에게 곤봉을 휘두르고 착검한 M-16 소총으로 찔러죽였으며, 총탄도 난사했었습니다.

1980년 광주의 비극은 단순히 일회성 사건이 아닙니다. 해방 이후 이승만과 미국이 저질러온 대구 10.1 항쟁과 제주 4.3 항쟁, 여순민중항쟁 그리고 한국전쟁 시기 수십만을 무차별 학살한 국민보도연맹 학살 이후 베트남 전쟁에서의 한국군의 민간인 학살의 역사가 반복된 것입니다.

특히나 전두환과 노태우 그리고 80년 광주에 투입되었던 공수부대는 베트남 전쟁에서 훈련된 지휘관들이었고 병사들이었습니다. 이러한 점을 생각해 보았을때, 광주의 비극은 베트남 전 당시 한국군의 살인적이고 파괴적인 군사작전과 분명히 밀접해있습니다.

오늘만큼은 이 광주민주항쟁의 투사들을 잊지 맙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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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란공 2021-05-18 15:16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유족들을 포함하여 후손들이 앞으로 해야할 일이 참 많이 남아있다고 느끼는 날입니다.

NamGiKim 2021-05-24 00:15   좋아요 0 | URL
네 맞습니다.

테레사 2021-05-18 16:09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저 사진 속의 청년은 어찌되었을까요? ㅜㅜㅜㅜ

NamGiKim 2021-05-24 00:15   좋아요 0 | URL
살아있을 수도 있고 아니면 순국하셨을지도 모르죠. 아무튼 마음이 아프죠.

행인96 2021-05-23 23:3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그런데 어떻게 갈수록 광주항쟁을 왜곡하고 당시 항쟁에 참여했던 시민들과 희생자들을 모욕하는 사람들과 그 주장들을 믿는 이들이 늘어나고 있는것 같아 머리가 아픕니다.. 이 사람들을 어찌해야 할까요..

NamGiKim 2021-05-24 00:14   좋아요 1 | URL
그 북한군 개입을 운운하는 지 모씨의 정신병자 같은 소리는 자세히 생각해보면 국민을 바보천치로 아는거죠.
 

19603.15 부정선거를 통해 장기집권을 계획했던 이승만은 4.19 혁명으로 인해 대통령직에서 물러나게 되었다. 1공화국이 무너진 이후 대한민국에는 장면 내각과 허정 과도정부가 수립되며 제2공화국이 탄생했다. 4.19 혁명의 불씨는 제1공화국 몰락 이후 이승만 정권 시기 반공이데올로기에 대한 저항으로 표출되기도 했다. 그러나 장면 내각 또한 이들과 노동운동에 대한 대응은 강경한 처지였다. 당시 한국은 매우 가난했다. 1공화국 시기 이승만을 포함한 친일 지배계급들의 부정부패로 인해 한국의 경제는 휘청거렸고, 지금당장이라도 북한에 흡수 되도 무리가 아닐 지경이었다.

 

그러던 1년 뒤인 1961516일 한국 현대사에 있어 빼놓을 수 없는 사건이 일어났다. 그것이 바로 5.16 쿠데타였다. 516일 박정희와 김종필을 중심으로 하는 장교 250명과 사병 3,500명은 한강에 진입하여 새벽 3시에 서울 입성에 성공했다. 그리고 2시간 뒤인 새벽 5시에 첫 방송을 통해 거사의 명분을 밝히는 한편 6개항의 혁명공약을 선포했다. 5.16 쿠데타가 성공한 것이다. 당시 박정희와 그 반란세력은 다음과 같은 공약을 선포했다.

 

첫째, 반공을 국시(國是)의 제일의(第一義)로 삼고, 지금까지 형식적이고 구호에만 그친 반공태세를 재정비 강화할 것입니다.

 

둘째, 유엔헌장을 준수하고 국제협약을 충실히 이행할 것이며, 미국을 위시한 자유우방과의 유대를 더욱 공고히 할 것입니다.

 

셋째, 이 나라 사회의 모든 부패와 구악을 일소하고, 퇴폐한 국민도의와 민족정기를 다시 바로잡기 위하여 청신한 기풍을 진작할 것입니다.”

 

이승만 정권 몰락 이후 또 다시 강력한 반공국가가 탄생하는 과정이었다. 5.16 쿠데타로 한국에 새로운 정권이 들어서자, 이 새로운 정권에 관심을 가진 두 나라가 있었다. 바로 북한과 미국이었다. 1950년 한국전쟁에서 한국의 적국이었던 북한의 경우 박정희가 과거 남로당에 있었던 경력을 자세히 살펴보기 시작했다. 물론 5.16 쿠데타 이후 새 정권이 반공을 제1의 국시로 삼는다.”는 것을 확인한 이후엔 수도 평양에서 반미집회를 가지기도 했지만, 다른 한편 북한의 김일성은 박정희 친형 박상희의 절친 이었던 황태성을 밀사로 내려 보내기도 했다.

 

박상희의 친구였던 황태성은 일제시기 사회주의 계열 독립운동가로 조선 공산당과 남로당에서 활동했고, 여운형이 창설한 조선건국동맹과 건국준비위원회에서도 활동했던 사회주의자였다. 1946년 대구 10.1 항쟁 이후 월북한 황태성은 1961년 박정희를 만나기 위해 밀사로 남한에 파견되었다. 앞서 말했듯이 그의 남하는 간첩행위를 목적으로 한 것이 아니었고, 그의 목적은 박정희를 설득하여 최소한 남북연방제에 대한 합의를 보는 것이었다. 하지만 박정희는 그를 간첩죄로 몰아 1963년 형장의 이슬로 보냈다. 하지만 한 가지 걸리는 건 그를 밀사로 보낼 때 김일성의 신임장을 주지 않았다는 점이다. 확실한 건 박정희가 이렇게 손쉽게 자신의 친형의 친구를 사형시킬 것을 북한이 예상하지는 못했다는 사실이다.

 

박정희가 정권을 잡자 미국의 존 F. 케네디 대통령 또한 한국 상황을 주의 깊게 살펴보고 있었다. 아이젠 하워를 이어 미국의 대통령이 된 존 F. 케네디는 미국 역사에 있어 20세기의 뉴프론티어를 상징하는 인물이었다. 미국 하버드대에서 우수한 성적과 더불어 인기가 많았던 케네디는 제2차 세계대전 중이던 1940<영국은 왜 잠자고 있었나(Why England Slept)>라는 논문으로 명성을 끌었던 인물이다. 태평양 전쟁 당시 PT-보트 부대의 해군으로 참전했던 그는 전역 이후 미국 정치에 발을 담갔던 케네디는 1960년 미국 대통령이 되었다.

 

노르망디 상륙작전을 지휘했던 드와이트 아이젠하워가 매카시즘 열풍을 전후로 해서 반공주의를 표방했다면, F. 케네디는 매카시즘이 많이 완화된 상태에서 미국 대통령으로써 반공주의를 추구했다. 케네디가 대통령이던 시절은 비록 매카시즘의 광풍은 사라졌지만, 미국의 반공주의가 영향력을 발휘하고 미국인들로부터 지지를 받던 시기였다. 1961년 소련의 흐루쇼프는 베를린에 장벽을 설치했고, 2년 전인 1959년 미국의 옆 나라 쿠바에선 피델 카스트로와 체게바라가 이끄는 혁명군이 정권을 잡았다. 그리고 1년 뒤인 1962년에는 이른바 쿠바 미사일 위기라 하여 전 세계가 제3차 세계대전의 공포 속에 휩싸이기도 했었다. 또한 베트남에서는 남베트남민족해방전선 이른바 베트콩들이 미국의 지지를 받는 응오딘지엠 정권에 맞서 혁명운동을 전개하고 있는 중이었다.

 

이러한 국제적인 상황속에서 존 F. 케네디는 미국을 중심으로 한 강력한 반공주의적 정책을 추진했다. 즉 박정희의 5.16 군사 쿠데타는 존 F. 케네디가 반공정책을 추진하는 과정 속에서 동아시아에서 일어난 사건이었다. 거기다 5.16 한 달 전에는 소련에서 인류 최초의 우주비행사 유리 가가린을 탄생시켰고, 피델 카스트로 정권을 전복시키기 위한 목적으로 진행된 피그스만 침공은 대실패로 끝난 시점이었다. 이런 상황속에서 케네디의 반공주의는 열이 올라 있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었다. 실제로 존 F. 케네디는 베트남 전쟁을 전면화 시키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인물로 반공주의를 수호하기 위해 동남아시아에서 전략촌 소개나 네이팜 폭탄 투하 그리고 고엽제 살포와 같은 전쟁범죄행위를 실행에 옮겼었다.

 

19614월 박정희의 쿠데타 계획을 포착한 미국 CIA516일 케네디 대통령에게 상황을 보고했다. 물론 미국은 5.16을 그저 지켜만 보았다. 쿠데타 이후 박정희가 했던 일중 하나에는 미국으로부터 정권의 승인을 받는 것이 있었다. CIA를 통해 한국의 상황과 박정희의 이력을 파악하고 있던 미국의 존 F. 케네디 대통령은 박정희를 의심하고 있었다. 무엇보다 박정희가 해방 이후 남로당에 가입했던 사실을 파악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박정희에게 있어서 케네디 대통령을 자신의 편으로 설득시키는 일은 참으로 중요한 일이었다.

 

19611111일 미국행 비행기에 오르게 된 박정희는 1114일 존 F. 케네디 대통령을 만나 백악관에서 1시간 20분 동안 정상회담을 가졌다. 이 과정에서 박정희는 케네디에게 잘 보이기 위해서 자신의 반공관을 증명하고자 했다. 케네디 또한 이러한 점들을 이용해서 한국을 반공의 보루로 만들고 싶은 목적이 분명히 있었다. 여기서 더 나아가 박정희는 케네디에게 베트남에 한국군을 파병할 용의가 있다.”고 밝히며 전형적인 친미반공적인 면모를 자발적으로 입증해주었다. 당시 박정희의 방미길에 동행했던 리영희 기자는 당시의 상황을 다음과 같이 회고했다.

 

박정희가 케네디와 회담할 때 보인 비굴한 태도에서 실망감을 더하게 되었다. 케네디의 오만방자한 태도도 꼴보기 싫었지만, 박정희의 비굴한 태도는 목불인견이었다. 박정희는 금색 도금 테두리의 짙은 색안경을 끼고 빳빳한 등받이 의자에 앉아 있었다. 가끔 다리를 반듯이 모으기도 하고 꼬기도 하고 그랬다. 마치 군주 앞에 홀로 불려나온 신하처럼 긴장한 모습이 역력했다.”

 

이를 통해 박정희는 미국 정부가 지속적으로 추진해온 동북아시아 지역 통합 전략에서 한미, 한일 관계의 마지막 꼭짓점을 마무리 짓는 중요한 인물로 부상할 수 있었다. 무엇보다 케네디는 박정희가 베트남에 군대를 파병하겠다 자진한 점을 매우 만족스러워 했다. 이것은 박정희가 미국이 만든 아시아의 반공주의 전략과 맞아 떨어졌기 때문이었다. 이 얘기를 역으로 얘기하자면, 박정희는 미제국주의자 존 F. 케네디가 추진하던 베트남에서의 침략전쟁에 자발적으로 동참할 의지를 표명한 것이며, 미제국주의의 동아시아 반공전략에 적극 협력하는 인물이었다는 사실이다. 따라서 케네디가 그를 지지한 것은 미국의 제국주의적 패권 전략에 맞아 떨어졌기 때문이지, 세간에서 얘기하는 박정희 대통령 각하의 탁월한 외교력따위의 것이 절대로 아니다.

 

참고문헌

 

20세기 우리 역사, 강만길, 창작과비평사, 1999

 

박정희 평전, 전인권, 이학사, 2006

 

한국현대사 다이제스트 100, 김삼웅, 가람기획, 2010

 

박정희 평전, 김삼웅, 앤길, 2017

마르크스주의로 본 한국 현대사, 한규한, 책갈피,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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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진홍 2023-06-02 20: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모스크바붉은광장이나 내용에 리영희기자.. 이사람은 철저히 공산주의시점에서 글을썼다. 빨갱이색끼

NamGiKim 2023-06-16 23:01   좋아요 0 | URL
ㅇㅇㅇ 빨갱이 맞음.
 

한국에서 생각하는 한국의 독립운동 무장투쟁사는 지나치게 단순화 되어 있다. 한국 교과서에서 독립운동 무장투쟁사로서 나오는 전투들은 홍범도의 봉오동 전투와 김좌진의 청산리 전투다. 물론 이 전투들이 한국 독립운동사에서 저평가 받을 이유는 없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독립운동사에 있어서 봉오동과 청산리만 있었던 것은 절대 아니다. 1930년대 일본이 만주사변을 일으키며 중국 대륙을 침략했지만, 독립운동 세력들은 전투를 끊이질 않았다. 다만 일본 제국주의의 지배가 심해지면서 일제에 충성하는 친일파 민족반역자들의 숫자가 늘어났던 것이다.

 

일본 제국주의에 맞선 독립군들의 무장투쟁은 1930년대와 제2차 세계대전 당시인 1940년대 에도 지속되었다. 한국 독립운동사에선 이 부분이 상당히 생략되고 나오는데, 그것은 당시 항일 무장투쟁을 주도했던 세력들이 사회주의 성향이 있던 좌파 계열이었기 때문이다. 또한 이들 중 일부는 중국 혁명에 가담하여 항일투쟁과 반국민당 투쟁도 같이 전개했었다. 1930년대 만주 지역에서 민족계열 독립운동가 지청천이 지휘하는 군대가 전투를 일본군에 맞서 여러 번의 전투를 치렀고, 만주사변 시점부터 항일투쟁에 참가한 김일성 또한 만주지역에서 여러 번의 항일투쟁을 전개했다.

 

특히나 김일성의 경우 1940년 소련으로 넘어가기 전까지 수많은 전투를 치렀고, 그가 지휘했던 잔존 동북항일연군은 1942년까지 만주에서 일본군에 맞서 항일투쟁을 전개했다. 이점에서 조선민중의 무장 독립투쟁은 일제 중기와 말기에 가서 사회주의 세력들이 주도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이 시기 연안을 포함한 중국 대륙에서 항일무장투쟁을 전개하던 또 다른 독립운동 단체가 있었다. 그 조직이 바로 의열단 단장인 약산 김원봉이 맡았던 조선의용대였다.

 

1937년 노구교 사건을 빌미로 일본이 중일전쟁을 일으키자 중국 관내 한인 독립운동가들은 중국 측과 본격적으로 연대하여 항일운동을 전개하고자 했다. 1936년 중반부터 좌파계열 독립운동 세력들도 세력을 결집하였는데, 19371112일 이들은 조선민족전선연맹을 결성했다. 이 조선민족전선연맹은 민족혁명당과 조선민족해방동맹 그리고 조선혁명자연맹 등의 단체가 모여 만든 연합체였다. 이들은 노동자·농민 외에 중소 자산계급까지도 조선혁명에 참여할 수 있다고 보았고, 군대를 창설했다. 이렇게 하여 창설된 것이 19381010일에 결성된 조선의용대였다.

 

조선의용대는 중일전쟁 이후 창설된 한인 부대로써 최고 대장은 약산 김원봉이었고, 창설시기 총 대원수는 97명이었다. 193811월과 19391월에 김원봉은 중국 국민당의 장제스와 임시정부의 백범 김구를 두 사람의 연합을 요구하면서 연합전선을 구축하고자 했다. 이것은 1937년 중일전쟁이 본격화 되면서 전개된 제2차 국공합작의 연장선상이었다. 약산 김원봉이 이끄는 조선의용대는 항일전을 치르는 전방에서 대적선전공작과 유격전을 전개하고자 했고. 실제로 그러한 선전적 그리고 군사적 활동을 전개했다.

 

조선의용대는 엄밀히 따지자면 전투부대가 아니었다. 이들이 일차적으로 맡은 임무는 대적선전공작이었다. 이것은 일본군 병사들에게 반전과 염전의 정서를 주입하고 사기를 저하시켜 투항을 유도하는 작전이었으며, 일본군에 강제로 끌려온 조선청년들을 독립군 쪽으로 끌어오는 역할이었다. 이들은 주로 일본군 주둔지역 주민들에게 국제정세와 일본군의 만행에 대한 강연을 하고 창가를 가르쳐 반일분위기를 고취시키기도 했고, 일본어와 중국어로 된 소책자와 전단·삐라 등을 수십만 장씩 만들어 살포하고 일본군이 투항할 때 쓸 신변보호용 통행증을 만들어 배포하기도 했다. 물론 이들이 선전활동만 했던 것은 아니다. 이들 또한 중국군과 합동하여 일본군에 대한 기습 공격을 감행하기도 했다. 대표적으로 1940323일에는 매복전에서 일본군 탱크 2대와 차량 8대를 파괴하고 적군 30명 이상을 사살하는 전과를 올리기도 했었다. 즉 이러한 유격전을 통해 일본군에게 군사적인 타격을 가했었다.

 

그러나 조선의용대은 19416월 조선청년전위동맹쪽 조선의용대원 80여 명 정도가 북상하여 팔로군 지역인 화북으로 가게 되면서 사실상 해체되었다. 그 이후 조선의용군에 있던 대원들은 대대적으로 북상하게 되면서 19427월에는 조선독립동맹으로 창립됐다. 이 조선독립동맹은 창립선언에서 당파를 망라하여 항일민족통일전선을 구축하며, 중국 특히 중국공산당과 공동전선을 결성하여 항일전에 참가하고, 무장부대를 확충하며, 대중을 조직하고, 동방 피압박 민족해방운동 및 일본의 반전운동과 연계하겠다고 밝혔다. 이들이 모여 생긴 군대가 바로 조선의용군이다.

 

조선의용군은 주로 화북지역에 근거지를 둔 무장 선전 부대임과 동시에 전투 부대였다. 이들은 주로 태항산 일대에서 전투를 치렀다. 이들은 조선의용대에 있을 당시 194112월에는 호가장 전투와 형태 전투 그리고 19425월에는 편성 전투 등을 치렀다. 조선의용군은 화북 지방의 각지에 흩어져서 다양한 활동을 전개했는데, 전지공작과 병사모집, 선전활동, 첩보활동 등이 있었다. 19436월에는 중국 팔로군과 함께 태항선 곳곳에서 이른바 일본군 반소탕전을 전개했으며, 이와 동시에 조직의 규모도 확장해 나갔다.

 

1943년부터는 중국 팔로군의 지휘를 받았던 조선의용군은 경성 당시 약 140명이었던 병력이 제2차 세계대전이 종료되던 19458월에는 1,000명 이상의 군대로 성장했다. 해방 후에는 마오쩌둥 휘하의 중국인민해방군에 편입되었고, 이후 제2차 국공내전에서 장제스의 국민당 부대에 맞서 맹활약을 펼쳤다. 국공내전이 중국 공산당의 승리로 끝난 이후 이들은 1948년에 수립된 북한으로 귀국하여 조선인민군으로 흡수되었다.

 

참고문헌

 

한국의 레지스탕스, 조한성, 생각정원, 2013

 

한국독립운동사, 박찬승, 역사비평사, 2014

 

약산 김원봉 평전, 김삼웅, 시대의 창,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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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5815일 일본의 천황은 항복 선언을 했다. 2차 세계대전을 일으킨 일본이 패망한 것이다. 일제가 패망하자 한반도 전역에선 기쁨의 함성이 울렸다. 이런 기쁨의 함성 속에서 가장 먼저 움직인 인물은 바로 몽양 여운형이었다. 1944년부터 건국동맹과 농민동맹을 조직하여 일제의 패망을 준비했던 여운형은 천황의 항복 선언 1일전 조선 총독부의 엔도 류사쿠 정무총감과 회담하여, 치안권과 행정권을 이양 받아 해방 정국을 주도해나갔다. 그 시기 여운형이 조직한 것은 바로 조선건국준비위원회(보통 건국준비위원회라고 부른다)였다.

 

여운형이 주도한 조선건국준비위원회는 한반도 전역에서 해방 조선의 치안과 행정을 유지해나갔다. 건국준비위원회의 인기는 막대했다. 여운형 평전의 저자이자 통일운동가인 이기형 선생은 해방 60주년에 만들어진 여운형 다큐에서 몽양 여운형이 가장 인기가 많은 지도자였음을 인정했다. 한국의 대통령인 김대중 전 대통령 또한 이 조직에 잠시나마 가담했었다. 건국준비위원회는 마찬가지로 소련군이 주둔한 한반도 이북에서 소련군과 함께 친일파 청산과 새 조국 건설 사업을 추진해 나갔다.

 

소련군이 주둔하지 않았던 한반도 이남의 경우 진보적인 인물 여운형이 건준을 이끌어 나갔고, 광주에서 벽돌공으로 숨어 지내던 박헌영은 이른바 조선 공산당을 재건하여 세력을 키웠다. 쉽게 말해 좌익에 대한 민중의 지지율은 매우 높았다. 이런 상황에서 가장 공포에 떨었던 세력들은 바로 민족을 팔아먹었던 친일파 민족반역자들이었다. 이들은 한반도 이북에서 친일파들이 단계적으로 청산되고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고, 한반도 이남에 좌익정권이 들어서면 본인들 또한 역사의 심판대에 설 것이라는 두려움에 빠져 있었다. 따라서 이들은 어떻게 해서든 살아남고자 했다. 그러던 과정에서 이들이 생각한 것은 바로 좌익에 맞서는 조직을 건설하는 것이었다.

 

안타깝게도 한반도의 분단은 제2차 세계대전 말기부터 연합국들 사이에서 기정사실화 되어있었다. 19452월 소련의 얄타에서 모인 루스벨트와 처칠 그리고 스탈린은 한반도 분단을 결정했고, 5개월 뒤인 포츠담 회담에서도 이를 확인했다. 따라서 일본의 패망 이후 한반도는 바로 38도선을 기점으로 한반도 이북에는 소련이 그리고 한반도 이남에는 미국이 들어갈 계획이었다. 물론 소련의 경우 대일선전포고 이후 치스차코프 휘하의 제1극동전선군이 한반도 이북을 단기간에 해방시키는 성과를 올렸다. 그러나 미국의 경우 19456월에 끝난 오키나와에서 상륙이 멈춰있는 상태였다. 따라서 미군의 상륙은 상대적으로 늦을 수밖에 없었다.

 

194598일 첫 미군부대가 인천항에 상륙했다. 남한 땅에 상륙한 미 제7사단은 다음날인 9일에 수도 서울에 입성했다. 당시 미 제7사단에 있던 총지휘관은 바로 오키나와 전투에서 태평양의 패튼이라 불렸던 존 리드 하지였다. 미군이 들어온다는 소식을 들은 민중들은 이들을 해방군으로써 환영하고자 했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일본 경찰의 발포로 2명이 사망했다. 그러나 미군은 일본을 두둔하는 모습을 보였다. 서울에 입성한 미군은 조선 총독부 건물에서 공식적인 항복 조인식을 갖고, 총독부 국기게양대에 일장기를 내린 뒤 성조기를 올렸다. 이로써 미군정이 실시된 것이다.

 

미군정은 제1단계로 서울과 경기지역을 점령하고 912일부터 23일까지 개성과 수원 그리고 춘천 등을 점령했으며, 2단계에서는 제40사단이 경남북지역을 점령하고 7사단의 점령지역을 확대시켜 1010일까지 경기도와 강원도의 모든 지역을 점령했다. 더 나아가 제3단계에서 6사단을 동원하여 전남과 전북까지 접수하며 남한의 전 지역을 점령하기에 이르렀다. 미군이 입성할 당시 민중은 해방군으로써 환영하고자 했다. 이는 여운형이나 박헌영 등의 좌익계열들도 그러했다. 그러나 미군은 해방군이 아니었다. 그들은 명백히 점령군이었다. 이런 사실은 이들의 포고령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미군정이 발표한 맥아더 포고령의 내용의 핵심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미군은 점령군의 지위로 들어오고 영어를 공용어로 사용한다.

미국에 반대하는 사람은 사형이나 그 밖의 형벌에 처한다.

경인 지구에 오후 8시부터 다음 날 새벽 5시까지 통행금지를 실시한다.”

 

이러한 포고문은 조선인민의 해방을 언급했던 소련군의 포고령과는 분명한 차이가 있었다. 이렇게 해서 한반도 이남에서 이른바 미군정이 실시됐다. 포고령에서 밝힌 것과 같이 점령군으로 들어온 미군은 가장 먼저 공포에 떨고 있던 친일 세력들과 손을 잡았다. 총독부의 행정체계를 그대로 유지했고, 그 인사들의 대다수를 일제에 협력했던 친일인사들로 채워나갔다. 경찰의 경우는 민중들의 반발을 샀던 친일파들이 거의 대부분이었다. 거기다 미군정은 여운형이 주도한 건국준비위원회와 그 과정에서 자주적으로 건설된 인민위원회 그리고 여운형과 좌우인사들이 합쳐 선포한 조선인민공화국을 전면적으로 부정했다.

 

이것은 우리역사에 있어 엄청난 실수였다. 서방에서 최초의 마오쩌둥 전기를 쓴 에드가 스노는 미군정이 건준을 해산한 것에 대해 다음과 같이 평가했다.

 

미국이 만일 건국준비위원회를 살렸더라면 조선의 건설은 더 신속하고 유리하였을 것이다.”

 

결국 미군정이 실시되면서 나타난 이런 모순적인 구조는 1946년 모스크바삼상회의 이후 대구에서 10.1 항쟁이라는 민중투쟁적인 형태로 나타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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