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전쟁을 주제로 한 국내의 영화들을 정말 많다. 2004년에 개봉한 강제규 감독의 ‘태극기 휘날리며’의 경우 천만관객이라는 성공적인 성과를 거둔 영화도 있다. 그 외에도 한국전쟁 관련 드라마 또한 적잖게 있다. 이러한 영화나 드라마를 보면 항상 설정해 놓는 것이 있다. 그것은 바로 한국전쟁 당시 북한을 돕기 위해 참전한 중공군에 대한 묘사다. 한국에서 만든 한국전쟁 관련 영화나 드라마 등을 보면, 정치성향과는 상관없기 중공군에 대한 묘사는 일치한다.
(영화 태극기 휘날리며에 나온 중공군 물량 공세)
예를 들어 드라마를 보자면, 2010년 MBC에서 방영했던 반공 드라마 ‘로드 넘버원’에서 나온 중공군들은 숫자에 의존한 공격을 퍼붑는 것으로 나온다. 드라마 상에서 나온 중공군의 평양 탈환작전이나, 주인공 부대와 한미 연합군이 치르는 전투에서 중공군은 압도적인 물량으로 이들을 압박하지만, 미공군의 항공지원으로 간신히 무찌르는 것으로 묘사된다. 2006년 KBS에서 방영했던 해방전후사를 다소 진보적인 시각에서 다룬 대하드라마 ‘서울 1945’에서도 중공군의 공세를 66화에서 아주 짧게나마 다루는데, 여기서도 중공군은 숫자로 한국군을 압도하는 모습을 보인다. 영화도 마찬가지다. 앞에서 언급한 ‘태극기 휘날리며’나 ‘고지전’등에서도 중공군은 물량공세를 펼치는 것으로 나온다.
이처럼 국내에서 만든 한국전쟁 관련 대중매체는 중공군을 단순히 인해전술에만 의존한 군대로 묘사한다. 그렇다면, 이러한 묘사는 사실적인 묘사일까? 내가 내리는 답은 “물론 아니다”다. 1950년 6월 25일에 시작된 한국전쟁은 자본주의 진영과 사회주의 진영의 싸움이자, 내전의 성격을 가지고 있었으며, 베트남 전쟁과 마찬가지로 사회주의 진영의 민족해방전쟁적인 모순점도 아주 명확하게 드러나 있던 전쟁이었다. 이 전쟁에 중국이 참전하게 된 것은 1950년 10월 25일의 일이었다.
한미 연합군이 인천에 상륙작전을 성공시키고, 수도 서울을 수복한 시점까지만 해도 중국은 참전할 의사를 보이지 않았었다. 그러한 이유는 중국이 내전을 끝낸 지 1년도 채 안된 시점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한국군을 포함한 유엔군이 이승만의 염원에 따라 북진을 하게 되면서 이야기가 달라졌다. 1950년 10월 1일 한국군은 단독으로 38선을 돌파했는데, 그 다음날인 10월 2일 마오쩌둥은 스탈린에게 참전 관련 편지를 보냈고, 10월 13일에 참전을 결정했다. 10월 19일 한미 연합군은 평양에 입성했는데, 이 시점에 마오쩌둥이 보낸 중공군은 압록강과 두만강 지역에 대기하고 있었다.
(소련제 기관단총으로 무장한 팔로군들)
이렇게 되면서 10월 25일 중공군은 한국전쟁에 참전했고, 참전한 중공군은 여기서 유엔군과 첫 교전을 벌였다. 이후 중공군은 팽덕회(펑더화이)의 지원 아래 초기에 최소 30만 명이 참전했다. 참전 규모는 이후 100만에서 150만까지 증가한다. 이들은 곳곳에서 한국군과 유엔군을 격퇴했고, 크리스마스가 되기 전 전쟁이 끝날 것이라는 유엔군 사령관 더글라스 맥아더의 말을 몽상으로 바꾸어 놓았다. 중공군은 북한의 조선인민군과 연합하여 12월에 다시 평양을 탈환하고 1951년에는 다시 서울을 점령했다. 그 이후엔 수원과 용인 그리고 충청북도 주변까지 진격했다. 이후엔 유엔군의 반격으로 다시 38선 부근까지 후퇴했고, 그곳에서 2년간 고지전을 치르다가 휴전을 맞이했다.
전쟁 초기 중공군이 쓴 전술로는 흔히 인해전술이 많이 알려져 있다. 그러나 이는 사실이 아니었다. 물론 중공군이 인해전술을 쓴 경우가 있었는데, 대표적으로 유엔군이 철수하게 된 장진호 전투에서였다. 장진호 전투에서 중공군 12만 명과 유엔군 2만 명이 교전을 벌였고, 중공군은 4만 명 그리고 유엔군은 2,500명이 전사했다. 당시 중공군은 미군을 밀어붙이기 위해 물량에 의존했었고, 당시 참전했던 미군들이 이후 ‘인해전술’로 불릴만한 증언들을 했기 때문이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중공군에 대해 가지게 되는 인식의 시작점이었다.
(북한에서 만든 중국인민지원군과 조선인민군을 그린 그림)
실제로 중공군의 주된 전술은 인해전술이 아니었다. 이들의 주된 전술은 게릴라전이었다. 중공군은 과거 제1차 국공내전과 중일전쟁 그리고 제2차 국공내전에서 그랬듯이, 게릴라전에 익숙한 군대였다. 마오쩌둥이 키운 중국의 홍군은 게릴라전을 기반으로 성장한 군대였고, 1935년 대장정 뿐만 아니라 중일전쟁 시기에도 일본군이 “모든 것을 불태우고, 약탈하고, 죽인다.”는 삼광작전을 펼친 것도 팔로군의 게릴라전술에 대한 대응이었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장제스에 맞선 전쟁에서도 마오쩌둥의 중국 공산당은 주로 화력보단 게릴라전술에 의존했다. 내전 초기 국민당군이 430만 대군이었던 반면 공산당은 120만 명의 군대를 보유하고 있었으므로 전력에서도 국민당이 3.5배나 많았다. 화력에서도 국민당이 미국의 탱크와 항공기를 지원받았기에 압도적이었다. 따라서 중공군은 이 시점에서만 보더라도 인해전술식 군대가 아니었다.
특히 국공내전 시기 동북해방전선에서 활약한 이 중공군은 한국전쟁에서도 국민당군을 굴복시킨 전술을 참전 초기에 사용했다. 이들은 보급로가 길어지면서 고립된 유엔군과 한국군 부대를 포위 공격했고, 야간을 이용하여 산을 타고 내려온 부대들을 통해 이들의 후방을 차단했다. 따라서 당시 적잖은 한국군과 유엔군이 공산진영의 포로로 붙잡혔다. 결국 이러한 전략전술을 통해 중공군이 다시 38선을 넘어 서울을 점령할 수 있었던 것이고, 수원과 용인을 넘어 충청북도 인근까지 진격이 가능했던 것이다.
그러나 중공군에게도 한계가 있었다. 그것은 바로 막강한 유엔군의 화력이었다. 우선 유엔군은 막강한 제공권을 장악하고 있었고, 거기다 한국전쟁 초기 낙동강 전선에서 보충한 강력한 기갑부대도 있었다. 특히나 항공화력은 북한 전역을 초토화 시킬 정도로 무서운 수준이었다. 이러한 화력지원을 토대로 맥아더 해임 이후 유엔군 총사령관이된 리지웨이는 중공군의 춘계 대공세를 효율적으로 막아낼 수 있었던 것이다. 이에 따라 양측 모두 더 싸우기 보단 휴전협정을 앞당기는 쪽을 택했다. 본문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중공군의 전략적 뿌리는 게릴라전에 있었다. 따라서 한국전쟁 시기 중공군이 인해전술에 의존했다는 인식은 사실이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