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도 특설대 - 1930년대 만주, 조선인으로 구성된 친일토벌부대
김효순 지음 / 서해문집 / 2014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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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710일 서울대병원에서 100살 먹은 한 노인이 사망했다. 사망일로부터 5일 후 그는 대전에 있는 현충원에 안장되었으며, 그의 죽음과 장례식은 한국사회에서 정치적으로 논쟁을 불러일으켰다. 그의 사망 전날에는 서울 시장이었던 박원순씨가 자살로 생을 마감했는데, 이러한 상황은 문재인 정부 하에서 정치적 논쟁을 불러일으키는 요소로 작용했다. 따라서 두 인사의 장례식은 정치적 성향에 다른 이들의 충돌을 우려하여 다른 장소에서 치러졌다. 그는 한국전쟁 당시 다부동 전투를 승리로 이끌었으며, 인천상륙작전 이후 38선 돌파 이후 미군 제1 기병사단과 선두 경쟁을 벌인 끝에 북한의 수도 평양에 먼저 입성한 인물이었다. 그가 바로 백선엽이다.

 

다부동 전투의 영웅으로 알려진 백선엽은 역사적 비판을 피할 수 없는 행적을 가지고 있는 인물이다. 왜냐하면 그가 바로 일제시대 당시 독립군을 토벌하는 만주군 군사조직인 간도특설대에 복무했던 인물이기 때문이다. 간도특설대는 제2차 세계대전이 일어나기 6개월 전인 19393월에 창설된 부대로 1945년까지 만주에서 활동했던 친일파 부대다. 간도특설대에 복무했던 이들 중에는 조선인들이 적잖게 있었다. 간도특설대에 지원했던 조선인들의 목적은 분명했다. 바로 일본 제국주의가 일으킨 침략전쟁에 동참하기 위함이었다. 따라서 이들이 간도특설대에 복무한 것은 조선의 독립이라는 가치와는 상반된 친일 행위였다.

 

간도특설대가 만주에서 창설된 궁극적인 목적은 만주 지역에서 항일투쟁의 뿌리 뽑기 위함이었다. 왜냐하면 만주지역은 항일투쟁의 본거지였기 때문이다. 1931918일 일본이 만주사변을 일으키자, 만주 지역에서는 항일무장투쟁이 활발해졌다. 1932년 일본은 괴뢰 황제 푸이를 내세워 만주국을 창설했지만, 만주지역 곳곳에서 일어나는 항일무장투쟁을 완벽히 꺾지는 못했다. 1931년 일본이 만주사변을 일으켰을 당시의 중국 대륙은 장제스의 국민당과 마오쩌둥의 공산당간의 내전이 전개되고 있었다. 국민당의 장제스는 일본에 저항하기 보단 중국 공산당 세력을 축출하는데 더 많은 노력을 기울여서, 군벌 장작림의 아들 장학량이 반감을 사게 만들었다.

 

그에 반해 만주 지역에 있던 중국 공산당 휘하의 군인들은 일본에 맞서 만주 지역에서 무장투쟁을 전개했다. 이 과정에서 수많은 조선인들이 중국인들을 도와 일본에 맞서 싸웠다. 따라서 일본은 만주국을 세우는 과정에서 그리고 만주국을 세운 이후에도 항일 무장병력을 상대로 대대적인 토벌작전을 벌였다. 이러한 토벌 작전은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가는 시점까지 전개됐다. 수많은 조선인과 중국인들이 일본 제국주의에 맞서 투쟁하다 전사했고, 이들을 상대하기 위해 일본은 더 많은 병력과 물자를 만주 지역에 배치했다. 이에 따라 만주 지역에 주둔했던 일본군은 70만 이상이 되었고, 최소 600대 이상의 일본군 항공기도 만주 지역에 배치됐다. 태평양 전쟁과정에서 미군을 상대하기 위해 적잖은 병력이 태평양 전선으로 차출되기도 했으나, 일본 관동군은 명실상부 일본군의 주력을 담당한 병력이었다.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1931년 만주사변 이후 만주에서 항일 무장투쟁을 전개했던 세력은 중국 공산당 휘하의 병력과 중국 공산당에 가입하거나 협력하던 조선인들이었다. 그리고 그 당시 만주 항일무장투쟁에서 명성을 쌓아 올린 인물이 있었는데, 그 중 한 사람이 바로 현재 북한 최고지도자의 할아버지인 김일성이었다. 1931년 만주사변 이후부터 항일무장투쟁에 가담한 김일성은 중국 공산당과 협력하여 수많은 전투를 만주에서 전개했다. 민생단 사건으로 죽을 위기에 놓일 뻔했지만, 김일성은 살아남았다. 그 이유는 바로 그의 항일경력을 알아본 중국 공산당의 스중헝이 변호해줬기 때문이었다. 이처럼 김일성은 그 당시 항일 무장투쟁의 붉은 별이었다. 물론 만주에서의 항일 무장투쟁은 김일성 혼자만의 작품은 아니었지만, 그의 존재 또한 독립투쟁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역사임은 부정할 수 없다.

 

반면 김일성과 같은 항일 무장병력을 상대로 토벌작전을 전개한 일본군 안에는 조선인 출신들도 적잖게 있었다. 이들 중에는 해방 이후 대한민국 정부 수립 과정에서 소위 국군의 아버지로 불리는 이들도 있었으며, 심지어 대통령 자리까지 오른 인물도 있었다. 대표적으로 대한민국 해병대의 아버지로 불리는 신현준, 다부동 전투의 영웅 백선엽 그리고 박정희 전 대통령이 이에 해당된다. 다만 이들의 경우 일본군에 복무했던 시점이 조선인 출신 독립군 부대가 만주에서 거의 자취를 감춘 시점이었다. 대신 이들은 중국 공산당 휘하의 팔로군을 상대로 토벌작전을 벌였었다. 이들이 조선인 출신 독립군을 토벌의 진위여부와는 별개로 일본 제국주의 침략전쟁에 적극적으로 협력한 세력이라는 사실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일본은 1932년부터 1935년 봄까지 특히 만주의 간도 지역에서 3차에 걸친 대토벌을 벌였고, 그 이후에도 전차와 항공기를 앞세운 토벌 작전을 1940년대 초반까지 전개했다. 이런 상황속에서 고난의 행군을 마친 김일성은 1940년 홍기하 전투에서 최소 100명 이상의 일본군을 사살하고, 소련으로 피신하여 제88특별여단에 배속됐다. 동북항일연군 3로군 참모총장 허형식은 만주에서 무장투쟁을 지속적으로 벌이다가 194283일 현재 헤이룽장 성 청안에서 전투 중 전사했다. 이처럼 만주의 상황은 항일과 친일간의 전투가 벌어지는 격전지였다.

 

이번에 김효순 선생의 책 간도특설대를 읽으며, 만주에서 전개된 친일파와 항일독립군의 토벌과 반토벌 과정을 상세히 알 수 있었다. 수많은 조선인과 중국인이 만주에서 일본 제국주의자들의 침략에 맞서 투쟁했던 그 역사가 감동적으로 다가왔다. 저자가 말했듯이, 일제시대를 살았던 모든 이들에게 항일의 기준만으로 평가하기는 매우 어려운 일이다. 왜냐하면 일제에 맞서 목숨을 걸고 독립운동을 한다는 것 자체가 어려운 일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저자의 주장대로, 당시 독립운동가들을 탄압하고 토벌하는데 동참하거나 그런 정책에 동참했던 이들이 자신의 행적을 낯부끄럽게 미화하는 것은 당연히 잘못된 것이다. 무엇보다 자신의 행적을 독립운동의 연장선상으로 포장하려는 행위는 당시 만주에서 항일 무장투쟁을 하다가 산화한 이들을 모욕하는 행위이다. 따라서 우리는 과거 백선엽이 근무했던 간도특설대의 존재를 제대로 알 필요가 있으며, 앞으로 더 많은 연구가 필요하다.

 

책에서도 언급된 사실이지만, 1939년에 창설된 간도특설대를 포함하여 일본은 만주지역에서 여러 특수부대들을 창설했다. 당시 일본이 창설한 특수부대 중에는 소련에서 탈출한 이들을 모아 편성한 아사노 부대도 있었다. 이 아사노 부대는 하사관 이하 사병이 모두 러시아인이었다고 한다. 그 외에도 만주 북부 지역의 소수민족인 오로촌족을 모집하여 만든 오로촌 부대, 몽골인들을 모아 창설한 기병부대인 이소노 부대 등이 있었다. 일본이 이와 같은 부대를 창설한 목적은 궁극적으로 소련과의 전쟁을 대비한 것이었다. 따라서 1931년 만주사변부터 1941년까지 일본이 만주에서 벌인 군사작전의 궁극적인 목적 중 하나는 소련을 견제하기 위한 목적이 강했다. 물론 이러한 일본의 대소정책은 19414월 소일 중립조약이 체결되고 같은 해 127일 진주만 기습 공격으로 태평양 전쟁이 시작되면서 수정되었으나, 이들의 기본적인 성격을 공산주의자 색출 및 토벌이라는 제1차적 반공주의적 목적의 색채가 짙었다.

 

아이러니 하게도 이러한 반공주의적 목적에 따른 정책은 이후 미국이 계승했다. 2차 세계대전이 끝난 이후 폭격으로 폐허가 된 일본을 재건하는 과정에서 미국의 대일정책은 평화적인 정책에서 반공주의적인 정책으로 수정됐다. 냉전이 시작됨에 따라 트루먼 대통령은 트루먼 독트린을 선언하여 반공주의 정책을 국제적으로 표명했는데, 이에 따라 미국은 독일과 일본의 산업을 부흥시켜 반공주의 라인의 일원으로 만들었다. 실제로 미국의 제임스 포레스털 해군장관은 소련을 봉쇄하려면 일본, 독일과 그 밖의 추축국이 원래 자리로 돌아가는 것이 필요하다.”라고 주장했는데, 포레스털의 주장은 미국의 대일정책 기조가 됐다.

 

미국의 이러한 정책에서 알 수 있는 사실은 냉전 초기 미국의 대소련 정책이 과거 일본의 대소련 정책과 이데올로기적으로 일맥상통한다는 사실이다. 일맥상통하는 것은 바로 반공주의 이데올로기다. 비극적이게도 만주에서 일어났던 토벌의 비극은 1950년 한국전쟁에서도 반복됐다. 간도특설대에 복무했던 백선엽이 지리산에서 독립운동을 한 이현상과 그가 이끌던 빨치산을 토벌했기 때문이다. 이러한 역사적 사실에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바로 이런 역사를 잊어서는 안된다는 사실이다. 이제는 반공주의에 의해 가려진 만주 항일투쟁의 역사를 바로 알아야 하며, 김효순 선생의 저서 간도특설대는 이러한 사실을 읽는 이들에게 가르쳐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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