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네수엘라 위기 - 왜 발생했고 어떻게 전개될 것인가?
조셉 추나라.앤디 브라운.김준효 지음 / 책갈피 / 201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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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네수엘라에 대하여

2019년 초 미제국주의자 도널드 트럼프는 예전부터 눈엣가시처럼 여겨왔던 남미 국가중 하나인 베네수엘라에 대한 제제와 억압을 가해왔다. 2013년 베네수엘라의 위대한 지도자 우고 차베스(Hugo Chavez)가 사망한 뒤, 그 뒤를 이은 니콜라스 마두로(Nikolas Maduro)는 제국주의의 고립과 더불어 사회의 반혁명 세력들로부터 막강한 압렵을 받고 있다.

베네수엘라는 경제적인 면과 정치적인 면에서 위기를 겪고 있다. 최근에는 미제국주의의 지원을 받던 후안 과이도는 니콜라스 마두로 정권을 전복시키기 위해 반동 쿠데타를 시도했으나, 베네수엘라 민중은 이를 저지했다. 니콜라스 마두로 편에 선 베네수엘라 민중들이 무조건적으로 마두로를 지지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렇다 해서 후안 과이도에게 호감을 가지고 있는 것은 절대 아니다. 따라서 과이도의 반동 쿠데타는 실패로 끝날 수 밖에 없었다.

냉전 시기 미국의 남미 문제 개입은 사실상 남미 민중의 자결권은 커녕 이를 짓밟는 제국주의적 처사이자 침략이었다. 이와같은 미제국주의의 침략과 신자유주의적 흐름에 남미 민중은 반대했고, 그 대표적인 국가가 베네수엘라라고 할 수 있다. 1990년대 베네수엘라에서 정권을 잡은 우고 차베스는 사회의 각계 분야에서 진보적인 정책들을 실행했다. 물론 차베스의 한계라 하자면, 자본주의적 국내 기업들과 베네수엘라에 들어와 있던 외국 기업들의 자본 투기를 사실상 방치했다는 것이다. 이는 니콜라스 마두로 또한 마찬가지다. 그들은 우익 반동 세력들이 언제든지 정권을 잡을 수 있도록 사실상의 강력한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 차베스가 우익 쿠데타로 2000년대 중반에 죽을 뻔했음에도 말이다.

우고 차베스 대통령의 진보적 개혁 정책 및 사회주의 비전은 그런 한계도 있었지만, 그들이 성취한 업적또한 분명히 존재했다. 차베스 정권은 ‘미시온 프로그램‘을 실시하여 판자촌에 사는 어린이와 청년들에게 고등학교와 대학교에 진학할 기회를 줬고, 문맹 퇴치 프로그램도 거창하게 실행했다. 기초 의료를 제공하기 위해 쿠바에서 의사를 불러와 환자 1800만명을 치료하는 성과를 올리기도 했다. 즉 차베스는 가난한 인민대중에게 복지혜택을 부여하고자 헌신했다.

오직 자본주의만이 최고라 생각하고 또 그렇게 믿고 싶어 하는 미국의 입장에서 베네수엘라는 당연히 전복되고 없어저야할 국가였다. 따라서 미제국은 베네수엘라에게 극심한 경제적 제제를 가했고, 우익 반동들의 차베스 전복 쿠데타도 지원했다. 미국이 베네수엘라를 ‘인도적 지원‘하겠다는 주장은 말그대로 위선이다. 그리고 그 위선은 제국주의적인 정권전복을 뜻하는 것이다. 미국은 니콜라스 마두로가 미국 정부의 지원을 수용하든 거부하든 간에 이를 베네수엘라 개입 사태의 명분으로 삼을 생각이었다. 그리고 정말 미국이 인도적 지원을 생각했다면 베네수엘라에 대한 경제적 제제를 해제하면 될일이다.

따라서 진보를 추구하는 사람이라면 미제국이 주장하는 ‘인도적 지원‘ 따위의 위선에 속지 말아야 한다. 책갈피에서 출간한 이 책은 베네수엘라의 문제를 심층적으로 분석한 책이다. 필자는 이책에서 상당 부분 공감했다. 아무튼 베네수엘라가 만약 반동들에 의해 전복된다면 결과는 최악일 것이다. 베네수엘라 인민들의 투쟁이 승리하기를 바란다!! 그들은 미제국주의에 맞서 승리할 것이다. Viva La Venezuel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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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주사변(Japanese Invasion of Manchuria)

1931년 9월 18일 밤 10시 20분 펑톈 시 외곽 북쪽으로 7.5km 정도 떨어진 류타오후에는 뤼순과 펑톈 그리고 창춘을 연결하는 만철(만주 철도)이 관통하고 있었다. 평소와 다를게 없이 만주의 황량한 벌판을 달리는 특급열차가 그 곳을 통과하는 순간 정체불명의 폭발음이 일어났다. 다행히도 열차는 파괴되거나 탈선하지는 않았고 제 갈 길을 달렸다. 사실 철도 주변에는 관동군 소속의 공병들이 숨어 있었다. 폭발 직후 그들은 일본군 특무기관과 일본군 제2대대 본부 부대에 무전기로 “동북군이 만철 철로를 파괴했다”고 보고했다.

보고를 받은 이타가키 세이시로 대좌는 관동군 사령관의 명의를 제멋대로 사칭하여 일본군 제2대대와 제5대대에게 펑톈 교외에 있는 장학량 휘하의 동북군을 일제히 공격하라고 명령했다. 이것이 바로 9.18 사변 즉 만주사변의 시작이었다. 일본군 제2대대와 제5대대에게 공격을 받게된 장학량 휘하늬 동북군은 혼란에 빠졌다. 1931년 9월 19일 오전 8시 30분 일본 관동군은 경성의 조선군 사령부에 전보를 보내어 신속한 병력 증파를 요청했다. 당일 오전 관동군 주력은 펑톈 성 외곽을 포위하였고, 중포를 앞세운 관동군의 기습공격을 받은 장학량측 동북군은 패주했다.

주요 정부 청사를 비롯해 펑톈 항공국, 병기창, 동대영이 잇따라 일본 관동군에게 함락되면서 20일 새벽까지 펑톈 성 전역이 관동군의 수중으로 들어갔다. 1931년 9월 20일 관동군 2개 보병대대와 1개 포병연대가 창춘을 공격하였고, 오전 7시쯤 그 지역을 완벽히 점령하였고, 다음 날에는 지린 성으로 진격하여 전투 없이 그곳을 장악했다. 일본의 관동군은 9.18 사건 후 겨우 2~3일도 안 되는 기간에 남만주 전역을 장악했다. 사실 만주는 일본의 반식민지였다. 자본, 금융, 철도, 산업 등이 일본에게 예속된 상태였고, 군사적으로도 일본 광동군은 만철과 주요 철도 그리고 요충지들을 장악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일본의 만주사변은 국제연맹(League of Nations)의 규율을 위반한 행위였다. 그러나 이미 힘을 잃은 국제연맹은 일본의 만주사변에 대해 아무런 대응을 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국제연맹을 이끄는 열강들은 자신들의 이익을 계산하기에 급급했기 때문이었다. 또한 서구 열강들은 1929년 미국 월스트리트에서 시작된 경제 대공황(The Great Depression)으로 인한 실업 및 내부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아시아에서의 일제 침략보다 더 중요했다. 그들은 일본과의 외교적 마찰을 일으키기를 원하지 않았다. 따라서 국제연맹은 일제의 만주침략을 그냥 외면했던 것이다.

1931년 일제가 일으킨 만주사변은 결과적으로 일본을 군국주의화 시키고, 전쟁국가로 이끌었다. 1919년 3.1운동 이후 무단통치에 대한 대안으로 문화통치를 펼쳤던 일제는 1931년 만주사변을 시작으로 조선에서 펼치던 문화통치 정책을 폐기하고, 황국신민화 정책을 펼쳤다. 그리고 1932년 2월 5일 하얼빈이 일본 관동군에 의해 함락되면서 만주 전체가 일본 손아귀에 넘어갔다. 당시 제1차 국공합작이 파기되어 국민당과 공산당의 내전을 치르고 있던 중국은 만주사변을 계기로 일본 제국주의 군대의 침략을 상대해야 하게 되었다. 당시 만주사변을 신경쓰지 않았던 국제연맹의 주요 회원국이었던 미국과 영국은 그로부터 10년 뒤인 1941년 일본의 제국주의 팽창이 자신들의 아시아 패권주의적 관할에 큰 영향을 끼치자 결국 일본 제국주의와 전쟁을 하게 되었다.

이렇듯 1931년 일본이 일으킨 만주사변은 국제적인 차원에서 큰 영향을 끼친 사건이었고, 일본을 본격적으로 제국주의 팽창으로 나서게 만든 사건이었다. 당시 만주 전역을 아주 손쉽게 점령한 일본은 앞으로 있을 중국과의 전쟁이 얼마나 장기전이 될 줄 예상치 못했고, 그로부터 몇 년 뒤 일본은 큰 대가를 치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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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제국 패망사 - 태평양전쟁 1936~1945 걸작 논픽션 17
존 톨랜드 지음, 박병화.이두영 옮김, 권성욱 감수 / 글항아리 / 2019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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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거 한번 읽어보고 싶다. 재밌을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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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택동 인민의 배신자 - 모택동은 왜 일본군의 進攻에 감사했나
엔도 호마레 지음, 박상후 옮김 / 타임라인 / 201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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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혀 학문적 검증이 안된 일본 극우 파시스트 학자가 쓰고, 왜곡과 선전 모략질의 달인 조선일보 논설위원이 번역한 책이라는 점에서 신뢰도 안가고, 읽을 가치도 못느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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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1217, 북한의 최고 지도자인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심근경색으로 사망했다. 그가 사망한 지 2일 뒤인 1219일 오전 10, 북한 정부는 현지지도의 길에서 급병으로 사망했다라고 보도했고, 김정일의 죽음을 듣게 된 북조선 인민들은 지도자를 잃었다는 슬픔에 빠졌다. 20111228일 김정일의 국장이 거행되었고, 그 다음날인 1230일 로동당 중앙위원회 정치국 회의에서 김정은을 인민군 최고사령관으로서 높이 모시었다라고 선포했음을 발표했다. 이로써 김정일의 시대가 끝났다.

 

김정일의 사망 소식은 전 세계적으로 큰 화제가 되었다. 무엇보다 김정일은 사망한 해만 보더라도 현지 활동을 활발하게 했었을 정도로 나름 건강했기 때문이다. 오사마 빈라덴이 미군에 의해 사살되던 20115월에는 대략 1주일을 거쳐서 중국을 방문했고, 그해 8월에는 시베리아를 방문하여 러시아의 메드베데프 대통령과 회담했기 때문이다. 또한 10월부터 12월까지 군시찰을 12, 경제시찰을 20회나 실시할 정도였다. 즉 이랬던 김정일이 심근경색으로 급사하고, 아들 김정은에게 권력을 물려주게 됐기 때문이다.

 

천안함 사건과 연평도 포격 사건이 있던 2010년부터 김정일이 첫째아들인 김정남을 제쳐놓고, 김정은을 후계자로 내세운 사실이 세상에 공개되었지만, 그 누구도 이렇게 빨리 아들 김정은이 정권을 물려받을 것이라는 사실을 예상치 못했다. 왜냐하면 김정일의 경우 아버지 김일성에게 대략 20년 내지는 25년에 걸쳐 지도자로서의 교육을 받았던 역사가 존재했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김정일의 사망을 기점으로 북한 권력에 내분이 생겨 정권이 붕괴될 것이라는 추측이 나왔었다. 물론 이런 추측은 허황된 망상이었다. 쉽게 말해, 김정은 자체를 매우 과소평가 했던 것이다.

 

2011년 김정일 사망 이후 4개월 동안은 김정은 최고사령관을 중심으로 만들어진 집단체제가 북한을 이끌었다. 북한의 노동신문에는 매일같이 전당, 전군, 전민이 일심 단결하여 선군의 위력을 더 높이 떨치자라는 구호가 실렸다. 그리고 2012411일 제4차 당대표자회에서 김정일은 영원한 총비서로 추대되고, 김정은은 당 제1비서, 정치국 상무위원, 당중앙군사위원회 위원장으로 추대되었다. 그리고 2일 뒤 최고인민회의에서 김정은은 국방위원회 제1위원장으로 추대하면서 북한 국가기관의 모둔 부문에서 최고지도자의 지위를 획득했다.

 

북한의 최고권력 자리에 오른 김정은은 2012415일 평양광장에서 열린 김일성 탄생 100주년 퍼레이드에서 세상을 향해 첫 공개연설을 했다. 그는 연설에서 "최후의 승리를 향하여 앞으로"라는 구호로 연설을 마쳤다. 지금까지 들어본 적이 없는 김정은의 목소리가 세상에 처음 공개되는 순간이었다. 그리고 김정은은 그해 초여름에는 가수 출신인 리설주와 함께 모란봉 악단의 공연을 감상하는 모습을 보였다. 아버지를 이어 북한의 지도자가 된 김정은은 그 해 7월 리영호를 제거함과 동시에 인공위성 제작에 박차를 가했고, 20121212일 인공위성인 광명성 3호를 성공적으로 쏘아 올렸다. 이걸까지고, 핵무기를 발사했다는 지나친 중상모략도 있었으나, 그냥 인공위성일 뿐이었다. 20133월 대한민국과 미국은 키리졸브 군사훈련을 실시하자 북한의 김정은은 정전협정 백지화를 언급하며, 강경한 모습을 보이기도 했고, 한 때 북한 전문가들이 김정은 정권에 대대적으로 영향을 주며 큰 힘을 발휘할 것이다.”라고 생각했던 장성택이 숙청되면서, 소위 북한 전문가들의 예상을 빗나가게 했다. 장성택이 처형되자 대한민국과 서방 세계는 북한을 향해 비난을 하고, 근거 없는 루머를 퍼뜨려 북한과 김정은에 대한 악마화를 진행했는데, 심히 3류 소설급 뇌피셜이 버젓이 기사로 실리기 까지 했다. 이는 대한민국뿐만 아니라 미국이나 서방 세계도 마찬가지였다. 필자가 생각하기에 가장 어이가 없던 기사는 김정은 정권 장성택을 발칸포로 처형했다는 기사와 김정은이 일부러 셰퍼드 무리를 풀어 장성택이 개들에게 물려 죽도록 했다라는 말같지도 않은 저질스러운 기사들이었다.

 

아무튼 김정은 정권은 김정일이 사망했을 때 이상한 중상모략 및 뇌피셜을 주장하며 북한이 망하기를 바랬던 대한민국의 극우세력이나 자칭 북한 전문가들의 주장과는 달리 권력을 잘 이끌어 나갔다. 따라서 북한이 자체적으로 망하기를 바라며 대북 고립 정책을 펴야한다는 일각의 주장은 아직도 극우반공주의적 사상과 대한민국 친일친미제국주의 세력들이 퍼뜨린 농간에 놀아나는 짓일 뿐이다. 앞으로의 우리는 김정은과 북한을 바르게 알도록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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