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주사변(Japanese Invasion of Manchuria)

1931년 9월 18일 밤 10시 20분 펑톈 시 외곽 북쪽으로 7.5km 정도 떨어진 류타오후에는 뤼순과 펑톈 그리고 창춘을 연결하는 만철(만주 철도)이 관통하고 있었다. 평소와 다를게 없이 만주의 황량한 벌판을 달리는 특급열차가 그 곳을 통과하는 순간 정체불명의 폭발음이 일어났다. 다행히도 열차는 파괴되거나 탈선하지는 않았고 제 갈 길을 달렸다. 사실 철도 주변에는 관동군 소속의 공병들이 숨어 있었다. 폭발 직후 그들은 일본군 특무기관과 일본군 제2대대 본부 부대에 무전기로 “동북군이 만철 철로를 파괴했다”고 보고했다.

보고를 받은 이타가키 세이시로 대좌는 관동군 사령관의 명의를 제멋대로 사칭하여 일본군 제2대대와 제5대대에게 펑톈 교외에 있는 장학량 휘하의 동북군을 일제히 공격하라고 명령했다. 이것이 바로 9.18 사변 즉 만주사변의 시작이었다. 일본군 제2대대와 제5대대에게 공격을 받게된 장학량 휘하늬 동북군은 혼란에 빠졌다. 1931년 9월 19일 오전 8시 30분 일본 관동군은 경성의 조선군 사령부에 전보를 보내어 신속한 병력 증파를 요청했다. 당일 오전 관동군 주력은 펑톈 성 외곽을 포위하였고, 중포를 앞세운 관동군의 기습공격을 받은 장학량측 동북군은 패주했다.

주요 정부 청사를 비롯해 펑톈 항공국, 병기창, 동대영이 잇따라 일본 관동군에게 함락되면서 20일 새벽까지 펑톈 성 전역이 관동군의 수중으로 들어갔다. 1931년 9월 20일 관동군 2개 보병대대와 1개 포병연대가 창춘을 공격하였고, 오전 7시쯤 그 지역을 완벽히 점령하였고, 다음 날에는 지린 성으로 진격하여 전투 없이 그곳을 장악했다. 일본의 관동군은 9.18 사건 후 겨우 2~3일도 안 되는 기간에 남만주 전역을 장악했다. 사실 만주는 일본의 반식민지였다. 자본, 금융, 철도, 산업 등이 일본에게 예속된 상태였고, 군사적으로도 일본 광동군은 만철과 주요 철도 그리고 요충지들을 장악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일본의 만주사변은 국제연맹(League of Nations)의 규율을 위반한 행위였다. 그러나 이미 힘을 잃은 국제연맹은 일본의 만주사변에 대해 아무런 대응을 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국제연맹을 이끄는 열강들은 자신들의 이익을 계산하기에 급급했기 때문이었다. 또한 서구 열강들은 1929년 미국 월스트리트에서 시작된 경제 대공황(The Great Depression)으로 인한 실업 및 내부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아시아에서의 일제 침략보다 더 중요했다. 그들은 일본과의 외교적 마찰을 일으키기를 원하지 않았다. 따라서 국제연맹은 일제의 만주침략을 그냥 외면했던 것이다.

1931년 일제가 일으킨 만주사변은 결과적으로 일본을 군국주의화 시키고, 전쟁국가로 이끌었다. 1919년 3.1운동 이후 무단통치에 대한 대안으로 문화통치를 펼쳤던 일제는 1931년 만주사변을 시작으로 조선에서 펼치던 문화통치 정책을 폐기하고, 황국신민화 정책을 펼쳤다. 그리고 1932년 2월 5일 하얼빈이 일본 관동군에 의해 함락되면서 만주 전체가 일본 손아귀에 넘어갔다. 당시 제1차 국공합작이 파기되어 국민당과 공산당의 내전을 치르고 있던 중국은 만주사변을 계기로 일본 제국주의 군대의 침략을 상대해야 하게 되었다. 당시 만주사변을 신경쓰지 않았던 국제연맹의 주요 회원국이었던 미국과 영국은 그로부터 10년 뒤인 1941년 일본의 제국주의 팽창이 자신들의 아시아 패권주의적 관할에 큰 영향을 끼치자 결국 일본 제국주의와 전쟁을 하게 되었다.

이렇듯 1931년 일본이 일으킨 만주사변은 국제적인 차원에서 큰 영향을 끼친 사건이었고, 일본을 본격적으로 제국주의 팽창으로 나서게 만든 사건이었다. 당시 만주 전역을 아주 손쉽게 점령한 일본은 앞으로 있을 중국과의 전쟁이 얼마나 장기전이 될 줄 예상치 못했고, 그로부터 몇 년 뒤 일본은 큰 대가를 치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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