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년 독일에서 개봉했던 영화 <바더 마인호프(Baader Meinhof Complex)>를 보면베트남 전쟁 반전운동을 주도했던 아나키스트 루디 두치께가 한 괴한에 의해 총탄에 맞고 부상당하자이에 분노한 이들이 집회를 하는 장면이 나온다집회는 시위대와 경찰이 충돌하는 상황까지 치달았고어느 한 독일의 반전인사는 불에 타고 있는 시위현장에서 다음과 같은 대사를 한다.

 

드레스덴!

히로시마!

베트남!”

 

영화에서 한 반전인사가 외친 드레스덴과 히로시마 그리고 베트남은 폭격으로 인한 대량 인명피해를 나타내는 것이다2차 세계대전에 대해 조금 공부해본 이라면, 1945년 2월 13일에서 15일에 있던 드레스덴 폭격을 들어봤을 것이다. 2일간의 공습으로 적잖은 인명피해가 발생했는데일단 나치독일의 선전장관 괴벨스에 따르면 20만 명이 죽었다고 알려졌다이후 연합군 측의 조사에서는 20만 명이 아닌 3만 명 정도가 죽었다고 나오지만미국의 반전 역사학자 하워드 진은 종합적으로 10만 명이 죽었다고 여러 저서에서 주장했다글쓴이의 개인적인 생각을 말하자면, 20만 명은 조금 부풀려졌을 수도 있고, 3만 명은 너무 축소되었을 것이라 생각한다따라서 종합적으로 6만 명에서 10만 명 정도가 직접적인 죽음과 부상으로 인한 죽음을 포함하여 희생되었을 것이라 본다.

(B-17 폭격기)

 

드레스덴 공습을 통해 알 수 있는 것은 영미 연합군에 의한 공습 희생자가 결코 적지 않았다는 사실이다물론 제2차 세계대전을 일으킨 책임은 당연히 전쟁을 시작하고 유대인 대학살을 저지른 나치 독일에게 있다나치 독일은 유럽 전역에서 인종청소와 대량의 민간인 학살을 무수히 많이 자행했고이러한 나치의 만행은 아우슈비츠 수용소나 트레블링카 그리고 아인자츠 그루펜의 전쟁범죄 등을 통해 입증이 된다2차 세계대전은 자본주의 진영과 사회주의 진영이 파시즘에 맞선 전쟁이었지만그 과정에서 연합군에 의한 전쟁 피해도 분명히 있었다는 것 또한 사실이다따라서 이 글에선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연합군 공습에 의한 독일 본토의 피해가 어느 정도였는지 알아보고자 한다.

 

2차 세계대전 당시 나치 독일은 1939년 폴란드 침공과 서유럽 침략 과정에서 공습을 단행했다. 1940년 프랑스를 점령한 이후에는 영국을 침략하기 위해대대적인 공습에 나섰고, 1940년부터 1941년까지 런던을 포함한 영국의 도시와 군사시설을 공습했다본토 항공전에서 독일군 공습으로 인해서 대략 5만 명 이상의 영국 시민이 사망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1941년 히틀러가 소련을 침공하게 되면서대다수의 독일군 병력과 물자는 동부전선으로 향했고비록 영국에 대한 독일의 공습은 1944년까지 있었지만, 1942년부터는 연합군이 서부전선에서 완벽히 제공권을 장악하고 있었다사실 본토 항공전에서 영국 공군의 활약으로 독일은 승리하지 못한 상황이었고바로 그렇기 때문에 1941년 진주만 기습 공격으로 미국이 참전하자 영국과 미국은 제공권을 장악할 수 있었던 것이다.

(공습을 하고 있는 B-17 폭격기 편대)


(영국군의 랭커스터 폭격기)


1942년 3월 영국 공군은 파리 르노의 공장공습에 성공한 데 고무받아 3월 28일부터 29일까지 발트 해의 유서 깊은 한자 동맹 도시 뤼백에 공습을 가했다그리고 4월에는 발트 해의 또 다른 중세도시인 로스톡에 나흘 밤 연속으로 소이탄을 쏟아 붓는 공습에 다시 성공했으며, 5월에는 폭격기 1,000대를 동원하여 쾰른을 공습했다. 6월에는 에센과 브레멘에 공습을 가했으며, 1942년 8월에는 영국에 도착한 미 육군 제8항공군이 루앙에 있는 조차장을 공습해서 첫 공습임무를 수행했다.

(1943년 공습으로 폐허가 된 독일의 함부르크)

 

미공군과 영국공군은 주간과 야간에 독일 본토에 대한 폭격을 실행했다특히나 미군은 B-17 폭격기를 유럽전선에 많이 투입했으며그로 인한 군사적 효과는 극대화됐다. 1948년 8월 17일 미공군(8항공군)은 독일 한복판에 있는 슈바인푸르트를 폭격했다. B-17 229대 가운데 36대가 격추되어 소모율이 16%였을 정도로 공군의 피해가 컸다주간공습이었던 것과 독일의 촘촘한 대공망이 이러한 피해의 원인이었을지도 모른다. 1943년 7월 영국과 미국은 독일의 항구 도시 함부르크를 폭격했다주간에는 미군이 야간에는 영국군이 몇일간 함부르크를 공습했고그 결과 3만 명에서 5만 명에 달하는 함부르크 시민들이 사망했다시의 몇몇 구에서는 주민의 치명적 사상자 수가 30%를 넘어섰고여성사망자가 남성 사망자보다 40% 더 많았다.

(1945년 공습으로 폐허가 된 드레스덴)

 

전쟁 기간을 통틀어 계산이 이루어지자함부르크의 폭격 희생자가 1939년과 1945년 사이에 함부르크 시에서 징집된 군인의 전사자 비율보다 겨우 13% 낮았다그리고 그 폭격 희생자의 과반수는 1943년 7월의 대공습에서 목숨을 잃은 사람들이었다이후 미군과 영국국은 뷔르츠부르크에서 7,000다름슈타트에서 6,000하일브론에서 7,000부퍼탈에서 7,000베저에서 9,000마그데부르크에서 12,000명의 민간인을 공습을 가해 사망하게 만들었다나치 독일의 수도 베를린도 1943년부터 미군과 영국군의 공습을 받았다베를린에 대한 공습은 1943년 8월부터 1945년까지 이루어졌던 것으로 확인된다공습 초기 베를린에 대한 공습으로 인해 목숨을 잃은 독일 민간인은 대략 6,000명 정도로 알려졌으며, 1944년 3월 말까지 150만 명이 집을 잃었고도시 2,000에이커가 폐허가 되었다.

 

이후 연합군이 실행한 전략폭격은 독일 민간인의 피해를 더욱 극대화했다전쟁이 끝나는 시점까지 루르 지방의 여러 소도시에서 8만 7,000함부르크에서는 적어도 5만 명베를린에서 5만 명쾰른에서 2만 명상대적으로 작은 도시인 마그데부르크에서 1만 5,000뷔르츠부르크에서 4,000명이 목숨을 잃었다영미 연합군의 공습으로 죽은 독일 민간인은 총 60만 명이고부상자는 80만 명 이상인 것으로 추정된다많게는 100만 명이 사망했다고 보는 학자들도 제법 있다이러한 연합군의 공습으로 민간인 피해가 많았던 것도 사실이지만투입된 연합군의 항공기 손실도 결코 적지 않았다. 1944년 한 해에 미 제8항공군이 잃은 폭격기 숫자만 최소 2,400대이며이런 저런 항공기 손실을 합치면대략 수만 대는 된다아무튼 이러한 공습이 민간인 피해를 늘린 것은 사실이며영국의 경우 과거 독일에게 당한 공습의 피해를 최소 10배 이상으로 복수를 했다고 볼 수 있다.

 

참고자료

 

존 키건류한수(), 2차세계대전사청어람미디어, 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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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돌프 히틀러 한길로로로 18
하랄트 슈테판 / 한길사 / 199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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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틀러와 나치즘

예전에 알라딘에서 산 <아돌프 히틀러>를 읽었다. 1990년대 한길사에서 인물 시리즈 중 하나로, 원서는 독일인이 쓴 책이며, 1983년에 나온 책이다. 히틀러는 전 세계적으로 비판받는 인물이다. 1939년 그가 일으킨 제2차 세계대전으로 수많은 인명피해와 재산피해가 발생했고, 홀로코스트라는 아주 끔찍한 인종학살까지 벌어졌다. 히틀러가 많은 이들에게 비판받는 이유는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이다.

책은 그 당시까지 이어져온 히틀러에 대한 연구 흐름을 간략하게 소개하며, 히틀러의 이데올로기와 정치선전 부분에 보다 많은 집중을 기울였다. 따라서 책은 히틀러가 극단적 민족주의에 빠진 이유를 찾기 위해, 히틀러의 초기 생애와 제1차 세계대전 이후 나치즘 이데올로기의 형성 과정 및 나치와 히틀러의 활동에 보다 초점을 맞추었다.

히틀러를 다루는 책 치고 결코 두꺼운 분량의 책은 아니지만, 제법 학술적인 부분도 보인다. 그러나 히틀러가 일으킨 제2차 세계대전에 대해선 정말 수박 겉핥기식으로 넘어가는 수준이다. 인물 히틀러를 알기 위해선 그가 일으킨 제2차 세계대전과 홀로코스트에 대해 보다 깊이 다뤄야 하지만, 나치즘 이데올로기에 대한 비판적 고찰만 하다보니 가장 중요한 부분을 짧게 다룬 느낌이다. 1942년 반제회의에서 유대인 절멸정책이 결정되어 실행되었다는 구절이 책 분량에 비해 짧게 들어가 있다.

또한 책은 나치즘의 본질적인 문제를 놓치고 있다. 600만 명의 유대인을 조직적으로 학살한 히틀러의 편협한 이데올로기는 과연 어디로부터 비롯된 것일까? 나치즘의 영통팽창적 망상은 어디서 비롯되었을까? 이들은 왜 인종 이데올로기적 사회를 추구한 것일까? 여기에 대해 내가 짧게 할 수 있는 명쾌한 대답은 바로 ˝서구 제국주의에서 비롯됐다.˝라는 대답이다.

나치즘의 우생학적 이데올로기와 인종차별 그리고 팽창정책 등은 엄밀히 말해서 19세기 영국 프랑스, 벨기에 등과 같은 서구 제국주의 열강들이 가지고 있던 이데올로기다. 나치즘 이데올로기에서 빠질 수 없는 반공주의 또한 서구 제국주의 국가들이 필수적으로 가지고 있던 이데올로기다. 따라서 나치즘과 서구 제국주의는 이러한 점에서 공통점을 보인다.

그러나 책은 이런 본질적인 문제를 외면하고 있다. 서구적 시각과 소위 자유주의적 시각의 치명적인 한계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책은 히틀러에 대해 알고 싶은 이들에게 제법 추천해줄만한 책이다. 존 톨랜드의 책은 글이 어렵지는 않지만, 일반인들이 읽기에 너무 두껍다는 단점이 존재한다. 따라서 두꺼운 책을 읽기 두려워하는 이들에게 추천할만 하다. 이 책은 제법 학술적이면서 분량도 적절한 편이고, 사진도 많이 들어가 있다.

히틀러에 대한 자료는 아주 많다. 조금 과장해서 표현하자면, 밤하늘의 별만큼 자료가 넘쳐난다. 신비한 티비 서프라이즈의 소재로 나치와 히틀러가 자주 사용되는 데에는 이러한 이유가 있다. 그러나 서구의 학계는 자신들의 제국주의적 이데올로기가 600만의 유대인을 학살한 나치즘과의 공통성에는 항상 외면한다. 앞으로의 히틀러와 나치즘의 연구는 이것을 바탕으로 확산되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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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은 프랑스 식민주의를 지지함으로써 영국의 낡은 동 수에즈 정책을 지지하는 자신의 지도자들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명확하게 드러냈다.”

 

출처일본제국 패망사 p.1321

 

2차 세계대전 이후 영국과 미국은 유엔을 통해 팔레스타인(Palestine)을 아랍인과 유대인 거주 구역으로 분리하기로 결정했다2차 세계대전 당시 히틀러에게 탄압을 받았던 유대인들은 전쟁이 끝나자과거의 땅을 되찾겠다는 이유를 들어 팔레스타인 영토에 자신들의 나라인 이스라엘(Israel)을 세웠다팔레스타인에 대한 미국과 영국의 결정은 당연하게도 아랍 민중에겐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었다. 1948년 이스라엘이 탄생하자 팔레스타인 지역의 유대인 수는 급격히 증가했다. 1914연만해도 그 나라의 유대인 인구는 6만 명이었지만, 1948년에는 70만 명이 됐다당시 유대인들이 벌인 활동은 이른바 시오니즘(Zionism) 운동이었고당연히 영국과 미국은 이를 지지했다.

(가말 압델 나세르)

 

1948년 5월 15일 유대인들이 이스라엘을 선포하자분노한 중동 국가들은 이스라엘에게 선전포고했다이집트시리아레바논이라크요르단 등이 이 전쟁에 참전했다당시 이집트는 영국으로부터 독립하지 얼마 되지 않은 상태였다물론 당시 이집트의 참전은 파루크 왕의 독단적인 결정이었으며파루크의 목적은 전쟁에서 승리한 후 자신의 정치적 최대 라이벌인 요르단 왕국의 압둘라가 팔레스타인을 점유하는 것을 막기 위함이었다1차 중동전쟁은 1949년 3월 이스라엘의 승리로 끝이 났다당시 제1차 중동전쟁에는 이집트의 장교로 참전한 이가 있었다그가 바로 가말 압델 나세르(Gamal Abdel Nasser).

(나세르와 소련의 흐루쇼프 서기장)

 

1차 중동전쟁에서 이집트 왕정이 패배하자이들은 불신의 대상이 됐다따라서 이집트 내에서는 왕정을 타도해야 한다는 생각이 확산됐다전쟁에 참전했던 나세르는 자유장교단을 중심으로 이 왕정을 타도하기로 결심했고이들은 1952년 7월 23일 거사를 단행했다쿠데타를 감행한 이들은 이날 아비딘 궁전에서 왕을 체포하는 데 성공하고국가의 모든 주요기관을 장악하거나 접수했다이미 국민들 간에 기존 정치세력에 대한 실망과 증오가 팽배해 있었기 때문에 쿠데타는 아무런 저항도 받지 않고 쉽게 성공할 수 있었다나세르는 1953년 6월 왕정제 자체를 폐지해버렸으며새로운 내각을 만들었다.

 

2차 세계대전 이후 이집트는 영국으로부터 형식적인 독립을 얻었지만여전히 영국군은 자신들의 경제적으로 필요한 수에즈 운하를 독점하고 있었다결국 1954년 영국군 철수협상을 진행했고, 1956년 영국군 철수를 합의했다나세르는 1955년 최초로 비동맹 개념을 채택한 반둥(Bandung) 회담에서 아랍 세계를 이끄는 강력한 지도자로 부상했고유고슬라비아의 티토인도네시아의 수카르노와 더불어 제3세계 진영에 가담했다. 1956년 7월 나세르는 영국군 철수한달 후 수에즈 운하를 국유화하고 거기서 생기는 수입으로 댐 공사를 하겠다고 선언했다수에즈 운하의 국유화는 즉각 시행되었다이집트 군대가 수에즈 운하를 장악했으며여기서 나온 수입으로 아스완 댐을 건설하고자 했다영국 프랑스는 나세르의 이집트에게 선전포고했다이렇게 되면서 제2차 중동전쟁 즉 수에즈 위기가 발발했다.

(수에즈 운하 지도)

 

이러자 미국은 아스완 댐 건설에 대한 약속을 저버렸으며미국의 덜레스 장관은 나세르가 소련과 무기 거래를 했다는 이유를 들며영국 프랑스를 지원했다당시 나세르는 프랑스의 식민지이던 알제리에서 독립운동 세력인 민족해방전선을 지원했었다이 점에서 프랑스는 이집트를 응징하려고 했다영국과 프랑스는 자신들의 제국주의 우방인 이스라엘을 끌어들였다. 3국은 비밀 회담을 갖고 이집트를 침공하는 전반적 전쟁계획을 세웠으며, 1956년 10월 29일 이스라엘은 계획대로 시나이 반도를 침공하여 5일 만에 가자 · 라파 · 알 아리쉬 등 주요 도시와 티란 섬을 점령했다.

(수에즈 위기 당시 전쟁을 표현한 사진)

 

10월 30일 영국과 프랑스는 시나리오대로 이집트와 이스라엘 양쪽에 선전포고를 하고 운하 양쪽 20마일 선으로 물러설 것을 요구했다이스라엘은 그 조건을 곧 받아들였지만이집트는 자국 땅 일부를 포기하라는 그 조건을 결코 수용할 리 없었다영국과 프랑스는 이집트 비행장들에 대한 공습을 가한 다음 11월 5일부터는 공수부대와 해상 수송부대가 상륙하고 운하를 향하여 진격했다그동안에 이스라엘군은 전 시나이 반도를 수중에 넣었다그러나 영국과 프랑스 이스라엘이 이집트를 상대로 전쟁을 치르자국제여론은 이들에게 외교적 압력을 가했다이들은 결국 전황이 고착화되기 전에 휴전을 선언했으며영국과 프랑스는 철수했다이스라엘도 1957년 3월까지 철수했다.

(이집트인들에게 환영받는 나세르)

 

수에즈 위기 당시 미국은 서독을 통해 이스라엘에게 무기를 지원했던 반면소련은 이들에 맞서 이집트와 같은 아랍 국가에게 무기를 제공했다수에즈 위기에서 나세르의 이집트 군대는 군사적인 면에선 패배했지만정치와 외교적인 부분에선 승리를 거두었다이를 통해 나세르의 이집트는 19세기 영국 제국주의가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만든 수에즈 운하를 자신들의 것으로 만들었다이로써 이집트는 식민지 지배의 잔재를 완전히 지워버릴 수 있었다나세르는 이집트에서 영웅으로 부상했고아랍 주권의 회복이라는 상징적 의미와 더불어 아랍인들에게 아랍 민족주의의 실현과 통일 아랍의 꿈을 심어주는 아랍 세계의 지도자로 급부상하기에 이른다.

 

참고문헌

 

존 드상시김한경(), 인물로 읽는 세계사 30, 나세르대현출판사, 1999

 

손주영이집트 역사 다이제스트 100가람기획, 2009

 

정토웅세계전쟁사 다이제스트 100가람기획, 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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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인 이야기 4 김명호 중국인 이야기 4
김명호 지음 / 한길사 / 201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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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에 입학한 이후부터 현재까지 나는 시간이 날 때, 독서를 자주 즐기는 편이다. 내가 독서를 하게 된 이유에는 아마도 유전의 영향도 있을 것이다. 어린 시절 독서를 거의 안했지만, 집에는 무수히 많은 책들이 서재에 쌓여있었다. 정치, 역사, 철학, 과학, 인문학, 사진, 바둑, 논어 등 아버지는 다독가였고, 지금도 그러하다. 어디까지나 내 생각이지만, 아버지가 회사에 입사하지 않았다면, 아마 대학교 교수가 되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휴학생 시절 아버지가 나에게 제법 강력하게 추천했던 책이 있었다. 그 책 중 하나가 김명호 교수가 쓴 <중국인 이야기>.

 

김명호 교수의 <중국인 이야기>는 현재도 계속 신작이 출간이 되고 있는 책으로써, 중국 근현대사에 등장하는 인물이나 사건 등을 일반인들도 읽기 쉽게 정리한 책이다. 무엇보다 책이 현학적이지 않고, 재미있다. 마치 소설을 읽어나갈 때처럼, 문장이 정말 술술 읽히는 책이다. 김명호 교수가 이야기하는 형식처럼 구성된 책이기에, 책이 굳이 책이 출판된 순서대로 읽을 필요도 없다. 따라서 1권을 먼저 읽든 8권을 먼저 읽든 책의 내용을 이해하는 데 큰 문제가 없다.

 

집에는 7권까지 있는데, 내 눈에는 4권이 눈에 들어왔다. 그래서 이번에 4권을 읽었다. 생각했던 것 그 이상으로 내용이 흥미진진해서, 제법 몰두해서 읽었다. 즉 그만큼 재밌게 읽었다는 것이다. 4권의 이미지는 문혁(문화대혁명) 시절의 포스터로 추정되지만, 4권에서는 문혁 관련 내용을 다루지는 않는다. 4권의 시작은 1936년 시안사건으로 명성을 떨친 장학량의 아버지 장작림의 가정교육부터이며, 1949년 혁명으로 탄생한 신중국의 외교관 형성에서 책은 종결된다. 4권에 포함된 내용들 하나하나가 개인적으로 매우 흥미롭게 다가왔다. 그중에서 가장 재밌게 읽은 파트는 아마도 제2차 국공내전에서 혁명을 도왔던 북한에 대한 내용이다.

 

1950년 맥아더의 인천상륙작전 이후 한국군과 유엔군이 북진하여 평양과 압록강까지 도달하자, 마오쩌둥은 북한을 위해 대규모의 병력을 보냈다. 최소 100만에서 150만 명 이상의 중공군 병력이 전쟁 당시 주둔했었으며, 이들의 사상자 또한 최소 수십만 명이었다. 많은 이들이 이승만의 북진통일이 실패한 이유의 원흉으로 중국의 존재를 지적한다. 그러나 이러한 지적은 한국전쟁을 이해하기 위한 시도하고는 아주 동떨어진 주장이다. 왜냐하면 중국이 한국전쟁 시기 북한을 지원할 수 밖에 없었던 이유를 무시하는 관점이기 때문이다.

 

김명호 교수의 <중국인 이야기 4>를 읽으면, 당시 중국이 북한을 위해 대규모의 병력을 파병할 수 밖에 없던 이유가 나온다. 2차 세계대전 이후 중국의 동북 지방에선 토호에 맞선 계급투쟁이 있었고, 얼마 지나지 않아 국민당 공산당 간의 내전이 발발했다. 중국 공산당 휘하의 동북항일연군에 있던 조선인들은 토호에 맞선 계급투쟁을 성공적으로 지휘했으며, 소련 군정 하에 있던 북한은 어려운 상황에도 불구하고 무려 10만 정의 무기와 탄약 그리고 여러 보급품들을 중국 공산당에게 지원했다. 그 외에도 홍군은 북한 인근 지역의 야전병원에서 부상자들을 치료했으며, 이는 북한이 적극적으로 지원했기 때문이다. 아래의 내용은 책에 나오는 내용이다.

 

“1946826, 남양철도 경비 대장이 탑승한 특별열차가 압록강 철교를 건너 단둥에 진입했다. 김일성은 10만여 정의 총과 탄약 외에 교량과 철도 폭파에 쓰라며 일제 폭약도 보냈다. 일제가 나진 질소비료공장에서 생산하던 황색 폭약은 당대 최고의 성능을 자랑했다.”

 

출처: 중국인 이야기 4 p.289

 

위의 인용문에서 알 수 있듯이, 북한은 중국 혁명의 승리를 위해 헌신했다. 그 외에도 중국 공산당 휘하에서 무려 10만 명 이상의 조선인들이 일본 제국주의와 국민당 정권에 맞서 중국 혁명에 동참했었다. 이것이 바로 한국전쟁 당시 마오쩌둥이 무수히 많은 병력을 보내 김일성을 도왔던 이유이다. 물론 이러한 시각에 무조건적인 적대감을 가진 이들도 많을 것이다. 그러나 한국전쟁을 객관적으로 이해하고 앞으로 통일 세대를 준비하고 싶다면 이러한 역사도 인정해야 하지 않을까? 나는 적어도 그렇게 생각한다.

 

황포군관학교 관련한 내용도 재밌었다. 1920년대 손문의 지원을 받았던 장제스가 교장으로 있던 황포군관학교는 반제국주의 투사들을 길러낸 군사학교였다. 장제스 본인은 독재자로써 부정부패한 국민당 정권의 수장이었으며, 수많은 양민을 학살한 인물이었지만, 국민당군의 군사력 증강을 위해 광저우에 황포군관학교를 설립했고, 또 그 과정에서 본의 아니게 혁명가들을 길러냈다. 책에는 언급되지 않지만, 2015년 영화 암살로 대중들에게 유명해진 의열단 단장 약산 김원봉 또한 동지인 오성륜과 더불어 황포군관학교에서 교육을 받았다. 이후 김원봉은 1930년 레닌주의 정치학교를 세워 운영했다. 베트남 전쟁 당시 북베트남의 총리였던 팜반동(Phạm Văn Đồng) 또한 황포군관학교에서 교육을 받았으며, 적잖은 베트남의 독립운동가들과 혁명가들 또한 황포군관학교에서 교육을 받았다.

 

이러한 점에서 생각해보았을 때, 황포군관학교는 말 그대로 반제국주의 투사들의 교육기관이었으며, 중국 공산당 인사들 뿐만 아니라 일제 치하 불제 치하에 있던 식민지 조선과 베트남의 독립운동가들에게도 막대한 영향을 준 것이다. 굳이 황포군관학교게 중국 혁명에 크게 기여한 점을 따지자면, 아마도 린뱌오(임표)를 군사전문가로 거듭나게 만들어 줬다는 점일 것이다. 이 점은 국민당의 수장인 장제스 또한 인정하는 점이다. 당시 장제스는 린뱌오에 대해 다음과 같은 말을 남겼다.

 

린뱌오는 전장과 초연, 선혈과 생명이 오가는 곳을 갈망하는, 당대의 한신이다. 다시 군대를 이끌고 전공을 세울 날이 멀지 않았다. 청사에 남을 공을 세울 테니 두고 봐라.”

 

출처: 중국인 이야기 4 p.163

 

반면에 황포군관학교 시절 장제스를 싫어했던 린뱌오는 다음과 같은 말을 했다.

 

황푸 시절에 본 장제스는 군벌에 불과했다. 항상 군림하려고만 했지 교관과 학생들을 존중하지 않았다. 화도 잘 내고 변덕도 심했다. 기분 내키면 잔정을 베풀었지만, 가끔 말 같지 않은 소리로 우리를 조롱했다. 그런 사람은 특징이 있다. 큰 일은 이룬 듯하지만 결국은 마지막 문턱을 넘지 못한다.”

 

출처: 중국인 이야기 4 p.156

 

책에 있는 내용들이 전반적으로 감명 깊었지만, 마지막에 나오는 신중국의 외교관 이야기도 정말 흥미로웠다. 1949년 혁명으로 탄생한 중화인민공화국은 이후 외교관들을 해외에 보냈다. 외교관으로 간 이들은 과거 중국 혁명에 동참하여 싸웠던 혁명가들이었다. 이들 중에는 혁명가의 부인들도 포함이 된다. 과거 혁명에 참가하여 남성들과 동등한 위치에서 활동했던 여성들은 외교관의 부인이 되자 분개했다. 그 이유는 서구 사회가 강조하는 여성의 이미지를 강요받았기 때문이다. 심지어 이들이 지켜야할 규칙 중에는 다른 해외 외교관들이 보는 앞에서 남편에게 소리지르며 지적을 하면 안된다.”는 것이 포함됐다. 그것 때문에 외교관의 부인이 되길 거부하고자 했던 여성들도 많았다. 나는 이 내용에서 혁명 시절 중국의 여성인권이 서구 사회보다 선진적이었다고 생각한다. 아래는 책에 나오는 내용이다.

 

부인들은 더 힘들어했다. 포성 속에서 성장한 전사들에게 파마와 얼굴 화장, 치파오와 굽 높은 신발은 애초부터 무리였다. 예절교육 담당자가 남편은 국가를 대표하는 사람들이다. 외교관 부인은 복장·행동·말투가 남달라야 한다. 남편이나 과거의 동지들이 좀 모자란 행동을 했다고 소리부터 버럭 지르는 교양 없는 행동은 정말 고쳐야 한다는 말을 하자 분노가 폭발했다.”

 

출처: 중국인 이야기 4 p.354

 

당시 현존하는 자본주의 국가들 중에서 외교관의 부인이 이 만큼의 권위가 있던 나라가 과연 존재했는가? 나는 이점을 지적하고 싶다. 따라서 이러한 사실에서 사회주의 국가의 여성권리가 자본주의 보다 더 나은 점을 제공한 것은 주지의 사실인 것이다. 물론 여기에서 언급한 내용의 옳고 그름을 떠나 그러한 사실을 얘기하고 싶었을 뿐이다.

 

이번에 <중국인 이야기 4>를 읽으며 제법 많은 사실을 알 수 있었다. 앞으로도 시간이 날 때, 이 시리즈를 차근차근 읽어나갈 예정이다. 중국을 알고 싶어하는 이들에게 이 책의 일독을 적극 권하는 바이며, 이러한 내용을 통해 현재 중국을 혐오가 아닌 보다 객관적인 시각에서 이해하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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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 역사의 기원은 역사학자들에 따르면 B.C 1400~1000년에 시작된 것으로 추정된다. 고대 로마는 현재 이탈리아 반도에서 발생했고, 고대 로마 주민 대다수는 인도유럽인으로 가장 중요한부류는 이탈리아 중부의 라틴인이다. 이 라틴인들이 세운 국가가 바로 로마다. 기원전 8세기부터 로마에는 새로운 이민의 물결이 이탈리아를 향해 들어왔고, 이민을 오게된 이들은 문명을 발전시켰으며, 기원전 7세기쯤 이들은 도시 국가를 세웠다. 당시에는 왕권이 약해서 도시 국가들로 분열되었다가 이후 로마가 일어나면서 도시국가들이 차례대로 정복당한다.

 

기원전 753년에 로마가 건립되었으며, 왕정 시대를 열었다. 왕정시대를 연 이들은 에트루리아인들이었으며, 기원전 510년에 귀족들의 봉기로 에트루리아 왕조가 명말했다. 그 후 두 세기 동안 로마는 내부의 계급투쟁과 외부로의 영토 확장에 몰두 했다. 에트루리아 왕정 시대가 끝나면서 로마에서는 이른바 공화국 시대에 접어들었다. 이 시기 로마에는 왕이 존재하지 않았고, 대신 두 명의 집정관이 임기 1년간 국정을 살피는 식이었다. 하지만 계급적으로 정치적 권한을 가진 원로원의 구성원은 모두 귀족이었고, 이에 따른 내부의 계급적 갈등이 심각했다. 즉 로마의 공화정은 실질적으로 귀족 공화정이었다.


 

이 시기 로마는 정복 전쟁을 벌였으며 영토를 확장했다. 기원전 5세기와 4세기 동안 로마는 현재의 이탈리아 반도를 정복했고, 과거 자신들의 뿌리였던 그리스도 정복했다. 기원전 3세기에는 지중해 서부의 통제권을 놓고 카르타고 제국과 두 번의 큰 전쟁을 치렀다. 카르타고와의 전쟁은 바로 포에니 전쟁인데 100년에 걸쳐 모두 세 차례 일어났으며, 이 전쟁에서 우리가 아는 카르타고의 장수 한니발이 코끼리를 타고 알프스를 넘어 이탈리아로 진군하기 까지 했다. 한니발에게 많은 영토를 정벌 당하자 로마인들은 명장 스키피오를 지도자로 선출했다.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는 기원전 202년 자마 전투에서 한니발 군대에 맞서 승리했다. 이후 한니발은 패배의 굴욕을 참지 못하고, 1년 뒤에 자살한다.

 

100년간 전개된 포에니 전쟁은 기원전 146년 로마가 카르타고를 멸망시키며, 로마의 승리로 끝났다. 이로써 로마는 유럽, 아시아, 아프리카 세 대륙을 장악한 지중해의 맹주로 성장했으며, 이에 따라 로마 제국의 시대가 시작됐다. 그러나 이 로마제국 시대에는 반란이 끊이질 않았다. 노예들의 반란이 자주 일어났으며, 계층들의 갈등도 극심했고, 대표적으로 스파르타쿠스의 반란은 이를 잘 보여준다. 스파르타쿠스의 반란은 자유를 위한 투쟁으로 이후 후세대들에게 많이 알려진 바 있다. 이 반란은 실패했지만, 귀족 중심의 로마 지도층에게 막대한 충격을 주기엔 충분했다.


 

스파르타쿠스의 반란을 진압한 로마는 정계에 세 명의 인물을 등장시켰다. 스파르타쿠스 반란 진압에 공을 세운 크라수스, 해적 소탕에서 공을 세운 폼페이우스, 몰락 귀족 가문 출신의 율리우스 카이사르다. 이들이 바로 로마 제국의 3두 정치체제를 구축했다. 당시 로마는 내전이 있었는데 카이사르는 내전에서 갈리아를 정복했고, 이후 자신의 경쟁자인 폼페이우스의 군대를 무찌르고 수도 로마로 진군하여 기원전 48년에 종신호민관에 선출됐다. 그러나 그는 4년뒤에 자신의 심복인 브루투스에게 암살당함으로써 생을 마감했다.

 

카이사르 사망 이후 옥타비아누스가 로마 최초의 황제로 등극했고, 동시에 공화정에서 제정으로 넘어갔다. 로마는 형식적으로 공화정을 유지했지만, 실질적으로는 전제군주정을 실시했다.다만 옥타비아누스가 선포한 원수라는 칭호는 세습이 되지는 않았다. 이 원수제는 기원전 27년 옥타비아누스가 아우구스투스라는 칭호를 받은 시점부터 시작되어 기원후 284년에 끝났다. 그러나 옥타비아누스의 이런 체제는 스스로 부패와 궁극적인 붕괴의 씨앗을 내포했으며, 경제나 사회 체제도 점차 흔들리기 시작했다.

 

로마 제국의 확장은 기원후 1세기부터 급격히 둔화됐고, 2세기에는 완전히 정지됐다. 영토가 너무 넓어져서 지도층의 단합과 이들에게 바쳐지는 피호민들의 충성은 군대에서의 일반 사병의 희생이 있어야만 가능했고, 이런 시스템은 사치스런 소비와 국가의 후한 보조금이 있어야만 지속될 수 있었다. 당시 로마에는 콜로세움이나 대중 목욕탕, 경기장 등 온갖 오락 시설 및 유흥시설들이 로마 제국에 건설됐지만, 그에 따른 재정 부담이 경제적으로 위태로울 정도로 심각했다.

 

로마 제국의 군사적 하락은 378년 현 불가리아의 아드리아노플에서 동로마제국의 전체 야전군이 고트족에게 패배하면서 확실히 나타났다. 당시 로마는 동부는 비잔틴 제국이라 불렸고, 서부는 서로마 제국이라고 불렸는데, 로마는 이민족들의 끊임없는 침입 하에 있었다. 410년 서고트인들이 로마를 함락시켰고, 455년에는 반달족이 다시 로마를 함락시켰다. 이어서 476년 게르만족 오도아케르가 로마의 마지막 황제 로물루스를 내쫓으면서 서로마 제국이 몰락했다. 이렇게 해서 로마 제국은 역사 속에서 사라지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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