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2년 전인 20216월에 포스팅한 글을 보다 보완한 글이다. 추가적으로 알바니아 노동당사(History of the party of Labour of Albania)를 참고했다.)

 

알바니아는 어떤 나라일까? 이 나라의 이름을 아는 사람들은 아시아 뿐만 아니라, 북미권 심지어 유럽권에도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알바니아는 인구가 300만 명도 안 되는 나라로 면적은 28,748로 대한민국 보다도 3.5배나 작은 나라이며, 한반도보다 8배나 작은 나라다. 대략 경상도 수준의 영토가 한 나라라고 생각하면 된다. 알바니아는 중세에서 근대 시기 오스만 제국의 지배를 받았으며, 19세기부터는 유럽에서 부흥하던 민족주의적 움직임이 일어났다. 심지어 이 시기를 알바니아 역사에선 알바니아 르네상스라고 부르기도 한다.

(엔베르 호자 사진, 엔베르 호자는 1945년부터 1985년까지 알바니아를 통치했던 지도자다. 서구 진영에선 독재자로 비난하지만, 다른 쪽에서는 알바니아를 가장 번영으로 이끈 탁월한 지도자로 평가한다.)

 

알바니아는 1912년에 공식적으로 독립을 선포했다. 알바니아는 1908년부터 독립전쟁을 치렀고, 4년간의 투쟁 끝에 독립을 쟁취할 수 있었다. 흥미롭게도 이 사건은 1914628일에 일어나는 이른바 사라예보 사건에도 영향을 주었으며, 1차 세계대전의 시발점에 직간접적인 영향을 미쳤다. 1차 세계대전이 끝난 이후 알바니아는 이탈리아와 전쟁을 치렀는데, 이 전쟁에서도 승리했다. 1920년대 로마에서의 쿠데타로 집권한 파시즘의 창시자 베니토 무솔리니(Benito Mussolini)는 과거 로마제국의 영광을 구현하고 싶어 했다. 그 결과 1935년 에티오피아를 침공하여 그 나라를 점령했고, 리비아를 식민지 지배 했으며, 1936년 파시스트 프랑코의 쿠데타로 일어난 스페인 내전에 나치 독일과 더불어 병력을 파병했다. 그리고 제2차 세계대전이 일어나기 전인 19394월 무솔리니는 알바니아를 침공하여 점령했다.

(알바니아의 지도, 한국의 경상도 정도의 영토를 가진 나라 알바니아는 인구도 현재 300만 밖에 안되는 나라다. 당시의 알바니아는 인구가 200만이 좀 넘었다고 한다.)

 

이탈리아의 독재자 무솔리니는 19391월부터 알바니아 침공에 대한 계획을 지지했고, 323일부터 알바니아에 대한 군사적 점령을 최종적으로 결정했다. 193947일에 알바니아를 공격했으며, 조그 왕이 빨리 도망쳤기에 이탈리아 파시스트 침략자들은 별다른 저항을 받지고 않은 채 알바니아를 점령했다. 이탈리아에게 알바니아는 단순히 점령대상이고, 로마제국의 영토 차지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었지만, 알바니아 민중들에겐 과거 오스만 제국에 저항한 역사에서 경험한 감정을 다시 한 번 경험하게 됐다. 이탈리아 군대가 알바니아를 침공하자 알바니아의 조그(Zog) 왕과 그의 정부는 도망쳤고, 체터스(Chetas)라고 불리는 일부 게릴라 부대들이 이탈리아군에 맞서 산발적인 게릴라전을 벌였다.

(알바니아 시내에 진입한 이탈리아군)

 

(1939년 알바니아에 진입한 이탈리아군의 경전차, L-3으로 불리는 이 경전차는 사람 한 두명 정도만 탑승할 정도로 작다.)

 

침략자 이탈리아는 알바니아인에 대한 강제동화정책을 실행했으며, 이탈리아 지배에 대한 알바니아 노동당의 확고한 입장은 암울한 이탈리아 파시스트 지배기, 알바니아를 노예화하던 시절로 정의된다. 이탈리아의 무솔리니 정부는 국왕 빅터 이마누엘 3세 내세우고, 셰프켓 베를라시(Shefqet Vëerlaci)를 꼭두각시 정부의 수장으로 임명했다.

 

초기 알바니아 민중은 파시스트들이 세운 기구에 참여하는 것을 거부하는 형태로 저항하기도 했으며, 알바니아 공산주의 조직 또한 이러한 저항에 나섰다. 19391128일 알바니아 공산주의 조직은 반파시즘 성향의 대중시위를 알바니아의 몇몇 주요 도시들에서 이끌었다. 당시 시위대는 알바니아의 자유 만세!’, ‘자유 아니면 죽음을!’ 구호로 외쳤고, 알바니아 공산주의 조직은 이 시위의 격려자이며 지도자였다. 이러한 시위 조직과 활동을 통해 알바니아 공산주의 그룹들은 힘을 강화하고 알바니아의 다른 도시들에서 활동을 확장할 수 있었으며, 지역주의를 종결시키기도 했다. 1940년 초에는 수도 티라나에서도 조직되었는데, 여기서 그 조직을 이끄는 인물이 바로 엔베르 호자(Enver Hoxha)였다.

(엔베르 호자와 빨치산, 2차 세계대전 당시 엔베르 호자는 알바니아에서 빨치산 투쟁을 이끌었다.)

 

부르주아 출신 집안에서 자란 호자는 프랑스와 벨기에에서 교육을 받은 역사학 교수였고, 이탈리아가 알바니아를 침공하여 점령했을 시점부터 반파시스트 운동에 뛰어들었던 인물이었다. 유학생활을 바탕으로 영어와 독일어 그리고 러시아어도 할 줄 알았던 다재다능한 인물이기도 했다. 1939년 알바니아는 이탈리아의 베니토 무솔리니가 이끄는 파시스트들에게 침략 당하자, 알바니아 공산당은 이에 맞선 투쟁을 전개하기에 이른다. 19406월에 들어 알바니아 공산당은 파시즘과 트로츠키즘에 맞서 싸웠다.

 

1940년 들어 이탈리아는 독일·일본과 동맹관계를 맺었으며, 10월에는 그리스를 침공했다. 당시 이탈리아군은 졸전을 거듭하는 군대로 유명했고, 그리스군은 도리어 이탈리아군에게 반격을 가하는데 성공했고 이탈리아군은 그리스에서 후퇴했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이탈리아-그리스 전쟁은 알바니아인들에게 파괴와 고통을 가져왔고, 알바니아의 반파시스트 조직들은 그리스를 도왔다. 전쟁 당시 무솔리니 정부는 알바니아인들을 강제로 징집했고, 파시스트군에 배치했는데 도리어 알바니아인들이 탈영하거나 싸우기를 거부하는 사례도 많았고, 이탈리아군의 전쟁기계를 뒤에서 파괴하는 공작까지 벌이기도 했다. 또한 호자가 이끌던 공산주의 조직은 1940년에 또 다른 시위를 조직하여 전개하기도 했으며, 여기에는 그리스의 쇼비니즘적인 요소를 반대하는 구호도 포함됐다.

(알바니아 빨치산들의 무장투쟁을 그린 상상화, 알바니아의 빨치산은 무솔리니의 이탈리아군과 히틀러의 독일군에 맞서 무장투쟁을 벌였다.)

 

이탈리아-그리스 전쟁으올 알바니아는 양측의 전쟁터가 되었고, 적잖은 인명피해와 파괴가 발생했다. 물론 이탈리아는 전쟁을 수행하는 도중 식민지 지배국의 착취를 강화했고, 식민지 대중들까지 탄압하고 착취하고 또 약탈했다. 이렇게 되면서 이탈리아 지배에 대한 알바니아인들의 저항의식은 더더욱 강화됐고, 공산주의자(사회주의자)이 보다 지지를 얻게 된다. 194111월 궁극적으로 수도 티라나에서 알바니아 공산당이 창당되었으며, 여기서 엔베르 호자를 포함한 몇몇 인사들이 지도부로 선출됐다. 그리고 공산당은 알바니아 인민해방군(armed forces of the National Liberation Army: NLA)이 창설되어 제대로 보다 적극적인 게릴라전을 전개하기에 이른다.

 

알바니아 공산당은 1935년 코민테른 제7차 대회에서 채택된 디미트로프 테제(인민전선) 전술에 따라 반파시즘 인민전선을 보다 광범위하게 구축하고자 했고, 히틀러의 소련 침공과 일본의 진주만 기습 공격이 있음에 따라, 소련이 영국과 미국하고 손을 잡는 것을 전략적으로 지지하는 모습을 보였다. 이탈리아군에 맞선 파르티잔 투쟁을 벌였던 호자는 1942년 말 왕당파 그룹이었던 게헤그(Gheg)의 게릴라 부대를 설득하여 민족해방운동을 전개하도록 만드는 데 성공했다. 또한 그리스 공산당(KKE)와 유고슬라비아의 티토(Tito)하고도 협력하는 관계였었다. 당시 영국의 SOE는 이탈리아에 맞서 게릴라전을 전개했던 호자와 협력관계를 형성한 게헤그의 부대와 호자의 파르티잔에 관심을 기울였다. 이들은 그들에게 무기와 장비를 공급해주고자 했고, 2개의 타격연대를 훈련시키기도 했었다.

(알바니아 사회주의 인민 공화국 시절에 있던 빨치산 관련 포스터)

 

(알바니아 사회주의 인민 공화국 시절 만들어진 빨치산 관련 포스터, 알바니아 사회주의 인민 공화국 탄생 40주년을 맞아 만든 포스터로 보인다.)

 

앞서 설명한 이탈리아-그리스 전쟁으로 알바니아는 전쟁터로 변모했는데, 이 과정에서 파시스트 이탈리아의 테러와 파괴가 뒤따랐다. 1941년에 이르러 알바니아에 주둔한 이탈리아 파시스트 군대의 규모는 10만 명으로 증가했고, 이탈리아군은 반파시즘 운동을 진압하기 위해, 극심한 테러와 학살도 자행했다. 물론 이러한 행위로 이탈리아군이 알바니아인들로부터 얻는 것은 반감 뿐이었다. 아래 엔베르 호자의 연설문 중 일부를 보자.

 

알바니아 산하에서 우리 선조들의 위대한 투쟁의 역사가 되풀이 되고 있고, 르네상스 부흥기 시절 우리 알바니아의 위대한 애국자들의 노고가 재현되는 것을 목격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바로 어깨에 총을 멘 소년과 노인들이고, 인민들의 병사들이며 이 저항군을 이루어 함께 뭉치고 있으며, 자유라는 이상에 영감을 받아 증오의 피가 들끓은 피에 굶주린 파시스트 침략자를 공격하는 것을 우리는 보고 있습니다. 농촌 곳곳에서 대문이 활짝 열렸고, 알바니아의 마을 곳곳이 자신들의 아들과 딸로 이루어진 병사들을 두 팔 벌려 환영하고 있습니다.”

 

1941년부터 1942년 사이 엔베르 호자가 지도자로 있는 빨치산 부대(알바니아 인민해방군)는 알바니아 대부분의 도시 및 마을에서 공산당 위원회의 지도아래 군사작전을 전개할 준비를 했다. 첫 게릴라 부대는 공산주의자와 공산주의 청년동맹 그리고 지지자들로 구성되었으며, 처음에는 10명 정도 밖에 안 되었으나, 전쟁이 지속되면서 규모를 확장했다. 1942년 초만 하더라도 빨치산 부대는 수도 티라나를 포함한 여러 지역에서 적잖은 수의 이탈리아 파시스트 군대의 장교와 군 고위간부를 살해했으며, 알바니아 파시스트 스파이와 민족반역자들도 일부 처단했다. 게릴라들이 이탈리아군을 공격하는 것과 동시에 반파시즘 시위가 지역 당의 지도를 받아 일어났고, 이탈리아 파시스트 지배는 점차 약화되어 갔다. 호자의 게릴라 조직은 1942년 말에 체타에 있는 곳만 하더라도 2,000명의 빨치산 병력을 모았다. 알바니아 전역을 통틀어 게릴라의 숫자는 수천 명으로 증가했다.

(알바니아에서 토벌작전을 벌이며 양민을 학살한 이탈리아군, 무솔리니의 이탈리아군 또한 일본군의 삼광작전과 같은 전쟁범죄를 알바니아에서 저질렀다.)

 

19429월부터 12월까지 이탈리아군은 남부와 중부 그리고 북부 알바니아를 아우르는 27개 지역에서 토벌작전을 벌였는데, 이 과정에서 이탈리아군은 농민들이 사는 수백채의 집을 불태우고, 적잖은 수의 여성·노인·아이들을 무차별 학살했다. 그러나 그들은 빨치산을 토벌하는 데 궁극적으로 실패했다. 그리고 19437월 연합군의 시칠리아 상륙 이후 영미연합군이 이탈리아 본토에 상륙하자, 이탈리아에서는 무솔리니가 왕에 의해 축출되어 감옥에 갇히는 일이 벌어졌다. 이탈리아가 항복하자 이탈리아군 중 대략 15,000명이 호자가 이끄는 알바니아 인민해방군에게 항복했다. 그리고 대략 1,500명의 이탈리아군이 알바니아 빨치산 부대에 자원입대했다. 알바니아는 이탈리아가 점령한 지역에서 해방되는 것 같았으나, 또 다른 적이 알바니아에 입성했다. 그것은 바로 히틀러가 보낸 나치독일의 군대였다.

(알바니아에 배치되어 보초를 서고 있는 독일군)

 

독일군이 입성하면서 파르티잔 투쟁은 고난을 겪었다. 독일군은 대략 2~3개 사단을 동원하여 수많은 게릴라 부대들은 몰아냈는데, 작전 개시 2주도 안되어 수세에 몰렸다. 독일군은 알바니아 점령에 총 4개 사단이 동원되었다. 독일군이 알바니아를 점령하기 위한 작전을 개시하자, 다시 한 번 알바니아 전역이 전쟁터가 됐다. 독일군의 강력한 공세로 알바니아인민해방군은 적잖은 사상자가 발생했다. 나치독일은 알바니아를 점령하는 데 있어서 대략 7만 명의 병력을 주둔시켰는데, 이들은 알바니아를 자신들의 영토로 만들기 위해 빨치산에 대한 강력한 토벌과 군사작전을 전개했다.

 

물론 엔베르 호자가 이끄는 알바니아 빨치산 또한 나치 독일에 맞서 강력한 공세를 가했다. 19431018일 알바니아 인민해방군의 포가 나치 독일 부역집단의 건물과 독일군 기지에 포격을 가했으며, 알바니아 공산당의 지도를 받는 조직들은 수도 티라나에서 반나치 선전물을 뿌렸다. 나치 독일 또한 이탈리아와 마찬가지로 학살과 방화 그리고 파괴를 알바니아에서 자행했다. 더 나아가 나치는 알바니아에 있는 유대인들을 인종정책에 따라 학살하고자 했으며, 적잖은 알바니아인이 나치에 의해 강제수용소에서 죽거나 수감됐다.

(알바니아에 배치한 독일군 부대, 여러 대의 탱크도 있는 것으로 보아 전차 부대인 것으로 추정된다.)

 

독일군은 군사작전 기간에 마을의 모든 것을 약탈했고, 모든 것을 폐허 및 잔해로 만들어 벌였다. 수천 명의 알바니아 민간인이 나치 독일군에 의해 학살당했다. 학살당한 사람들 대다수는 여성·노인·어린이었으며, 이들은 총살당했고, 도살당했으며, 산채로 불태워졌고, 구금되거나 절멸수용소에 보내지기까지 했다. 말 그대로 알바니아 전역의 도살장과도 같은 곳으로 변모한 것이다. 심지어 나치 독일은 학살한 민간인의 시신을 길거리에 걸어놔 알바니아인들에게 공포심을 심어주고자 했다. 만약 나치 독일군이 게릴라를 찾아서 붙잡으면, 이들을 죽인 뒤에 민간인들에게 그 시신을 전시하여 보여줬다.

 

그러나 이것이 알바니아 공산당에 대한 민중의 지지가 약화되었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알바니아 공산당의 지도를 받는 군대의 병력은 1943년 말에 대략 2만 명을 넘겼으며, 그 규모에 있어서도 결코 작지 않았다. 이러한 병력의 규모는 알바니아의 반파시즘 투쟁이 굉장히 치열했음을 알 수 있다. 1943년 겨울부터 1944년 초까지 최소 1,000명 이상의 병력이 나치 독일과의 전투에서 죽었다. 그럼에도 알바니아 공산당의 군대는 기하급수적으로 조직이 강해졌고, 군대 병력도 보다 늘어났다. 19445월이 되자 알바니아 공산당이 지휘하는 군대의 병력은 35,000명까지 증가했다. 거기다 쿠르스크 전투 이후 소련군이 보다 광범위한 반격을 게시하자, 독일은 점차 패색이 짙어졌다.

 

1944년 봄 영국의 SOE는 조그주의자(왕당파) 세력인 쿠피 그룹을 중심으로 하는 레지스탕스 봉기를 일으키고자 했지만, 당시 이 그룹은 친나치파 문제와 더불어 조직 내의 분열에 휩싸여 있었다. 이와 대조적으로 호자와 그가 이끄는 빨치산들은 세력을 확장했고, 앞서 설명한 것처럼 엔베르 호자가 이끄는 알바니아 공산당의 병력은 3만 명을 넘어섰다. 이에 따라 연합국은 이들에게 군수품을 포함한 물자를 공중으로 지원했으며, 호자의 빨치산 부대는 이런 지원을 바탕으로 지역을 확장하고, 독일군 호송대와 나아가 수비대를 상대로 공격을 감행하기에 이르렀다.

(시가행진을 하는 알바니아 인민해방군)

 

(티라나라고 써진 표지에 서서 사진을 찍은 알바니아 빨치산)

 

그해 6월 독일군은 제1산악사단을 창설하여 북부의 연합군 교두보를 폐쇄시키는 데 성공하여 빨치산들을 산속으로 쫓아내 버렸지만, 독일 제1산악사단이 유고슬라비아에 배치되자 호자의 빨치산들은 다시 독일군에게 게릴라전을 감행했다. 이후 독일군은 불리해지는 전황에 따라 알바니아에서도 후퇴하게 되었다. 노르망디 상륙작전 5개월 뒤인 194411월에 호자가 이끄는 빨치산들은 궁극적으로 알바니아에서 독일군을 몰아내기에 이른다. 이로써 알바니아가 해방된 것이다. 빨치산의 주장에 따르면 대략 5천 명에서 6천 명 이상의 독일군이 그들에 의해 살해되었다.

(수도 티라나에 입성한 알바니아 빨치산과 이를 지휘한 엔베르 호자)

 

(빨치산 지도자로서 연설을 하고 있는 엔베르 호자)

 

(엔베르 호자 관련 포스터, 알바니아가 다민족 국가고 이들을 존중하는 것을 강조한 포스터로 보인다.)

 

19441117일 수도 티라나에 알바니아 공산당의 깃발이 게양됐다. 알바니아 공산당이 전개한 혁명전쟁으로 부역자 출신의 지주들이 숙청됐고, 부르주아지 국가가 철저히 파괴됐다. 또한 전쟁이 끝날 무렵 게릴라 부대는 정규군화 됐고, 대략 7만 명 이상의 병력이 알바니아 공산당의 지휘를 받았다. 이 병력들 중 대략 9~10%는 여성이었고, 80%는 청년들이었으며, 90% 이상은 알바니아의 농민들이었다. 즉 이들이 알바니아와 코소보에서 침략자 나치독일군을 무찌르는데 가장 경절적인 역할을 했으며, 궁극적으로 수도 티라나를 해방했다.

(알바니아 사회주의 인민 공화국의 깃발)

 

(알바니아의 빨치산 투쟁을 다룬 영문 서적)

 

그로부터 1년 뒤인 1945년 알바니아는 티토의 유고슬라비아와 스탈린의 소련의 지원을 받아 전국적인 총선거를 실시했다. 1945년 알바니아 총선에서 공산주의 세력은 민주전선으로 출마해 전 의석을 획득했다. 미국과 영국에서 온 선거 감시단은 이것이 공정한 선거였음을 마지못해 인정했다. 물론 이 미국과 영국에서 온 선거 감시단이 선호한 알바니아 후보는 파시스트 협력자였다. 너무나도 당연한 이야기지만, 그런 후보에게 표를 던지려는 알바니아인은 아무도 없었다. 선거 감시단의 귀에는 젊은 빨치산의 목소리로 복수를 요구하는 젊은이여, 복수해다오라는 빨치산 노래가 들려왔다. 나치에 조력했던 알바니아인과의 계급 협조란 절대로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이에 따라 1946년 엔베르 호자를 지도자로 한 알바니아 인민 공화국이 탄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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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ewdvs117 2023-06-29 21:3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우리에게 잘 알려지지 않은 알바니아 혁명사네요.
 

(케냐의 깃발)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미소냉전이 시작되면서 또 다른 운동이 발발했다. 그 운동은 주로 19세기 식민지 지배를 받던 나라들에서 발생했는데, 이것을 통틀어 제3세계 운동이라고도 표현한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영국과 프랑스는 전 세계 곳곳에서 일어나는 제3세계 운동에 직면했는데, 영국의 경우에는 말레이시아에서 가장 격렬하게 일어났고, 프랑스의 경우에는 베트남을 포함한 인도차이나와 알제리에서 강력한 저항이 발생했다. 특히나 인도차이나의 경우 1946년에 독립전쟁이 발발했으며, 1954년 디엔비엔푸 전투를 통해 프랑스의 식민지 지배가 종결됐고, 알제리에서는 1954년부터 1962년까지 독립전쟁이 전개되어 프랑스의 식민지 지배가 종결됐다.


당시 영국도 곳곳에서 독립운동이 발생했다. 인도에서는 간디와 네루가 이끄는 민족운동이, 버마에서는 아웅산을 중심으로 한 독립운동이 벌어졌으며, 말레이시아에서는 좌파 게릴라들이 무장봉기를 일으켜 영국의 식민 지배에 저항했다. 이러한 반영투쟁은 아프리카에서도 일어났다. 대표적으로 이집트의 가말 압델 나세르 또한 영국에 맞서 반영투쟁을 전개했으며, 이집트 또한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독립국가로 등극했다. 아프리카에서는 이른바 영국령 케냐에서 격렬한 저항이 일어났는데, 오늘은 케냐의 마우마우단 봉기에 대해 알아보고자 한다.


아프리카 동쪽 중앙 끝자락에 있는 나라인 케냐는 수십 개의 부족으로 이루어진 사회였다. 반투어를 사용하는 키쿠유족과 타베타족, 키쿠유족 그리고 마사이족 등 무수히 많은 아프리카의 부족들이 현재 케냐에 거주하고 있었으며, 이들은 부족 단위로 전쟁 및 분쟁을 겪었다. 19세기 후반에 들어서 케냐는 영국의 식민 지배를 받게 됐다. 1884년 독일 베를린에서 열린 회담으로 케냐는 영국의 보호령이 되었고, 1890년에는 영국의 동아프리카 회사가 내륙진출을 개시했다. 세계사를 들어본 사람이라면, 영국의 동인도 회사를 생각하면 이해가 빠를지도 모르겠다. 영국의 이러한 식민지 지배는 20세기 초중반까지도 지속되었으며, 이 기간에 제1차 세계대전과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했다.


당시 아프리카인들은 영국 및 프랑스의 식민지 지배로 인해 강제로 징집당했다. 징집당한 아프리카인들은 백인 지배자들에 의해 차별과 멸시에 시달렸었다. 물론 영국의 지배를 받는 케냐인들은 당연히 악랄한 착취와 폭압에 직면했었다. 케냐를 지배하던 영국의 입장은 아래의 인용문으로 요약이 된다. 아래의 인용문은 케냐에 파견된 청년장교 마이너차겐 대위가 델라메어 경을 만나서 직접 본 것을 글로 쓴 것이다.


“그는 동아프리카의 장래에 관해, “나는 당신들 모두에게 이 나라가 백인의 나라임을 입증해 보이겠소.”라고 말했다. 나는 공손하게 “이곳 흑인들의 나라입니다. 어떻게 흑인 위에 백인이 군림할 수 있단 말입니까?”라고 했다. 델라메어는 성미가 급한 사람이었다. 그는 성가신 듯 “흑인들은 협력을 통해 혜택을 볼 겁니다.”라고 내뱉었다.”


이 인용문에서 표현된 것과 같이 당시 흑인들은 백인들에게 사람이 아니었다. 1900년대 초 케냐를 지배하던 영국인들은 자기 것도 아닌 땅을 차지했을 뿐만 아니라, 이 땅에 사는 아프리카인들은 노예처럼 부려먹고 착취했다. 그리고 이러한 폭압적인 통치는 케냐인들의 경제적인 반란과 봉기를 불러왔다. 제1차 세계대전 이후 케냐인들은 정치적 발언을 얻고자 애썼지만, 아프리카인들의 지휘는 전혀 상승되지 않았다. 그리고 당시 영국인들은 케냐인들에게 기독교적 교리를 강조했지만, 이는 당시 케냐 사람들이 글을 읽고 쓸 줄 모른다는 점에서 민낯이 드러난다. 이에 따라 1921년 케냐에서는 청년 키구유회(Young Kikuyu Association)라는 조직에 의해 정치활동이 시작되었으며, 이 단체는 1920년대와 1930년대에 “도둑 맞은 땅”에 관한 불만을 토로했다. 청년 키구유회는 강제적 흑인 노동자 등록제도, 저임금 고착취, 흑인의 커피 재배 금지, 식민지 의회에서의 아프리카인 차별 등을 문제 삼았다.

(조모 케냐타, 케냐의 독립운동을 이끈 독립운동가이자 초대 대통령으로 현재 케냐에서 국부로 존경받고 있는 인물이다.)


영국령 케냐에서는 조모 케냐타라는 독립운동가가 존재했다. 그는 1893년 나이로비 외곽의 어떤 부족 보류지에서 태어났으며, 미션스쿨에서 교육받았다. 그는 나이로비에서 사무원, 신문 편집인 등의 경력을 쌓은 후 1925년에 청년 키구유회를 계승한 키구유 중앙회(KCA)에 가입했으며, 1928년에는 사무총장이 됐다. 1년 후 케냐타는 영국 공산당에 가입했으며, 스탈린 집권 하의 소련을 여행했다. 그는 영국으로 가서 런던 경제대학원에서 인류학을 전공한 뒤에 학위를 받았으며,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인 1946년 케냐로 귀국했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이후에도 영국의 케냐 식민지배는 지속됐다. 키구유 중앙회는 이미 영국 식민지 지배 하에서 불법화된 상태였으며, 케냐타는 독립운동 조직을 재건하기 위해 케냐 아프리카 동맹(Kenya African Union)이라는 정당을 창설하여 1947년에 당수가 됐다. 이에 따라 이 정당을 중심으로 하는 이른바 마우마우단 운동(Mau Mau Movement)도 이렇게 시작됐다.


당시 마우마우단은 영국의 지배하에서 여러 활동 및 무장 테러활동 및 봉기활동도 전개했는데, 당연히 영국 당국은 이에 대해 테러라고 비난하기 바빴다. 1950년 들어서 영국 정부는 마우마우단을 사악한 테러 단체로 규정하며 마우마우단 인사들을 기소하기도 했었다. 케냐의 마우마우단은 1950년에 이르러 지하 대중운동 조직으로 변모했으며, 마우마우단 본부는 각 지방에 조직요원을 파견하여 신규단원을 모집했고, 세포조직을 만들었다. 마우마우단이 케냐의 아프리카인들에게 지지를 받을 수 있었던 이유에는 당시 토지문제가 있었다. 아래는 나이로비의 입법회의 의원 마투가 1951년 어떤 회의에서 한 말이다.

(마우마우단의 게릴라 무장 병력)


“토지는 아프리카인에게는 모든 것을 의미한다. 아프리카인은 장사를 해서 살 수도 없고 임금을 받아 살 수도 없다. 우리는 땅으로 돌아가야 한다. 도둑맞은 땅을 되찾아야 한다. 신은 우리의 기도를 들어주실 것이다. 왜냐하면 땅은 신이 우리에게 주신 것이기 때문이다.”


1952년에 들어서 마우마우단은 보다 무장력을 갖춘 조직이 됐다. 당시 기준으로 최소 400~800정의 근대식 총기를 보유하고 있었고, 그해 초부터는 아프리카인 공무원들의 주택과 일부 백인 농민들의 밭을 불태우는 행위도 착수했다. 백인 지배자들을 살해하기도 했다. 케냐에서 마우마우단의 활동이 활발히 전개되자 영국 정부는 비상사태를 선포하고 영국군 병력을 이집트로부터 공수했으며, 순양함 1척까지 케냐 몸바사 항에 진입시켰다. 그리고 마우마우단의 지도자 케냐타와 그의 추종자 182명을 체포했다. 당시 영국의 베어링 총독은 비상사태를 선포하면서 다음과 같이 호소했는데, 이 비상사태 선포문에는 영국의 지배가 얼마나 무지했는지를 반증한다.


“평화와 질서가 유지된다면, 케냐의 앞에는 모든 종족의 생활수준이 향상될 밝은 미래가 열릴 것이다. 지금껏 이 나라의 경제발전, 특히 가난한 주민들을 돕기 위한 계획이 작성되고 있었다. 예컨대 아프리카인들을 위한 주택건설 아프리카인의 교육 확대, 그리고 아프리카인 공무원의 처우개선 등이 촉진될 밝은 희망이 있었다. 만일 무질서한 상태가 계속된다면, 이 모든 것이 실현될 수 없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우마우단은 여전히 독립운동을 전개했고, 비상사태 선포 2주 후에 마우마우단은 백인농장주 1명과 아프리카인 하인 2명을 살해했다. 그리고 11월 말에는 백인 해군 퇴역장교 1명을 죽였으며, 그의 부인에게 중상을 입혔다. 결국 지도부의 체포에도 불구하고 영국 식민지 당국은 봉기를 분쇄하지 못했다. 이후에도 마우마우단은 세력을 확장하여 영국의 공군력까지 동원되기에 이르렀다. 마우마우단은 점차 게릴라조직으로 변모하여 1954년에는 키쿠유 지역에서 게릴라전을 전개했다. 1953년 말까지 영국이 지원하는 병력 규모가 1만 명을 넘어섰고, 경찰력도 7,000명에서 1만 5,000명으로 증가했으며, 자경단 수가 2만에 달했다. 1953년 말까지 영국 정부는 마우마우단 단원 3,000명 이상을 사살하고 1,000명 이상을 생포했다고 발표했지만, 마우마우단의 세력을 약화시키지는 못했다.

(마우마우단원으로 의심되는 케냐인을 체포 및 수색하는 영국군)


당시 영국은 자신들에게 충성하는 일부 부족들을 내세웠고, 이들을 토대로 경찰력을 구성하기도 했다. 1955년 1월 영국측은 대략 1개 사단을 동원하여 마우마우단을 소탕하기 위한 해머작전을 게시했다. 대략 2개월 동안 400명 이상의 마우마우단을 살해 및 생포했다. 1955년 말경부터는 이른바 특수부대를 보내 마우마우단 지역 게릴라 2,000명을 추적하였으며, 이 추적 작전은 당시 마우마우단 게릴라를 지휘한 키마티가 생포됨으로써 1956년 10월에 종결됐다. 키마티는 나중에 처형됐다. 키마티가 생포되며 마우마우단의 저항은 사실상 종결됐다. 전쟁 기간 영국과 친영 정부군 측은 마우마우단 1만 1,000명 이상을 살해하고, 2만 5,000을 생포했다. 당시 영국 측 피해는 대다수가 현지 케냐인들이었지만, 수백 명 정도였다고 한다.


영국의 학살은 극심했다. 당시 영국은 군대를 투입해 마우마우단 관련자는 물론 그 주축을 이루는 키쿠유족을 학살했다. 케냐 국가인권위원회의 자료를 보면, 영국이 비상사태를 선포하고 무력 개입한 1952년 이후 10년 동안 9만여 명의 케냐인이 영국 군대에 의해 숨졌고, 16만여 명이 수용시설에 감금됐다고 한다. 이것만 보더라도 신사의 나라 영국이 얼마나 끔찍한 학살을 벌였는지를 알 수 있을 것이다. 반면에 전쟁 기간 동안 마우마우단에 의해 살해된 영국 협력자들은 1,800명이 죽고, 백인 정착민 32명이 사망했다. 당시 영국은 무시무시한 강제 수용소를 운영했다. 남색, 거세, 전기충격, 물고문, 심리적 고통 가하기, 개를 이용한 고문 등이 영국 식민지 지배 하의 수용소에서 행해졌다. 따라서 1950년대 영국의 케냐 지배는 여전히 폭력과 인권유린이 판을 쳤던 것이다.

(마우마우단 운동을 기념하는 기념물, 현재 케냐에 있다.)


비록 케냐타와 그의 참모들은 구금되었고, 이후 석방되어 가택연금 상태에 놓였지만, 1961년에 이르러 정부는 케냐타를 완전히 복권했다. 그로부터 2년 뒤인 1963년 케냐는 공화국이 됐고, 케냐타가 케냐의 초대 대통령으로 선출됐다. 대다수의 케냐인들은 케냐타가 주도한 마우마우단 운동에 대해 자랑스럽게 생각한다. 마우마우단 운동이 영국 제국주의의 식민지배로부터 해방시켰다고 진심으로 믿고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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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ewdvs117 2023-06-29 21: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세계사 교과서에는 이런 내용이 하나도 안 나오죠.
 
빈곤의 역사 - 교수대인가 연민인가 역사도서관 8
브로니슬라프 게레멕 지음, 이성재 옮김 / 길(도서출판) / 201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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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에 듣는 수업 덕분에 읽게 됐다. 발표분담을 하게되면서 읽게 됐고, 어쩌다보니 생각 이상으로 흥미진진하게 읽었다. 원생이라 참으로 바쁜 인생을 살고 있지만, 그래도 이렇게 책에 대한 리뷰를 한번 남겨본다.

사실 나는 이 책의 제목에 제법 끌렸다. 자본주의 사회의 고질적인 문제인 ‘빈곤‘의 역사를 다룬다고 하니 제법 끌렸다. 물론 이 책 저자의 이력을 보니 내가 싫어할만한 이력을 가지고 있긴 하다.

우선 냉전시기 폴란드에서 미국의 지원을 받으며 반공투쟁을 했던 자유노조 운동의 제법 급이 있는 일원이었고, 냉전 이후에도 폴란드 정계에서 활동한 것이 확인된다.

물론 인물의 이력은 내가 싫어할만한 점이 있지만, 책 자체는 그래도 읽을만 했다. 저자는 빈곤의 문제에서 현대의 빈곤을 너무 짧게 다룬다는 한계가 분명있지만, 중세나 근대 과정의 빈곤에 대해선 상당히 상세히 다룬다.

나는 이 책을 통해 유럽 역사에서의 빈곤이 중세와 근대에 어떤 형식으로 나타났는지 알 수 있었다. 기득권에 있으면서 표면적으로 종교를 앞세우며 보시행위를 하는 것과 농촌의 소외화 그리고 도시화 과정에서 나타나는 부재한 생계보장 및 빈민들의 슬럼화 등 중세와 근대의 빈민들 삶을 배우는데 제법 공부가 됐다.

근대 시기 감옥 제도도 마찬가지다. 나는 감옥에 대해 단편적으로 범죄자의 처벌만 생각했는데, 빈민들을 감시하고 탄압하고 수용하기 위한 존재로 사용한다는 사실에서 제법 놀랐다. 책에 따르면 영국과 미국의 처벌식 감옥은 19세기쯤 자리 잡았다고 한다.

사실 일반인들이 읽기에는 조금 어려울수도 있는 내용들이 제법 나오는 것 같다. 뭐 그래도 다 읽었고 모르는 사실도 제법 알게 됐으니 그거대로 만족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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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0년 독일 통일과 1991년 소비에트 연방이 해체되면서 냉전은 미국의 승리로 종결됐다. 1975년 베트남 전쟁에서 패전한 미국은 이른바 베트남 신드롬(베트남 트라우마, Vietnam Syndrome)을 겪었다. 1980년 미국 대통령에 당선된 로널드 레이건은 이른바 미국의 애국주의와 반공주의를 내세웠고, 1983년 그레나다를 침공하여, 미국의 성공적인 군사작전을 전 세계에 대대적으로 홍보하고자 했다. 로널드 레이건 정부의 정책을 이어받은 아버지 조지 부시 또한 1989년 파나마를 침공하여, 군사작전의 성공을 홍보했다. 그레나다 침공이나 파나마 침공이나, 미국의 개입 명분은 표면적으론 공산주의 세력 소탕이거나 독재자 축출이었다.

(1999년 코소보 내전 당시 미군 폭격을 받은 베오그라드)

 

냉전 말기 동유럽 사회주의권의 붕괴와 더불어 미국은 한국전쟁과 베트남 전쟁 이후 대규모 군사작전을 동반한 전쟁에 참전했다. 그것이 바로 걸프전쟁(Gulf War)이었다. 1991117일 미국의 노먼 슈워츠코프(Norman H. Schwartzkopf) 장군이 이끄는 다국적군은 쿠웨이트를 침공한 후세인의 이라크군을 공격했다. 미국 및 31개국이 모인 다국적군의 병력은 54만 명이 넘었고, 1,800대의 항공기로 구성됐다. 작전을 전개하자, 세간의 예상과는 달리 이라크군은 궤멸적인 타격을 받았다.

 

당시 미국은 걸프전쟁 6주 동안 베트남 전쟁 당시 9개월 동안 북베트남에 투하한 양보다 2배가 넘는 레이저 유도 폭탄들을 투하했다. 공중발사순항미사일부터 M1에이브람스 탱크 그리고 베트남 전쟁 당시보다 성능이 훨씬 강화된 B-52 폭격기와 유도미사일까지 걸프전쟁은 미군의 최신식 무기 실험장이 됐다. 6주 만에 이라크군은 10만 명 이상이 전사하고 30만 명 이상이 부상당했으며, 6만 명이 포로로 붙잡혔다.

(미군 폭격으로 파괴된 세르비아 어느 도시, 예전에 밀로셰비치쪽 지지자가 만든 영상을 유튜브로 본 적이 있었는데, 그 영상에선 베트남 전쟁 당시 미군의 무차별 폭격을 언급했었다. 밀로셰비치의 인종청소적 만행과는 별개로 유고 내전 당시 미군의 폭격은 참혹했다.)

 

연합군의 공중 폭격은 이라크 육군에도 상당한 피해를 입혔는데, 전쟁이 끝날 무렵 이라크 육군은 탱크의 76%, 병력 수송 장갑차 55%, 그리고 포병 전력 90%의 손실을 입었다. 현재까지도 미군의 전쟁범죄로 규탄 받는 죽음의 고속도로(Death of Highway)에서는 최소 수천 명의 병사 및 민간인(이 부분은 좀 논란이 있다고 한다. 사망자 추정치는 최소 수백 명에서 최대 1만 명까지도 집계한다.)의 죽음과 더불어 수천 대의 차량도 파괴됐다. 그 외에 당시 미군 공습으로 사망한 이라크 민간인은 람제 클라크의 추산에 따르면 25,000명이나 된다. 반면에 다국적군 사상자는 사망자 148명을 포함하여 300명의 군사상자와 31대의 탱크가 파괴된 수준이었다.

 

1991년 걸프전쟁 종결 10개월 뒤 세계 최초의 사회주의 국가 소련이 붕괴했고, 미국은 냉전의 승리자로써 기억됐다. 그러나 냉전에서의 미국의 승리가 세계 평화의 시작을 의미하는 것은 절대 아니었다. 미국은 여전히 전 세계 분쟁에 간섭하고 있었으며, 자국의 이익에 방해되는 존재에게는 악랄한 철퇴를 가하고 있었다. 199310월 미국의 클린턴 정부는 소말리아 내전에 개입했고, 쿠바의 피델 카스트로 정부에 대한 색깔혁명 공세와 살인적인 경제제재를 멈추질 않았으며, 북한의 김일성 정부 또한 미국에게 화해의 제스처를 보냈음에도 묵살 당했으며 미국은 1994년 전쟁 위기를 의도적으로 조성했었다. 냉전의 승리는 자본주의 진영의 일시적인 승리를 가져왔으나. 이것은 미국의 신제국주의적 폭력의 정당화로 이어졌다. 그런 과정에서 또 다른 나라에 끔찍한 내전이 벌어졌다. 그것이 바로 유고슬라비아 내전이다.

(미군 폭격으로 파괴된 자신의 집을 바라보는 세르비아의 한 여성)

 

유고슬라비아 내전은 20세기 역사에 있어 최악의 내전이자, 국제분쟁이었다. 서로에 대한 맹목적인 증오와 혐오, 민간인 학살, 인종청소, 부녀자들과 아이들에 대한 인권 유린 등, 2차 세계대전을 일으켰던 나치가 저질렀던 만행들이 이 내전이 지속되는 와중에 일어났다. 유고슬라비아 내전에서 일어난 민간인 학살과 인종청소는 참으로 추악하고도 잔인했다. 그러나 이 추악하고 잔혹한 내전에, 이를 막는다는 명분으로 또 다른 학살극을 벌인 나라가 있었고, 이는 당연히 미국을 위시한 NATO 세력들이었다.

 

지금은 지구상에 존재하지 않는 나라 유고슬라비아는 현재의 세르비아, 크로아티아, 마케도니아, 몬테네그로, 슬로베니아, 보스니아를 합친 6개의 연방으로 이루어진 국가였다. 2차 세계대전 당시 나치 독일의 침략을 받았던 유고슬라비아 연방은 공산주의 지도자 요시프 브로즈 티토(Josip Broz Tito)4년간의 파르티잔(빨치산) 투쟁을 전개했었다. 동쪽에서 진격하던 소련군과 연합하여 유고슬라비아를 해방시킨 티토는 유고슬라비아의 지도자가 되었다. 냉전 초기 스탈린과 대립하던 티토는 동유럽 국가 중에 유일하게 바르샤바 조약 기구에 가입하지 않은 나라가 되었고, 이른바 자주노선을 택하면서 미국과 소련 그리고 제3세계 사이에서 중립 외교를 했었다.

 

그러나 1980년 티토가 사망한 이후 유고슬라비아는 점차 힘을 잃게 되었고, 냉전의 종식과 더불어 연방이 해체가 되었고, 티토 사후 표출된 민족갈등 그리고 종족 갈등은 내전으로 이어졌다. 물론 이것이 내전으로 이어지고 연방국가로 나뉘게 된 것은 유고슬라비아의 인구 구성이 많은 종족만 하더라도 40% 안팎이었던 점도 많이 작용했다. 1992()유고슬라비아 연방이던 보스니아에서 내전이 발발했다. 3년 동안 지속되었던 이 보스니아 내전에서 세르비아측은 차마 입으로 표현하기도 힘든 학살과 범죄 그리고 인종청소를 자행했다. 당시 미국은 평화유지군(사실상 NATO)의 일원으로 대략 2만 명이 넘는 병력을 파병했다. 이것은 평화유지군으로 들어갔던 미지상군을 뜻한다.

 

19934월 미국과 NATO 소속의 항공기들은 이른바 작전명 디나이플라이트(Deny Flight)로 알려지게 되는 작전에서 보스니아에 비행금지구역을 강제로 적용했다. 그해 8NATO는 사라예보를 포위하는 보스니아의 세르비아인들을 응징하기 위해 공중폭격을 실시하겠다고 위협했다. 19944월 미군 항공기들은 세르비아측의 목표물들에 산발적인 항공기 타격을 가했지만, 세르비아는 소위 유엔 피난처였던 스레브니차를 침공하여 수천 명의 시민들을 무참하게 살육했다.

(미군의 F-117 스텔스 전투기, 천문학적인 비용과 좋은 성능을 자랑하는 미군 전투기다.)

 

1995828일 세르비아측이 사라예보(1차 세계대전의 발단이 된 그 도시다.)의 시장에 박격포 공격을 가했다. 이러자 미국의 클린턴 정부는 세르비아를 협상 장으로 끌어내 내전을 종식시킨다는 명분으로 딜리버레이트포스 작전(Deliberate Force)을 전개했다. 17일에 걸친 이 작전에서 NATO400대 이상의 항공기가 항시 대기하면서 5개국 18개 비행장과 최대 3척의 항공모함에서 3,500회 이상의 비행을 수행했다. 작전이 진행되는 동안 NATO(사실상 미군이라 봐야함) 항공기는 1,026발의 폭탄과 미사일을 48개의 표적에 발사했다. 이는 걸프전쟁 당시 항공 작전에서 하루 동안 퍼부은 폭탄의 양과 거의 비슷한 규모다.

 

미국은 유고슬라비아 내전에서 보스니아 내전에도 개입했다. 이 과정에서 RQ-1 프레데테 무인 항공기(UAV)도 실전에 투입했다. 알바니아의 자데르에 있는 부대가 보스니아로 날아가는 프레데테를 조종했고, 15회나 출격시켰다. 이 중 12회는 효과적으로 150시간 이상 보스니아를 감시했다. 작전 중 프레데터가 입수한 이미지는 세르비아가 사라예보에서 퇴각하고 있지 않다는 사실을 입증했고, 결국 공습을 지속한다는 결정이 내려졌다. 물론 이것이 효과가 크기 않았기에 미국은 공습을 지속하는 쪽으로 나아갔다. 당시 미군의 교전 방식은 단순했다. 세르비아측을 섬멸하기 위해 들어간 미군은 세르비아측 저격수가 사격을 가하면 바로 공군기를 출동시켜 저격수가 있는 건물 자체를 무너뜨려 버렸다. 특히나 F-16혹은 F-18 공군기가 세르비아군 거점에다 무차별 맹폭을 가했었다. 아무튼 내전은 전황이 불리해진 세르비아가 협상 테이블로 나오면서 종결되었다.

 

그러나 그로부터 3년 뒤인 1998년 내전이 다시 발발했다. 그 전쟁이 바로 코소보 내전이었다. 코소보 지역에서 내전이 발발하자 미국은 1999324일부터 610일까지 작전을 전개했다. 작전명은 얼라이드포스(Allied Force)였다. 이 작전은 78일간 전개되었고, 829대의 항공기가 동원되었으며, 38,000회 이상의 비행을 실시했었다.

(B-2 스텔스 폭격기, 1999년 코소보 내전 당시 이 폭격기는 이른바 출퇴근 폭격을 수행하기도 했다. , 미국 본토에서 출격하여 유고슬라비아를 폭격한 뒤 다시 본토로 귀국했다.)

 

당시 미군이 투입한 항공기 종류는 군사전문가인 이세환(샤를 세환)에 따르면 다음과 같다. 전투기 F-16, 전투기 F-15, F-117, B-52, B-1B 그리고 B-2A였다. 특히나 스텔스 폭격기인 B-2A의 경우 폭격 작전에서 미국 본토에 있는 공군기지에서 발진했다. 중간에 급유기로부터 기름을 지원받으며 유고슬라비아까지 가서 폭격임무를 마친 뒤 미국 본토로 귀국하는 기록을 보여주었다. 이 스텔스기는 출퇴근 폭격을 수행했다. 18톤의 폭탄을 장착하고 있었고, 폭격 임무에는 스마트탄과 같은 최첨단 폭탄을 사용했다. 그 항공기 1대만 2조원(한국돈 기준임)에 달한다고 한다. 말 그대로 미국은 코소보 내전에서 매우 비싼 항공기를 투입했던 것이라 할 수 있다. 그 외에도 알바니아와 마케도니아가 연합군 헬리콥터 발진기지로 사용됐고, 미국의 루스벨트 항공모함과 프랑스군 항모 포슈가 폭격작전에 동원됐다.

 

코소보 내전 동안 미군을 위시한 NATO군은 세르비아의 목표물에 23,600발 이상의 폭탄을 사용했다. 미군의 첫 공격에만 미국 수상함 4척과 미국 잠수함 2, 영국 잠수함 1척이 나섰고, 214대의 미국 항공기와 130대의 연합군 항공기가 100여 발의 레이저 유도 폭탄을 투하했었다. 국내의 군사전문가 이세환에 따르면, 군사작전 첫날만 해도 총 400대의 NATO 항공기가 유고슬라비아의 하늘을 덮쳤다고 한다. 그러나 이에 따른 민간인 희생자가 코소보 내전 당시 미군의 폭격에 의해 발생했다. 유고슬라비아측 추산에 따르면, 8,000명 이상의 민간인 사상자가 나왔는데, 폭격 기간 동안 대략 2,500명이 사망했다고 추정했다. 반면, 휴먼라이츠워치는 민간인 사망자가 500명 안팎이라고 낮게 추산했다.

(1999년 미군 폭격으로 파괴된 중국 대사관)

 

1999424일 폭격에선 베오그라드에 있는 방송국이 폭격을 받아서, 30명의 사상자(이 중 16명이 사망)가 나왔다. 이에 대해, 언어학자이자 사회운동가인 노엄 촘스키(Noam Chomsky)는 명백한 테러이자 전쟁범죄라고 주장했다. 또한 57일 베오그라드의 유고슬라비아군 관련 기관을 겨냥했던 합동직격탄 3발이 중국 대사관에 투하되어 중국 대사관측 인사 4명이 사망하는 일이 발생했다. 추가적으로 중국 대사관에 있던 세르비아인 14명이 숨지고 20명 이상이 부상당했다. 이 사건은 미국과 중국 사이에 외교 위기를 촉발시키기도 했다. 그러나 이후 2주간 베오그라드에서 폭격이 중단됐다.

(빌 클린턴을 나치에 빚대어 표현한 당시 중국의 반전 시위대)

 

그 외에도 1999412일 세르비아 공화국 남부 그루데라츠카 크리슈라 철교와 통과 중이던 열차가 폭격을 받아 민간인 20명이 사망했고, 414일 코소보 자치주 자코비차에서 알바니아인 난민이 탄 차량 행렬이 폭격을 받아 약 75명이 사망하고 100명이 부상당하기도 했다. 57일 세르비아 공화국 니슈 시 중심부 주택가에 클러스터 폭탄이 떨어져 14명이 사망하고 30명이 부상당하는 일도 있었으며, 531일 세르비아 공화국의 슬르도차에 있는 병원이 미사일 두 발을 맞아 16~17명이 사망하기도 했다.

 

걸프전쟁 당시 미국을 위시한 다국적군은 방사선을 포함한 인체에 치명적인 영향을 주는 열화우라늄탄을 사용했다. 열화우라늄탄은 중금속 화학적 독성을 가지고 있으며, 이는 심각한 건강 피해를 초래하는 무기였다. , 이러한 무기의 사용으로 사용한 미군 병사는 두통, 현기증, 백혈병, , 간과 장의 불안 등 건강에 이상이 생기고, 폭탄 피해자들은 백혈병, , 선천성 장애아 출산 등의 문제가 생길 수 있었다. 걸프전쟁에서 이러한 무기가 사용되어 미군 군인과 이라크 민간인에게 피해가 생겼는데, 미국은 1995년 보스니아 내전과 1999년 코소보 내전에서도 이 폭탄을 상용했다. 그 결과 NATO군 병사와 현지 주민들도 같은 건강 피해 증상이 나타났다. 오죽하면 이에 대해 발칸증후군이라는 말까지 나왔을 정도다.

(코소보 내전 당시 투입된 미군 테어도어 루스벨트 항공모함, 이와 더불어 프랑스측 항공모함도 폭격에 동원됐다.)

 

이런 민간인 사상자가 나오자 NATO는 불가항력적으로 발생한 부수적 피해 혹은 오폭이라는 변명을 했다. 비록 민간인 사망자를 낮은 수치로 추산했지만, 휴먼라이츠워치는 이러한 민간인 사망 사건이 최소 90건 이상 발생했다고 발표했다. 반면에 미국 국방성의 발표는 20~30건으로 축소됐다. NATO는 공습으로 5,000명 이상이 사망했다고 했으나, 여기에 군인과 민간인의 구분은 명확하지 못하다. 거기다 NATO군의 항공부대가 발사한 23,614발의 무기 가운데 8,160발이 정밀 유도병기로 전체에서 34%정도에 해당했다. , 나머지 무기는 무차별 폭격으로 사용될 무기였고, 유도병기들도 적잖은 오폭을 일으켰다.

(1999년 코소보 주변을 정찰하는 미 지상군)

 

코소보 내전 당시 미국은 3달간의 폭격 임무를 수행하며, 전쟁 영웅을 만드는 데 성공적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1999327일 오후 815분 유고슬라비아 연방의 수도 베오그라드 북서쪽 3지점 상공에서 공습을 마치고 귀환하던 미 공군 조종사 데일 젤코 중령이 조종하던 F-117 스텔스 전투기가 세르비아 측 방공전력에 의해 격추됐다. 조종사는 격추된 스텔스기에서 탈출했고, 격추 8시간 만에 미군 구출팀에 의해 구출됐다. 비록 천문학적인 비용이 들어간 스텔스 전투기중 한 대가 유고 상공에서 격추되었다는 점은 미국 정부에겐 아까운 손실이었을 꺼다. 이후 스텔스 전투기 조종사의 탈출기에 대한 이야기는 미국 내에서 제법 홍보됐고, 이후엔 내셔널지오그래픽에서도 다큐로 제작됐다.

(데일 젤코 중령, 1999년 폭격 임무를 수행하는 도중 세르비아 방공망에 의해 격추된 스텔스기의 조종사다.)

 

종합해보자면, 미국은 유고슬라비아 내전에 개입하여 NATO군의 형태로 최신식 폭격을 감행했다. 유고슬라비아 내전 도중 일어난 인종청소로 수십만 명이나 되는 인명이 학살당했다. 그런 점에서, 유고슬라비아의 민족 갈등이 얼마나 끔찍했는지 생각해봐야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하다. 그러나 미국은 이를 빌미로 유고슬라비아를 폭격하고, 또 최신식 무기의 성능을 실험하는 장소로 유고슬라비아를 선택했다. 1994년과 1995년 당시 폭격 그리고 1999년의 폭격은 냉전 이후 발달된 미국의 신무기 실험 현장이었다. 물론 한국전쟁이나 베트남 전쟁에 비하면, 미군의 폭탄 실험은 전에 경험한 전쟁에 비해 적은 민간인 사상자를 불러왔지만, 이것이 미래에도 그럴 것이라는 얘기가 되지는 못했다.

 

20019.11 테러 이후 미국이 일으킨 아프가니스탄 전쟁과 이라크 전쟁에서 수십만 명의 중동 민간인이 미군의 공습으로 사망했다는 사실은 미국의 제국주의가 폭격이라는 폭력행위를 얼마든지 정당화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유고슬라비아 내전 당시 미군의 폭격에 대해 전쟁범죄라고 규탄하는 목소리도 제법 있었다. 코소보 내전 당시 최소 2,000명 이상의 세르비아계 미국인들이 뉴욕에서 반전운동을 전개했었고, 호주 시드니에서도 7,000명이 반전시위를 전개했었다고 한다.

 

러시아 연방의 경우 자신들과 비슷한 혈통을 가진 슬라브 민족을 폭격하는 미국에 대해 분노했다고 한다. 한 설문조사 결과에 따르면 당시 폭격에 대해 러시아인의 96%가 이를 반인륜 범죄라고 생각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푸틴 정권이 시작되던 2000년 당시 조사를 보면 81%가 미국의 정책을 반러시아적이라고 응답했으며, 이는 미국의 유고슬라비아 폭격과 연관이 있었다. 미국의 폭격행위는 1920년대 니카라과 개입부터 현재까지 지속된 역사다. 이 과정에서 미군의 폭격은 무고한 타국 민간인의 피로써 채워졌다. 유고슬라비아 내전 당시 미군의 폭격도 그러한 역사 중 일부임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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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전쟁의 기원 1 - 해방과 분단체제의 출현 1945~1947 현대의 고전 16
브루스 커밍스 지음, 김범 옮김 / 글항아리 / 202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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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학 전공자로써 앞으로 무조건 읽을 책이다. 완역된다고 하니 정말 기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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