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베스 미국과 맞짱뜨다 - 제국주의와 신자유주의의 굴레를 벗고 자주의 새 역사를 여는 베네수엘라
베네수엘라 혁명 연구모임 지음 / 시대의창 / 2006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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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와 우크라이나 사이의 전쟁이 격화되고 있는 요즘 재밌는 책 한권을 읽었다. 그 책은 바로 <원숭이도 이해하는 자본론>의 저자로 유명한 임승수씨가 공동집필한 저서 <차베스 미국과 맞짱뜨다>라는 책이다. 사회주의자가 되고 난 이후 베네수엘라에 대해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지만, 정작 베네수엘라에 대해서 깊게 공부해본 적은 거의 없었던 것 같다. 그저 베네수엘라가 미국의 경제제재를 받고 있고, 진보적인 정책들을 통해 사회주의를 달성하고자 했었던 것 정도만 단편적으로 알았다. , 베네수엘라의 역사와 이들의 정치 상황을 자세히는 몰랐다고 할 수 있다.

 

책의 제목에서 알 수 있듯이, 책에서 주인공이 되는 인물은 바로 베네수엘라의 대통령인 우고 차베스(Hugo Chavez). 우고 차베스는 진보적인 정책들을 통해, 베네수엘라를 사회주의 국가로 만들고자 했다. 실제로 차베스는 집권 초기 여러 성과들을 만들어 냈고, 성과들은 고무적이었다. 차베스는 베네수엘라를 사회주의 국가로 만들기 위해 많은 노력을 했다. 그는 과거 빈부격차가 극심하던 베네수엘라를 억압받고 착취 받던 이들에게 보다 더 많은 권력을 부여하고자 했고, 빈민들을 위해 학교를 설립하고 병원을 세웠으며, 문맹 퇴치에 지대한 공헌을 했다.

 

차베스는 과거 굶주리던 빈민들을 위해 무상으로 급식을 제공했고, 집이 없는 이들을 위해 주택을 건설했으며, 또 건설한 주택들을 가난한 인민들에게 분배했다. 차베스의 정책은 분명 진보적인 정책이었고, 자본주의적 양식이 많이 남아있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사회민주주의적 성격을 띈 것도 아니었다. 무엇보다 차베스는 빈민 계급이 권력을 가지기를 원했다. 그리고 기업의 이익이 아닌 공적인 이익을 추구했으며, 생산자가 일하고 노력한 만큼 받을 수 있는 평등한 생산관계를 유지한 사회를 추구했다. 그는 소위 21세기 사회주의라는 구호 아래 민주주의를 추구했지만, 소위 미국에서 주장하는 위선이 가득 찬 민주주의는 절대로 아니었다. 오히려 제국주의로 포장한 미국식 민주주의에 맞서 저항했다.

 

1998년 선거를 통해 베네수엘라의 대통령이 된 차베스는 집권 시점부터 미국이라는 거대한 제국주의 세력의 사악하고 위협적인 공격을 받았다. 미국에게 있어서 차베스라는 존재는 자신들의 사적 이익을 방해하는 존재였고, 따라서 축출되어야만 하는 존재였다. 따라서 미국은 베네수엘라 내에 있는 우익 부르주아지 세력들을 지원하여, 차베스 정부를 내부에서 흔들고자 했다. 이런 수법은 과거나 현재나 미국이 항상 이용하는 방법이다. 과테말라의 아르벤스, 브라질의 골라르트, 칠레의 아옌데 등이 그렇게 레짐 체인지(Regime Change)를 당했다. 2002년에만 해도 차베스를 축출하려는 두 번의 쿠데타가 있었고, 실제로 차베스 또한 목숨을 잃을 뻔했다. 그러나 미제국주의자들의 염원과는 달리, 베네수엘라 민중은 차베스편이었다. 그래서 미국과 우익 세력들이 온갖 흑색선전과 여론조작을 해도 쿠데타는 실패로 끝났다.

 

민중들이 차베스를 지키고 수호한 이유는 자명했다. 그것은 차베스가 가난한 인민들을 위해 진심으로 헌신했기 때문이다. 차베스 집권 이전에는 베네수엘라 빈민들과 인종차별을 받던 원주민들을 위해, 헌신하고 그들을 위한 진보적인 정책을 추진한 지도자는 없었다. 차베스가 집권한 이후 베네수엘라 사회에서 차별받던 원주민들도 권리라는 것이 생겼고, 공장과 사회에는 인민들의 의사가 직접적으로 반영되는 시스템이 도입됐다. 탐욕과 이윤밖에 모르는 자본주의 사회가 아닌, 집단과 공동 그리고 대다수 민중을 위한 진보적인 사회가 자리 잡았다. 과거 아주 극소수만 소유하던 집을 빈민들이 소유하게 됐고, 치료비가 없어서 못 가던 병원을 공짜로 치료받을 수 있게 됐다. 이런 혁명적인 변화들은 차베스가 대다수 인민들에게 지지를 받을 수밖에 없었던 이유다.

 

책을 읽으면서, 우고 차베스에 대한 존경심이 더 생겼다. 사회주의를 향한 그의 원대한 꿈과 정의는 너무나도 아름답고 순수하다. 1959년 혁명으로 사회주의를 건설한 쿠바의 피델 카스트로와 더불어, 베네수엘라 우고 차베스의 사회주의 승리를 향한 발걸음은 그 자체로 숭고하다. 이들의 혁명과 진보가 아름다운 건, 인간적이고 당연한 가치이기 때문이다. 단순히 기업과 자본가 계급의 이익만을 추구하는 자본주의의 가치와는 질적으로 다르다. 이런 가치를 부정하고, 범죄와 학살 그리고 폭력을 동반하는 주체가 바로 미국이다. 이런 미국에 대한 환상을 가진 대다수의 한국 사람들을 보고만 있으면 그저 안타까울 따름이다.

 

일각에서는 베네수엘라 경제가 실패했다고 말한다. 물론 베네수엘라는 가난하다. 무엇보다 미국의 경제제재는 지금도 해제되지 않았다. 미국은 차베스가 집권한 시점부터 현재까지 무려 20년간 베네수엘라에게 살인적인 경제제재를 가하고 있다. 베네수엘라 석유 문제도 그 원인을 따지고 보면, 자본과 부, 권력, 달러를 독점한 기업들이 우익들을 동원해 베네수엘라의 자주적인 시스템에 사보타주를 가해서 생긴 일이지, 차베스와 베네수엘라 민중이 의도적으로 망치기 위해서 그런 것이 아니다. 미국의 경제제재와 사보타주 및 테러를 당하는 베네수엘라의 상황은 보지 않고, 그저 서방이 주장하는 말말 앵무새처럼 반복하는 왜곡된 신념이 진실의 눈을 가린 것이다.

 

차베스는 2013년에 사망했다. 그러나 그는 죽기 전까지 미제국주의에 맞선 투쟁과 사회주의 승리를 향한 투쟁을 포기하지 않았다. 비록 사회주의 국가는 아니지만, 베네수엘라는 사회주의로 가기 위한 그 과도기적 단계에 있다. 현재는 그의 후임자인 니콜라스 마두로가 지도자로 있다. 우고 차베스와 피델 카스트로 그리고 에보 모랄레스로 이어지는 사회주의 승리를 향한 라틴 아메리카의 투쟁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전 인류가 COVID-19를 겪으며, 자본주의 하에서 고통을 받고 있다. 그리고 로자 룩셈부르크의 말대로 사회주의를 선택하지 않은 자본주의 국가는 우크라이나 전쟁이라는 어리석은 선택을 했다. 물론 자본주의 러시아 보다 자본주의 미국의 책임이 훨씬 더 크긴 하지만, 자본주의라는 야만주의가 불러온 결과다.

 

20세기가 끝나는 시점에서 21세기에 사회주의를 시도한 베네수엘라의 붉은 별 우고 차베스, 그는 비록 세상을 떠났지만 사회주의를 향한 라틴 아메리카의 전진은 COVID-19라는 위기 속에서 지속되고 있다. 자본주의가 야만주의라는 사실은 미국을 통해서 숱하게 봐왔다. 20세기에는 베트남 21세기에는 아프가니스탄과 이라크까지 미국이 일으킨 침략전쟁은 로자 룩셈부르크의 표현대로 제국주의 세력이 보여준 야만주의 그 자체다. 그 침략전쟁으로 돈을 벌고 이윤을 축적하는 것도 미제 그 자체다. 현재 우크라이나 사태에서도 경제적 이득을 보는 건 결과적으로 미국일 것이다. 2013년 유로마이단 색깔 혁명 이후 우크라이나에서 탈산업화가 가속화되며, 미국과 서방의 기업들만 이득을 보았다.

 

이처럼 자본주의는 야만주의고, 제국주의의며 신식민주의를 추구한다. 따라서 인류가 선택해야할 길은 사회주의다. 4차 산업혁명 시대라고 하지만, 19세기 마르크스가 분석한 모순은 본질적으로 그 형태를 유지하고 있다. 따라서 사회주의를 향한 투쟁은 계속돼야 한다. 그런 점에서 우고 차베스의 베네수엘라는 적잖은 영감을 주는 사례라고 나는 생각한다. 미제에 맞서 사회주의를 이룩하고자 했던 우고 차베스의 말을 인용하겠다.

나는 매일 더욱 확신하게 되며 내 마음 속에는 한 점의 의심도 없습니다. 이전부터 수많은 지식인들이 말해왔듯이, 우리는 자본주의를 넘어서야 합니다. 하지만 자본주의 안에서 자본주의를 넘어설 수는 없습니다. 사회주의를 통해서만이 자본주의를 넘어설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일은 민주주의를 통해서 가능합니다. 하지만 미국이 강요하는 방식의 민주주의는 아닙니다. - P2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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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89714일 무장한 시민 군중이 프랑스 파리에 있던 바스티유 감옥을 습격했다. 바스티유 감옥을 습격하고 며칠이지나 왕은 파리를 방문했고, 혁명 측의 요구를 수용했다. 왕 스스로가 왕권의 실추를 행동으로 보여줬다. 파리의 소식은 프랑스 전역으로 퍼졌고, 지방 도시에서는 주로 부르주아로 구성된 시정 상설 위원회와 국민 방위대가 조직되어 행정과 치안을 맡았으며, 그해 8월에는 이른바 인권선언문을 채택되어 봉건제도를 폐기했다. 이것이 바로 프랑스 혁명(French Revolution)이다.

 

1791년에 이르러 왕권의 권력은 완전히 붕괴했고, 이는 유럽 전역에 공포를 안겨줬다. 영국의 에드먼드 버크는 프랑스 혁명은 미친 짓이다.”라고 했을 정도로 경멸을 드러냈고, 이는 다른 유럽 국가들도 마찬가지였다. 1792년 혁명의 불길이 확산되는 것을 두려워한 프로이센은 프랑스와 전쟁을 치르게 됐고, 영국이나 러시아 제국 그리고 포르투갈 왕국과 네덜란드가 프로이센을 지원했다. 이것이 바로 프랑스 혁명전쟁이다. 유럽이 프랑스를 두려워 한 것은 왕권의 힘이 약해지는 것을 두려워했기 때문이며, 특히나 루이 16세의 단두대 처형은 그들에게 충격 그 자체였다.


프랑스는 혁명을 수호하기 위한 전쟁을 치렀다. 전쟁 초기 프로이센군의 전진은 거셌지만, 프랑스군은 발미 전투에서 정신적 그리고 정치적 승리를 거두었다. 전투에서 프로이센군 200명이 전사하고 프랑스군이 300명 전사했는데, 프로이센군의 진격을 1차적으로 막아냈다. 이를 통해 프랑스군은 혁명 열기를 이끌어 낼 수 있었고, 프랑스 시민과 군대는 보다 더 단결했다. 더 나아가 국내에서는 로베스피에르를 포함한 강경파들이 정치적으로 권력을 잡게 됐는데, 이들은 혁명 프랑스를 수호하기 위해 1793823일 징집령을 선포했다. 이에 따라 혁명군의 규모는 1794년에 대략 100만 명으로 증가했다.

 

그러나 이 전쟁은 유럽 전역으로 확산됐고, 프랑스는 대략 10년 동안 이 혁명전쟁을 치러야 했다. 플랑드르 전역과 스페인 전역 그리고 네덜란드 점령 및 제1차 이탈리아 원정으로 이어졌으며, 그 이후 이집트와 시리아 원정에 나섰다. 또한 제2차 이탈리아 전쟁을 치렀으며, 이 전쟁은 1801년까지 전개됐다. 17983월 프랑스는 영국을 굴복시키기 위해 350척의 함선과 54,000명의 병사를 싣고 이집트 원정에 나섰다. 여기서 큰 활약을 떨쳤던 인물이 있었는데, 그가 바로 그 유명한 나폴레옹 보나파르트다.


나폴레옹 보나파르트는 이집트 원정에서 터키 제국과 러시아에게도 큰 자극을 주었고, 영국과 더불어 이들을 상대했다. 당시 프랑스 혁명 전쟁은 네덜란드 방면과 독일의 라인강 방면 그리고 이탈리아의 나폴리 방면이었는데, 동맹국의 총공격 앞에 크게 후퇴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프랑스군은 네덜란드에 상륙하려는 영국군 3만 명을 격퇴시켰으며, 179910월 러시아의 반불 동맹 탈퇴 후에 연합세력의 공격을 국경에서 막아냈다. 이집트 원정에서 본국 귀환을 선택한 나폴레옹은 이른바 쿠데타를 일으켰고, 이것이 바로 브뤼메르 18일이다.

 

브뤼메르 18일을 통해 권력을 잡은 나폴레옹은 1800년에 제2차 이탈리아 전쟁을 지휘하기 위해 출정했고, 알프스를 넘어 밀라노에 입성했다. 마렝고 전투에서 오스트리아군을 무찌르고, 12월에는 독일 라인 방면에서 오스트리아군을 무찔렀다. 마렝고 전투에서 오스트리아측은 9,000명의 사상자를 낸 반면, 나폴레옹은 7,000명의 사상자를 냈다. 1801년 결국 오스트리아는 뤼네빌 조약에 응했고, 이에 따라서 프랑스와의 전쟁을 지속하는 국가는 영국만 남게 됐다. 영국은 오스만 제국과 협력하여 이집트에 있던 프랑스 원정군을 항복시켰지만, 결과적으로 프랑스에게 고립 당했다. 이후 나폴레옹은 1802년 종신 통령을 선포했고, 1804년에는 황제가 되었다. 이것은 결국 나폴레옹의 정복전쟁으로 이어졌다.


사실 프랑스의 정복 전쟁은 어떤 면에선 1796년 제1차 이탈리아 원정을 통해 시작되었다고 보는 견해도 있다. 그러나 이 시기의 전쟁은 엄밀히 따져서 프랑스 혁명 전쟁의 일부였고, 나폴레옹 개인의 정복욕 때문은 아니었다. 그리고 나폴레옹이 종신 통령을 선포하며 황제의 길을 걸었던 것은 1802년으로 그 전까지는 엄밀히 따지고 보면 혁명을 방어하기 위한 성향이 강했다. 나폴레옹이 정복욕을 드러내기 시작했던 것은 자신이 황제로 등극한 이후였다. 특히 그가 황제를 자칭하면서, 영토 팽창을 가속화했는데 이런 점에서 프랑스의 전쟁은 혁명전쟁에서 나폴레옹 개인이 추구한 정복전쟁로 성질이 바뀌었다. 따라서 나는 프랑스의 혁명전쟁은 나폴레옹이 종신 통령 선포와 황제 등극 이전까지를 혁명전쟁으로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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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0년대부터 1940년대까지 만주는 토벌과 반토벌의 격전지였다. 1931 9 18일 일본은 만주사변을 일으켜 침략의 마수를 드러냈고중국인과 조선인은 공산당을 중심으로 저항했다일본 제국주의자들이 만주를 침략한 이례로중국 공산당 휘하의 중국인과 조선인들은 일본군에 맞서 무장투쟁을 전개했다이들의 저항이 거세지자 일제는 대대적인 대토벌 작전을 전개했었다. 1933 11월 일제의 동만 지역 2차 대토벌에만 보병기병포병을 포함한 6,000명의 병력과 전투기가 동원됐으며, 3차 대토벌은 1935년까지 전개됐다만주지역 일본의 관동군 숫자는 1941년 독소전쟁이 일어나는 시점에서 대략 70만 명으로 증가했고, 600대의 전투기도 주둔했다.

(마오쩌둥과 홍군, 대장정 이외에도 중국 공산당 병력들은 만주사변 이후 만주에서 항일무장투쟁을 전개했다.)

 

만주에 주둔한 일본군 병력 규모에서 알 수 있듯이일제는 만주 지역에 대규모 병력을 투입했다. 1941년 일제가 진주만을 기습 공격하여 태평양 전쟁을 일으켰음에도만주 지역 관동군은 1945년까지 대부분 주둔하고 있었다일본이 만주사변을 일으킨 이례로 중국 공산당은 만주에서 무장투쟁을 전개했다무장투쟁을 전개했던 이들 중에는 조선인들이 많이 있었으며이후 북한의 초대 지도자가 되는 김일성도 그 중 한 사람이다김일성만 하더라도 1935년 중국 공산당 병력과 연합한 2,000명의 병력으로 일본군 부대를 습격해 6일 동안 전투를 벌이기도 했다심지어 1937년에는 소위 국내 보천보에 잠입하여 소규모의 교전을 치르고 난 뒤무사히 후퇴하기까지 했다동북항일연군 잔존 병력을 이끌던 허형식은 1942년 8월 일본군과 교전을 치르다 전사했다.

(동북항일연군 대원들)

 

중국인과 조선인의 항일무장투쟁이 격렬했기 때문에 일본군은 무자비한 토벌을 감행했다중일전쟁 발발 1년이 되던 1938년 일제는 그 악명 높은 간도 특설대를 창설하여중국 공산당 휘하의 부대 및 독립군들을 토벌하는 일에 착수했다일제는 만주에서 일어나는 항일투쟁의 뿌리를 뽑고자이른바 모든 것을 태우고죽이고약탈하는” 삼광작전을 감행하여 무자비한 양민 학살과 토벌을 자행했다삼광작전의 일환으로 일제는 이른바 집단부락이라는 것을 세웠다집단부락은 항일 유격대의 근거지를 철저하게 토벌하고 불태워 버린 뒤 그 주변에 흩어진 농가의 백성들을 강제로 집결시켜 하나의 부락에 수용하는 정책이다이후 비슷한 정책이 제주 4.3 사건 당시 한국 군경과 미군에 의해 사용됐고베트남 전쟁 당시에도 전략촌이라는 이름하에 자행됐다.

(동북항일연군의 깃발)

 

히틀러가 폴란드를 침공하기 며칠 전 동북항일연군 휘하 병력 600명은 일본군에 맞서 승리를 쟁취했다그 전투가 바로 다샤허 전투다당시 전투에 참가한 동북항일연군 제3방면군은 웨이정민과 천한장이 지휘했으며전투에 참가한 대다수 인사들은 조선인이었다. 1939년 8월 23일 동북항일연군은 일제가 만들어 놓은 집단부락을 포위해 공격했고집단 부락 안으로 밀고 글어가 치열한 전투를 치렀다동북항일연군은 이 과정에서 만주국 경찰 및 자위단 병력 다수를 사살했고대략 100여 명의 일본군을 사살했다이 소식을 들은 일본군은 수백명의 병력을 그곳으로 보냈다.

(다샤허 전투에서 전사한 허성숙의 전투 장면을 묘사한 그림)

 

다음 날에도 전투가 벌어졌다집단 부락에 도착한 일본군 수비대는 항일연군의 기습공격을 받았다이 전투에서는 당시 창설된 지 얼마 안 된 간도 특설대도 참여했다고 한다동북항일연군은 일본군 수비대가 집단부락의 일본인 주검을 수습해 돌아가는 것을 노렸으며, 7대의 트럭에 분승한 토벌대 차량 대열의 선두차가 대낮에 류슈 촌 부근에 미리 파놓은 물웅덩이에 빠져 정착하자 기습 공격을 가했다고 한다기습 공격을 받은 일본군 부대는 간도 특설대 대원 4명을 제외하고는 거의 전멸했다다샤허 전투에 관한 내용은 <연변인민 항일투쟁사>에 보면 다음과 같이 나왔다.

 

대사하 전투에서 제3방면군 부지휘관 후국충은 한 개 연대 40명을 인솔하여 양목조자에 매복하고 있다가 안도현성에서 증원병력으로 오는 100여 명의 일본군과 만주국 경찰에게 불의의 사격을 가하여 적을 무리로 쓸어 눕혔다살아남은 적들은 살구멍을 찾아 황급히 흩어졌다그런데 이 요격전에서 부지휘관 후국충이 적의 흉탄에 맞아 장렬한 최후를 마쳤다1호군 제3방면군은 가장 어려운 시기에 우수한 군사 지휘관을 잃었다.”

 

출처연변인민 항일투쟁사 p.350~351

 

2일간의 전투는 동북항일연군의 승리로 마무리 됐다다샤허 전투에서 대략 200명의 일본군을 사살하고 경기관총 7정을 포함하여 모두 200여 자루의 총기를 노획하는 전과를 올렸다하지만 인용문에 나와 있듯이3방면군의 희생도 컸다부지휘관인 후국충이 전사했고그를 포함하여 14단 정치위원 양형후, 13단 1연의 여자 기관총 사수 허성숙 등이 전사했다이후에도 항일연군은 일제가 만들어 놓은 집단부락을 타격 대상으로 삼으며 급습했고성과를 거두기도 했다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는 1939년 9월부터 12월 사이에 다샤허 전투를 승리로 이끈 동북항일연군 제3방면군은 집단부락을 습격하여 일본군 무장자위단원 100명을 포로로 붙잡고식량과 군용물자를 노획했었다최현이 있던 부대는 화전현 한총구에서 집중훈련을 받고 있던 만주군을 습격하여 그 대부분을 포로로 붙잡고 경기관총 7소총 600자루권총 10자루와 기타 군수물자를 노획하기도 했었다.

(동북항일연군 지도부의 얼굴)

 

1940년 1월부터 6월까지 간도성의 옌지허룽왕칭안투 네 현에서만 모두 46회의 집단부락 공격이 존재했다다샤허 전투 이후 만주국 정부는 숨진 특설부대원 16명의 장례식을 밍위에거우에서 성대하게 치르고이들이 숨진 장소에 16용사 전적비를 세워 순국열사로 기렸다이 전적비는 1945년 일제가 패망하고 난 뒤 철거됐다이처럼 만주에서는 일본군에 맞서 티열한 항일무장투쟁이 전개됐다그리고 만주에서 일본군에 맞서 싸웠던 이들 중에는 조선인들이 다수를 차지했다이들의 투쟁은 분명히 독립운동이었지만대한민국 교과서에는 언급되지 않고 있다참으로 안타까운 현실이다.

 

참고문헌

 

최성춘연변인민 항일투쟁사연변대학, 1999

 

김효순간도특설대서해문집,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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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Nick Turse의 저서 <Kill Anything That Moves>에 나오는 내용입니다.)


(후에 전투 당시 투입된 미군 탱크)


As U.S, and South Vietnamese forces launched a counterattack to take back the city, another bloodbath commenced. Reporing on the marines as they fought street to street, the CBS television correspondent John Laurence asked Lieutenant Colonel Ernie Cheatham what would happan to innocents trapped between them and the guerrillas. “I'm pretty sure they are civilians that we would consider bad guys right now,” Cheatham replied.

 

Navy ships lobbed 7,679 shells into Hue, and Marine Corps aircraft flew dozens of sorties, dropping napalm and five hundred pound bombs on residential neighborhoods. In all, U.S. forces unleashed an astonishing six hundred tons of bomb, plus barrages from artillery and tank cannons, dismantling the city in a chorus of explosions while ground troops fought street street. “We used everything but nuclear weapons on this town,” said one marine. Another admitted, “A great many civilians must have died in the fighting. If you saw or heard-or thought you saw or heard- movement in the house next door, you didn't stop to knock; you just tossed in a grenade.”

 

At least 3,800 of Hue's citizens were killed or reported missing as a result of the bombardment and battle, and 116,000 people were made homeless. More than three quarters of the city's homes were destroyed or seriously damaged. “Nothing I saw during the Korean War in the Vietnam so far has been as terrible, in terms of destruction and despair, as what I saw in Hue,” wrote the correspndent Robert Shaplen. Cheatham, the commmander of the 2nd Battalion, 5th Marines, put it more simply; “We pretty much destoryed the place, I guess.”

 

Source: Kill Anything That Moves p.103

 

미군과 남베트남군이 도시를 재탈환하기 위해 반격을 게시하자, 또 다른 유혈극이 일어났다. 미 해병대가 시가전을 벌이는 것을 보도함에 따라, CBS 텔레비전 특파원인 존 로렌스는 어니스트 치트햄 중령에게 미 해병대와 게릴라 사이에 갖힌 민간인들에게 무슨일이 일어날지 질문했는데, “나는 현재 나쁜 놈들로 여겨지는 그 무고한 이들이 민간인들이라 생각한다.”라고 치트햄은 대답했다.

 

미해군 군함은 7,679개의 포탄을 후에에 투하했고, 미 해병대의 전투기는 수십차례나 출격했으며 네이팜 폭탄과 500파운드나 되는 폭탄을 인구 거주 지역에 투하했다. 미군은 모두 합쳐600톤의 폭탄과 대포와 탱크 대포로 포격을 퍼부었으며, 지상병력이 시가전을 벌이는 동안 엄청난 폭발로 도시를 파괴했다. “우리는 핵폭탄을 빼고는 이 도시에 모든 것을 퍼부었다고 한 미군 해병은 말했다. 다른 해병은 무수히 많은 민간인들이 이 전투로 죽었을 것이다. 만약 당신이 다른 집으로 이동하는 것을 보거나 들었다면(혹은 보거나 들은 것을 생각한다면), 당신은 그곳을 공격하는 것을 막지 못했을 것이다. 당신은 그저 수류탄을 던졌을 것이다.”라고 인정했다.

 

최소 3,800명 이상의 후에 시민이 미군의 폭격이나 전투로 죽거나 실종되었고, 116,000명 이상의 민간인이 노숙자가 되었다. 도시의 3/4 이상이 파괴되거나 극심하게 손실됐다. “한국전쟁과 베트남 전쟁 동안 내가 본 그 어떤 것도 절망과 파괴 면에서는 후에 도시에서 본 것 만큼 끔찍하지 않았다.”라고 로버트 셰플린 특파원은 기록한다. 미 해병대 제2대대 5연대 지휘관인 치트햄은 좀 더 간단하게 표현했다. “내 생각에는 우리가 그곳을 거의 다 파괴했는걸.”

 

출처: 움직이는 것은 뭐든 죽여라 p.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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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에 노정협 사무실을 들렸다가 우연히 흥미로운 책 한권을 발견했다. 멕시코 만화작가 리우스가 쓴 <산디니스타 니카라과>. 1980년대 극단적 친미 반공주의자 로널드 레이건은 소위 이란-콘트라 스캔들(IranContra affair)’을 야기하여, 국제적으로 비난을 받은 적이 있다. 레이건 정부는 이란과 무기를 거래하고 받은 돈으로 니카라과에 있는 콘트라 반군을 지원했다. 당시 콘트라 반군은 1979년 혁명으로 정권을 잡은 니카라과의 산디니스타 정부를 전복시키려던 세력이었다.

 

콘트라 반군에게는 정당성이 전혀 없었다. 이들은 카터 정부와 레이건 정부로부터 대대적인 지원을 받아가면서 사회주의 정권을 무너뜨리는 행동에 착수했다. 또한 니카라과 인민들을 대량 학살했다. 미국은 니카라과 정부에게 대대적인 경제제재를 가했고, 혁명 정부는 소련의 지원에 의존해야 했다. 당시 미국이 지원한 세력은 반민중적이고, 무자비한 학살을 자행한 세력이었다. 이들은 니카라과인의 소수를 이루는 자본가 계급을 대변했으며, 당연히 민중들에게 지지를 받을 수 없는 이들이었다. 반면 1979년 혁명을 통해 탄생한 산디니스타 정부는 억압받고 착취 받던 계급의 이익과 입장을 대변했다.

 

1979년 산디니스타 혁명 이전에도 니카라과의 상황은 비슷했다. 19세기 중후반 미국의 기업들은 니카라과에 진출하여, 그 나라 자원과 국부를 수탈했다. 대표적으로 연합과일회사(United Fruit Company)를 포함하여, 미국의 기업들은 니카라과를 사실상 식민 지배했다. 19세기와 20세기 초반에는 직접적인 식민 지배를 했고, 1930년대 이후에는 간접적인 식민지배를 했다. 미국이 지원하는 세력은 반민중적이었다. 친미세력들은 미국의 지원을 받았고, 때로는 양민을 학살했다.

 

1912년 미해병대의 니카라과 점령이 시작된 이래로, 니카라과인들은 미제국주의에 저항했다. 아우구스토 산디노라 불리는 혁명가는 게릴라전을 통해, 점령군 미해병대에 맞서 싸웠다. 미국은 산디노의 게릴라 세력들을 뿌리 뽑기 위해, 대규모 전투기 편대를 조직하여 마을에 무차별 폭격했으며, 기총소사를 퍼부어 죄없는 농민과 부녀자 그리고 어린이 300명을 학살했다. 그리고 이러한 행위들은 미국의 캘빈 쿨리지 대통령에 의해 영웅적인 군사행동으로 찬양받았으며, 민간인을 무차별 학살한 전투기 조종사들은 백악관에서 대통령이 주는 훈장을 받았다. 소름끼치게도 이러한 비극은 이후 그리스 내전과 한국전쟁 그리고 베트남 전쟁에서 반복됐다.

 

미국 언론들은 산디노의 게릴라 부대에 대한 온갖 흑색선전을 했다. 미국의 언론들은 산디노 부대를 약탈자, 살인자, 악마적 투기꾼들, 강간자들, 침략자들과 같은 수식어로 흑색선전을 했다. 한국전쟁 당시 한국 정부와 미국 정부가 빨치산들에 대해 온갖 악의적인 왜곡 보도와 흑색선전을 했던 것과 일치한다. 마찬가지로 베트남 전쟁 시기 미국과 남베트남 언론이 조국의 자유와 독립을 위해 투쟁하던 베트콩들에 대해 온갖 악의적인 왜곡 보도와 흑색선전을 하며 테러리스트라 매도했던 것과 똑같다. 그리고 현재 친미주의자들은 100년 전부터 미국이 했던 이러한 왜곡된 흑색선전을 아무런 검증 없이 믿는다.

 

1930년대 등장한 소모사 정권은 40년에 걸쳐 이른바 3대 세습 독재를 했다. 많은 이들이 북한이 3대 세습 독재를 비난하지만, 정작 미국이 3대 세습을 지원했다는 점에 대해선 무비판적이며 무지하다. 아니 사우디아라비아와 같은 전 근대주의적 국가에 대해선 아무런 말도 없다. 미국이 주장하는 소위 인권 타령의 진면목일 것이다. 1960년대에서 1970년대 기준으로 소모사 일가의 전 재사는 미화로 9억 달러였고, 미국 기업의 외자 투자액도 상상을 초월했다. 그러나 당시 니카라과 민중은 세계 최대의 빈곤국중 하나였다. 니카라과의 실업률은 36%였고, 민중의 문맹률은 74%였으며, 유아사망률은 최소 20%를 넘겼다. 주택 불청결도 70%에 민중의 60%가 영양실조였다. 또한 니카라과의 어린이 80% 이상이 미취학 아동이었다. 쉽게 말해, 니카라과 부자들과 미국이 막대한 부를 축적하고 있는 동안, 대다수의 민중은 가난에 허덕였다.

 

1948년 한반도 이남에서 미국과 이승만 정권의 폭압에 맞서 빨치산들이 창설되어 게릴라전을 벌였고, 1960년 남베트남에서 미국과 응오딘지엠 정권에 맞서 남베트남민족해방전선(베트콩)이 창설되어 게릴라전을 벌였듯이, 1962년 니카라과에서도 를로스 폰세카 아마도르(Carlos Fonseca Amador) 등 소모사 왕조의 독재와 미국 독점자본의 지배에 반대하는 소규모 무장조직 지도자들이 모여 산디니스타민족해방전선을 결성했다. 이들은 18년간의 게릴라 항쟁을 통해, 1979년에 니카라과 전역을 장악했다. 수많은 전투에서 미제국주의 앞잡이 소모사 일단의 반동적 군대를 격파했고, 궁극적으로 이들을 몰아냈다.

 

이들은 120만 에이커에 달하는 토지를 몰수하여 국유화하고자 했으며, 미취학 아동과 치료받지 못한 민중들에게 무상으로 치료해주고자 했다. 이들은 하늘처럼 치솟은 문맹률을 감소시키 위해 학교를 건설하고, 무상교육을 실행하고자 했다. 소모사 친미정권 시기 치솟은 유아사망률을 감소시키기 위해, 무상의료 체제를 건설하고자 했다. 정권 초기 무려 10만 명 이상의 젊은이들이 문맹 퇴치 캠페인에 참여했고, 10개월 만에 문맹률이 많이 감소했으며, 글을 배운 이들이 다시 도시와 농촌의 어린이들을 교육시켰다. 책에 나오는 내용 일부를 발췌하겠다.

 

대서양 연안지방의 사람들은 조금 다른 데가 있는 민족이었다. 그들은 고유의 방언과 그들만이 갖고 있는 풍습과 종교가 있었다. 나카라구아의 중심도시에서 수천명에 달하는 교사, 사회운동가, 의사, 그리고 문맹퇴치 운동원들이 이곳에 도착했을 때에야 비로서 이 지방이 니카라구아의 한 부분이라는 것이 확인되었다.”

 

출처: 산디니스타, 니카라구아 p.134

 

책을 읽으며 니카라과 인민들과 혁명가들의 감동적이고, 역동적인 역사를 감동적으로 알 수 있었다. 쿠바와 칠레, 엘살바도르, 베네수엘라 등 미국에 반대하는 목소리를 내는 이들은 항상 전체적으로 너무나도 옳은 가치를 추구한다는 생각이 든다. 반면에 자본으로 모든 것을 지배하려는 미국은 너무나도 추악하고 탐욕스럽다. 1950년대 프랑스에 맞서 독립전쟁을 전개하고 있던 베트남의 지도자 호치민이 했던 연설처럼, 미국은 너무나도 탐욕스럽고 추악한 존재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은 절대적으로 정의가 될 수 없는 것이다. 최소한 미국이 제국주의적 행보를 포기하지 않는 한 말이다.

 

산디니스타민족해방전선의 시초인 아우구스토 산디노가 했던 연설이 기억에 남는다. 1912년부터 1933년까지 21년간 니카라과를 군대로 통치하고 점령한 미국은 잔악무도했다. 19세기 후반에서 20세기 초에 필리핀에서 대량 학살을 했듯이, 그리고 니카라과 이후에는 그리스와 한반도 그리고 인도차이나 반도에서 온갖 천인공노할 대학살을 벌였듯이 말이다. 2차 세계대전 이후 미국과 그 미국 지지자들이 자행한 온갖 범죄와 만행들이 미해병대의 니카라과 통치 기간에 일어났다.

 

미군 전투기가 니카라과 마을을 무차별 폭격했을 당시, 혁명군 지도자 아우구스토 산디노는 저항을 추구했다. 그리고 미제국주의에 맞선 투쟁에서 궁극적으로 승리했다. 그의 연설은 참으로 감동적이고 혁명적이다. 그의 연설을 인용하며 마치겠다.

 

우리는 고립됐다. 조국 니카라과의 대의는 잊혀져가기 시작했다. 이제부터 산디노의 상대는 디아즈 정권이 아닌 역사상 가장 강력한 미제국주의자들이다. 우리는 그들과 다시 싸울 것이다. 그리고 우리 중의 일부는 그들의 폭격으로 무참히 학살당하고, 제국주의 군대의 총검에 난자당하며 최신식 기관총 앞에 쓰러져 나갈 것이다. 그러나 니카라과는 승리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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