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은 프랑스 식민주의를 지지함으로써 영국의 낡은 동 수에즈 정책을 지지하는 자신의 지도자들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명확하게 드러냈다.”
출처: 일본제국 패망사 p.1321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영국과 미국은 유엔을 통해 팔레스타인(Palestine)을 아랍인과 유대인 거주 구역으로 분리하기로 결정했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히틀러에게 탄압을 받았던 유대인들은 전쟁이 끝나자, 과거의 땅을 되찾겠다는 이유를 들어 팔레스타인 영토에 자신들의 나라인 이스라엘(Israel)을 세웠다. 팔레스타인에 대한 미국과 영국의 결정은 당연하게도 아랍 민중에겐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었다. 1948년 이스라엘이 탄생하자 팔레스타인 지역의 유대인 수는 급격히 증가했다. 1914연만해도 그 나라의 유대인 인구는 6만 명이었지만, 1948년에는 70만 명이 됐다. 당시 유대인들이 벌인 활동은 이른바 시오니즘(Zionism) 운동이었고, 당연히 영국과 미국은 이를 지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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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말 압델 나세르)
1948년 5월 15일 유대인들이 이스라엘을 선포하자, 분노한 중동 국가들은 이스라엘에게 선전포고했다. 이집트, 시리아, 레바논, 이라크, 요르단 등이 이 전쟁에 참전했다. 당시 이집트는 영국으로부터 독립하지 얼마 되지 않은 상태였다. 물론 당시 이집트의 참전은 파루크 왕의 독단적인 결정이었으며, 파루크의 목적은 전쟁에서 승리한 후 자신의 정치적 최대 라이벌인 요르단 왕국의 압둘라가 팔레스타인을 점유하는 것을 막기 위함이었다. 제1차 중동전쟁은 1949년 3월 이스라엘의 승리로 끝이 났다. 당시 제1차 중동전쟁에는 이집트의 장교로 참전한 이가 있었다. 그가 바로 가말 압델 나세르(Gamal Abdel Nasser)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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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세르와 소련의 흐루쇼프 서기장)
제1차 중동전쟁에서 이집트 왕정이 패배하자, 이들은 불신의 대상이 됐다. 따라서 이집트 내에서는 왕정을 타도해야 한다는 생각이 확산됐다. 전쟁에 참전했던 나세르는 자유장교단을 중심으로 이 왕정을 타도하기로 결심했고, 이들은 1952년 7월 23일 거사를 단행했다. 쿠데타를 감행한 이들은 이날 아비딘 궁전에서 왕을 체포하는 데 성공하고, 국가의 모든 주요기관을 장악하거나 접수했다. 이미 국민들 간에 기존 정치세력에 대한 실망과 증오가 팽배해 있었기 때문에 쿠데타는 아무런 저항도 받지 않고 쉽게 성공할 수 있었다. 나세르는 1953년 6월 왕정제 자체를 폐지해버렸으며, 새로운 내각을 만들었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이집트는 영국으로부터 형식적인 독립을 얻었지만, 여전히 영국군은 자신들의 경제적으로 필요한 수에즈 운하를 독점하고 있었다. 결국 1954년 영국군 철수협상을 진행했고, 1956년 영국군 철수를 합의했다. 나세르는 1955년 최초로 비동맹 개념을 채택한 반둥(Bandung) 회담에서 아랍 세계를 이끄는 강력한 지도자로 부상했고, 유고슬라비아의 티토, 인도네시아의 수카르노와 더불어 제3세계 진영에 가담했다. 1956년 7월 나세르는 영국군 철수한달 후 수에즈 운하를 국유화하고 거기서 생기는 수입으로 댐 공사를 하겠다고 선언했다. 수에즈 운하의 국유화는 즉각 시행되었다. 이집트 군대가 수에즈 운하를 장악했으며, 여기서 나온 수입으로 아스완 댐을 건설하고자 했다. 영국 프랑스는 나세르의 이집트에게 선전포고했다. 이렇게 되면서 제2차 중동전쟁 즉 수에즈 위기가 발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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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에즈 운하 지도)
이러자 미국은 아스완 댐 건설에 대한 약속을 저버렸으며, 미국의 덜레스 장관은 “나세르가 소련과 무기 거래를 했다”는 이유를 들며, 영국 프랑스를 지원했다. 당시 나세르는 프랑스의 식민지이던 알제리에서 독립운동 세력인 민족해방전선을 지원했었다. 이 점에서 프랑스는 이집트를 응징하려고 했다. 영국과 프랑스는 자신들의 제국주의 우방인 이스라엘을 끌어들였다. 3국은 비밀 회담을 갖고 이집트를 침공하는 전반적 전쟁계획을 세웠으며, 1956년 10월 29일 이스라엘은 계획대로 시나이 반도를 침공하여 5일 만에 가자 · 라파 · 알 아리쉬 등 주요 도시와 티란 섬을 점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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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에즈 위기 당시 전쟁을 표현한 사진)
10월 30일 영국과 프랑스는 시나리오대로 이집트와 이스라엘 양쪽에 선전포고를 하고 운하 양쪽 20마일 선으로 물러설 것을 요구했다. 이스라엘은 그 조건을 곧 받아들였지만, 이집트는 자국 땅 일부를 포기하라는 그 조건을 결코 수용할 리 없었다. 영국과 프랑스는 이집트 비행장들에 대한 공습을 가한 다음 11월 5일부터는 공수부대와 해상 수송부대가 상륙하고 운하를 향하여 진격했다. 그동안에 이스라엘군은 전 시나이 반도를 수중에 넣었다. 그러나 영국과 프랑스 이스라엘이 이집트를 상대로 전쟁을 치르자, 국제여론은 이들에게 외교적 압력을 가했다. 이들은 결국 전황이 고착화되기 전에 휴전을 선언했으며, 영국과 프랑스는 철수했다. 이스라엘도 1957년 3월까지 철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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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집트인들에게 환영받는 나세르)
수에즈 위기 당시 미국은 서독을 통해 이스라엘에게 무기를 지원했던 반면, 소련은 이들에 맞서 이집트와 같은 아랍 국가에게 무기를 제공했다. 수에즈 위기에서 나세르의 이집트 군대는 군사적인 면에선 패배했지만, 정치와 외교적인 부분에선 승리를 거두었다. 이를 통해 나세르의 이집트는 19세기 영국 제국주의가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만든 수에즈 운하를 자신들의 것으로 만들었다. 이로써 이집트는 식민지 지배의 잔재를 완전히 지워버릴 수 있었다. 나세르는 이집트에서 영웅으로 부상했고, 아랍 주권의 회복이라는 상징적 의미와 더불어 아랍인들에게 아랍 민족주의의 실현과 통일 아랍의 꿈을 심어주는 아랍 세계의 지도자로 급부상하기에 이른다.
참고문헌
존 드상시, 김한경(역), 『인물로 읽는 세계사 30, 나세르』, 대현출판사, 1999
손주영, 『이집트 역사 다이제스트 100』, 가람기획, 2009
정토웅, 『세계전쟁사 다이제스트 100』, 가람기획, 20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