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화 체 게바라 평전
시드 제이콥슨 외 지음, 이희수 옮김 / 토트 / 201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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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20세기 위대한 휴머니스트 체게바라

체게바라(Che Guevara)!

난 이 이름을 듣기만 해도 가슴이 뛴다. 예수와도 같은 얼굴을 한 이 인물은 정말 예수처럼 남을 위해 자신을 철저하게 희생한 혁명가였다. 미국의 포악한 독점자본이 착취와 유린을 일삼던 라틴아메리카에서 체는 억압받고 고통받는 민중을 위해 자신을 희생했다.

체는 한손에는 총과 다른 한손에는 의약품을 들고 혁명에 투신했으며, 그의 삶은 1967년 10월 볼리비아에서 마감됐다. 그의 마지막 혁명은 분명 실패였다. 혁명가를 두려워한 제국주의 앞잡이와 미국은 그를 총살했고, 시신은 묘비도 세우지 않은 채 비밀리에 매장됐다. 하지만 체는 전설이 됐고, 오늘날까지도 그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다.

1968년 프랑스 파리와 독일의 베를린에서 68혁명이 일어났을 당시, 젊은이들은 체게바라와 호치민의 사진을 들고 거리로 나왔다. ˝호! 호! 호치민! 체! 체! 체게바라!˝를 외쳤던 젊은이들은 이들의 위업을 받들어 미제국주의의 폭력성을 규탄했다.

당시 미국은 베트남에서 파괴적인 살육전을 전개하고 있었고, 무고한 베트남 민간인들이 미군의 최신식 화력과 무기에 대량학살 당하고 있었다. 이런 제국주의의 폭력성에 반기를 들고 저항한 인물이 바로 베트남의 호치민과 쿠바의 체게바라였던 것이며, 실제로 서구의 젊은이들은 그렇게 생각했다.

체게바라가 총을 들게 된 이유는 분명하다. 부유한 가정에서 태어난 의대생 체는 라틴아메리카를 여행하던 도중 제국주의가 저지른 폭력과 억압을 두눈으로 직접 보았기 때문이다. 연합과일회사를 비롯한 미국의 독점 기업들은 자국의 초과이윤을 위해 라틴아메리카 민중을 개처럼 취급했고, 미국에 협력한 부르주아 계급들은 민중을 착취하며 호의호식했다.

뜨거운 심장을 가진 체는 바로 그걸 묵과할 수 없었고, 사회주의 혁명만이 라틴아메리카 민중을 해방시킬 수 있는 길이라 굳게 믿게 됐다. 그가 피델 카스트로를 만나 쿠바 혁명에 동참한 것도 그런 이유에서였다. 사회주의 혁명 이전의 쿠바는 미국의 식민지였다. 마약과 매춘, 부정부패가 창궐했고, 소수의 자본가들만이 미국의 자본가들과 더불어 부를 독점했다.

쿠바 혁명은 그런 제국주의 체제를 종결시킨 혁명이었으며, 혁명에 성공한 카스트로는 미국 제국주의가 소유한 생산수단을 국유화했다. 가난한 이들에게 무상으로 교육시키고, 치료시키며 집을 주었다. 쿠바의 사례가 성공했듯이, 체는 이러한 혁명을 라틴아메리카 전역으로 확산시키고 싶어했다. 그래야만 미국의 제국주의에 맞서 저항할 수 있다 생각했기 때문이다.

바로 그랬기 때문에 미국은 볼리비아에 체게바라가 잠입했다는 소식을 듣자, CIA와 육군 특수부대 그린베레를 투입하여 어떻게든 체를 죽이고자 했다. 미국은 체게바라를 죽였지만, 그의 순고한 혁명 이념까지 억압받고 유린받던 민중들의 마음속에서 지우지 못했다.

이번에 읽은 책 <만화 체게바라 평전>은 인간 체게바라가 낡은 오토바이를 타고 혁명가가 되는 과정부터, CIA가 동원한 토벌대에 의해 사살되는 최후까지의 내용을 다루고 있다. 중간 중간에 국제정세에 관한 설명과 더불어, 체의 인간적인 심오한 고민을 만화의 형태로 잘 담아낸 것이 이 책의 특징이다.

내가 체게바라를 처음 읽은 건 6~7년 전 군대가기전에 했던 일반휴학 시절이었다. 그때 읽은 <체게바라 자서전>과 어록, 평전 그리고 감상한 영화와 다수의 다큐멘터리를 통해 숭고한 신념을 가진 그를 존경하게 됐다.

체게바라가 꿈꾸던 라틴아메리카의 해방이 이루어졌는가?

이 질문에 대답하자면, 아직은 아니다라고 대답할 수 밖에 없다. 그러나 분명한 사실이 있다. 체가 가졌던 그 원대한 꿈을 실현하기 위해 싸우고 투쟁하는 수많은 체게바라가 라틴아메리카에 있다는 사실은 현재 그곳에 확산되는 반미 반자본주의를 통해 드러나고 있다. 또한 체가 목격한 억압받는 라틴아메리카의 현실은 현재 진행형이다. 따라서 체게바라의 혁명적 위업과 신념은 여전히 유호하다.

라틴아메리카에 진정한 해방이 이루어지기를 기대하며 서평을 마치도록 하겠다.

˝사회주의는 라틴아메리카에서 이루어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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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43-Plus My Lais of the South Korean Mercenaries


(이 글은 노엄 촘스키와 에드워드 허만의 저서 『The Washinton Connection and Third World Fascism(워싱턴과 제3세계 파시즘)』에 나오는 내용의 번역본을 수정한 것입니다. 원문은 베트남 전쟁 당시 한국군에 의한 민간인 학살을 얘기하지만, 1980년대 국내 번역본은 한국군을 동맹군 혹은 용병이라 번역을 했더군요. 그래서 수정해서 올려봤습니다.)


한국군은 1965년 존슨 행정부와의 협정에 의하여 남베트남에 도착해서 1973년까지 주둔했었다.(각주 59) 1965년과 1966년의 뉴스 보도는 미국의 동맹군인 한국군을 ‘용맹’하고 ‘강력하다’고 표현했지만, 1970년 1월에는 그들의 강력함이 남베트남 민간인들에 대한 의도적인 살상에 기반한 것임이 일반인들에게 폭로됐다. 당시의 보도에 따르면, 한국군은 자신들이 점령한 마을에서 무조건 1/10의 민간인을 사살하는 정책을 수행하고 있었다.(각주 60)


하지만 1972년이 될 때까지 한국군의 민간인 학살 규모는 전혀 알려지지 않고 있었다(당연히 이것 역시도 언론에서는 별 관심이 없을 테지만 그 살상은 ‘조직적’인 범주에 들어가는 것이었다).(각주 61) 베트남어를 하는 두 명의 퀘이커 교도인 다이안(Diane)과 마이클 존스(Michael Jones)는 5년 동안 한국군에게 점령되어 있었던 작전지역에 대해 집중적인 조사를 벌였다. 그들의 조사결과를 요약해보면 다음과 같다.


(a) 남베트남인들이 표현하는 것처럼 ‘임대군인(rented soldiers)’인 한국군은 미라이 학살과 규모면에서 비슷한 일련의 학살을 자행했다. 100여 명 정도가 죽은 각각 별개로 나눠진 12건의 학살사건이 존스의 조사에서 밝혀졌다. 한국군은 이밖에도 20~30명의 비무장 민간인이 죽은 수십 건의 또 다른 학살을 자행했으며, 그 밖에 헤아릴 수도 없는 각각 별개의 살인, 강도, 강간, 고문, 그리고 토지 및 민간인 개인이 소유한 재산의 파과 및 방화를 저질렀다. 한국군에게 살해된 것으로 알려진 사람의 숫자는 총 수천 명 단위에 이르는 것이 분명하다. 거기다 존스는 이들 ‘연합군’에게 ‘평정된’ 지역 중 임무지역만을 조사했던 것이었다. 


(b) 이러한 한국군에 의한 학살의 희생자는 대부분 여자와 어린이, 그리고 노인들이었다. 그러한 이유는 징집연령에 해당되는 남자들이 남베트남민족해방전선에 가담하거나 사이공 정부에 소집되었고 또는 숨어 있었기 때문이다.


(c) 이러한 대량학살은 부분적으로 행해진 것이었다. 그러나 부분적이라는 것은 한국군을 공격한 데 대한 보복으로서, 또는 그러한 기습 공격에 대한 경고로서 행해졌다는 것이다.(각주 62) 요컨대 한국군이 장악한 전 지역의 민간인들은 그들에게 잡힌 인질이나 다름없었다. 만일 지뢰가 폭발한다든지 해서 한국군 중에 사망자가 생기는 경우 이들이 빈번이 가장 가까운 마을을 습격하여 20명 혹은 120명에 달하는 비무장 민간인을 학살했다. 이 정책은 나치 독일의 정책화 비슷했지만, 남한의 민간인 포로학살은 나치가 2차 세계대전 도중 서유럽에서 자행한 학살들에 비하면, 보다 전방위적이고 무차별적인 것이었다.


(d) 이러한 대향학살은 오랜기간 동안 심지어 1972년까지도 행해졌으며 미군당국도 이를 알고 있었다.(각주 63) 미국 관리들이 이런 형태의 ‘평정작업’을 중단시키기 위해서 어떤 노력을 보였다거나 혹은 이와 같이 빈번하고도 지속적인 만행에 대하여 어떤 징계조치가 취해졌다는 증거는 전혀없다. 사실상 한국군의 고의적인 민간인 학살은 미국에게 용인 받았을 뿐만 아니라, 일부 미군 당국자는 이를 호의적으로 보기도 했었다는 신뢰할만한 근거도 있다. 콜롬비아 대학 동아시아 연구소의 프랭크 볼드윈(Frank Baldwin)은 한국군의 그러한 방침은 “수년 동안 미국에서는 공공연한 비밀”이었다고 보고했다. 미국 관리들이 볼드윈에게 때로는 유감을 가지기도 했지만, 보통은 찬사와 함께 그러한 볼드윈의 주장이 사실임을 인정했다.


(e) 미 국방부는 한국군의 지속적인 남베트남 주둔을 유지하기 위해 1973년 회계연도 예산을 1억 3,400만 달러로 요구하면서(1965~1973년간의 총액은 17억 6천만 달러에 이르렀다.), 의회에서 한국군이 남베트남의 중요한 지역을 지키고 있다고 강조했다. 미국 관리들이 말하는 오웰주의적 의미에서 본다면 한국군이 남베트남에 있는 사람들을 지키고, 안전(각주 65)을 보장해준다는 것은 사실이며, 그런 의미에서 마찬가지로 닉슨과 웨스트모어랜드 및 평정계획 자체도 그런 역할을 했던 것이다.(각주 66)


이러한 형태의 평정작전을 스락했다는 것은 충분히 입증되었듯이 미군 및 미군의 각국 연합군-비단 한국군뿐만 아니라(각주 67)-이 모두 남베트남 민간인들에 대한 조직적인 폭력행위를 즐겼다는 것은 그 같은 만행과 학살이 미군의 노력과 임무에 ‘부합하는 것’이었음을 시사한다. 즉, 그러한 행위는 가난하고 실질적으로는 무방비 상태에 있었으면서도 완강히 협조를 거부하는 이민족을 평정한다는 과업에 없어서는 안 될 사항이었다.


각주


(각주 59) 1965년 1월 9일 대략 2,000명이 한국군이 파병됐다. 1965년 4월 20일의 호놀룰루 회담은 그 숫자를 7,250명으로 증가시킬 것을 권고하였다. 이때는 바로 남베트남에 북베트남군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정보가 처음으로 주의를 끈 때였다. 1965년 6월까지도 국방부는 아직 그런 군대가 남베트남 내에 혹은 근처에 있을지도 모른다는 가능성에 대해서만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참고문헌은 Chomsky, For Reasons of State, p.122를 보라. 한국군은 1967년 2월의 캄보디아 마을 습격에 가담했던 것으로 보도되고 있다. Chomsky, At War With Asia, p.122를 보라.


(각주 60) Robert M. Smith, “Vietnam Killings Laid to Koreans,” New York Times (10 January 1970).


(각주 61) 뉴욕타임즈지의 크레이그 휘트니(Craig Whitney)는 다이안(Diane)과 마이클 존스(Michael Jones)로부터 한국군의 학살행위에 대한 방대한 기록을 받았는데 그는 베트남에서의 동맹군의 장래 역할에 초점을 맞춘 한 기사의 끝부분에다 그들이 본 사실을 간략하게 요약해 놓았다. 그 기사의 첫 머리에서 휘트니는 이렇게 설명한다. “한국군은 중부 해안의 방어가 빈약한 지역에 군사적 방패(휘트니는 누구를 위한 방패인가는 말하고 있지 않다)를 제공하고 있었다.” “Korean Troops End Vietnam Combat Role,” New York Times (9 November 1972).


(각주 62) 한국군에 의한 학살은 대부분 그들의 행동이 당시 진행되고 있던 어떠한 군사작전에도 포함되지 않는 것이었다는 점에서 닥치는 대로 벌인 학살이었다.


(각주 63) 랜드연구소의 “Viet Cong Motivation and Morale Study (1966년)”는 한국군의 무차별적인 민간인 학살에 대한 기록상의 증거를 제시하고 있었는데, 이 자료는 기밀처리되어 유포가 억제됐다. American Report (28 July 1972)를 보라.


(각주 64) Letter in the New York Times, (25 January) 1970).


(각주 65) ‘안전’이란 미국의 공식 대변인들이 일관되게 베트남에 적용한 또 하나의 오웰주의이며 비슷한 방식으로 이 왕국 전역에 적용되었다. 베트남에 관한 경우 그 말은 사이공의 미국 종속정권이 위협당하지 않는 상태의 지배를 의미했다. 만일 사이공 측이 순전히 무력과 폭력으로 지배를 한다고 하더라도-비록 이는 종종 있는 일이지만- 그 부락과 주민은 ‘안전’한 것이었다. 만일 남베트남민족해방전선이 무력 없이 지배를 한다 하더라도 그 부락과 주민들은 ‘불안전’한 것이었다. 이와 마찬가지로 1953년 6월의 한 국가정보 추산은 “베트남 주민에게 안전을 제공”할 수 없었던 프랑스의 무능력을 우울하게 논하고 있는데, 그들 주민은 게릴라에게 프랑스연합군이 와 있음을 경고해 줌으로써, 게릴라들이 방어를 취할 수 있게 해주었다는 것이다. 요컨대 베트민에 대한 대중적 지지가 프랑스로 하여금 베트남 주민들에게 베트민으로부터의 안전을 제공할 수 없도록 만들었다는 것이다. The Pentagon Papers, Gravel ed., v. I, p. 396.


(각주 66) 자세한 건 “‘Pacification’ by Calculated Frightfulness: The Testimony of Diane and Michael Jones on the Massacres of South Vietnamese Civilians by South Korean Mercenary Troops,” Pacification Monograph Number 2; edited with an Introduction by Edward S. Herman, Philadelphia, 1973을 보라.


(각주 67) 이와 같은 문제는 호주군이 전개한 평정작전에서도 나타났다. 알렉스 카레이(Alex Carey)의 “Australian Atrocities in Vietnam,” Sydney, N.S.W., 1968을 보라.


출처: Noam Chomsky·Edward Herman, 『The Washinton Connection and Third World Fascism (The Political Economy of Human Rights - Volume I)』, Haymarket Books, 2014, p.365~3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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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나라 이웃나라 17 : 동남아시아 - 시즌 2 지역.주제편 먼나라 이웃나라 17
이원복 글.그림 / 김영사 / 201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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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나라 이웃나라 동남아시아편 감상평

어린시절 역사에 대한 호기심을 자극시킨 책이 있다면, 만화작가 이원복의 먼나라 이웃나라를 뺄 수가 없다. 초등학교ㆍ중학교 시절 먼나라 이웃나라에 대한 의문점 하나가 있었다. 왜 이 책은 주로 서구유럽 위주의 나라만 다뤘던걸까? 나는 이 점이 항상 의문이었다.

그러나 미국편 이후 중국편과 발칸반도 편, 동남아시아, 터키, 오세아니아, 러시아 편이 나왔다는 얘기를 듣고, 늦게서야 작가가 다양한 국가를 다룬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 대학원 생활이 바쁘기는 하지만, 오랜만에 이원복의 먼나라 이웃나라가 읽고 싶었다. 그래서 집 근처의 도서관에서 동남아시아편과 러시아편을 대출했다.

초등학교 시절이나 중학교 시절에는 몰랐지만, 이원복씨는 상당히 보수우파적 성향을 가진 인물이다. 대학생 시절 우연히 이원복이 조선일보에 게재한 만화를 인터넷으로 본 적이 있었다. 그때 나의 기분은 ˝이원복 실망이다.˝였다. 그가 우리나라의 친일청산 문제나 과거사 문제를 다루는 태도가 뉴라이트랑 크게 다르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한 생각은 뒤로하고 이번에 동남아시아편을 읽었다. 작가는 미얀마ㆍ태국ㆍ라오스ㆍ베트남ㆍ캄보디아ㆍ말레이시아ㆍ인도네시아ㆍ필리핀ㆍ싱가폴ㆍ브루나이ㆍ동티모르 순으로 동남아시아의 역사와 문화를 설명한다. 이원복 특성상 서문에서 밝히는 소위 대한민국 국뽕적 감상은 여전히 나이브하다는 생각을 하게 만들었지만, 그래도 제법 잘 읽혔다. 내가 잘 모르던 동남아시아의 역사와 문화를 만화를 통해 간략하게 배울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제법 재미도 있다.

하지만 만화의 구성과 내용에도 적잖은 문제들이 발생한다. 이원복 작가는 너무 지나치게 서구식 민주주의를 절대선으로서 맹신하는 경향이 있다. 이원복 스스로가 인정하듯이, 동남아시아 국가들의 빈곤은 엄밀히 따지자면 서구 제국주의자들의 식민지 지배다. 이원복이 지적하는 바와 같이 일제의 식민지배가 조선을 수탈한 것처럼 말이다.

그러나 각국의 빈곤을 식민지 지배 이후에는 단순히 공산독재나 군부독재 그리고 왕정체제에 돌리기 바쁘다. 이 과정에서 미국의 달러 제국주의가 그 나라의 경제와 사회구조를 어떤식으로 잠식해 나가는지에 대한 비판적 의식을 만화에서 찾아볼 수 없다.

그러한 이원복 작가의 맹신적 오류는 특히나 필리핀 역사를 대하는 태도에서 나타난다. 이원복은 미국의 필리핀 지배가 얼마나 악독하고 잔혹했는지 말 그대로 외면한다. 1901년 미국이 아기날도 정부를 짓밟고, 식민지화를 추진하는 과정에서 필리핀인들을 짐승죽이듯이 학살한 역사는 전혀 등장하지 않는다.

미국의 필리핀 식민지화 과정에서 대략 100만 명의 필리핀인이 학살당한 것은 완전히 거세당해 있다. 또한, 제2차 세계대전 이후 필리핀에 다시 미군이 들어오자, 필리핀 민중이 미군을 다시 환영했다는 황당무계한 주장은 실소를 금할수가 없다. 맥아더 정부가 친일한 반역자들을 기반으로 필리핀에 친미정부를 세우고, 후크발라합을 포함한 공산주의 게릴라 세력을 잔혹하게 소탕한 역사는 당연히 거세당해있다.

인도네시아 부분도 비슷하다. 인도네시아 독립 영웅 수카르노에 대해, 독재로 인기를 잃었다고 이원복은 주장한다. 그러나 수카르노가 나쁜놈으로 묘사된건 미국의 CIA가 1955년 반둥회의를 통해 이른바 제3세계 진영의 축으로서, 반미주의 노선을 걸었기 때문이었다. 오히려 수카르노가 친미 독재자 수하르토보다 정당의 다양성을 인정했지만, 이런 사실에 대해 이원복은 의도적으로 무시한다.

1965년 군사 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수하르토가 독재정치를 펼치고, 반대파를 억압하고 학살한 부분에 대해 이원복은 마지못해 언급하지만, 그 정부가 미국의 대대적인 지원을 받은 정부라는 건 언급조차 안한다. 결국 독재를 해서 물러났지만, 그 독재정부를 미국이 무슨 목적을 가지고 원조 및 지원했는지는 언급을 안한 것이다.

이원복 교수의 정치ㆍ경제 논리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이 간단하게 정리해볼 수 있다.

1. 사회주의 체제는 경제적으로 비효율적이다.
2. 자본주의 시장경제가 항상 대안이다.
3. 그 자본주의라는 틀 안에서 빈부의 문제 및 정치의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
4. 서구의 민주주의가 최선이다.
5. 서구식 자유선거를 안하면 다 독재로 규정될 수 있다.

이러한 틀에 맞춰보려고 하니, 당연히 만화에서도 오류가 생긴다 할 수 있다. 하지만 그래도 이원복 교수의 장점도 있다. 19세기 서구 제국주의에 대해서 만큼우 비판적으로 보고, 이들의 억압과 착취 그리고 인권유린 그 자체를 부정하지는 않는다.

또한, 미국 주류사회가 흑역사로 인식하는 베트남 전쟁에 대해서도 올바르게 인식하고 있다. 최근들어 인터넷 상에서 미국의 꼭두각시 국가 남베트남을 찬양하는 넷 인플루언서들이 창궐하고 있다. 그에 반해 이원복은 베트남을 다루는 편에서 베트남 전쟁을 올바르게 인식하는 모습을 보인다.

이원복 작가는 베트남 전쟁의 근본적 선상은 프랑스의 식민지 지배에 있음을 얘기하며, 1954년 디엔비엔푸 전투를 통해, 독립전쟁을 승리로 이끈 호치민에게 정당성이 있음을 강조한다. 무엇보다 제네바 협정에서 약속한 총선을 파기한 미국의 행동을 옹호하지는 않는다. 또한 남베트남의 친미 독재자 응오딘지엠이 오직 반공주의만을 외치며, 토지개혁을 망친 반면, 호치민이 북베트남에서 토지개혁을 실시하여 대중의 지지를 얻었다는 점도 분명히 한다.

이런 이원복 작가의 시각에 대해, 나무위키는 이상한 논리로 비난하지만, 이원복은 그저 서방의 주류적 시각에서 얘기한 것 밖에 없다. 그 외에도 미얀마나 말레이시아, 싱가폴, 브루나이, 동티모르 등은 내가 많이 모르는 역사를 배우는 느낌이었다. 이원복 작가 특유의 전달력은 정말 강력하다. 이원복만이 가지는 먼나라 이웃나라의 큰 장점이랄까.

오랜만에 이원복 작가의 먼나라 이웃나라를 읽었다. 비록 오류는 많지만, 세계사 지식을 쌓는데 이 책 보다 읽히기 쉬운 책은 없다고 본다. 비록 이원복이 반공주의자여도, 이런 점에선 대단하다고 본다. 조만간 먼나라 이웃나라 러시아편도 읽을 것이다. 다음에는 러시아편에 대한 리뷰를 올릴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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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20226월 유럽의회에서 아일랜드계 유럽의회 국회의원인 믹 월레스(Mick wallace)가 한 연설 중 일부를 번역한 것입니다. 동영상은 https://www.facebook.com/watch/?v=370148711672664 에서 볼 수 있다.)

 

여성의 권리가 인권의 근본입니다.

 

근데 왜 우리는 미국이 인권을 침해하는데 미국에 맞서는 것에 대해 항상 침묵하는거죠?

일각에서는 감히 어떻게 우리가 미국에 대해 왈가왈부 할 수 있냐?”라고 말합니다?

 

우리는 모든 것에 대해 말할 권리와 자격이 있습니다.

 

미국에서 민주주의가 제대로 작동합니까?

 

자 한번 그 진실을 보도록 하죠.

 

미국에서는 대통령이 되는데 28,800억 원(202211월 달러 환율 기준)이나 돈이 듭니다.

전 세계 죄수 인구의 25%가 미국에 있습니다.

 

미국은 전 세계의 군사비를 합친 것보다 더 많은 1,1528,000억원의 군비를 매년 지출합니다.

 

미국은 275년 전 건국된 이후부터 대략 250년 동안 전쟁을 치러왔습니다.

 

하지만 미국은 너무나도 기본적이고 보편적인 건강보험은 하나도 제공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미국은 자국의 학생들에게 2,4449,700억원의 빚을 탕감해주지 못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미국은 밥 한끼조차 제대로 못먹는 1,700만명의 어린이들을 위한 정부의 복지 프로그램 조차 만들지 못하고 있습니다.

 

바로 이딴 것들이 당신들이 말하는 건강하게 작동하고 운영되는 민주주의입니까?

 

당신들(유럽의회)이 생각하는 민주주의란 도대체 뭔가요?

 

심지어 대선 당시 진보적인 후보 버니 샌더스는 민주당 후보로 공천받는 것조차 허락되지도 않았습니다.

 

미국은 민주주의라는 발음조차 제대로 발음하지도 못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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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ewdvs117 2024-03-25 22: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여기서 언급했듯 미국은 공화당(레이건, 부시 부자, 도날드 트럼프) 정권이건 민주당(클린턴, 버락 오바마, 조 바이든) 정권이건 자국민들에게 보편적인 건강보험을 제대로 제공하지 않았고, 학생들에게 어마어마한 빚더미를 덜어주지 않았고, 식사조차 못하는 가난한 어린이들에 대한 복지를 외면하고 오로지 군수마피아들과 독점재벌가들의 배만 불려줬죠. (이게 ‘세계 1위 초강대국‘이라는 미국의 민낯입니다. 이 사실을 국짐과 윤석렬-김거니-한똥훈 검찰파쑈독재세력, 친일숭미에 찌든 뉴라이트 사학자들, 기레기들만 모르죠.)
 
붉은 혈맹. 평양, 하노이 그리고 베트남전쟁 서울대학교 아시아연구소총서 모노그래프시리즈 11
도미엔 지음 / 서울대학교출판문화원 / 202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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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폭격>의 저자로 유명한 김태우 교수가 집필한 신간 한권이 있다. 책의 이름은 <냉전의 마녀들>로 한국전쟁 당시 북한 사회에서 반파시즘 연대운동을 벌였던 국제여맹의 활동을 재조명했다. 1951516일부터 527일까지 북한 전 지역을 돌아다니며 조사를 벌였던 국제여맹의 조직원은 총 18개국으로부터 온 21명의 외국인 여성으로 구성되었었다. 이들 중에는 놀랍게도 베트남 출신의 여성도 있었던 것으로 나온다. , 국제여맹이라는 조직은 반파시즘 반식민주의 차원에서 쿠바, 아르헨티나, 튀니지, 알제리, 중국, 베트남과 같은 소위 제3세계로 불릴 수 있는 국가의 인물들과도 교류를 했던 것이다.

 

<냉전의 마녀들>에선 자세히 다루고 있지는 않지만, 비슷한 시기 전개되었던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프랑스-베트민 전쟁) 당시 호치민(Ho Chi Minh) 정부는 미국과 전쟁을 치르던 중국 북한과 연대의식을 가지고 있었다. 또한 4.27 시대에서 출간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현대사 1>을 보면, 1960년대 당시 북한이 쿠바와 베트남 그리고 이집트 등과 같은 반제민족해방투쟁에서 연대와 지원을 한 것으로 나온다. , 북한과 베트남의 반제국주의 연대 차원에서의 관계에 대한 나의 관심은 이 두 권의 책이 제법 자극제를 줬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놀랍게도 2022년 올해, 아주 흥미로운 책 한권이 출간된 것을 확인하게 됐다. 그 책이 바로 베트남 연구자인 도미엔(Do Mien)씨의 저서 <붉은혈맹: 평양, 하노이 그리고 베트남 전쟁>이라는 책이다. 이 책은 저자의 박사논문을 책으로 간추린 것으로, 베트남 전쟁 당시 북한과 북베트남의 동맹관계를 재조명한 책이다. 아주 흥미로운 주제이며, 올해 들어 정말 흥미롭게 읽은 책이 됐다. 사실 한국 사회는 이승만 시대부터 뿌리 깊게 자리 잡은 극단적 반공주의(Anti-Communism)이 아직도 남아있는 사회다. 따라서 북한에 대해 얘기하는 것이 모종의 잘못된 행위로 간주되는 이상한 분위기가 일반인들에게 아직도 남아 있는 사회다. 그런 사회에서 그것도 베트남 전쟁 시기 북한과 북베트남의 공동연대의식을 조명했다는 점은 한국 사회에서 건드리기 다소 힘든 점을 용기 있게 조명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저자 도미엔씨는 북한과 베트남의 연대의식의 시작점은 제2차 세계대전 전후로 양국이 경험했던 식민주의 제국주의적 비슷한 경험의 공통성으로부터 비롯됐다고 주장한다. 2차 세계대전 이후 베트남은 호치민이 독립을 선포하자마자 얼마 되지 않아 프랑스의 침공을 받아 8년간 전쟁을 치렀다. 북한 또한 1948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정부수립 이후 불과 2년 만에 한국전쟁을 통해 미국과 전쟁을 치렀다. 그리고 놀랍게도 양국의 전쟁에는 미국이 개입되어 있었으며, 미국은 이 두 전쟁을 반공주의의 논리로 접근했다. 당시 미국 사회에는 중국의 공산화와 소련의 핵개발에서 비롯된 매카시즘이 사회 곳곳에 퍼져 있었고, 그러한 반공주의는 반제국주의·반식민주의적 성격을 가진 전쟁을 오로지 반공주의적 논리로 접근하게 만든 것이다.

 

, 이러한 상황에서 양국에 형성된 반제국주의·반식민주의적 의식이 1954년 제네바 협정 이후 베트남의 남북분단 상황과 미국의 남베트남 군사고문단 파견 그리고 베트남 침략에서 보다 구체적인 양국의 반미의식으로 확대되었다는 것이 저자의 주장이다. 2019년 북미정상회담이 베트남의 수도 하노이에서 개최되자, 당시 북한과 북베트남의 관계를 얘기하는 국내 기사들이 제법 나왔었다. 특히나 베트남 전쟁 당시 전사한 조선인민군 공군조종사의 묘가 베트남 박장 성에 있다는 사실도 기사화됐었다. 그러나 베트남 전쟁 당시 이들의 연대의식이 기원이 과연 어디인지 얘기하는 기사는 없었다. 그러한 점을 이 책이 충분히 채워줬다고 나는 생각한다.

 

1954년 디엔비엔푸 전투의 명장인 보 응우옌 잡(Vo Nguyen Giap)의 자서전인 <디엔비엔푸(Dien Bien Phu)>를 몇 년 전에 읽은 적이 있다. 길찾기 출판사에서 번역한 잡 장군의 책에는 디엔비엔푸 전투 10주년을 맞아 그가 쓴 디엔비엔푸 대첩과 동춘 승리의 궁극적 의의라는 글도 같이 실려 있는데, 그 글에서 잡 장군은 제국주의자들이 당황하고 낙담한 반면, 우리의 승리에 대한 소식은 전 세계의 진보적인 인민들을 크게 고무시켰다. 모든 사회주의 국가들은 디엔비엔푸에서 거둔 승리의 기쁨을 함께 나눴다. 이는 억압받던 인민들의 자랑거리였고, 2차 세계대전 이후 알고 있던 국가 해방을 위한 세계적인 운동에 지대한 공헌을 했다.”고 썼다.

 

잡 장군이 1964년 글에서 얘기한 바와 같이 이 내용이 정말 사실이었다는 것을 1950년대 북한의 김일성 위원장의 연설을 통해 알 수 있다. 아래는 김일성 위원장의 연설 문 일부를 발췌한 것이다.

 

사실은 전 세계 피압박 인민들에게 민주진영의 적극적인 지지 밑에 자기 조국의 해방을 위하여 전 민족이 단결하여 일떠서 싸우면 어떠한 제국주의도 물리칠 수 있다는 신심을 굳게 하여 주었습니다. 실례로 지금 이란, 애급, 윁남, 말라이를 비롯한 여러 나라 인민들이 조선 인민의 투쟁에 고무 되여 민족해방투쟁의 불길을 더욱 높이고 있습니다. 우리는 정전을 요구하며 그 실현을 위하여 노력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꼭 정전이 된다고만 생각하고 장기전에 대처할 준비를 하지 않아서는 안 됩니다.”

 

출처: 붉은혈맹 p.59

 

1차 인도차이나 전쟁 당시 북한과 베트남은 중국과 더불어 소위 반제국주의 연대를 구축했던 것으로 드러난다. 책을 읽으면서 놀란 것이 또 있다. 그것은 바로 한국전쟁 시기 북한을 돕기 위해 참전한 중공군 중에는 중국 군사학교에 간부 및 군인으로 파견된 베트남인들도 있었을 것이라는 사실이다. 책에 따르면 19506월까지의 통계에 따르면, 북베트남인 3,000명가량이 중국에서 군사훈련 및 정치교육을 받았다고 한다.

 

이것이 무슨 얘기인지 이해하기 위해선 당시 정세를 볼 필요가 있다. 1949년 중국이 마오쩌둥의 주도로 통일이 되면서, 아시아에서의 냉전진영은 극적으로 소련에게 유리해졌다.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베트남은 호치민의 지도하에 1946년부터 프랑스의 침략에 맞서 싸웠고, 침략자 프랑스군을 상대로 게릴라전을 전개했다. 그러던 1949년 중국이 공산화되면서, 중국 공산당은 프랑스에 맞서고 있던 호치민 정부를 지원했는데, 이 과정에서 일부 베트민 병력이 중국에서 군사 및 정치훈련을 받았고, 더 나아가 일부가 한국전쟁에 참전했을 것이라는 얘기다. 한국사회에서 한국전쟁에 대한 입장은 김일성은 침략자이기에 나쁜 놈이다라는 이미지가 유난히 부각되며 사회적으로 강조된다. 그러나 책에 나온 사실을 포함한 여러 가지 사실들은 그러한 하나의 사실관계만으로는 한국전쟁을 파악할 수 없음을 입증한다고 할 수 있겠다.

 

1차 인도차이나 전쟁이 한참이던 19504월부터 9월까지 중국은 베트민에게 다량의 군수품과 일반물품을 원조했다. 그것은 14,000자루의 소총과 조종사, 1,700자루의 기관총과 무반동총, 150문의 박격포, 60문의 포, 300개의 바주카포뿐만 아니라 탄약, 약품, 통신 재료, , 음식 2,800톤을 포함한 것이었다고 한다. 이러한 원조를 보면 알 수 있듯이, 한국전쟁과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에서 중국의 영향력은 결코 무시할 수 없는 수준이었다는 것이다. 사실 양국에 대한 중국의 지원은 당시 미국의 대아시아 반공정책과 연관이 있다. 아래의 인용문을 보도록 하자.

 

중국의 베트남과 북한에 대한 적극적인 지원은 당시 사회주의 진영과 자본주의 진영의 갈등에 대한 마오쩌둥의 신념에 바탕을 두었다. 마오쩌둥은 한국전쟁에 직접적으로 개입하고 프랑스에 대규모 원조를 제공한 미국의 움직임을 한반도-대만-인도차이나 세 방향에서 중국을 포위-침공하는 전략을 실행한 것으로 판단했다. 그리하여 그는 3국의 상황이 긴밀히 연결되어 있다고 생각했으며, 만약 미국이 한반도에서 우위를 점하게 되면 중국과 아시아의 혁명이 거대한 위기에 처할 것이라고 강조하였다. 거시적으로, 마오는 중국의 한국전쟁 및 항불전쟁 참여가 세계와 아시아에서의 프롤레타리아 혁명 및 반제국주의 혁명 수행을 지원하는 것이라고 밝혔다.”

 

출처: 붉은혈맹 p.45~46

 

1954년 디엔비엔푸 전투 이후 제네바 협정에 따라 베트남이 남북분단이 되자, 미국은 제네바 협정에서 약속한 총선을 거부했다. 미국이 자신들의 꼭두각시로 내세운 응오딘지엠은 과거 항불 투쟁하던 이들에 대해 탄압과 구금 그리고 학살을 자행했다. 이것이 결국 1960년 베트콩 창설에 큰 이유를 제공했다. 응오딘지엠이 전직 베트민 투사들에 대해 탄압과 학살을 자행하던 1957년 호치민은 대략 5일간 북한을 방문하여 대미행장에 힘쓰기 위해 북한·북베트남 연대를 강화하자는 내용의 공동성명을 발표했다. 호치민은 북한과 북베트남의 분단문제에서 미국의 책임을 언급하고 다음과 같이 양국의 단결을 호소하는 연설을 했다.

 

미 제국은 조선 및 베트남뿐만 아니라 세계적으로 군사기지를 늘리며 긴장상태를 일으키고 있고 사회주의 진영을 공격하려고 합니다. 미 제국의 전쟁도발 음모에 당면했기에, 선두에 선 소련과 중국, 그리고 사회주의 형제 국가들은 인류의 평화문제와 사회주의 업적에 책임을 인식하여 단결심을 강화하고 마르크스-레닌주의를 바탕으로 서로 협력을 증진해야 합니다.”

 

출처: 붉은혈맹 p.65~66

 

이러한 호치민의 연설에서 알 수 있듯이, 항불전쟁과 한국전쟁 시기 식민지 경험과 반식민지 투쟁에서 형성된 양국의 연대의식은 양국의 남북분단이라는 현실 속에서 반미주의적 연대의식으로 보다 구체화됐다. 즉 이러한 과정에서 북베트남과 북한은 미국이라는 제국주의에 맞선 연대의식을 강화해나갔고, 이것은 1960년대 미국이 침략으로 일어난 베트남 전쟁 속에서도 나타난 것이다. 양국의 문화 및 정치도 교류를 통해 서로에게 소개되기도 했으며, 1964년에는 로버트 맥나마라를 암살하려다 체포당해 총살당한 베트남의 독립운동가 응우옌반쪼이(Nguyen Van Troi)가 북한에서 소개되기도 했다. 놀랍게도 북한은 응우옌반쪼이 정신을 강조하기도 했으며, 응우옌반쪼이의 이름으로 생산력 강화를 주장하며 공장의 생산력 증진 및 북베트남의 지원을 강화하기도 했다.

 

앞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1960년대 베트남 전쟁 당시 북한의 공군 조종사 파견은 한국 언론에 보도되었을 정도로 제법 유명하다. 그러나 베트남 전쟁 당시 북한이 북베트남에게 얼마나 많은 무상지원을 했는지는 알려져 있지 않다. 도미엔씨의 논문은 이러한 점을 아주 잘 집고 있다. 북베트남에 대한 북한의 무상지원은 1965년부터 시작되어 1973년까지 지속됐다. 이러한 지원의 규모는 결코 작지 않았으며, 초기 지원은 북한이 요구한 것 보다 1.5배나 많기까지 했다. 북한의 지원은 단순히 공군 조종사 100명과 심리전단 인원뿐만 아니라 무상지원도 있었다는 사실을 같이 생각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베트남에 대한 북한의 무상지원은 1965년에 시작되었다. 해당 문서에는 1965~1973년에 이르는 동안 연도별 북한의 지원액에 대한 정확한 통계가 나와 있다. 북베트남 정부는 북한의 지원을 4년 단위로 나누어 총 2단계로 파악하고 있다. 1965년부터 1968년까지의 4년이 1단계, 1969년부터 1973년까지는 2단계이다. 1960년대 중후반 북한북베트남 관계의 진전을 잘 보여준 북한의 베트남 무상지원 1단계 양상이 <3-1>에 제시되어 있다. <3-1>에서 보듯 1965년의 지원 금액은 1,200만 루블이었다. 1965~1968년의 지원 금액은 3,000만 루블에 이르렀는데, 북베트남 정부는 이를 높은 지원 수준으로 평가했다. 북한의 북베트남 무상지원은 1970년대까지 진행되었으나, 전체 연도를 놓고 봤을 때 1965년의 1,200만 루블이 가장 고액이었고, 해당 연도가 1965~1968년 총지원액인 3,000만 루블에서 40%를 차지하고 있다. 다시 말해 1965년 지원액이 베트남 전쟁기 북한이 베트남에 지원한 최고 지원 금액이었다.”

 

출처: 붉은혈맹 p.163

 

북한과 북베트남의 연대와 양국의 협력의식은 놀랍게도 1968년 베트남의 구정 대공세(Tet Offensive)를 기점으로 다소 약화되었다는 것이 저자의 주장이다. 이러한 저자의 근거는 당시 북베트남에 대한 북한의 지원액의 감소와 1969년 전투기 조종사의 철군 등과 같은 여러 근거에 입각했다. 그렇다 하더라도 양국의 연대의식 자체가 사라진 것은 아니었으며, 1975년 통일 이후 양국의 약간의 입장 차이에도 불구하고, 북한은 미국에 맞서 승리한 베트남의 승리에 대해 환영해주긴 했다.

 

그러나 1975년 이후 북한의 중국에 가까운 노선을 걷고 베트남이 소련에 가까운 노선을 걸으면서, 양국의 갈등이 있었다. 특히나 베트남의 캄보디아 침공을 빌미로 중국이 베트남을 침공하자, 북한은 베트남에 대해 비판 성명을 냈다. 그러한 배경이 1990년대 북한과 베트남 관계의 냉각 기류에 영향을 주었다고 저자는 설명한다. 거기다 1992년 베트남은 대한민국과 수교했고, 1994년 미국과 수교를 했다. 1986년부터 추진한 개혁개방 정책인 도이모이의 영향이었다. , 그러한 점은 당시 북한이 베트남과 거리를 두었던 이유일 것이다. 그래도 양국의 관계는 2000년대 들어 다시 회복세로 진입했으며, 오늘날의 관계까지 이어졌다는 것이 저자의 주장이다.

 

이번에 도미엔씨의 책을 읽으며, 내가 많이 궁금해했던 주제를 많이 공부할 수 있어서 기뻤다. 지금껏 알지 못했던 여러 사실을 가르쳐준 저자에게 진심으로 고마움을 느낀다. 물론 나는 이 책 내용에 100%까지 동의하는 것은 아니지만, 아주 훌륭한 연구 자료라고 생각한다. 특히나 베트남인 연구자이기에 베트남측 문서를 많이 활용한 것이 눈에 들어왔으며, 한국 사람들이 정말 알기 쉽지 않은 최근 베트남 역사학계의 동향까지 알려준 것도 정말 의미가 있었다. 예를 들면 책에 나온 다음과 같은 예시를 들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최근 베트남에서 이루어진 연구는 이미 1967년부터 소련이 북베트남에 미국의 협상 조건을 전달했고, 북베트남에 협상에 들어갈 것을 권유했음을 드러냈다. 1960년대 말 베트남 전쟁에 대한 소련의 관점은 현상 유지였기 때문이다. 즉 소련은 미국의 북베트남 폭격 중단 문제를 먼저 해결하고, 그다음에 남베트남 문제를 해결하자는 것이다. 그리고 남베트남에서의 미군 철수 및 군사 문제를 먼저 해결하고, 그다음에 정치 및 통일을 해결하자는 것이다.”

 

출처: 붉은혈맹 p.216~217

 

그 외에도 헝가리 연구자의 문서와 윌슨 센터 자료, 기존 국내에 나온 연구와 북한 자료 및 베트남 자료를 고루고루 사용한 점이 눈에 들어왔다. 그리고 이러한 자료들 중에는 베트남 전쟁에 대한 최신의 자료도 제법 많이 담고 있다. 이러한 점은 이 책의 가장 큰 장점일 것이다. 마지막으로 저자 또한 은연중에 언급한 민족해방전쟁론에 대해 얘기하고 싶다. 사실 한국 사회에서 베트남 전쟁을 호치민의 민족해방전쟁으로 보는 관점은 <전환시대의 논리> 저자인 리영희 교수에 의해 나온 관점이다. 이러한 관점에 대해 일각에서는 낡은 관점으로 치부하며, 도리어 정통성이 없던 남베트남에 대한 옹호의 흐름으로 이어지기도 한다.

 

그러나 그러한 흐름은 서방학계 일부의 흐름일 뿐, 전반적인 진실을 담고 있다고 할 수 없다. 그 이유는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전 세계적으로 일어난 제3세계적 흐름을 쉽게 무시하기 때문이다. 당연한 일이겠지만, 책의 저자 또한 베트남 전쟁을 통일전쟁이자 민족해방전쟁으로 인식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나 또한 베트남 전쟁은 기본적으로 민족해방전쟁이었다고 생각한다. 그 이유는 이 자료도 입증하고 있듯이, 북한과 북베트남의 연대뿐만 아니라, 미국이 내세운 나라 남베트남의 정통성이 전혀 없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사실은 응오딘지엠 정부가 과거 독립운동을 하던 베트민 투사들을 공산주의자로 몰아 탄압하고 학살했던 역사에서 입증 된다고 생각한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베트남 전쟁은 기본적으로 호치민과 북베트남 공산당의 민족해방전쟁적 성격을 가진 것이다. 책 초반에 나오는 내용을 인용하겠다.

 

베트남 전쟁은 제국주의와 식민지, 자본주의와 사회주의, 그리고 사회주의 진영 내부의 갈등이 복잡하게, 뒤얽힌 복합전쟁이었다. 물론 베트남 전쟁은 기본적으로 통일전쟁이고 민족해방전쟁이었다.”

 

출처: 붉은혈맹 p.8

 

그 외에도 다음과 같은 책의 내용을 통해 저자가 베트남 전쟁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알 수 있다.

 

한편, 베트남 전쟁의 성격과 그 의미는 전쟁의 발생으로 거슬러 올라가서 검토해야 한다는 주장도 있다. 따라서 그 역사적 기원을 현대사에서 찾는다면, 1945년 제2차 세계대전의 종결과 함께 발생한 베트남의 ‘8월 혁명일 것이라는 설명이다. 19459월 베트남민주공화국 수립과 함께 호찌민이 선언한 베트남 민족의 독립과 베트남 통일을 당시 국제사회가 승인했다면, 특히 구식민지 종주국인 프랑스가 인도차이나에 대한 지배 의지를 갖고 있지 않았다면, 그 후 30년에 걸친 프랑스, 그리고 미국과의 전쟁은 발발하지 않았을 것이다. 다시 말해 그 후의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프랑스와의 전쟁), 2차 인도차이나 전쟁(미국과의 전쟁)은 연속적인 반제국주의 항쟁인 것이다.”

 

출처: 붉은혈맹 p.29~30

 

이 책의 조금 아쉬운 점이 있다면, 베트남 전쟁 당시 북한의 공군 조종사들이 얼마나 많은 전투기를 격추했고, 또 얼마나 많이 전투에 기여했는지에 대한 내용이 빈약하다는 점이다. 그래도 이 책이 아주 잘 쓴 명저라는 점은 너무나 분명하고 이 책을 통해 정말 많은 것을 공부할 수 있었다. 그 점에서 다시 한 번 저자에게 깊이 감사함을 표하고 싶다. 사실 이 책은 저자 논문의 절반 부분을 책으로 낸 것이다. 저자 논문의 절반 부분이 북한과 북베트남의 관계를 조명한 것이라면, 나머지 절반 부분은 남한과 남베트남의 관계를 조명한 것이다. 이 나머지 부분이 책으로 나올 것을 저자는 머리말에서 암시하고 있다. 그 점에서 나머지 절반 부분도 많이 기대가 된다. 나는 북한과 베트남에 대해 관심이 많은 이들에게 적극적으로 일독을 권하고 싶다. 앞으로 더 좋은 연구 성과가 이 책을 시작으로 더 많이 등장할 것이라 기대하며 긴 서평을 마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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