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리아드
마릴린 로빈슨 지음, 공경희 옮김 / 마로니에북스 / 201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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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이 박경리 문학상 수상작가가 쓴 작품이라고 해서 좀 놀랐다.

아니 그 보단 박경리 문학상이 있다는 것이 좀 더 놀라웠을까? 박경리 작가야 워낙 유명하고, 모든 사람들이 존경해 마지않는 분이니 이 분의 이름을 딴 문학상이 있음직한 것은 당연한 것인데, 언제 또 이런 상이 제정되었단 말인가? 그건 또 차치하고라도, 기존의 우리나라 문학상은 당선작에 의미를 둔 경향이 있는데 이 상은 작가의 공로에 수여하며 그것을 우리나라 작가에만 국한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마치 노벨문학상처럼. 얼핏 들으니 벌써 3회째라고 하는 것 같은데, 우리나라 문학상이 이렇게까지 권위가 있어지다니, 기분 좋은 일이 아닐 수 없다. 

 

이렇게 알게된 작가 메릴린 로빈슨과 그의 작품이라...!

길라이드란 이름이 왠지 지구상에 없는 이상향의 이름인 것도 같지만, 사실은 우리가 성경에서 접하는 '길르앗'의 미국식 발음이다. 미국의 아이오와주에 있는. 책이 왠지 영화, '흐르는 강물처럼'이나 아미쉬를 배경으로 한 '위트니스'를 연상케도 한다. 단 영화 보다는 좀 더 잔잔하고, 유장한 느낌이라고나 할까? 그래서 읽기에 따라선 적잖이 지루하고, 인내가 필요한 듯도 하다. 

 

읽으면서 내내 드는 생각은 왜 이런 작품의 작가에게 이런 상을 줬을까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나름의 답을 구하지 못할 것도 없다. 박경리하면 대표작 <토지>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는데, 그 작품은 인간의 장구한 역사를 그리고 있다는 점에서 역사 소설이며 비록 픽션이긴 하지만 하나의 기록물처럼 읽혀지는 느낌을 갖는다. 이 작품도 그렇지 않을까? 어딘가 모르게 '토지'와 닮아 보인다. 그래서 수여했던 것은 아닐까?

 

특이한 점은 이 작품은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세계 문학계에서도 거의 쓰지 않는, 아니 사라진 것처럼 보이는 '서간체'로 썼다는 것인데 왜 작가들이 서간체로 쓰지 않는지 새삼 놀랍다는 생각이 든다. 

 

그러고 보니 아주 오래 전, 박완서 작가가 서간체는 아니지만 전화로 이야기하는 형식의 소설을 읽어 본 적이 있는데 참 인상 깊었다는 생각을 했었다(그런데 워낙 오래 전에 읽어 제목이 뭔지 기억이 나질 않는다). 기존의 3인칭이나, 1인칭 소설이 아닌 새로운 방식에 도전하는 작가 정신에 경의를 표하고 싶었다.

그러고 보면 요즘 작가들은 잊혀진 문체에 대해 그다지 관심이 없어 보인다. 어떻게 하면 자신이 얘기하고자 하는 이야기를 어떻게 보줄 것인가에만 촛점이 맞혀있는 듯하다. 뭐 그런 것 아니어도 편지는 누구나 받고 싶지 않은가? 그것을 소설의 한 형식으로 차용해서 썼다는 건 인간의 마음을 잘 공략한 작가의 글쓰기 작전(?)은 아니었을까?

 

솔직히 이 작품은 여러가지 면에서 나를 좀 놀라게도 하는데, 이야기 자체는 지루하고 인내를 필요로 하지만, 기존의 내가 알고 있는 소설형식을 배반한다. 아니 아예 관심이 없어 보인다. 기존의 소설 형식이라면 영화적 기법 내지는 기승전결에 의한 인간의 욕망을 보여주는 뭐런 것으로 대별되고 그것이 소설 기법의 전부인 양 하지만, 이 작품은 그냥 인생 자체를 얘기할 뿐이다. 그것도 주인공이 아들에게 자신의 인생에 대해 그냥 주저리 주저리 말해 주는 것이다. 그러니까 내 말은, 소설은 언제부턴가 인생을 말하지 않게 되었다가 이 작품에서야 비로소 인생을 말할 수도 있음을 보여줬다고나 할까?

그도 그럴것이, 인생을 말하는 건 어느 특정인의 자서전이나 회고록, 평전의 몫인 양 했었다. 그래서 마치 소설은 그런 방식을 차용하면 안 될 것처럼 하고 있지는 않았을까 하는 하는 의혹이 들었다는 것이다(이것도 나의 게으름의 소치라면 할 말은 없겠지만).    

 

사실 이 작품이 좀 지루하게 씌여져서 그렇지, 분명 의미가 있는 것도 사실이다. 개인의 역사는 존중 받을 필요가 있다. 그것이 아무리 하찮은 인생이어도. 그리고 그것은 사회의 역사와도 맞물려 있기도 하다. 아무리 평범한 사람이라고 해도 어느 시대 사회의 역사에 발을 담그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주인공은 노예해방 전후세대를 얘기하지만, 나는 내가 주로 살았던 386 세대에 살았으니 나름 그 시대를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 시절 민주화에 적극적으로 가담을 했건 안했건 간에 말이다. 

 

이 책에서 또 한 가지 놀라운 점이 있다면 지극히 보수적이며 건전하달까? 우리가 흔히 아는 섹스 장면이 나오는 것도 아니고, 인간의 그로테스크한 면을 기술적으로 보여주는 문학적 장치도 찾아 볼 수 없다. 그래서 지루하다고 느꼈는지도 모르겠다. 한 술 더 떠 성경 말씀까지 인용한다. 그도 그럴 것이 주인공은 3대가 목사인 집안에서 나고 자랐으니 그럴만도 하다. 그러나 요즘 문학에서 성서를 인용한다는 건 서간체 문학의 낯섬만큼이나 어색한 것은 아닐까?

 

예전에 나도 비록 습작이긴 하지만, 소설 가운데 성경 말씀을 인용한다는 게 어떤 의미인가를 생각했었다. 고전문학에서 성경을 인용한다는 것은 자연스러울 수도 있다. 하지만 요즘 같이 세속화되고, 물질 만능의 사회에 언제부턴지 종교가 약화된 사회에서 성경 말씀을 작품에 인용한다는 건 좀 어색하지 않을까를 생각해 보게 되었다. 하지만 이런 세대에도 성경 말씀을 자기 작품에 삽입하는 작가가 있었다니 나도 언제고 정말 소설을 쓴다면 필요한 순간이 되면 인정 사정 보지 않고 쓸 것이다. 

 

솔직히 난 이 작품으로 인해 미국에 대해 조금 다른 시각을 갖게 되었던 것도 사실이다. 왠지 미국은 물질만능주의의 최첨단을 달릴 것만 같은데, 이런 순수하고도 고전적인 작품을 아직까지 쓰고 있는 작가가 있고, 주목하고 있는 독자가 있다는 것이 놀라웠다.

 

그리고 무엇보다 나의 이야기를 다음 세대에 남겨줄 요량으로 이런 이야기를 썼다는 것이 부럽다는 생각이 든다. 왜 사람들은 나의 이야기를 자기 자녀나 손주에게 들려줄 마음으로 살지 않는지 모르겠다. 나의 이야기를 들려 줄 요량으로 산다면 그 삶이 얼마나 성실하게 살게 되는 것일까? 나는 사춘기 때 한때, 내가 일기를 쓰쓸 때 훗날 나의 손자가 읽어주길 바라는 마음에서 썼던 적도 있다(물론 지금은 그나마 거의 쓰지 않고 있긴 하지만). 책에서는 그것이 주인공의 설교원고였을 것이다. 꼭 설교원고가 아니어도 그런 성실함을 증거해 줄만한 근거물이 꼭 있었으면 좋겠다.       

 

아무튼 지루함을 견딜 수만 있다면 이 유장한 작품을 읽어보는 것도 꽤 나쁘지 않은 독서 경험이 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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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노래 2013-11-26 13: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애티커스 님도 애티커스 님 삶을 조곤조곤 적어서
살붙이나 동무한테 곱게 남겨 보셔요~

stella.K 2013-11-26 13:23   좋아요 0 | URL
와우, 이렇게 빨리 읽으시고, 댓글을 달아주시다니!ㅋ
저도 그래보고 싶어요. 용기 주셔서 고맙습니다.^^
 
제7일
위화 지음, 문현선 옮김 / 푸른숲 / 201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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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게는 처음 접하는 위화의 소설이다. 

일단 다 읽고난 후 이 소설의 인상을 말하라면 책 표지 그림만큼이나 쓸쓸하고, 허무하며 동시에 기괴하다. 죽으면 한 줌의 흙이되고, 저 세상으로 가면 이 세상에서의 일들은 더 이상 아무런 의미도 없는 것인데, 뭐 때문에 사는 동안 그토록이나 악다구니를 쓰면서 살아야 하는 것인지, 왜 그렇게 미워하면서 살아야 하는 것인지, 왜 그렇게 사랑 받지 못하여, 사랑할 수 없어서 눈물을 흘려야 하는 것인지 모르겠다.

 

이 소설을 읽어보면, 작가가 나름 죽음의 세계를 자신의 상상력을 총동원해 잘 보여주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그러니 그것은 부수적인 것에 불과하다. 오히려 작가는 죽음을 통해 인간 삶의 부조리한 면들을 말하고자 했던 의도가 더 강해 보인다.

 

작가가 책에서 사룬 중국 사회의 문제는 비단 중국 사회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그가 책에서 다뤘던 자살의 문제, 영아 납치 살해의 문제, 여러 가지 일어날 수 있는 그러나 온갖 사건과 사고의 문제는 익히 보아 온 우리 사회의 문제이기도 하다. 거기에 얼키고 설킨 인간 애증의 문제는 충분히 공감할 수 있다. 다만 작가의 다른 점이 있다면, 메멘토모리. 즉 죽음을 기억하랬다고, 이런 인간의 문제를 죽음의 관점에서 보았다는 것이 다르다는 것이다.

 

인간은 왜 죽음을 기억해야 하고, 생각해야 하는 것일까? 인간 사회의 문제를 윤리나 철학의 관점이 아닌 죽음의 관점에서 보면 뭔가 명확해 보이는 것들이 있다. 요즘엔 모든 것을 절대적 관점이 아닌 상대적 관점에서 보려고 하는 경향이 강하지 않은가? 그래서 이성과 논리는 엄청 날카로워졌는지 몰라도 답할 수 없는 것들이 너무 많아졌다. 그러나 죽음은 절대적이다. 누구도 죽음을 피해가지 않는다. 인간은 인간의 문제를 안고 죽음을 맞이한다. 그러나 인간이 해결할 수 없는 문제도 죽음을 통과해 버리면 더 이상 문제가 아니다. 더 이상 인간의 문제를 안고 저 세상에서 까지 씨름할 필요가 없다. 그런 의미에서 작가가 설정한 '빈의관'이라는 곳은 마치 이승에서 저승을 넘어가기 위한 일종의 국경 또는 정류장 같은 곳으로 생각되어 진다.

 

그곳에서 죽은 영혼들은 뭐하다, 어떻게 해서 이곳에 왔냐고 서로 물어본다. 과연 그럴 것도 같다. 가족 중 누군가가 죽으면 살아있는 사람은 그가 왜 죽었는지, 뭐하다 죽었는지 묻는 사람마다 답변하기에 바쁘다. 죽은 망자도 이 세상에서 살다가 저 세상으로 간건데 망자끼리라도 그런 통과의례는 있지 않을까? 사연 없는 사람이 없다고, 고통 없고 이유없이 죽음을 맞이하는 사람이 없으니 저승에서 치뤄지는 그 통과의례는 유쾌하지마는 않을 것이다. 그래서 망자끼리 그렇게 서로를 위로하고 감싸 주려고 애를 쓰는 것은 아닐까?

 

작가는 죽음을 다룸에 있어서 '자살' 또한 간과하지 않는다. 그것은 주인공 양페이의 전 부인이었던 리칭과 슈메이의 죽음이다. 둘은 다 자살로 생애를 마쳤다. 태어나는 것은 자신의 의지가 아니어도 자살은 의지고 선택할 수 있는 것 아니냐며 그것을 합리화시키고 고무 찬양하기도 한다. 그런데 역시 일단 죽음을 통과해 보면 자살처럼 초라하고 불합리한 것은 없다는 걸 두 사람이 잘 보여주지 않나 싶기도 하다. 

 

사실 우리가 직접 죽어보지 않는 이상 사후 세계에 대해서 명확히 얘기할 수 없는 것 같다. 물론 역대로부터 사후 세계에 대해서 끊임없이 논의가 되긴 하지만 누구 하나 명확하게 밝혀 놓은 이론은 없는 것 같다. 하지만 우리가 한 가지 아는 건, 죽고나서 천국과 지옥이 있다는 전제다. 그리고 이 천국과 지옥은 누가 가느냐를 놓고도 의견은 분분해 보인다. 무신론이면서 이것을 믿는 사람은 이 세상에서 살 때 착하게 살았는가 나쁘게 살았느냐에 따라 천국과 지옥이 갈린다고 본다. 그에 비해 기독교인 것은 경우엔 하나님을 믿고, 안 믿고의 믿음의 문제로 그것을 판단하기도 한다. 그리고 어떤 사람은 그것으로 인간의 삶을 판단하며 인간에게 겁을 준다고 비판하기도 한다. 물론 그것에 대해 비판할 생각은 없지만 그것은 어쩌면 죽음을 생각하기 싫어하는 인간의 유보의식이 그렇게 말하는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천국을 생각해 보라. 인간이 사후에 갈 곳이 없고, 죽으면 끝이라면 이 세상 사는 것이 얼마나 무의미하고, 힘들고, 괴로운 것이 되어버리겠는가. 우리가 이 세상 사는 것이 힘들고 어려워도 죽으면 천국을 소망하기에 죽음 조차도 기쁘게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이 아닌가? 

 

얼마 전, 나의 사랑하는 가족이 세상을 떠났다. 물론 슬프다. 그러나 우린 천국에서 다시 만나자며 떠나 보내줬고 그렇게 떠나갔다. 우리가 슬픔을 이겨낼 수 있는 건 어느 때가 되면 천국에서 다 같이 모여 살 날을 소망하기 때문이다. 이것을 인간의 온갖 이성과 논리로 부정하는 철학을 펼친다면 무엇이 이로울까? 자신도 천국에 들어가지 않으면서 천국에 들어가려고 하는 사람조차 막는 어리석은 자에 불과하지 않을까? 물론 이 책은 그것을 말하고자 했던 책은 아니다. 그러나 작가가 인간의 죽음을 다룬만큼 그런 생각이 들게도 만든다.

 

이 책은 한 사람의 소설가가 쓴 하나의 소설일 뿐이다. 대부분의 소설가들이 그렇듯 소설은 인간의 삶에 대해 말할 뿐이다. 거기에 작가의 상상력이 더해져 사후 세계의 일부를 보여준다. 그리고 그것은 나름 설득력을 지녔다. 하지만 나 개인적으론 작가의 생각에 완전 동의하진 못하겠다. 한 작가의 문학관은 그 자신의 세계관을 말하며, 인생관을 말하고 있을 뿐이다. 그저 작가는 사후 세계의 일면을 보여주므로 소설에서의 운영의 묘를 잘 살렸다고도 보여진다.  

 

결국 소설은 휴머니즘을 말해야 하고, 소설가는 휴머니스트가 되야 한다고 생각한다. 작가는 이 점이 충실해 보인다. 이야기도 잘 엮었다. 정말 이야기'꾼'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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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크pek0501 2013-09-16 23: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위화의 에세이는 읽었는데, 이건 소설이군요.
사후 세계가 궁금해요.
그래서 위화 작가의 상상력으론 사후 세계를 어떻게 그려냈는지 궁금합니다.
꽤 잘 쓰는 작가로 봅니다.^^

stella.K 2013-09-17 16:28   좋아요 0 | URL
중국 작가들이 한 글 하잖아요. ㅎㅎ
저 개인적으론 아주 감동적으로 썼다고는 말할 수 없어도
참 그럴 듯하게 썼다는 생각이 듭니다.
저도 사후 세계는 늘 궁금해요.^^
 
41 - 이재익 장편소설
이재익 지음 / 네오픽션 / 201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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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기회도 좋았지만, 내가 이책을 읽으려고 했던 건 순전히 작가에 대한 관심 때문이다. 언제부턴가 인터넷 그것도 서점에서 이재익이란 이름이 심심찮게 떠돌고 있었다. 어떤 사람인가 봤더니 공중파 라디오의 PD란다. 이책 말고도 몇권의 책을 더 낸적이 있고, 이미 그의 작품이 영화화되기도 했다. 사람이 한 가지 일도 잘하기 어려운데 PD에 작가에 영화 진출까지! 부럽다 못해 약간 배가 아플려고 한다.ㅋ 

 

책이나 영화나 스릴러는 딱히 좋아하는 장르가 아니라 작가의 이름이 아니었으면 안 봤을런지도 모른다. 그런데 이 작가 글을 잘 쓴다는 생각은 든다. 어쨌든 책을 끝까지 보게 만드는 힘을 지녔으니 말이다. 재미있었다. 그리고 읽을 때마다 느꼈던 건 작가는 모르긴 해도 영화와 만화에 일가견이 있겠다 싶었다. 한마디로 책이 비주얼적이다. 굳이 영화를 보지 않더라도 그림이 그려진다. 특히 이야기 중간중간에 나타나는 폭력적 장면이나 비교적 디테일한 섹스 장면은 영화의 지문보다 리얼해서 오금이 저릴 정도다. 그것에 대해 작가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이 소설에는 여러 종류의 폭력이 등장합니다. 지금까지 제가 쓴 소설들 중에 폭력적인 장면이 가장 많이 등장하지요. (중략) 사람과 사람과의 관계가 점점 폭력적으로 변하는 요즘 세태를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싶었습니다. 특히 학교 폭력에 대해서요.

 학교 폭력을 보도하는 기사를 보면서 마치 정글 같다는 생각을 했는데, 지금은 정글보다 더 잔인하다는 결론에 이르렀습니다.(320~321p)     

나름의 (궁색한)변명 같기도 자조하는 듯해 보이기도 하다. 솔직히 그 정도 가지고 놀랄 정도는 아니다. 이미 우린 알게 모르게 폭력 장면이나 음란한 장면에 얼마나 많이 길들여져 왔는가. 단지 거슬렸던 건 사실이다. '뭐 이렇게까지 자세하게...?' 작가는 나름 그것에 대해 이렇게 말하고 있지만 남들이 그런다고 자신까지 그래야 하는 건가? 좀 묻고 싶어졌다. 

 

이 이야기는 지난 해 말 발생한 밀양 성폭행 사건을 모티프로 한 스릴러다. 자고 일어나면 뉴스에서 성폭행 사건을 보도하는지라 이런 사건이 있었나? 부끄럽지만 좀 뜨아했다. 주진우 기자는 그때 성폭력에 가담한 자가 44명이라고 했는데, 여기선 41명이다(그래서 제목도 간단 명료하게 41이다). 44명이든 41명이든 명수가 중요한 것은 아니고, 어떻게 이 모든 사람이 무죄로 판결을 받았는지 그야말로 우리나라는 귀신이 신나락 까먹기 딱 좋은 나라라는 걸 입증한 셈이다. 무법천지란 말이 잘 어울린다는 말이다. 이런 일은 이것 하나로 끝났던 것이 아니다. 익산과 전주에서도 발생 했으며 학교와 경찰, 사법부의 안일한 대처와 어른들이 불합리한 잣대를 들이대 피해자들은 또 한 번 강간을 당해야만 했다(주진우의 전통시사활국 주기자, 333p). 아무튼 이것에 대해 작가는 '이 사건의 가해자들이 누군가로부터 복수를 당한다면?'이란 가정에서 이 소설을 쓰기 시작했다고 했다(320p). 이야기를 대하는 작가의 좋은 태도라는 생각이 든다. 

 

하지만 이걸 꼭 스릴러란 장르로 풀어야만 했을까? 약간의 아쉬움이 남았다. 스릴러라기 보단 복수극 더 맞는 말 같다. 한꺼번에 다 보여주지 않고 조금 조금씩 보여주는 작가의 이야기 푸는 방식도 마음에 들기는 한다. 보고나서 나름 통쾌한 느낌도 든다. 그후 시윤은 어떻게 됐을까? 정태는 또 어떻게 됐을까? 약간의 여운도 괜찮긴 하다. 하지만 결국 남는 건, 이건 너무 익숙한 방법 아닌가? 보고나면 약간은 허탈해지는 것이 여느 영화 보고난 느낌과 별 다르지 않다.

그래. 보고나면 인과응보란 말도 생각나고(복수극이니까), 우리나라 법이 정말 허술하고 있는 자를 위한 법이지 약자를 보호하기 위한 법은 없구나 회의하게도 되며, 가해자도 가해자지만 그 아이들을 싸고도는 어른의 맹목적인 이기심에 치를 떨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이런 자극적인 스릴러 복수극 보다 조금 다른 관점, 다른 장르로 풀었으면 어땠을까? 

 

이제 우리나라 영상이 수위를 넘었다는 것엔 모든 사람이 공감한다. 엊그제 하필 이책을 읽으면서 모처럼 영화 <완득이>를 보았는데, 그 영화에 나오는 완득이를 좋아하는 윤하를 보면서 묘하게도 이책에 나오는 미나와 오버랩이 되는 것을 느꼈다. 미나도 저렇게 윤하같이 해맑았겠지? 그런 미나가 짓밟혔다니. 저 완득이의 윤하도 그렇게 되는 것은 아닐까? 그러면서 잠시 망상적 젖었다. 그런데 이내 정신을 차리고, 이책은 아직 영화화 되지도 않았는데 어떻게 윤하와 미나를 오버랩 시킬 수가 있을까? 나의 사고체계가 어떻게 된 것은 아닐까 스스로도 좀 놀랐다. 결국 책을 보면서 영화를 생각했던 것이다. 그러니 다른 장면은 말할 것도 없다.

 

나는 작가의 저 말이 공감도 납득도 되지 않는다. 폭력적 장면으로서 이 사회의 폭력성을 말한다고 생각하는가? 오히려 그것을 뛰어넘어야 이 사회의 폭력에 대해 말할 수 있는 것 아닌가? 그건 많은 영화 감독이 폭력적이고 자극적인 장면이 들어가야 영화가 된다고 믿는 것과 무엇이 다른 것인가? 그러니 작가가 폭력적이고 자극적인 장면을 묘사한 것을 정당화하거나 미화시키지 않았으면 좋겠다. 겉표지도 보면 청소년도 함께 봐도될 그런 그림을 하고 있다. 이책이 청소년도 함께 볼 수 있는 책이 되려면 그런 장면들의 남발이 아니라, 너희의 학교에서도 일어날 수 있는 일이야. 어떻게 할래? 라고 물어 볼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얼마 전, 레이디 가가가 내한 공연을 갖는다고 했을 때 공연물 심의 위원(?)에서 청소년 유해 공연(?)이란 판정이 났다. 그랬을 때 탈런트 유아인이 무슨 쌍팔년도식 발상이냐고 비판하는(그랬다기 보단 냉소하지 않았을까?) 글을 자신의 미니홈핀지 어디에 올렸다고 한 보도를 접한 적이 있다. 아마도 그런 보도는 우리나라 심의 규정이 얼마나 낙후되었는가를 비아냥 거리기 위해 보도된 것처럼 보이는데, 낙후된 면이 없지 않더라도 글쎄 일단 그런 빨간 딱지가 붙여지면 의심하게 되는 건 사실이다. 특히 자식가진 부모는 더더욱. 물론 그런다고 우리의 아이들이 그 공연을 안 보겠느냐마는 난 영상의 폭력성이 범죄에 미치는 것을 거의 절대적으로 신뢰하는 사람이라 낙후됐더라도 심의위원에 손을 들어주고 싶다. 그런 점에서 유아인은 공공의 적이 될런지는 몰라도 말이다.

 

이 작품은 장르에 호소하는 이야기 보다는 오히려 우리나라 법의 허술함, 어른들의 이기심, 학교의 무력함에 촛점을 맞췄더라면 어땠을까? 그래도 작가가 작품을 위해 나름 많은 자료를 참고했다는 느낌이 들기는 한다. 특히 법에 대한 공부를 꽤 했던 것 같다. 하지만 우리나라 법이 얼마나 허술하고, 강자를 위한 법인가를 보여줬더라면. 그래서 대미를 시윤과 정태의 대결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주효진 검사와 미나의 이야기나 41명을 다 다룰 수 없어서 그중 차출된 9명 중의 한 사람과의 대결 구도에 힘을 줬더라면 좀 더 신경 쓴 작품이란 평을 얻을 수 있지 않았을까 싶기도 하다.

 

얼마 전 개봉한 <부러진 화살>을 보라. 그건 이렇다 하게 자극적인 장면이 없으면서도 우리나라 사법부의 문제점을 아주 적절하게 보여줌으로해서 평단의 호평을 받았다. 그건 지금 생각해도 아주 효과적이고 경제적인 작품이란 생각엔 변함이 없다. 또한 난 그 영화를 보면서 결국 이야기를 다루는 사람이 모든 것의 우위를 차지할 것이란 생각을 했었다. 하지만 난 이 작품을 보면서 웬지 영화화 될거라는 조짐과 함께 재미는 있는데 익숙한 번잡스러움을 또 한 번 보여주겠구나 하는 생각을 했다. 

 

인과응보. 41명의 가해자를 무혐의 판정을 받게 해 준 주 변호사가 태도를 바꾼 것이 그 사이 그의 아들이 똑같은 폭력을 당하고 자살을 했다는 점에서 성폭력의 문제는 나의 문제고 내 가족의 문제인 것을 각인시켜 준 것은 나름 설득력이 있어 보이긴 한다. 하지만 그것 이전에 우리가 얼마나 내 문제가 아니면 둔감한가는 가해자의 부모와 이 사건이 여론의 촛점이 되면서 비난을 받는 장면에서 묘한 대척점을 이룬다(176p). 분명 가해자의 부모도 자신들의 자식이 그런 사건에 연루되지 않았다면 저런 놈은 시청 광장에 세워두고 총살시켜야 한다고(어른들은 곧 잘 이렇게 말한다) 길길이 날 뛰었을 것이다. 그런데 그게 과연 무슨 의미가 있을까? 성교육 부재의 시대, 법의 정의가 부재인 시대에 그런다고 이 성폭력의 문제가 해결되겠는가? 무엇보다 기성 세대의 성문화가 바닥이다 그런 세상에서 제 2, 제3의 밀양 성폭력 사건은 계속될 수 밖에 없다. 무엇보다 피해학생을 오히려 마녀사냥을 해 전학간 학교에서도 발을 못 붙이게 만든다는 건 너무 가혹하다. 그건 가해학생 못지 않은 잔인한 짓을 범하는 것이다. 무엇보다 안타까운 건 우리의 아이들이 학교를 신뢰하지 않고, 좋아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학교에 대한 긍지와 자부심이 있다면 그런 문제는 발도 못 붙이게 오히려 학생들이 자발적으로 나서서 이 문제를 해결했을지 모를 일이다. 

 

작가의 말에 의하면 그 폭행을 당했던 그 여학생은 지금 어떻게 됐는지 모른다고 한다. 그리고 위에서도 고백했지만 나 같은 벽안의 시민은 그 사건을 너무나 빨리 쉽게 잊었다. 그것을 상기시켜 주기에 이 작품은 그런대로 효과는 있어 보인다. 

솔직히 나의 조카는 성인임에도 불구하고 내가 보기에도 좀 불안해 보인다. 더구나 요즘 부모를 떠나 친구와 함께 자취생활을 하고 있는데 녀석이 잘 지내고 있을까? 같은 서울 하늘 아래 있음이 더 불안해 진다. 우리의 아이들이 좀 안전하게 살 수 있도록 법이나 제도가 바뀌었으면 좋겠다.

 

이책을 읽으니 얼마 전에 읽기를 마친 주기자의 말이 생각난다. 

중학교 다닐 때 어린 애를 데려다가 팬티를 벗기고 추행하던 두 놈이 있었다. 한 명은 1년 선배고, 한 명은 동기였다. 매년 명절 때마다 고향에 가면 꼭 물어본다. 그놈들 뭐 하느냐고. 몇 해 전 그 선배가 체포됐다. 안산 발발이로 신문을 큼지막하게 장식했다. 옛날부터 성도착증을 보이더니 원룸을 털고 강간을 일삼는 전국구 범죄자가 된 것이다. 그놈은 어렸을 때부터 많이 걸렸는데 그때마다 아버지가 로비해서 번번이 구해냈다. 결국 큰 범죄자를 만든 꼴이 됐다. 동기는 고등학교 때 강간 사건으로 감옥에 갔다 왔다. 이후에는 농사를 지으며 살고 있다.('주진우의 정통시사활극 주기자' 341~342p)       

남의 눈에서 눈물 나게 만들면 자신의 눈에선 피눈물 난다는 말은 틀린 말이 아니다. 자식을 감사 주고 싶은 부모의 마음은 한결 같다지만 이런 문제를 로비하면 죄에 대해 둔감해져서 더 큰 범죄를 저지르게 만든다. 옛날엔 자식이 그러면 창피해서 이사를 가는 부모도 있는데 지금의 부모는 그렇지도 않은가 보다. 

 

작품의 의도는 좋은데 좀 더 좋은 작품이 나와주길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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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진 2012-05-03 20: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좋아요. 오랜만에 스텔라이모 글에 댓글 달아보네요. 이 책은 신간 소설을 찾다가 눈여계 봐둔 소설인데 이모가 읽었다고 해서 놀라며 글을 읽었지요. 왠지 이모 취향은 아닌거 같아보아서요.(어쨌든 제가 잘옷 알았던게 아니라서 다행이군요ㅎㅎ)
부러진 화살은 놀랄만한 영화였지요. 웬만한 자극적인 영화보다 훨씬 자극적이었고, 비판적이었어요. 일단은 눈살 찌푸리게 되는 자극적 장면도 없으니 생각거리를 더욱 명확히 던져주었구요. 비주얼적인 소설은 제가 참 원하는 소설인데 어찌 읽을 방법이 없네요. 연이 된다면 만나겠죠ㅎㅎ 그나저나 새삼 이모 리뷰가 대단하다고 느껴요. 길이만 긴것도 아니고 긴 리뷰안에 하고픈 이야기가 옹골차게 뭉쳐있는 리뷰 참 좋아요.

stella.K 2012-05-04 13:45   좋아요 0 | URL
짜슥, 그냥 달라는 말 보다 더 하네.ㅋㅋ
기다려봐. 언제고 시간나면 보내줄게.
근데 뭐, 옹골차게 뭉쳐있다...?
니 마이 컸다!ㅋㅋㅋ
근데 내 리뷰가 오히려 번잡스러웠나 보다.
추천은 영...ㅠㅠ

이진 2012-05-04 19:17   좋아요 0 | URL
음, 달라는 소리로 들렸나요 ㅎㅎㅎ
그런 이야기는 아니었는데 그렇게 읽히긴 하는군요.
제가 많이 컸죠?
어른들한테 이런 평가나 하고다니고 말이에요 ㅎㅎ
아니에요, 너무 잘쓰셨는걸요.

해피투게더 나문희씨가 나온 편을 보고 있는데 역시 너무 좋아요.
저, 김영애보다 나문희를 더 좋아하거든요 ㅎㅎㅎㅎㅎㅎㅎㅎㅎ

stella.K 2012-05-04 22:25   좋아요 0 | URL
뭐야, 김영앤줄 알았더니 나문희라구?
나문희 다음은 누구야? 니가 가장 좋아하는 사람 더 없는 거야?ㅎㅎㅎ
니가 마이 큰 것 중에 또 하나가 있는데,
니가 벌써 이모의 책 읽는 취향을 꿰뚫고 있다는 것이지.
그 때문에 보내 준다. 세상에 이런 이모 읎지?ㅋㅋㅋㅋㅋㅋ


이진 2012-05-04 23:38   좋아요 0 | URL
헤헤, 대충은요.
대충은 아마 이럴것이다, 하고 생각하고 있는 취향이 있어요.
뭐라고 설명하기는 약간 애매한데 말이죠 ㅎㅎㅎ
저는 연기 잘하는 배우 좋아해요. 김영애와 나문희 둘 다 연기에서는 짱 먹으시고 귀엽고 예쁘기까지 하시잖아요. 또 있다면 저는 바로 박해미를 꼽지요. 어떻게 보면 '거침없이 하이킥'을 아주 감명깊게 봐서 그런거 같기도 하구요.

우와!

아이리시스 2012-05-07 00: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에 이 분이 쓴 소설을 읽었는데 비쥬얼 치중이라 문학적인 면은 부족하다 여겼는데, PD라고 하더라고요. 그래서 아.. 이랬는데 뭐랄까, 본인이 할 수 있는 새로운 소설적 영역을 구축해가는 건 좋아보여요. 전에 제가 읽은 건 <카시오페아 공주>랑 <압구정 소년들>이었어요^^ 근데 이후로 엄청 소설이 많이 나왔어요.^^

stella.K 2012-05-07 10:26   좋아요 0 | URL
저도 새로운 소설적 영역이란 말에 동의해요.
문학성은 다소 아쉽지만 이야기를 이끌어 가는 방식은 알고 있으니.
단지 좀 통찰적 측면이랄까? 그게 좀 아쉽고
익숙한 방식이 아닌 좀 더 다른 측면에서의 이야기의 접근이 아쉽더라는 거죠.
이럴 것 같으면 영화로 보지 소설은 안 보게 될 것 같아요.ㅋ
 
노인과 바다 (무선)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91
어니스트 헤밍웨이 지음, 이인규 옮김 / 문학동네 / 201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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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소설을 보면 이 그림이 생각이 난다

 

부끄럽게도 난 이제야 헤밍웨이의 작품을 읽었다. 하지만 난 읽기를 마쳤을 때 오히려 이때 읽기를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것은, 얼마 전 보도에 따르면, 최근 헤밍웨이의 저작권 기간이 만료가 됐는데, 이제까지 우리가 본 헤밍웨이의 작품은 해적판이거나 의역을 한 것이라고 한다. 그런데 저작권 기간이 만료가 됨에 따라 앞으로 제대로 된 번역본이 나올 것이며, 그의 다른 작품들도 속속 다시 출판되거나 미번역 작품들이 나올 것이라고 한다. 반가운 일이다. 그리고 그에 따라 헤밍웨인의 이 작품이 새롭게 번역되어 나왔고, 그러니 바로 이때 읽은 것이 잘 된 일이 아닌가. 하지만 꼭 그런 이유가 아니더라도, 고전을 읽으라고 닥달 받았던 청소년 시기에 이 작품을 읽었더라면 내내 고개를 갸웃거렸을지도 모를 일이다. 그런데 나는 이제야 비로소 이 작품을 읽고 '아, 그런 거구나. 과연 그런 것이었구나.' 조용한 탄성을 내질렀다.     

 

알겠지만 이 작품은 줄거리로만 보자면 너무나 간단한 이야기이다. 노인이 고기를 잡으려고 바다에 나갔지만 벌써 84일째 아무 것도 못 잡고 있다가 85일째에 큰 물고기(만새기)를 잡았고 돌아오는 길에 고래에게 고기를 내주고 결국 아무 소득도 없이 피곤한 몸이 돼서 돌아온다는 것이 전부다. 물론 중간에 소년도 있고, 소년과 함께 나눈 야구선수의 이야기도 있긴하다. 모름지기 소설이라면 기승전결이 있어 줘야만 할 것 같은데 이 작품에선 그런 것은 없고, 오로지 노인의 기쁘지도 슬프지도 않았을 어제의 연장선과 고기를 잡아 올리고, 고래와의 사투. 그리고 노인의 피곤함이 전부일 뿐이라는 것이다. 그것은 나에게 그림 하나를 연상케 했는데, 그것은 다름아닌 반 고흐의 그림이었다.    

 

 꼭 노인이 신었다 벗었을 것 같은 남루하고 초췌한 신발이다. 그리고 그것이 노인의 삶을 대변해 줄 것만 같다(밀레도 이 비슷한 그림은 그린 바가 있다. 하지만 우리에겐 반 고흐가 더 익숙해 보인다). 그처럼 이 작품은 마치 한 폭의 그림과도 같고, 영화로 치자면 한 시퀀스에 해당하는 작품 같기도 하다. 한 폭의 그림이 많은 것을 생각하게 만들고, 잘 만든 영화의 장면 하나가 명작을 만드는 것처럼 이 소설은 그렇게 설명되어질 수 있는 것이 아닐까 한다.

 

 

나는 생각해 본다

 

나는 생각해 본다. 이 노인의 젊은 청년기와 장년기는 어땠을까를. 지금의 모습은 과거를 반영하고 있다고 했던가. 왠지 노인의 지난 삶은 지금의 모습과 크게 다르지 않았을 것 같다. 평생 바닷가 주위를 떠나지 않았으며, 바다와 함께 살고, 바닷바람에 깊이 패인 주름이 산티아고를 노인으로 만들었을 것이다. 바다는 인생 어느 시기에 그에게 만선의 기쁨을 맛 보게 해 주었을 것이고, 그것으로 돈을 벌게 해 줬을 것이며, 그 돈으로 술과 잠깐의 방탕으로 여자를 샀을지 모른다. 하지만 왠지 산티아고는 평생 독신으로 살았을 것 같기도 하다. 가족관계에 대해선 말이 없으니 말이다. 근데 또 모를 일이지. 인생 어느 시기에 아내(내지는 동거인)와 함께 살았을지 모를 일이고, 아이는 없거나 먼저 떠나 보냈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 사이 자신을 낳아준 부모님을 떠나 보내고, 아내마저 보내고 지금은 이렇게 혼자가 되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나는 가끔 할머니나 지금은 늙어버린 나의 어머니를 보며 생각해 본다. 그 많은 세월 인생의 헛헛함을 어떻게 견디며 살아왔을까를. 특히 나의 두 할머니에게도 부모님은 계셨을진대 그분들을 보내드리고 인생은 살만하던가를 여쭙고 싶은 때가 있었다. 그러나 끝내 여쭙지 못했다. 벌써 오래전에 두 분의 할머니를 보내드리고, 아버지마저 보내 드리고, 나 역시 나이 들고나니 새삼 여쭙지 않아도 당신들의 마음을 알 것 같다. 그리고 아무렇지도 않은 양 사는 것, 살아내는 것. 인생은 그런 것이었다.

 

늙는다는 건 무엇인가?

 

내가 이 책을 이때 읽기를 잘했다는 건, 내 나잇대가 산티아고 노인과 근접해 있기 때문이다. 아직 노년이라고는 할 수 없지만 그렇다고 더 이상 젊다고 할 수도 없는 나이. 젊을 때는 나이든다는 걸 어떻게든, 어떤 식으로든 이해할 수 없었다. 누구 보다 나이를 더 먹었다는 것만으로는 나이들었다는 걸 설명할 수 없다. 그것은 청소년기와 청년기가 다르듯 꼭 나이들어봐야 알 수 있는 또다른 경지를 의미하는 것이었다. 예전엔 감히 상상할 수 없는 것을 그동안의 경험과 연륜을 통해 아직 그 경지에 다다르지 않은 것을 생각하고, 상상하고, 직관하고 싶다. 그래서 나는 이 책을 읽으면서 산티아고 노인과 동병상련의 마음이 되어 공감하고 싶고, 이해하고 싶고, 연민하고 싶었다.

 

가끔은 내 젊은 날이 몹시도 그리울 때가 있다. 그렇다고 그때가 행복하고 좋았던 것도 아니다. 어느 땐 죽을만치 힘든 때도 있고, 실수투성이어서 다시 생각하고 싶지 않은 것도 많다. 하지만 적어도 지금 보다는 젊다는 것만으로도 사랑스러울 때가 있다. 저 햇빛에는 스펙트럼이 존재하듯이 인생의 나날을 이만큼 보내고 뒤돌아 본 젊은 날의 햇빛속엔 비록 이루지 못한 것들이 수두룩해도 내 인생에 젊은 시절이 있었다는 것만으로도 왠지 그 시절을 용서하고 끌어 안아주고 싶은 때가 있다는 것이다. 산티아고 노인도 그렇지 않았을까? 비록 이루지 못한 지난 날의 꿈들이 있지만 그래도 자신의 것이기에 모든 것을 긍정으로 때론 체념으로 달관하며 지금도 살고 있을 것만 같다.  

 

노년도 생(生)이다

 

그런데 잊지 말아야 할 것이 있다. 노년도 생(生)이라는 것을. 누가 노인은 힘도 없으며, 옛날이나 추억하는 퇴물이라고 했는가. 그들은 여전히 자신과 필요하면 그의 식솔들까지 책임지고 건사해야 하는 생활인인 것이다. 늙어서 자식들이 호강시켜줄 나이에 생활전선에 뛰어 들었다고 함부로 연민의 눈으로 바라보지 말아야겠다. 그는 그렇게 움직일 수 있는 것이 긍지요 자부심일지 누가 알겠는가. 늙어서 이룬 것 하나 없다고 책망할 것도 아닌 것 같다. 이룬 것이 많으면 무엇하려고? 사람은 사람을 평가할 때 저 사람이 무엇을 하는 사람이며, 무엇을 이루었으며, 재산이 얼마인가 하는 결과로 판단하려고 할 때가 너무 많다. 그런데 사람을 보는 잣대가 그것뿐이라면 노년에 할 일이 없어서 빈둥대는 삶은 나은 것인가? 그런 의미에서 요즘엔 노후대책 세우는 것을 무슨 삶의 완장처럼 생각하는 경향이 있는 것 같은데, 정말 그것만이 완전한 삶일까? 생각해 본다. 노년은 정류장에서 죽음의 버스나 기다리는 얼마 남지 않은 삶이 아니다. 노년도 엄연한 생이고 삶인 것이다. 

 

"하지만 사람은 패배하도록 만들어지지 않았어."

노인은 말했다.

"사람은 박살이 나서 죽을 수는 있을지언정 패배를 당하진 않아."

                                                               (180p) 

인생이 그러하듯 굴러 떨어지는 바위를 산꼭대기로 밀어올 올려야 하는 시지프스처럼 노인의 삶도  그런 것이다.

 

노후대책이 세워진 삶이 여유로운 건 사실이긴 하겠지만 그것이 만족한 삶인지는 난 아직 확신할 수 없다. 사람들은 타인을 볼 때 경제적 가치로만 보기 때문에 그 누구도 그런 노인을 염려하거나 격려가 필요한 존재라고 보지 않는다. 그래서 차라리 산티아고 노인 같은 삶이 더 아름답게 느껴지기도 하는 것이다. 망망대해에서 홀로 의지할 것이라곤 바다와 새 그리고 자신 밖엔 없다. 만새기를 기다리는 84일 동안 그가 한 일은 혼자 궁시렁 거리고(정말 우리 할머니도 혼자 궁시렁 거리는 때가 많으셨다), 바닷새와 대답없는 대화를 주고 받는 것 밖에 없었다. 그리고 드디어 만새기를 낚아 올릴 때 스스로를 다잡아야 했기 때문에 자신에게 더 많은 말을 걸고, 후에는 고래와 사투를 벌이느라 고생을 해야만 했다. 그리고 모든 것을 잃고 지쳐 집에 돌아왔을 때 그것만으로도 그는 격려 받기에 충분한 존재였다. 누가 그를 쓸모없는 노인이라고 비난하랴. 

 

그것은 또 어찌보면 성경에 베드로가 예수님을 만나기 전 바다에 그물을 던졌으나 한 마리도 잡지 못한 그 사건과 상치되기도 한다. 산타이고 노인은 중간에 고기를 얻는 잠깐의 기쁨을 얻었지만 결국 아무 것도 얻지 못하는 공수레 공수거란 인생의 법칙에 딱 맞는 결과를 얻었고, 베드로는 예수님을 만난 후 그물이 찢어질 정도로 많은 고기를 길어올릴 수 있었다. 어찌보면 산타이고 노인의 결말이 더 현실적으로 다가온다. 사는 동안 욕심내지 말고, 비록 머피의 법칙과 호사다마의 삶을 살게되는 날이 더 많을지라도 생은 과정이니만큼 과정에 충실하라고 소설은 우화적으로 우리를 교훈하고 있는 것도 같다.

 

작가의 삶을 생각하다         

 

이 책을 읽으면서 헤밍웨이의 삶을 생각해 보지 않을 수가 없었다. 이렇게 한 폭의 수채화 같은 작품을 남겨놓고 그는 왜 권총자살로 생을 마감했을까. 숙연해졌다. 풍모도 좋아 언제나 남루한 우리네 보통 사람들의 삶을 위로해 줄 것만 같은데 이렇게 우화 같은 소설을 쓰고 정작 자신은 삶이 괴로워 그것을 피해버리고 말았으니 그런 그가 이내 연민에 젖게 만들었다. 

 

더구나 이미 잘 알려진 사실이지만, 이 작품이 나오기까지 그는 150번 가까이 고쳐 썼다고 했다. 그래서일까? 군더더기 없는 문체가 상당히 인상적이다. 이 작품을 두고 하드보일이라고 하는데 그것은 오랜 기자생활로 다져진 그의 문체의 내공에서 나온 것이다. 또 그래서일까? 고기를 잡는 과정, 고래에게 고기를 빼앗기는 과정이 정말 사실적이라 인상 깊었다. 왜 여타의 이름 있는 작가들이 헤밍웨이를 그냥 지나치지 않는지. 왜 그를 큰 산맥이요, 문학적 스승으로 삼는지 알 것도 같다. 

 

150번. 난 지금까지 내 글을 제일 많이 고쳐 본 것이 13번인가 됐던 것 같다. 그러면서 점점 나아지는 것 보단 자괴감에 빠져들곤 했었다. 그런데 그건 정말 아무 것도 아니었다. 오늘 헤밍에이는 여러모로 나를 위로 한다. 그를 사랑하게 된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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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yrus 2012-03-07 15: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아직 안 읽어봤어요. 헤밍웨이의 소설들이 나오기 시작할 때 헌책방에 굴러다니던
번역판들을 읽어보려고 했는데 때마침 저작권이 풀려서 다행이에요.
노인과 바다 이야기자체로만 보면 짧은 편인데 이 한 편 쓰는데 100번 넘게 고쳤다니..
역시 대가들은 다르긴 다르군요. 역시 노벨문학상 수상작으로 될 만한 문학적 가치가
있는거 같아요 ^^

stella.K 2012-03-07 16:06   좋아요 0 | URL
근데 시공사와 문학동네가 헤밍웨이를 두고 격돌하더군.
그렇지 않아도 이거 읽으면서 몇 작품 더 읽어보고 싶은 생각이 드는데
시공이 나을까? 문동이 나을까?
행복한 고민에 빠질 것 같아.
어떤 게 좋을 것 같니?^^

cyrus 2012-03-09 12:31   좋아요 0 | URL
잘 모르겠어요. 저 같은 경우에는 한 번 구입하거나 읽게 된 문학전집은
오랫동안 쭉 읽거나 구입하는 경향이 있어요. 그래서 읽게 된다면 두 출판사의
번역판을 읽어보겠지만 구입은 문학동네 판이에요 ^^

stella.K 2012-03-09 12:54   좋아요 0 | URL
결국 어느 걸 골라도 비슷비슷할 것 같아.
근데 보니까 시공사 책이 문동 보다 디자인은 맘에 들어.
그래서 다음엔 사게 된다면 시공사에서 골라보려구.ㅋ

숲노래 2012-03-07 17: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옛날 번역을 더 좋아해요.
요즘 번역가들은 '외국어 전공'을 오래 하기는 했지만
'우리 말 공부'는 영 안 하는구나 싶어서
도무지 진도가 안 나가요... -_-;;;;

원본과 외국어를 정본 삼아 번역을 한다지만,
번역하는 사람 눈높이와 깜냥과 말솜씨가 뒤떨어지면,
차라리 일본책을 중역하든
해적판으로 만들었든,
예전 번역이 훨씬 낫다 싶기까지 하기도 해요.

stella.K 2012-03-07 17:58   좋아요 0 | URL
오, 그런 게 있을 수가 있겠군요.
역시 된장님은 그쪽으로 전문가시라 잘 보시겠어요.
근데 전 그냥 무난하게 잘 읽히는 것 같던데요.
비교를 안 해봐서 잘 모르겠네요.ㅠ


아이리시스 2012-03-07 19: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번역은 잘 모르고 내용파악으로다가.. <노인과 바다>는 많이 읽었어요. 단편이랑 초기작들에 더 끌려요. 그런데 책은 아직도 안 샀어요. 선뜻 손이 안가는 건 사실이에요^^

어쨌거나 멋진 작가예요, 헤밍웨이는.

stella.K 2012-03-08 11:42   좋아요 0 | URL
와, 노인과 바다를 여러번 반복해서 읽었군요.
그래서 아이님은 그렇게 글을 잘 쓰는가 봅니다.ㅋ
맞아요. 헤밍웨이는 멋진 작가에요.^^

이진 2012-03-07 21: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늘도 학교에서는 국어선생님이 <노인과 바다>읽어본 사람했는데 아무도 손을 안들었어요. 만약 누군가 손을 들었다면 저는 이렇게 생각했을 겁니다. "자네가 읽은 것은 가짜야... 진짜는 아마 읽어본 적 없을걸?"이라고요. 지혼자 잘난척에 빠져가지고는... 지도 진짜 번역본을 읽어보지도 않아놓고서는 그런 발칙한 상상을 합니다. 아이고 저도 얼른 헤밍웨이를 읽어봐야 할텐데요...씁

stella.K 2012-03-08 11:43   좋아요 0 | URL
ㅎㅎ 지금은 안 읽어도 돼.
이담에 나이들어 읽어.^^

차트랑 2012-03-07 21: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니 읽느니보다 지금이라도 읽는 것이
훨씬 나은 것 맞습니다요~
좋은 점도 분명히 있는데요
한 번 읽은 소설들은 다시 읽기 어렵습니다.

나이가 들어 읽으면 고전 소설의 그 깊은 맛을 알게 될 것입니다.
괸히 고전이 아니잖아요..
그러니 더 좋은 일이 될 수 도 있다는....

stella.K 2012-03-08 11:44   좋아요 0 | URL
헤밍웨이를 좋아하게 됐어요.
몇 권 더 읽어야 할 것 같아요.^^

blanca 2012-03-08 09: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노년에 대한 스텔라님의 생각에 제가 위로를 받네요... 구구절절이 옳은 얘기들입니다. 잘 읽고 갑니다.

stella.K 2012-03-08 11:44   좋아요 0 | URL
우리 생애에 젊은 날이 있어서 좋았어요. 그죠, 블랑카님!^^

휘오름 2012-03-09 08: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거장의 이름만 듣고 부끄럽게도 아직 한번도 제대로 읽어보지를 못했네요. 얼마전에 보니 헤밍웨이 시리즈도 출간하더근요 조만간에 한번 도전해 볼 생각입니다..ㅎ

stella.K 2012-03-09 12:54   좋아요 0 | URL
저도요. 반갑습니다.^^

방패연 2012-03-12 00: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우연히 여기에 오게 되었는데 이 작품에 대한 대화를 보면서 몇년전 저의 블로그에 올린 글이 생각나서 소개합니다. 너무 길어서 죄송하고 혹시 않올려질지도 모르겠네요. 제목은 "두 어부 이야기" 입니다.

매주 화요일 밤은 기숙사 신세를 지는 덕분에 저녁 식사도 학교 식당에서 할 때가 자주 있습니다. 삼면 벽 전체가 유리창인 그 식당 창 밖 언덕 아래로는 야구장이 보이는데, 지난 화요일 저녁시간에는 마침 다른 학교와의 경기가 한창 진행되고 있었습니다. 프로 야구장에서 이렇게 식사를 하면서 경기를 관전하려면 아마 천불짜리 박스를 빌려야 하려니 생각하면서 무척 흡족한 기분으로 식사를 했습니다. 주황색 저녁 노을 아래 금빛 찬란한 조명이 밝혀지고 파아란 잔디가 깔린 야구장은 경기 없이 그저 빈 야구장을 내려다 보기만 해도 가슴이 울렁일만한 전경인데, 문득 헤밍웨이의 소설들을 떠올리게 되었습니다. 20대 시절 내가 푹 빠졌던 그의 소설 가운데 미국 프로야구 이야기가 나오기 때문인 듯 합니다. (e.g., 노인과 바다, 그리고 또 어딘가에 나왔던 것 같은데? 기억이 가물가물..)

생각은 꼬리를 물어서 대학 연극반 시절 내가 무척 따랐던 동훈형과 헤밍웨이를 논하던 생각도 났습니다. 주로 기획을 맡으면서 배우로 한번 출연한 것이 고작인 나에게, 연출가 동훈형은 문학을 이해하는 진짜 연극쟁이로 느껴졌던 것 같습니다. 오징어 다리에 소주를 빨면서 내가 헤밍웨이의 소설 이야기를 꺼내자 동훈형은 "헤밍웨이의 소설에서는 정액냄새가 난다"고 했지요. 나보다 다섯살 위로 군대에서 복학한 그 형의 홀애비냄새 나는 방에서 그 말을 들었을때 내가 받았던 강한 인상은 아직도 뇌리에 생생합니다. 한편으로는 농스럽게 받아들이면서도 그 표현의 강렬함과 적나나함에 내심 감탄했던 듯 합니다. 싸아하고 비릿한 정액냄새에는 총각들이 자위행위 후에 느끼는 낭패감과 허무감이 서려있음이 아닐까요.

식사를 마치고 도서관에 가서 노인과 바다를 빌려가지고 기숙사에 들었습니다. 거의 30년 만에 영어로 다시 읽는 이 책에는 내가 기억하고 있는 야구 이야기와, 사투 끝에 잡은 거대한 swordfish를 상어들에게 다 물어 뜯기는 이야기 이외에 한가지 이야기가 더 있더군요. 주인공 산티아고 노인을 보살피는 소년의 끈끈한 사랑 이야기입니다. 과거에 그저 흘려버렸던 이 부분에 감동을 받는 나 자신이 많이 변했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또 한가지 아주 흥미있는 대조를 하게되었는데 그것은 산티아고 노인과, 역시 어부였던 시몬 베드로의 비교입니다.

자신을 끌고 가는 거대한 물고기와의 필사의 투쟁가운데서 노인은 평소에 잊고 있던 기도문도 외우고 신에게 서원도 하지만 그의 결국은 참담하고 허무하기만 합니다. 그 결말을 예견이라도 하듯 그는 자신의 생각이 죄에 대해서까지 미치자 곧 그 생각을 떨어버립니다. "죄에 대해서 생각하는 일은 월급받고 하는 사람(사제)들을 위해서 있는 것이지.." 라고 하면서 마음을 돌려버립니다. 헤밍웨이의 작품에 전반적으로 흐르는 인본주의.. 그 저변에는 고독과 무의미가 언제나 질식할 정도로 깔려있음을 느낍니다. '프란시스 맥코머의 짧고 행복한 인생'이라는 단편이 대표적인 예가 되겠지요.

시몬 베드로의 이야기는 시작은 같으나 전혀 딴판의 결말로 이어집니다. 밤새 수고했으나 아무 것도 잡지 못한 베드로가 자신의 인간적 판단을 버리고 예수님의 명령에 순종했을 때 그는 전혀 예견치 못한 결말을 보게 됩니다. 놀란 그는 주님께 "나는 죄인이니 나를 떠나소서"라는 고백을 하지만,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해 주시겠다는 한마디 말에 모든 것을 다 버려두고 주를 따라나서서 종국에는 이 땅과 하늘을 연결하는 천국의 열쇠를 가진 자가 됩니다.

인본주의의 허무한 결말과 성경적인 희망의 뚜렷한 대조. 물론 헤밍웨이는 천국의 열쇠 따위에는 관심이 없었겠지요. 사내답게 멋있게 사는 것에 열중하였지만 아마도 삶의 허무감을 이겨낼 수는 없었나봅니다. 엽총을 입에 물고 방아쇠를 밀기 직전 그는 무엇을 생각했을까요?

내가 설흔 한살 때로 기억합니다. 소요리문답의 첫번째 항 "인생의 제일되는 목적이 무엇입니까?"라는 질문에 대해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며 평생 그를 즐거워하는 것입니다"라고 목사님과 회중앞에서 고백하면서 과거 20년 동안 줄곧 마음 속에 되풀이하던 "인생의 의미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묻어버리고 말았습니다. 그 이후에 내 마음에 찾아온 평안은 어떻게 설명할 방법이 없습니다. 내 자신 그렇게 단순한 사람이 아님을 잘 알기 때문입니다. 오직 베드로를 먼저 찾아주신 예수님이 나에게도 찾아오셨음을 감사할 따름입니다.
(출처: http://bangpaeyon.blogspot.com

stella.K 2012-03-12 10:59   좋아요 0 | URL
멀리 미국에서 찾아 주셨군요.ㅋ 반갑습니다.
왜 이글을 댓글로 달아주셨는지 알 것도 같네요.
그래요. 베드로가 확실히 생각나지요.
저도 교회 다니는 신자입니다.
전 그저 노인과 바다의 관점에서 베드로를 본 것이고
본심은 그렇지는 않았습니다. 지면상 베드로 이야기를 장황하게
쓸 생각이 없었구요.
근데 방패연님께서 저의 정리되어지지 않은 부분을 잘 정리해서
쓰셨네요.
헤밍웨이 뿐만아니라 확실히 여타의 문학작품들이 인본주의와 허무주의를
가지고 있지요. 전 이 허무주의란 말에 헤밍웨이를 오랫동안 읽기를 거부하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분명 인간의 고독과 허무를 얘기하고 있는 것도 사실이지만 이 작품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아라 뭐 그런 얘기로 받아들여졌습니다.
아무튼 긴 글 고맙습니다.^^
 
폭풍의 언덕 (무선)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86
에밀리 브론테 지음, 김정아 옮김 / 문학동네 / 201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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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도 낮설면서도 익숙한 이야기가 또 있을 수 있을까?

어렸을 때 이 책을 어린이 문고본으로 읽은 것 같기도 하다. 워낙 오래된 일이라 기억이 잘 나지 않지만 아마도 그때 이 책을 완독하지 못했었나 보다. 이렇게 낮선 걸 보면 말이다. 단지 기억나는 건, 히스클리프가 입양되어 와서 머리 빗는 걸 가지고 밀고 당기고를 했던 것 하나가 생각이 난다. 난 왜 이것을 잊지 않고 있었던 걸까? 그리고 나름 캐서린과 히스클리프가 꽤 다정한 사이였던 것으로 아는데 다시 읽어보니 참 낮선 방법으로 사랑했던 것은 아닌가 한다. 어쩌면 그리도 미워하면서 사랑을 할 수 있었던 걸까?

보통 사랑을 한다면 따뜻하고 밝은 느낌 또는 불 같은 사랑의 이미지를 생각하지만, 미움에서 사랑을 발견하고 확인할 수 있다는 게 참 흔치 않는 이야기 방식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면서도 여전히 사랑과 미움을 교차하며 발전시켜 나가는 작가의 상상력은 가히 천재적이란 느낌이 든다. 또한 영국 특유의 안개에 쌓인듯 암울하고 스산한 사실적 묘사가 운치를 더한다.

 

이야기의 시작이요 얼개는 사실 간단한지도 모르겠다. 어느 날 아버지가 여행에서 돌아오면서 한 남자 아이를 데려와 양아들로 삼는다. 아버지는 양아들을 편애해 아들의 미움을 사고, 여동생은 그를 사랑한다. 하지만 캐서린은 히스클리프를 사랑하지만 다른 사람과 결혼한다. 뭐 대충 이런 얼개는 그동안 드라마나 여타의 애증을 소재로한 영화나 소설에서 보암직한 내용들이다. 하지만 이 작품을 보면서 또 그런 얘기네 하면 그건 실상 잘못하고 있는 것이다. 사실은 이 작품에서부터 그런 이야기가 파생됐을지 모르겠다. 중요한 건 작가마다 그런 얼개를 어떻게 요리하고 이야기 가능한 이야기로 만들 것이냐는 작가의 역량일지도 모르겠다. 그런 점에서 작가는 탁월한 이야기 솜씨를 구사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참 사촌끼리도 결혼이 가능한 옛 유럽의 결혼방식이 좀 특이하긴 하다. 어떤이는 바로 이점이 하나의 유럽 공동체를 만든는 원동력이 됐을 거라고 하기도 하는데 읽으면서 정말 그럴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이 이야기는 2대에 걸친 사랑과 증오의 가족사를 꼼꼼하게 그려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한 세대가 그렇게 삐뚤어진 사랑을 하고 그로인해 불행한 가족사를 그렸다고 한다면, 그 다음 세대는 그것을 어떻게든 바로잡으려고 하는 경향을 보인다는 것이다. 또 그런 것을 반복하며 가족은 대를 이어갈지도 모를 일이다. 

 

특이한 건 이 이야기가 각자 개체의 이야기가 아닌 누가 누구에게 고백하는 고백체에서 이야기로 들어가는 액자 소설격 형식을 띠고 있는데 이런 모든 것들이 아름답고도 스산한 명작을 탄생시켰다는 것이 놀랍다.

하지만 역시 그 어둡고 스산함 때문인지는 몰라도 흡입력이 있다고는 볼 수 없을 것 같고 읽는데 조금은 고전했다. 하긴 고전 대부분이 그렇지 않은가. 고전할 것을 마음 먹는다면 한번쯤 도전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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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크pek0501 2012-02-18 13: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드디어 다 읽고 리뷰 쓰셨네요. 난 이 책을 30대 초반에 읽었는데, 진도는 그런대로 잘 나갔으되 큰 감흥은 없었는데, 어떤 글쟁이 친구가 이 책을 너무 재밌어서 세 번이나 읽었다고 해서 질투를 느꼈었죠. 내가 모르는 뭐가 있나 보네, 하면서... ㅋㅋ

취향, 경험의 차이인 듯.

이런 비슷한 사랑을 해 본 사람이라면 아마 이 책에 열광하겠죠. 누구를 열렬하게 짝사랑 해 본 사람만이 <베르테르의 슬픔>에 빠지듯 말이에요. 베르테르의 슬픔은 두 번 읽었는데, 두 번째가 훨씬 좋아서 책이란 읽을 적마다 그 느낌이 정말 다르다는 걸 실감했어요.


2012-02-18 13:3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2-02-18 13:46   URL
비밀 댓글입니다.

cyrus 2012-02-18 14: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자, 이제 에밀리 브론테의 폭풍의 언덕 다 읽으셨으니, 샬럿의 제인 에어도 읽어보세요 ^^

stella.K 2012-02-18 14:23   좋아요 0 | URL
ㅎㅎㅎ 그럴려고.
이거 말은 꺼내놨으니 지켜야겠지?ㅋㅋ
제발 제인에어는 폭풍의 언덕 같지는 않게되길 바라고 있어.ㅠ

비로그인 2012-02-20 12: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고전을 읽는 데 고전하셨군요 ㅎㅎ <폭풍의 언덕>은 제대로 읽은 기억이 안 나요. 한 번 들춰본 것 같기는 한데... 내용이 생각나지 않는... 아마 저도 스텔라님처럼 한 순간 이 책을 스쳐지나갔나봐요. 중학교 때 친구가 이 책을 추천해주었었는데, 저는 이 책이 뭔가 불길하고 마음에 안 들어서 대신 <제인 에어>를 감명 깊게 읽었던 기억이 나네요 ^^;;

stella.K 2012-02-20 12:53   좋아요 0 | URL
그러게요. 저도 제인에어는 폭풍의 언덕 보다 재밌게 읽은
기억이 나요. 지금은 내용이 하나도 기억에 없지만.
뭐 수다쟁이님 말씀도 있고 하니 좀 덜 고전하리라 믿으면서
3월을 기약하렵니다.^^

아이리시스 2012-02-20 17: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래도 빨리 읽으셨어요! '의식의 흐름' 기법이잖아요. 분명 잘 안 읽혀요. 잘 읽히는 사람은 좀 문제가 있는 사람이 아닐까..( '') 굉장히 빨랐어요. <제인에어>도 좋을 것 같아요. <테스>랑 3종 세트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stella.K 2012-02-20 17:54   좋아요 0 | URL
ㅎㅎ 저도 읽으면서 <테스>가 많이 생각나더만요.
근데 그게 의식의 흐름 기법이었나요?
그것도 모르고 읽었슴다.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