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교
박범신 지음 / 문학동네 / 201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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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가 <은교>를 알아? 

종이로 만든 책이 아직도 건재한가 보다. 나도 알고는 있었다. 작가 박범신 선생께서 언제부턴가 당신의 불로그에 '살인 당나귀'란 제목으로 소설을 연재하신 것을. 나는 그렇게만 알고 있었을 뿐 이게 뭐에 관한 이야기인지는 알려고 하지 않았다. 한다한다는 작가들이 그렇듯 일단 자기 블로그에 글을 올리고 그것을 책으로 내는 것이 보편화되어가고 있으니 이 작품도 곧 책으로 나올 거라고 예상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만큼 나는 꼭 봐야한다면 책으로 보겠다고 생각했다. 그도 그럴 것이 나는 연재물을 꼼꼼히 챙겨 볼만큼 부지런 하지도 않으며 컴퓨터 모니터로 글을 읽는 것도 그다지 편해하지도 않는다. 그러니 나 같은 독자를 위해서라도 종이로 만든 책은 언제나 건재해야 한다. 그리고 드디어 원래의 제목 '살인 당나귀'가 아닌 <은교>란 이름을 달고 세상에 나왔다. 그리고 난 예전의 제목 보다 지금의 제목이 훨씬 좋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이 책은 생각보다 빨리 읽게 되었다.  

솔직히 박범신 작가는(더 정확히 말하면 작가의 작품은) 그동안 나와는 인연이 없었던 것도 사실이다. 사춘기 시절부터 적잖이 많이 들어왔던 이름이지만 여간해서 선생의 작품은 나의 손에 들려지기를 한사코 거부해 왔었다. 왜 그랬을까? 건방지게도 사춘기 그 어린 마음에 선생은 그냥 사랑 이야기나 쓰는 통속 작가쯤으로 여겼던 것이다. 그 시절 문학 소녀가 아닌 사람이 없다고 나도 한때는 글 써서 돈 버는 작가가 되고 싶었다. 작가지망생이라면 문학을 대하는 편견없이 진지하게 남의 작품을 대할 줄도 알아야 하지 않은가? 난 그래서 지금까지 그 죄를 속하느라 작가가 되지 못했는지도 모르겠다. 

얼마 전, 한때 동문수학했던 사람들을 모처럼 만났다. 그때는 내가 <은교>를 읽고 있었던 중이라 입이 간질거려 도저히 이것을 말하지 않고선 견딜 수가 없었다. "야, 늬들 <은교> 꼭 읽어라. 그거 읽으면 우리 싸부님께서 말씀하신 인간의 오욕칠정을 어떻게 확장 발전시켜 나가는지 알 수 있다." 그러자 같이 동문 중의 하나가 "거 내용이 뭡니까?" 한다. "노인이 소녀를 사랑하는 내용이다." 그러자 그는 콧방귀끼듯 "그런 사람 파고다 공원가면 많습니다." 그러면서 냉소하는 것이 아닌가? 나는 속으로 '무식한 넘. 탑골 공원이지 파고다 공원이 뭐냐? 그래. 넌 그러고 살다가 죽어라. 니가 <은교>를 알아?' 좀 아연했다. 그렇지 않아도 그는 세상을 달관한 건지 아니면 열등감과 우월감을 교차시키는 건지 매사 아는 척, 자기 생각만이 옳다고 하는 주의라 만나도 그다지 반갑지는 않았다. 모름지기 작가가 될 사람이라면 사회 현상에 대해 말하려는 것이 아니라 예술을 말하려 한다는 것을 알고 진지하게 들어줘야 하는 것 아닌가? 내가 문학에 대해 말했으니 말이다. 그래놓고 작가가 되겠다니 혀가 절로 차졌다.(참고로 그는 시나리오 작가가 되겠단다.)  

그런데 돌아켜 보면 그나 나나 예술을 대하는 태도가 별반 다르지 않다. 나도 <은교>를 몰랐을 때 그 보다 나은 태도를 보였다고 누가 말할 수 있으랴? 솔직히 이 작품의 프롤로그를 읽을 때까지도 탑골 공원의 어느 변태 노인에 관한 연상을 쉬 지워버리지 못했으니까. 솔직히 고백하자면 그것 보단 인간의 사랑에 관한 이야기를 받아들일 자세가 더 안 되었는지도 모른다. 

인간의 사랑 그 야성과 이성에 관하여                    

읽으면서 든 생각은, 난 아무리 생각해도 이적요 시인과 서지우 작가를 따로 떼어 놓고 생각할 수 없다는 거였다. 즉 이적요 시인의 또 다른 분신이 결국 서지우 작가라는 것이다. 이적요 시인에게도 서지우 같은 동물적 본능이 있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서지우를 향한 불타는 증오는 기실 자신을 향한 분노였을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서로에 대한 오해와 불신으로 커져갔고 결국 파멸로 까지 간 것이다.  

그리고 이것을 다른 관점에서 보자면, 이적요 시인이 은교에게 보이는 태도나 행동은 이성적이고 문화적인 측면(페미니즘적인 측면까지도 포함한)까지 포용하고 있는 반면, 서지우가 보이는 일련의 행동들은 동물적이며 권위적인 측면을 드러내고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이것이 사람 하나에 다 들어있을진대 그것을 인정하고 융합하고 화해시키기 보다 끊임없이 갈등하고 대립하는 두 개의 측면으로 나눈다는 것이다. 따지고 보면 인간의 역사와 문화는 이렇게 대립하고 융화하면서 발전해 왔을 것이다. 그런데 이적요는 왜 자신 안의 동물적 본능을 죽여 가면서까지 은교를 사랑했던 걸까? 사랑이란 과연 무엇이란 말인가? 작가가 인용했던 대로, 사랑은 나이를 먹지 않으며(파스칼) 분별없는 광기(셰익스피어)일 뿐인가?

이적요 VS 서지우

은교를 향한 이적요의 사랑의 방식이 서지우의 그것보다 훨씬 더 설득력이 있는 것도 사실이다.  그것은 서지우가 이적요의 적대자로서 이적요와 대립하면 대립할수록 더 옳게 증명하는 것으로 나타난다. 말하자면 서지우는 이적요를 힘도 없으면서 음욕으로만 가득찬 노인이라고 평가절하하고 자신의 당위를 위해 은교에게 설득하려 하려하지만 돌아오는 반응은 그가 원하던 것이 아니었다.  은교의 눈엔 오히려 이적요가 더 옳고 건강하며 그에 비해 서지우가 오히려 변태적이며 잘못됐다고 말하는 것이다. 결국 남자에 대한 평가는 같은 남자가 하는 것이 아니라 여자가 하는 것이 더 옳은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서지우는 은교의 평가를 무효화하고 끊임없이 자신의 옳음을 증명하려다 덫에 걸리고 만다. 또한 서지우가 결정적인 잘못은 인간의 정욕과 사랑을 한 가지로 생각한다는 것이다. 물론 인간의 육체가 노화되면 정력도 떨어지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정력이 떨어졌다고 해서 사랑을 못하는 것이 아니다. 이것을 깨닫기엔 서지우는 아직도 미숙했다.  노인에게 정욕이 없을 거라는 건 이 이야기의 방식으로 보자면 덮어 씌우기의 원죄일 뿐이다. 서지우도 그렇게 죽지만 않으면 언젠가는 이적요처럼 노인이 될 것인데 그땐 자신을 어떤 식으로 증명할까? 

내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라  

사랑에 대한 황금률 중 하나는 내 이웃을 내 몸고 같이 사랑하라는 것이다. 거기엔 나를 사랑하는 것이 먼저 전제가 되지 않으면 내 이웃을 사랑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나를 사랑하는 것은 도통해서는 쉽지 않은 일이다. 그런데 어찌보면 이적요 노인은 피그말리온의 원형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도 든다. 아름다운 조각상을 만들고 그 조각상과 실제 사랑을 나누다가 죽어버리고만 피그말리온. 그것이 오늘 날 교육 이론이나 정신분석학 이론에 적용이 되곤 하지만 그 보단 이 사랑의 공식을 정의할 때 쓰이는 것이 더 타당하지 않을까?  

사실 객관적으로 보면 은교는 모든 사람이 다 사랑할 수 있는 아이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조금은 그늘진 평범한 아이로 보인다. 다만 그녀가 가진 특수한 무엇이 이적요의 뇌관을 건드렸을 것이다. 그러니 실제로 사랑한 건 은교 자신이라기 보단 은교를 사랑하는 자신의 감정을 더 사랑한 것은 아닐까? 사랑이라는 게 원래 그렇다지 않은가? 과학적으로 보자면 짧게는 3개월에서 길어야 6개월을 넘지 못한다는데(이런 정의는 또 얼마나 삭막한가?) 그것의 유무는 대상 그 자체에 있기 보다 대상을 바라보는 콩깍지에 있고 보면 말이다. 또한 콩깍지 하나의 무게는 과학적으로 얼마나 나갈까? 그러나 다른 관점에서 보면 그것은 무한대이다. 사랑이란 감정은 얼마나 자신을 풍요롭게 만들고 얼마나 큰 사람으로 만드는가?  

그런데 그런 말도 있다. 정말 너무 사랑하면 대상의 털끝 하나라도 건드리는 것을 용납하지 못한다는 것. 즉 말하자면 이적요가 은교를 갖지 않은 것은 힘이 없어서가 아니라 너무 사랑했기 때문은 아니었을까? 그랬을 때 은교는 비로소 여자가 되었던 것이다. 있는 그대로를 사랑하고 보호해 줬을 때 여자는 남자에게 무한한 사랑과 신뢰를 보내고 끌어 당기고 싶은 욕망이 생기는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안타깝게도 서지우에 의해 짓밟혔다. 내가 가진 꽃이 꺾여지고 짓밟혔다면 누군들 분노하지 않고 복수하고 싶지 않을까? 더구나 이적요도 남자일진데 말이다. 여자 하나로 인해 어제까지 아군이 오늘은 적군이 되어 싸우는 것이다. 이들 사이에 은교가 없었더라면 이적요와 서지우는 여전히 좋은 관계를 유지하며 하나의 알 속에서 잘 살았겠지? 결국 인간의 평화는 어떤 상황 또 누군가에 의해 쉽게 깨질 수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메멘토 모리, 소멸 또는 불멸            

가끔은 사랑 때문에 죽는 사람이 있다. 보통은 사랑 때문에 살 생각을 하지 죽을 생각은 잘 하지 않는다. 사랑하면서 티격태격하는 것도 다 살아있는 증거고 사랑하며 살기 위한 것이 아니겠는가? 그런데 죽는 사람이 있다는 건 불행한 일이지만 드물게 있다.  

메멘토 모리. '죽음을 기억하라'는 라틴어 말이다. 이적요가 서지우를 죽일려고 작심했을 때 그는 저 말을 기억하지 못하였을 것이다. 서지우를 죽이고 자신이 어떻게 될지? 은교는 어떻게 될지? 생각하지 못했다. 그리고 그는 이를 실행했고 서지우는 죽었다. 물론 나중에 드러난 건 꼭 이적요가 서지우를 죽인 건 아니지만 결국 그의 증오가 서지우를 죽게 만들었다고 해도 틀린 말은 아닐 것이다. 그리고 그는 그때부터 자신도 죽어갔다. 결국 죽음을 생각한다면 그렇게까지 자신의 뜻을 밀어붙일 필요가 있었을까? 결국 서지우의 죽음은 이적요의 육체성의 죽음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사람이 육체 없이 어떻게 존재할 수 있단 말인가? 그렇다. 인간의 육체는 그렇게 소멸되지만 그의 사랑과 원죄는 불멸로 남은 것이다. 때로 사랑은 사람의 영혼으로 하여금 생기를 주지만 죄책감이 그를 사로잡으면 사랑이 옆에 있어도 그것이 구원할 수 없는 것인가 보다. 그래서 죽음을 기억하라고 했는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확실한 것은 이적요는 죽음을 초월한 사랑을 했다는 것일 것이다. 예술가로서 그만한 사랑을 했다면 글쎄, 그것만으로도 충분한 것이 아닐까?  

끝내 울어버린 소설 '은교'  

적어도 나는 그랬다.  이 책을 읽다 울어버리고 만 것이다. 내내 작가가 인간의 오욕칠정을 어떻게 확장시켜 나갈 것인가? 그것만을 내심 열심히 쫓다 결국 한방  맞았다. 서지우는 자기 눈에 서린 눈물 때문에 시야가 흐려져 사고로 죽었지만, 나는 죽어가는 이적요가 은교를 그리워 하는 그 장면에서 시야가 흐려져 계속 읽고 있을 수가 없었다. 이건 나에겐 아주 이례적인 일이다. 나의 독서란 무지한 지성을 깨우기 위한 거라고 생각하고 읽어왔을 뿐인데 그래서 책이 사람을 울릴 수 있다는 것에 쉬 동의하지 못했는데 그런 생각에 무릎을 꿇게 만들었던 책이 되어버렸다. 그것은 선생의 자작시로 보이는 '빈들'이란 시를 대했을 때다. 

사랑을 믿지 않으면 누가 아침 이슬에게 경배하겠는가

고꾸라지고 베이고 허물어져도 청노루 눈빛

그 아침빛이 너를 통과해와 세계의 구석방

내 안에 꽃초롱으로 둥지를 튼다 새는 날마다

저녁으로 떠나가고 나는 아직 모른다

저기 자갈투성이 해안선 끝나는 곳에

어떤 아우성들이 또 물레를 돌리고 앉아 있는지

-시집 <산이 움직이고 물은 머문다>중에서  

 

그런데 이런 생각을 하다 난 갑자기 오늘 날 왜 변태 노인이 그렇게도 문제가 되는 걸까를 생각해 보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것은 사회학적으로 보자면 몸은 늙어가는데 그에 따라 정신의 성숙이 이루어지지 않은 불균형 때문이라고 말한다. 아직도 사랑의 능력을 섹스의 능력과 동일시에서 비록 몸은 늙었지만 정력은 조금도 소진되지 않았다는 걸 증명해 보이려 하다보니 그렇게 되어버린 거라고. 그렇다면 이 세상에 재대로된 사랑은 없거나 사랑은 다 변태성을 지니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언제고 무엇이 진정한 사랑이고 성숙한 사랑인지 그것을 말하려 했던 적이 있었는가? 플라토닉. 사랑은 성교 없이도 가능하다는 것을 이적요는 말해주는 듯도 하다. 문제는 사랑을 허리 아랫쪽으로만 몰고 갔던 이 사회가 더 변태적인 것이 아닌가? 

판도라의 상자를 열어 본 은교       

책의 말미를 향할수록 내가 만약 Q 변호사였다면 과연 은교에게 이적요의 노트를 읽어 보라고 허락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에 첫번 째 드는 생각은 나는 은교가 그 노트를 읽지 않게되길 바랬다. 왜냐하면 은교가 이적요의 사랑을 알게 된다면 그녀는 다른 사랑을 못하고 평생 갇히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알겠지만 우리 시대 사랑이란 다 고만고만한 물물교환 같은 것이 아니겠는가? 모든 것을 주고 모든 것을 발화시킨 사랑이 어디 흔하냐 말이다. 나를 위해 그가 그렇게 해 줬다면 어찌 다른 상대와의 사랑이 있을 수 있겠는가? 하지만 은교는 그 한 사랑만 보기엔 너무 젊다. 필시 그 노트는 은교에겐 판도라의 상자일거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하지만 또 나중에 드는 생각은 우리의 세대가 사랑을 믿을 수 있는 세대라고 보는가? 하지만 은교만큼은 진짜 사랑이 있었다는 걸 알지 않겠는가? 사랑도 받아 본 사람만이 할 줄 안다고, 그렇다면 그것으로 또 누군가를 사랑하지 않을까? 어쨌거나 은교가 어떤 선택을 하던 그것은 그녀 몫인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니 이적요는 죄책감 때문에 자신을 학대했다기 보단 육체에 갇히는 것이 싫어 그 나름의 발화 의식으로 자신을 혹사시켰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말하자면 작가는 이 소설을 통해 이 시대의 사랑을 통렬히 비판하고자 했는지도 모른다.

이적요와 박범신       

소설은 어느 만큼의 진실과 허구를 잘 융합시킨 문화상품이라고도 한다. 그렇다고 작가가 정말 17세의 소녀와 사랑을 하고 이 작품을 썼는지는 알 수는 없다. 하지만 나는 선생의 첫 작품을 읽은 것에 불과하지만 많은 부분 이적요에게서 선생의 데자뷰를 느꼈다. 특히 이적요를 빌어 우리나라 문단을 비판한 것과 그리고 이적요를 시인으로 등장시킬 만큼 시를 좋아하신다는 것이 그것이다. 그리고 이적요의 대쪽 같은 캐릭터도 어느만큼은 선생의 이미지는 아니었을까 짐작해 본다. 또한
그만큼 문체는 시적이면서도 탐미적이다.  

사족으로 조금 과장을 해서 말한다면, 이 책을 읽고나니 내가 이제까지 읽었던 몇 안 되는 소설들이 하찮게 느껴졌고 그나마 썼던 나의 글들이 허접하다 못해 쓰레기 같이 느껴져 한숨만 더욱 깊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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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lanca 2010-05-14 16: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좋은 리뷰 잘 읽었습니다. 감사합니다. 은교를 알게 해 주셔서.

stella.K 2010-05-14 16:56   좋아요 0 | URL
부디 블랑카님께도 감동있으시길...!^^
 
리큐에게 물어라
야마모토 겐이치 지음, 권영주 옮김 / 문학동네 / 201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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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래 다도가 깊이 있는 인간의 경지를 보여주고 있다는 건 막연하게 남아 알고는 있었다. 커피를 좋아해 하루 석잔의 인스탄트 커피를 마시고, 녹차를 보리차 대용으로 마시는 내가 다도의 깊고 오묘한 세계를 어찌 알겠는가?  

가끔은 나도 다도를 배워보고 싶은 생각이 들곤 했다. 하지만 깊고 은은한 차의 세계는 또 어찌보면 밋밋한 것과 가끔은 혼동을 일으켜, 달착지근한 것을 좋아하는 내가 과연 그 세계를 받아 들일 수 있을런지도 의문스럽기도 하다. 

책을 읽으면서 왜 일본의 개국 공신이라 할 수 있는 명장들이 그들의 근성과 달리 그토록이나 다도에 집착했을까란 생각이 들기도 한다. 이책을 읽으며 그 짐작이 어렵지 않다. 전장에서 많은 사람들의 피를 봐야만 했던 그들에게 마음의 평정심과 위로가 될 수 있었던 게 다도는 아니었을까? 그러고 보면 인간의 야수성이 그 반대의 격인 문화성을 키워 온 셈이기도 하다.  

작가의 문체는 얼핏 김훈의 문체를 연상케도 한다. 김훈의 단문과 고기심줄처럼 사람의 마음을 쉬 놔주지 않는 질깃함이 느껴진다.  

독특하게도 소설의 배경은, 다성(茶聖, 차의 성인) 리큐의 할복 하루를 앞두고 그의 인생을 거슬러 올라가는 형식을 취하고 있다. 이를테며, 리큐 할복 몇 개월 전, 몇 개월 전 하다가 몇 년 전으로 점점 올라가더니 마침내 리큐라는 이름을 히데요시에게 하사 받기 이전 청년의 원래 이름 요시로까지 올라간다. 그렇게 올라가면 청년 요시로는 조선의 어느 왕녀를 사랑해 그녀를 탈출시키려다 실패하는데 까지 이른다. 여자는 독약을 먹고 목숨을 끊지만, 자신은 정작 목숨을 버리지 못하는 치명적인 트라우마를 간직한 채 살아 온 인간 리큐를 만나게 되는 것이다. 그 아우라가 제법 매력적이고 근사하다.  

알고보면 요시로가 다성 리큐가 되기까지 그 배후엔 청초하고 아름다운 이 조선 여인이 있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이 아닌가? 가슴 속에 못 다이룬 사랑 하나 간직하고 사는 사람은 확실히 많은 사람의 가슴을 울렁이게 만들고 심지어는 질투까지 느끼게 만든다. 하지만 그것도 죽음 앞에서면 모든 것은 허무 해지고 만다.  

책은 도의 경지에 이른 리큐를 보여 주기는 하지만, 정작 그가 왜 할복을 해야하는지에 관해서는 알길이 없다. 단지 부록으로나마 그가 히데요시의 노여움을 사 할복 자결했다는 사실만을 알 수가 있다. 하지만 왜 히데요시의 미움을 샀는지 알 수가 없다. 그점에 있어서는 이책은 불친절하다. 단지 미루어 알 수 있는 건, 영원한 주군은 없으며 따라서 영원한 가신도 없다는 것쯤.          

그러나 이 작품은 자체만으로도 충분히 문학적으로 아름답다고 생각한다. 차 하나에 갖가지 인간 군상과 역사를 담고, 사랑까지 담고 있으니 작가의 필력이 새삼 대단하다는 생각이 든다. 어찌보면 마음을 다스림에 있어 차 만큼 좋은 것이 없겠지만 그 뒤에 감춰진 인간의 진실은 피 보다 진하다. 나중에 영화나 드라마로 만들어도 손색이 없을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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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도하는 사람
텐도 아라타 지음, 권남희 옮김 / 문학동네 / 201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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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나이 스물 여섯되던 해, 나의 아버지가 돌아가셨다. 병을 안지 한달하고도 반만에 돌아가신 것이다. 그전까지 내가 사람들의 죽음을 몰랐을까? 모르진 않았던 것 같다. 하지만 안다고도 할 수 없을 것 같기도 하다. 솔직히 난 그 전까지 그 어느 누구의 죽음도 목도해 본적이 없으니까. 다 간접적으로만 접할 뿐이었다. 하다못해 그 나이 되도록 남의 결혼식에는 간적은 있어도, 초상 난 집에 애도하러 가본 적은 없었던 것 같다.   

과연 누가 곁에 있다가 없는 건 어떤 느낌일까? 막연하게 생각은 해 봤지만 그것을 알기엔 나의 삶은 완벽했다. 왜냐하면 누구를 잃은 것만큼 살점이 떨어져나가는 듯한 슬픔은 없었으니까. 그래서 그때까지 난 구김없이 살아 올 수 있었던 것 같다. 하지만 또, 그 나이 먹도록 그렇게 살았다는 건 그만큼 철없이 살았다는 뜻도 되지 않았을까? 아버지의 죽음을 목도하고 서야 나는 비로소 어른이 된 듯한 느낌이 들기도 했다. 

아버지가 막 숨을 거두셨을 때 유감스럽게도 난 그 자리를 온전히 지키지 못했다. 새벽 먼동이 터오기 시작할 때 나는 아직 잠을 자고 있었고, 그 시간 전화를 받고서야 비로소 아버지가 돌아가셨음을 알았다. 돌아가실 것을 예견 못했던 건 아니지만 그래도 얼마간은 더 버텨주시지 않을까? 그런 바람을 가지고 있었을 뿐, 난 그때까지 아버지의 임종을 받아드릴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 더구나 아버지의 이렇다 할 유언도 듣지 못한 상태였다. 그도 그럴 것이 아버지는 후두쪽에 이상을 보였기 때문에 이미 말로 뭔가를 표현한다는 것이 어려워 필담으로 의사표현을 하셨는데, 내용은 그냥 그때 그때의 불편한 사항을 말씀하셨을 뿐이었다. 마치 소설속에 나오는 마키노 고타로의 아버지처럼. 

게다가 아버지는 어떻게 해서든지 살 생각만 가지고 계셨지 죽음은 생각지 않으셨다. 아버지 당신도 받아들이지 않는 죽음을 누구더러 받아들이란 말인가? 죽음을 예견했다면 죽을 준비도 하였으리라. 이책의 애도하는 사람의 어머니 사카쓰키 준코처럼.  

내가 어떻게 죽고 싶은가?란 질문에, 10명 중 8,9명 또는 10명 다 고통없이 어느 날 잠자듯 홀연히 죽고 싶다고 하지 않을까? 그런데 그것은 성숙한 죽음의 방법은 아닐 것이다. 살아있는 사람을 얼마나 놀래키는 방법인가? 그 사람들은 아직 보낼 준비가 안돼 있는데 그렇게 가다니. 적어도 인사는 하고 가야하지 않은가? 그래서 자살이 가장 안 좋은 죽음의 방법인 줄도 모르겠다. 그렇게 자다가 죽는 것이나, 사고로 죽는 것은 불가항력적인 요소가 있다. 하지만 자살은 자살할 수 밖에 없는 이유야 충분히 이해는 하지만 불가항력적이라고만 할 수 없기 때문에 살아있는 사람에겐 엄청난 충격과 함께 씼을 수 없는 상처로 남는 것이다. 어떻게 사랑했던 살아있는 사람에게 그런 상처를 주고 떠날 수 있단 말인가? 

가장 성숙한 죽음의 방법은 내가 다소 고통스럽더라도 자신의 죽음을 알아 그것을 중비하며, 남아 있을 사람을 위로를 하며 죽는 것이 될 것이다. 그래서 난 이 작품을 읽으면서 주인공 시즈토 보단 사카스키 준코에게 무한한 애정이 갔던 것도 사실이다.  

그런데 나의 아버지가 과연 죽음을 예견하지 못하셨을까? 그렇지는 않다고 생각한다. 물론 그때 아버지는 죽는 이유 보단 살아야 할 이유가 더 많았다. 사업을 더 이끄셔야 했고, 성인으로 자랐다고는 하지만 슬하의 네 자녀들의 앞길도 어떻게든 터 주어야 한다고 생각하셨을 것이다. 그때 우린 아직 살만한 기반을 갖고 있지 못했으니까. 더구나 아버진 충분히 더 사셔도 되는 나이이기도 했다. 하지만 이 모든 끈을 끊고 가셔야만 했다. 그러나 남아 있는 우리와 어떻게 이별을 해야 하는지 당신도 그 방법을 모르셨던 것 같다. 그저 병상에 누워 살아야 할 의지를 보여주는 것으로 가족들을 위로하는 수 밖에. 그리고 연기가 다 했을 때 그 새벽에 홀연히 가셨다. 마치 조그만 어린 아이 오랜만에 찾아 온 이모가 자기가 잠든 사이에 몰래 갈까 봐, "응. 어디 안 가. 꼭 여기 있을 거야. 그러니까 자."  그렇게 어린 조카를 재워놓고, 잠든 사이 몰래 조카 곁을 떠나는 이모처럼 또는 삼촌처럼, 나의 아버지도 그렇게 내가 자고 있을 때 나를 떠나셨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얄궃은 분. 미운 아버지. 

내가 아버지가 입원하고 계셨던 병원 영안실에 도착하자 어느 틈엔지 아버지의 빈소가 마련되어 있었다. 그리고 아버지와 평소 알고 지냈던 지인분들이 수시로 문상을 왔다. 호상이었다. 이렇게 많은 문상객들이 올 줄 몰랐다. 그러고 보면 아버지는 살아생전 많은 사람들과 교분을 가지시면서 좋은 일도 많이 하시고 사셨나 보다 했다. 그 사이로 나의 지인들과 친구들도 문상을 와 주었다. 슬픈 건 사실이지만 그들을 힘들 게 만들고 싶지 않아 일부러 태연한 척 했다. 난 그들이 같이 울어주지 않아도 좋았다. 이렇게라도 와 줬다는 것이 큰 힘이 된다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그래서 잔칫집에 가기보다 초상집에 가기를 더 바라라는 성경 말씀이 뭔지 그때서야 알 것 같았다. 좋은 일에 사람이 온다는 것은 이를 맞는 당사자들로서는 그다지 기쁘지 않을 수 있다. 그야말로 어중이 떠중이 다 오니까. 하지만 남이 돌아 간 자리에 그것을 애도하기 위해 와 준다면 그 사람이 비록 나와 안 좋은 사이라도 고맙기 마련인 것이다. 

그런데 그때였다. 나의 아버지가 돌아 가셨다는 소식을 듣고 나의 오랜 후배 하나가 조용히 왔다. 다른 사람들이야 삼삼오오 서로 어울려서 왔지만, 그 후배는 홀홀단신으로 온 것이다. 혼자 오기가 어색할 것 같아 그냥 소식만 전했을 뿐 딱히 오란 말도 못했다. 그 후배는 아버지 영정에 헌화를 하고, 그 앞에 조용히 무릎을 꿇더니 한 줄기 눈물을 흘렸다. 예쁘기도 하고, 싹싹한 성격이라 평소 내가 예뻐라 했던 후배였다. 그런데 그때 그 후배의 모습이 내 가슴에 밖힌 것이다. 아버지가 살아 계셨을 때 한번도 보지 못했다. 물론 나와 연관이 되어있으니 그럴 수도 있겠지만, 뉘라서 그렇게 눈물을 흘려줄 수 있단 말인가? 그때까지 문상을 온 다른 사람은 다 덤덤한 표정만 지을 뿐인데, 또 그것에 대해 뭐라고 할 것도 아닌데 그 후배는 진정으로 슬퍼하는 것 같았다. 그리고 그것이 진짜 애도의 모습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했었더랬다. 한참 전의 일이다. 아마도 그 후배는 그때 그 모습을 내가 아직도 기억하고 있다는 것을 모를 것이다. 그런데 이책을 읽으니 시즈토와 그 후배의 모습이 오버랩 됐다. 그 친구는 나의 아버지 영정 앞에서 뭐라고 애도를 했을까? 그리고 시즈토라면 내 아버지 장례식에 와 줬을까? 

사실 누구도 애도에 익숙한 사람은 없을 것이다. 사람이 죽으면 이승과 어떻게 연관이 되는지 우리는 잘 알지 못한다. 어떤 사람은 해마다 제사를 지내면서 죽은 사람의 넋을 위로하고 그 사람을 기념하지만, 죽은 사람은 막상 어떨지 알 길이 없다. 그래서 우리는 애도를 아주 형식적으로 하게되지 않을까? 그런 생각을 해 보게 된다.   

이 작품에서도 보면 시즈토가 처음부터 애도를 잘했던 것은 아니었던 것 같다. 애도를 시작하게 된 동기는 나오지만, 왜 애도를 하는지, 무엇 때문에 하는지에 관해서는 구체적으로 나오지 않고 있다. 그의 애도는 제법 적극적이어서 라디오나 신문에서 부고 소식을 접하면 꼭 메모를 했다가 그곳을 직접 찾아가 애도를 한다. 나 역시도 아버지 장례 이후 결혼식 같은 좋은 일엔 더러 빠지는 일이 있어도 남을 위로해야 할 자리엔 가급적 빠지지 않으려고 했다. 하지만 시즈토처럼 일부러 모르는 사람의 장례식에 까지 쫓아 가지는 못했다. 그렇지 않아도 문상객으로 가장한 조의금 탈취 사건이 끊이지 않는 판에 도둑으로 몰릴 수도 있고, 아무튼 이상한 사람으로 오인 받는 것은 자신에 대한 모독이라고 생각해 감히 엄두도 내지 못하는 것이다. 하지만 왜 그런 사람이 있지 않은가? 사람들은 대체로 이기적인데 간혹 어떤 사람은 이타성이 월등히 높은 사람도 있지 않은가? 시즈토가 그런 사람에 속하는 사람인 듯 싶다.  

그가 애도하는 방식은 오른손을 머리 위로 올렸다가 가슴 앞까지 내리고, 고개를 숙인 채 입술을 달싹거렸다고(49p), 마카노 고타로는 말한다. 보통 사람들과 조금 달라 보이기도 하지만 여느 사람의 그것과 그렇게 크게 다른 방식은 아닌 성 싶기도 하다. (정확히 보지 않았으니 뭐라고 얘기할 수도 없다.) 하지만 애도의 내용은 비교적 구체적이다. 누구를 사랑했습니까, 누구에게 사랑을 받았습니까, 어떤 일로 감사받았습니까 이것에 관한 주위 사람의 이야기를 듣고 애도를 하는 것이다. 그리고 더 중요한 것은 한번의 애도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를 잊지 않기 위해 메도를 하는 것이다. 그것은 그 사람이 누구건(살인자건, 살인을 당했건), 어떻게 죽었건(자살했건, 사고사건) 상관없이 똑같이 애도를 하는 것이다. 

사실 나도 아버지의 죽음을 계기로 슬픔을 당한 자를 열심히 위로하겠다고 다짐해 보기도 하지만, 남의 죽음의 소식을 접하는 건 아직도 익숙치 않다. 하지만 시즈토는 죽음의 소식이 들려올 때까지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더 적극적으로 그를 찾아 가고, 애도를 하는 것이다. 그렇게 매번 죽음의 소식을 접하면 그것도 굉장한 스트레스일 법도 한데 누가 뭐라던, 어떠한 오해를 받건 그 일을 묵묵히 하는 것이다. 그것도 처음엔 오해를 받았지만 차츰 알려지기 시작하니 그를 찾는 사람도 생겼고, 왜 우리는 애도해 주지 않냐고 항의하는 사람도 생겼다. 그 과정이 참 사실적이다.  

사실 이 작품은 쉽게 읽혀지지는 않는다. 결코 만만치 않은 두께이기도 하지만, 구성 또한 씨줄과 날줄로 엮은 것이 작가는 결코 쉽게 쓰고, 쉽게 읽히는 것을 용납하고 싶지 않았던 모양이다. 더구나 작품을 위해 작가는 하루에도 무수히 많이 쏟아지는 죽음의 소식을 채집하였을 것이다. 그것은 결코 유쾌한 소식은 아니다. 어쩌면 그리도 살인 당하는 사람이 많고, 사고로 죽는 사람이 많고, 동반 자살의 소식이 많은 것인가? 게다가 등장인물 3명의 삶도 하나 같이 그늘져 있고 그래서 읽는 독자로 하여금 우울하게 만든다. 그런 속에서 시즈토의 활약은 더욱 빛을 발하는지도 모르겠다. 세상에 어떤 풍파가 어떤 사람을 핥고 지나가도 그것에 평정심을 잃지 않고 묵묵히 애도만 한다. 이 세상 어디엔가 시즈토 같은 사람이 정말 있을 것만 같다. 그리고 있다면 위로가 되지 않을까? 

그래도 등잔 밑이 어둡다고, 시즈토는 다른 사람은 그렇게 애도하고 다니면서 정작 자신의 엄마가 다 죽어가는데 과연 그 엄마는 자식에게로부터 애도를 받을 수 있을런지 의문인 채 소설은 끝나고 있다. 그래도 준꼬는 죽어가는 나날 동안 아들을 이해하려고 애쓰는 장면에서 또 다른 진한 모성애를 느끼게 해 준다.    

작가는 왜 이 작품을 썼을까? 이 작품을 통해 무엇을 말하려고 했던 걸까? 우리가 죽은 사람을 두고 시즈토가 무수히도 많이 묻고 다녔을 그 질문을 해야하는 것은 망자를 잊지 않기 위함일 것이다. 어느 시인은 말했다. 이 세상에서 가장 슬픈 일은 내가 잊혀지는 것이라고. 그것은 병든 자나, 악한 자나, 속인이나, 범인이나 하나 같은 마음일 것이다. 이것을 안다면 세상을 악하게만 살 수 있을까? 어쩌면 작가는 사람의 가장 음습하고, 어두운 것을 통해 서로를 감싸주고, 치료해 주길 바랐던 것 같다. 어차피 세상은 우리가 바라던데로 밝고 따뜻하지마는 않으니 말이다. 

비록 읽기는 쉽지 않고 어찌보면 결미가 확실치 않은 열린 결말을 보여주고 있지만, 난 이렇게 죽음을 생각하고, 영원을 생각하게 만드는 소설이 좋다고 생각한다. 한번쯤 일독을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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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바보 노무현'은 우리가 있어 행복했을까?
    from 당신 덕분에 꽃이 핍니다♡ 2010-04-01 15:48 
    노무현 전 대통령이 자살을 하였습니다. 인권변호사로 80년대 사회에 나타나 민주화운동에 이어 정치개혁을 하다가 63세의 나이로 ‘부엉이 바위’에서 뛰어내린 노무현, 그의 죽음을 보면서 많은 사람들이 충격을 받았습니다. 전 대통령이 퇴임한지 1년여 만에 자살을 하는 한국, 지금 뭔가 크게 잘못 돌아가고 있습니다. 노무현 대통령을 좋아하던 사람들이 많습니다. 서민을 위하는 ‘바보 노무현’, 그가 펼친 정책들이 때론 반발도 낳고
 
 
 
캔들 플라워
김선우 지음 / 예담 / 201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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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이책의 해설을 맡았던 장정일씨의 말대로 처음에 나도 무슨 칙릿 소설인 줄 알았다. 그런데 아마도 90년대 초까지 우리나라 문학계에 유행하던 현실참여 문학과 그 후일담 문학 이후 다시 부활한 참여문학은 아닌가 싶다. 그때는 독재 정권을 타도하는 글들을 문학인 저마다 쏟아 냈었다. 그 시기는 정말 암담했었고 작가들 저마다 현실참여를 하고 있으니, 나 개인적으론 그 시기는 문학의 죽음의 시기는 아니었나 싶었다. 도무지 작가들이 그쪽 아니면 글을 쓰지 않았으니 말이다. 이 작품은 그때 이후 오랫만에 보는 현실참여 문학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은데 다들 이 작품의 출현을 신기하게 보는 것 같다. 이게 그렇게 신기하게 볼 일인가? 격세지감이란 느낌도 든다. 단지 다른 것이 있다면 그때의 현실 참여는 독재정권이지만, 지금의 현실 참여는 '쇠고기 파동' 즉 국민의 먹을 권리와 건강에 관한 것으로 옮겼다는 것이다. 

2008년 6월 10일. 나도 그밤 시청에 있었다. 왜 하필 그날이었을까? 그날은 6.10 항쟁 10주년 기념(이었나?) 해서 국민의 단합을 호소하는 의미에서 그랬을 것이다. 그도 지금 보면 격세지감이다. 예전의 데모는 '피끊는 외침' 또는 '연합의 힘'같은 거였는데, 이젠 과거의 힘을 빌어 하나의 상징이자 문화 행사로 옮겨간 느낌이다. 솔직히 나도 그날 그곳에 가봤지만 사람의 물결이란게 이런 거구나 싶었다. 아마도 멀리 공중에서 보면 물결이 흘러가고 있다고 생각할 것이다. 나 같은 경우는 참여라기 보단 사람 구경을 더하고 싶어서였는지도 모른다. 과연 신문이나 뉴스에서 보도된 것처럼 절박할까? 뭐 그런 걸 확인해 보고 싶었다고나 할까? 그런데 듣던 거 보다 그다지 절박하고 치열해 보이지는 않았다. 물대포나 최루탄을 쏜 흔적없이 비교적 질서있게 시위를 했던 것 같다. 물론 드문드문 절박하게 호소하는 사람도 있긴 했다. 하지만 포퍼먼스나 현장에 온만큼 구호 몇마디를 외치고 사람들은 삼삼오오 둘러앉아 그밤을 그저 즐기고 지키고 있었다. 오죽했으면 이래 가지고서야 청와대가 꼼짝이나 하려나 싶기도 했다. 예전을 생각해 보면 사람이 죽어 나갔다. 그러나 수입 쇠고기 반대를 위해 목숨을 바칠 정도는 아니다.  

난 그때 참 많이 혼란스러웠다. 정말 대통령이 그랬단 말인가? 예전에 고노무현 대통령 미워해서 언론이 원천 봉쇄하고 조작하기도 했다던데 뭐 그런 것과 같은 건 아닐까? 어떻게 한 나라의 대통령이 그 같은 일을 아무 생각없이 허락할 수 있을까? 이걸 허락했다면 배후에 무엇이 작용했길래 그랬을까? 내내 궁금했지만 높으신 분들이 하는 일을 나같이 초야에 묻혀 사는 사람이 어찌 알까 ? 속시원한 뭔가가 없어 답답하기만 했다.  

나 개인적으로 이 책은 좀 실망스러웠다. 제목이 약간은 생뚱맞아 별 기대는 하지 않았는데(표지도 마음에 안 든다.) 역시나 예감했던 것 이상의 새로움은 없었다. 적어도 작가라면 2008년 6월 10일을 새로운 시각 또는 우리가 잘 모르고 있던 일을 보여줘야 하는데, 별로 새롭다는 느낌이 들지 않는다. 그냥 덤덤하고 심지어는 너무 뻔해 보여 지루하기까지 했다. 솔직히 지오는 새로운 아이다. 지오를 통해 보는 2008년도의 우리나라에 대한 해석이 좀 새로워야 하는데 그다지 새롭지가 않다는 것이다. 우리는 잘 알고 있는 오늘날의 입시문제에 대해 지오가 알고 "어머, 너희들은 어떻게 그러고 살 수가 있니?"하는 식의 반응은 너무 상투적이지 않은가? 어떻게 우리가 잘 알고 있는 것을 그대로 투영하고 있는지. 한마디로 이펙트가 약해 보인다. 

이 책을 읽으면서 괜히 마음만 더 복잡해졌다. 정말 우리가 존경해 마지않는 대통령은 언제 나올 것인가? 국민이 이렇게 대통령을 행해 분노하고 있으니 앞으로 곧 머지않아 선출되는 대통령은 좀 더 똑똑하고 좋은 리더십을 가진 좋은 대통령이 나올 거라고 생각한다. 문득 작년에 봤던 영화<굿모닝 프레지던트>에서 장동건이 일본대사한테 주억거렸던 말이 생각난다. "한국 정부를 우습게 보지 마시오. 굴욕의 역사는 가지고 있을 망정 굴욕을 정치는 하지 않는다."고 했던가? 그건 정말 맞는 말이다. 나라의 지도자가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스스로 먼저 굴욕적일 필요는 없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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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로 이야기 3 - 세상 속으로
시모무라 고진 지음, 김욱 옮김 / 양철북 / 200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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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부터 3권으로 이루어진 <지로 이야기>를 얼마 전 완독했다. 대체로 두꺼운 책을 좋아하긴 하지만 지나치게 두꺼운 책은 나도 부담스럽다. 하지만 우연한 기회에 알게 된 이 책은 나름의 묘한 매력이 있었다. 두꺼운 1권의 읽기를 마쳤을 때 꼭 끝까지 완독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마침내 이렇게 완독했다.  

사실 이책은 원래 저자가 다 완성하지 못한 것으로 안다. 완성을 하기도 전에 죽었다고 한다. 그래서일까? 3권까지 읽었지만 완결 됐다는 느낌이 들지 않는다. 얘기는 아직도 더 남아 있는 것만 같은데 더 읽지 못하는 것이 아쉽다. 하긴, 인생에 완결이 어디 있겠는가? 

1권은 지로의 어렸을 이야기를 담고 있고, 2권은 청소년기를 거쳐, 3권에서는 청년기 우애숙이란 일종의 기숙 학원에서의 일을 그리고 있다. 읽기에 따라서는 지루할 수도 있다. 주로 지로의 생각등을 펼쳐 보이고 있으니까. 개인적으로 난 1권이 가장 재미있고 흥미로웠다. 각권마다 역시 인생의 각 시기의 독특한 면들이 잘 묘사가 되었다. 이를테면, 1권은 유년기를 다룬만큼 호기심과 장난기가 남겨있고, 2권은 사춘기의 반항심리를, 3권은 청년기의 끊는 혈기 같은 것이 느껴진다. 하지만 전편에 흐르는 지로는 행동보단 생각을 많이 하는 사람이란 생각이 든다. 무엇이 잘 사는 길인가 끊임없이 탐색하는 지로의 진지함이 사랑스럽다. 

저자는 일본의 전체주의 내지는 군국주의에 반항하고 일본을 계몽 하고자 자신의 자전적 소설을 썼다. 책의 강점은 무엇보다 솔직함에 있을 것이다. 인간은 한때 실수하고 좌충우돌할 수 있어도 진실을 찾아가야 한다는 것을 말해 주는 것 같다. 한 번 힘 쫙 빼고 그냥 편안한 마음으로 읽으면 소소하면서도 잔잔한 감동을 느낄 수 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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