新 황태자비 납치사건 - 개정판
김진명 지음 / 새움 / 201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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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까지 난 김진명 작가에 대한 묘한 편견이 있었다. 글쎄, 그냥 똑똑하고 글 잘 쓰는 작가에 대한 독자의 열등감 같은 거라고 해 두자. 아니면, 대중적으로 성공한 작가의 작품엔 문학성이 떨어질 거란 독자가 갖는 보수적인 편견 같은 게 있지 않나? 그런 것을 통해 독자라고 아무 작품이나 좋아하지 않는다는 걸 은근 과시하고 싶은 것인지도 모른다. 어쨌든 그게 맞는 생각이든 아니든, 김진명 작가는 매니아층이 두텁다는 것엔 이의를 달지 못할 것이다. 

 

이 책은 작가의 그러한 명성에도 불구하고 내가 처음 읽은 그의 첫 작품이다. 물론 이 책은 전에 한 번 나왔다가 이번에 개정판을 내면서 '신'이라는 글자를 달고 나왔다. 이 전의 책과 무엇이 다른지는 잘 모르겠지만, 읽으면서 '제법이다'하며 읽었다. 

 

무엇보다 문체가 쉬워 읽는데 부담이 없었다. 나이가 드니 머리 써 가면서, 앞뒤 문맥 따져가면서 읽는 책이 부담스러워 졌다. 더구나 추리 소설은 좀 그런 수고를 하게 만들지 않나? 몰랐던 새로운 사실을 양파껍질 벗기듯 알아 가는 재미도 있다지만 이쪽에 취약한 나는 꽤나 질기게도 추리 소설을 거부하며 책을 읽어 왔구나 싶다.

 

또한 쉬운 문체면서 논리가 정연하다. 물론 현실에 일어날 확률은 0.0001%도 안 되겠지만 일어날 수도 있다는 가상하에선 나름 설득력이 있어 보인다. 게다가 황태자비 납치 사건을 주도한 임선규는 또 얼마나 벗있는 사람인가!

 

처음 읽기 시작했을 땐 막연히 명성황후 시해 사건을 다룬 것인 줄만 알았다. 그런데 그것과 함께 중국의 난징대학살과 일본의 역사 교과서 왜곡 문제까지 다분히 일본의 사과과 시정을 촉구하는 국가적 대명제에 작가는 이 작품으로 보탠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이 책이 처음 나왔을 때 일본과 동시 출판을 하려했지만 일본 극우파에 의해 일본 출판이 저지됐다고 한다.

 

일본의 황태자비를 납치해서 일본의 사과를 받아내고 잘못된 역사관을 바로 잡겠다. 확실히 꼼수긴 꼼수다. 엔딩도 나름 만족스럽긴 하다. 그래서 이 작품은 다분히 계몽적이기도 하다. 그런데 좀 웃기다. 역사는 사실에 입각하면서 이렇게 살면 안 된다는 계몽적인 기능이 있으면 좋긴한데 왜 문학은 그러면 다소 김이 빠진다고 생각하는지 모르겠다. 솔직히 난 좀 그랬다. 하긴, 등장인물을 보면 하나 같이 모난 구석이 없다. 다 반듯하다.

 

하다못해 일본측 등장인물도 보면 그들이 역사 문제를 어떻게 생각하든 각자 맡은 일에 최선을 다한다. 우리나라가 쓴 만큼 어느 한구석 그래도 좀 나쁜 사람으로 그릴 법도한데 균형이라도 잡듯 반듯하다. 그리고 독자의 열망이 뭔지도 이미 너무도 잘 알고 있어 거기서 한치도 벗어나지 않는다. 그러니 계몽 문학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그런데 읽으면서 한편 드는 생각은, 지금의 일본 역사의 왜곡과 은폐가 우리나라도 똑같은 입장이라면 어떻게 했을까 생각해 본다. 솔직히 인정을 하고 사죄를 구했을까? 아니면 일본과 별반 다르지 않게 극우적 태도를 취했을까? 그건 아무래도 대대로 내려오는 민족성에서 찾을 수 있지 않을까 싶기도 하다.

 

알겠지만 우리나라의 역사는 정복의 역사가 아니다. 지키고, 보존하는 성향이 강한 민족이다. 누구는 왜 우리나라 민족성은 좀 정복하는 능동성을 갖지 못했냐고 불평할지 모르겠지만 난 우리나라가 정복과 찬탈의 역사가 아닌 것에 오히려 다행스러움을 느낌다. 물론 대신 같은 민족끼리 총부리를 겨누었던 질곡의 역사가 있었다는 것엔 다소 아픔이 있긴 하지만 말이다.

 

자기 나라의 역사를 있는 인정할 수 없는 민족에 내일이란 있을 수 없다는 그 말에 나는 백 번 동감한다. 우리나라나 중국이나 일본에 무엇을 크게 바라는 것도 아니지 않는가? 인정할 것 인정하고, 사죄할 것 사죄하면 그만이다. 어차피 이 세 나라는 동반자 관계를 구축하며 태평양 시대를 열어갈 중심축이지 않는가? 인정할 것을 인정하지 못하고, 사죄할 것을 사죄하지 못한다면 그 나라의 지도자는 얼마나 미성숙한 사람들인가? 나라를 대표하는 지도자가 이 모양인데 그 나라 국민들이 지도자의 무엇을 보며 한 나라의 국민으로 살아갈 수 있겠는가? 

 

더구나 자라나는 다음 세대는 과연 자기네 나라가 전혀 남의 나라에 해코지한 적이 없는 깨끗하고 양심 바른 나라라고 정말 굳게 믿고 살아갈 수 있을까? 한 가정의 부모도 자식들에게 잘못한 것이 있으면 즉각 사과해야 하는 거라고 올바로 가르치지 않는가? 적어도 그들은 그렇게 믿고 살아간다고 해도 다른 나리 민족의 아이가 그것을 건드린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개미가 뚫어놓은 구멍 하나가 둑을 무너트린다고 그게 그냥 아이들 싸움으로 끝날 수 있을까?

 

세계가 남의 나라 역사를 바라보는 관점도 그렇다. 일본이 우리나라 보다 강대국이어서 일본에 유리한 시각으로 역사를 바라본다면 그건 올바른 세계사는 아닐 것이다. 물론 역사적으로 일본과 우리나라가 적대적이었던 것은 사실이나 그것 때문에 흠집을 내려고 이러는 것이 아니지 않는가? 어느 나라나 부끄러운 역사는 있다. 단지 우리 다음 세대엔 이런 부끄러운 역사들 물려주지 않기 위해 역사는 바로 씌어야 한다.

 

또한 일본 모두가 우파적인 것은 아니다. 소수긴 하지만 자신의 나라 조상이 지은 죄를 대신 참회하고 역사를 바로 하려고 하는 성숙한 사람들이 있다. 난 그들의 참회와 노력이 헛되지 않았으면 좋겠다. 다수가 그럴 때 소신을 지켜내기란 또 얼마나 어렵고 힘든 일인가?

 

앞서 일본의 지도자 얘기를 했지만, 소설의 일본 황태자비와 지금의 황태자비는 얼마나 다른 것인지 생각해 본다. 적어도 지금의 일본 황태자비도 알고는 있지 않을까? 자기네 나라 극우파들이 얼마나 역사를 왜곡시키려 하는지를. 하지만 나라를 대표하고 말 한마디 잘못했다 황실에서 쫓겨나는 수모를 견디느니 입을 다물고 있는 것은 아닐까?

 

그래도 진실은 언제나 정의 편이다. 정의가 살아 있는한 진실은 피를 흘릴지라도 승리할 것이다. 진실이 언제 행복하게 미소짓고 있는 거 봤나? 

 

이 작품은 영화나 드라마로 만들어도 좋을 것 같다 계몽적이라고 해서 재미가 없는 건 아니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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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들의 감동은 위험하다
이정서 지음 / 새움 / 201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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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고 보니 기억이 난다. 표절 문제야 어제 오늘의 문제가 아니지만  그럼에도 특별히 그 문제가 주목을 받았던 건 명망 있는 교수가 그렇게 했다는 점과 그 교수의 직속 제자가 문제를 제기했다는 점에서 큰 반향을 일으켰던 것으로 알고 있다. 

 

말하기 좋아하는 사람들이야 판도라의 상자를 열었다는 둥, 요즘이 어떤 세댄데 도제냐며 사제 카르텔을 비판했을 것이다. 그리고 좀 심하면 그 스승에 그 제자라며 한꺼번에 싸잡아 양비론으로 몰아가기도 했을 것이다.  

 

 그런데 이제와 그 이야기가 소설로 나왔다. 하지만 솔직히 그 이야기를 자세히 알 수 있게 되서 반갑다기 보단 그냥 새삼스럽다는 생각이 더 드는 건 왜 일까? 새삼스럽다는 건 새롭지 않다는 얘기다. 그도 그럴 것이, 앞서도 얘기했지만 표절이 어제 오늘의 얘기가 아니라는 게 첫째 이유일 것이다. 우리는 이미 '표절 공화국'이란 오명을 쓰고 있다. 너무 빈번하니 면역이 생겨 이젠 그러려니 할 정도다. 그러니 이 이야기가 뭐 그리 새롭겠는가?

 

그리고 검색을 해 보니 이 책은 이번에 처음 나온 것도 아니었다. 2001년도에 작가는 다른데 똑같은 제목의 책이 같은 출판사에서 나왔다. 목차가 조금 다르긴 한데 이번에 작가를 달리하면서 내용은 그대로 전승하는 (이런 경우가 이전에도 있었는지 모르겠지만) 방식으로 나온 모양이다.

 

그렇게 되고 보니 난 책 내용의 전말 보다 오히려 이 책의 출판 과정이 더 궁금해졌다. 책에 대한 설명이 더 붙어줘야 할 것 같은데 왜 내용에 대한 설명만 있지 출판 과정에 대한 설명은 없었던 걸까? 그렇다면 2001년 판의 작가와 이 책의 작가가 필명을 쓴 동일 인물인가? 아니면 다른 인물일까? 만일 서로 다른 인물이라면 판권을 이양하는 과정에서 모든 것을 확실히 한 건가? 아니면 동일 인물인 경우 독자를 혼란케한 건 무엇으로 설명할 것인가? 이를두고, 자라 보고 놀란 가슴 솥뚜껑 보고 놀란다고 할 텐가? 아쉬운 건 아니지만 좀 불친절하다는 인상은 지울 수가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이 책을 읽어 볼 생각을 한 건, 나야 작가들 그리고 그들과 관련된 사람들, 사고와 사건들에 대해 흥미를 가지고 있는지라 책이 나온 김에 한 번 읽어 보자는 생각에서였다. 솔직히 세간들의 세치 혀야 다들 거기서 거기 아니겠는가? 그나마 그때 이 필화사건을 전달해 준 나의 후배 역시 사제 카르텔과 도제에 대해 비판을 했고, 난 누군지 모르지만 판도라의 상자를 열었다는 말로 접수된 사안을 마무리했던 걸로 기억한다. 

 

하지만 그때 난 무슨 생각으로 이 사건을 판도라의 상자에 비유했던 걸까?진정 판도라의 상자였다면 이 사건을 통해 더 좋은 결과를 가져 왔거나, 더 안 좋은 결과를 가져왔거나 둘 중의 하나였을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언론을 통해 보도만 됐을 뿐 이후 이 사건이 어떻게 마무리 됐고, 대중과 역사 속에 잊혀져 갔는지 알지 못했다. 그렇다면 이 판도라의 상자라는 것도 반쪽짜리에 지나지 않거나 판도라의 상자라고 이름 붙여도 되는 것인지에 대해서도 확신할 수 없게 되어버렸다. 그런데 그때 그 잊혀진 사건을 지금에서야 자세히 알 수 있게 되었으니 당연 궁금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 책의 내용은 그런 것이다. 우리 사회에서 인맥이 중요하듯 학계 역시 학맥이 중요할 터. 그런데 자신의 학문의 '아버지'라 할 수 있는 스승이 논문을 표절 했다는 사실을 언론을 통해 폭로 된다. 그랬을 때 주위의 반응들, 폭로 당사자인 이명서의 행보와 언론이 이 사건을 어떻게 몰아 가는가를 나름 밀도있게 보여준다.

 

솔직히 이런 사건에서 짐작될 수 있는 건 굳이 책을 보지 않더라도 가능하다. 같은 테두리 안에 있으면서 특별한 관련이 없는 사람은 점잖은 체면에 기대어 폭로한 당사자 앞에서는 용기를 칭찬하지만 그 마음엔 이미 그를 적색분자로 찍어 놓을 것이다. 그래서 경계를 하기도 하고 언제 어디서든 나에게 위해를 가할 수도 있다고 가늠하기도 할 것이다. 또 누구는 시쳇말로 '그런 찐따 같은 짓'은 왜 하냐며 비판을 할 것이다. 왜냐하면 미운털이 박혀 좋을 것이 없기 때문에. 그래서 시끄러워지는 것이 싫고 그러다 불똥이 자신에게로 튄다던지 아니면 애매한 사람이 역적으로 몰릴 수도 있으니 정의는 좋은 것이긴 하지만 들쑤시고 파서 좋을 일이 없는 것이다. 또한 책에서처럼 제자가 스승을 친 것이니 이것은 명백한 하극상으로도 볼 수 있다. 하극상을 용납할 사람은 아무도 없다. 또 누구는 쌍수를 들어 환영해 마지않을 수 있는데 그게 도덕적 기준이 아닌 이해관계 때문이라면? 이 모든 것들이 책에도 일부 표현이 되고 있다. 

 

무엇보다 폭로자는 죄인 아닌 죄인이 된다. 또한 이럴 경우 내부고발자의 신변의 안전을 보장할 수 없다. 그들에 대한 법적 보호 장치가 없진 않겠지만 그것이 얼마나 적극적인지는 미지수다. 그렇다고 해서 언제까지나 표절 문제를 좌시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것이 꼭 이 책에서 다루는 학계뿐 아니라 모든 분야에서 표절은 그 분야의 발전을 저해할뿐 아니라 무엇보다 도덕과 양심의 문제인 것이다. 물론 여기엔 무엇을 표절로 볼 것이냐는 기준이 복잡하고, 많은 어려움이 따르긴 한다. 하지만 책에서처럼 스승은 자신이 표절했음을 아주 간략하면서도 순순히 인정한다. 

 

이렇게 본인도 인정하는 명백한 표절을 왜 하는 것일까? 이 책을 읽으면서 질문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것이 어느 특정인에게만 적용되는 사안이라고 누가 감히 말할 수 있을까? 그건 어느 누구라도 심지어 나에게도 그런 마음은 언제고 도사릴 수 있다. 책에서 '현해탄 콤플렉스'를 지적하기도 했지만, 좋아하면 닮는다고 그것이 병적으로 지나치면 어느 새 내 것과 남의 것의 구분이 모호해져 남의 것도 나의 것으로 오인하는 우를 범하기 때문은 아닐까?      

 

또한 아무리 현해탄 콤플렉스라고 해도 왜 표절을 할 생각을 했을까이다. 나름 우리나라에 대학자라 할 수 있는 사람이 자기 생에 왜 그런 오점을 남겼던 것일까? 그냥 보통의 사람이 표절한 것과 그런 명망 있는 학자가 표절은 같은 것이라고는 하나 달라 보인다. 하지만 인간의 온정적이고도 객관성을 유지하려고 하는 성향들이 그것을 덮게 마련이다. 그럴 경우 아무리 명망있는 사람이라도 그도 한 인간임을 보여 준다는 쪽으로 기울고, 그동안 쌓아 온 공적이 그 표절 하나로 무로 돌릴 수 없으며, 시간이 지나면 묻혀진다는 것으로 흘러가는 것이다. 그리고 보라. 그것을 증명이라도 하듯 김윤식 교수는 그 이후에도 여전히 학자로써 자신의 소임을 다해 오늘 날까지 이르고 있지 않은가? 그렇다면 무엇이 달라졌다는 말인가?

 

그럴 경우 종국엔 이명서를 어떻게 볼 것인가로 귀결이 될 수 있겠다. 과연 그가 정말 하극상을 보인 인물이라 할 수 있을까? 우리가 아는대로 이명서의 실제 모델은 <타는 혀>란 평론집을 낸 이명원이다. 그는 그 평론집을 통해 김윤식뿐 아니라 당대 유명한 학자들의 논문의 오류를 바로잡고 비판을 가해 유명해진 사람이다. 솔직히 나는 (아직)<타는 혀>를 읽지 못해 무슨 오류를 어떤 식으로 바로 잡았는지 또한 그것이 얼마만한 가치가 있는지 알지 못한다. 하지만 분명 보수적인 우리나라 학풍에 적지 않은 진보를 가져왔을 것이란 건 쉽게 짐작할 수 있을 것 같다. 솔직히 우리나라 학풍이라는 것이 너무 편향적인데다 다양한 스펙트럼이 존재하기 어렵기 때문에 발전이 늦거나 어려운 실정 아닌가?

 

그는 지금 어떻게 살아가고 있을까? 뭐 나름 집필 활동도 하고 열심히 살아가고 있는 것 같긴한데, 그때 자신이 한 일을 지금은 어떻게 생각할까? 김윤식 교수와는 어떻게 지낼까? 조금은 궁금해진다. 솔직히 난 이 책을 읽었을 때 김윤식 교수의 자서전 내지는 회고록을 읽어 봤으면 하는 바램이 있었다(아쉽게도 아직은 그의 자서전이나 회고록이 나오지 않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 그리고 그는 그때를 어떻게 회고하는지 알고 싶어졌다. 처녀가 애를 베도 할 말은 있다는데 그도 왜 표절을 했는지 이유는 있을 것 아닌가? 과연 '현해탄 콤플렉스'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을까?

 

사실 이 책은 나름 탄탄한 구성을 가지고 있긴 하지만 아쉽게도 독자를 만족시키기엔 다소 부족해 보인다. 물론 한때 이런 일이 있었다는 주위를 환기시키는 정도라면 그도 읽어 볼만하긴 하다. 하지만 이 책의 초판이 나오고도 십 수년이 흘렀다. 그동안 표절은 너무나 익숙한 단어가 되어버렸기 때문에 (앞서도 얘기했지만)새롭지가 않다. 차라리 그 사건의 후일담을 보는 거였다면 좀 더 낫지 않았을까?(이렇게 작가를 달리해서 나온 책이라면 말이다.) 굳이 프란츠 카프카의 말을 인용하지 않더라도 책이 새롭지 않다면 우리가 뭐 때문에 그 책을 읽어야 한단 말인가?

 

소설은 분명 허구라고 배웠는데 '논픽션 소설'이란 장르가 있는지 모르겠지만 꼭 그렇게 읽히는 것만 같다. 그래도 소설은 소설이다. 글쎄, 너무 드라마에 익숙한 탓일지는 모르겠는데 나는 소설에서 드라마적 요소를 최대한 억제하고 온전히 이명서와 김윤식의 이야기로 채워갔더라면 좋지 않았을까 싶었다. 그것이 비록 허구고, 상상일지라도 말이다. 국민의 알 권리. 대중의 알 권리. 시청자의 알 권리는 그토록 외치면서 왜 정작 문학에 있어서 독자의 알 권리는 이리도 빈약한 것인가? 소설은 허구라고 합리화 시키면서 말이다. (어설픈)열린 결말이 소설가가 할 수 있는 전부라며 나머지는 독자의 상상에 맡기겠다면 그건 겸손일까? 직무를 유기하는 것이 되는 것일까?        

 

아무리 소설의 위기를 논해도 소설은 살아 남았다. 이젠 그것의 위기를 말하는 것은 시대착오라고도 얘기한다. 그처럼 소설은 앞으로 영원히 종언을 고하지 않고 살아 남을 거라고 말한다. 나 역시도 그것에 동감하고 앞으로 꼭 그렇게 해 주기를 간절히 바란다. 그러나 현실은 냉정하다. 소설을 읽지 않는 사람이 소설을 읽는 사람 보다 압도적으로 많다. 그나마 드라마는 진화의 진화를 거듭해 소설을 읽지 않을 확률을 더욱 높이고 있다. 

 

나에게 두 가지 질문을 한다면, 이를테면 왜 소설을 읽느냐는 질문과 왜 소설을 읽지 않냐고 묻는다면(이런 상반된 질문을 동시에 받을 리 없지만) 나는 한 가지로 대답할 수 있다. 그것은 인간의 진실이다. 왜 그 소설을 읽느냐고 하면 소설이 허구이긴 하지만 인간의 진실을 담고 있기 때문이고, 왜 소설을 읽지 않느냐고 묻는다면 인간의 진실이 없기 때문이라고 말할 것이다. 그리고 나는 읽는 행위가 전자에 속한다면 고전을 읽고 있을 확률이 높고, 후자라면 요즘의 영혼없는 소설들에 실망했기 때문이다. 

 

소설엔 반드시 문제를 다루는 작가의 해석 내지는 혜안이 필요하다. 이 작품은 문제를 다루는 사안만 있지 작가 고유의 해석이 뚜렷하게 보이지 않고 있어 아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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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노래 2014-03-25 17: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허구인 소설이라도 다 아니까 두 분 이름을 고스란히 써도 되었을 텐데요.
지난날 그 사건을 실시간으로 읽고 들었던 사람 가운데 하나로서
참말 '새삼스럽지 않구나' 하고 저도 똑같이 느낍니다.

표절공화국이라기보다
'도둑나라'가 아닐까 싶어요.
여기저기 다들 '도둑'이니까요...

오랜만이셔요.
봄날 즐겁게 봄내음 누리셔요~

stella.K 2014-03-25 18:05   좋아요 0 | URL
그러게요. 님도 잘 계시죠?
거기 고성은 봄이 한껏이겠습니다.
이쪽은 봄이라고 해도 아직은 좀 덜 영근 느낌이라고나 할까요?
님한테서 이 이야기를 들었으면 더 리얼했겠습니다.
고맙습니다.^^
 
열세 번째 배심원
아시베 다쿠 지음, 김수현 옮김 / 디앤씨미디어(주)(D&C미디어) / 201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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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에 장르소설을 읽었다.

아니 어쩌면 오랜만이랄 것도 없다. 다른 책에 밀려 나는 장르소설은 웬만해선 읽는 법이 없으니까.

그러니까 또 이 책은 웬만하다는 얘기일 수도 있겠다. 웬만해서 잘 안 읽는 나에게 읽어 볼 생각을 하게 했으니 말이다.

표지도 그렇고, 작년에 봤던 법정을 소재로한 드라마 <너의 목소리가 들려>를 재밌게 본지라 기대하고 본 책이다. 하지만 결론부터 얘기하자면, 기대가 너무 컸던 걸까? 기대한 것만큼은 만족은 주지 못한 것 같다.

초반 소설의 얼개는 다소 황당하지만 그런대로 잘 짜여졌다는 생각은 든다. 하지만 중반을 넘어가면서 영 무슨 소리를 하는 건지 그 중심이 모호해지는 느낌이다. 

주인공이 다카미 료이치 같기도 한데 그렇다면 그가 힘있게 소설을 끝까지 이끌어 갈 수 있어야 했던 것은 아닐까?

주인공이 이 사람인가 싶다가도 문제를 해결하는 사람은 따로 있었다. 변호사 모리에. 물론 주인공이 꼭 하나일 필요는 없겠지만 도대체 이 사람이 하는 일이 뭔지가 잘 와 닿지 않았다. 물론 이 사람의 과제가 없는 것은 아니다. 문제는 배심원들을 설득해야 하는 것인데 그 설득력이 약하지 않나 하는 것이다.

소설 속 배심원의 설득은 또한 독자들의 설득으로 이어질 수 있을 것이다. 이 작품은 이미 어느 정도 성공을 입증한 것 같긴 하다만, 나 같은 벽창호는 뭐가 뭔지 통 감이 와닿질 않는다.  

가끔 보는 법정 드라마를 보면 판사든, 변호사든 법정 변론을 하다 결국 마지막 최후변론에선 감성에 호소하는 것을 볼 수가 있는데, 그런 인간적인 설득과 마무리가 이 작품에 있었는지 나는 잘 모르겠다. 물론 꼭 있어야 하는 건 아닐테지만 그래도 이 작품이 의도한 바가 있다면 어쨌거나 나름의 설득력은 가지고 있어야 하지 않을까?

그도 그럴 것이, 이 책의 저자 자체가 너무 현실감 없는 도입을 감행했기 때문에 어느 부분에서 설득의 힘을 줬는지 독자로선 알 길이 없다.

물론 흔히 장르에서 보여지는 그 놈의 '트릭'이라는 것만 가지고 얘기를 하자면 난 할 말이 없다. 그것도 트릭이라면 트릭일테니까.

하지만 이제까지 있어 오지 않았던 일번 사법에 배심원제의 도입을 위해 이 소설을 썼다면 없는 사실에만 얘기할 것이 아니라 있어야만 하는 설득이 있어야 하는 것이 아닌가? 

즉 작가의 논점은 다른 민주주의를 표방하는 나라에선 배심원제도가 있는데, 일본은 없다는 것을 부각시키기 위해 이 소설을 쓴 것이 아닌가?

이것은 우리나라도 다르지 않아 보인다. 최근 우리나라에 시민 참여재판이란 게 생겼는데 그것이 바로 배심원제도인 줄 알고 있다. 나는 그런 게 생겨 내심 좋아했는데 얼마 전 친구에게 들으니 그렇게 참여는 할 수 있어도 그것이 실제 재판에 영향을 미치는 것은 아니란다. 그냥 일종의 참고는 할 수 있어도 최종 구형에선 어떤 영향도 미치지 않는다는 것이다. 

글쎄 시범 단계라 그럴 수도 있겠고, 결국 법조인들이 그리 호락호락 그런 자리를 쉽게 시민에게 내어줄리 없을 테니 어쨌거나 그 친구의 말이 틀리지는 않을 것이다. 

나는 여기서 작가가 할 수 있는 일을 본다.

일본이나 우리나라나 분명 법조인들도 정의를 위해 일하고, 배심원제의 중요성을 인식하는 사람들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차마 자신들이 나서지 못하는 일을 작가는 여러 가지 취재와 문학적 소양으로 그것을 형상화 낼 수 있다. 또한 그럼으로 일반인(독자)의 관심을 끌어낼 수 있다. 

그런 점에서는 이 작가는 앞선 의식으로 독자의 관심을 끌기에 충분했다고 본다. 이렇게 작가는 사회의 관심을 이끌어낼 수 있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 작품이 이루어낸 성과는 충분하다고 생각한다. 이 분야에서 좀 더 좋은 작품들이 많이 나오길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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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크pek0501 2014-03-01 14: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배심원제도가 있는 나라의 영화를 볼 때 부럽더라고요.
아무리 법 공부를 많이 한 법조인들이라고 해도 주관성을 완전히 배제하지는 못할 터이니
그런 제도가 필요한 게 아닐까 싶었어요.
누구나 자신이 살아온 삶으로부터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으니까 주관성이란 게
있기 마련일 텐데요. 그래서 객관성 확보를 위해 사람 수가 많은 게 낫지 않을까 하는 것이고,
다양한 종류의 직업의 사람들이라는 것도 장점일 수 있고요.

저는 글을 읽고 거의 공감을 누르는데요, 그 이유는 제가 알고 지내는 블로거들 대부분이 글을 잘 쓴다고 생각해서죠. ^^

stella.K 2014-03-01 15:51   좋아요 0 | URL
아유, 무슨 과찬의 말씀을...ㅠ
솔직히 내용을 다 이해하고 있는 게 아니라 리뷰를 쓰기가
좀 막막 하더라구요.
그래도 상 받고 하는 거 보면 저도 글 쓰는데 조금 용기를 내도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해요. 실은 하나도 못 쓰면서...ㅋㅋㅋ
암튼 저도 언제고 국민 참여 재판이란 거 함 해봤으면 좋겠어요.
우리나라에 배심원 제도가 잘 정착됐으면 좋겠구요.^^
 
마부 러시아 고전산책 6
막심 고리키 지음, 이수경 옮김 / 작가정신 / 201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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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을 생각만큼 그렇게 많이 읽는 것은 아니지만 읽는다 해도 왠지 러시아 작가들의 작품에 선듯 손이 가지는 않았다. 

러시아 작가라야 톨스토이나 도스토옙스키 정도일텐데, 나는 이들의 작품을 한번도 흡족한 마음으로 읽어보지 못했다. 두껍기는 왜 이리 두껍고, 관념적이기는 왜 이리 관념적인가? 그래도 고전을 읽어야 한다는 강박에 꾸역꾸역 읽은 기억 밖에는 나지않는다.

때론 고전을 읽어야 한다는 이유만으로 과연 이렇게 어려운 작가들의 작품을 읽어야 하는 것일까? 남몰래 회의가 들기도 했다. 그래도 남들 앞에서는 고전은 좋은 거라고 떠들었겠지. 

 

꾸준히 책을 손에서 놓지 않은 덕에, 우리가 이해할 수 있고, 재미만을 위해 소설을 읽는다면 그건 책 읽는 자의 자세에 온전히 이르지 못한 것. 이라고 이제는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물론 그나마 그것을 위해서도 책을 읽지 않은 자는 또 얼마나 많은가? 하지만 또 그럴 바엔 TV 드라마를 보는 것이 낫지 않을까?

 

요즘 소설의 흐름이 어떤지 알 수가 없다. 워낙에 다양해 뭐라고 꼭 집어 말하기도 어렵지 않을까? 하지만 한 가지 말할 수 있다면, 소설은 언제부턴가 신에 대해 말하지 않고, 인간의 도덕이나 규범에 대해 말하지 않게 된 것 같다. 대신 인간의 욕망이나 관계 또는 실존과 군상에 대해 무수히 많은 말을 하지 않았을까?  

 

그런데 나는 이 책 막심 고리키의 '마부'를 읽었을 때야 비로소 러시아 문학의 위대함에 눈을 뜨기 시작하는 것 같았다.  위대함이란 표현이 낮간지러울까? 다른 나라의 다른 작품도 위대한 작품이 많은데 굳이 러시아 문학에 그런 형용사를 쓴다는 건 형평성에 위배되는 거라고 태클을 걸 사람이 있을까? 무엇보다 내가 러시아 문학을 알면 얼마나 안다고 위대함을 논할까? 그냥 러시아 문학이 내가 읽어 온 다른 문학에 비해 다른 점을 발견하기 시작했다고 해 두자.

 

그것은 이를테면 그런 것이다. 러시아 문학은 신에게 묻고 있다는 것이고, 인간의 도덕과 규범에 대해 어떤 식으로든 끊임없이 말하고자 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것은 현대의 포스트 모던한 세대에선 얼마나 고리타분한 주제인가? 하지만 그러므로 인간을 말하려 했다는 것이 러시아 문학이 지닌 강점은 아닌가 싶기도 하다. 그런 건 러시아 문학이 아니면 물어질 수 없는 것이니까.

우리가 읽은 '부활'을 생각해 보고, '죄와벌'을 생각해 보라. 그런 것이 읽혀지지 않는지. 그리고 그것을 이 책에서도 읽을 수 있는 것이다.

 

작가는 본명을 두고도 '막심 고리키'란 필명을 사용했다고 한다. 그리고 그 이름이 뜻하는 바는 '극단의 고통'이라고 한다. 아, 어쩌자고 그런 이름을 사용할 생각을 했을까? 그만큼 그의 삶이 고단했다고 한다.

하지만 내가 이 책을 읽어 본 바에 의하면, 그의 단편들은 대체로 밝은 느낌이었고, 생을 긍정하도록 만드는 요소들을 많이 발견할 수 있어 좋았다고 생각한다. 그러니 굳이 이름과 연결시킨다면 '극단의 고통'이란 어울리지 않는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사실 삶이란 한 가지로만 말할 수 없는 경우가 많다. 예를들면, 이 책에 나오는 '파란 눈의 여인' 같은 경우, 그의 시대 러시아는 공창 제도가 아직 있던 때였나 보다. 허가만 받으면 누구든 직업적으로 '그 일'을 할 수 있다. 그러니 도덕적으로 비난할 수도 없을 것이다. 하지만 공창이든, 사창이든 직업적으로 몸을 판다는 건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최하층 직업군의 하나고 비난 받는다. 그것을 이야기 속에 나오는 경찰서장을 통해 얼마나 적나라하게 표현되는가? 하지만 나중엔 그 파란 눈의 여인을 따뜻한 시선으로 보고자 하는 경찰서장의 또 다른 시선을 보여준다. 

 

요즘 상업주의에 밀려 사람의 몸이 성적 쾌락의 도구로 전락한지 오래다. 오늘 날의 문학은 바로 이 인간의 몸과 쾌락이 화두가 되기도 한다. 하지만, 예전에 이건 생존을 위한 마지막 보루와 같은 것이었다. 그래서 이것에 대해 쉽게 뭐라고 하는 것은 옳지가 않다. 물론 과연 이 시대에 생존을 위해 몸을 파는 사람이 얼마나 있을지 모르겠지만, 쉬운 비난 보단 어려운 시대일수록 서로를 이해하고 보듬어 안는 시선이 더 필요한 건 말할 것도 없을 것이다.            

또한 이런 작가의 시선은 그 뒤에 나오는 '아쿨리나 할머니'에서도 같은 각도로 볼 수가 있는데, 두이야기의 교훈은 오늘 날에도 똑같이 적용될 것이다. 즉, 사람을 쉽게 판단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인간의 규범에 관한 물음은 표제작인 '마부'나 '환상' 같은 작품에서 잘 나와 있다다. 특히 '마부'에서 파벨 니콜라예비치는 사람을 죽이고 돈을 갈취해 훗날 시장이 된다. 하지만 자신이 사람을 죽였다는 것에 전혀 죄책감을 느끼지 못하는 자신에 대해 오히려 절망하는 장면은 마치 도스토옙스크의 <죄와 벌>의 한 장면을 연상케 한다. 그러면서 작가는 주인공을 통해 직접 묻는다. '내 안에 내적 규범이 있는가, 없는가?'를. 그것을 읽는 순간 나는 뭔가에 얻어 맞은 듯 띵했다. 과연 요즘 작가들 중에 이것을 이렇게 대놓고 묻는 작가가 있었는가? 이것을 묻는 건 또 얼마나 뜬금없는가? 하지만 이 뜬금없는 세상에 오히려 더 물어야 하는 것 아닌가?

 

그나마 주인공은 사람을 죽이고 그 돈으로 시장이 되겠다는 포부라도 있었지. 묻지 마 범죄가 성행하는 오늘 날의 세상에서 정말 규범이 없어진 것에 대해 인간의 사고는 마비가 된 듯하다. 이런 세상에 왜 작가는 직접적이고도 강력하게 묻지 못하는가? 작가의 사명은 이런 것에 있지 않을까?잊혀진 질문에 대해 묻는 것 말이다.

그런데 그것은 또 주인공의 꿈을 빌어 서술되고 있다. 읽고나면 또 한 번 뒤통수를 맞는 느낌인데 그래서 이 작품은 환상 문학의 범주에 들어갈 수 있고, 과연 그 서사가 대단하다 싶다.

 

작가는 확실히 글발이 대단하다. 특히 '지난해는 자신의 생의 마지막 날...'로 시작해서 '......이미 새로운 해의 옷으로 갈아입은 지난해만이 홀로 남아 있다. 그리고 진리가 남았는데 그녀는 언제 어디서나 영원한 꼴찌였다!'(167~173p)로 끝나는 '지난해'는 우리가 삶을 어떻게 살고 있는가를 돌아보게 해 주는 가히 독특하고도 놀라운 은유를 담고 있는 작품이라고 생각한다. 

또한 더불어 '시간'이란 작품은 에세이 소설의 전범을 따르고 있다고 볼 수 있을 것 같은데, 흘러가는 시간 속에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를 다시금 돌아보게 만드는 뭔가의 웅변이 느껴졌다.

 

이 책에 실린 작품들은 하나 같이 매력적인 작품들이다.

사담이긴 한데, 책을 읽다보면 작가가 살았던 시대엔 러시아에도 새벽 예배가 있었나 보다. 이 새벽 예배는 우리나라에만 있는 기독교 전통인 줄 알았는데 러시아에도 있었다니 새삼 놀랍기도 했다. 가끔 러시아 선교사한테서 들으면 그 나라는 신앙의 불모지처럼 전해지고 있는데 언제 다시 러시아의 부흥이 있을까? 아득한 느낌이 들기도 한다.   

 

초두에도 그런 얘기를 했지만, 난 이 책으로 인해 러시아 문학에 한 발 다가선 것 같아 뿌듯한 느낌이었다. 나 같이 러시아 문학에 다가서는데 왠지 모를 부담이 있다면 이 작품으로 시작해 보는 것은 어떨까 감히 권해 본다. 새해 벽두에 아주 좋은 작품으로 시작한 것 같아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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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노래 2014-01-09 16: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최하층 직업인 그 여자들한테 찾아가는 사람들,
사내들도 '최하층'인 사람들일 테지요.

stella.K 2014-01-10 11:26   좋아요 0 | URL
그러게요. 이상한 건 창녀는 사회적으로 잘 알려져 있으면서
그 반대인 남창은 잘 다루지 않는다는 것도 저로선 잘 이해가
안 될 때가 있어요.
뭐 그만큼 이 사회는 남자가 꽉잡고 있다는 뜻일테지만.ㅋ

카스피 2014-01-09 18: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러시아문학을 읽기 시작하셨네요.고리키는 공산주의 리얼리즘 문학을 창조한 분으로 소련 문학 발전에 큰 영향을 끼친 분이죠.
그나저나 늦었지만 스텔라님 새해 복많이 받으셔요^O^

stella.K 2014-01-10 11:29   좋아요 0 | URL
오, 오랜만이어요, 카스피님!
카스피님이 러시아 문학에 관심이 많은 줄 몰랐어요.
저는 막심 고리키는 이 책이 첨인데 좋아어요.
님도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페크pek0501 2014-01-15 13: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어찌된 일인지 처음 문학을 공부하기 시작했을 때, 막심 고리끼, 고골리, 도스토예프스키, 톨스토이의 작품부터 읽었어요. 제가 수강한 어느 문학 강의에선 그런 것 가지고 수업을 하기도 했지요.
<죄와 벌>이 그렇게 재밌는지도 처음 알 때여서 경이로웠어요.
막심 고리끼의 <나의 문학 수업>을 읽기도 했죠. 고리끼의 수준으로 글을 쓸 것도 아닌데...
지금 생각하면 에세이 중에서 쉽게 쓴 에세이부터 읽어야 했던 게 아닐까 싶어요.

새해, 서재의 번창을 기원합니다. ^^

stella.K 2014-01-15 15:56   좋아요 0 | URL
그러셨군요. 저는 이 책 덕분에 러시아 문학이 쫌 좋아졌어요.

근데 언니, 올해도 저의 서재는 별로 번창할 것 같지 않아요.
며칠째 제 서재에 들어오면 1이었어요. 그나마 언니가 빌어주셔서 그런가요?
그나마 지금은 9네요.ㅎㅎ
 
[세트] 이중섭 - 전2권
최문희 지음 / 다산책방 / 2013년 11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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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중섭을 모르는 사람이 있을까? 

중학교 몇 학년이더라? 미술 교과서에 실린 그의 그림 몇 점. 특히 그의 그림 황소는 너무 어리고, 미술에 식견이 없어서일까? 그 그림을 보고도 나는 뭐라 할 말이 없었다. 분명 강렬한 느낌이긴 한데 그것 외에는 말로 표현할 수 없었다. 왜 그는 그리도 소를 좋아했던 것일까? 

 

솔직히 나는 화가 이중섭을 알게된 후에도 그가 무엇을 즐겨 그렸는지에 관해서는 그다지 관심이 없었던 것도 같다. 물론 그가 그린 황소는 하도 이미지가 강렬해 잊을래야 잊을 수도 없겠지만, 그 보다 나는 그의 죽음이 더 깊은 인상을 받았다. 그 시절 미술 선생님으로부터 그가 짧은 생애를 살다 갔으며, 죽을 때 담배를 피우며 그림을 그리다 앉은 자리에서 담뱃재를 떨구며 죽었다고 들었으니까.진정 화가다운 죽음 아닌가? 자기 일을 좋아해 그 일에 충실해서 그 일을 하다 죽으면 얼마나 복된 죽음일까, 그런 생각을 했다. 물론 그의 죽음에 대한 환상은 이 책을 읽으므로 깨지긴 했지만, 만일 그 환상이 사실이었다면 나는 여전히 그를 신비로운 존재로 여겼을 것이다. 

 

읽은 소감부터 얘기하자면, 책은 정말로 잘 썼다고 생각한다. 확실히 노작가의 노련한 문학적 향취가 여지없이 드러난 수작이란 생각이 든다. 하지만 역시 소설은 작가의 문체에만 언제까지나 취해 있을 수 없는 것 같다. 작가가 인물을 너무나 생생하게 살리고 있어서일까? 언제나 그렇듯이, 예술가들은 왜 그리 불행할까에 결국 귀착되고 만다. 누군가는 이상을 가리켜 박제가 된 천채라고 하지만 그런 불행한 천재는 의외로 많다. 또한 이 책을 읽으므로 그런 또 하나의 천재를 마주한 것 같아 결국 마음이 무거워지고 말았다. 

 

천성적으로 의지가 박약한 것일까? 그가 살았던 시대가 그를 불행하게 만든 것일까? 천재는 불행할거란 덧씌워진 이미지에서 그 역시 헤어나오지 못했다. 

 

그가 불행했으니 당연 주변인물도 행복할 수마는 없을 것이다. 특히 그의 일본인 아내 야마모토 마사코의 삶은 그로인해 더욱 실존주의자가 되어갈 수 밖엔 없었으리라. 일본 출신. 사랑은 국경도 넘는다지만, 그와 그녀의 시대는 한국인 남자와 일본인 여자의 사랑을 결코 좋게 봐 줄 수 없는 시대였다. 그나마 한국인 여자가 일본인 남자와 결혼하는 건 봐 줄 수 있다. 하지만 일본인 여자가 한국인 남자와 결혼하는 건 양국의 사람들에겐 죄악시되는 시대다. 그래도 그들은 사랑을 했다. 아마도 그래서 사랑은 국경을 넘는다고 했을지 모르겠다. 

 

하지만 사랑의 무게는 같을 수 없는 것일까? 똑같이 사랑을 한다고 해도 누군가는 조금 더 많이 사랑하게 되어있고, 더 많이 사랑하는 쪽이 더 많은 희생을 하게되는 것 또한 어쩔 수 없는 것 같다. 그리고 그것은 중섭이 아닌 그의 일본인 아내 남덕의 몫이었다.

 

그래서 남편만큼의 실력은 아니어도 프랑스 유학을 떠날만큼 그녀도 미술에선 실력있는 재원이었지만 그것을 미련없이 포기했고, 그에게서 두 아이를 낳아 키우는 평범한 아낙이 되는 것도 마다하지 않았다. 그런 사람이 요즘에도 없을리 없겠지만 우린 또 그런 사람을 얼마나 불편한 시선으로 보는 걸까? 확실히 격세지감이다. 

 

그런데 천재가 그렇듯 그도 한 가지 밖에는 잘하는 것이 없다. 바로 그림 그리는 일. 그리고 인간과의 사리분별을 논하지 않는 순수한 사귐. 그리고 가정을 재대로 돌 보지 못하는 것에 대한 자책과 자유에 대한 열망. 이 모든 것이 또 그녀를 얼마나 힘들 게 만들었는지 그는 얼마나 알까? 하지만 그도 자신의 삶의 날개가 무거워 점점 나락으로 떨어진다.

 

게다가 그를 시기하고 질투하는 허수는 또 그 유명한 모짜르트와 살리에르를 연상케도 한다. 그래도 천재는 둔감하다고 했던가? 중섭은 그다지 허수를 의식하는 것 같지는 않다. 하지만 난 여기서 의문을 가져 본다. 과연 허수는 실재인물이었을까? 아니면 작가가 설정한 가상의 인물이었을까? 

 

말미에 허수는 중섭에 대한 자신의 시기와 질투를 고백하고 있던데, 이 소설은 이중섭을 조명하고 있는 것 같아도 다분히 여성 그러니까 남덕의 시각을 투영하고 있다. 그것은 또 작가의 관점일 터. 만일 이 이야기가 남덕이 아닌 허수나 이중섭과 친했다던 구상 시인의 관점에서 그려졌다면 어땠을까? 허수의 관점에서 썼다면 좀 더 정치적이었을지 모르고, 구상의 관점에서 씌였다면 우정이 강조되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하지만 그의 이야기는 남덕의 관점에서 씌였던 게 맞는 것 같긴 하다. 사랑은 반드시 명분과 충돌하고, 외로움은 실존의 문제와 맞닿아 있으며, 모든 이야기는 남성성과 여성성을 함께 가지고 있어야 완벽해질 것이다.

 

여담 같지만, 왜 여자는 사랑에 모든 것을 바치지 않는 사람에게 부나비처럼 뛰어드는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 여자는 사랑 하나뿐이 없는데, 왜 남자는 사랑이 전부가 될 수 없는가? 왜 여자는 한 가지 밖에 잘 할 수 없는 외눈박이 남자에게 끌려하는가? 역시 미스터리란 생각이 든다.

 

그래도 나는 이중섭이 소를 좋아했다는 사실이 마음에 든다.소야말로 우리 민족과 가장 가까운 상징과도 같은 동물 아니던가? 일본을 상징하는 동물은 아무리 생각해도 소는 아니다. 그런 한국 남자를 소 같이 사랑했던 일본 여자. 그녀에게도 한국인의 정서가 흐르긴 했었을까? 늘 그림과 민족주의 사이에서 고민했던 이중섭의 영혼과 남덕의 이야기가 씨줄과 날줄처럼 잘 표현되어 있다.

 

리뷰를 쓰려고 이중섭이란 이름으로 검색을 해 보았더니 그에 대한 책이 의외로 많이 나와있는 것을 알 수가 있었다. 이 작품은 작가의 상상력이 더해져 풍성한 느낌을 주지만, 어디서부터 어디까지가 사실이고, 어디까지가 허구인지를 몰라 의문이 증폭되기도 한다. 훗날 그의 평전을 한 번 읽어봐야 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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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노래 2013-12-12 17: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사랑을 깨닫도록 일깨울는지 몰라요.
머스마들이 너무 바보스러우니까요.
사랑이 있으면 그림도 더욱 빛이 나고
삶은 한결 아름다울 수 있겠지요.

stella.K 2013-12-14 16: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머스마..ㅋㅋㅋ 그렇죠?
근데 여자는 바람이나면 가정이고 뭐고 자신의 모든 것을 다 버리지만,
남자들은 바람을 펴도 가정은 안 버린다잖아요.
그게 맞는 말인지는 전 잘 모르겠으나(흑, 뭔 말을 하는 건지...ㅠ).
아무튼 이 소설은 천재에게 덧씌워진 이미지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어서
좀 아쉬웠어요. 이중섭에게나 소설이나.
천재는 왜 그렇게 비운스러운 건지...
피카소처럼 장수하면서 행복한 천재는 왜 그렇게 없는 걸까요?

노이에자이트 2013-12-22 23: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최문희 씨는 늦은 나이에 데뷔해서 지금도 노익장을 과시하니 대단합니다.요 몇 년 동안은 예술가들을 소재로 한 작품을 쓰더군요.

stella.K 2013-12-23 11:07   좋아요 0 | URL
아, 최문희 씨가 늦게 등단했군요.
저도 이 분 나이 알고 깜짝 놀랐어요.
나이들어서도 할 수 있는 일이 있다는 건 확실히 복인 것 같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