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리아드
마릴린 로빈슨 지음, 공경희 옮김 / 마로니에북스 / 201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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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이 박경리 문학상 수상작가가 쓴 작품이라고 해서 좀 놀랐다.

아니 그 보단 박경리 문학상이 있다는 것이 좀 더 놀라웠을까? 박경리 작가야 워낙 유명하고, 모든 사람들이 존경해 마지않는 분이니 이 분의 이름을 딴 문학상이 있음직한 것은 당연한 것인데, 언제 또 이런 상이 제정되었단 말인가? 그건 또 차치하고라도, 기존의 우리나라 문학상은 당선작에 의미를 둔 경향이 있는데 이 상은 작가의 공로에 수여하며 그것을 우리나라 작가에만 국한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마치 노벨문학상처럼. 얼핏 들으니 벌써 3회째라고 하는 것 같은데, 우리나라 문학상이 이렇게까지 권위가 있어지다니, 기분 좋은 일이 아닐 수 없다. 

 

이렇게 알게된 작가 메릴린 로빈슨과 그의 작품이라...!

길라이드란 이름이 왠지 지구상에 없는 이상향의 이름인 것도 같지만, 사실은 우리가 성경에서 접하는 '길르앗'의 미국식 발음이다. 미국의 아이오와주에 있는. 책이 왠지 영화, '흐르는 강물처럼'이나 아미쉬를 배경으로 한 '위트니스'를 연상케도 한다. 단 영화 보다는 좀 더 잔잔하고, 유장한 느낌이라고나 할까? 그래서 읽기에 따라선 적잖이 지루하고, 인내가 필요한 듯도 하다. 

 

읽으면서 내내 드는 생각은 왜 이런 작품의 작가에게 이런 상을 줬을까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나름의 답을 구하지 못할 것도 없다. 박경리하면 대표작 <토지>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는데, 그 작품은 인간의 장구한 역사를 그리고 있다는 점에서 역사 소설이며 비록 픽션이긴 하지만 하나의 기록물처럼 읽혀지는 느낌을 갖는다. 이 작품도 그렇지 않을까? 어딘가 모르게 '토지'와 닮아 보인다. 그래서 수여했던 것은 아닐까?

 

특이한 점은 이 작품은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세계 문학계에서도 거의 쓰지 않는, 아니 사라진 것처럼 보이는 '서간체'로 썼다는 것인데 왜 작가들이 서간체로 쓰지 않는지 새삼 놀랍다는 생각이 든다. 

 

그러고 보니 아주 오래 전, 박완서 작가가 서간체는 아니지만 전화로 이야기하는 형식의 소설을 읽어 본 적이 있는데 참 인상 깊었다는 생각을 했었다(그런데 워낙 오래 전에 읽어 제목이 뭔지 기억이 나질 않는다). 기존의 3인칭이나, 1인칭 소설이 아닌 새로운 방식에 도전하는 작가 정신에 경의를 표하고 싶었다.

그러고 보면 요즘 작가들은 잊혀진 문체에 대해 그다지 관심이 없어 보인다. 어떻게 하면 자신이 얘기하고자 하는 이야기를 어떻게 보줄 것인가에만 촛점이 맞혀있는 듯하다. 뭐 그런 것 아니어도 편지는 누구나 받고 싶지 않은가? 그것을 소설의 한 형식으로 차용해서 썼다는 건 인간의 마음을 잘 공략한 작가의 글쓰기 작전(?)은 아니었을까?

 

솔직히 이 작품은 여러가지 면에서 나를 좀 놀라게도 하는데, 이야기 자체는 지루하고 인내를 필요로 하지만, 기존의 내가 알고 있는 소설형식을 배반한다. 아니 아예 관심이 없어 보인다. 기존의 소설 형식이라면 영화적 기법 내지는 기승전결에 의한 인간의 욕망을 보여주는 뭐런 것으로 대별되고 그것이 소설 기법의 전부인 양 하지만, 이 작품은 그냥 인생 자체를 얘기할 뿐이다. 그것도 주인공이 아들에게 자신의 인생에 대해 그냥 주저리 주저리 말해 주는 것이다. 그러니까 내 말은, 소설은 언제부턴가 인생을 말하지 않게 되었다가 이 작품에서야 비로소 인생을 말할 수도 있음을 보여줬다고나 할까?

그도 그럴것이, 인생을 말하는 건 어느 특정인의 자서전이나 회고록, 평전의 몫인 양 했었다. 그래서 마치 소설은 그런 방식을 차용하면 안 될 것처럼 하고 있지는 않았을까 하는 하는 의혹이 들었다는 것이다(이것도 나의 게으름의 소치라면 할 말은 없겠지만).    

 

사실 이 작품이 좀 지루하게 씌여져서 그렇지, 분명 의미가 있는 것도 사실이다. 개인의 역사는 존중 받을 필요가 있다. 그것이 아무리 하찮은 인생이어도. 그리고 그것은 사회의 역사와도 맞물려 있기도 하다. 아무리 평범한 사람이라고 해도 어느 시대 사회의 역사에 발을 담그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주인공은 노예해방 전후세대를 얘기하지만, 나는 내가 주로 살았던 386 세대에 살았으니 나름 그 시대를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 시절 민주화에 적극적으로 가담을 했건 안했건 간에 말이다. 

 

이 책에서 또 한 가지 놀라운 점이 있다면 지극히 보수적이며 건전하달까? 우리가 흔히 아는 섹스 장면이 나오는 것도 아니고, 인간의 그로테스크한 면을 기술적으로 보여주는 문학적 장치도 찾아 볼 수 없다. 그래서 지루하다고 느꼈는지도 모르겠다. 한 술 더 떠 성경 말씀까지 인용한다. 그도 그럴 것이 주인공은 3대가 목사인 집안에서 나고 자랐으니 그럴만도 하다. 그러나 요즘 문학에서 성서를 인용한다는 건 서간체 문학의 낯섬만큼이나 어색한 것은 아닐까?

 

예전에 나도 비록 습작이긴 하지만, 소설 가운데 성경 말씀을 인용한다는 게 어떤 의미인가를 생각했었다. 고전문학에서 성경을 인용한다는 것은 자연스러울 수도 있다. 하지만 요즘 같이 세속화되고, 물질 만능의 사회에 언제부턴지 종교가 약화된 사회에서 성경 말씀을 작품에 인용한다는 건 좀 어색하지 않을까를 생각해 보게 되었다. 하지만 이런 세대에도 성경 말씀을 자기 작품에 삽입하는 작가가 있었다니 나도 언제고 정말 소설을 쓴다면 필요한 순간이 되면 인정 사정 보지 않고 쓸 것이다. 

 

솔직히 난 이 작품으로 인해 미국에 대해 조금 다른 시각을 갖게 되었던 것도 사실이다. 왠지 미국은 물질만능주의의 최첨단을 달릴 것만 같은데, 이런 순수하고도 고전적인 작품을 아직까지 쓰고 있는 작가가 있고, 주목하고 있는 독자가 있다는 것이 놀라웠다.

 

그리고 무엇보다 나의 이야기를 다음 세대에 남겨줄 요량으로 이런 이야기를 썼다는 것이 부럽다는 생각이 든다. 왜 사람들은 나의 이야기를 자기 자녀나 손주에게 들려줄 마음으로 살지 않는지 모르겠다. 나의 이야기를 들려 줄 요량으로 산다면 그 삶이 얼마나 성실하게 살게 되는 것일까? 나는 사춘기 때 한때, 내가 일기를 쓰쓸 때 훗날 나의 손자가 읽어주길 바라는 마음에서 썼던 적도 있다(물론 지금은 그나마 거의 쓰지 않고 있긴 하지만). 책에서는 그것이 주인공의 설교원고였을 것이다. 꼭 설교원고가 아니어도 그런 성실함을 증거해 줄만한 근거물이 꼭 있었으면 좋겠다.       

 

아무튼 지루함을 견딜 수만 있다면 이 유장한 작품을 읽어보는 것도 꽤 나쁘지 않은 독서 경험이 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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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노래 2013-11-26 13: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애티커스 님도 애티커스 님 삶을 조곤조곤 적어서
살붙이나 동무한테 곱게 남겨 보셔요~

stella.K 2013-11-26 13:23   좋아요 0 | URL
와우, 이렇게 빨리 읽으시고, 댓글을 달아주시다니!ㅋ
저도 그래보고 싶어요. 용기 주셔서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