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이 잃어버린 것 - 창작집단 독 희곡집 제철소 옆 문학관 1
유희경 외 지음, 창작집단 독 엮음 / 제철소 / 201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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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우 조재현은 배우나 관객이 아닌 순수한 독자로서 희곡을 읽은 게 얼마만인가라며 이 책의 추천사에서 자신의 소회를 밝혔다. 배우 조재현이 이렇게 밝힐 정도라면 벽안의 독자인 나는 어떻겠는가?

 

잘 쓰지는 못했지만 한때 나도 연극 대본을 썼더랬다. 하지만 그때나 지금이나 독자로서 희곡을 선뜻 뽑아 읽기에는 주저되는 게 많았다. 다른 읽어야할 책도 수두록 빽빽한데 희곡집은 워낙에 알려진 게 없으니 어떤 걸 읽어야 하는지 잘 모르겠는 것이다. 우리나라가 세계 10위 안에 드는 출판대국이라고 하지만 아직도 출판의 편중화는 극복하지 못하고 있다. 

 

당장 책을 고르라고 하면 소설이나 에세이, 인문 관련 책들이 선택된다. 리뷰를 읽어 봐도 이 범주의 리뷰들이 워낙 많으니 아무래도 따라서 읽어줘야만 할 것 같지 희곡을 읽는다는 건 감히 상상할 수 없고 생뚱맞기까지 하다. 그도 그럴 것이, 연극을 보지 왜 읽는단 말인가? 그러려면 공연장까지 가야한다는 번거로움이 있기는 하지만 연극은 종합예술인만큼 모든 그것을 한 자리에서 볼 수 있는 걸 선택하는 건 당연해 보인다. 더구나 나는 예전 같은 시력이 아니다 보니 이제 눈으로 읽는 독서 행위는 어느 정도 한계가 있어 보인다. 그러니 희곡을 읽어야겠다는 생각을 못하는 것이다.    

 

왜 이렇게 희곡이 푸대접을 받아야 하는 건지 모르겠다. 모르긴 해도 희곡은 시와 함께 가장 오래된 문학 형태였을 것이다. 하지만 오늘 날 희곡의 권위를 인정하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왜 이렇게 되어버린 것일까? 정말 스스로 나에게 묻고 싶다. 희곡도 소설이나 에세이 아니면 다른 인문 도서처럼 조명을 받게 된다면 그래도 안 읽을 거냐고. 그건 명백히 아닐 것이다. 희곡도 마케팅이든, 입소문이든 나 좀 봐달라고 난리굿을 한다면 나는 못해도 일년에 한 두 권을 읽을 것 같다.

 

그렇다면 감히 말하고 싶다. 독자로서 희곡을 읽지 않는 것이 독자 자신의 문젠가 아니면 그렇게 난리굿 한 번이라도 제대로 할 생각을 못하는 출판 관계자 및 각 언론사 출판 담당 기자의 책임인가? 왜 희곡은 소설이나 에세이 읽는 것만큼이나 독자들이 친근하게 읽지 않으면 안 되는 걸까? 언제 한 번 희곡이 자기 경쟁력을 가졌던 때가 있었나? 
 

연극 작품을 활자로만 읽으면 그건 다 본 것이 아니다. 3분의 1정도까지만 본 것에 지나지 않는다. 하지만 희곡도 문학의 한 장르인만큼 읽는 행위 하나로만 볼 때 소설이나 에세이 보다 더 간결하고 더 의미 깊게 읽을 수 있는 거라고 생각한다. 이런 인식의 변화가 이루어져야 하는데 이 책은 바로 이것을 선언하고 나온 것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한마디로 이 책을 읽으니 우리가 연극 보는 또는 책을 읽는 인식이 달라져야 겠다는 생각이 든다.

 

솔직히 연극이 우리나라에서 공연되는 것은 극히 제한적이다. 일년에 몇 백 편의 희곡이 쏟아져 나오겠지만 그것이 실제로 공연되는 것은 몇 십편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그나마 그것도 관객의 눈에 띄고 실적을 낼 수 있는지는 미지수다. 더구나 우리나라 공연계는 웬만한 큰 기획사에서 이름있는 배우들을 내세워 주관하는 뮤지컬이 독식을 하다시피 한다. 그러니 쏟아지는 희곡을 공연이 소화하기란 애초에 불가능할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극작가들의 숨통을 조인다는 게 말이나 되겠는가?

 

모르긴 해도 그들도 푸른 꿈이 있었을 것이다. 또 때로는 소설의 유혹도 있었을 것이다. 극작가로서 자신의 입지를 다져나가며 밥 먹고 살 수 있을까? 거의 불가능할 것이다. 우리나라의 소설을 쓰는 웬만한 전업작가도 글만 써서 벌어먹고 살기가 힘들다는데 하물며 극작가가 그럴 수 있을 거라곤 감히 상상이 가질 않는다.

 

나야말로 얼마만에 희곡을 읽어 본 것일까? 지면상 26편의 단편 희곡을 일일이 다 평할 수는 없지만 정말 어떤 작품은 번뜩이는 재기가 느껴지는 작품들이 꽤 있었다. 물론 또 개중엔 단편이라 그 어떤 것도 제대로 보여주지 못하고 마무리된 작품도 있다. 하지만 전체적으로 느낄 수 있는 것은 9명의 작가들은 정말 열심히 치열하게 썼겠구나 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희곡이 시나 소설을 읽는 것만큼이나 독자에게 읽히려면 몇 가지 선결되어야 할 과제가 있어 보인다. 우선 작가 스스로가 더 재밌고, 즐겁고, 의미 있는 작품을 기죽지 말고 써야 한다. 이땅엔 만화나 그래픽노블 매니아가 있는 것처럼 희곡 매니아도 분명 어디엔가 존재할 것이다. 요즘엔 장르와 장르 간의 교류가 워낙에 빈번해, 소설이 영화화 되고. 만화가 드라마 되기도 하고, 드라마가 뮤지컬로 재탄생되기도 한다. 희곡도 그러지 말라는 법이 어디있겠는가? 희곡은 꼭 연극으로만 만들어질 수 있다고 누가 그러던가? 

 

또한 독자의 마음을 사로잡으려면 책이 좀 멋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물론 뚝빼기 보다 장맛이라고는 하지만 책표지가 마음에 안 들면 독자는 다른 샤방한 책에 눈이 간다. 그런 점에서 이책은 표지가 그다지 마음에 드는 것은 아니었다. 솔직히 난 그런 취지와 여기 실린 작가와 작품을 응원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면 선택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리고 가급적 책으로 나온 희곡은 공연으로도 볼 수 있었으면 좋겠다. 내용을 보니 제작비를 최소화하며 꼭 공연장이 아니어도 어디에서든 공연이 가능할 수 있을 것 같다. 아마도 이런 작품들이 앞으로도 많이 나오지 않을까? 북콘서트 개념으로도 얼마든지 할용 가능할 수도 있겠다 싶다. 지금까지는 일정 정도 공연으로 성공해야 출판을 생각했을 것이다. 그런데 독자가 먼저 희곡을 접하고 공연으로 볼 수도 있는 것이 아닌가? 그러려면 희곡을 먼저 띄우는 적극적인 마케팅이 필요하지 않을까? 그래야 작가들도 글 쓸 의욕이 생길 것이다. 그런 취지에서도 이 책이 나왔을 것이고.

 

나는 최근 시나리오를 써야할 사람들이 소설을 쓰겠다고 했다가 이도저도 아닌 경우를 종종 본다. 시나리오로 밥 벌어 먹기가 어려우니까 소설을 써 보겠다고 하다 그런 것 같은데 그도 이해 못하는 건 아니지만 민폐 아닌가? 소설도 시나리오 쓰는 것만큼이나 어려운 건데 만만이 보는 저자세가 있는 것 같아 독자로서 좀 씁쓸했다. 무엇보다 그 작가가 자기 전공의 글을 잘 쓸 수 있도록 지원책을 마련하는 것이 좋겠는데 과연 기대해도 좋을지 모르겠다. 그래야 독자의 혼란도 줄어들고. 선택의 폭도 넓어질 수 있는 것이 아닌가.

앞으로 이런 프로젝트가 계속 나올 모양인데 일단은 환영하고 기대를 해 본다. 잘 됐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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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yrus 2016-03-01 22: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보통 일반적인 무대극을 `연극`이라고 많이 부르는 편이라서 `희극`을 잘 쓰지 않아요. 그래서인지 희극을 낯설게 여기는 경향이 있는 것 같아요. 그리고 희극을 읽는 작품이라기보다는 `보는 작품`이라는 인식도 남아 있고요.

stella.K 2016-03-02 12:28   좋아요 0 | URL
그니까. 소설이란 문학 장르가 언제부터 나왔는지 모르겠지만
그 보다 오래된 게 희곡이야.
생각해 보니까 우리가 독서를 묵독한 역사가 얼마 안 되잖아.
그전에는 독서 하면 소리를 내서 읽는 거라고 그러고.
그렇다면 희곡을 읽었을 것 같애. 묘사나 수사는 소설이 발달하면서
생겼을 거고.
이 책 나름 내용이 좋아. 읽을만 해.
너도 기회되면 한 번 읽어 봐.^^

transient-guest 2016-03-05 08: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희곡을 읽으면서 맛을 제대로 느끼려면 음독을 해야하지 않을까 생각하는데요, 이게 꽤 어렵더라구요. 시를 읽을 때 가끔 겉멋에 배우같은 손짓을 하면서 소리내어 읽어보는데, 굉장히 좋더라구요. 희곡도 그렇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그냥 스토리로 읽기에는 대사와 대사사이의 공간을 메우는게 쉽지 않을 것 같아요.

stella.K 2016-03-05 14:08   좋아요 0 | URL
그렇죠. 그러면 더 음미가 잘 되죠.
그런데 음독을 하면 시간이 더 걸린다는 단점도 있어요.
그리고 목도 금방 쉬구요. 그래서 희곡이란 장르가
쇄퇴하지 않았을까 싶기도 해요.

yamoo 2016-03-10 12: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흠....추천을 안 누를 수가 없습니다~
희극이라...저두 좀 읽어보겠어요~

stella.K 2016-03-10 12:30   좋아요 0 | URL
헉, 누르신 거 맞나요?
좋아요가 그대로여요.ㅠㅋㅋ

그런데 제가 전에 보통의 존재로 야무님께 실망을 안겨 드려서
이게 과연 야무님께 좋을런지 모르겠어요.
뭐 큰 기대 안하시고 읽어보시면 또 나름 읽는 재미가 있지 않을까
싶기도 해요. 나름의 구성력도 있고.
우리나라 희곡 작가들도 많이 밀어 줘야할 텐데 말이어요.ㅠ

페크pek0501 2016-03-11 10:5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희곡은 읽기가 어렵더라고요. 예전에 헨릭 입센의 <인형의 집>이나 셰익스피어의 4대 비극을 읽었는데 재미는 있었지만 읽기가 수월하지 않아 그 다음부턴 희곡을 선호하게 되질 않더라고요.
대화체라는 게 누가 하는 말인지 확인해 가며 읽어야 하는 수고가 있어서 말이죠.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런 형식엔 익숙하지 않아 선호하지 않는 것 같아요.

stella.K 2016-03-11 13:18   좋아요 0 | URL
그렇죠. 하지만 요즘 희곡 작가들은 쉽게 쓰더라구요.
그래서 어찌보면 장황한 서사의 소설 보다 슬림한 희곡 읽기가
곧 대세가 되지는 않을지 기대해요.

참, 잘 지내시죠? 왜 이리 오랜만이십니까? 한참 기다렸습니다.
자주 뵈어요.^^
 
위험한 독서
김경욱 지음 / 문학동네 / 2008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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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소설을 처음 접하게 된 건 지난 여름 문학 잡지 <악스트> 창간호에서 였다. 단편이 실렸길래 별 생각없이 읽기 시작했다. 그런데 놀랄만큼 글을 잘 썼다. 주인공이 택시를 잡아 타는 것에서 시작해서 운전 기사와 나눈 이야기가 전분데, 그 이야기속에 한 남자의 인생이 담겨 있고  결말은 당연 주인공이 목적지에서 도착해서 택시에서 내리면 끝이다. 그걸 읽으면서 어쩌면 이리도 문장이 지적이고 오돌오돌한지 마치 고기의 오돌뼈를 씹는 맛이라고나 할까? 김경욱이 이런 작가였어? 진작 알아주지 못한 게 미안할 정도다. 

 

가끔 이렇게 괜찮은 소설을 읽으면 기분이 좋아지면서 그 작가의 다른 작품을 읽고 싶은 욕구가 생긴다. 마침 난 손만 뻗으면 읽을 수 있는 거리에 작가의 책을 두고 있었는데 그게 바로 이 책이다. 이 책은 몇년 전 어느 지인으로부터 그해 생일을 핑계 삼아 선물로 받은 것인데 민망스럽게도 바로 읽지도 못하고 차일피일 미루고 있다가 이제야 읽은  책이다(나는 책을 선물 받을 자격이 없는 사람이다ㅠㅠ).     

 

이 책 띠지엔 "소설적 재능이 만개한 폭죽다발!"이라고 써 있다. 뭐 책을 팔려면 무슨 말인들 못 쓰겠냐만 그 말이 꼭 틀린 말은 이닌 성 싶었다. 마치 영화 '웰컴 투 동막골'에서 보면 하늘에서 팝콘 눈꽃이 내리는 장면이 있는데 왠지 그 장면이 떠오른다. 

 

그런데 이 작가 이 책이 첫 소설집이 아니다. 이미 2009년 동인문학상 수상작을 받기도 했지만 그것 말고도 지금까지 국내 유수의 문학상은 거의 다 석권하다시피 했다. 등단 나이도 빨라 약관 22세에 등단했다. 그러니까 지금은 결코 젊다고 할 수 없지만 또한 결코 만만히 봐서는 안 되는 작가이기도 하다. 무엇보다 그는 전업작가인가 본데, 그만한 실력과 학벌이라면 다른 좋은 직업을 가져도 될 텐데 그는 소설에 순정을 바쳤다. 이런 사람들을 보면 존경스럽기도 하고, 안쓰럽기도 하다. 아무리 잘 쓴다고 해도 책을 사 볼 사람은 언제나 한정되어 있지 않은가? 정말 예전엔 입이 가볍고, 철 없어서 요즘 작가들 어쩌고 하며 성토했지 그것도 함부로 하면 안 되겠다 싶기도 하다. 요즘 그 어느 때보다 한국 문단계의 자성의 소리가 높은데 결국 문단을 바꿀 사람들도 그들 아니겠는가? 

 

수록작은 총 8편. 물론 모두가 다 만족스러웠던 것은 아니다. 그중 한 두 작품은 뭔가의 아쉬움이 남기도 한다. 특히 '달팽이를 삼킨 사나이'는 아내가 대리모인 것에 대해 뭔가 할 얘기가 더 있을 것 같은데 이렇다하게 보여주지 못하고 끝난다. 하지만 이 책의 제목이 그래서 그런지 작품을 통해 실제로 작가가 어떤 책을 읽었을까 궁금증을 갖게 만든다.

 

그렇지 않아도 요즘 한다하는 작가들 또는 명사들 심지어 일반인들까지 자신이 읽은 책에 관한 책을 경쟁적으로 내고 있는데, 독자에게 그렇게 책을 직접 들이대기 보다 표제작처럼 그런 스토리 방식을 통해 작가 자신의 독서 이력을 슬쩍 끄집어 내는 방식도 나름 괜찮은 방법이란 생각이 든다. 표제작 <위험한 독서>는 주인공이 독서치료사다. 내담자에 관해 이야기를 하면서 작가가 각주를 달기도 했는데 이 작품을 위해 언급한 책만해도 거의 10권은 되어보임직 하다. 주인공은 내담자를 치료하는데 필요한 목록이기도 하지만 분명 작가는 그 모든 책을 섭렵하고 그 작품을 썼을 것이다. 그리고 아주 불친절하게도 언급한 인용구에 대해 책 이름만 나와 있을 뿐 몇 페이지 어디는 구체적으로 나와 있는지 말하지 않는다. 그리고 직접 찾아 보라고 한다. 약을 올리겠다는 건가? 

 

누가 무슨 책을 읽었을까를 알고 싶어하는 것은 거의 관음증에 가깝다. 그리고 우리는 그 책 목록중 나도 읽은 책이 있는가를 확인하고 싶어한다. 그리고 없으면 괜히 민망해 하기도 하고 설혹 있다고 해도 두 권 이상을 넘어가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그것에 대해 아쉬워 하면서도 두 권쯤 있다는 것에서 안도감 같은 걸 교차시키겠지. 모르긴 해도 작가는 독자의 이런 반응을 계산에 넣고 이 작품을 쓰고 각주를 만들었을지도 모르겠다(아님 말고). 그렇다고 작가가 독자들에게 어떤 자각 내지는 반성을 이끌어 내려고 그렇게 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어떤 작가도 독자로 하여금 책을 읽기를 바랄 뿐이지 왜 읽지 않냐고 따져 물을 권리는 없다. 그거야 독자가 책을 읽지 않은 것에 대한 부채의식 같은 거지 독서를 하지 않는다고 비난하거나 혼내킬 일은 아니니까. 어쨌든 이 단서(각주에 언급된 책 목록)를 통해 작가가 어떤 책을 읽었는지 추적이 가능해졌으니 오히려 약간의 스릴 같은 것으로 바뀌게 되는 것이다.  

 

'천년 여왕'은 또 어떠한가? 얼핏 이 작품은 남자들이 그렇게도 바라마지 않는 현모양처의 전형과 사는 것이 정말 좋기만 한 것인가에 대한 물음을 하는 것도 같다. 물론 우연히는 아니겠지만 생각 보다 쉽게 작가된 남자가 본격적으로 전업작가의 길에 들어섰다. 이럴 경우 배우자의 동의와 지원을 받지 않으면 그건 거의 불가능 하다. 다행히도 아내는 별 거부감 없이 남자가 전업작가가 되는 것을 동의했고, 남자는 성공하는 작가가 되기 위한 행동 지침도 수립했다. 아내는 연상이기도 하지만 지적이고 똑똑해서 남자의 작업에 적지않은 도움이 된다. 하지만 언제부턴가 아내의 도움과 조언이 자신이 바라는 도를 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고 위축감까지 느끼게 된다. 자신이 미처 알지도 못하고 번역조차 확인 불가능한 책의 제목을 들이대며 이미 세상에 있는 소설이기 때문에 다른 책을 써 보라는 조언을 받기가 일쑤다. 

 

나는 이 작품을 읽으면서 문득 작가 김경욱이 주인공을 통해 언급한 책 예를 들면, 훌리오 루이스 곤잘레스란 작가의 <산티아고에서 온 편지>란 책이 실제로 있는지 궁금해 졌다. 작가의 이름은 생소하지만 낮설지도 않다. 곤잘레스가 들어가는 것을 보면 분명 남미 어디쯤 되는 사람인 것도 같다. 또한 '산티아고'가 들어 간 책이 몇 권 번역되어 나와 있는 것을 보면 그런 제목은 십중팔구는 있어 보인다. 말하자면 작가가 실제로 있는 책을 얘기하고 있는지 없는 것 가지고 구라를 치고 있는지 확인하고 싶은 것이다. 검색해 본 결과는 어땠냐고? 미안하지만 나도 안 가르쳐 준다. 궁금하면 직접 알아 보라.

 

그러니까 내가 말하려고 하는 것은 작가가 독자를 쥐락펴락 하는 수준이 범상치 않다는 것이다. 작가는 '위험한 독서'에서 제발 독자들은 작가가 취급하는 작품마다 작가의 경험과 삶이 녹아 있을 거라고 착각하지 말라고 경고하기도 한다. 그것에 관해서는 '천년 여왕'에서도 다시 한 번 다른 식으로 못 박기도 한다. 이를테면, 주인공이 쓰는 것마다 어떤 나라 어느 작가가 이 비슷한 글을 썼다는 아내의 말에 매번 좌절한다. 그렇다면 자신의 경험을 쓸 수 밖에 없다. 실제로 아내는 해 아래 새 것이 없으니 그렇게 하라고 권한다. 하지만 주인공은 그렇게 하지 않는다. 이유는 자신을 판 다음에는 무엇을 팔 것인가. 작가에게 자신의 삶은 씨암탉이다. 배고프다고 씨암탉을 잡아먹을 수는 없지 않은가.(89p)하며 말이다.

 

하지만 내가 볼 때 이건 그냥 작가가 자신의 소설에서 쓴 말이거나 그러기를 바라서 쓴 말은 아닐까? 어차피 소설은 허구가 아니던가? 허구 속에서 무슨 말인들 못하겠는가? 소설이란 100% 거짓말을 쓸 수도 없고, 100% 진실만을 쓸 수도 없다. 물론 경험이 아니면 글을 쓰지 않는다는 에니 아르노란 작가도 있지만 자전 소설을 쓴 경험이 없는 작가가 과연 있을까? 진실을 말하지 않는 작가가 있다면 그게 과연 작가일까? 자신의 경험을 펼쳐 보이는 것도 능력이라고 생각한다. 그런 의미에서 마지막 수록작 <황홀한 사춘기>는 뭔가 작가의 경험이 녹아져 있는 작품일 것 같다는 생각이 있다. 작가라면 누구든 자신의 사춘기를 소설로 쓰고 싶어하지 않을까?    

 

그런데 난 저 <천년 여왕>을 읽으면서 과연 세상에 어떤 작가가 나와 비슷한 책을 썼다고 해서 과연 엎어야 하는 것인가에 대한 의문이 남는다. 그게 언젠가 표절 시비에 휘말릴까 봐 그런 걸까? 그럴 수도 있겠다. 하지만 아마추어 작가일수록 세상 어디에도 없는 자신만의 소설을 쓰겠다는 의욕이 강할 것이다. 하지만 정말 나만이 쓸 수 있는 단 하나의 이야기가 과연 있을까? 해 아래 새 것이 없다는 걸 알게된다면 창작은 새로운 이야기가 아니라 이미 있었던 이야기를 새롭게 각색하는 것이거나, 누군가 미처 다 쓰지 못한 이야기를 그 작가가 쓰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그러므로 어떤 작가의 어떤 작품과 비슷하다고 해서 소설을 못 낼 것까지야 있겠냐는 것이다. 나중에 혹시 표절 시비에 휘말린다고 해도 자신이 표절 안한 것이 확실하다면 낼 수도 있는 것 아닐까?(그러고 보니 오래 전에 읽은 안정효 작가의 '허리우드 키드의 생애'라는 소설이 생각이 난다. 그 작품은 결국 창작이란 재각색에 지나지 않는 것 아니냐고 묻는 작품이 아니던가?) 

 

표절 의혹 받을까봐 쓸 수 없고, 씨암탉이라 쓸 수 없다면 작가는 과연 어떤 글을 쓸 수 있을 것인가? 작가가 글 쓰는 것 자체를 즐길 수 없다면 어떻게 작가가 될 수 있겠는가?

 

하지만 작가가 생각해 봐야할 것은 그런 것이 아닐지도 모른다. 보다 근본적인 건 책이란 무엇이냐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어차피 아무리 좋은 작가라고 해도 독자와 소통하지 못하는 책을 쓰는 작가는 도태되기 마련이니까. 저자의 말을 생각해 보자. 그는 <위험한 독서>에서, 책의 의미는 작가의 창조적 재능이 아니라 독자의 취향에 따라 결정된다. 어떤 사람들은 말한다. 책에는 독자가 메워야 할 수 많은 빈칸이 존재한다고. 독자가 그것을 채우기 전에는 모든 책이 본질적으로 미완성 원고에 불과하다(32~33p)고 했다. 

 

이렇다면 <천년 여왕>에서 주인공이 왜 자신의 작품을 엎어야 했는지 그의 고민의 실체가 좀 더 명확해 보인다. 오늘도 작가지망생을 포함한 작가들은 늘 이것 때문에 스탠드 불빛 아래서 글을 쓰고 고민하지 않을까? 내가 지금 쓰는 책이 독자에 의해 미완성 원고라도 될수 있을지 아니면 무관심속에 잊혀지는 책이 될지를 고민하는 것이 아닐까? 나는 이렇게 독자를 고민하는 작가가 좋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김경욱 작가는 '위험한 독서'라고 했는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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곰곰생각하는발 2015-09-26 15:3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매우 부지런한 작가죠. 이 양반도 소설에만 올인해서 많은 작품을 써냅니다.
일정한 퀄리티를 유지하는 것을 보면 눈여겨볼 작가임에는 틀림없습니다.
전 이 작가가 좋더라고요...

stella.K 2015-09-26 18:26   좋아요 1 | URL
그러게요. 좋은 작가를 알게 되었을 때 독자로서 정말 기분이 좋더라구요.
그런데 비해 저는 너무 게으르고 동시에 웬만해서 작가에게
마음의 문을 함부로 열지않기도 하죠.ㅋ
이 작가 정말 마음에 듭니다.^^

[그장소] 2015-09-27 02: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좋아하는 작가!^^

stella.K 2015-09-27 12:11   좋아요 1 | URL
오, 김경욱 좋아하는 독자들이 많네요!^^

[그장소] 2015-09-27 12:39   좋아요 0 | URL
이 작가도 처음 시작부터 봐놔서..^^
중력이랄까..일종의 주문같이 습관같이
베어있는거 같아요.
나오면 봐야지..같은!

stella.K 2015-09-27 13:24   좋아요 1 | URL
저도 그장소님 같은 독자로서의 근성이 있어야 할 것 같은데
그러지가 못해요.ㅠ
읽고 싶은 책이 워낙 많으니 한 작가를 진득하니 읽어주질 못하는 거죠.
그저 좋은 작가라는 것을 확인하는 정도.
지금도 읽으려고 하는 책이 워낙 많이 쌓이다 보니 이젠 미안할 정도죠.ㅠ

[그장소] 2015-09-27 13:31   좋아요 0 | URL
저야 ..소설 쪽을 읽으니까요..금방 후딱후딱 읽히기도 하고요. 전공분야같은 책은 골치 아픈 생각많아지기만 해서..가뜩이나 멘탈이 유리라..그런건 오래 붙들고 못있어서..능력부족^^
이걸..자랑이라고..한심하죠?
각기 잘하는 부분 있음 되는게 아닐까..저는 그러네요.

stella.K 2015-09-27 17:44   좋아요 1 | URL
멘탈이 유리...?ㅋㅋㅋ
전공이 무엇이길래요?

[그장소] 2015-09-28 08:02   좋아요 0 | URL
딱히 전공 없는게 전공!^^ (공부 많이 안했단..말을!)

yamoo 2015-09-30 23: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주 오래전에 김경욱의 저 단편 <위험한 독서>를 읽었더랬습니다. 이상문학상 우수문학작으로 선정되었던 걸로 기억합니다만...전 꽤 재밌게 봤습니다. 김경욱 작품은 대개가 실망보다는 기대쪽으로 기울더라구요. 실망한 작품이 별로 없습니다.

스텔라 님 리뷰를 보니, 저하고 많은 점에서 달라 신선합니다~ 앞으로 김경욱 소설에 대한 리뷰를 더욱 기대하게 됩니다..ㅎ

stella.K 2015-10-01 14:01   좋아요 0 | URL
와, 야무님도 김경욱 좋아하시는군요.
전 이럴 줄 몰랐어요. 그럴 줄 알았으면 진작 읽어 줄 걸 후회하고 있는 중.ㅠ
김경욱에 대한 야무님과 제가 어떻게 다른지 궁금하기도 하네요.
전작주의 독서는 못하더라도 앞으로 2, 3권은 더 읽어주고 싶긴해요.

추석 잘 지내셨죠, 야무님?^^

페크pek0501 2015-10-01 00: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위험한 독서를 읽었는데 저는 2006 이상문학상 작품집에서 읽었어요.

˝이유는 자신을 판 다음에는 무엇을 팔 것인가. 작가에게 자신의 삶은 씨암탉이다. 배고프다고 씨암탉을 잡아먹을 수는 없지 않은가.(89p)하며 말이다.˝
- 저는 이것에 대해 반론을 제기하고 싶어요.

자기가 경험해서 가장 잘 쓸 수 있는 걸 써야 소설을 어떻게 써야 하는지를 알게 될 것 같기 때문.
예를 들면, 경험한 것은 잘 아니깐 세밀하게 묘사하게 되어 나중에 경험하지 않은 것을 쓸 경우에도 세밀하게 쓰려고 할 것 같아요.(세밀하지 않으면 저번에 쓴 것과 비교하게 되겠지요.)

또 자기가 경험한 것을 쓰다 보면 그 이야기에서 저절로 파생되는 여러 이야기들이 생기기 때문.
하나의 이야기로 상상력이 뻗어나가지요.

`위험한 독서`를 다시 읽어 봐야겠어요. 어떤 내용인지 하나도 기억이 나질 않아요...(책은 뭐하러 읽나 몰라요...ㅋ)

페크pek0501 2015-10-01 01: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추가 :
우리는 경험한 것을 글로 다 쓰지 못하고 죽는다고 하더군요...

stella.K 2015-10-01 14:09   좋아요 0 | URL
저도 그렇게 생각해요.
모르긴 해도 저는 그 부분에서 김경욱이 본인의 의도와 다른
얘기를 했다는 생각이 들어요. 일종의 트릭을 쓴 것 같다는 느낌.
어차피 소설은 허구를 쓰는 거니까 반어법을 써도 누가 뭐랄 사람 없잖아요.
아닌가? 히히.

그래서 이석원 작가는 자신의 기억 모두를 글로 쓰고 싶다고 얘기했나 봐요.
저도 이렇게 소설을 못 쓸 봐엔 내가 기억하는 모든 걸 쓰고 싶다는
생각이 들기도 해요. 나이 탓일까요...?ㅠ

명절 잘 보내고 오신 거죠?^^

페크pek0501 2015-10-01 14:24   좋아요 0 | URL
`위험한 독서`(단편으로)를 오늘 다시 읽었어요. 두 번 읽은 거죠. 읽으니깐 생각이 나더라고요. 제가 밑줄도 긋고 뭔가 써 넣기도 했더라고요. `이렇게 나도 인용문 넣어 써 볼 것.`이라고 생각하며 읽었던 글이더라고요.
님 덕분에 두 번 읽은 책 목록이 추가되었어요. 감사드려요.

예. 잘 보냈어요. 님도 명절 잘 보내셨나요?

stella.K 2015-10-01 14:32   좋아요 0 | URL
문체가 좋아서 베껴쓰기를 해도 좋겠다는 생각도 들어요.
물론 생각만 그렇게 할뿐 실제로 할 것은 아니지만...ㅠㅋ
 
[세트] 우리가 볼 수 없는 모든 빛 - 전2권
앤서니 도어 지음, 최세희 옮김 / 민음사 / 201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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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에 대한 내용 요약 같은 것은 생략한다.

그저 단지 읽으면서 생각한 것들이나 느낀 것들을 간략하게 쓰는 것으로 리뷰를 대신할까 한다.

 

이 책을 읽고 있노라니 문득 오래 전에 본 영화 <파이란>이 생각이 났다. 물론 내용은 이 책과 전혀 같은 것이 아니지만 영화는 남녀 주인공이 한 공간에서 잠시도 만나지 않는다. 그들에 인연이 있다면 위장결혼을 했다는 것과 몇 통의 편지를 남자 주인공이 받는 것이 전부다. 그런데도 잔잔한 감동이 어느새 관객을 압도하지 않는가?

이 작품도 일종의 그런 얘기다. 책 표지에 나왔던 대로 단 한 순간의 만남을 위해 소년과 소녀는 10년의 세월이 필요했다. 그것도 소녀는 그나마 선청성 백내장이다. 소년은 알아 볼 수 있어도 소녀는 알아 볼 수도 없다. 스쳐지나가듯할 뿐인데 바로 이것에 굉장한 의미가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을 작가는 의미심장하면서도 시적으로 잘도 포착해 낸다.

 

읽으면서 사람은 참혹한 전쟁과 고난 속에서도 더 단단해지고, 결속하고, 서로를 보듬는 존재의 역설이 있고 위대함이 있다. 또한 그것이 미래로 나가는 힘을 발휘하게도 된다. 작품은 그것을 보여주려 했던 것 같다. 그래서 사람들은 전쟁문학이란 장르에 매료 당하는 것이고. 문득 <안네의 일기>도 생각나게 만들었다.      

 

그런데,  글쎄.. 이 책 너무 기대를 하고 봐서인지는 몰라도 나 개인으론 이 작품이 생각만큼은 아니었다. 어쩌면 그리도 감정이입이 안 되는 것인지... 

마케팅을 위한 것이긴 하겠지만 책 겉표지에 나온 이 작품에 대한  상찬이 너무 과한 건 아닐까 싶기도 하다. 물론 이미 올해 미국의 권위있는 플리처상을 타버렸으니 이 작품에 대한 반박을 하기는 좀 어려울 것 같고, 어쨌든 내 개인의 느낌은 생각 보다 좀 많이 지루했다는 것이다.

 

그에 대해 몇 가지 이유를 들자면, 이 책은 묘사는 뛰어날지 모르지만 서사가 약하다. 이 작품은 제 2차 세계대전을 배경으로 하고 있지만, 굳이 2차 세계대전으로 하지 않아도 될 것도 같다. 그냥 코소보 사태나 스페인 내전 뭐 이런 것을 배경으로 해도 작품은 충분히 성립이 된다. 어차피 전쟁 상황에서의 인간군상과 내면을 그렸으니까. 단지 2차 세계대전을 설정하는 건  지금까지 문학이 그것을 익숙하게 그려왔기 때문은 아닐까?

 

또한 나는 이 책의 작가가 스스로가 갖는 뭔가의 한계를 다른 무엇으로 메꾸려 했다는 인상을 받았는데 그것이 지나친 서정적 묘사에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때론 전쟁 상황을 지나치게 감상적으로 그리고 있다는 느낌을 받는 것이다. 물론 인간의 운명이 처절할 수록 더 빛나는 뭔가가 있는 법이긴 하다. 그것을 지나치게 감상적으로 그리려 했던 것은 아닌지? 또한 그것을 인간 본성을 그렸다고 착각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인간 본성은 인간 서정과는 다른 것이다.

 

그러고 보니 저자가 1973년 생이란다. 전쟁을 격어보지 않은 세대다(모르지. 남의 전쟁에 참전은 했을지). 단순히 상상력만으로 이만큼 쓰기도 쉽지는 않겠지만 요즘 문학의 지적하는 바가 묘사는 있으나 서사가 부족하다는 것인데 이같은 지적은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미국도 왠지 별로 다를 바가 없어 보이기도 하다. 서사가 부족하니 소설이 자꾸 진부해지고 재미없어지는 것이 아니겠는가?       

  

어쨌든 느낌은 자유고, 나의 허접한 리뷰를 저자가 알아 볼 리는 없으니 나 혼자 맘대로 지껄여 봤다. 물론 이 책을 번역하고 출판한 출판사에 조금은 미안한 감이 없지 않지만 지금까지 리뷰를 보면 너무 칭찬 일색라, 나 한 사람 정도는 반기를 들어도 무방하리라고 본다. 물론 문체 자체는 나무랄 때는 없어 보이긴 하지만 문학을 문체로만 보는 건 너무 안일하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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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yrus 2015-08-06 20: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자가 1973년생인데 세계대전을 배경으로 소설을 썼다니, 특이하네요. 작가도 세계대전의 역사를 학교에서 배웠을 것이고, 전쟁을 배경으로 한 작품들을 읽어봤을 거예요. 그래서 작가 자신만의 서사와 표현이 나오지 못했을 것 같아요.

stella.K 2015-08-07 12:38   좋아요 0 | URL
내 말이! 그런데 어떻게 이런 작품에 플리처상이라는 건지
이해가 안 가더군. 하지만 그런 생각 보단 내가 문학을 이해하는 수준이
낮은 건가? 죄괴감이 들기도 해.
그런데 내가 알기론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가 플리처상을 받은 것으로
알고 있거든. 그 작품 보면 그야말로 스펙타클 장쾌한 서사시란 느낌이
팍 오잖아. 아무리 현대문학이라고 하지만 이렇게 묘사만 있고 서사에
약한 작품에 이런 영예를 준다면 문학상은 이미 권위를 잃었다고 봐야하지
않을까 싶기도 해.ㅋ

페크pek0501 2015-08-07 13: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스텔라 님.
긴 책을 읽으셨군요. 저도 두 권짜리 외국소설 샀는데 모셔 두고만 있어요.ㅋ
올해 안에 읽는 게 목표예요. 책이 밀려 있어서요.

<인간의 굴레에서>1, 2는 두 권 합해 천 쪽이 넘어서 읽고 나니 뿌듯하더라고요.
그런데 소설 독서의 단점은 다른 책과 함께 읽을 수 없음, 이에요. 쭉 이어져야 하니까요.
뒷이야기가 궁금해지기도 해서 말이죠.
에세이 독서의 장점은 이 책, 저 책 맘대로 왔다갔다 하면서 읽을 수 있다는 점이에요.
그래서인지 에세이가 편하더라고요. 배울 점도 많고요.

민음사 출간의 신간인데 별로인 모양이군요.
맞아요. 반기를 드는 리뷰를 누군가는 쓰는 게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2015-08-07 15:4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5-08-07 13:5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5-08-07 15:29   URL
비밀 댓글입니다.
 
나의 할아버지가 탈옥한 이야기 - 중국 문화대혁명을 헤처온 한 남자의 일생
옌거링 지음, 김남희 옮김 / 51BOOKS(오일북스) / 201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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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얼마 전, 영화 <5일의 마중>을 감명 깊게 본적이 있어 이 책이 나왔을 때 관심을 갖지 않을 수가 없었다. 사실 난 소설이 영화화 되는 것에 다소 부정적인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물론 소설이 영화화되면 나름 좋은 것도 있을 것이다. 예를 들면, 소설을 영화화 하면 안정감을 유지할 수 있다. 이야기가 잘 나가다가도 마지막에 뭉개져버리는 영화나 드라마가 얼마나 많은가? 어쨌든 이런 저런 장점을 들어 언제부턴가 그것을 너무나 당연시 여기는 풍조가 있는 것 같아 마뜩치 않았다. 그렇게 해서 영화 또는 드라마화하니 사람들이 더더욱 소설을 안 읽는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나의 기우인지도 모르겠다. 지금은 영화와 소설이 공생관계를 너무나 잘하고 있지 않은가? 영화가 뜨면 소설을 읽어보라고 권유를 받고 있다. 분명 영화가 다 담지 못하는 걸 소설은 섬세하면서도 자유롭게 담아내고 있다. 여기서 자유롭다는 것은, 영화는 과학이고,  2시간 안팎이라는 제약을 받기 때문에 그 흐름에 있어 여유를 부릴 틈이 없다. 하지만 소설은 작가가 쓰고 싶은대로 맘껏 쓸 수가 있다. 물론 이것은 내 말이 아니고 폴 오스터가 한 말이다. 이에 대해 <퇴마록>의 작가 이우혁은 한 술 더 뜬다. 어떠한 작품이 영화화 됐을 때 당장 볼 생각하지 말라고 한다. 그렇게 되면 그 본 영상에 갇혀 더 이상의 상상력을 발휘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런데 비해 작품을 문자로 읽게되면 연상을 하게되기 때문에 상상력이 좋아진다는 것이다. 그뿐인가? 영화 평론가 이동진도 소설가 김중혁과 나눈 대담에서 영화 보다 소설의 우수성을 자주 언급하곤 했다.

 

뭐 이쯤되면 소설 읽기 싫으면 영화 본다고 하지만 지금은 작품을 제대로 음미 한다면 아무리 영화로 봤다고 하더라도 소설을 읽어주는 것이 꽤 있어 보이지 않을까? 소설과 영화가 어떤 점에서 서로 조우할 수 있는지, 또 어떤 점에서 소설이 영화를 능가하고 있는지 알아야 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이 소설은 영화와 달라도 너무 많이 다르다. 그래서 어디에 손을 들어줘야할지 다소 난감하다. 영화 <5일의 마중>이 이 작품의 원작이라기 보단 이 소설에서 영감을 받아 만들어진 영화라고 해야 옳지 않을까? 그래도 영화가 워낙에 강렬해 소설을 읽으면서도 뭔가 모르게 자꾸 그 족적을 찾고 싶어진다. 그래서 겨우 찾아낸 공통점이 루엔스의 아내 펑위완이 심인성 건망증이라는 것 하나 건졌다고나 할까? 그러면서 위대한 것이 영화와 소설에 각각 하나씩 있다고 생각한다. 

 

우선 소설의 위대함은 유장한 필력이라고 생각한다. 어떻게 작가가 자신의 아버지도 아닌 할아버지의 이야기를 이렇게 꼼꼼하고도 유장하게 쓸 수가 있을까? 또한 혁명의 물결속에 한 개인과 가족이 변화되어 가는 과정을 어떻게 그렇게 치밀하게 쓸 수 있을까? 그런 역사의 흐름속에서도 변하지 않은 인간의 가치를 작가는 한 올의 흐트러짐 없이 썼다. 그래서 단점이라면 영화를 이미 보고 이 소설을 읽는다면 다소 지루할 수도 있을 것 같다. 그러나  소설이 주는 연상은 극대화 된다. 

 

또한 영화가 주는 위대함이란 결국 감독의 영화에 대한 천재적 감각을 얘기하지 않을 수 없는데, 어떻게 이 유장한 소설을 읽고 극적인 요소와 영상적 요소를 끄집어 내서 스크린에 옮길 수 있었느냐는 것이다. 문화대혁명이 끝나고 아내가 사는 집 실내에 환하게 드리워진  햇빛이라든지, 남편이 돌아왔음에도 원작엔 없는 비가 오나 눈이 오나 5일마다 남편을 역에 나가 기다리는 펑위완의 아타까운 운명은 정말 영화적으로 잘 살렸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지금도 그 영화의 잔상이 남아 아직은 영화에 손을 들어 주고 싶다. 하지만 훗날 이 책을 다시 읽게 된다면 이 책의 위대함에 다시 한 번 감동하지 않을까 한다. 그리고 항상 느끼는 거지만 중국 문학은 범접하기 어려운 뭔가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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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7-09 00:0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5-07-09 12:56   URL
비밀 댓글입니다.

페크pek0501 2015-07-09 17: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영화와 소설을 다 본 작품으로 <위대한 개츠비>가 있어요.
대부분 영화보단 소설이 나은 법인데, 이 작품은 소설보단 영화가 나았어요. 저는 그랬어요.

<안나 카레니나>, <닥터 지바고>,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 등 그런 작품이 많지요.
영화를 잘 만들어서인지 영화로 봐도 실망하지 않는 영화들 아닙니까.

그래도 명작이 있다면 선택할 때 저는 영화보단 책을 택하겠어요. 심리 묘사가 궁금하거든요.
영화에선 묘사가 없으니 생략된 게 많잖아요. 둘 다 보는 건 좋은 공부가 되겠죠...



stella.K 2015-07-09 18:46   좋아요 0 | URL
그렇죠. 그리고 작가 저마다 문체가 있잖아요.
그걸 아는 것도 묘민데 말입니다.
예전엔 읽는 게 고통이기도 했는데 이걸 알고부터 읽는 게
확실히 의미있는 일이구나 싶어요.^^
 
연인 심청 - 사랑으로 죽다
방민호 지음 / 다산책방 / 201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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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나 잘 알고 있어서 새삼 다시 읽을 필요가 없을 것 같은 이 이야기를 나는 어른이 되어 다시 읽었다. 저자는 왜 우리가 잘 아는 심청전을 연인 심청이란 새 옷을 입혀 독자들 앞에 내놓은 것일까?

무엇보다 저자는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설화 그대로를 복원해내고 있다. 하나 다른 것이 있다면 원작에 없는 윤상이란 캐릭터를 첨가 시켰다는 정도다. 그렇게 하므로 심청이 얼마나 희생적이고 이타적 인물인가를 더 강하게 어필한 것으로 보여 진다.

보통 설화는전래 동화란 이름으로 주로 어렸을 때 많이 읽고 성인이 되어서는 여간해서는 접하질 않게 된다. 왜 그럴까?

어렸을 때 이미 전래 동화로 접해 온 터라 굳이 성인이 되어서까지 다시 알아야할 필요성 못 느껴서일까? 물론 그것도 이유는 될 것이다. 하지만 그것만이 이유의 전부는 아닐 것이다.

심청전만 해도 우리가 잘 알고 있듯이 부모에 대한 효를 강조하고 있다. 하지만 성인이 되어서도 효를 강요받는다는 것이 부담스럽지는 않는가? 부모님 살아실제 섬기기를 다하라고 하지만 이 말을 실제로 지키고 사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마음은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다고 심청전을 읽으면 왠지 마음이 편치가 않다. 누구든 심청이 되기를 원하지만 누구도 그 인물에 도달할 수 없음을 통감하니까. 그래서 우린 심청전을 박재된 이야기로만 취급할 뿐이다.

 

그런데 이 책을 읽으니 새삼 심청전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 보다 훨씬 복잡한 구조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물론 이 이야기는 우리가 잘 아는효도하는 심청이 아니라 사랑하는 심청으로 재해석된다.

하지만 난 현대의 페미니즘 영향 때문일까? 그 보다는 왠지 억압 받는 여성으로써의 심청이 더 많이 느껴져 읽으면서도 마음 한 켠이 불편했다.

그것은 심청의 아버지 심학규의 캐릭터 때문이었던 같은데, 이 작품에서의 심학규는 원작 보다 훨씬 더 현실적이고 자신의 욕망이 충실하면서 한편으로는 한 없이 나약한 인물로 그려지고 있다. 다시 말하면, 두 눈이 멀쩡한 아비여도 매번 동냥젖을 물리기가 쉽지 않았을 텐데 어렵게 동냥젖을 먹여 키웠다는 그 사실로 심청은 아비에게 효도할 것을 강요받는 인물처럼 보이는 것이다.

그것엔 어떤 심리적 기저가 숨어 있는 것일까? 태어날 때부터 어미를 잡아먹은 운명과 아비가 자신을 동냥젖으로 어렵게 키웠다는 이 원죄 의식이 심청을 옥죄진 않았을까? 그렇다고 해서 그 운명을 거스르기 보단 아비를 위해 죽는 것이 당연하듯 인당수에 자신을 수장시키는 숙명을 택하기까지 한다. 바로 이러한 설정이 편치가 않았던 것이다.

물론 어려운 여건 속에서 자식을 그만큼 키운다는 건 쉽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그만큼 키웠으니 그만큼의 봉양이 당연한 것처럼 여기고 한 세상을 편히 살려고만 하는 심학규가 왠지 정당해 보이지는 않는다. 물론 자식으로부터 일정 정도의 봉양은 가능하겠지만 인당수의 수장은 아무리 설화라고는 하지만 과분하고 동시에 과장 돼 보인다.

거기엔 또한 남존여비의 사상이 깔려 있음을 부인할 수가 없다. 춘향전만 해도 그렇다. 여자에게만 정조를 강조하고 있지 않은가? 그렇게 모진 시련과 고난을 견디다 보면 사랑도 이루고 축복 받고 잘 산다는 인과응보, 사필귀정의 논리가 숨어있다.

아무튼 이 이야기는 여자의 희생을 무조건 당연하게 그리고 있다.

그렇지 않은가? 심청의 어미는 심청을 낳다 죽었고, 심청은 아비에게 희생을 하며 동시에 그 아비 때문에 사랑도 이루지 못한다. 또한 귀덕 어멈은 자신의 젖을 희생해 청이를 키워야 했고, 그 반대 선상에 있는 뺑덕 어미는 몸을 함부로 굴린 덕에 성병 보균자인 동시에 피해자며, 한평생 창녀와 도둑의 굴레 벗어나지 못한다.

이런 극단적인 인물군상은 하나의 아름다운 사랑이야기에 쓰일 법한 인물이라기 보단 오히려 페미니즘의 관점에서 보면 논란의 여지가 아주 많아 보이는 것이다. 그러면서 현대에 들어와서는 수많은 계약이론을 탄생시키는 듯도 하다. 이를테면 사랑에 이런 저런 계약 이론을 끼워 넣는 것이다.

심청전 같은 설화를 들이대면서 효도를 강요하지 말아야 한다고. 그 자식도 인간으로 누려야 하는 가치와 권리가 있으므로 아무리 부모 된 자라도 그것을 침해해서는 안 된다고 말하는 지도 모른다. 또한 자식을 진정으로 사랑했는가? 그렇다면 그 자식도 응당 부모에게 효도할 거라고 말하고 싶어지는지도 모른다. 그러므로 누구도 효를 강요하면 안 된다고 선을 그어 버리는 지도 모르겠다.

아는 것이 병일까? 이렇듯 성인이 되어 읽은 심청의 이야기는 어릴 때 읽은 그것 보다 순수하거나 더 이상 아름답게만 느껴지지 않는 것이다.

그러다 난 어느 순간 내가 너무 이런 시각에 경도되어 있었단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것은 저자의 해설을 읽을 때였는데 그 부분을 읽으니 또 다른 해석도 가능하겠단 생각도 든다.

저자는 말한다.‘이 세계를 구할 수 있는 것은 자기를 버리고 남을 위할 줄 아는 이타적 사랑 밖에 없다. <여인 심청>은 이타적 사랑의 이야기다. 그것을 실천해가는 운명 개척의 이야기(398~399p)’라고 했다.

그렇다. 여인이 죽음에 대한 두려움과 뼈가 으스러지는 고통을 참으면서 자식을 낳는 것을 두고 이타적 사랑이 아니면 불가능 하다고 했다. 그러므로 여성의 자궁을 이타적 사랑의 근원으로 보는 해석도 있다. 바로 이런 사랑이 아니면 세상을 구원할 방법이 없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가 십자가에 고난당하고 부활한 것이 아니겠는가? 인당수에 자신을 희생시키는 것과 연꽃으로의 부활은 예수님의 그것과 흡사해 보인다.

그런데 또 드는 생각은 이 심청전의 최초의 설화자 즉 원작자는 누구였을까를 생각해 본다. 작자 미상일 테니 정확히 누구라고는 말할 수 없겠지만 남자였을 거란 짐작은 어렵지 않다. 그 시대도 여자와 어린 아이는 인간으로 대접도 못 받았던 시대였을 테니. 이야기를 다룰 수 있는 사람은 아무래도 여자 보단 남자가 더 가능성이 높지 않을까? 그리고 남자가 아니면 이런 여인상을 그릴 수가 없다.

남자의 로망은 시대를 불문하고 뮤즈였다. 그래서 고래로 저마다 이야기를 다룰 줄 아는 남자는 구원의 여인상을 즐겨 쓰길 마다하지 않다. 그렇다. 이 세상을 구원할 방법은 사냥 기질에 영역 확장의 기질만 가지고 있는 남성성만을 가지고는 구할 수 없다. 희생을 전제로 한 이타적 사랑이 세상을 구원하는 것이다.

어쨌든 현대에 들어와서 자기희생이니 이타적 사랑은 또 얼마나 생뚱맞은 것이 되어 버렸는가? 하지만 세상의 모든 이야기는 반면교사 의 성격을 가지고 있으면서 인간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를 끊임없이 역설하고 있다. 그러니 이야기에서의 자기희생과 이타적 사랑은 얼마든지 변용가능하다.

그런데 남자들은 이렇게 구원의 여인상을 즐겨 쓰면서 자기희생이나 이타적 사랑을 여성에게 슬쩍 미루는 것처럼도 보인다. 또 그런 점에서 어찌 보면 예수님의 고난과 부활은 자궁 달린 남성 즉 구원하는 남자 또는 이타적 사랑을 보여주는 최초의 남성상을 보여주는 건 아니었을까?

 

진정한 작가정신이란 무엇인가를 생각해 본다.

작가는 말한다.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은 믿지 못하는, 눈에 보이지 않는 힘으로는 세상을 바꿀 수 없다고 믿는 우리들 현대인의 어리석음에 관한 것... 상상적인 것, 환상적인 것, 마음속에서만 작용하는 것, 마음이 세상을 바꿀 수 있다(397p)고 했다. 나는 그의 말에 무조건 동의한다.

그래서 그렇게도 눈을 뜨길 원했던 심학규는 눈을 뜨자 자신의 어리석음을 통탄한 나머지 산속으로 숨어들었고, 윤상은 심청을 진정으로 사랑했던 그 마음의 작용에 따라 인두로 눈을 지지는 고통 속에 죽어갔어도 고귀하게 희생할 줄 알았나 보다.

그렇다면 애초의 어줍지 않은 나의 페미니즘의 사고방식을 잠시 내려놓고 저자의 의도와 생각에 깊이 침잠해 보는 것도 나쁘지 않아 보인다.

아무튼 난 이 책을 무척 흥미롭게 읽었다.

저자 특유의 문체와 사유의 깊이에 감탄했고, 새로운 캐릭터와 이야기를 만드는 것도 작가의 몫이긴 하지만 기존에 있었던 이야기를 재해석 해 오늘날에 재조명 하는 것 또한 역량 있는 작가의 능력이라고 생각한다. 그런 의미에서 그동안 평론과 학자의 길을 걸었던 저자가 작가로서의 가능성을 유감없이 펼쳐 보여줬다고 생각한다.

이 이야기를 200번이나 고쳐 쓴 작가의 노고에 진심어린 박수를 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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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립간 2015-06-26 14: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익숙한 것을 낯설게 보기. 이것이 철학이라고 합니다. 과학은 철학의 가지枝죠.

stella.K 2015-06-26 14:43   좋아요 0 | URL
그러게요. 그런 의미에서 예전에 읽은 책 다시 한 번
읽어보고 싶다는 생각을 해요. 지금은 그 책이 또 어떤 느낌일까
궁금하기도 해요.^^

페크pek0501 2015-06-26 14: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지금 생각나는 것. - 좋은 글이란 새로운 무엇을 보여 주는 글이거나 새롭지 않다면 새롭지 않은 무엇에 대해 새롭게 해석하는 글이거나 둘 중의 하나, 라는 것. 물론 둘 다 영양가 있어야 하겠죠.

재해석하는 능력이 작가들(또는 글을 쓰는 모든 이들)에게 필요하다는 생각을 요즘
<정희진처럼 읽기>를 읽으며 했어요.

stella.K 2015-06-26 15:11   좋아요 0 | URL
맞아요. 그런 의미에서 방민호는 소설가로서도 손색이 없어 보였어요.
원전을 해치지 않으면서 작가 나름의 상상력을 유려하게 잘 펼쳤다고 봐요.
그런 의미에서 능력자죠.^^

곰곰생각하는발 2015-06-26 19: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좋은 해석이란 익숙한 것을 낯설게 보기`가 아닌가 싶습니다. 익숙한 것을 익숙한 방식으로 풀어내는 것은 정말 짜증나는 경우죠. 중학교 국어시간도 아니고 말입니다. 가령 < 흥부전 > 은 착한 일을 하면 복을 받는다는 내용이다... 이런 거 누가모릅니까 ? 이렇게 쓰면 짜증이 나요..ㅎㅎㅎ

stella.K 2015-06-27 14:33   좋아요 0 | URL
그렇죠. 해 아래 새 것이 없다고 했는데 기존에 있는 이야기를
어떻게 자기만의 스타일로 바꾸냐가 관건이라잖아요.
중반 정도까지는 좀 디테일만 살렸다 뿐이지 뭐 다를 게 있나
그런 생각도 들었는데 결말이 나름 신선했어요.
아, 지금은 또 읽은 지 좀 되는지라 덤덤합니다만,
끝까지 읽히는 힘은 있는 것 같더라구요.^^

곰곰생각하는발 2015-06-26 19: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나저나 방민호라는 사람 혹시 평론가 아니었나요 ?

stella.K 2015-06-27 14:26   좋아요 0 | URL
그거게요. 평론가가 소설도 잘 쓰면 어떡하라는 건지...ㅉ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