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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물, 한쪽 눈을 뜨다 ㅣ 문학동네 청소년 7
은이정 지음 / 문학동네 / 2011년 2월
평점 :
몇년 전, 어떤 일 때문에 한 중학교를 방문한 적이 있다. 그렇게 중학교를 방문하기는 정말이지 처음있는 일이었다. 그런데, 그때 내가 느꼈던 당혹감을 아직도 기억한다. 그것은 바로 책상 때문이었다.
책상이 좀 낡기도 했지만 작은 듯도했다. 성인인 내가 보기에 작아 보이는 책상이 과연 아이들에겐 맞는 것인지? 아니면 아이들도 작다고 생각하는데 생긴 게 그 모양이니 별 수 없이 쓰고 있는 것인지 알 수가 없었던 것이다. 전자라면 상관이 없는 일이다. 하지만 후자쪽이라면 다소 문제가 있어 보였다. 그러면서 또 하나 드는 생각은, 내 중학시절 썼던 책상과 의자를 나는 어떻게 느꼈던 걸까? 하는 거였다. 그땐 나름 크게 느껴졌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런데 새삼 '겨우 요거였어?' 하며 오히려 실망감이 느껴질 정도였다. 그만큼 같은 물건이라도 그 느낌이 다르다는 것이다. 요는, 아이들에게 맞지 않을 것만 같은 책상은 교육의 문제점을 상징적으로 반영하는 것일 것이며, 나는 그 시절 학교를 그저 두려움의 대상으로만 생각했는지 모르겠다는 것이다.
현대식 학교가 생긴이래, 교육은 한번도 사람에게 맞춘 적이 없다. 오히려 사람이 교육에 맞추어졌다. 그래서 벽돌공장에서 규격에 맞혀 벽돌이 찍혀 나오듯, 학교는 그렇게 규격에 맞는 인간만을 만들어 세상으로 내보냈다. 그 규격에 맞는 인간이란, 즉 세상을 자유자제로 유영할 수 있는 소위 말하는 우성인자이거나, 적어도 세상에 도태되지 않고 살아남을 인간을 의미한다. 학교는 작은 사회다. 여기서 잘 살아남는 자가 사회에서도 잘 살아남을 것이고, 여기서 도태되는 자가 사회에서도 도태될 확률이 높다. 즉 잉여인간. 루저가 되는 것이다.
작가가 영섭의 시각으로 학교, 특히 교실을 야생의 사바나로 설정한 건 적절한 설정같다. 그리고 영섭이 이야기가 진행되는 내내 자신을 변신이 가능한 동물로 생각하는 건 씁쓸하지만 공감한다. 이는 어찌보면 그렇게 생각하므로 자신을 숨기려는 일종의 자폐적 성향 같기도 하다. 그렇게라도 생각하지 않으면 이 정글같은 교실에서 살아 남기란 쉽지 않을테니. 물론 그것은 일종의 자기방어적 사고일텐데, 일견 이해가 가면서도 역시 이런 식으로 자기 자신을 숨기는 영섭에게 씁쓸한 연민이 느껴졌다. 그리고 그랬던만큼 내가 어떤 식으로든 이 작품에 감정이입을 하고 있었다는 말이 될 것이다.
이 책을 읽으면서 나는 기시감처럼 사춘기 시절, 그것도 중학시절과 맞닥트려질 수 밖에없었다. 그때 난 영섭이만큼도 영리하지도 못했다. 영섭은 그래도 학교를 사바나의 세계로라도 표현할 수 있었지, 하지만 난 도무지 이 학교라는 곳을 무엇으로 바라봐야 하는지 알지 못했다. 어떻게 보면 굉장히 이질적인 블랙홀 같은 곳이다가도, 그럭저럭 인간이 정붙이고 살만한 곳이란 생각을 하루에도 몇번씩 되풀이 해 가며 살았던 것 같다.
분명 이 학교에서 살아남지 못하면 다른 어떤 곳에서도 살아남지 못할텐데, 나는 아침에 눈만 뜨면 학교 갈 일이 끔찍했고, 무사히 학교를 다녀오면 그 사실에 안도했다. 학교가 주는 구속이 싫었고, 선생님의 폭압내지는 압제도 내겐 끔찍했다. 무엇보다 학교는 나 있는 그대로가 인정될 수 없다는 사실이 서글펐던 것 같다. 작품 속 태준을 보라. 그에게도 문제가 없는 건 아닌데, 단지 공부 하나 잘 한다는 이유만으로 무난한 학교 생활을 하고있다. 어찌보면 공부를 잘하는 사람이 세상을 별 어려움없이 잘 살아갈 사람들이다. 그러나 우리나라는 어느새 이들을 영웅시해 왔다. 하지만 그들이 공부에서만 앨리트지, 삶에 있어서도 앨리트는 아니지 않는가?
난 지금도 학교에 대한 잊혀지지 않는 기억이 있다. 중학교 들어와서 첫 성적표를 받던 날이다. 다른 과목은 그냥 그럭저럭 점수를 맞았는데, 수학에서 기대 이하의 점수를 받아 전체 성적이 한참 아래로 곤두박질 쳐버린 것이다. 어떻게 수학 하나 잘못했다고 이렇게까지 사람이 낮은 등수를 받아야 하는 건가? 나의 학교생활도 순탄치는 않겠다는 생각을 순간하게 되었고, 역시나 난 학교 적응이 쉽지 않았다. 작품에서 누구도 영섭에게 사바나에선 이렇게 살아가야 하는 거라고 가르쳐 주는 사람이 없는 것처럼, 나 역시도 누구에게도 학교를 견디는 법을 가르쳐 주는 사람이 없었다. 누구든 학교의 지도방침에 따라 올 사람은 따라오고, 못 따라오는 사람의 등에는 회초리 아니면 무관심만이 존재할 뿐이다. 거기서 내가 숨을 수 있는 곳은 책뿐이었다. 책은 나의 따분한 학교생활을 버티게 해 줬고, 학교가 주는 두려움을 어느 정도 완화해 주었다. 그것 외에 내가 학교를 이길 수 있었던 것은 별로 없었다. 작품 말미에 영섭이 변하여 모르는 아이들의 물건 갈취하고 장난을 쳐 보는 건 제목과 잘 어울리는 행동 같기도 하다는 생각이 든다. 그렇게 모르는 사람은 순하다가도 돌출행동을 하게 되는 것이다.
솔직히 난 그렇게 첫 성적표를 받아든 날, 속으로 뭔가 새로운 기준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어떻게 한 과목에서 낙제를 받았다고 이렇게까지 열등해야 하는가? 억울했다. 자신이 잘하는 것이 무엇이고, 그것에서 인정을 받는 이런 세상이 되는 것이 필요하지 않을까? 하지만 나의 생각은 생각에서 머무를 뿐이었다. 그건 기준을 바꿔야 하는 문제인데 그러기엔 난 힘이 없었다. 그래서 못하는 사람은 계속 못해야 하는 것으로 알고 그 시절을 보냈다. 그때 누구든, 내가 수학을 못하는 것은 전체를 못하는 것이 아니며 또한 항상 못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고 말해주는 사람이 있었더라면 나는 그 시절을 조금 편하게 보냈을지도 모른다. 그 시절 하나를 못하는 것에 대한 동공이 너무 컸기 때문에 무엇으도 메울 수 없을 거란 두려움이 컸다. 그래서 현실을 직시하고 싶지 않았고, 때문에 내가 잘 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해서도 알고 싶지 않았(던 것 같)다. 눈을 떠야할 때 눈을 감아버린 것이다. 작품에 나온 영섭이뿐만 아니라 등장인물 모두가 다 그렇지는 않을까? 그저 앞만 보고 달리라고만 하지, 왜 달려야 하는지, 어떻게 하면 잘 달릴 수 있는지 가르쳐주는 사람이 없다. 그래서 하루가 멀다하고 성적비관 자살이 나오는 것이 아닌가? 그렇게 죽기에는 그들의 젊음은 아직 저리도 아름다운데 말이다.
나는 우리의 청소년과 젊은이들이 세상이 이미 만들어 놓은 그물과 기준에 맞추어 살게 되길 바라지 않는다. 그들 자신이 기준이 되고, 새로운 길을 만들어 갔으면 좋겠다. 나의 청소년 시절은 이미 오래 전에 지나갔고, 그 시절엔 권력이 지배하던 시절이었기 때문에 한 사람, 한 사람이 개성과 장점을 인정받기 어려운 시대였다. 하지만 세상은 이제 달라졌고, 달라져야 한다. 한 사람, 한 사람이 인정 받고 존중 받는다면 세상은 진정한 매니아의 세상이 될 것이다. 세상에 장점이 없는 사람은 없다. 그런 의미에서 매니아는 있을 수 있어도 루저는 없어야 한다.
이 책을 읽는 사람이라면, 여기 등장하는 아이들이 앞으로 어떤 아이가 될 것인가? 생각하지 않을 수가 없을 것이다. 이들은 지금까지의 기준을 적용한다면 힘없는 루저가 될 확률이 높아 보인다. 그 공부 잘한다는 태준이까지도. 하지만, 새로운 기준으로 이들을 바라봐주고, 각자가 자신의 존재를 자각한다면 바람직하게 살아갈 수도 있을 것이다.
이 작품은 청소년의 내면을 시의적절하게 잘 표현해 준 작품이라고 할 수 있지만, 어떤 사건이 있다든지 그래서 반전이 있는 작품은 아니다. 그냥 이들의 내면 세계는 현재진행형이며 가변적임을 암시해 준다.
청소년을 괴물에 비유한다지. 어린이도 아닌 어른도 아닌 애매한 존재. 그들은 이제 한쪽 눈을 떴다. 한쪽 눈만 가지고는 세상을 다 안다고 할 수 없을 것이다. 이들의 이러한 시기는 또 지나간다. 그러면 나머지 한쪽 눈도 뜨게 되겠지. 그들이 양쪽눈을 다 떴을 때 희망을 발견할 수 있도록 세상이 조금이라도 좋은 세상이 되었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