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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인과 바다 (무선) ㅣ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91
어니스트 헤밍웨이 지음, 이인규 옮김 / 문학동네 / 2012년 1월
평점 :
이 소설을 보면 이 그림이 생각이 난다
부끄럽게도 난 이제야 헤밍웨이의 작품을 읽었다. 하지만 난 읽기를 마쳤을 때 오히려 이때 읽기를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것은, 얼마 전 보도에 따르면, 최근 헤밍웨이의 저작권 기간이 만료가 됐는데, 이제까지 우리가 본 헤밍웨이의 작품은 해적판이거나 의역을 한 것이라고 한다. 그런데 저작권 기간이 만료가 됨에 따라 앞으로 제대로 된 번역본이 나올 것이며, 그의 다른 작품들도 속속 다시 출판되거나 미번역 작품들이 나올 것이라고 한다. 반가운 일이다. 그리고 그에 따라 헤밍웨인의 이 작품이 새롭게 번역되어 나왔고, 그러니 바로 이때 읽은 것이 잘 된 일이 아닌가. 하지만 꼭 그런 이유가 아니더라도, 고전을 읽으라고 닥달 받았던 청소년 시기에 이 작품을 읽었더라면 내내 고개를 갸웃거렸을지도 모를 일이다. 그런데 나는 이제야 비로소 이 작품을 읽고 '아, 그런 거구나. 과연 그런 것이었구나.' 조용한 탄성을 내질렀다.
알겠지만 이 작품은 줄거리로만 보자면 너무나 간단한 이야기이다. 노인이 고기를 잡으려고 바다에 나갔지만 벌써 84일째 아무 것도 못 잡고 있다가 85일째에 큰 물고기(만새기)를 잡았고 돌아오는 길에 고래에게 고기를 내주고 결국 아무 소득도 없이 피곤한 몸이 돼서 돌아온다는 것이 전부다. 물론 중간에 소년도 있고, 소년과 함께 나눈 야구선수의 이야기도 있긴하다. 모름지기 소설이라면 기승전결이 있어 줘야만 할 것 같은데 이 작품에선 그런 것은 없고, 오로지 노인의 기쁘지도 슬프지도 않았을 어제의 연장선과 고기를 잡아 올리고, 고래와의 사투. 그리고 노인의 피곤함이 전부일 뿐이라는 것이다. 그것은 나에게 그림 하나를 연상케 했는데, 그것은 다름아닌 반 고흐의 그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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꼭 노인이 신었다 벗었을 것 같은 남루하고 초췌한 신발이다. 그리고 그것이 노인의 삶을 대변해 줄 것만 같다(밀레도 이 비슷한 그림은 그린 바가 있다. 하지만 우리에겐 반 고흐가 더 익숙해 보인다). 그처럼 이 작품은 마치 한 폭의 그림과도 같고, 영화로 치자면 한 시퀀스에 해당하는 작품 같기도 하다. 한 폭의 그림이 많은 것을 생각하게 만들고, 잘 만든 영화의 장면 하나가 명작을 만드는 것처럼 이 소설은 그렇게 설명되어질 수 있는 것이 아닐까 한다.
나는 생각해 본다
나는 생각해 본다. 이 노인의 젊은 청년기와 장년기는 어땠을까를. 지금의 모습은 과거를 반영하고 있다고 했던가. 왠지 노인의 지난 삶은 지금의 모습과 크게 다르지 않았을 것 같다. 평생 바닷가 주위를 떠나지 않았으며, 바다와 함께 살고, 바닷바람에 깊이 패인 주름이 산티아고를 노인으로 만들었을 것이다. 바다는 인생 어느 시기에 그에게 만선의 기쁨을 맛 보게 해 주었을 것이고, 그것으로 돈을 벌게 해 줬을 것이며, 그 돈으로 술과 잠깐의 방탕으로 여자를 샀을지 모른다. 하지만 왠지 산티아고는 평생 독신으로 살았을 것 같기도 하다. 가족관계에 대해선 말이 없으니 말이다. 근데 또 모를 일이지. 인생 어느 시기에 아내(내지는 동거인)와 함께 살았을지 모를 일이고, 아이는 없거나 먼저 떠나 보냈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 사이 자신을 낳아준 부모님을 떠나 보내고, 아내마저 보내고 지금은 이렇게 혼자가 되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나는 가끔 할머니나 지금은 늙어버린 나의 어머니를 보며 생각해 본다. 그 많은 세월 인생의 헛헛함을 어떻게 견디며 살아왔을까를. 특히 나의 두 할머니에게도 부모님은 계셨을진대 그분들을 보내드리고 인생은 살만하던가를 여쭙고 싶은 때가 있었다. 그러나 끝내 여쭙지 못했다. 벌써 오래전에 두 분의 할머니를 보내드리고, 아버지마저 보내 드리고, 나 역시 나이 들고나니 새삼 여쭙지 않아도 당신들의 마음을 알 것 같다. 그리고 아무렇지도 않은 양 사는 것, 살아내는 것. 인생은 그런 것이었다.
늙는다는 건 무엇인가?
내가 이 책을 이때 읽기를 잘했다는 건, 내 나잇대가 산티아고 노인과 근접해 있기 때문이다. 아직 노년이라고는 할 수 없지만 그렇다고 더 이상 젊다고 할 수도 없는 나이. 젊을 때는 나이든다는 걸 어떻게든, 어떤 식으로든 이해할 수 없었다. 누구 보다 나이를 더 먹었다는 것만으로는 나이들었다는 걸 설명할 수 없다. 그것은 청소년기와 청년기가 다르듯 꼭 나이들어봐야 알 수 있는 또다른 경지를 의미하는 것이었다. 예전엔 감히 상상할 수 없는 것을 그동안의 경험과 연륜을 통해 아직 그 경지에 다다르지 않은 것을 생각하고, 상상하고, 직관하고 싶다. 그래서 나는 이 책을 읽으면서 산티아고 노인과 동병상련의 마음이 되어 공감하고 싶고, 이해하고 싶고, 연민하고 싶었다.
가끔은 내 젊은 날이 몹시도 그리울 때가 있다. 그렇다고 그때가 행복하고 좋았던 것도 아니다. 어느 땐 죽을만치 힘든 때도 있고, 실수투성이어서 다시 생각하고 싶지 않은 것도 많다. 하지만 적어도 지금 보다는 젊다는 것만으로도 사랑스러울 때가 있다. 저 햇빛에는 스펙트럼이 존재하듯이 인생의 나날을 이만큼 보내고 뒤돌아 본 젊은 날의 햇빛속엔 비록 이루지 못한 것들이 수두룩해도 내 인생에 젊은 시절이 있었다는 것만으로도 왠지 그 시절을 용서하고 끌어 안아주고 싶은 때가 있다는 것이다. 산티아고 노인도 그렇지 않았을까? 비록 이루지 못한 지난 날의 꿈들이 있지만 그래도 자신의 것이기에 모든 것을 긍정으로 때론 체념으로 달관하며 지금도 살고 있을 것만 같다.
노년도 생(生)이다
그런데 잊지 말아야 할 것이 있다. 노년도 생(生)이라는 것을. 누가 노인은 힘도 없으며, 옛날이나 추억하는 퇴물이라고 했는가. 그들은 여전히 자신과 필요하면 그의 식솔들까지 책임지고 건사해야 하는 생활인인 것이다. 늙어서 자식들이 호강시켜줄 나이에 생활전선에 뛰어 들었다고 함부로 연민의 눈으로 바라보지 말아야겠다. 그는 그렇게 움직일 수 있는 것이 긍지요 자부심일지 누가 알겠는가. 늙어서 이룬 것 하나 없다고 책망할 것도 아닌 것 같다. 이룬 것이 많으면 무엇하려고? 사람은 사람을 평가할 때 저 사람이 무엇을 하는 사람이며, 무엇을 이루었으며, 재산이 얼마인가 하는 결과로 판단하려고 할 때가 너무 많다. 그런데 사람을 보는 잣대가 그것뿐이라면 노년에 할 일이 없어서 빈둥대는 삶은 나은 것인가? 그런 의미에서 요즘엔 노후대책 세우는 것을 무슨 삶의 완장처럼 생각하는 경향이 있는 것 같은데, 정말 그것만이 완전한 삶일까? 생각해 본다. 노년은 정류장에서 죽음의 버스나 기다리는 얼마 남지 않은 삶이 아니다. 노년도 엄연한 생이고 삶인 것이다.
"하지만 사람은 패배하도록 만들어지지 않았어."
노인은 말했다.
"사람은 박살이 나서 죽을 수는 있을지언정 패배를 당하진 않아."
(180p)
인생이 그러하듯 굴러 떨어지는 바위를 산꼭대기로 밀어올 올려야 하는 시지프스처럼 노인의 삶도 그런 것이다.
노후대책이 세워진 삶이 여유로운 건 사실이긴 하겠지만 그것이 만족한 삶인지는 난 아직 확신할 수 없다. 사람들은 타인을 볼 때 경제적 가치로만 보기 때문에 그 누구도 그런 노인을 염려하거나 격려가 필요한 존재라고 보지 않는다. 그래서 차라리 산티아고 노인 같은 삶이 더 아름답게 느껴지기도 하는 것이다. 망망대해에서 홀로 의지할 것이라곤 바다와 새 그리고 자신 밖엔 없다. 만새기를 기다리는 84일 동안 그가 한 일은 혼자 궁시렁 거리고(정말 우리 할머니도 혼자 궁시렁 거리는 때가 많으셨다), 바닷새와 대답없는 대화를 주고 받는 것 밖에 없었다. 그리고 드디어 만새기를 낚아 올릴 때 스스로를 다잡아야 했기 때문에 자신에게 더 많은 말을 걸고, 후에는 고래와 사투를 벌이느라 고생을 해야만 했다. 그리고 모든 것을 잃고 지쳐 집에 돌아왔을 때 그것만으로도 그는 격려 받기에 충분한 존재였다. 누가 그를 쓸모없는 노인이라고 비난하랴.
그것은 또 어찌보면 성경에 베드로가 예수님을 만나기 전 바다에 그물을 던졌으나 한 마리도 잡지 못한 그 사건과 상치되기도 한다. 산타이고 노인은 중간에 고기를 얻는 잠깐의 기쁨을 얻었지만 결국 아무 것도 얻지 못하는 공수레 공수거란 인생의 법칙에 딱 맞는 결과를 얻었고, 베드로는 예수님을 만난 후 그물이 찢어질 정도로 많은 고기를 길어올릴 수 있었다. 어찌보면 산타이고 노인의 결말이 더 현실적으로 다가온다. 사는 동안 욕심내지 말고, 비록 머피의 법칙과 호사다마의 삶을 살게되는 날이 더 많을지라도 생은 과정이니만큼 과정에 충실하라고 소설은 우화적으로 우리를 교훈하고 있는 것도 같다.
작가의 삶을 생각하다
이 책을 읽으면서 헤밍웨이의 삶을 생각해 보지 않을 수가 없었다. 이렇게 한 폭의 수채화 같은 작품을 남겨놓고 그는 왜 권총자살로 생을 마감했을까. 숙연해졌다. 풍모도 좋아 언제나 남루한 우리네 보통 사람들의 삶을 위로해 줄 것만 같은데 이렇게 우화 같은 소설을 쓰고 정작 자신은 삶이 괴로워 그것을 피해버리고 말았으니 그런 그가 이내 연민에 젖게 만들었다.
더구나 이미 잘 알려진 사실이지만, 이 작품이 나오기까지 그는 150번 가까이 고쳐 썼다고 했다. 그래서일까? 군더더기 없는 문체가 상당히 인상적이다. 이 작품을 두고 하드보일이라고 하는데 그것은 오랜 기자생활로 다져진 그의 문체의 내공에서 나온 것이다. 또 그래서일까? 고기를 잡는 과정, 고래에게 고기를 빼앗기는 과정이 정말 사실적이라 인상 깊었다. 왜 여타의 이름 있는 작가들이 헤밍웨이를 그냥 지나치지 않는지. 왜 그를 큰 산맥이요, 문학적 스승으로 삼는지 알 것도 같다.
150번. 난 지금까지 내 글을 제일 많이 고쳐 본 것이 13번인가 됐던 것 같다. 그러면서 점점 나아지는 것 보단 자괴감에 빠져들곤 했었다. 그런데 그건 정말 아무 것도 아니었다. 오늘 헤밍에이는 여러모로 나를 위로 한다. 그를 사랑하게 된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