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인과 바다 (무선)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91
어니스트 헤밍웨이 지음, 이인규 옮김 / 문학동네 / 201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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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소설을 보면 이 그림이 생각이 난다

 

부끄럽게도 난 이제야 헤밍웨이의 작품을 읽었다. 하지만 난 읽기를 마쳤을 때 오히려 이때 읽기를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것은, 얼마 전 보도에 따르면, 최근 헤밍웨이의 저작권 기간이 만료가 됐는데, 이제까지 우리가 본 헤밍웨이의 작품은 해적판이거나 의역을 한 것이라고 한다. 그런데 저작권 기간이 만료가 됨에 따라 앞으로 제대로 된 번역본이 나올 것이며, 그의 다른 작품들도 속속 다시 출판되거나 미번역 작품들이 나올 것이라고 한다. 반가운 일이다. 그리고 그에 따라 헤밍웨인의 이 작품이 새롭게 번역되어 나왔고, 그러니 바로 이때 읽은 것이 잘 된 일이 아닌가. 하지만 꼭 그런 이유가 아니더라도, 고전을 읽으라고 닥달 받았던 청소년 시기에 이 작품을 읽었더라면 내내 고개를 갸웃거렸을지도 모를 일이다. 그런데 나는 이제야 비로소 이 작품을 읽고 '아, 그런 거구나. 과연 그런 것이었구나.' 조용한 탄성을 내질렀다.     

 

알겠지만 이 작품은 줄거리로만 보자면 너무나 간단한 이야기이다. 노인이 고기를 잡으려고 바다에 나갔지만 벌써 84일째 아무 것도 못 잡고 있다가 85일째에 큰 물고기(만새기)를 잡았고 돌아오는 길에 고래에게 고기를 내주고 결국 아무 소득도 없이 피곤한 몸이 돼서 돌아온다는 것이 전부다. 물론 중간에 소년도 있고, 소년과 함께 나눈 야구선수의 이야기도 있긴하다. 모름지기 소설이라면 기승전결이 있어 줘야만 할 것 같은데 이 작품에선 그런 것은 없고, 오로지 노인의 기쁘지도 슬프지도 않았을 어제의 연장선과 고기를 잡아 올리고, 고래와의 사투. 그리고 노인의 피곤함이 전부일 뿐이라는 것이다. 그것은 나에게 그림 하나를 연상케 했는데, 그것은 다름아닌 반 고흐의 그림이었다.    

 

 꼭 노인이 신었다 벗었을 것 같은 남루하고 초췌한 신발이다. 그리고 그것이 노인의 삶을 대변해 줄 것만 같다(밀레도 이 비슷한 그림은 그린 바가 있다. 하지만 우리에겐 반 고흐가 더 익숙해 보인다). 그처럼 이 작품은 마치 한 폭의 그림과도 같고, 영화로 치자면 한 시퀀스에 해당하는 작품 같기도 하다. 한 폭의 그림이 많은 것을 생각하게 만들고, 잘 만든 영화의 장면 하나가 명작을 만드는 것처럼 이 소설은 그렇게 설명되어질 수 있는 것이 아닐까 한다.

 

 

나는 생각해 본다

 

나는 생각해 본다. 이 노인의 젊은 청년기와 장년기는 어땠을까를. 지금의 모습은 과거를 반영하고 있다고 했던가. 왠지 노인의 지난 삶은 지금의 모습과 크게 다르지 않았을 것 같다. 평생 바닷가 주위를 떠나지 않았으며, 바다와 함께 살고, 바닷바람에 깊이 패인 주름이 산티아고를 노인으로 만들었을 것이다. 바다는 인생 어느 시기에 그에게 만선의 기쁨을 맛 보게 해 주었을 것이고, 그것으로 돈을 벌게 해 줬을 것이며, 그 돈으로 술과 잠깐의 방탕으로 여자를 샀을지 모른다. 하지만 왠지 산티아고는 평생 독신으로 살았을 것 같기도 하다. 가족관계에 대해선 말이 없으니 말이다. 근데 또 모를 일이지. 인생 어느 시기에 아내(내지는 동거인)와 함께 살았을지 모를 일이고, 아이는 없거나 먼저 떠나 보냈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 사이 자신을 낳아준 부모님을 떠나 보내고, 아내마저 보내고 지금은 이렇게 혼자가 되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나는 가끔 할머니나 지금은 늙어버린 나의 어머니를 보며 생각해 본다. 그 많은 세월 인생의 헛헛함을 어떻게 견디며 살아왔을까를. 특히 나의 두 할머니에게도 부모님은 계셨을진대 그분들을 보내드리고 인생은 살만하던가를 여쭙고 싶은 때가 있었다. 그러나 끝내 여쭙지 못했다. 벌써 오래전에 두 분의 할머니를 보내드리고, 아버지마저 보내 드리고, 나 역시 나이 들고나니 새삼 여쭙지 않아도 당신들의 마음을 알 것 같다. 그리고 아무렇지도 않은 양 사는 것, 살아내는 것. 인생은 그런 것이었다.

 

늙는다는 건 무엇인가?

 

내가 이 책을 이때 읽기를 잘했다는 건, 내 나잇대가 산티아고 노인과 근접해 있기 때문이다. 아직 노년이라고는 할 수 없지만 그렇다고 더 이상 젊다고 할 수도 없는 나이. 젊을 때는 나이든다는 걸 어떻게든, 어떤 식으로든 이해할 수 없었다. 누구 보다 나이를 더 먹었다는 것만으로는 나이들었다는 걸 설명할 수 없다. 그것은 청소년기와 청년기가 다르듯 꼭 나이들어봐야 알 수 있는 또다른 경지를 의미하는 것이었다. 예전엔 감히 상상할 수 없는 것을 그동안의 경험과 연륜을 통해 아직 그 경지에 다다르지 않은 것을 생각하고, 상상하고, 직관하고 싶다. 그래서 나는 이 책을 읽으면서 산티아고 노인과 동병상련의 마음이 되어 공감하고 싶고, 이해하고 싶고, 연민하고 싶었다.

 

가끔은 내 젊은 날이 몹시도 그리울 때가 있다. 그렇다고 그때가 행복하고 좋았던 것도 아니다. 어느 땐 죽을만치 힘든 때도 있고, 실수투성이어서 다시 생각하고 싶지 않은 것도 많다. 하지만 적어도 지금 보다는 젊다는 것만으로도 사랑스러울 때가 있다. 저 햇빛에는 스펙트럼이 존재하듯이 인생의 나날을 이만큼 보내고 뒤돌아 본 젊은 날의 햇빛속엔 비록 이루지 못한 것들이 수두룩해도 내 인생에 젊은 시절이 있었다는 것만으로도 왠지 그 시절을 용서하고 끌어 안아주고 싶은 때가 있다는 것이다. 산티아고 노인도 그렇지 않았을까? 비록 이루지 못한 지난 날의 꿈들이 있지만 그래도 자신의 것이기에 모든 것을 긍정으로 때론 체념으로 달관하며 지금도 살고 있을 것만 같다.  

 

노년도 생(生)이다

 

그런데 잊지 말아야 할 것이 있다. 노년도 생(生)이라는 것을. 누가 노인은 힘도 없으며, 옛날이나 추억하는 퇴물이라고 했는가. 그들은 여전히 자신과 필요하면 그의 식솔들까지 책임지고 건사해야 하는 생활인인 것이다. 늙어서 자식들이 호강시켜줄 나이에 생활전선에 뛰어 들었다고 함부로 연민의 눈으로 바라보지 말아야겠다. 그는 그렇게 움직일 수 있는 것이 긍지요 자부심일지 누가 알겠는가. 늙어서 이룬 것 하나 없다고 책망할 것도 아닌 것 같다. 이룬 것이 많으면 무엇하려고? 사람은 사람을 평가할 때 저 사람이 무엇을 하는 사람이며, 무엇을 이루었으며, 재산이 얼마인가 하는 결과로 판단하려고 할 때가 너무 많다. 그런데 사람을 보는 잣대가 그것뿐이라면 노년에 할 일이 없어서 빈둥대는 삶은 나은 것인가? 그런 의미에서 요즘엔 노후대책 세우는 것을 무슨 삶의 완장처럼 생각하는 경향이 있는 것 같은데, 정말 그것만이 완전한 삶일까? 생각해 본다. 노년은 정류장에서 죽음의 버스나 기다리는 얼마 남지 않은 삶이 아니다. 노년도 엄연한 생이고 삶인 것이다. 

 

"하지만 사람은 패배하도록 만들어지지 않았어."

노인은 말했다.

"사람은 박살이 나서 죽을 수는 있을지언정 패배를 당하진 않아."

                                                               (180p) 

인생이 그러하듯 굴러 떨어지는 바위를 산꼭대기로 밀어올 올려야 하는 시지프스처럼 노인의 삶도  그런 것이다.

 

노후대책이 세워진 삶이 여유로운 건 사실이긴 하겠지만 그것이 만족한 삶인지는 난 아직 확신할 수 없다. 사람들은 타인을 볼 때 경제적 가치로만 보기 때문에 그 누구도 그런 노인을 염려하거나 격려가 필요한 존재라고 보지 않는다. 그래서 차라리 산티아고 노인 같은 삶이 더 아름답게 느껴지기도 하는 것이다. 망망대해에서 홀로 의지할 것이라곤 바다와 새 그리고 자신 밖엔 없다. 만새기를 기다리는 84일 동안 그가 한 일은 혼자 궁시렁 거리고(정말 우리 할머니도 혼자 궁시렁 거리는 때가 많으셨다), 바닷새와 대답없는 대화를 주고 받는 것 밖에 없었다. 그리고 드디어 만새기를 낚아 올릴 때 스스로를 다잡아야 했기 때문에 자신에게 더 많은 말을 걸고, 후에는 고래와 사투를 벌이느라 고생을 해야만 했다. 그리고 모든 것을 잃고 지쳐 집에 돌아왔을 때 그것만으로도 그는 격려 받기에 충분한 존재였다. 누가 그를 쓸모없는 노인이라고 비난하랴. 

 

그것은 또 어찌보면 성경에 베드로가 예수님을 만나기 전 바다에 그물을 던졌으나 한 마리도 잡지 못한 그 사건과 상치되기도 한다. 산타이고 노인은 중간에 고기를 얻는 잠깐의 기쁨을 얻었지만 결국 아무 것도 얻지 못하는 공수레 공수거란 인생의 법칙에 딱 맞는 결과를 얻었고, 베드로는 예수님을 만난 후 그물이 찢어질 정도로 많은 고기를 길어올릴 수 있었다. 어찌보면 산타이고 노인의 결말이 더 현실적으로 다가온다. 사는 동안 욕심내지 말고, 비록 머피의 법칙과 호사다마의 삶을 살게되는 날이 더 많을지라도 생은 과정이니만큼 과정에 충실하라고 소설은 우화적으로 우리를 교훈하고 있는 것도 같다.

 

작가의 삶을 생각하다         

 

이 책을 읽으면서 헤밍웨이의 삶을 생각해 보지 않을 수가 없었다. 이렇게 한 폭의 수채화 같은 작품을 남겨놓고 그는 왜 권총자살로 생을 마감했을까. 숙연해졌다. 풍모도 좋아 언제나 남루한 우리네 보통 사람들의 삶을 위로해 줄 것만 같은데 이렇게 우화 같은 소설을 쓰고 정작 자신은 삶이 괴로워 그것을 피해버리고 말았으니 그런 그가 이내 연민에 젖게 만들었다. 

 

더구나 이미 잘 알려진 사실이지만, 이 작품이 나오기까지 그는 150번 가까이 고쳐 썼다고 했다. 그래서일까? 군더더기 없는 문체가 상당히 인상적이다. 이 작품을 두고 하드보일이라고 하는데 그것은 오랜 기자생활로 다져진 그의 문체의 내공에서 나온 것이다. 또 그래서일까? 고기를 잡는 과정, 고래에게 고기를 빼앗기는 과정이 정말 사실적이라 인상 깊었다. 왜 여타의 이름 있는 작가들이 헤밍웨이를 그냥 지나치지 않는지. 왜 그를 큰 산맥이요, 문학적 스승으로 삼는지 알 것도 같다. 

 

150번. 난 지금까지 내 글을 제일 많이 고쳐 본 것이 13번인가 됐던 것 같다. 그러면서 점점 나아지는 것 보단 자괴감에 빠져들곤 했었다. 그런데 그건 정말 아무 것도 아니었다. 오늘 헤밍에이는 여러모로 나를 위로 한다. 그를 사랑하게 된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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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yrus 2012-03-07 15: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아직 안 읽어봤어요. 헤밍웨이의 소설들이 나오기 시작할 때 헌책방에 굴러다니던
번역판들을 읽어보려고 했는데 때마침 저작권이 풀려서 다행이에요.
노인과 바다 이야기자체로만 보면 짧은 편인데 이 한 편 쓰는데 100번 넘게 고쳤다니..
역시 대가들은 다르긴 다르군요. 역시 노벨문학상 수상작으로 될 만한 문학적 가치가
있는거 같아요 ^^

stella.K 2012-03-07 16:06   좋아요 0 | URL
근데 시공사와 문학동네가 헤밍웨이를 두고 격돌하더군.
그렇지 않아도 이거 읽으면서 몇 작품 더 읽어보고 싶은 생각이 드는데
시공이 나을까? 문동이 나을까?
행복한 고민에 빠질 것 같아.
어떤 게 좋을 것 같니?^^

cyrus 2012-03-09 12:31   좋아요 0 | URL
잘 모르겠어요. 저 같은 경우에는 한 번 구입하거나 읽게 된 문학전집은
오랫동안 쭉 읽거나 구입하는 경향이 있어요. 그래서 읽게 된다면 두 출판사의
번역판을 읽어보겠지만 구입은 문학동네 판이에요 ^^

stella.K 2012-03-09 12:54   좋아요 0 | URL
결국 어느 걸 골라도 비슷비슷할 것 같아.
근데 보니까 시공사 책이 문동 보다 디자인은 맘에 들어.
그래서 다음엔 사게 된다면 시공사에서 골라보려구.ㅋ

숲노래 2012-03-07 17: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옛날 번역을 더 좋아해요.
요즘 번역가들은 '외국어 전공'을 오래 하기는 했지만
'우리 말 공부'는 영 안 하는구나 싶어서
도무지 진도가 안 나가요... -_-;;;;

원본과 외국어를 정본 삼아 번역을 한다지만,
번역하는 사람 눈높이와 깜냥과 말솜씨가 뒤떨어지면,
차라리 일본책을 중역하든
해적판으로 만들었든,
예전 번역이 훨씬 낫다 싶기까지 하기도 해요.

stella.K 2012-03-07 17:58   좋아요 0 | URL
오, 그런 게 있을 수가 있겠군요.
역시 된장님은 그쪽으로 전문가시라 잘 보시겠어요.
근데 전 그냥 무난하게 잘 읽히는 것 같던데요.
비교를 안 해봐서 잘 모르겠네요.ㅠ


아이리시스 2012-03-07 19: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번역은 잘 모르고 내용파악으로다가.. <노인과 바다>는 많이 읽었어요. 단편이랑 초기작들에 더 끌려요. 그런데 책은 아직도 안 샀어요. 선뜻 손이 안가는 건 사실이에요^^

어쨌거나 멋진 작가예요, 헤밍웨이는.

stella.K 2012-03-08 11:42   좋아요 0 | URL
와, 노인과 바다를 여러번 반복해서 읽었군요.
그래서 아이님은 그렇게 글을 잘 쓰는가 봅니다.ㅋ
맞아요. 헤밍웨이는 멋진 작가에요.^^

이진 2012-03-07 21: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늘도 학교에서는 국어선생님이 <노인과 바다>읽어본 사람했는데 아무도 손을 안들었어요. 만약 누군가 손을 들었다면 저는 이렇게 생각했을 겁니다. "자네가 읽은 것은 가짜야... 진짜는 아마 읽어본 적 없을걸?"이라고요. 지혼자 잘난척에 빠져가지고는... 지도 진짜 번역본을 읽어보지도 않아놓고서는 그런 발칙한 상상을 합니다. 아이고 저도 얼른 헤밍웨이를 읽어봐야 할텐데요...씁

stella.K 2012-03-08 11:43   좋아요 0 | URL
ㅎㅎ 지금은 안 읽어도 돼.
이담에 나이들어 읽어.^^

차트랑 2012-03-07 21: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니 읽느니보다 지금이라도 읽는 것이
훨씬 나은 것 맞습니다요~
좋은 점도 분명히 있는데요
한 번 읽은 소설들은 다시 읽기 어렵습니다.

나이가 들어 읽으면 고전 소설의 그 깊은 맛을 알게 될 것입니다.
괸히 고전이 아니잖아요..
그러니 더 좋은 일이 될 수 도 있다는....

stella.K 2012-03-08 11:44   좋아요 0 | URL
헤밍웨이를 좋아하게 됐어요.
몇 권 더 읽어야 할 것 같아요.^^

blanca 2012-03-08 09: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노년에 대한 스텔라님의 생각에 제가 위로를 받네요... 구구절절이 옳은 얘기들입니다. 잘 읽고 갑니다.

stella.K 2012-03-08 11:44   좋아요 0 | URL
우리 생애에 젊은 날이 있어서 좋았어요. 그죠, 블랑카님!^^

휘오름 2012-03-09 08: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거장의 이름만 듣고 부끄럽게도 아직 한번도 제대로 읽어보지를 못했네요. 얼마전에 보니 헤밍웨이 시리즈도 출간하더근요 조만간에 한번 도전해 볼 생각입니다..ㅎ

stella.K 2012-03-09 12:54   좋아요 0 | URL
저도요. 반갑습니다.^^

방패연 2012-03-12 00: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우연히 여기에 오게 되었는데 이 작품에 대한 대화를 보면서 몇년전 저의 블로그에 올린 글이 생각나서 소개합니다. 너무 길어서 죄송하고 혹시 않올려질지도 모르겠네요. 제목은 "두 어부 이야기" 입니다.

매주 화요일 밤은 기숙사 신세를 지는 덕분에 저녁 식사도 학교 식당에서 할 때가 자주 있습니다. 삼면 벽 전체가 유리창인 그 식당 창 밖 언덕 아래로는 야구장이 보이는데, 지난 화요일 저녁시간에는 마침 다른 학교와의 경기가 한창 진행되고 있었습니다. 프로 야구장에서 이렇게 식사를 하면서 경기를 관전하려면 아마 천불짜리 박스를 빌려야 하려니 생각하면서 무척 흡족한 기분으로 식사를 했습니다. 주황색 저녁 노을 아래 금빛 찬란한 조명이 밝혀지고 파아란 잔디가 깔린 야구장은 경기 없이 그저 빈 야구장을 내려다 보기만 해도 가슴이 울렁일만한 전경인데, 문득 헤밍웨이의 소설들을 떠올리게 되었습니다. 20대 시절 내가 푹 빠졌던 그의 소설 가운데 미국 프로야구 이야기가 나오기 때문인 듯 합니다. (e.g., 노인과 바다, 그리고 또 어딘가에 나왔던 것 같은데? 기억이 가물가물..)

생각은 꼬리를 물어서 대학 연극반 시절 내가 무척 따랐던 동훈형과 헤밍웨이를 논하던 생각도 났습니다. 주로 기획을 맡으면서 배우로 한번 출연한 것이 고작인 나에게, 연출가 동훈형은 문학을 이해하는 진짜 연극쟁이로 느껴졌던 것 같습니다. 오징어 다리에 소주를 빨면서 내가 헤밍웨이의 소설 이야기를 꺼내자 동훈형은 "헤밍웨이의 소설에서는 정액냄새가 난다"고 했지요. 나보다 다섯살 위로 군대에서 복학한 그 형의 홀애비냄새 나는 방에서 그 말을 들었을때 내가 받았던 강한 인상은 아직도 뇌리에 생생합니다. 한편으로는 농스럽게 받아들이면서도 그 표현의 강렬함과 적나나함에 내심 감탄했던 듯 합니다. 싸아하고 비릿한 정액냄새에는 총각들이 자위행위 후에 느끼는 낭패감과 허무감이 서려있음이 아닐까요.

식사를 마치고 도서관에 가서 노인과 바다를 빌려가지고 기숙사에 들었습니다. 거의 30년 만에 영어로 다시 읽는 이 책에는 내가 기억하고 있는 야구 이야기와, 사투 끝에 잡은 거대한 swordfish를 상어들에게 다 물어 뜯기는 이야기 이외에 한가지 이야기가 더 있더군요. 주인공 산티아고 노인을 보살피는 소년의 끈끈한 사랑 이야기입니다. 과거에 그저 흘려버렸던 이 부분에 감동을 받는 나 자신이 많이 변했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또 한가지 아주 흥미있는 대조를 하게되었는데 그것은 산티아고 노인과, 역시 어부였던 시몬 베드로의 비교입니다.

자신을 끌고 가는 거대한 물고기와의 필사의 투쟁가운데서 노인은 평소에 잊고 있던 기도문도 외우고 신에게 서원도 하지만 그의 결국은 참담하고 허무하기만 합니다. 그 결말을 예견이라도 하듯 그는 자신의 생각이 죄에 대해서까지 미치자 곧 그 생각을 떨어버립니다. "죄에 대해서 생각하는 일은 월급받고 하는 사람(사제)들을 위해서 있는 것이지.." 라고 하면서 마음을 돌려버립니다. 헤밍웨이의 작품에 전반적으로 흐르는 인본주의.. 그 저변에는 고독과 무의미가 언제나 질식할 정도로 깔려있음을 느낍니다. '프란시스 맥코머의 짧고 행복한 인생'이라는 단편이 대표적인 예가 되겠지요.

시몬 베드로의 이야기는 시작은 같으나 전혀 딴판의 결말로 이어집니다. 밤새 수고했으나 아무 것도 잡지 못한 베드로가 자신의 인간적 판단을 버리고 예수님의 명령에 순종했을 때 그는 전혀 예견치 못한 결말을 보게 됩니다. 놀란 그는 주님께 "나는 죄인이니 나를 떠나소서"라는 고백을 하지만,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해 주시겠다는 한마디 말에 모든 것을 다 버려두고 주를 따라나서서 종국에는 이 땅과 하늘을 연결하는 천국의 열쇠를 가진 자가 됩니다.

인본주의의 허무한 결말과 성경적인 희망의 뚜렷한 대조. 물론 헤밍웨이는 천국의 열쇠 따위에는 관심이 없었겠지요. 사내답게 멋있게 사는 것에 열중하였지만 아마도 삶의 허무감을 이겨낼 수는 없었나봅니다. 엽총을 입에 물고 방아쇠를 밀기 직전 그는 무엇을 생각했을까요?

내가 설흔 한살 때로 기억합니다. 소요리문답의 첫번째 항 "인생의 제일되는 목적이 무엇입니까?"라는 질문에 대해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며 평생 그를 즐거워하는 것입니다"라고 목사님과 회중앞에서 고백하면서 과거 20년 동안 줄곧 마음 속에 되풀이하던 "인생의 의미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묻어버리고 말았습니다. 그 이후에 내 마음에 찾아온 평안은 어떻게 설명할 방법이 없습니다. 내 자신 그렇게 단순한 사람이 아님을 잘 알기 때문입니다. 오직 베드로를 먼저 찾아주신 예수님이 나에게도 찾아오셨음을 감사할 따름입니다.
(출처: http://bangpaeyon.blogspot.com

stella.K 2012-03-12 10:59   좋아요 0 | URL
멀리 미국에서 찾아 주셨군요.ㅋ 반갑습니다.
왜 이글을 댓글로 달아주셨는지 알 것도 같네요.
그래요. 베드로가 확실히 생각나지요.
저도 교회 다니는 신자입니다.
전 그저 노인과 바다의 관점에서 베드로를 본 것이고
본심은 그렇지는 않았습니다. 지면상 베드로 이야기를 장황하게
쓸 생각이 없었구요.
근데 방패연님께서 저의 정리되어지지 않은 부분을 잘 정리해서
쓰셨네요.
헤밍웨이 뿐만아니라 확실히 여타의 문학작품들이 인본주의와 허무주의를
가지고 있지요. 전 이 허무주의란 말에 헤밍웨이를 오랫동안 읽기를 거부하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분명 인간의 고독과 허무를 얘기하고 있는 것도 사실이지만 이 작품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아라 뭐 그런 얘기로 받아들여졌습니다.
아무튼 긴 글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