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균관 유생들의 나날 2 - 개정판
정은궐 지음 / 파란(파란미디어) / 200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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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억울해, 억울해, 억울해! 

우여곡절 끝에 이 책을 읽게 되었다(내가 이 책을 읽기까지 어떤 과정이 있었는지 아는 사람은 알 겠지만, 지금 생각하면 어떻게 나 자신 그럴수 있었는지 웃음이 나온다). 처음엔 이것을 책으로 읽을 생각은 그리 많지 않았다. TV 드라마로 나오는데 굳이 이 작품을 책으로 읽을 필요가 있겠는가 하는 생각에서 말이다.  사실, 책을 쓴 작가에게나 출판에 관련된 분들은 좀 억울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아다시피 이 작품은 드라마가 있기 전에 먼저 책으로 나왔고, 읽어본 독자들은 드라마화 될  것을 예상했거나, 리뷰를 통해 드라마로 만들어 줄 것을 요청하곤 했으니까. 그래서 독자들의 예상(또는 희망사항)은 적중했고, 드라마는 비교적 성공적으로 방영되고 있다(다음 주면 아쉬운 종영이지만).  덕분에 책은 더더욱 잘 팔리는 베스트셀러가 됐다. 앞서 말했던 '억울하다'는 표현은 어디까지나 내 개인적 느낌이다. 그건 여전히 책이 드라마에 엎혀 간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기 때문이다. 물론 이건 책이 더 유명해져서 드라마화한 거지만 결과적으로 (언제나 그랬듯이) 그러한 관행에서 자유롭지는 못한 것 같다. 그래서 책(또는 작가)의 입장에선 억울하고 아쉽다고 할 밖에. 

책과 드라마가 다른점   

아무리 책이 좋아도 드라마로 만들어지면 그것 때문에 책을 더 볼 생각을 할 수도 있겠지만, 대부분은 드라마로 나오면 독서에 대한 욕구는 슬그머니 꺽이는 것도 사실이다. 적어도 나는 그런 편이다. 그만큼 문자가 영상 이미지를 쫓아가지 못한다. 물론 이미지가 인간의 상상력을 방해하기도 하지만, 21세기는 영상테크놀로지 시대기 때문에 인간의 상상력이 그것을 따라가지 못하는 경우가 더 많아 졌다. 분명 영상테크놀로지도 인간의 상상력의 산물임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예를들어, 이야기의 배경이 되는 조선의 저잣거리, 반궁, 성균관 내부, 위폐가 모셔졌다는 사당, 복식 등은 전문가가 아니면 그것을 재현에 낼 수 없고, 따라서 우리 일반인으로선 상상의 한계가 있을 수 밖에 없는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한 작품을 이해하는데 있어서 영상만을 의지할 수는 없다. 반드시 영상이 추구할 수 없는 영역이 있다. 무엇보다도 이 드라마는 텔레비전의 황금시간에 배치된만큼 영상 등급을 피해가지 못한다. 그래서 책에서 나오는 질펀하고도 농도 짙은 성적 농담 같은 것은 드라마에선 방영불가다. 당장 "나 구용하다."라고 했던 그의 호 '여림'의 뜻이 책과 드라마에서 얼마나 다르게 나오는지 아는 사람은 알지 않는가?ㅎ 이걸 그대로 방송에 내보냈다가 무슨 경을 칠지 안 봐도 비디오다. 19금이라면 가능하지만.  그러니까 한마디로 드라마는 인물이 갖는 장점을 최대한 이용하면서, 미스테리한 면을 부각시켰고, 동시에 없어서는 안될 무술을 뽐내는 쪽이었다면, 책은 인간의 심리와 역사적 배경에 촛점을 맞혔다고 볼 수 있을 것 같다. 그리고 그렇게 보자면 드라마가 훨씬 인물의 생생함과 박진감을 높혔다는 건 부인할 수 없을 것 같다.  무엇보다도 정조와 정약용을 살렸다는 점은, 그들이 실제로 그랬을런지, 안 그랬을지는 그다지 중요하지는 않아 보인다. 어차피 역사나 전기물이 아니라 역사를 차용한 드라마니까. 그냥 그 인물이 갖는 아우라를 살려 상상력을 극대화했다는 측면에선 나쁘지 않은 방법이라고 생각한다.  

장르문학? 그게 뭔데? 

하지만 난 이 '정은궐'이란 작가가 어떤 사람인지 도무지 모르겠다. 작가 프로필을 보면 과거에 그가 썼던 작품 몇 개와 그의 존재를 각인시켜준 본 작품(그리고 규장각 각신의 나날들)외엔 그 어떠한 정보도 알 수가 없다. 하다못해 그가 남잔지, 여잔지도 불분명하다. 하나 아는 것이 있다면, 처음 작가가 정은궐이란 이름이 아닌 본명으로 보이는 이름을 썼다가 필명을 그렇게 정한 것으로 안다.  이건 작가 나름의 연막작전은 아닌가 싶은데, 나 개인적으론 이런 취향은 그다지 좋은 것이라고 생각지는 않는다. 작가가 너무 나대도 그렇긴 하지만, 너무 신비주의 작전을 쓰는 것도 좋은 태도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또 한 가지 '억울'할 수도 있는 것은,  많은 사람들이 이 작품을 B급으로 분류하고 있다는 것이다. 작품이 B급이면, 작가 역시도 B급 작가라는 소린데, 과연 그것에 대해서 정작 작가는 어떤 느낌일지 모르겠다. 허리우드 영화 감독들 중엔 스스로를 B급으로 칭하는 사람도 많다. 하긴, 어설픈 A 보단 확실한(또는 고품격) B가 훨씬 낫다고 생각한다. B급이라면, A에서 보여지는 작품성이나 화려한 수사없지만, 통속적이고, 마이너적 감성을 뜻하지 않는가? 어설픈 작품성과 어설픈 수사로 치장하느니, 확실한 B가 A를 눌러버리는 그런 구도 또한 나쁘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 왜 이 작품에 B를 부여하느냐는 말이지. 

이만한 작품을 구사하려면 시대를 관통하는 나름의 지식과 안목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드라마야 어쩔 수 없어서 특정 인물을 부각시켰다지만(화려해야 하니까), 책에선 잘금 4인방 외 어떤 인물도 크게 부각되는 인물은 없었다. 하다못해 정조도 정약용도 책에는 나오지 않는다. 왜 , 이제까지 역사 소설은 그렇게 잘 난 사람이 나와야 하는 건데? 이렇게 역사적인 배경이나 맥락을 유지하면서 허구의 인물이 이끌어 가는 역사물이 나와주면 안 되는 건가?    

그리고 설혹 나왔다 하더라도 '장르 문학'에 국한시켜 폄한다. 반드시 소설은 유명한 필력있는 작가가 써야하며, 문체가 좋아야 하고, 그것이 역사 소설일 경우엔 역사적으로 인정 받은 인물을 형상화해야 한다는 규칙은 어디서 나온 발상인가? 그것 역시 사대주의가 아닌가? 문학이면 문학이지 장르문학, 순수문학 가르는 이 행태는 언제까지 계속될 건지 모르겠다.  물론 그래봐야 내 입만 아플뿐 순수문학하는 어르신은 꿈쩍도 안할 것이다.  

어쨌거나 내가 읽어본 결과, 작가의 그것이 그냥 B급 작가라고 하긴엔 작품에 드린 공력이나 필력이 여느 프로 작가 못지 않다는 것이다. 그래서 장르 문학 작가라고 하기엔 꽤 억울한 무엇이 있겠다는  것이다. 그리고, 나의 불만은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책 장정이 그게 뭔가? (솔직히 선물로 받아 선물하신 분께 누가 될까 말을 아끼고 싶긴 한데) 받아보고 약간은 식겁했다. 솔직히 책 장정이 그야말로 B급이다. 이러니 우리나라에서 장르문학(난 솔직히 이 표현이 탐탁지 않지만)이 대접 받지 못한 이유일 수도 있겠다. 책 장정이 그 책을 살 것이냐 말 것이냐의 반은 먹어주고 들어가는데, 내가 작가였다면 '억울'해서 책 못 내겠다고 했을지 모를 일이다. 그나마 개정판이 이 정도라면 초판은 어느 정도란 말인가? 아무튼 이런 쪽에서의 작품은 더 나와줘도 좋지 않을까? 

이 작품을 어떻게 볼 것인가?  

무엇보다 이 작품을(책이나 드라마나)  두고 동성애 코드라고 한다. 물론 조선 시대 실제로 남장을 한 여자 성균관 유생이 있을 것 같지는 않다. 그렇다고 여자가 남장을하고 나왔다고 해서 그것을 무조건 동성애 코드라고 보는 시각도 고려해 봐야할 것 같다.  실제 동성애자들이 봐도 이 작품은 자신들의 권리를 옹호하기 위한 작품이라고 인정할 수 있을까? 그건 잘 모르겠다.  하지만 무조건 여자가 남장하고 나온다고 해서 그것을 모두다 동성애 코드라고 보는 우리의 시각도 점검해 볼 필요는 있을 것 같다. 

문학은 상상력의 산물이다. 그리고 그 상상력에는 작가 자신의 욕망을 투영할 수도 있고, 무엇보다 작가가 보는 사회적 욕망을 녹여낼 수도 있다. 난 아무리 봐도 이 작품은 조선 시대 당시 억압된 여성의 사회적 신분과 상승을 대리 만족시키는 작품으로 밖에는 보여지지 않는다. 정말 윤희 같은 인물이 이런 활약상을 보였다면 당시의 여인들이 얼마나 통쾌했을까? 그러나 이런 일은 있을 법하지 않고 허구였던만큼 대리 만족이다. 그렇다면 오늘 날의 독자들이 윤희를 보고 대리 만족을 해야할만큼 이 나라의 여권이 조금도 나아지지 않았는가?고 묻는다면 그건 좀 다른 얘기가 될 것이다. 이건 감상적 차원에서의 로맨스 소설이지, 페미니즘을 표방하기 위해 쓴 작품 같지는 않아 보인다. 그러니만큼 동성애옹호를 위한 것으로 보기에도 미흡해 보인다. 설혹 그렇다고 할지라도, 그래야 세련되고 앞서가는 뭐라도 되는 양하는 것이 미덥지 않다.  

독자는, 책을 읽는 사람이다.   

사실, 많은 사람들이 이 작품에 보내는 아낌없는 찬사에 동감한다. 하지만 내 개인적으론 조금은 늘어지고, 지루한 감이 없지 않았다.  그건 내가 이 작품을 보고 열광하리만큼 젊지 않아서인지도 모르겠다(이건 드라마를 볼 때도 그랬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작가가 이 작품이 드렸을 공력은 높이 사고 싶다. 읽으면서, 미국에 <하버드 대학의 공부벌레>가 있다면 이건 감히 한국판은 아닐까 싶은 생각도 들었다. 이런 지적이면서도 대중의 인기도 어느 정도 확보한 소설이 반가웠다.  앞서 A급이나 B급이니 하는 건 엄밀한 의미에서 독자가 할 일은 아니라고 본다. 독자는 그저 책을 읽는 사람이다. 이 책을 읽으면서 이 이야기의 후편에 속한다는 <규장각 각신의 나날>도 계속 읽고 봐야겠지만, 그 질펀하고 농 짙은 성농담 때문에라도 <조선 후기 성 소화 선집>(문학동네)란 책도 읽고 싶어졌고, 성균관 생활기라는 <성균관의 공부벌레들>(수막새)도 읽고 싶어졌다. 약간 흉내낸 느낌이 나긴 하지만, 소설이 주는 구라 때문에 '정말 그럴까?' 하는 호기심이 발동했다면 그건 일단 성공한 독서라고 생각한다.  독자가 작가에게 바라는 건 독서의 즐거움과 호기심을 채워주는 것이 아닐까? 그래서 작가는 어렵지만, 또 그래서 존재하는 것이 작가다.  작가 정은궐은 지금쯤 어디서 무엇을 쓰고 있을지 사알짝 궁금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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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녀고양이 2010-10-29 17: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ㅇㅇ, 좋은 리뷰예요. 고개를 끄덕이면서 읽을 정도로. ^^

언니, 장르 문학은여, 대여점과 일부 고정팬을 타겟으로 했다는 의미예요.
무협이나 판타지, 로맨스 소설이 그런 편인데,
한달에 엄청난 숫자가 쏟아져 나와요.
왜냐하면, 하루에 몇권씩 동일 장르만 읽는 골수 팬이 있어서 그래요.
<성균관->은 장르 소설 중 수작으로 성공한 경우구여,
어떤 장르 소설들은 으아,, 미치게따 할 정도인 경우도 종종 있대요.

그래도 소설, 꽤 잼나셨죠?
저는 규장각이 더 맘에 들어요, 윤희가 당당하거든요.

stella.K 2010-10-29 18:52   좋아요 0 | URL
그렇군요. 이제야 그대 땜에 확실히 알았네.
그러니까 장르문학 하는 사람들 열심히 분발해야 한다구요.
그대가 선물해 준 규장각 빨리 읽어야 할 텐데...
읽어줘서 고마워요.^^

다이조부 2010-10-29 23: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리뷰를 읽으니까 드라마가 급 땡기네요~

스텔라님이 김태훈 이야기한거 보면서 가슴이 넓은 사람이라는 생각을 했어요 ^^

stella.K 2010-10-30 12:24   좋아요 0 | URL
ㅎㅎ 아니어요. 김태훈이 결혼도 안하고 잘난 척하는 거야
좀 거시기 하지만, 그래도 그 사람은 웃긴데가 있어요. 그래서 좋아해요.

드라마가 제가 기대한 것만큼 시원하게 끝날 것 같지는 않아요.
그래도 기대 안하고 보면 볼만하죠. 무엇보다 출연진들이 잘 생겼잖아요.
괜히 잘금 4인방이겠습니까?ㅎㅎ

자하(紫霞) 2010-10-30 22: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이 책들을 밤을 새워서 읽었다는거 아닙니까?
덕분에 이틀동안 눈에 핏줄이 서서 많이 아픈 애로 알았을거예요.
드라마도 본방사수한다는...^^;

stella.K 2010-10-31 18:13   좋아요 0 | URL
ㅎㅎ 저는 그 정도는 아니던데...
그래도 이 작품은 참 영리하게 잘 쓴 소설이라고 생각합니다.^^

2010-10-31 18:5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10-31 20:4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11-01 00:24   URL
비밀 댓글입니다.
 
어디선가 나를 찾는 전화벨이 울리고
신경숙 지음 / 문학동네 / 201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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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나 그래왔듯이, 신경숙 작가의 소설들을 읽는다는 건 결코 유쾌한 일마는 아니다. 그녀의 작품엔 늘 쓸쓸함과 우수가 베어있다. 그것을 또 객관적으로 보기란 쉽지가 않다. 말하자면 함께 그것에 젖어든다는 말이다. 그래서 이제 이 작가의 작품은 그만 읽어야지 해놓고 또 어느샌가 또 한 권의 책을 펼쳐 들었다. 그리고 역시 그 특유의 쓸쓸함을 목도했고 다 읽고난 지금 우울함이 가슴 한켠에 잔잔히 남아있다.   

이 작품은 과거를 더듬는다.  연대기적 배경은 80년대 중후반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그리고 이야기의 시작은 그로부터 8년 후에서 시작하는 것으로 되어있다.  80년 대하면 그냥 넘어갈 수 없는 건 역시 민주화항쟁운동일 것이다. 하지만 작가는 이제와서 민주화항쟁운동을 새롭게 조명하고자 했던 것은 아닌 것 같다. 그랬다면 민주화항쟁의 선봉에 선 누군가를 주인공으로 내세웠을테지만, 작가는 오히려 그 주변인물에 촛점을 맞춘다. 이를테면 그 시대가 민주화 운동에 압장선 투사가 아니라 그 주변인들이 어떻게 상처받고 어그러졌는지를 말하고자 하는 것이다.  

그 시대가 행복했다면 이 작품도 행복을 얘기했거나 아예 다른 형태로 나왔을 것이다. 그 시대는 내가 생각해도 정말 암울했다. 하지만 생각해 보았는가? 그 시절 주변인들이 어떻게 고통당했을지. 나는 이 책을 대하고 나서야 비로소 내가 별로 깊이 생각해 보지 못했던 것을 작가는 잘도 잡아 펼쳐보이는구나 했다.  

솔직히 그 시대를 돌아보면, 민주화항쟁의 투사든 아니든 크고 작게 다 상처받은 세대인 것만큼은 사실이다. 나 역시도 밝힐 건 못되지만, 그 시절은 암울했던 것만큼 문학 역시 암울했다고 생각한다. 그 시절 모든 작가들이 참여 문학만을 쏟아내는데 우리나라 문학에 무슨 밝은 내일을 기대할 수 있단 말인가? 물론 이것이 한 개인의 미련한 생각이겠지만, 그 사람에겐 그 시대가 문학과 절연을 하게 만드는 계기가 되기도 했으니 상처라면 상처일 수도 있다. 일개의 개인일지라도 문학을 논할 수 없다는 것은 내일을 논할 수 없다는 것과 같은 거니까. 이런 식으로 그 시대의 아품은 어떤 식으로든 개인에게 상처를 남기는데, 작품 속 인물의 아품은 비슷한 시기에 청춘을 살았던 나 같은 벽안의 독자 보다 더한 것이 아니겠는가? 물론 소설은 허구다. 그러므로 주인공 역시 만들어진 가공의 인물이겠지만 그 시대를 말함에 있어 실제는 그 보다 더했으면 더했지 결코 덜하지 않을 것이다.  

사실 어찌보면 미래와 미루 자매의 집안은 오늘 날의 시각에서 보면 꼭 저주 받은 집안 같기도 하다. 어떻게 미래는 치명적인 육체적 상처로 인해 발레리나의 꿈을 접어야만 했다. 그런 언니의 그 상처가 자기 때문이라며 살아있는 날 동안 십자가를 진 미루. 그래도 미래는 훗날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행복해하고 그 애인을 동생에게 소개시켜 주기로 한다. 하지만 소개시켜주기로 한 바로 그 날 애인의 실종 소식을 접하고 반미치광이가 되어 그를 찾아 헤멘다. 미래의 애인은 민주화 운동을 했다는 이유로 쫒기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애인을 더 이상 찾을 수 없을 때 미래는 분신 자살을 하고, 미루는 그때 입은 화상을 천형처럼 지니게 된다.  생각해 보라. 사랑하는 언니가 눈 앞에서 분신자살을 하는데 그것을 온전한 정신으로 지켜 볼 사람이 누가 있는가? 그 부분은 확실히 나에게도 조금은 충격스러웠다.  

하지만 또 어찌보면 죽은 미래의 입장에서 보면 아주 이해 못할 부분도 아니다.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죽을 수 있는 것. 그것도 젊으니까 할 수 있는 일이 아닐까? 하지만 무엇보다 그것은 미래가 할 수 있는 시대를 향한 극단적인 항거인지도 모르겠다. 왜 그 시대는 개인이 맘놓고 사랑도 못하는 시대란 말이인가? 국가가 개인의 행복을 지켜줄 수 없다면 그 나라는 별로 좋은 나라는 되지 못하는 것 같다.  사랑이 깊으면 증오도 깊다고 결국 죽음으로써 항거하는 것 밖엔 달리 방법이 없었던 것이다. 실로 미래는 가련한 영혼이다. 

하지만 죽기로 한 사람에게 산 사람은 보이지 않는다. 자신을 사랑해 주는 사람이 있다는 걸 생각하면 그렇게 죽을 수 있을까? 그것은 정말 살아있는 사람에게 못할 짓을 하는 것이다. 윤미루 역시 그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결국 스스로 목숨을 끊지 않는가? 한 집안에 자살자가 둘이나 나왔다면 그건 저주받은 집안이 아니고 무엇인가? 하지만 종국엔 나라와 시대가 한 가정을 지켜주지 못한 것이나 다름이 없다. 또 그 시절 그렇게 스러져간 가정이 어디 하나였겠는가? 연좌제다 뭐다하여 실제로 민주화엔 가담도 하지 않았았는데도 그 가정과 개인의 권익은 박탈당했다.  

누구는 그랬다. 불행속에서도 행복은 있으며, 행복속에도 불행은 있는 법이라고. 8년이나 지나서 은사의 임종 때문에 잊을 줄 알았던, 아니 일부러 과거 속에 묻고 살았을 청춘의 한자락을 다시 생각하고 기억해야 한다는 것은 쓸쓸하다 못해 쓰리기까지 할 것이다. 그러나 그때를 돌이켜 보면 그 시절이 다 불행했던 것마는 아니다.  행복하지 못한 때에도 작은 행복 한 두 가지는 있게 마련이다. 이 책에서는 윤이 미루와 명서가 그래도 가장 행복한 시절을 살았던 건, 죽은 언니와 함께 살았던 그 집에서의 한때였을 것이다.  결국 인간은 아주 불행하지만도, 너무 행복하지만도 아닌 존재들이다.  

시대가 암울할수록 오히려 희망을 노래하는 사람이 있는가하면, 시대의 조류에 떠밀려 불행한 항거하는 사람도 있다. 그들이 노래하는 희망은 희망 그 자체 보다는 정의의 염원이 더 많이 실린 희망의 노래였을 것이다. 정의가 없으면 희망도 없는 거니까. 그 시절 윤교수는 왜 윤이나 명서에게 강을 건너는 크리스토프를 각인시켰을까? 암울한 시기는 민주화항쟁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우리는 어쩌면 여전히 어두움의 시대에 살고 있는 줄도 모른다. 우리가 언제 정말로 행복한 때가 있었나? 그렇게 시대의 강을 흘러보내면서 누군가는 대신해서 시대를 건너 줄 크리스토프가 필요하다. 나는 제자들에게 그것을 가르쳐 주는 윤교수가 한 없이 존경스러웠다. 이런 세상에서 그런 빛이 되어줄 말을 하는 건 오히려 쑥스러운 일이 되어버렸다. 그래서 침묵해 버리거나 남이 행동하는 만큼만 행동하고 살려고 한다. 하지만 가치관을 확립해야 하는 청소년이나 청년의 시기에 마땅히 들어야할 소리를 듣지 못하면 그 사람의 10년 후는 어떻게 되겠는지 상상해 본적이 있는가?  

젊은 청춘의 시기를 다 보내버린 내가 지금도 가끔 돌아보면 그때는 정말 아름다웠다고 생각한다. 그것은 내가 진짜 아름답게 생겼기 때문이 아니다. 젊음 그 자체가 아름다운 것이다. 하지만 그 속내를 들여다 보면 소설 속의 윤만큼이나 쓸쓸하고 아름다운 것이 하나도 없어 들춰보기 싫은 것들이 더 많다. 젊음 그 자체는 아름다운데 왜 그리도 상처가 많고, 아쉬운 것이 많은 것일까? 그런 점에서 신은 공평하지도 정당하지도 않은 것 같다. 그토록 젊음이 아름다운 것이라면 그 삶이나 내면도 아름다운 것이라면 얼마나 좋은가? 하지만 그도 사춘기 때만큼이나 실수가 많고 치이는 게 많다. 하긴, 인생자체가 고되지 않은가? 어느 때고 만족스럽고 평온한 때가 있으면 얼마나 되겠는가? 

젊음은 젊음을 벗어나야 젊음의 참된 가치와 아름다움을 한다. 그래서 어느 가수는 젊은 날엔 젊음을 모른다고 노래했는지도 모른다. 윤에게나 명서에게나 젊은 청춘 노트가 있었던 것처럼 우리 각자에게도 청춘 노트가 있다. 때론 그걸 다시 꺼내볼 용기도 나지 않는다. 윤 역시도 윤교수가 임종을 맞지 않았다면 아니 맞았어도 그녀가 끝까지 몰랐다면 그 노트를 꺼내보지 않았을 것이다. 젊음은 좋은 거지만 그 안에 들어있는 과거는 좋은 게 없으니까. 하지만 사람은 언제 어떤 이유로든 그 추억의 노트를 꺼내보게 될 것이다. 그 노트가 실제로 있든, 마음 속에 있던 말이다. 그건 즐거운 것도 있지만 실수와 상처도 많을 것이다. 그때가 오거든 꼭 그때의 나와 화해하길 바란다. 그런 때는 나의 잊혀진 아픔을 건드리기 위해서만 오는 것이 아니다. 과거는 현재와 연결이 되어있고, 오늘의 윤처럼 그렇게 현실에서 불쑥 나타나 화해를 요청하러 오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때가 되거든 피하지 말아라. 그냥 자연스럽게 문을 열어주는 것도 나쁘지 않은 것 같다. 생각보다 덜 아프고, 생각보다 덜 슬플지 모른다. 또 아프면 어떻고, 슬프면 어떠랴? 이미 겪은 것들이 아닌가? 무엇이 두렵겠는가? 아마도 작가는 그것을 말하기 위해 이 책을 썼는 줄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  그렇게 생각하니 이 책을 읽었을 때의 우울함이 다소 걷히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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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철나무꾼 2010-08-30 22: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ㅎ,ㅎ...우리 이 리뷰도 찌찌봉이네요~
우와~감탄사가 절로 나와여.
백만 개쯤의 추천을 날립니다.

stella.K 2010-08-31 10:30   좋아요 0 | URL
이거 사실은 이유있는 리뷰잖아요.
양철님은 아니신가?ㅋㅋ
방금 리뷰 읽고 왔어요. 님이 저 보다 10배 20배 잘 쓰셨네요.
전 어제 컨디션이 안 좋아 겨우겨우 썼다능...ㅜ

양철나무꾼 2010-08-31 12:03   좋아요 0 | URL
아니긴요~^^
이유 있는 리뷰 맞습니다.


전 아직 글이란 게 뭔지,리뷰라는 게 뭔지 잘 모르겠어요.
온 몸과 마음을 열어 놓고 터득하는 중이구여.

이게,이런 리뷰 대회에서 연거푸 물을 먹고 있지만,
계속 도전하는 이유이기도 하구요~

님의 이벤트 참여도 그래서 였는걸요~
여러사람들에게 보여 객관적인 평가를 받다보면 조금은 나아질 수 있을까 하여...

lo초우ve 2010-08-30 22: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나도 어제 알라딘에서 구입했어요 ^^
읽기전에 스토리를 다 알게 되버렸어요 ^^
그래도 읽어야겠죠 ^^

stella.K 2010-08-31 10:31   좋아요 0 | URL
약간의 스포일러가 있긴 하죠?
그래도 뭐 한자락에 불과하구요, 슬쩍 보여주는 맛이 있어야
리뷰라 하지 않을까요?ㅋㅋ

프레이야 2010-08-30 23: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앗, 양철님과 동시에 텔라님도 이 리뷰를요. ㅎㅎ
아무튼 전 둘 다 반가워요.
젊은 날엔 젊음을 모르고... 이상은의 '언젠가는' 저 이 노래 무지 좋아해요.^^

stella.K 2010-08-31 10:34   좋아요 0 | URL
참 그 노래가 왜 세월이 가면 갈수록 애잔해지는지 모르겠어요.
누구는 빨리 나이 먹고 늙었으면 좋겠다고 하는데
저는 가면갈수록 젊음에서 멀어지고 있다는 게 아쉽고 안타깝고
그래요. 어쩌면 좋아요.ㅠㅠ

순오기 2010-08-31 00: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상하게 이 책은 끌리지 않아서 아직 구입도 안 했어요.ㅜㅜ
어쩌면 지난 연말 만났을 때, 강연에 초대하면 오겠다고 철썩같이 구두약속 해놓고
바쁘다고 시간낼 수 없다며 틀어버린 신경숙한테 삐쳤는지도...ㅋㅋ

선댓글, 후독서 할게요~ 큰딸이 12시에 할 게 있대요.^^

stella.K 2010-08-31 10:47   좋아요 0 | URL
저도 신경숙 씨의 작품은 누구한테 선듯 읽어보라고 권하진 못하겠더라구요.
이번 작품도 그렇긴한데 작가가 참 많이 달라지고 있구나 하는 게 느껴졌어요. 그건 리진 때부터인 것 같긴하지만...
이 작품은 약간 지적인 느낌도 있고 영화를 보는 듯한 느낌도 있더라구요.
왜 느리고 우울한 그런 영화.^^

조선인 2010-08-31 09: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문득 노래가 생각났어요. "내 청춘의 빈 노트엔 무엇을 채워야 할까. 아름답고! 신비로운! 우리들 사랑의 이야기??? =3=3=3

stella.K 2010-08-31 10:48   좋아요 0 | URL
ㅎㅎ맞아요. 그 시절 그런 노래도 있었죠.^^

비로그인 2010-08-31 09: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청춘은 청춘을 몰라보고...
꼬부라져야 청춘을 제대로 느낀다니까요.
에잇~~

stella.K 2010-08-31 10:49   좋아요 0 | URL
그니까요. 청춘도 두번 살아봐야 하는데...ㅎㅎ

마녀고양이 2010-08-31 11:42   좋아요 0 | URL
그니까,, 마기님은 지금이 청춘이라니까.
같이 퀼트하는 언니들, 나보고 제일 좋을 때라던데? 아하하.

그져, 스텔라 언니? 우리 모두 청춘 맞져? ^^

stella.K 2010-08-31 12:08   좋아요 0 | URL
마고님, 여러말 말구요, 추천이나 해 줘욧!ㅋㅋㅋ

비로그인 2010-08-31 12:38   좋아요 0 | URL
추천도 안하구선 댓글 달았었대요, 마녀님은?
얼른 눌러~~~

마녀고양이 2010-08-31 13:33   좋아요 0 | URL
추천 눌러떠여... 귀신이다...
깜박한걸 어찌 알았을고... ㅋㄷㅋㄷ

stella.K 2010-08-31 13:38   좋아요 0 | URL
제가 서재질만 7년째요. 그걸 모를까...ㅎㅎ
고맙소!

2010-08-31 14:0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08-31 14:2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09-01 10:1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09-01 10:56   URL
비밀 댓글입니다.

꿈꾸는섬 2010-09-01 00: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 신경숙 작가와 코드가 잘 맞는가봐요. 별 다섯개^^

stella.K 2010-09-01 11:09   좋아요 0 | URL
그러시군요. 저는 좀 안 맞나봐요.^^

다이조부 2010-09-03 23: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20대 어느 시점에 신경숙의 출세작(?) 풍금이 있던 자리

를 필사하던 시절이 생각나네요 ^^

stella.K 2010-09-04 13:10   좋아요 0 | URL
오, 필사까지?^^
 
강남몽
황석영 지음 / 창비 / 2010년 6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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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백컨대, 내가 강남에 산지도 어느 덧 30년 세월을 넘어 40년을 바라보고 있다.  지금 생각하면, 한곳에 이렇게 오래 살게될 줄은 정말 몰랐다.    

처음 강남 땅을 밟은 건 아주 어렸을 때다.  부모님이 그 집을 계약하고, 앞으로 이 집에 살게 될 거라고  나를 처음 데려가신 적이 있다. 아마 모르긴 해도, 부모님은 전 주인에게 잔금을 치르기 위해 그 집을 가셨던 것 같고, 앞으로 이 집이 우리집이 될 거라니 나는 좀 얼떨떨한 기분이었고,  믿기지도 않았다. 그 집 주인 내외는 뭔가 우리와는 달라 보였다. 고상하고 지적여 보엿다고나 할까? 물론 그런 집에서 산 사람에 대한 착시 효과인지도 모르겠지만, 어쨌든 남의 떡이 더 커보인다고 그 사람네들은 제법 근사하게 보였다. 

그리고 얼마되지 않아 그해 가을 우린 정말 이사를 했다. 한강 다리를 건너 우리 가족이 탄 차가 미끄러지듯 현깃증을 느끼며 굴다리를 지나면 강남구 신사동 경계다. 굴다리를 지나 올 때 달린 간판엔 강남의 전신인 '영동 지구'란 팻말이 달려 있었다.  그날로부터 나의 친척들은 우리 엄마를 부를 때 'ㅇㅇ 엄마'라고 불리지 않고 '영동'으로 불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아직도 우리 엄마는 친척들로 부터 그렇게 불려진다.   

새로운 집은 중구 광희동이란 먼저 살던 집과는 사뭇 달랐다. 먼저 살던 동네는 기와집 아니면 지붕을 슬레이트로 덮은 집이 많았지만, 새집은 그때만해도 새롭게 불리던 '양옥'이라 불리우기에도 손색이 없는 집이었다. 우리집이 있던 골목엔 시에서 찍어내듯 비슷한 구조의 '시형주택'이란 것이 쪼르라니 있었는데, 딱 두 집이 개인주택이었고, 그중 하나가 우리집이었다. 마당엔 잔디에 꽃도 많았고, 집 뒤론 '대머리산'이란 조그만 야산도 있었다. 

하지만 이렇게 집만 좋았다 뿐이지 도무지 이 동네가 먼저 살던 집 보다 뭐가 좋은지를 어린 나는 알 수가 없었다. 땅은 아직도 닦이지 않아서 바람이 불라치면 흙바람이 그야말로 장난이 아니었고, 비가 오면 진창이되어 미끄러질듯 뒤뚱거리거나 발이 땅에 깊이 들어가 한 발 띄어 놓기가 어려웠다.  더구나 언덕 꼭대기에 있었던 우리집은 나올 땐 어떻게 나왔는데, 다시 들어갈 땐 어떻게 저 흙언덕을 올라갈 것인가 한숨이 다 나올 지경이었다. 적어도 먼저 살던 동네는 시멘트 길이라 그런 문제점은 없었다. 이쯤되면 먼저집이 그리웠다.  

지금도 잊혀지지 않는  '강남'의 기억은, 학교에서 돌아오는 길이면 소가 달구지를 매고 지나가는 것을 볼 수가 있고, 실개천을 건너야 학교를 다닐 수 있다는 것이다. 실제로 아랫길엔 개천도 있어 오폐수의 냄새가 코를 찔렀다.  

그런데 이 모든 것이 없어지기까지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불과 2,3년 안에 개천은 메워지고, 땅은 회색 시멘트도 잘 닦여졌다. 지금도 궁금한 건, 그 비슷한 시기에 달구지 매던 소도 자취를 감췄던 것 같은데 그 소는 어디로 갔을까? 하는 것이다. 모르긴해도, '개발'이라는 명목하에, 그 소의 주인은 얼마의 돈을 받고 동네를 떠나지 않았을까 싶다.   

이렇게 다른 모든 건 다 잊어도 달구지 매고 거리를 지나다녔던 그 소의 걸음걸이를 잊을 수가 없다. 사람들은 내 말을 믿지 못할 지도 모른다. 오늘 날, 이렇게 세련된 도시에서 무슨 희귀한 소리냐고. 정말 희귀한 옛 이야기가 되어버렸지만, 내가 아는 '강남'은 분명 그랬다. 

황석영 작가. 확실히 우리나라에 몇 안 되는 굵직하고도 독보적인 작가임에 틀림없다. 어떻게 이 한권의 책에 '강남 형성사'뿐만 아니라 우리나라 현대사를 관통하며 물 흐르듯 풀어낼 수 있을까? 그 막힘없는 필치에 나는 반쯤 넋이 나간 채 이 책을 읽었다. 특히, '아, 소설도 이렇게 쓸 수 있구나.'하며 감탄했던 건, 몇몇을 제외하곤 거의 실명 또는 실제의 사건을 조금의 각색도 없이 썼다는 것이다. 그래서 무슨 역사 다큐멘터리를 보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그리고 그것을 소설체로 쓰고 있으니 무슨 '비사(秘史)'를 조근조근 듣는 것도 같다.  

특히, 첫 장면을 1995년 '삼풍 백화점'이 무너졌을 당시를 묘사하고 있다는 것을 볼 때, 이는 필시 '강남'에 대한 아니, 우리나라 전반에 대한 경고를 담고 있는 하나의 예시를 보여주는 것 같다는 생각을 하게 했다. 물론 당시 삼풍 백화점이 무너져 내렸을 때, 이것이 주는 적지 않은 사회적 파장이 있었다. 안전불감증은 물론이고, '빨리 빨리'가  줬던 후유증, 그리고 무엇보다 그 사건이 다른 곳도 아닌 '강남'의 한 복판에서 일어났다는 점에서, 과연 현대의 자본주의 세례가 그렇게 달고 좋기만 한 것이냐는 사회적 각성과 비판까지, 실로 우리나라 현대사에 남을만한 사건이었다.    

지금 생각해도 그 사건은 웃을 수도, 울 수도 없는 묘한 사건으로 기억된다. 어떻게 백주대낮에 하고 많은 땅중에 그 상류층만 다닌다던 백화점이 일순간 무너져 내릴 수 있단 말인가? 누가 그렇게 될거라고 감히 상상이나 해 봤겠는가? 그때 그 근처에 발 그림자도 비추지 않았던 일반 시민들조차 하도 어이가 없어 한동안 멍한 상태였다. 이렇게 사회적으로 크게 이슈가 될만한 사건은 비록 내 삶과는 직접적으로 관계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정신적 동공상태를 경험하게 된다. 그것이 때로 신기할 때가 있다. 그래서 '국민'이라고 하고 인간이라 했는가 보다.   

어쨌든 그 사건을 가지고 황석영 선생은, 자유당 때부터 있어 온 정치 깡패 김진의 이야기를,  꽃뱀이자 복부인의 박선녀의 이야기를, 기회주의자 심남수의 이야기를, 또한 빠질 수 없는 조폭 홍양태의 이야기를, 그리고 가난한 자를 대변하는 임수정의 이야기를 깍아지른 듯 배치시켜 놓았다. 그리고 이들 모두는 '대성 백화점'이란 성에 하나로 연결되어 있다.   

사실, 강남의 제2의 새마을 운동(시형주택이 허물어지고 다가구 건물이 들어선 것)과 그로인해 '나가요'업소의 사람들이 방을 점령하고 사는 것을 보면 격세지감이긴 하지만, 선생의 소설이 전혀 근거없는 거짓말을 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나는 웬지 일견 불만이 없었던 것도 아니었다. 처음에 밝혔던대로, 나의 '강남'은 이런 아름다운 기억이 있는데, 그리고 나와 비슷하게 그곳을 기억할 사람도 있을텐데, 작품은 너무 거시적이고 어두운 강남을 다룬 것은 아닌가 아쉬웠던 것이다. 

그리고 상대적인 것인지, 아니면 실제적인 분석에 의한 것인지 모르겠지만, 이젠 강남이 지난 세대 동안 누려왔던 명성과 또 앞으로 누릴 수혜 때문에 '강남 불패'니 '강남 신화'니 하는 말을 공공연히 수면위로 떠올랐다. 불과 한 세대 동안(적어도 내 기억 속엔 그렇다. 우리집이 이사 오자 곧바로 개발붐이 일어났으니까) 강남은 비약적인 발전을 해온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저런 말이 강남을 제2의 고향으로 알고 살아 온 나에겐 그다지 편하게만 들리지 않는다.  

나의 아버지는 그 옛날 왜 이 강남으로 이사 올 생각을 하셨는지 모르겠다. 어쩌면 아버지도 그 시절 개발붐이 일어날 것이라는 정보를 듣고 이사할 생각을 하셨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동네가 하도 삭막하여 2,3년 정도만 살다가 나올 생각을 하셨다고도 하니 그것과는 별로 상관이 없어 보이기도 하다. 또한 그렇게도 유행해 마지않았던 '부동산 투기의 시대' 때도, 우린 지난 30여년 동안 마치 남의 나라에서 이사 온 사람처럼 살았다. 글쎄, 우린 점 같은 건 보지 않지만, 아마도 점쟁이들은 우리 가족의 사주를 보면 부동산 운 같은 것은 없다고 말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우리집 같이 살고 있는 강남 사람들이 더 있지 않을까?  

강남이 다 높은 빌딩에, 주상복합 건물, 으리으리한 빌라만 들어차 있는 것은 아니다. 아직도 이 강남 어디에선가 빈곤층은 존재하고 있으며, 그들이 또 언제 제3차 강남 개발붐이 일어 살던 곳을 떠나야 할지 모른다. 그리고 그 개발이란 건 이제 없는 사람만이 피해를 보는 것이 아니다. 평범하게 한달 벌어 한달 먹고 사는 중류층 가정에도 언제 살던 곳을 내주게 될지 장담할 수 없는 상황이 되어버렸다. 

그런데도 강북도 강남 수준으로 끌어 올려야 한다고 하며 들썩이는 것 같다. 그렇다면 거기에 원래 살고 있던 주민들은 철거민으로 내려앉을 것이고, 이사를 가야할 것이다. 물론 그들 중엔 이것을 반기는 사람도 있을지 모르지만, 살던 곳을 떠난다는 게 어디 쉬운 것인가? 원래 강남에 살던 사람이 개발이 되자 성남 등지로 밀려났다. 그리고 그들 대부분은 상대적 박탈감과 열등감에 사로잡혀 산다고 들었다.  이런 사람들의 상처를 강남 사람들이 알까? 그런 헤아림도 없이 밀어내기만 했다. 강북도 그러지 않겠는가? 또 성남이 개발이 되면 그곳에 사는 사람은 또 밀려나야 한다. 이런 철거민의 악순환의 고리를 해결하지 못한 채 계속 개발만을 외친다면 그것도 민주주의 국가라 말할 수 있는 것인가? 그들이 보호되면서 개발을 된다면 그것 이상의 좋은 개발은 없을 것이다. 

그런데도 강북은 강남을 벤치마킹하지 못해 안달이다. 도대체 강남이 겉으로야 화려하지만 뭘했다는 것인가? 그래서 강북에도 삼풍 백화점이 생기고 그런 일어나지 말라는 법이 어딨겠는가? 강북은 강남과는 뭔가 달라야 하는 것이 아닌가? 물질적 개발은 이루었을지 몰라도 정신적인 개발은 이루지 못한다면 그러고 개발이라 할 수 있는 것인가?  언제부턴가 강남은 내게 아주 어렸을 때의 기억을 제외하고 그다지 매력적인 곳이 되지 못하고 있다. 

그래도 내가 이 작품에서 위로를 받았던 건 끝에 다뤄졌던 임수정의 부분이다. 부자라고 해서 오래 잘 사는 것이 아니며, 가난하다고 해서 언제나 절망 속에 사는 것은 아니다. 하나님은 누구에게나 똑같이 해를 비춰 주신다. 마지막 생존자로 임수정이 구출되고 이야기가 마무리 되고 있다. 욕심만 부리지 않는다면, 탐욕하지만 않는다면 세상은 그래도 살만하지 않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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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클 2010-07-29 23: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첫문장의 후반부가 굉장히 인상깊은 리뷰군요. 바라보다가 어느 순간 되돌아 보지요.^^

stella.K 2010-07-30 16:07   좋아요 0 | URL
그렇다면 야클님도 강남에 꽤 오래 사셨나 봅니다.^^

2010-07-30 12:3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07-30 16:1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07-30 17:2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07-30 18:1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07-31 08:06   URL
비밀 댓글입니다.

꿈꾸는섬 2010-07-30 21: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강남에 오래 사셨군요. 님의 사신 이야기와 책의 이야기가 어우러져 재미난 리뷰가 되었네요. 강북을 강남처럼 만들게 되면 또다시 철거민들의 비애가 시작되겠지요.ㅠ.ㅠ

stella.K 2010-07-31 13:17   좋아요 0 | URL
그니까요. 전 제발 위에 계신 분들 개발에 대해 다시 생각해 줬으면 좋겠어요.ㅜ
 
새벽 세시, 바람이 부나요?
다니엘 글라타우어 지음, 김라합 옮김 / 문학동네 / 200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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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처럼 연애소설을 읽었다.  참 특이했던 건, 이 작품은 처음부터 끝까지 이메일로 진행되며 어떠한 설명도 없이 시종 구어체로 씌여졌다는 것이다. 과연 이런 소설이 가능할까 싶은데, 가능했다.  

또한 이 작품은 '사랑의 일생' 즉 사랑은 어떻게 생성되며, 어떤 과정을 거치며, 시들어 가고, 소멸되어 가는가를 (미흡하나마) 보여주고 있기도 한다.  나 개인적으론 사춘기 시절, 학교에서 그렇게 보지 말라던 하이틴 로맨스를 보며 가슴 콩닥거렸던 그 기억이 새롭다고나 할까?  

어느 작가는 말했다. 사랑은 '관능'이라고.  그래서 일까? 책속, 아니 이메일에서 보여주는 레오와 에미의 사랑의 밀어는 정말 관능적이다. 그들이 주고 받는 관능적 언어의 향연을 보고 있노라면, 사춘기 때 읽었던 D.H 로렌스의 '채털리 부인의 사랑'을 읽고 후끈 달아올랐던 기억 또한 새롭다. 물론 이 책은 '채털리 부인의 사랑'처럼 실제로 후끈할 정도는 아니다.  그냥 '이렇게 적나라 하다니...?' 정도가 될 것인데, 그건 아무래도 내가 사춘기의 나이에서 너무 많이 떨어져 나온 삶을 살고 있기 때문은 아닐까 싶기도 하다. 바꿔말하면, 이 책을 안고 사춘기 시절로 돌아가 읽으면 '채털리 부인의 사랑'을 읽었을 때만큼이나 감흥을 일으켰을지도 모를 일이라는 것이다.  

이메일이란 절대적 도구를 통해서만이 소통할 수 있는 사랑. 과연 사랑이라 말할 수 있을까? 있을 수 있을까?  

이 책은 한마디로 소설이란 관점에서 보자면, 상당히 영리하게 씌여진 작품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사랑할 때 일어날 수 있는 일. 사랑할 때 할 수 있는 말.  게다가 상상력의 극대화까지 보여줄 수 있는 건 다 보여준다. 그리고 서로 꼭 만나지 않더라도 사랑은 가능하다고 말하고 있다. 더구나 독자로 하여금 레오와 에미가 만날 것인가, 못 만날 것인가?  능수능란하게 쥐락펴락한다. 물론 끝이 좀 깨긴 하지만.(그것은 또한 2부를 예약하기도 한다)

솔직히 이메일은 상용은 하지만 좀 특수하기도 하다. 이메일이 있어서 우표 붙이고, 우체통 앞까지 가야하는 번거로움은 해결 됐지만, 그렇다고 정말 이메일이 편지의 원래의 목적을 대신해 줬는가? 하는 것에 나는 좀 회의적이다.  글쎄, 이메일이 쓰이기 시작한 때는 내가 편지를 잘 안 쓰던 때여서인지도 모르겠다.  특별히 사무적인 용도가 아니면 사람들은 고전적 의미에서의 '편지' 또는 '소통'을 위한 이메일은 잘 사용하지 않는 것 같다. 오히려 소통을 위한 도구는 이메일 보다 '블로그'가 아닐까?  나는 이것을 통해 오프 라인에서 알게된 사람 보다 훨씬 더 많은 사람을 알게되었고, 그들과 소통을 하며 그것이 즐겁다.  

언젠가 블로그가 처음 생겼을 때 어느 블로거가 그런 글을 올린 적이 있다. 이렇게 블로그를 통해 만나는 블로거들과의 만남도 과연 '만남'이라고 할 수 있는가? '만남'의 고전적 가치관과 잣대를 들이 댄다면, 서로 눈을 마주쳐야 하고, 체온이 느껴지는 악수도 해야할 것 같고, 같이 밥 먹고, 웃고 떠드는 그런 것이 되어야 한다. 당연 블로그에서 만나는 사람들은 이 모든 것이 생략된 만남이고, 어느 한 가지 이슈에서만 통해야 하는 단점이 있다. 하지만 시간을 줄여주고, 만남이 훨씬 용이하며, 내가 원하지 않으면 쉽게 단절하면 그만이다. 그것도 분명 '만남'은 만남이다. 그러나 뭔가 채워지지 않는 만남이긴 하다.  

하긴, 실제로 만났다고 해서 완전한 만남이라고도 할 수 없다. 즐겁고, 유쾌하고, 재밌고, 뭔가 충만하지 않으면 인터넷에서의 만남 보다 더 질이 떨어진 만남이 될 수도 있다.  그러니 블로그든 실제적 만남이든 중요한 것은 '만남' 그 자체보단 얼만큼 마음을 나눴냐가 더 중요할 것이다.  

그런데 익명성이 보장된 만남에선 상상력이 극대화된다.  실제로 블로그를 하다보면 블로거들이 궁금하다. 이 사람은 어떻게 생겼을까? 블로그에 올린 글처럼 멋있을까? 재밌을까? 온갖 상상과 추측을 하게된다. 하물며 우리도 이런데, 책속의 주인공 레오와 에미는 더하지 않을까? 레오와 에미는 만나야만 할 것 같다. 이들의 사랑(로맨스 보단 불륜에 가깝긴 하지만)을 완성하기 위해서라도, 또는 그들의 터무니 없는 사랑의 상상을 깨기 위해서라도 말이다.  상상속에서만 사랑을 한다는 건 얼마나 답답한가?  

그런데 엄밀히 말하면, 사랑은 상상을 먹고 자란다. 그 사람의 실체를 사랑하기 보다 상상한 상대를 더 사랑한다.   그래서 사랑하는 사람을 콩깍지가 씌웠고하고, 사랑의 유효기간은 6개월이라고도 말하지 않는가? 그런데 이것 없이는 사랑은 성립되지 않는다. 필연이다. 이 작품은 바로 이 부분을 극대화 했다고 볼 수가 있는데, 작가는 우린 이렇게 사랑하지 않느냐고 말하고 있는 것 같다. 

이 작품이 안타까운 건, 연애 그 자체만을 그렸다는 것인데, 그런 점에서 작가는 감성에만 촛점을 맞췄지 그다지 지적여 보이지는 않는다. 사랑도 보면 남자인 레오 보다 여자인 에미가 더 적극적인 것으로 묘사하고 있다. 물론 나름 설득력 있는 설정이긴 하다. 하지만 조금 더 촉각을 세워서 남자와 여자가 사랑을 느끼는 관점이 어떻게 다른가? 어느 지점에서 만나고, 어느 지점에서 상충되는가를 좀 더 심층적으로 보여줬더라면 지적인 평가까지 받을 수 있지 않았을까? 적어도 사랑의 야수성과 문화성에 대해 건드려만 줬어도.  그것은 나중에 에미의 남편 베른하르트의 이메일 등장에서 얻은 착상이기도 한데, 나는 이 부분에서 저 유명한 윌리엄 골딩의 <파리대왕>의 기시감을 느꼈기 때문이기도 하다.   

물론 난 애석하게도 책으로는 읽지 못하고 영화로 봤는데,  소년들이 섬에 표류하고, 소년들은  문화성과 야만성으로 파가 나뉜다. 그 작품은 결국 문화성이 야만성을 이지지 못한다는 걸 보여주고 있기도 한데, 나중에 문화성을 대표하는 소년이 쫓기는 상황이 되고 야만성을 지닌 소년들이 이를 추격하다 앞의 소년이 결국 돌뿌리에 걸려 넘어진다. 마침 그 앞에는 소년들을 구조하러 온 구조대원이 서 있고 그 구조대원은 "아니 너희들 여기서 뭐했던 거니?"란 질문으로 모든 상황은 종료가 되고, 영화 또한 끝을 맺는다.  바로 그것이 베른하르트의 등장과 흡사해 보인다는 것이다. 

에미나, 레오나 심지어 독자까지 그 두 사람이 펼쳐 보이는 사랑의 향연에 빠져 들었다. 그러다 베른하르트가 등장하자 자연스럽게, 아, 맞아. 이들의 사랑은 불륜이지? 이 사람네들 뭐했던 거야? 딱 깨는 느낌을 갖게 만든다. 그 효과가 좋아보인다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 등장하는 남자들 즉 레오나 베른하르트나 원래 캐릭터는 그다지 그럴 듯해 보이지는 않는다. 레오는 에미의 적극적인 사랑 공세에 소극적이고, 베른하르트는 레오에게 에미를 만나달라고 징징울며 통사정을 한다. 물론 베른이 생면부지의 남자와 아내가 소통하는 것에 흥분하지 않고 신중한 태도를 보이려 한다는 면에선 세련되긴 하지만, 징징댈 것 까지야 없지 않을까? 거기다 한 술 더 떠 자기 아내와 섹스까지 해 달라니?  그런데 그것에 대한 레오의 반응 또한 못지 않다. 오히려 적반하장 격으로  오히려, 당신이 내 말대로 하지 않으면 당신이 내게 이메일 보낸 사실을 에미에게 폭로할 것이라고 협박까지 한다.  확실히 넌센스다. 

적어도 베른하르트의 등장은 감정적으로만 흐르는 에미와 레오에게 블레이크 제동을 거는 것이 되어야 한다. 말하자면 사랑은 관능만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사랑의 색깔이 어디 한 가지만 있던가? 어떤 사람은 사랑에 대해서 이렇게 말한다. 그것은 '고통'이라고. 나는 그것에 동의한다. 사랑엔 반드시 '고통'이 따른다. 이 고통의 파도를 넘느냐 못 넘느냐에 따라 사랑은 더 깊어지고 향기를 바랄 수도 있고, 상처와 악취를 낼 수도 있다. 

에미와 레오의 사랑에 '고통'이 나타났는가? 나타나지 않았다. 갈등은 나타났다. 갈등은 갈등일뿐 고통의 동의어로 대체될 수는 없다. 오히려 더 성숙한 사랑을 할 가능성이 있는 인물은 에미의 남편 베른하르트다.  그런 점에서 사랑은 '인내'며 '신뢰'이기도 하다. 한순간 달아오른 것만 가지고 사랑이라고 말할 수 있느냐는 것이다.

하지만 이 소설은 에미와 레오가 만나려고 하는 싯점에서 멈추고 만다. 그것도 사랑을 이루기 위한 것이 아니라, 사랑을 끝내기 위한 작별 의식으로. 그리고 역시나 레오의 미적지근한 태도에서 회피하는 쪽으로. 그것은 스토리상 맞는 설정이긴 한데 역시 좀 김이 빠진다. 누구는 또 이렇게 충고하기도 한다. 사랑과 욕망을 혼돈하지 말라고. 어려운 말인다. 하지만 하나 확실한 건 이 작품의 작가는 남녀의 가장 낮은 수준의 사랑을 가지고 썼다는 것이다.  작품 자체는 재미있다. 하지만 읽고나서 남는 것은 그다지 없어 보인다.  그냥 이것저것 복잡하게 따지지 않고 푹 빠져서 즐기는 독서를 하고 싶다면, 이 책은 확실히 읽을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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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녀고양이 2010-07-11 09: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환상에 대한 사랑 이야기... 이런 느낌이라 이 책은 그다지 끌리지 않습니다.
그런데 정말 좋아하는 분들도 많이 계시니, 사람마다 다른가 봐여~ ^^

하지만.... 온라인으로 여럿 만나봤지만, 특히 남녀 관계는 상대를 사랑하는게 아닌
나 자신에 대한 환상, 결국 "나"를 사랑하는게 아닐까 싶어서... ㅡㅡ;;

stella.K 2010-07-11 14:35   좋아요 0 | URL
그러게 말입니다. 저도 좋아하는 사람이 많아서 기대를 했는데
제 꽈는 아닌 듯해요. 그래도 나름 재밌었어요.
마지막 말씀도 동감하구요.^^

 
스위치를 누를 때
야마다 유우스케 지음, 박현미 옮김 / 루비박스 / 2010년 3월
평점 :
절판


내 주위에 자살하는 사람이 너무 많다. 예전엔 나와 관련없는 먼 건너 건너의 사람이 자살을 했다면 이젠 나와 관련있는 코 앞의 사람들의 자살로 사라지고 있다. 어디 그뿐인가? 매스컴에 오르내리는 자살관련 소식도 불과 몇년 전만해도 잘 알려지지 않는 사람들이었지만 이젠 사회 거물 급인사나 톱 스타들의 자살 소식을 듣게 된다. 그렇게 자살하면 또 줄줄이 자살하는 사람은 얼마나 많은가? 내가 직접 알지는 못하지만 나의 어머니의 지인이 얼마 전 자살로 생을 마감했고, 한달 반 상관으로 그분의 따님이 자살했다는 소식을 접했다. 그뿐인가? 한쪽에서는 한다하는 사람들이 자살을 고무찬양 하며 미화시키기 까지한다. 누구는 혼자 죽기 무섭다고 자살 사이트에서 사람들을 만나 동반자살을 모의하기도 한다.     

난 가끔 이런 소식을 접하면 마음이 아픔과 동시에 화가 난다. 왜 연일 매스컴에서는 누가 자살했다는 소식은 쏟아내면서 왜 이 문제를 국가적 차원에서 다루지 못하고 있는지 모르겠다는 것이다. 국회에선 여러 가지 민생 현안들을 다루겠지만 그 다뤄야 할 현안 문제에 이 문제가 들어있기나 한 것인지? 이렇게 자살의 문제는 끊임없이 나오고 있는데 왜 대책은 마련하지 않고 개인사적인 문제로만 취급하려고 하는지 모르겠다.  

매스컴도 문제다. 자살 보도만 쏟아내고 있지 어느 한군데에서라도 자살이 왜 문제인지? 어떻게 자살에 이르게 되는지? 예방책은 없는지? 자살의 유혹을 이긴 사례는 없는지? 등을 다루려 하지 않는다. 언제까지 이 부분에 대해 나몰라라 할 건지? 물론 이것을 연구하는 단체나 개인이 없는 것은 아닐게다. 하지만 그것은 극히 일부에 지나지 않는다. 문제는 산만한데 그 산자락 한뼘도 되지 않는 잡초가 난자리만큼도 취급을 못 받는 것이다. 언제까지 이것에 대해 입을 닫고만 있을 것인가? 

조금은 우려 반, 반가움 반으로 이 책을 읽었다. 그래도 이 문제를 다루는 사람이 없지 않구나. 그것도 소설로 문제제기를 하는 작가가 있다니 반가웠다. 그런데 결론부터 얘기 하자면 실망스러운 작품이라 하지 않을 수가 없다. 내용은 2030년에서 2007년을 돌아보는 것인데, 일본 내 집단자살률이 증가하자 그것에 대한 대응책으로 정부에서는 YSC라는 즉 청소년자살억제프로젝트를 시행한다는 가상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그런데 치료적 관점에서 다루지 않고 실험대상으로 청소년 아이들이 무작위로 차출당한다는 점에서 전체주의적 관점에서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는 점이 이색적이다.  차출당한 아이들은 가슴에 스위치가 달리고 너무 고통스러우면 그 스위치를 누르면 실험이 종료가 되면서 그것은 곧 스스로의 삶을 마감하는 것으로 일단락 된다. 그래서 실제로 실험종료를 선언한 아이들이 있는 반면 그것의 부당함을 깨닫고 집단탈출을 감행하는 일종의 탈출 소설 형태는 띄는 것이다. 또 아니면 자살을 직접적으로 다루지는 않고 그런 말도 안되는 황당한 체제를 비난하기 위한 인간 소외를 다룬 모험 소설이라고나 할까? 아무튼 내 기대를 좀 많이 빗나가 있는 소설이었다.  

작가도 1981년생. 비교적 젊은 작가다. 뭐 나름 소설의 전제는 어느 정도의 상상력을 뒷바침 하고 있는 것도 같지만 그만큼 깊이가 따라 주지는 못했다. 물론 유추는 해 볼 수 있다. 정부가 자살억제프로젝트를 시행하기 위해 아이들을 무작위 차출한다. 그런데 견딜 수 없어 자살하는 아이들이 속출한다. 가난은 나라도 구제할 수 없다더니 자살 역시 구제할 수 없는가 보다. 작가는 아마도 무능한 정부를 비판하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그 안에서의 부조리함을 고발함으로 전체주의의 암울함을 드러내 주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그런 상황에서 모든 사람들이 상황에 자신을 맡기는 것은 아니다. 그것을 거부하는 사람도 있더라는 것이다. 하지만 그것이 그다지 힘있게 다루어지지 못하고 있어 안타까웠다.  

그래도 작가의 실험성에 박수는 보내고 싶다. 이 소설이 정부의 완강함을 무너뜨릴 수는 없겠지만, 자살에 대해 함구하고 있고 오히려 그것을 간접적으로 조장하고 있는 정부에 대해 삿대질이라도 했다는 점에서 아쉽지만 그런대로 박수는 쳐주고 싶다. 언제고 이런 분야에서 깊이 있는 소설이 나오게 되길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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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10-05-23 18: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학력별로 줄세우며 행복도 성적순인 이런 나라에서...
국가적인 대책이란....
정말 요원한 일인지도 모르겠어요.ㅠㅠ

stella.K 2010-05-23 19:00   좋아요 0 | URL
그래도 교육에 대해선 뭐라도 하는 척은 하잖아요.
그런데 자살에 대해선 어쩌면 그리도 안면몰순지 모르겠어요.
적어도 자살 억제든 방지든 그런 쪽에서의 상담사나 의사들의 인력을
대폭 늘리고 전문 인력을 양성하는 뭔가의 움직임이 필요하지 않을까요?ㅠ

비로그인 2010-05-23 20:02   좋아요 0 | URL
학력과 경제력...권력...
1등만 기억하는 더러운 세상이예요.
교육과 사회, 문화...모든것들이 유기적으로 얽혀있는 세상...
어쩌면 개개인의 삶이 가치가 인정받지 못하는 지금의 분위기는
거꾸로 자살을 부추기고 있는 결과를 낳고 있잖아요.
상담사 배치와 전문 인력 양성은 대증적인 미봉책일 뿐일거예요.

아~~어디서부터 잘못된걸까?ㅠㅠ

stella.K 2010-05-23 20:41   좋아요 0 | URL
그니까요. 자살은 나라도 구제를 못한다니깐요.
적어도 그런 미봉책 조차도 하지 않는 이 나라가 원망스러워요.
비록 밑바진 독에 물붓기가 될지라도 말입니다.OTL